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한 갈대

올 해는 유난히 독감이 극성입니다. 한차례 감기가 지나가면 또 다시 새로운 바이러스가 유행을 합니다. 이번 감기는 머리가 무척 아픈 목감기인 것 같습니다.

저도 지난 한 주간동안 몸살과 감기로 무척 고생했습니다. 예전에도 감기가 한번 걸리면 일주일 정도 몸져누울 만큼 심하게 앓곤 했었지만, 샌프란시스코에 와서는 긴장을 해서인지 감기를 앓을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에는 그동안 미뤄놓았던 감기들이 한꺼번에 밀려온 듯 호되게 고생을 했습니다.

벽기도회를 끝내고 집에 가서, 또는 교회에 누워있으면서 지난겨울 감기와 몸살로 고생하셨던 서머나 식구들을 생각했습니다. 할머니 권사님들은 거의 예외 없이 감기를 앓으셨습니다. 젊은 성도님들도 이번 감기에 속수무책이셨습니다. 일주일 이상 바깥출입을 못하면서 앓아누우신 경우도 많이 있었습니다.

새벽기도회와 금요심야 기도회에서 감기와 몸살에 걸리신 성도님들을 위해서 기도했었지만, 얼마나 아프실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제가 막상 아파보니 이번 독감이 얼마나 아픈지 알 수 있었습니다. 머리가 아프고, 콧물이 줄줄 흐르고, 목과 편도선이 붓고, 밖에 나가면 온 몸이 춥고…“우리 성도님들께서 이렇게 아프셨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은 실제로 함께 아파하고 겪어봐야 그 정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않으면 피상적으로만 동정하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신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들이 겪는 어려움을 모두 경험하심으로 우리들을 속속들이 이해하기 위해서 사람이 되신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얼마나 귀하고 좋으신 분입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눈 이사야서 42장 1-4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세우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입니다.“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이 바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메시야는 뒤틀린 세상을 바로잡는 공의의 사자입니다. 그렇지만 세상의 재판관처럼 목소리를 높이지 않습니다. 거리를 다니면서 그 위용을 뽐내지도 않습니다. 도리어 예루살렘 한복판을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걸어가시는 분입니다.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십니다.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십니다. 상한 갈대는 짓밟혀서 쓸모가 없게 된 갈대입니다. 꺼져가는 등불 역시 희미한 빛을 내니 새로운 등불로 갈아주는 것이 세상 이치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십니다.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십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하찮은 것들에도 소망을 버리지 않으시고 결국에는 살려내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또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상한 갈대와 같은 우리들을 누구보다 더 많이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우리 모두 힘을 냅시다. -河-

피난처

요즘은 통신수단이 무척 발달했습니다. 이제는 길을 가면서도 전화로 통화할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컴퓨터를 켜고 실시간으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즐깁니다. 전화를 걸기 위해서 공중전화 박스를 찾고, 편지를 부쳐서 한 달 후에나 서로 연락을 주고받던 때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입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과 언제든지 전화나 인터넷으로 연결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는데도, 사람들은 “외롭다”는 말을 합니다. 아니 실제로 외롭습니다. 이것을 두고 폴 틸리히라는 신학자는 모든 인간은 혼자라는 외로움과 싸우고 있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이 외로움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홀로 있다는 것과 이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은 인간의 운명”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마음과 처지를 진심으로 이해해 주는 이웃을 갖는 것은 무척 어렵습니다. 모두 자신을 이해해 주기 바랄 뿐, 남을 이해하는 것에는 인색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어려운 순간이 닥치면, 이 커다란 우주공간에 자기 혼자 덩그러니 서있는 것처럼 외롭습니다. 틸리히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우리의 운명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시편 62편 속의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 다윗은 힘이 없습니다. 3절에 있듯이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같습니다. 곧 무너져 내릴 지경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무너져 내릴 판인데, 사람들은 거기에 일제히 공격을 합니다. 4절에서는 높은 낭떠러지에서 사람들이 떼밀고 있다고 했습니다. 겉으로는 축복의 말을 하지만 속에는 저주로 가득하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외롭고 절박한 순간입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을 바라봅니다.:“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다윗은 위기와 외로움의 순간에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반석이 되시고, 구원이 되시고, 산성이 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윗의 피난처가 되어주셨습니다. 사람들이 공격해 올 때도 다윗은 하나님께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해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너무 힘들고 외로울 때도 하나님께 숨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를 반겨주셨습니다. 하나님을 피난처 삼는 주님의 백성들에게 임하는 복입니다. -河-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제목의 연속설교 세 번째 시간입니다. 첫 번째 시간에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살려주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지난 시간에는 죄를 짓고 쫓겨나는 아담과 이브에게 구원의 표시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하나님의 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오늘은 우리 모두를 위해서 그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외아들을 내어주셨다는 사실을 올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요일 사도신경 강해에서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한 것을 두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별개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여기에 보혜사 성령까지 합쳐지면 자칫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세 분인 것처럼 잘못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똑같은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교리인데, 삼위일체 교리 속에는 우리의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신앙의 신비”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인간의 언어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을 구별해서 알려주셨습니다.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역시 하나님이시지만, 외아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우리의 이해를 도와주신 것입니다.

