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외가 없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1.
작년과 올 초에
고난에 관해서 공부했습니다.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햇볕이 비치고 비가 내리듯이
고난도 맥락 없이 찾아옴을 배웠습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만 고난에서 면제된다면
세상은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자연법칙은 망가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크고 작은 고난에서 면제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면제되는 곳(시간)은
이다음 완성된 하나님 나라뿐입니다.
그곳에는 의와 기쁨과 평화만 있고 고난은 없습니다.

 

고난이 면제되는 곳이
이다음 완성될 하나님 나라뿐이라면,
세상을 살면서 고난에서 면제되길 기도하기보다
고난이 찾아왔을 때, 고난을 이길 힘과 지혜를 주시길 구해야겠습니다.
고난을 믿음으로 마주하고, 파도를 타듯이 뛰어넘어야겠습니다.

 

2.
저도 예외 없이
5월 초에 코로나에 걸렸습니다.
2-3일은 열도 오르고 목도 아프고
두통과 몸살기로 몸이 무거웠습니다.

 

심한 증세는 아니었지만,
작은 집에서 세 식구가 격리해서 지내는 것이나
주일 예배를 저 혼자 온라인으로 전송하는 등 한 차례 큰일을 겪었습니다.

 

코로나를 앓으면서,
세상에 예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구나 전염병에 노출되어 있고, 아무리 조심해도
언제 어떤 경로로든 감염될 수 있음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러니 이겨내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3.
다시 코로나가 유행하면서,
그동안 감염되지 않은 분들을
도미노를 쓰러뜨리듯이 차례로 감염시키는 느낌입니다.
이토록 끈질긴 팬데믹에서 언제나 벗어날 수 있을지요!

 

저는 교회에 다음과 같이 광고했습니다:
“가능하면 조심하셔서 코로나에 걸리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행여나 감염되면 너무 겁내지 말고, 코로나와 마주하시고,
증세가 심하고 기저 질환이 있으시면 의사에게 코로나 치료제를 요청하시기 바랍니다.”

 

맥락 없이 코로나가 찾아옵니다.
까닭 없이 고난도 닥칩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피할 수도 없습니다.

 

그때,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백성답게
담대하게 마주하고, 싸우고, 넉넉히 이겨내야 합니다.
그 힘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 주시는 힘으로
찾아오는 삶의 파도를 훌쩍 뛰어넘기를 원합니다.

 
의인이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시편 34:17)

 

하나님,
예외 없이 닥치는 어려움에서 건져주시고, 이길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6.2 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 형상 (2)

1.
지난주 목요 서신에서
버팔로와 남가주 총기사고를 보면서
하루속히 총기 규제가 이뤄지길 촉구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모든 사람이 귀하기에,
사람에게 총을 쏘는 행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월요일
텍사스의 한 초등학교에서
19명의 아이들과 두 명의 선생님이
목숨을 잃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2012년 코네티컷 샌디 훅 초등학교에서 20명의 아이들과
8 명의 어른이 희생당한 사고가 있은 지
정확히 10년 만에 발생한 사고였기에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그때 모든 정치인이
총기 규제를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엄격한 총기 규제는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미국 총기 협회(NRA)의 로비를 비롯한
정당과 정치인들이 각자의 이익을 좇느라
실제적인 정책을 내놓지 못한 것입니다.

 

총기를 구입하는 사람의 배경(background)을 세밀하게 점검하고,
총기 거래 과정을 명확하게 추적하려는 법안들이
민주/공화 양당 간에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는 총기 규제가 상대적으로 엄격하지만,
블랙마켓에서 은밀히 거래되는 총기가 워낙 많고
아직도 법에 허점(loopholes)이 많기에 아슬아슬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2.
미국은 수정 헌법 2조에서
“무기를 소장하고 휴대하는 인민의 권리는 침해될 수 없다”고
무기 소지를 허용하기에 총기 규제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헌법을 고쳐서라도
강력한 총기 규제를 해야 할 시점이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 큰 희생을 치르게 될 것입니다.

