흘러 넘치는 은혜 5 : 죄사함

성경에서 은혜와 죄사함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은혜는 죄인됨을 인정하고 고백하였을 때 임한다고 성경은 가르쳐줍니다. 여기서 죄는 하나님 없이 살거나 하나님보다 위에 올라서려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린 채 자신이 온 세상의 주인인 것처럼 마음대로 사는 것이 곧 죄라고 성경은 가르쳐줍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 인간을 만드신 분임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섬기는 것이 인간된 도리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거역한 것이 가장 근본적이고 커다란 죄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살았을 때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죄의 모습은 교만과 우상숭배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교만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결국 에덴 동산의 아담과 이브도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뱀의 유혹에 빠져서 선악과를 따먹었는데 결국 하나님처런 눈이 밝아지겠다는 일종의 교만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모셔야 할 자리에 다른 것을 모셔놓고 섬기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서 바알신이나 이방신들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이방신들은 금이나 나무 매우 화려하게 만들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어서, 부와 재물은 물론 쾌락까지 보장했습니다. 어차피 거짓 신이니 사람들 비위만 맞춰서 세를 불리면 그만이었던 셈입니다.

현대인들도 교만과 우상숭배의 죄를 범합니다. 점점 더 하나님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고, 자신이 삶을 통제하고 자신이 주인이 되려고 합니다. 현대판 우상숭배는 재물과 권력과 명예 그리고 쾌락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을 너무 많이 섬기고 도리어 하나님 섬기기를 불편해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죄들이 아주 많음에 틀림없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인간의 죄된 본성을 인정하고,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은혜로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쳐줍니다. 말 그대로 기쁜소식 복음입니다. 쉬워보이지만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생각하면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속의 여인도 죄를 많이 지으며 살았습니다. 여인은 도덕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죄인이라고 낙인이 찍힐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으로부터 복음을 듣습니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자신을 예수님께서 받아주시고, 그 여인에게 죄사함의 복음을 들려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죄사함의 은혜는 물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 은혜가 하도 커서 예수님께 옥합을 갖고 왔습니다. 꽤 비싼 옥합인데 그것을 깨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결로 딱습니다. 발에 붓는 것과 머릿결로 닦아주는 것은 자신을 가장 낮춘 겸손이자 예수님을 최고로 높인 경외심입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죄가 용서함받았음을 확신했습니다. 사회적으로 죄인취급받던 자기를 예수님께서 받아 주심이 너무 감사해서 은혜가 넘쳤습니다. 그래서 아끼고 아끼던 옥합을 깼습니다. 옥합을 깬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옛 모습, 자신의 삶을 깨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예수님 앞에서 결심한 것입니다. 여인의 삶 속에 은혜가 흘러넘쳤기 때문입니다.-河-

흘러 넘치는 은혜 4 : 사랑

지난주에 살펴본 다윗은 실수라고 하기에는 너무 커다란 죄를 범했습니다. 신하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하고, 그 신하를 전쟁터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다윗이 치명적인 죄를 범한 것입니다. 다윗은 그가 범한 죗값을 톡톡히 치렀습니다.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병으로 죽었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 아들을 낳고 이름을“솔로몬”이라고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고 무엇보다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라면서(샬롬) 그렇게 이름을 지었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이름을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는 뜻인 “여디디야”로 바꿔주십니다. 다윗을 위로하시고 새로운 힘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다윗 정도는 아니지만 신약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 베드로입니다. 반석과 같은 믿음을 갖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라고 예수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합니다. 예수님께서 미리 예고하셨건만 베드로는 그만 두려움에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다짐을 저버렸으니 자신과 예수님께 큰 잘못을 범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향 갈릴리에 가서 어부의 생활을 다시 시작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그가 범한 실수로 인해서 더 이상 사도의 직분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밤새도록 일했지만 고기가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 오셨습니다. 처음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될 때와 매우 비슷한 상황입니다(눅 5장). 숯불에 아침식사를 차려주시고, 베드로에게“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연거푸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며칠 전 모닥불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숯불을 피어놓으신 것과 좋은 대비를 이룹니다. 베드로가 세 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사랑하는 지 세 번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많이 망설였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무조건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지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폐로 물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예수님을 세 번씩 부인한 터라 면목도 없고 자신도 없었을 베드로는 아가페로 대답하지 못하고 평범하게 사랑한다고 동료간의 사랑(필레오)로 대답합니다. 결국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마음으로 내려오셔서 아가페가 아닌 필레오로 물으십니다. 거기서 베드로가 무너집니다.:“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의 음성이 베드로의 삶에 깊이 새겨집니다.:“내 양을 먹이라. 나를 따르라.”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를 보내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 여디디야라고 불러주셨던 하나님과 베드로를 직접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씩 물으시고 그에게 주님의 양을 맡기신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의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합니다. 흘러넘치는 은혜는 부서진 마음이 용서받고, 회복되었을 때 임합니다. 그 일을 우리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 오셔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말끔하게 용서해 주십니다. 베드로에게 양을 치는 사명을 주셨듯이 용서와 회복 후에는 주님의 일을 맡겨주십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위해서 행하시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할렐루야!-河-

