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지난주에는 신앙의 토대인 믿음, 소망,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믿음에는 행함과 역사가, 사랑에는 수고가, 소망에는 인내가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덕목들입니다. 우리교회 안에 그리고 모든 성도님들의 신앙과 삶 속에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항상 있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교회에 와서 어떤 말씀을 전해야 할 지 깊이 생각했습니다. 전하고 싶은 말씀이 많이 있었습니다. 아직 제가 젊고 열정이 있어서인지 교회의 부흥을 위한 말씀을 힘차게 전하고 싶었고, 새로운 곳에 왔으니 교회를 확실히 바꿔보고 싶은 마음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서두르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지난 2년 동안 한 순간도 긴장을 놓지 않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여기서 무리하게 앞으로 나가는 것은 사람의 생각이요 욕심이었습니다. 지금은 심호흡을 하면서 잠시 쉬어갈 시간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차분하게 미래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앞으로 나가길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와 성도님들께 아주 따뜻한 은혜의 말씀을 전하길 원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성도님들의 상한 마음을 말씀으로 어루만져주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때 제일 먼저 떠오른 말씀이 시편23편이었습니다.

시편 23편은 목자 되신 하나님의 세심하신 인도로 시작됩니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인생의 어려움도 들어있습니다. 사실 우리네 인생은 푸른 초장만 거닐 수 없습니다. 인생의 폭풍은 수시로 몰려옵니다. 때로는 죽음의 순간을 오갈 수도 있습니다. 그때에도 하나님께서 똑같이 인도하시고 함께하심을 다윗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고백을 하도록 우리를 인도하시고 훈련시키십니다.

실제로 양은 매우 근시안이라고 합니다. 눈 앞 1피트정도밖에 볼 수 없기에 떼를 지어 다닌답니다. 그때 맨 앞에 서서 양들을 인도하는 목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어디 양들만 그렇습니까? 우리들 역시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 양들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우리들도 마음대로 인생길을 갈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다가 엄한 곳에 가서 망가지고 손해를 볼 때도 많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인생길을 인도해 줄 선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들의 선한 목자가 되신다고 깨우쳐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인생길을 인도해주시니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 역시 다윗처럼“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河-

믿음, 사랑, 소망

기독교 신앙을 표현하는 말이 꽤 많습니다. 그 가운데 믿음 사랑 소망은 기독교 신앙의 세 기둥이라고 말할 정도로 우리의 신앙을 세워주는 토대입니다. 이를 두고 보른캄이라는 신학자는 “믿음 소망 사랑의 삼주덕(三主德)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진수”라고 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 있을 때에 비로소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로 이루어진 신앙 공동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믿음의 역사”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믿음에는 행함이 뒤따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입으로만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반쪽믿음입니다. 믿음에 행함이 동반될 때 온전한 믿음이 됩니다. 또한 “믿음의 역사“라는 말 속에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다는 의미도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믿음의 역사를 이루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음으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과 연결되면 믿음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또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진실로 믿으면 사랑을 나누고 싶어집니다. 받은 사랑이 너무 많아서 그 사랑을 나눠주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 역시 수고가 필요합니다. 올바른 사랑은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희생과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수고입니다. 여기서 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코포스”입니다. 저는 이 단어를 외울 때 발음을 생각해서 “코피가 날 만큼 열심히 일하는 수고”라고 연상해서 외웠습니다. 한 평생 살면서 코피가 날 만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 자체가 행복입니다.

믿음과 사랑이 현재 우리들이 가져야할 신앙의 태도라면, 소망은 우리의 신앙을 저 멀리 미래까지 연장시켜줍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소망은 특별히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서를 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를 고대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지 불과 20여년 후에 기록된 말씀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신앙을 유지하는 것이 힘겨워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를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소망에는 늘 인내가 필요합니다.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 –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 세 가지를 마음에 품고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이것을 두고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칭찬했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가 새로운 처소에서 첫 예배를 드리는 뜻 깊은 날입니다. 우리들은 그동안 온전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힘든 시간을 견뎌냈습니다. 이제 더욱 마음을 합해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 그리고 소망의 인내가 넘치는 교회를 세워갑시다. -河-