외아들은 가장 귀한 존재입니다. 외아들을 내어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귀한 것을 우리들을 위해서 내어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자녀 삼으시겠다는 표시입니다. 따라서 성경 속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부자지간으로 설명할 때, 그 속에 깃든 의미에 초점을 맞춰야지 실제로 하나님이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신다고 생각하면 잘못된 신앙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곧 자신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이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다른 모든 것을 주시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오늘 예배하는 하나님, 세상 속에서 우리가 의지하는 하나님, 골방에서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는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즉 외아들까지 내어주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우리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다음 한 주간,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시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느껴보시기 바랍니다.-河-

가죽옷

창세기 3장은 성경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장(章)입니다. 3장 속에는 인간이 어떻게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는지를 가르쳐줍니다. 뱀의 꼬임에 넘어간 이브가 아담과 더불어 선과 악을 구분하는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려는 교만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결국 아담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마에 땀을 흘려하는, 이브는 해산의 고통을, 뱀은 흙을 먹으면서 기어 다녀야 하는 저주를 받습니다. 결국 창세기 3장에서 첫 번째 인간인 아담과 이브가 죄를 범하므로,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근본적인 죄가 들어왔고, 결국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이 모든 죄를 깨끗이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3장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시작인 셈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에게 나타난 첫 번째 현상은 눈이 밝아진 것입니다. 그런데 눈이 밝아진 결과는 자신들이 벌거벗은 것을 알아차리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자신의 몸을 가립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목전에서 숨게 됩니다. 3:10절에서 아담이 이렇게 대답합니다.:“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여기서 “벗었다”는 것은 자신들의 죄가 드러났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신의 수치가 드러난 것입니다. 그것을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서 가렸지만 일시적입니다. 나뭇잎이 시들면 다시 수치가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아담과 이브에게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해서 입히십니다. 여기서 가죽옷은 온 몸을 덮을 수 있는 튜닉(tunic)입니다. 죄를 덮어주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뜻합니다. 또한 가죽옷은 나뭇잎과 달리 영원함을 뜻합니다.

죄를 지은 아담과 이브를 에덴에서 내어 쫓으시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할 계획을 벌써 세워놓으신 것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가죽옷을 만들 때 짐승을 죽였을 것을 전제해서 훗날의 피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에게 가르쳐주셨다고 주장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자신의 명령을 어긴 것은 물론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던 아담과 이브에게 구원의 표시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십니다. -河-