흘러 넘치는 위로 3 : 위로

하나님의 은혜는 여러 가지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인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그의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물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하나님 사랑의 절정입니다. 흘러넘치는 은혜라는 주제로 말씀을 듣는 세 번째인 오늘은 우리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위로’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설명하는 여러 가지 표현들 가운데‘위로의 하나님’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위로하십니다. 아니 타락한 세상에 사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위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나함”입니다. 나함이라는 히브리어에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사랑,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해 주려고 마음을 고쳐먹는 것, 어떤 사람에게 유감의 뜻을 표하지만 결국 관계를 회복한다는 의미가 두루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사정을 모두 공감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을 예비해 놓으십니다. 자신의 백성을 끔찍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들에게 위로로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다짐하지만 우리는 매 순간 넘어지고 죄를 짓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우리의 죄를 내려놓으면 붉은 죄가 흰 눈처럼 깨끗하게 사해집니다.

죄의 용서를 받으면 죄책감에서 해방될 수 있고 가벼운 마음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죄로 인해서 막혀 있었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께 불의한 모습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를 가로막고 있던 죄를 없애시고 예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양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지나서 살아계신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덮어주시고 막혔던 담을 헐어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아주 커다란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전쟁에 나간 신하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고, 신하마저 전쟁터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런데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하나님께서 데려가십니다. 다윗이 범한 죄값을 그렇게 물으신 것입니다. 다윗은 금식을 하면서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구했지만,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죄의 값을 치르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하나님은 거기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다윗과 밧세바사이에 또 다른 아기를 주셨는데 그가 바로 다윗에 이어서 왕이 된 솔로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솔로몬을 “여디디야”라고 부릅니다. 여디디야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는 뜻입니다. 선지자 나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커다란 죄를 짓고, 죄의 값을 치루면서 매우 힘들어했을 다윗에게 임한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다윗은 여디디야를 안고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느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시는지 실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우리가 범하는 죄보다 훨씬 크고 깊습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임했을 때 우리의 삶이 회복되고 그 은혜가 흘러넘칩니다. 할렐루야. -河

흘러 넘치는 은혜 2 : 공급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을 가르쳐주는 표현이 여럿 나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여호와 이레”입니다. 여호와 이레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하나뿐인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드릴 때 하나님께서 이삭대신에 양을 미리 준비해 놓으신 것에서 유래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실제로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는 것을 확인하시고 서둘러 중단시키신 후에 이삭대신 양을 제물로 바치게 하십니다. 거기서 여호와 이레가 나왔습니다. 여호와 이레를 직역하면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모든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앞서 가셔서 필요한 것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이처럼 여호와 이레 하나님은 예비하시는 하나님,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탈출해서 가나안 땅으로 향할 때 광야에서 40년을 보냈습니다. 광야는 물과 먹을거리가 없는 곳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바위를 쳐서 물이 나게 하셨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서 백성들을 먹이셨습니다. 무한정 먹을거리를 내려주신 것은 아닙니다. 일을 하지 않는 안식일을 제외한 6일 동안 매일같이 하루 분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말 그대로 일용할 양식(daily bread)을 공급해주신 것입니다. 하루분만 주신 것은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라는 뜻입니다. 만약에 일 년치씩 내려주셨다면, 백성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교만해졌을 것입니다. 또한 만나를 하루 분만 주신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자신들을 먹이신다는 믿음을 심어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매일같이 만나를 내려주실 지 의심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어기고 이틀 분 만나를 거뒀다가 썩어서 버리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광야 40년 동안 매일같이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앞에는 가뭄이 찾아오자 하나님 말씀대로 그릿 시냇가로 피했던 엘리야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왕상17:4).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로 갔을 때,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동원하셔서 아침 저녁으로 떡과 고기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엘리야 선지자는 먹을거리를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사르밧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곳에 사는 어떤 과부가 엘리야에게 가뭄이 끝날 때까지 먹을 것을 공급해 줄 것이랍니다. 엘리야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사르밧에 갔을 때 한 과부가 땔감을 줍고 있었습니다. 그녀에게는 밀가루 한 줌과 기름 몇 방울 밖에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음식을 만들어서 아들과 함께 먹으면 끝입니다. 그 정도로 긴급한 상황에 처한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야는 음식을 만들어서 자신에게 가져오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면 가뭄이 그칠 때까지 주님께서 먹을거리를 공급해주실 것이랍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의 말대로 합니다. 그때부터 가뭄이 그칠 때까지 하나님께서 사르밧 과부에게 먹을거리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공급해 주십니다. 믿음대로 행하였을 때 살 길을 열어주십니다.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서 앞길을 예비해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흘러넘치는 은혜입니다. -河-