하나님을 닮아가라

발가락이 닮았네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아내가 아기를 낳았는데 아무래도 자신의 아기 같지가 않습니다. 주인공은 고민을 하다가 아기의 발가락이 자신과 닮았다고 말하는 가슴 아픈 줄거리의 소설입니다.“닮았다”는 것은 서로 유사한 것을 넘어서 어떤 특별한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집 두 아들 가운데 큰 아이는 할머니와 엄마를 닮았습니다. 둘째는 저를 닮았습니다. 어르신들 말대로 씨가 같아서 그렇고 요즘 말로 유전자가 동일해서 비슷한 외모와 성격을 갖고 태어난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습니다. 그 형상이 죄를 지으면서 부서졌지만, 예수님을 믿음으로 다시 회복되었으니 우리 가운데 어디엔가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있습니다. 레위기 11장 4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찌어다”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은 구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은 어디에 있어도 무엇을 해도 구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닮으라는 말씀이 생소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소위 성직자들이나 특별한 직책을 맡고 있는 분들이 할 일이지 보통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아니 솔직히 하나님을 닮아서 별로 이익이 생길 것 같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닮는다고 돈이 벌리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에서 출세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도리어 적당히 세상과 섞여서 살아가면 이익이 생길 것 같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닮는 것은 세상의 복이나 명예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닮아서 세상에서 손해를 볼 수도 있고, 세상 사람들에게 핀잔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닮아 가야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자녀가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닮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을 닮는 것은 영생의 삶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거룩한 백성들이 모인 곳입니다. 이 세상에서 거룩을 훈련하고, 마음과 삶 속에 거룩을 새겨놓으면 이다음 하나님 나라에 가서 거룩한 백성으로 멋지게 살 수 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제 아들을 보고 사람들이 하목사 아들인 것 같다고 말하듯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닮으면 세상 사람들이 금방 우리를 알아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모습, 행동, 마음과 삶 속에서 하나님을 생각해 내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요즘은 교회도 많고 교인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막상 찾아보면 하나님을 속 빼닮은 그리스도인들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가 사람들의 입에 부정적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서머나 식구들은 어디에 있어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금방 표시가 날 만큼 하나님을 닮아 가시길 기도하겠습니다.-河-

마음에 새겨진 말씀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이후에도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그의 백성들을 축복하셨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구약성경의 처음 다섯 권을 모세오경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토라”라고 하는데“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신약성경의 요한복음은 창세기와 똑같이“태초에”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또 다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나중에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처럼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 자신을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신명기 6장 4-9절의 쉐마 역시 하나님 말씀을 들으라는 명령입니다.“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명령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을 듣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귀로 들은 말씀이 마음 판에 새겨져야 합니다.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해야 합니다. 말씀을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내면이 말씀으로 가득차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듣는 것을 넘어서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암송하고, 자꾸만 되새길 때 말씀이 능력으로 우리 가운데 임합니다.

그 다음에는 마음에 새긴 말씀을 밖으로 표현해야합니다. 제일 먼저 가정 안에서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요즘은 가정성경공부가 많이 약해져 있습니다. 가족끼리 모여서 성경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것은 매우 생소합니다. 하지만 말씀 교육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정에서 성경을 공부하면서 자란 자녀들은 훗날 큰 인물이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처음에는 어색할 수도 있지만 가족끼리 성경을 공부하는 시간을 만들어봅시다. 아침에 하나님께 받은 큐티 말씀을 저녁시간에 식구들끼리 도란도란 둘러앉아서 나누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자녀들과 함께 잠언이나 시편말씀을 돌아가면서 읽기만 해도 가정 속에 말씀이 살아 역사할 것입니다.

말씀은 사회 속으로 퍼져야 합니다. 길을 가거나 일터에서도 말씀은 살아있어야 합니다. 마음 판에 새긴 하나님의 말씀을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생각해내고, 최선을 다해서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쉐마의 신앙은 변명이나 핑계대지 않습니다. 그대로 지켜 행할 뿐입니다. 또한 마음 판에 새긴 말씀은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그것을 손목이나 미간에 부치고, 집의 문설주와 문에 붙여 놓고 살라고 교훈합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라는 것입니다. 시시때때로 말씀을 기억해내고 묵상하라는 교훈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합니다. 말씀을 따라 살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합니다.