열매맺는 신앙

누가복음 8장의“씨 뿌리는 자 비유”를 살펴보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마태, 마가, 누가, 즉 공관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제가 특별히 누가복음 본문을 택한 것은 누가복음이“씨가 뿌려진 밭”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살펴본 세 가지 밭의 공통점은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신앙과 삶이 헛수고로 끝이 났습니다. 씨는 분명히 생명력과 가능성을 품고 있었는데 그만 밭이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세 가지 밭은 조금씩 차이가 있었습니다. 길가는 씨가 뿌려지자마자 밟히거나 새에 의해서 없어졌습니다. 싹을 틔울 겨를이 없었습니다. 바위는 싹이 났지만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했습니다. 가시떨기는 싹도 났고 뿌리도 깊이 내렸습니다. 그런데 가시떨기의 기운에 막혀서 위로 자랄 수가 없었고 결국 열매를 맺는데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의 해석에 의하면, 길가는 말씀을 듣자마자 잊어버리는 마음밭입니다. 세상에 온 마음이 가있기 때문입니다. 바위는 기쁨으로 말슴을 받지만 어려움과 시험이 닥치면 말씀을 잊어버리는 감정적이고 일시적 신앙입니다. 길가와 바위가 말씀을 듣는 마음에 문제가 있다면, 가시떨기는 환경이 문제입니다. 말씀을 잘 받았지만 환경의 시험을 이기지 못한 경우입니다. 염려, 세상에 대한 욕심, 세상의 쾌락에 대한 유혹이 마음속에서 생길 때 그만 말씀을 잃고 말았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 동안의 설교를 통해서, 길가와 같은 마음을 말씀을 꼭 붙잡음으로, 바위와 같이 딱딱한 마음은 죄와 상처를 몰아내고 찬양을 통해서 회복함으로,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은 기도를 통해서 가시떨기를 헤치고 위로 자라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말씀, 찬양, 기도는 우리의마음을 옥터로 변화시키는데 꼭 필요한 덕목들입니다.

이제 오늘 마지막으로 살펴본 좋은 밭은 앞에 나온 세 가지 나쁜 밭을 갈아엎어서 만들어진 옥터입니다. 좋은 밭은 길가와 달리 말씀을 잘 듣습니다. 바위 밭과 달리 말씀을 끝까지 간직합니다. 가시떨기와 달리 결국에는 열매를 맺습니다. 본문 속에도“듣고, 지키어…결실하고”라는 세 가지 동사가 적절히 쓰였습니다.

오늘로 연속설교를 마치지만, 서머나 식구들 모두 100배의 결실을 맺는 좋은 마음 밭을 소유하시길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河-

가시떨기를 헤치고

누가복음 8장에 나오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세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씨가 가시떨기에 떨어졌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팔레스타인 지역은 지중해성 기후로 햇볕이 무척 따가웠습니다. 그래서 야생에서 자라는 식물들은 건조한 기후와 따가운 햇볕을 견딜 수 있는 생명력이 강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성경에 종종 등장하는 찔레, 엉겅퀴, 가시나무가 모두 여기에 속합니다. 가시떨기로 밭의 경계를 삼아서 짐승과 사람들의 발걸음을 막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런 잡초류들이 밭에서 곡식들과 함께 자라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도 여기에 속합니다.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는 길가나 바위와 마찬가지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씨가 뿌려져서 싹이 나고 어느 정도 자랍니다. 그런데 가시떨기의 나쁜 기운에 막혀서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말라죽게 됩니다. 성경은 가시떨기에 “질식해서(choked)”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얼마나 가시나무의 세력이 강하면 그런 표현을 사용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가시떨기를 세 가지로 정리해 주셨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3가지 나쁜 가시들(three evil thorns)입니다. 첫 번째 가시는 염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염려는 지속적으로 근심케 하는 미래에 대한 불안함 등을 가리킵니다. 염려는 믿음이 자라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염려는 하나님께 던져버려야 합니다.

두 번째 가시는 재물에 대한 욕심입니다. 재물은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을 가져도 더 갖고 싶은 것이 재물입니다. 재물에 마음을 두면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자명한 진리입니다.

세 번째 가시는 세상의 쾌락입니다. 세상이 주는 즐거움은 말초적입니다. 대신에 자극적이고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힘듭니다. 염려, 재물욕, 쾌락은 모두 우리들 마음에서 생기는 것들입니다. 이 세 가지 가시는 중독성 요소를 갖고 있어서 한번 빠지면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서서히 질식시킵니다.