흘러 넘치는 은혜 1 : 회복

요한일서 4장 8절에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명쾌하게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구약에서는 히브리어 ‘헤세드’를 사용해서 표현합니다. 구약성경 호세아에서 자신의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무조건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세드로 표현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헬라어 ‘아가페’를 갖고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합니다. 아가페는 세상에 속한 사랑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말씀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신의 유산을 팔아달라고 요청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재산을 팔아서 무슨 일을 할 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아들의 요구를 들어줍니다. 아들을 존중하는 아버지이십니다. 아들은 먼 나라에 가서 흥청망청 아버지의 유산을 모두 써버립니다. 결국 농장에서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를 먹으면서 연명합니다. 그러던 중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생각난 것입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아버지께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아들이 집을 나간 후 아버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저 멀리 아들의 모습이 보이자 뛰어나가서 아들을 맞이합니다. 아들은 자신을 종으로 받아주길 바라면서 아버지 앞에서 잘못을 뉘우칩니다. 그렇지만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는 종이 아니라 아들로 지위를 회복시켜주고 그를 위해서 잔치까지 베풀어줍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아들을 위해서 자신의 재산을 팔아주는 아버지입니다. 아들이 다시 돌아오기만 기다릴 뿐입니다. 재산을 모두 없애고 돌아온 아들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어주고 옛날 그대로 아들로 대우해 주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구약성경의 ‘헤세드’이고 신약에서 말하는 ‘아가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지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은혜로 임합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값을 치루는 것은 거래이지 선물이 아닙니다. 선물에는 주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아무한테나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거나,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에게 선물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무엇보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기셨습니다. 이 보다 더 큰 선물, 하나님의 은혜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오른손이 마른 병을 갖고 있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회복된 사건이 나옵니다. 오른 손이 말랐으니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몸에 장애가 있으니 사람들의 시선도 곱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몸의 일부가 말라 들어간 것 자체가 절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런 조건도 없이 이 사람의 손을 고쳐주십니다. 손이 마른 사람에게 회복의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들이 갖고 있는 연약함 속에 임합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흘러넘치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한량없는 사랑, 충만한 은혜라고 부릅니다. 앞으로 몇 주간 흘러넘치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차근차근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그 은혜가 흘러넘칠 때 우리 자신은 물론 가정과 교회 그리고 세상이 밝아질 것입니다.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들어가서 그 은혜를 누리는 참빛 교회 식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河-

찬양의 은혜 6

찬양에 대한 연속 설교를 오늘로 마무리합니다. 찬양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커다란 축복이라는 말씀으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왕되신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경배와 찬양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이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길도 기도와 찬송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찬송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고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한껏 누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찬양은 하늘나라에 가서도 계속될 신앙의 훈련입니다.“할렐루야(주님을 찬양하라)”라는 히브리어가 하나님을 믿는 모든 백성들 의 공용어가 된 것과 같습니다.

찬양에 대한 말씀을 전하면서, 성경에 있는 찬양의 인물들을 살펴보았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면서 구원을 체험한 모세의 찬양, 처녀의 몸으로 예수님을 품게 된 마리아의 순종의 찬양, 빌립보 감옥에서 손을 잡고 기도하며 찬송했던 바울과 실라, 하나님의 법궤가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옷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면서 춤추며 찬양했던 다윗까지 성경의 주요 인물들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들을 통해서 힘을 다해서 찬양해야 하고, 목소리를 높여서 찬양해야 하고, 순종과 겸손으로 찬양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찬양은 감사와 기쁨의 표현이라는 것도 배웠습니다.