다음 한 주간은 서머나 식구들 모두 하루도 빼놓지 마시고 큐티를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매일매일 주시는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고,` 그 말씀을 붙잡고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능력이 그대로 임할 줄 믿습니다. -河-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본문인 신명기 6:4-9을 쉐마라고 부릅니다. 쉐마라는 말은 오늘 본문의 첫 단어가 히브리어“쉐마”로 시작된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히브리어 쉐마는 “들으라(listen)”는 뜻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들으라는 것일까요? 그것은 제일 먼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들으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고, 우리를 인도하셨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을 우리가“주님”이라고 부르고“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오직 한분뿐이십니다. 여기서 유일신 신앙이 나왔습니다. 우리들은 오직 한분뿐인 하나님을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믿음은 하나님께 집중되어야 하지 세상의 어떤 것을 하나님 대신 믿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곧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오직 한 분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심을 믿는 것이 쉐마의 첫 번째 교훈입니다.

둘째로 쉐마의 구체적인 내용이 6장 5절에 나옵니다:“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쉐마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으로 집약됩니다. 사랑하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아하브”에는 여러 가지 뜻이 들어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말은“미워하다”의 반대말로 사람들끼리 서로 아끼고 사랑할 때 사용합니다.

또한 아하브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임한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하브에는“음식 등을 맛보다”라는 뜻도 들어있습니다. 사랑은 체험해야 하고 상대방이 맛볼 수 있을 만큼 느껴져야 합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언약을 맺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한분뿐인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마음을 다해서, 성품을 다해서, 그리고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쉐마는 이처럼 우리의 모든 것을 드려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느끼실 정도록 사랑하라는 교훈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진실되고 뜨겁게 사랑할 때, 도리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임하게 됩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주셨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향해서“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더불어 나눈 사랑을 세상 속에서 실천합니다. 여기까지 나간다면 세상 사람들이 저절로 하나님께 돌아올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과 신앙생활의 클라이맥스입니다. -河-

여호와를 앙망하라

신앙에는 종종 의심과 회의가 따라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도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생활이 그렇게 좋아진 것 같지도 않습니다. 산적한 문제가 풀리지도 않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과 신앙에 대해서 회의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조금 심해지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돌보지 않으시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이사야서 40장 속의 이스라엘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를 잃어버렸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무너졌습니다. 현재는 포로의 신분으로 남의 나라에서 종살이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온 땅에 그 이름이 창대케 되고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커다란 환난이 닥친 것입니다. 어려움이 닥치고 기도해도 앞길이 활짝 열리지 않는 암담한 현실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의심했고 자신들의 신앙을 놓고 회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사야서 40장 26절은“야곱아!”로 시작됩니다. 야곱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만은 버리지 않았던 창세기의 인물입니다. 그는 밤새도록 하나님과 씨름해서“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 많은 성경의 인물들 가운데“야곱”을 언급하면서 회의와 낙심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전혀 돌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에게 아무런 빛도 비추지 않았습니다. 암담한 포로의 시대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귀한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입니다. 현재는 이스라엘이 어려움 속에 있지만, 그것은 세상의 시계를 통해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영원이라는 하나님의 시계를 갖고 현실을 보면 현재의 어려움은 순간에 지나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신 명철이 한이 없으신 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실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야곱을 버리지 않으셨듯이 자신의 택한 백성을 절대로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은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입니다. 앙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 가운데 기다리는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모하는 것입니다. 비록 마음에는 회의와 의심이 생겨도 그의 영혼은 끝까지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때 임하는 은혜는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가고 달음박질해도 지치지 않는“새 힘”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앙망할 때 임하는 새로운 힘으로 작금의 어려움을 능히 이겨내시는 서머나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河-

새해 새 마음 : 기도

새해 새 마음이라는 주제로 연속설교를 하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첫 번째 주일에는“결심”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이 그랬듯이 새해를 맞는 우리들 역시 하나님 앞에서 꼭 지키고 싶은 것을 결심하고 뜻을 정하고 살자고 했습니다. 작심삼일이지만 3일마다 100번만 결심하면 일 년 내내 뜻을 정한 것을 지킬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서머나 식구들 모두 연초에 세운 결심을 지금까지 지키고 계실 줄 믿습니다.

두 번째 주일에는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보면서, 우리들 역시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면 놀라운“변화”를 체험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는 것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생기는 완전한 변화를 가리킵니다. 지난주일 설교의 주제는“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기쁨이 샘솟는 샘물을 마음속에 품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고 찬송하고 꿈을 갖고 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기쁨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두신 기쁨은 추수 때의 풍성함보다 더하다고 했으니 세상이 주는 기쁨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영생의 기쁨입니다.