 

18세 이상의 성인에게 총기 구입을 허용하는 것에 연령을 높이거나,
불법으로 총기를 거래하는 것을 엄격히 단속하고,
위험한 총기는 GPS 추적 장치를 탑재하도록 의무화하거나
요즘같이 AI가 발달한 세상에서 마음만 먹으면
어느 정도의 확실한 규제가 가능할 것입니다.

 

3.
살기 좋은 세상을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은
모든 어른의 의무이자 책임입니다.

 

지혜를 모아야겠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도움을 요청해야겠습니다.
행동해야겠습니다.

 

희생된 아이들의 천진난만했던 사진을 보고 있으니
저절로 눈물이 흐릅니다.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들의 부모님과 사랑하는 가족들의 아픔은 오죽하겠습니까?
주님의 위로와 소망을 구합니다.

 

이 땅을 회복시켜 주소서.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시편 93:13)

 

하나님,
하루속히
강력한 총기 규제가 이뤄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5. 26 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 형상 (1)

1.
요즘 연거푸
총기 사고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뉴욕주 버펄로에서는
인종 차별주의자인 18세 청년이
슈퍼마켓에 들어가서 무차별 총격을 가하고
생중계까지 시도한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엊그제 주일에는
남가주에 있는 대만 회중 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마치고 친교 하던 중에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같은 대만 출신 60대 남성이
교회에 모여 있던 연로한 성도님들에게 총격을 가했습니다.

 

산호세에서도 총격 사건이 있었고
쉬지 않고 총기와 관련된 사건사고가 이어지고 있어서
안타까울 뿐입니다.

 

무엇보다 인종차별과 연결된
혐오 범죄여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2.
우크라이나에서는
80여 일 이상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임시 매장지에서 슬프게 우는 병사의 어머니,
도심에 나뒹구는 시신들,
– 전쟁이 일어나면
사람의 목숨과 인간의 존엄성이 한순간에 무너집니다.

 

언론이나 유튜브 영상을 접하면서
안타까움을 넘어서 허무할 정도입니다.

 

3.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따라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비록 죄로 인해서 그 형상이 망가지고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서 형상이 지워졌지만,
본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성경은 하나님 형상의 회복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열외 또는 배제는 없습니다.

누구나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 은혜에 들어갈 자격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나무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웨슬리는
모든 사람에게 선재적 은총(prevenient grace)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미리 은혜를 주셨고
그 은혜에 반응하면 곧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4.
그렇다면 모든 인간은 존귀합니다.
각 사람에게 주어진 한 번뿐인 생명은
그 누구도 빼앗을 권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신성 모독입니다.

 

그러니 총격 사건과 전쟁이
귀한 생명을 무차별 앗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도전이요 반항입니다.
해서는 안 되는 반인륜적 행위입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탄식이 나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주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할 뿐입니다:

“주님, 이 땅에 평화를 주소서”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7)

 

하나님,
이 세상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의 손으로 회복시켜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5. 19이-메일 목회 서신)

5월은

좋은 아침입니다.

 

1.
오늘은 한국식으로
5월 5일 어린이날입니다.

 

올해는
100번째 맞이하는 어린이날이랍니다.

 

어린이날 노래가 생각납니다: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 날 우리들 세상

 

팬데믹이 물러가고
어린이들이 마음껏 뛰놀고
꿈을 펼칠 수 있는 세상이 찾아오길 기도합니다.

 

2.
5월 8일은 어버이날입니다.
미국에서는 5월 둘째 주가 Mother’s Day입니다.

 

자녀들 선물에 부모님 선물 또는 용돈까지
젊은 부모님들은 허리가 휘는 5월초가 되겠습니다.

 

그래도 부모님과 자녀들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귀하고 큰 선물이니
기꺼이 기쁘게 섬기는 어린이날이요 어버이날입니다.