가시떨기에서 헤어 나오는 가장 좋은 비결은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노력이 요청됩니다. 자기절제와 경건의 훈련을 통해서 가시덤불로 가득한 우리의 마음 밭을 갈아엎고 옥터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열매 맺는 삶을 사는 비결입니다. -河-

믿음의 시작 (Challenging Start)

2008년 첫 달을 맞아서 저는 “시작”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도바울의 말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앞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앞만 보고 나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들 앞에는 확실한 푯대가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닮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푯대입니다.

또한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우리들 인생길의 목표입니다.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닮고 그 안에서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 앞을 바라보며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앞을 향해서 나가다보면 장애물을 만납니다. 여호수아 3장에서 가나안땅에 들어가려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요단강이 가로 막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꼭 붙잡고 믿음으로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넘실거리는 요단강에 법궤를 메고 들어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여호수아와 제사장들은 법궤를 메고 요단강에 첫 발을 내딛습니다. 그들의 발바닥이 강물에 닿자마자 물이 벽을 이루며 멈추었습니다. 성경은 강물이 상류와 하류에 각각 얼음처럼 쌓아져서 정지했다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인생길의 요단강에 발을 내듣는 모험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무모한 모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면서 믿음으로 첫발을 내딛는 모험입니다. 일단 내딛기로 마음먹으면, 발바닥만 닿아도 강물이 갈라져서 길이 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보장된 모험입니다.

2008년도에는 서머나 식구들 각자 하나님 안에서 모험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앞을 가로막는 요단강이 있다면 과감히 발을 내딛는 것입니다. 그동안 꼭 시작하고 싶었는데 자신이 없어서 망설이던 일이 있다면 한번 믿음으로 시작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와 능력이 우리 안에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과감히 여러분 앞을 가로막고 있는 요단강에 첫발을 내딛으십시오. 이전에 알지 못했던 놀라운 일이 생길 것입니다. 믿음은 늘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모험입니다.-河-

새로운 시작 (New Start)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하나님의 공평하심은 대표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 경우에 나타납니다. 첫째는 적신으로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똑같이 맨 몸입니다. 둘째는 이 세상을 하직할 때 빈손으로 간다는 사실입니다. 태어날 때 미리 많은 것을 갖고 태어나지 않듯이, 죽을 때도 모든 것을 놓고 빈손으로 떠나 갑니다.

세 번째는 살아있는 동안 매 해마다 365일을 부여받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새해가 되면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365일을 허락해 주십니다. 누구도 더 많은 날짜를 갖지 못하고 동시에 더 적은 날로 한 해를 시작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결과는 제각각입니다. 빈손으로 와서 커다란 업적을 이루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똑같이 1년 365일을 살지만 삶의 모습과 결과는 천양지차입니다. 이 세상을 하직할 때도 영생을 소유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늘나라에서의 새로운 삶을 기대하면서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시작은 같지만 과정을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삶의 열매가 다른 것입니다.

이제 우리 앞에 2008년 365일이 놓여있습니다. 2008년은 미리 가본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전인미답(全人未踏)의 길입니다. 망설일 수도 없습니다. 뒤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시작(new start)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3-14절에서 자신이 영적 순례길을 걷고 있음을 담대히 밝힙니다. 그는“도상(道上)의 존재(存在)”였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인생길을 걸어가는 순례자였습니다.

본문 그대로 표현하면, 빌립보서의 바울은 푯대를 향해서 영적 달음박질을 하는 달리기 선수였습니다. 육상 경주에 나선 사람은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추월당하기 때문이고 집중력이 분산되기 때문입니다. 경주를 하는 사람은 푯대, 즉 결승점을 향해서 질주합니다. 그의 눈은 시종일관 푯대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어질 상을 기대하면서 매 순간 있는 힘을 다해서 달릴 뿐입니다.

