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에고 에이미 (6)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일곱 가지 <에고 에이미(나는…I am)>를 한 가지씩 공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신 자기 소개문입니다. 그동안 배운 예수님의 <에고 에이미>는 다음과 같습니다:“나는 생명의 떡이라” “나는 세상의 빛이라” “나는 양의 문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여섯 번째 <에고 에이미>가 등장하는 요한복음 14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직전, 유월절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가룟 유다는 자리를 떠났습니다.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은 어디든지 가겠다고 다짐하지만, 예수님은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이 뒤숭숭했습니다. 마음에 근심이 가득했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믿고 따랐는데 떠나신다니 자기들만 홀로 남게 생겼습니다. 제자들의 생각과 마음을 간파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4:1).

 

예수님은 떠나시지만, 아버지 집에 제자들이 거할 곳을 준비해 놓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가까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종말입니다. 마지막 때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제자들과 모든 성도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동안 여러 번 알려주셨지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알지 못합니다.

 

의심 많은 도마가 나서서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5절)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목적지를 알지 못하니, 어떤 길을 가시는지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여섯 번째 <에고 에이미>를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6절).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도마 역시 예수님께서 실제로 가실 길에 주목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셔야 할 십자가의 길도 아닙니다. 이들에게는 예루살렘에 올라오신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길을 가시고, 실제로 로마 권력을 물리치고 왕이 되실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십자가의 길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길이라는 말씀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진리와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14장 후반부에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오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시고 다시 오실 때까지 보혜사 성령께서 제자들과 성도들 안에 머무시고 도우실 것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갈 수 있습니다.-河-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에고 에이미 (5)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일곱 가지 <에고 에이미(나는…I am)>를 한 가지씩 공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신 자기 소개문입니다. 그동안 배운 예수님의 <에고 에이미>는 다음과 같습니다:“나는 생명의 떡이라” “나는 세상의 빛이라” “나는 양의 문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 세상에 오셔서 자신의 몸을 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셨고, 그 빛은 생명의 능력이었습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에고 에이미>는 예수님을 양을 돌보는 선한 목자, 양들이 오가는 문으로 소개하셨습니다. 목자인 예수님과 양인 우리의 관계를 강조하셨습니다. 목자는 양의 이름으로 알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습니다. 목자와 양이 서로 연결됩니다.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오늘부터 다음 주까지 배울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에고 에이미>는 서로 짝입니다. 역시 “생명”이 강조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에 품고 줄곧 생각하신 것은 “생명”입니다. 죽은 세상을 살리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일곱 가지 <에고 에이미>와 함께 일곱 가지 표적(signs)이 나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이 변해서 포도주로 변한 표적으로 시작해서,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고,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고, 5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물 위를 걸으시고, 앞을 못 보는 시각 장애인의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 번째 표적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2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베다니라는 동네가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마르다와 마리아, 남동생 나사로가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면 나사로의 집에서 머물곤 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은 여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들 오누이를 가족처럼 그리고 친구처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사로가 많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던 사역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계신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시다가 나사로에게 가셨지만,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는 나사로가 이미 죽어서 장례까지 끝낸 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11:11)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다니에 도착했을 때, 마르다와 마리아는 물론 온 동네 사람들이 나사로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시면서 하신 말씀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였습니다. 나사로를 살려 내십니다. 나사로의 죽음은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는 표적이었던 것입니다.-河-

나는 선한 목자라

에고 에이미 (4)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일곱 가지 <에고 에이미(나는…I am)>를 한 가지씩 공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신 자기소개입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라” “나는 세상의 빛이라” “나는 양의 문이라”를 배웠습니다.

 

오늘은 네 번째 <에고 에이미>인 “나는 선한 목자라”를 공부합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양의 문과 연결됩니다. 요한복음 10장은 양을 돌보는 참된 목자와 양을 해치기 위해서 담을 넘어오는 도둑과 강도를 비교했습니다. 참된 목자는 우리의 문을 통해서 양의 출입을 돕습니다. 양의 이름을 부르면, 양들도 자기 이름을 부르는 목자의 음성을 압니다. 하지만, 도둑과 강도는 양의 이름을 모릅니다. 양들도 그들을 모릅니다. 양들이 따라나서지 않으니 도둑질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양의 문으로 소개하십니다. 양의 우리를 지키는 문입니다. 예수님을 통과할 때 생명과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따르는 양들은 예수님의 문으로 출입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들어가는 모든 사람은 구원을 받고, 들어가고 나가면서 먹을 양식(“꼴”)을 얻습니다. 도둑과 강도들은 양을 죽이려는 것만 생각하지만, 양의 문이신 예수님은 풍성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자연스럽게 자신을 “나는 선한 목자라”고 소개하십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정성껏 돌봅니다. 목숨을 내어놓을 정도로 양을 사랑합니다. 반면, 봉급만 받고 형식적으로 양을 돌보는 삯꾼 목자는 물질에만 관심을 둡니다. 이리가 오면 양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목숨을 먼저 챙깁니다. 양을 들에 두고 도망갑니다. 이리가 양을 물어가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삯꾼 목자들이 많았습니다. 백성들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어떤 생활을 하고, 어떤 신앙을 갖든지 상관하지 않고 자기들 잇속만 챙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질타하십니다. 그래도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 말씀을 듣지 않고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들은 뇌물을 받고 성직을 매매하던 헬라 시대의 제사장들과 비슷했습니다. 더 멀리는 에스겔 선지자가 말하던 삯꾼 목자와 정확히 일치했습니다:”내 양 떼가 노략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이라. 내 목자들이 내 양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만 먹이고 내 양 떼를 먹이지 아니하였도다”(겔34:8). 하나님께서는 직접 자신의 양을 찾고 돌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기는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없다고 정의대로 그것들을 먹으리라(겔34:15-16).