 

Mother’s day에 우리 교회에서 부르는

어머니 마음이라는 노랫말은 늘 감동을 줍니다: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하리요/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

 

특별히, 팬데믹 동안 얼굴을 뵙지 못한
조국에 계신 부모님들의 건강과 평안을 위해 기도합니다.

 

3.
5월 15일은 스승의 날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곳에 있기까지 많은 스승이 계셨습니다.
꼭 학교 선생님이 아니어도,
우리를 빚어주고, 가르쳐준 선생님들이 얼마나 많았는지요!

 

스승의 노래도 기억합니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스승은 마음의 어비이시다
아아 고마워라 스승의 사람
아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4.
베이지역에서 5월이 되면 건기가 시작되지만,
한국의 5월은 온 세상이 찐한 초록으로 물드는
하늘까지 맑은 청록의 계절입니다.

 

부활절 이후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죽음을 이기신 예수의 생명이 넘치는 기간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죄짐을 모두 지신 친구요,
따라야 할 스승이요,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신 하나님(아버지) 이시니
예수님께 감사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푸르른 계절 5월을 맞아서
우리 주변을 사랑으로 섬기고,
무엇보다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과 사랑이
변함없이 푸른 초록 색깔이길 바랍니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시 92:13)

 

하나님,
5월을 맞는 참빛 식구들에게
변치 않은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5. 5이-메일 목회 서신)

사이 잇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에는
루스드라의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바울의 후계자가 된 디모데에 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디모데는 아버지가 헬라 인이고
어머니와 할머니는 신실한 유대인이었습니다.

 

순혈주의를 고집하는 유대인으로
헬라인과 결혼하는 것이 쉽지 않았겠지만,
나라를 잃고 사방으로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가운데는
다른 민족과 결혼한 사람들이 꽤 있었을 것입니다.

 

디모데는 어릴 적부터
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유대인 가정의 신앙 교육을 잘 받았습니다(딤후 1:5)

 

구약 성경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갖고 있었기에
바울이 설명하는 예수님을 금방 구약 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아로 믿고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사전지식, 기초지식,
신앙도 초기 교육이 중요함을 디모데를 통해서 배웁니다.

 

2.
주일에 말씀드렸듯이
디모데의 몸에는 유대인과 헬라인의 피가 함께 흘렀습니다.
유대인의 밭에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의 씨가 뿌려졌으니
신앙적으로 두 종교가 섞여 있습니다.
어쩌면 경계선에 서 있던 인물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안에 있는 디모데는
유대인은 물론 헬라인을 위한 전도에 딱 맞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제안으로 몸에 할례까지 받음으로
유대인의 비난도 면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다문화 가정들이 보편화되었고
부모들이나 자녀들이 제한 없이 자기 인생을 펼쳐 나가지만,
바울과 디모데 시절에는 쉽지 않은 선택이고 삶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디모데를 선택하셔서
그를 통해서 하나님 선교 사역을 이뤄 가셨습니다.
경계선에 있는 인물이 아닌,
두 민족과 종교를 통합하는 인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간격과 차이를 이어주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3.
사실 우리도 경계선에 서 있을 때가 많습니다.

 

미국에 살다 보니
한국 사람도 미국 사람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말 그대로 어중간한 모습입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이것도 저것도 아니거나,
여기도 저기도 속하지 않은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을 놓고도
딱 부러지게 잘하는 것 같지 않고
그렇다고 아주 못하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에 처하곤 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걷는 인생길 자체가 경계선이요
모호한 길을 걷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그 여정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사이를 잇는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디모데처럼 우리를 사용하시길 기대합니다.
미국에 사는 한국인의 장점이 발휘되고,
여기저기, 이것저것을 통합하고 화평케 하는 삶을 살고
우리의 모든 삶이 결국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것을 보기 원합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셨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처지를 아시고, 우리를 통해서 놀라운 주님의 역사를 써 가실 것입니다.

