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끝

기독교는 기다림의 종교입니다. 소망입니다. 꿈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말씀에서 배운 “소망의 인내”입니다. 기다림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조급합니다. 한 술에 배부르는 것을 기대합니다. 꿈과 희망이 조속히 이뤄지길 바라면서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기다림에 인내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2천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600여년 전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세상에서 사라졌습니다. 예루살렘 중심의 남유다가 바빌론에 멸망했기 때문입니다(주전587년). 백성들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이집트로 몸을 피했습니다. 그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디아스포라(“흩어진 백성”)가 되었고, 바빌론, 페르시아, 알렉산더 제국을 거쳐서 예수님이 오실 때는 로마의 식민지로 살았습니다.

 

게다가 헤롯이라는 이두매 사람은 로마에 아첨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최대한 이용했고 백성들은 헤롯 가문의 폭정에 시달렸습니다. 이스라엘 정통 가문이 아니었기에 예루살렘 성전을 증축하면서 백성들을 위하는 척했지만. 그의 속셈은 로마의 앞잡이로 권력을 유지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인들도 자기 몫을 챙기고 힘을 기르는데 혈안이 되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성전을 장사꾼의 소굴로 만들었습니다. 성전에서 벌어지는 거래의 이권을 놓고 대제사장들은 뇌물을 받으면서 배를 채웠을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충실하겠다고 시작한 바리새인들은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종교인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자신들이 갖고 있는 율법의 지식을 자기와 상대방을 비난하고 정죄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율법이 백성들의 신앙과 삶을 제한하는 올가미가 되었습니다.

 

여기저기서 로마 제국에 항거하는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럴수록 제국의 군인들이 예루살렘 시내를 활보했고, 반역자들은 십자가에 죽이는 사태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세금을 거둬서 로마에 바치는 세리들까지 예루살렘 백성들은 춥고 배고프고 무서운 시대를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니 구약에서 약속한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로마 제국을 무너뜨리고 다윗왕국을 세울 메시아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으로, 하나님 아들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베들레헴 말 구유에서 태어나시니 아무도 알아보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어두운 세상에 오신 참빛이었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다림에 끝이 찾아온 것입니다. 어두움에 익숙한 백성들은 빛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세상을 밝히는 빛이셨습니다.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아셨습니다. -河-

데살로니가전서 (7)

믿음의 소문

 

바울이 2차 전도여행에서 세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의 첫 번째 장을 두 달여 공부했습니다. 로마 제국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인 데살로니가는 전형적인 로마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그곳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고, 심었고, 그것이 열매를 맺어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멋지게 세워졌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와 교회는 바울에게 영광이요 면류관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하고 기도할 때마다 감사했습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편지를 시작하면서 은혜와 평강이 임하길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가 평강으로 이어집니다. 교회가 아무리 든든하게 세워졌어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은 언제나 필요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기도할 때마다 교회가 갖고 있던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기억하며 감사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덕목입니다. 거기에 “역사(행위 또는 삶), 수고, 인내”라는 꼬리표가 붙으면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앙을 더 자세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교회 전체는 물론 그리스도인 각각에게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믿음은 삼위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구체적인 신뢰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이웃을 향한 섬김입니다. 애씀이요 희생입니다. 소망은 언제나 인내를 요청합니다. 끝까지 견디고 결국 이루는 힘입니다. 믿음에서 사랑과 소망이 파생되고 현실화되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꼭 필요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표시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우리의 보답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온전한 믿음을 갖게 된 경위를 설명합니다(5-7절). 복음이 말로 전해졌습니다. 데살로니가는 복음을 진리(로고스)로 받았습니다. 말 뿐만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이어졌습니다. 말이 능력과 확신으로 이어졌고,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신 분이 성령 하나님입니다.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믿음을 지켰고, 예수님을 본받는 성도가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은 세상으로 향했습니다. 바울이 언급하지 않아도 데살로니가 교회가 갖고 있던 믿음에 대한 소문이 마게도냐는 물론 아테네와 고린도가 있는 아가야까지 퍼졌습니다. 소문의 핵심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우상을 버리고 돌아선 회개(과거),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현재),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믿는 소망(미래)이었습니다. 돌아섬, 섬김, 기다림은 믿음, 사랑, 소망과 연결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앙을 우리도 따르고 닮기 원합니다. -河-

 

데살로니가전서 (6)

내적 확신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 가운데 멋지게 세워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항상 기도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도 바울의 영광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선포된 복음을 다시 요약하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선택하셨습니다(4절). 이렇게 데살로니가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을 통해서 데살로니가 교회와 교인들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복음이 전파된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5절). 그동안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워진 것을 하나님의 은혜요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로마 제국의 대표적인 도시였던 데살로니가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을 때,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도 바울의 말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2:13).