 

에스겔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약속이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할렐루야! -河-

 

나는 양의 문이라

에고 에이미 (3)

 

신약성경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신 일곱 가지 말씀이 나옵니다. 헬라어 <에고 에이미(나는…I am)>로 시작합니다. 처음 시간에 “나는 생명의 떡이라,” 지난주에는 “나는 세상의 빛이라”는 예수님의 <에고 에이미>를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몸을 주셨습니다. 어두운 세상을 생명의 빛으로 밝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 오신 것을 말씀하실 때는 초막절이라는 이스라엘의 3대 명절 기간이었습니다. 낮에는 성전에 물을 붓고, 밤에는 불을 켜는 초막절 기간이 끝나면서,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 오셨음을 알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빛은 절대로 꺼지지 않습니다. 어두운 세상을 밝게 비추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오늘 우리가 배우는 세 번째 예수님의 <에고 에이미>는 “나는 양의 문이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을 때는 유대인의 명절 가운데 하나인 수전절(하누카) 기간이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 가운데 한 명인 셀류시드 왕조의 안키오커스 4세(주전175-164)의 통치를 받을 때였습니다. 안키오커스는 이스라엘은 물론 정복한 민족들에 헬라 문화를 강요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 지내는 것은 물론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금지했습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헬라 제국에 뇌물을 바치고, 대제사장의 직분을 사고파는 일을 했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을 헬라식으로 바꾸는 데 앞장섰습니다. 예루살렘은 혼란에 빠졌고, 커다란 신앙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에서 20여 마일 떨어진 작은 마을 데모인에 살고 있던 제사장 맛다디아와 그의 다섯 아들이 무력으로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하스몬 왕조(주전143-주후63년)를 세웠습니다. 맛다디아의 셋째 아들 유다 마카비(“망치”)가 혁명을 주도했기에 마카비 혁명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했을 때, 성전에는 하루 분 기름밖에 없었는데, 신기하게도 여드레 동안 불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마카비 형제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한 것을 기념하는 유대인의 절기가 “수전절/하누카(봉헌)”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실 때가 바로 유대인의 절기 수전절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도 마카비 시대의 제사장들과 마찬가지로 로마 제국에 아부하면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사랑으로 양을 돌보는 목자가 없었습니다(겔34장):”내 양 떼가 노략 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이라”(겔34:8). 그때 예수님께서 자신이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안전하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들어가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河-

나는 세상의 빛이라

에고 에이미 (2)

 

“에고 에이미(I am)” – 예수님께서 직접 밝히신 일곱 가지 “나는 누구인가?”에 관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오병이어의 기적에 이어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소개하시는 말씀을 배웠습니다. 여기서 떡은 예수님의 몸(살)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해서 그의 몸을 내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주신 사랑이요 희생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배울 두 번째 “에고 에이미”는 “나는 세상의 빛이라”입니다:“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빛은 어두움의 반대입니다. 어두움은 또한 죽음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죽음을 몰아낼 생명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빛 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주님의 백성들은 어두움에 다니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기적을 표적(sign)이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기적 자체를 넘어서 기적이 주는 교훈을 자세히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생명의 떡으로 이어진 것이 대표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소개하셨을 때도 말씀하신 배경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3대 명절 중의 하나인 초막절을 맞아서 성전에 올라가셨습니다. 초막절은 추수감사절에 해당합니다. 많은 사람이 예루살렘 성전에 모였습니다. 초막절에는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떠서 제단에 붓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초막절이 끝날 즈음, 성전에 물을 붓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 외치십니다:”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7:37-38). 여기서 생수의 강은 실로암 연못의 물을 넘어서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가리킵니다.

 

낮에는 제단에 물을 붓는 예식을 행하였다면, 밤이 되면, 성전에 불을 밝혔습니다. 성전의 헌금함 앞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하셨는데(8:20), 성전 헌금함은 여성들까지 들어갈 수 있는 여성의 뜰에 있었고 이곳에서 초막절 불을 밝혔습니다. 초막절이 끝나니 불이 꺼졌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초막절에, 제단에 물을 붓고 밤에 불을 켜는 예식은 구약 성경에 기초한 전통이었습니다(슥 14:7-8). 무엇보다 빛에 대한 성경 말씀은 곳곳에 등장합니다. 특별히 구약성경에서 예고한 빛이 세상에 오셨음을 예수님께서 알리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어두움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믿습니다. 세상에 깃든 어둠을 몰아내고 생명을 주시길 간절히 원합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