 

하나 되게 하시고, 사이를 잇게 하시고,
모든 것을 들어서 참되고 선하고 아름답게 만드시는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4월을 마감하고 새달 맞읍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하나님,
우리의 모든 것이 주님께 드려지고
주께서 쓰시는 것을 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4. 28 이-메일 목회 서신)

 

앞을 향하여

좋은 아침입니다.

 

1.
부활절을 보내고
이제 부활 이후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면서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이 다시 모였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사실이요
진리였음이 증명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제자들은 능력 있는 사도가 되었고
예루살렘에서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2.
살아생전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예고하셨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 자
제자들이 모두 흩어지고
두려움에 떨면서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던 이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말씀대로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셨습니다.

 

여기서부터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앞을 향하는 열린 세상입니다.

 

3.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악한 세력을 이기신
우주적인 승리였습니다.
과거의 청산입니다.

 

반면,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었습니다.
미래를 향합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아담의 죽음을 해결하셨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었습니다 (고전 15:21).

 

부활이 없다면
십자가의 죽으심은 과거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부활은 십자가 죽으심의 완성입니다.
십자가가 구원의 은혜를 알려준다면
부활은 영원히 펼쳐진 희망을 살게 합니다.

 

4.
이제 우리도 부활을 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모든 것을 내어놓고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소망 가운데
앞을 향해서 나가는 것입니다.

 

버릴 것, 정리할 것,
미련을 갖고 양손에 쥐고 있던 욕심과 집착 등등
과거를 청산하고
앞을 향해서 부활을 살기 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 15:57)

 

하나님,
소망 가운데
부활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4. 21 이-메일 목회 서신)

2022년 고난주간에

좋은 아침입니다.

 

1.
올해도 어김없이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함께 나눴듯이
“세상에 쉬운 일이 없습니다”
– 행복한 순간은 잠시일 뿐,
엉겅퀴와 가시덤불을 내는 에덴 이후의 세상은
크고 작은 어려움이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물론, 파도가 밀려오지 않기를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만 어려움에서 제외된다면
그것은 자연법칙 위반이자 지나친 이기주의입니다.

 

어려움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밀려오는 파도를 어떻게 마주하고 넘어야 할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지점에서 어려움을 현명하게 풀어나갈
힘과 용기 그리고 지혜를 하나님께 구할 수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 더욱 깊이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2.
사도 바울이 자기가 개척한 교회들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환난을 겪게 될 것이니
단단히 준비하고 믿음 안에 거하라고 부탁한 말씀을 다시 생각합니다.

 

물론, 초대 교회의 어려움과 우리가 겪는 어려움이 다를 수 있고
우리의 어려움이 꼭 예수님을 믿는 데서 오는 특별한 어려움이기보다
인생길을 가면서 마주치는 일반적인 어려움일 수 있지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목에서 환난을 겪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우리 상황에 그대로 적용해도 무리는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행복, 완전함, 위로와 소망을
꼭 간직하면서 세상을 사는 것도 커다란 도움이 될 것입니다.

 

3.
2022년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합니다.

 

“아사셀의 염소”라는 구약의 전통이 있습니다(레16장).
염소 하나를 정해서 그곳에 이스라엘의 죄를 모두 얹고
광야로 내보내는 예식입니다.

 

혹자는 여기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대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모든 죄를 한 몸에 지셨기에
십자가 앞에서 괴로워하시고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그렇지만, 결국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이뤄지길 원하십니다.

 

절대 쉽지 않은 그 길을 가셨습니다.

 

4.
팬데믹 막판이라고 생각해서인지
멀리서 들려오는 전쟁의 참상 때문인지
게다가 “쉬운 것이 없다”는 우리 각 개인의 현실까지 겹치니
올해 고난주간에는 아세살 염소와 같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기보다
우리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의 모든 짐을 지고
십자가의 길을 가신 우리 주님을 의지하고,
단지 예수님의 은혜를 구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우리 자신과 삶을 얹어 놓고
말 그대로 공짜로/은혜로 생명의 부활절을 기다립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참으로 큽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11:28)

 
하나님,
우리 주님의 은혜를 묵상하고 구하며
오늘 하루를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4. 14 이-메일 목회 서신)

한 가지 의도

좋은 아침입니다.

