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해설 (15)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요즘 금과 은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답니다. 전쟁 등 세상이 불안하니 안전 자산인 금과 은을 사 모으고, 거기에 왠지 귀금속을 갖고 있지 않으면 뒤처진다는 포모(FOMO)까지 더해진 결과라는 분석입니다. 금이나 은이 실제 산업에서 사용되기도 하지만, 개인의 경우 대부분 희소성의 가치 때문에 금을 사 모읍니다. 온 세상이 금과 은으로 이뤄져 있고, 값싸고 손쉽게 구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황금을 돌처럼 볼 텐데 말입니다.

 

연속 설교 중간에 찬송가에 깃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오늘 살펴볼 찬송가 94장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의 영어 가사 첫 구절은 “나는 은과 금보다 차라리 예수님을 선택하겠습니다”입니다. 너도나도 갖고 싶어 하는 금과 은보다 예수님이 더욱 귀하다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13:44). 예수님께서 천국을 감추인 보화에 비유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했습니다. 너무 기뻤습니다. 집에 돌아가서 모든 재산을 팔아 밭을 삽니다. 재산을 팔아서 밭을 사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어리석다고 비아냥거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밭에 숨겨진 보화를 보았습니다. 천국에 예수님을 대입하면 오늘 우리가 배우는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이 없네”라는 찬송가 가사가 됩니다.

 

요즘 세상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세상에 너무 좋은 것이 많습니다. 금과 은과 같은 보화들도 많이 있습니다. 때로는 세상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 가운데 감추인 보화를 발견했다면, 모든 것을 팔아서 밭을 산 사람처럼 모든 것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을 가장 귀하게 여길 것입니다.

 

찬송가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는 술주정뱅이 아버지를 두었던 밀러(Miller, 1894-1966)부인이 작사한 찬송입니다. 밀러 부인은 돈만 생기면 술을 사먹는 아버지가 하나님께 돌아오길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녀의 기도가 응답되어서 예수님을 믿고 변화된 아버지가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로 시작하는 간증을 하였고, 앞에 앉아 있던 밀러 부인은 아버지의 간증을 정리해서 찬송시로 만들었습니다.

 

밀러 부인의 찬송시는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어느 주일날, 찬양하는 것이 너무 좋아서 아버지가 담임하는 교회에서 찬양으로 섬기던 조지 셰이(George Shea,1909-2013)는 그의 어머니가 손 글씨로 써 놓은 밀러 부인의 시를 발견하고 즉석에서 곡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94장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 없네”가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河-

우리 교회는…

오늘은 그동안 교회를 섬기며 수고해 주신 은퇴 권사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우리 교회는 집사나 권사라는 직위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직책 때문에 더 대우하거나, 직책이 없다고 덜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말 그대로 교회를 섬기기 위한 역할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지난 수년 동안 권사님으로 교회를 섬겨 주신 헌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는 원로 권사님으로 무엇보다 기도로 교회를 더 많이 섬겨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아무쪼록 영육 간에 강건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세 분의 집사님을 새로 세웁니다. 입교(등록) 후 2년이 지나면 신천집사로, 다른 교회에서 집사로 섬기셨다면 1년 후 이명 집사로 임명합니다. 집사가 되기 위한 절차가 복잡하지 않고, 집사님으로 해야 할 의무도 특별히 강조하지 않습니다. 다만 각자가 있는 자리에서, 힘닿는 대로 교회를 섬겨 주시길 부탁드릴 뿐입니다. 올해 임명되신 세 분 집사님을 통해 우리 교회가 더욱 근사하게 세워 지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교회는 은혜로 여기까지 왔지만, 팬데믹 이후 많은 교회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특히 작은 교회가 더욱 커다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럴수록 교회를 섬기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손길이 귀합니다. 함께 교회를 세워 가시는 임원들이 계시고, 참빛 식구들이 계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앞으로도 교회의 사역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교회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도 많이 달라졌고, 사역의 조건과 환경도 바뀌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과거에 머물러 있기보다, 새로운 환경을 맞닥뜨리고 필요한 변화를 시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무리한 교회 사역이나 활동은 자제하겠습니다. 자원하는 손길이 있을 때,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겠습니다. 자칫, 교회가 조용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우리 교회의 특징이 된다면, ‘일상을 사는 교회’로 근사하게 세워져 갈 것입니다.

 

교회에 시간과 에너지를 과도하게 쏟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주일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주일에 함께 교제하면서 힘을 얻기를 바랍니다. 예배가 하나님 사랑이라면, 성도의 교제는 이웃 사랑입니다. 주일마다 우리 안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온전히 실천되기를 바랍니다. 그 힘으로 천국과 같은 가정을 세우고,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물론 교회가 세워지기 위해서는 섬김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행사와 활동을 자제해도 기본적으로 감당해야 할 사역이 있습니다. 각자의 은사대로 교회를 섬기지만, 그 섬김이 부담이 아니라 기쁨과 보람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 한마음과 한뜻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멋진 교회를 세워갑시다.-河-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4)

올해 표어인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 관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에 대해서는 익숙하고 많이 배웠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고 말씀 읽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언제나 중요합니다. 하나님 사랑이 없는 이웃 사랑은 박애주의에 빠질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 사랑이 첫째가는 계명이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이 이해됩니다.