 

사도 바울 역시 모든 것을 바쳐서 복음을 전했고, 데살로니가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회 사이에 신앙의 교감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하면서 감사했듯이,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바울의 열심을 기억했습니다(2:9).

 

사도 바울이 말로 전한 기쁜 소식이 하나님 말씀이 되었습니다(2:13).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세 가지 표현이 서로 연결됩니다. 성령 자체가 능력입니다. 성령에 감동되면 하나님의 능력이 임합니다. 바울이 전한 말씀에도 성령의 감동이 임했기에 하나님 말씀(진리)이 되었고, 그 말씀 자체에 능력이 생겼습니다.

 

바울이 전한 말씀이 성령의 감동하심 가운데 능력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데살로니가 교인과 교회에 “큰 확신(full conviction)”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모든 것이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방식이었습니다:“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2:2-3).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임했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능력과 큰 확신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河-

 

데살로니가전서 (5)

소망의 인내

 

우리의 믿음을 표현하는 방식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제가 자주 사용하는 머리(head교리doctrine)-가슴(heart체험 experience)-손(hands실천 practice)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균형 잡힌 신앙을 갖추는 데 꼭 필요한 절차입니다. 그동안 기회가 되는 대로 여러 번 소개했기에 참빛 식구들이라면 세 가지 H(3 H’s)로 요약되는 신앙의 모습을 아실 것입니다. 배우고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균형 있는 신앙으로 멋지게 자라는 것을 보기 원합니다.

 

사도 바울이 알려주는 신앙의 덕목은 우리가 그동안 배운 “믿음, 사랑, 소망”입니다. 신앙의 세 가지 최고 덕목(spiritual top 3)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신앙에 이 세 가지가 항상 있어야 한다고 했고 그중에 제일은 지난주에 배운 사랑이라고 강조했습니다(고전13:13).

 

여기서 믿음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믿음을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 모든 하나님의 사역 중심에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임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받은 사랑을 나누는 것이 필요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1장에서는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라는 독특한 표현을 통해서 믿음의 삶, 사랑의 애씀을 부연해서 설명했습니다. 믿음을 통한 행위와 삶, 사랑에서 비롯된 수고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행위)은 믿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말과 혀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함과 행함이 동반된 사랑이 진정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 덕목은 “소망의 인내”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는 이미 기독교인을 향한 핍박과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있을 때도 유대인들이 폭력배들을 동원해서 바울을 죽이려 했으니,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늘어나고 교회가 세상에 좋은 평판을 얻으면서 핍박은 더욱 심해졌을 것입니다.

 

어려움이 닥칠수록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성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라는 부활과 영생의 소망이 커졌습니다. 당시 문명을 선도하는 제국의 도시 한 가운데서 예수님을 믿고 영원히 살 것이라는 부활에 관한 소망을 갖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어려운 일을 데살로니가 교회와 성도들이 해낸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어려움이 닥치면 당황스럽습니다. 어려움이 지속되면 몸과 마음이 지칩니다. 소망에 인내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소망 가운데 끝까지 견디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입니다. 기다림에 끝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도 믿음의 행위(삶),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꽃피우길 간절히 바랍니다.-河-

 

데살로니가전서 (4)

사랑의 수고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하면서 감사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와 성도들을 기억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기억”은 마음에 남은 잔상입니다. 좋은 기억이 있고 나쁜 기억도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속에 어떤 기억으로 남느냐가 중요합니다. 또한 기억의 특징은 생각나게 합니다. 연상 작용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서 감사했으니 좋은 기억입니다. 기도할 때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연상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멋진 모습이기에, 우리 교회도 닮기를 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깃든 세 가지 신앙의 덕목을 끊임없이 기억했습니다:믿음의 역사(works of faith), 사랑의 수고(labor of love), 소망의 인내(perseverance of hope). 믿음의 역사는 “믿음의 행위”라는 뜻임을 지난주에 배웠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행위를 통해서 구체화됩니다. 그런 점에서 행위는 믿음을 점검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눌 주제는 “사랑의 수고”입니다. 믿음이 밖으로 드러나는 대표적인 행위가 바로 사랑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 보낸 편지에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5:6)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니 믿음과 사랑은 짝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샬롬이 임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던 죄의 담이 무너졌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우리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특권과 의무를 갖게 되었습니다(신6:5).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우리를 사랑하심 때문입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하신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신 것입니다(요15:13). 여기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근거가 마련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율법은 물론 십자가의 핵심입니다.

 

이제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남았습니다. 사랑은 말과 혀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해야 합니다(요일3:18). 오늘 본문에서 사랑을 ‘수고’라고 설명한 이유입니다. 손과 발을 사용해서 애쓰고 힘쓰는 행위입니다. 신약성경에 쓰인 헬라어 의미는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하는 노동과 힘씀”이라는 뜻입니다. 사랑에 수고가 필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을 사랑으로, 사랑을 수고로 실천하는 멋진 신앙을 갖기 원합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