 

1.
팬데믹이 계속되면서
아무래도 신앙의 끈이 점점 느슨해집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안간힘을 쓰지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여러 방향으로 분산됩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따라 사는 신앙이
우선순위에서 뒷전으로 밀립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빼앗아 가는 것들이
하도 많아서 신앙이 치고 올라 틈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신앙의 집에 물이 새고, 흔들거리고
여기저기 부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알면서도 당하는 것입니다.

 

2.
엊그제 목사님 모임에서
“순수한 의도 a single intention”라는 제목의
웨슬리 설교 한 편을 읽고 생각을 나눴습니다.
저는 “한 가지 의도”라고 옮기고 싶었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웨슬리는
두 가지 마음을 품는 것을 경고하고
한 가지 의도만 꼭 갖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라는 산상수훈 말씀을 본문으로
우리의 눈이 한 곳을 바라보길 부탁합니다.
눈이 바라보는 곳, 우리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우리 생각의 목적지라는 것입니다.
그곳은 오직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
세상일도 하나님 안에서 실행하고,
먹는 것, 말하는 것, 심지어 오락의 영역에서도
하나님 생각하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슨 말을 하고 생각하든지
혹은 무슨 행동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 한 분만이 여러분의 목적이 되도록 하십시오!
하나님 만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 만을 사랑하십시오. (웨슬리 설교 본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추구합니다:
하나님 만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 만을 사랑하십시오.

 

3.
웨슬리 시대와 우리 시대는 많이 다릅니다.
우리 삶이 훨씬 복잡해서
생각할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니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 참빛 식구들께 부탁하고 싶습니다.
“처음 믿음, 순수한 믿음”을 마음에 품고 한 가지 의도에 집중합시다.
“의도(intention)”라는 말을 기억합시다.

 

웨슬리가 부탁하듯이
한 가지 의도(a single intention)로부터
신앙은 물론 삶을 정돈하고 그 힘으로 사는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분산된 우리 생각을(의도를)
하나님께 모으고 그 힘으로 살아갈 때입니다.

 

여러분의 눈을 하나의 의도에 고정시키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온 몸은 빛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더욱더 그분의 도우심의 빛을 여러분 위에 비치실 것입니다 (웨슬리 설교 본문에서)

 

 

하나님,
우리에게 당신을 향한
한 가지 마음, 생각, 의도를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4.7 이-메일 목회 서신)

 

뚜벅뚜벅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주까지 수요예배에서는
구약성경 사사기부터 사무엘상하를 거쳐서
다윗의 마지막과 솔로몬의 등극을 전하는
열왕기상 1-2장을 모두 읽었습니다.
팬데믹 기간에 맞먹는 1년 반 이상 걸린 여정이었습니다.

 

수요예배에 빠지지 않고 오시는
권사님들께 감사드리고
나중에 영상으로 함께 하는 참빛 식구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어제 수요일부터는
신약성경으로 넘어와서 누가복음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탄생부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까지 역사가로 불릴 정도의 누가가
조목조목 차례로 자세히 기록한 말씀입니다.
앞으로 반년 정도 수요예배에서 누가복음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더욱 깊이 만나기 원합니다.

 

2.
누가복음을 ‘소’에 비유합니다.
누가복음에는 소에 걸맞게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여정을
누가복음 전체의 절반에 가까울 정도로 아주 길게 기록했습니다(9-19장)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서
장차 자신이 겪을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도 예고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허투루 들었습니다.

 

길을 가시면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시고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고치시니
제자들과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소처럼 뚜벅뚜벅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셨습니다.
그 자체가 십자가를 지고 오르신 골고다 언덕길이었습니다.