어느 덧 새해의 첫 달이 지나고 있습니다.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 앞에서 세월을 아끼라는 하나님 말씀이 다시 한 번 새롭게 다가옵니다. 또한 아무리 굳게 결심을 해도 우리들은 질그릇처럼 연약한 존재이기에 자꾸만 넘어지고 마음도 무너집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일입니다. 세상의 문이 모두 닫혀도 하늘문은 열려있습니다. 그곳에 들어가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 힘을 덧입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요일5:14절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신감과 담대함을 가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시편107:10-22절속에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응답이 금방 오지 않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그 어려움을 조금 더 연장시켜주시는 듯합니다.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훈련이요 연단의 기간이지만 무척 참기 힘든 순간입니다. 이처럼 모든 가능성이 사라지고 자신의 생명마저 위태로울 때 시편기자는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외쳐 기도한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최고의 특권입니다.

2009년 한 해의 경제전망이 매우 어둡습니다. 우리들 개인의 삶도 만만치 않게 힘들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기도로 살 때입니다. 무릎 꿇고 하나님 앞에 외쳐 부르짖으면서 우리 앞에 닥친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살 때입니다. -河-

새해 새 마음 : 기쁨

기쁨을 국어사전에서는“즐거운 마음이나 느낌”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기쁨에 해당하는 영어 JOY를 웹스터 사전에서는“평안하거나 좋은 행운이 찾아왔거나 어떤 일에 성공했을 때 또는 어떤 사람이 자기가 바라는 일을 성취했을 때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이라고 뜻을 풀이해 놓았습니다. 이처럼 기쁨은 우리 안에서 생기는 감정입니다. 웹스터 사전이 정의했듯이 어떤 일이 잘되거나 뜻한 바를 이루었을 때 기쁨이 찾아옵니다. 힐티라는 사상가는 “무릇 마음에 있어서 가장 건강한 것은 순수한 기쁨이다. 가장 나쁜 것은 계속되는 절망적인 슬픔이다”라고 했습니다.

성경에도 기쁨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에는“항상 기뻐하라(Be joyful always)”고 교훈할 정도입니다. 사실 항상 기뻐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이 그만큼 녹록치 않고 어려움이 늘 닥쳐오기 때문입니다. 인생길이 늘 평탄한 것은 아닙니다. 언제나 행운이 따라오지도 않습니다. 마음에 품은 뜻을 이루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그렇다보니 웹스터 사전이 정의하는 것처럼 기쁜 감정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요즘처럼 불경기에는 기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더욱 어렵지요. 기쁨보다 염려와 근심이 앞서고 때로는 우울함과 슬픔이 밀려오기도 합니다.

이처럼 기쁨을 외부에서 찾으면 항상 기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성경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기쁨을 안에서 찾으라는 것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 기쁨을 만들어내는‘샘’을 가지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릇에 담겨진 물은 자꾸만 채워놓아야 합니다. 오래된 물은 변질됩니다. 하지만 깊은 산속 옹달샘은 마르지 않습니다. 늘 신선하고 맑은 물이 자꾸만 샘솟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이처럼 안에서 샘솟는 기쁨입니다. 따라서 외부의 환경이 어떻게 변화되어도, 심지어 마음이 조변석개로 변해도 기쁨의 샘을 간직하고 있으면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활기차게 인생을 개척해 갈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사람만이 누리는 하늘의 기쁨입니다.

“새해 새 마음”이라는 연속설교 세 번째 시간에“기쁨”이라는 제목을 택했습니다. 새해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을 마음에 품고 샘솟는 기쁨을 누리면서 살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 기쁨을 누리는 세 가지 비결이 있습니다. 첫째는,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는, 찬양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두신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꿈을 꾸는 사람은 기쁨을 잃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마음에 품고 사는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세상이 어려워도 하늘을 보면서 씩-웃고 기쁨으로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河-