기도가 습관이 되길 바랐듯이, 찬양도 습관이 되길 원합니다. 감사한 일이 있을 때 찬양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느낄 때 찬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삶이 추락할 때도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날아오를 힘을 얻어야 합니다. 마음에 염려와 근심이 밀려올 때도 찬양을 통해서 기쁜 마음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마음속에 또는 삶 속에 밀려오는 두려움을 내쫓는데 찬양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일하면서 찬양하고, 설거지하고 운전하면서 찬양하고, 누워서 찬양하고 일어서서 찬양합니다. 우리가 이처럼 찬양의 삶을 살 때 우리 안에 임한 은혜가 배가되고,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마음껏 사용하실 것입니다.

찬양에 대한 마지막 시간인 오늘 우리는 에베소서 첫 번째 장에 나오는 삼위일체 하나님 찬양을 살펴봅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낼 편지를 쓰면서 “찬송하리로다”로 시작되는 말씀으로 성삼위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성부 하나님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세상이 생기기 전부터 우리를 선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녀삼아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선물로 주셨으니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의 보혈이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겨 줍니다. 하늘에 속한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귀한 뜻을 알게 하십니다. 장차 하늘과 땅을 하나로 세우시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와 함께 사실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의 보증인이 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이라고 인을 치면서 확증해 주십니다. 우리들 안에서 구원을 이뤄 가십니다.

우리들은 자칫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것에만 감사하고, 그것만 갖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좋은 일이 생길 때만 찬양하고 상황이 힘들어지면 찬양이 그칠 수 있습니다. 찬양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어떠하든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성삼위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찬양 가운데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하나님 백성으로 사시길 바랍니다.-河-

찬양의 은혜 5

구약성경 창세기에 의하면 가인의 후손 가운데 유발이라는 사람이 수금과 퉁소를 발명했습니다(창4:21). 유발은 성경에서 말하는 첫 번째 음악가인 셈입니다. 이처럼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악기들은 놀이나 가무에서 흥을 돋우는 역할은 물론 신전의 제사와 공동예식에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할 때 목소리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악기를 사용하기를 장려합니다. 실제로 성경에서는 하프와 같은 현악기, 나팔과 같은 관악기, 소고와 같은 타악기를 모두 동원해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특히 다윗은 말 그대로 찬양의 사람이었습니다. 목동이었던 다윗은 하프를 타면서 양들을 관리하였던 것 같습니다. 다윗의 수금타는 솜씨는 세상에 널리 알려질 정도로 특출했습니다. 사울왕이 악령에 들어서 번뇌하고 고통스러워할 때 다윗이 왕궁에 들어와서 수금을 타면 사울왕의 정신이 온전해 지곤 했습니다(삼상 16장).

골리앗을 물리치면서 다윗의 인기가 사울보다 훨씬 높아졌습니다. 그러자 사울왕은 다윗을 몹시 시기했습니다. 시기와 질투하는 사울왕에게 악령까지 들어가면 다윗을 죽이려는 충동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왕궁에서 생활하던 다윗은 언제나 수금을 타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것을 본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창을 던졌지만 다윗이 두 번 모두 피합니다.“다윗이 평일과 같이 수금”(삼상 18:10)을 타고 있을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다윗은 목숨이 위태로운 현실 속에서도 수금을 타면서 하나님을 찬양했고 평정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평일에도 늘 찬양했습니다.

찬양의 사람 다윗의 진면목은 법궤가 예루살렘에 들어올 때 가장 잘 드러납니다. 다윗은 사울에 이어서 왕이 된 후에 다윗성이라고 불리는 예루살렘을 건축하고 그곳을 수도로 삼았습니다. 왕위가 견고해 질 무렵, 블레셋에 빼앗겼던 여호와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첫 번째 계획은 법궤를 손으로 만졌던 웃사라는 사람이 죽는 사고를 겪으면서 실패로 돌아갑니다. 그 후에 다윗은 요즘 식으로 찬양대를 앞세우고, 제사를 드리면서 조심조심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옵니다. 당시에 하나님의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상징이었습니다.