우리 모두 2008년 첫 달을 살고 있습니다. 새로운 경주를 시작한 것입니다. 뒤를 돌아보지 말고 푯대 되신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달려갑시다. 하나님께서 공평하게 나눠주신 365일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갑시다. 올 한 해 하나님의 은혜가 서머나 식구들 위에 임하기를 다시 한 번 축원합니다.-河-

창세기의 요셉

요셉: 샘 곁의 무성한 가지

오늘까지 3주에 걸쳐서 성경에 등장하는 동명삼인(同名三人) 요셉이라는 인물들을 한 사람씩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창세기의 요셉에 대해서 살펴볼 차례입니다.

요셉은 열두 명의 형제들 가운데서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다른 형제들은 평상복을 입히면서도 요셉에게는 색동옷을 지어 입힐 정도였습니다. 다른 형제들이 들에 나가서 양을 치면서 일을 할 때, 요셉은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의 시중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의 인생에 먹구름이 몰려옵니다. 형들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서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려서 이집트로 끌려가게 된 것입니다.

요셉은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가서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에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지만, 그 그림자가 그의 마음까지 침투할 수는 없습니다. 요셉은 어디에서나 하나님을 인정했고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요셉의 삶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형통했습니다. 한 가정의 노예로 일할 때도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가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형통한 삶을 살았던 요셉은 무엇보다 매사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있을 때도, 감옥에 갇혀 있을 때도, 나중에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을 때도 요셉은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을 때에 요셉은 그의 이름 뜻 그대로 “더하기 인생”을 살았습니다. 가정의 총무에서 감옥의 총무로 그리고 한 나라의 총무로 그의 삶은 마치 동심원처럼 퍼져나갔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요셉이 매사에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고, 샘 곁의 무성한 가지처럼 그의 삶을 부요케하셨습니다.

요셉처럼 매사에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할 때, 어떤 역경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기도 가운데 하나님 곁에 꼭 붙어 있기로 결심하면서 2008년 새해를 맞는 서머나 식구들 위에 요셉에게 임했던 축복이 그대로 임하기를 기도하겠습니다.-河-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

요셉의 배려

지난 주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 이어서 오늘은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유다지파에 속했고 다윗의 후손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목수일을 하면서 가족을 돌보는 당시의 직업으로 봐서 서민층에 해당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한 사이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풍습에 의하면 약혼을 하고 보통 1년 후에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렇지만 약혼은 결혼에 버금가는 혼례식이어서 구약의 신명기 20장 7절에 의하면 한 여자와 약혼 한 남자를 전쟁터에 내보내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행여나 전쟁에서 죽으면 약혼한 여자가 홀로 되고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는 비극을 막기 위한 율법적 조치였습니다.

요셉은 약혼한 마리아가 아기를 가진 것을 눈치 챕니다.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는데 아기를 가졌으니 요셉이 얼마나 황당하고 실망스러웠겠습니까? 하지만 마리아가 부정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면서도 요셉은 마리아를 배려합니다.

마태복음 1장 19절에 의하면 마리아가 수치를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요셉이 가만히 끊고자 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 앞에서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지요? 성경에서 말하는 의로운 사람은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성숙함을 겸비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약육강식의 논리가 판을 칩니다. 선거에서 네거티브 전략이 난무하듯이 서로의 약점을 파헤칩니다. 남이 잘되면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반면에 남이 수치를 당하는 것을 고소해 하면서 은근히 즐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취해야 할 생활방식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서로를 배려해야 합니다. 자기에게 피해를 입히고, 황당한 일을 겪게 하는 사람까지 배려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마리아를 가만히 끊고자 했던 요셉은 의인이라고 불릴 만큼 성숙한 사람이요 우리들에게 귀감이 되는 인물입니다.

성숙한 신앙은 말이나 행동 뿐 아니라 인격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의인이었던 요셉이 마리아를 배려하는 것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서머나 식구들은 서로를 아껴주고 배려하면서 사랑이 넘치는 신앙공동체를 이뤄갔으면 좋겠습니다. 배려 – 우리 기독교인들이 마음에 품고 실천하기를 애써야 할 신앙의 덕목입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