 

지난주에 배웠듯이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면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웃 사랑이 하나님 사랑을 증명하고 완성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사랑에 비해서 이웃 사랑을 생각하면 부담이 밀려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경건의 실천들입니다. 왠지 거룩해 보입니다. 기도와 말씀 읽기, 예배 참석과 같은 하나님 사랑은 혼자서도 잘할 수 있지만, 이웃 사랑은 상대가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에 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마음과 생각을 넘어서는 행함입니다. 그러니 부담감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고넬료는 가이사랴에 파견된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 고넬료가 ‘경건’하였다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었던 유대교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할례받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구별해서, 유대교에 입문한 이방인들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God-fearer)’라고 불렀습니다. 로마 신들과 황제를 섬겼던 고넬료가 이스라엘에 파견 나와서 하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고넬료는 하나님만 잘 믿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많이 구제하였습니다. 로마 군대의 장교라면 식민지에 있는 백성들을 압제하고 다스리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고넬료는 자기가 다스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좋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춥고 배고팠습니다. 힘겹게 살았습니다. 지난주에 함께 살펴본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마저 힘겹게 사는 백성들을 무시하고 그들을 이용하였는데, 로마 백부장 고넬료가 백성들을 도왔습니다. 구약 성경의 이웃 사랑을 실천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으니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온전히 실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와 고넬료에게 각각 환상을 보여주셔서, 공식적으로 예수님을 믿은 첫 번째 이방인이 되는 데 손색이 없습니다.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믿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고넬료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한 것에 감동을 받습니다. 올 한 해 우리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합시다.-河-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3)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올해 표어에 관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지난 두 주간에는 “하나님 사랑”에 초점을 맞춰서 공부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한 것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사랑”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 하나님 백성들의 사랑을 가리키는 특별한 헬라어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사랑과 분명히 구별됩니다. 히브리어 아하브는 언약/약속이 강조된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 “마음을 다해서 뜻을 다해서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약속을 지키면서 끝까지 이어지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이 아하브라면, 하나님 사랑이 임한 상태를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헤세드입니다.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헬라어 아가페는 히브리어 아하브와 헤세드가 통합된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사랑만 있다면, 외톨이가 됩니다. 반쪽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 계명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둘째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서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이 먼저 가면, 그 뒤에 이웃 사랑이 함께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이 완성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짝입니다. 자칫, 신앙이 좋고 깊어질수록 하나님 사랑에 집중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의 완성은 이웃 사랑에 있습니다. 동시에 이웃 사랑의 목표는 하나님 사랑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합(合)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서로 순환하면서 사랑을 완성해 갑니다.

 

무엇보다 이웃 사랑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면,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형제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말씀 앞에서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도 사랑하느니라”(요일4:21). -河-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2)

올해 우리 교회 표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 맞춰서 아침마다 요한일서 말씀을 읽고 있습니다. 의도한 것은 아닌데, <생명의 삶>의 진도와 맞았습니다.

 

요한일서는 구십이 넘은 사도 요한이 기록했습니다. 특별히 요한일서 4장은 사랑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사랑’이라는 표현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8,16절)고 하나님을 정의하였습니다. 말씀 그대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복음서는 회개하라는 세례 요한의 선포에 이은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하나님 나라 복음이 주제입니다. 성령 행전이라고 불리는 사도행전은 오순절에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면서 예루살렘에서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기록했습니다. 성령이 사도행전의 화두입니다. 로마서를 비롯한 바울 서신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확립했습니다. 믿음과 은혜가 바울서신의 주제입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개신교가 시작되면서 믿음과 은혜는 개신교의 핵심 교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은 물론 요한서신에서 ‘사랑’이라는 화두로 신앙과 삶을 풀어갑니다. 독특한 해석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계명을 쫓아 살아야 하는데, 계명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그 믿음을 갖고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계명을 쫓아 살 때,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고 온전히 믿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주제가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과 선지자 글의 강령(요약, 핵심)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사도 요한이 그대로 계승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으로 드러나고,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깨우쳐줍니다.

 

요즘은 기독교가 힘을 쓰지 못합니다. 때로는 이리저리 치이는 천덕꾸러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기독교와 기독교의 전통 교리는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잊혀지는 시대에 ‘사랑’이라는 키워드를 갖고 복음을 소개하고 설명하는 사도 요한의 메시지가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는 사랑이 설득력을 갖지만, 교회 안의 기독교인들이 믿음과 은혜를 강조하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믿음과 은혜의 끝에도 결국 사랑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믿음, 소망, 사랑이 항상 있지만,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대신, 우리 힘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울 때 저절로 사랑이 흘러갈 것입니다. 신앙은 이 모든 것이 함께 작동하는 협력이고 순환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