법궤가 예루살렘에 들어오자 다윗은 감사와 기쁨으로 춤을 춥니다. 옷이 다 흘러내렸는데 그것도 모르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것이 한없이 기뻤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옷이 벗겨지면서 춤을 추는 것을 본 그의 부인 미갈이 다윗에게 핀잔을 줍니다. 그때 다윗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삼하6:21).

온 몸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던 다윗의 마음이 구약의 시편에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32편은 법궤가 예루살렘에 들어올 때 불렀던 다윗의 찬양입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예루살렘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없었다는 다윗의 고백, 하나님의 법궤 앞에서 그와 후손들이 예배할 것을 결단하는 모습,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실 축복을 소망하는 다윗의 마음이 잘 드러난 찬양시입니다. 다윗과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우리들도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기도 뿐만 아니라 찬양이 습관이 될 때 험한 세상 속에서도 평안과 힘을 누릴 수 있습니다.-河-

찬양의 은혜 4

성경에는 찬양에 대한 표현이 여럿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 중요하고, 다양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함을 배웁니다. 그 가운데 찬양에 대한 히브리어 네 가지가 눈에 띱니다. 첫째는“테힐라”라는 명사입니다. 하나님을 아주 큰 소리로 찬양하는 것입니다. 보통 찬양집회라고 할 때 테힐라가 어울릴 것 같습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을 <테힐라>했습니다. 둘째는 “할랄”이라는 동사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생각하고 눈으로 보면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 “할렐루야”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셋째는“야다”라는 동사입니다. 야다는 찬양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드리는 찬양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토다”라는 명사인데,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찬양입니다.

찬양에 대한 말씀을 연속해서 나누면서 참빛 교회 성도님들은 물론 교회 전체에 찬양이 넘치길 간절히 바랍니다. 찬양이 있는 곳에 기쁨이 있고, 감사가 넘칩니다. 찬양이 있는 곳에 두려움이 사라지고 하늘의 평안이 임합니다. 우리가 찬양할 때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몸소 체험하게 됩니다.

바울과 실라가 두 번째 전도여행을 할 때였습니다. 원래는 오늘날 터키에 해당하는 소아시에서만 복음을 전할 계획이었는데 성령의 지시로 마케도니아로 건너갔습니다. 그곳에서 첫 번째로 방문한 도시가 빌립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빌립보에 왔지만 복음의 문이 쉽게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안식일에 유대인들의 기도처가 있는 강가에 가서 옷감장사였던 루디아를 만나면서 빌립보에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합니다.

신나게 복음을 전하던 바울과 실라는 귀신들려서 점을 치던 한 소녀를 만납니다. 이 소녀는 점을 쳐서 번 돈을 주인에게 모두 바쳤습니다. 귀신은 물론 주인에게까지 이용당한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소녀에게서 귀신을 쫓아냅니다. 수입원이 없어지자 주인이 바울과 실라를 모함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결국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옷이 벗겨지고 채찍에 맞았습니다. 발에는 쇠사슬이 채였습니다. 도망 나올 수 없는 깊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게다가 간수까지 붙여서 그들을 감시하게 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한 밤중이 되었을 때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기도를 했을 겁니다. 자신들이 전도한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비록 감옥에 갇혔지만 그 속에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감사와 기쁨의 찬송을 불렀을 것입니다. 이들의 기도와 찬송 소리가 적막한 감옥에 울려 퍼졌습니다. 그때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감옥이 흔들리고 문이 열립니다. 놀라운 일이 생긴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를 지키고 있던 간수가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간수를 안심시킵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서 간수와 그의 가족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이 모든 일들이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혔던 절망적인 순간에 기도하고 찬양하면서 생겼습니다. 찬송은 하나님만을 의지하겠다는 고백입니다. 찬송은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는 선포입니다. 찬송은 어둠을 밝히는 빛입니다. 기도와 마찬가지로 찬송도 하늘보좌를 움직입니다. 다음 한 주간 삶 속에서 찬양의 능력과 은혜를 마음껏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河-