 
3.
우리도 뚜벅뚜벅 주어진 인생길을 걸어갑니다.
독수리처럼 날아오르고 싶지만,
대부분 인생길은 소처럼 묵묵히 걸어갑니다.
아니 그렇게 걸어가야 합니다.

 

지나 온 길을 가슴에 품고
기대를 갖고 앞을 향해서 걸어가지만,
꼭 좋은 일만 기다리는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님의 길에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 끝에 부활이 있음을 믿기에
우리는 부활의 능력, 생명을 생각하면서

주어진 인생길을 소처럼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습니다.
믿음의 힘입니다.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주어진 인생길을 차근차근, 힘을 다해
그리고 뚜벅뚜벅 걸어가시는 참빛 식구들을 응원합니다.

 

힘내십시오.

 

[예수님께서]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를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눅 9:57)

 

하나님,
오늘도 주의 길을 걷고 계시는
참빛 식구들과 함께 하시고 힘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3. 31 이-메일 목회 서신)

 

세 가지 믿음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말씀에서
루스드라에 간 바울과 바나바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하는 장면을 나눴습니다.

 

예배 후에 교회 집사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할 경우는 의학상 쉽지 않고
태어나는 과정 또는 어렸을 때 사고나 질병으로 걷지 못한 것을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으로 표현했을 것으로 정리했습니다.

 

평생 걷지 못하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걷는 것도 현대 의학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신비로운 능력이 이 사람에게 임했다고 봐야겠습니다.

 

이처럼 수천 년 전에 기록된 성경의 자세한 내용을
현대 과학이나 오늘날 상식에 맞춰서 꼼꼼히 살펴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해석이 필요한 “하나님 말씀”이고
올바르고 건전한 그리고 우리에게 타당한 해석이 되기 위해서
성경이 기록될 당시와 우리 시대 사이의 간격(gaps)을 잘 메워야 합니다.

 

대충 읽으면 별일이 없지만
세심하게 읽다 보면 성경이 더 어려워질 수 있는데
그래도 그 길을 가야 성경이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살아있고 운동력 있는 하나님 말씀”이 될 것입니다.

 

설교 후에
집사님들과 유익한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함께 배워가는 과정이요,
그런 대화 속에서 일하실 성령 하나님을 기대합니다.

 

2.
바울과 바나바는
걷지 못하는 사람에게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보고 그를 걷게 했습니다.

 

구원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속에는
구원받다와 더불어 회복되다는 뜻도 있으니
“걸을 수 있겠다는 믿음”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사람은 걷는 것을 구원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성경에서 “믿음”이라고 말할 때도
여러 가지 의미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마커스 보그라는 신학자가 그의 책에서
리처드 니이버가 소개한 세 가지 유형의 믿음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확신(assurance)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지식, 교리에 대한 확신입니다.
머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는 신실함(fidelity)입니다.
앞에서 말한 자신감이 지적인 동의라면
신실함은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삶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는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는 신뢰(trust)입니다.
니이버는 신뢰를 믿음의 가장 깊은 차원이라고 말합니다.
생각이나 마음을 넘어서 우리 삶을, 관계를, 인생 전체를 하나님께 연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니이버는 신뢰로 대표되는 믿음의 반대말은
의심(doubt), 회의(skepticism), 불신(unbelief)이 아니라
불안(anxiety), 염려(worry), 두려움(fear)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하면서
불안, 염려, 두려움에 휩싸여 있다면,
신뢰로 표현되는 믿음이 부족한 표시입니다.

 

3.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삶이
니이버가 제시한 세 가지 믿음에 근접하길 바랍니다.

 

불안, 염려, 두려움을 극복하고 이길 수 있는
정말 멋진 믿음을 갖고 싶습니다.
그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기를 원합니다.

 

주여, 믿음을 주옵소서.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행14:9)

 

하나님,
온전히 주님을 신뢰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3. 24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