새해 새 마음 : 변화

새해의 두 번째 주일입니다. 시간이 참 빠르게 흐르지요? 이렇게 올 한해도 화살처럼 훌쩍 지나갈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요한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기적을 행하신 사건입니다. 가나는 “갈대밭”이라는 뜻을 갖고 있고 예수님께서 자라신 나사렛 근처에 있던 동네였습니다. 예수님은 물론 제자들과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가 잔치에 초대된 것을 보면, 결혼식이 열리던 집은 예수님의 친척이거나 매우 친한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특히, 마리아는 그 집의 종들을 모두 알고 있고 종들은 마리아의 말을 잘 듣는 것을 보아도 두 가족이 매우 친근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결혼식은 신랑 집에서 열렸고 가족은 물론 온 동네의 축제였습니다. 축하연에 빠져서는 안 되는 음식이 바로 포도주였습니다. 또한 결혼식은 길게는 일주일동안 열렸기 때문에 주최 측에서는 음식을 풍성하게 마련해야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이것을 눈치 챈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을 찾아서 포도주가 없다고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종들에게 여섯 개의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명령합니다. 물이 모두 채워졌을 때, 예수님께서 종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이제는 떠서 연회장에 갖다 주라.”그랬더니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결혼식장은 훨씬 맛이 좋은 포도주에 기쁨이 넘쳤습니다.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된 기적은 여러 가지를 시사합니다. 2장 1절의“사흘되던 날“은 예수님께서 사흘 후에 부활하신 것을 연상시킵니다. 유대인들이 손을 씻던 항아리가 6개 있었다는 것은 완전수인 7에서 하나가 부족한 숫자입니다. 유대인의 율법과 신앙이 불완전함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항아리에 물을 가득 부음으로 율법으로는 부족했던 구원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완성되었습니다.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된 것은 또한 새로운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가르쳐줍니다. 예수님의 시대는 물처럼 밋밋한 시대가 아니라 포도주가 있는 기쁨과 축제의 시대입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사건은 엄청난 변화입니다. 물은 무색무취입니다. 게다가 항아리에는 먹는 물이 아니라 손을 씻는 물이 담겨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켰습니다. 포도주에는 색깔, 맛, 향기가 고루 들어있습니다. 손을 씻는 항아리의 물이 잔치에 쓰이는 포도주로 변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고 그 말씀에 순종했을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도 예수님의 말씀이 임하면 물과 같은 인생이 포도주와 같은 인생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향기롭고 맛깔스러운 인생이 됩니다. 값어치로 보아도 물과 포도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올 한해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사건이 서머나 식구들의 성품과 인생 속에 임하기를 기도하겠습니다.-河-

새해 새 마음 : 결심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는 말 그대로 새로운 해(new year)입니다. 아무런 글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가 우리 앞에 놓여있는 셈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365일이라는 백지수표를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2009년이라는 새해의 백지 위에 어떤 인생의 그림을 그려갈 지 계획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새해결심을 합니다.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하겠다는 결심, 좋지 않은 습관을 정리하겠다는 결심, 자기개발을 위해서 필요한 것을 배우겠다는 결심,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성경을 일독하겠다는 결심 등등 새해의 결심은 각자의 꿈과 처지에 따라서 제각각입니다.

하지만“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고 했습니다. 마음먹고 결심한 것을 기껏해야 3일 동안만 유지한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우리들의 의지가 약하다는 것이겠지요. 어떤 분들은 3일 만에 결심한 것을 잊어버리고 살려면 아예 새해결심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결심을 지키지 못했을 때 도리어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랍니다. 아무리 그래도 새해를 맞아서 한 두지씩 마음에 각오를 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듯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다니엘은 당시의 강대국인 바벨론이 지배하던 시대에 살았습니다. 바벨론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똑똑하고 잘생긴 소년들을 선발해서 왕궁으로 데려갔습니다. 왕을 보필 할 현지 전문가들로 양성하기 위함입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다니엘이었습니다. 다니엘의 이름은 “하나님은 나의 재판관이시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바벨론의 왕궁에 잡혀간 바벨론과 그의 세 친구들은 바벨론의 학문과 언어를 익히는 훈련을 받습니다. 이름도 바벨론식으로 바뀌었습니다. 또한 다니엘은 왕이 먹는 궁정식도 먹어야했습니다. 당시의 모든 궁정식과 포도주는 이미 우상에게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우상의 제물로 드렸던 음식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로 뜻을 정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관할하는 관리에게 자신의 뜻과 결심을 전합니다. 포로로 잡혀 온 소년이 왕궁에서 작은 반란을 일으킨 셈입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지혜로웠습니다. 열흘 동안 자신을 시험해 볼 것을 제안합니다. 열흘 동안 채식만 한 다니엘은 왕의 진미를 먹은 다른 소년보다 훨씬 아름다웠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의 결심을 도와주셨고, 다니엘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훗날 다니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바벨론에 펼쳐 보이는 위대한 신앙의 인물이 됩니다.

이제 우리 앞에 놓여있는 2009년이라는 백지수표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들 각자의 몫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다니엘처럼 뜻을 정하고 그것을 하나님과 세상 앞에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뜻을 꿋꿋하게 실천할 때 우리들 역시 세상을 이기는 그리스도인 될 수 있을 것입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