찬양의 은혜 3

우리들이 하나님과 소통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크고 높으신 하나님께서는 다양하게 우리와 연락을 시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가장 확실하고 강력한 도구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우리 측에서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기도와 찬양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 우리의 소원을 솔직하게 간구할 수 있습니다. 찬양도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수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찬양받기에 합당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찬양을 기다리십니다. 개인의 찬양은 물론 주님의 백성들이 함께 드리는 성도들의 찬양도 주님께 큰 영광이 됩니다. 지난 번 기도에 대한 말씀에 이은 찬양에 대한 연속설교를 통해서 하나님께 찬양을 통해서 영광 돌리고 무엇보다 찬양하는 습관이 생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주의 모세에 이어서 오늘 우리가 살펴볼 찬양의 인물은 신약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사이였습니다. 당시에 정혼은 오늘날 약혼관계보다 더 강력해서 이미 결혼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마리아의 약혼자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세상에서도 좋은 평판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요셉의 직업은 목수였습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지 않았지만 한 가정을 책임질 만 했습니다. 갈릴리 나사렛 동네의 선남선녀였던 마리아와 요셉은 결혼을 준비하면서 둘 만의 사랑을 키워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마리아는 평범한 여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말하기를 은혜를 입은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리아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어리둥절했던 마리아는 어찌된 일인지 속으로만 생각할 뿐 두려움 가운데 멈춰 있었습니다. 그때 천사가 엄청난 예언을 합니다.:”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 1:31). 마리아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남자를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사내아이를 잉태할 것이라고 천사가 말을 하니 큰 일 났습니다. 천사는 더욱 이해하기 힘든 말을 합니다.:“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 1:35).

마리아는 보통 일이 아님을 직감했습니다. 그 일이 자신에게 임했다는 사실은 두려운 것입니다. 하늘의 계시를 받고 특별한 일에 쓰임받기 보다 요셉과 결혼해서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는 천사의 말에 다음과 같이 순종합니다:“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 마리아의 고백이 참 아름답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의 찬양입니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 자신에게 닥쳤지만 마음과 영으로 주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였다는 사실에 기뻐합니다. 힘이 없고 비천한 자신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 것을 보면서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메시야는 기존의 질서를 폐하고 새로운 세상을 펼쳐 보이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품은 마리아의 찬양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고 상식적으로 이해가지 않는 일 앞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답게 하나님께서 그리시는 세상을 매우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河

찬양의 은혜 2

찬양에 대한 말씀을 나누는 두 번째 시간입니다. 찬양 속에는 말씀과 기도가 모두 들어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갖고 찬양을 드립니다. 찬양을 통해서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무엇보다 찬양은 감사와 기쁨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들어가면 저절로 찬양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체험해도 감사의 찬양을 드립니다. 성경에는 여러 가지 상황에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 인물들이 많이 나옵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 대표적인 모세의 찬양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모세의 인생은 말 그대로 파란만장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죽을 운명이었지만 어머니의 지혜로 목숨을 부지합니다. 강물에 떠내려가다가 바로의 공주에게 구출된 모세는 이집트 왕궁에서 청년시절을 보냅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산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혈기왕성한 성품을 관리하지 못해서 결국 살인죄를 범하고 나이 40에 광야로 도주합니다.

모세에게 있어서 광야 40년은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삶을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훈련 기간이었습니다. 모세는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을 만큼 낮아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사이에서 부르셨을 때 모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항복선언을 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킵니다. 바로왕 앞에서 행한 열 가지 기적은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심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집트의 장자들이 모두 죽는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을 끝으로 바로왕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로 떠날 수 있도록 허락합니다. 그때 모세의 나이 80세였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해서 출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떠나서 얼마 가지 않았을 때 홍해가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모세를 떠나보낸 바로왕은 분에 차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했습니다. 뒤에서는 이집트 군대가 쫓아오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진퇴양난입니다. 백성들은 모세를 향해서 원망을 퍼붓습니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홍해를 향해서 손을 앞으로 쭉 뻗습니다. 그때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물이 양 옆으로 벽을 이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른 땅을 건너는 것처럼 홍해를 건넜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건넜을 때 이집트 군사들이 홍해에 들어왔지만 물이 다시 합쳐지면서 이집트 군사들은 전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물과 이집트 군사들로부터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홍해를 건넌 후 모세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여호와는 나의 힘이시오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출15:2).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가 갈라지는 구원을 체험했습니다. 그들의 목전에서 이집트 군사들이 물에 빠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자신들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때 모세는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찬양은 내가 또는 공동체가 경험한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인생길을 가면서 하나님의 크고 작은 도움을 받습니다. 그때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을 향해서 모세처럼 찬양하는 일임을 꼭 기억합시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