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5장 (3): 고치신 이는 예수라/ 요한 5장 10-15절
Category: 생명샘
요한복음 5장 (3)
고치신 이는 예수라.
병자들이 모여 있는 베데스다 연못에 가신 예수님께서는 38년 동안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있는 병자를 찾아가서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병이 매우 오래된 것을 감지하셨고, 불쌍한 마음에 그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발동한 것입니다. 아무 조건이 없었습니다. 전적인 은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신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사건이 특별히 많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것이 당시 예루살렘 지도자들에게 문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병을 고치셨을 것입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절)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38년 된 병자는 곧바로 병이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시비를 겁니다. 안식일 날에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 규정에 의하면 안식일에는 어떤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제 칠일에 쉬신 것에서 시작된 안식일입니다. 시내산에서 모세가 받은 십계명에도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이 네 번 째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날입니다. 안식하면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입니다. 안식일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유대교에서는 안식일에 대한 규정을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병이 나은 사람이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조차 금지할 정도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안식일 규정이 사람들을 판단하는 데 사용되곤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곡식 이삭을 따먹은 것을 갖고도 시비를 걸었을 정도입니다. 실제로 당시에 안식일 법은 매우 복잡해서, 먹고 살기 힘든 백성들에게 큰 족쇄가 되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안식일 법을 갖고 백성들을 정죄하였습니다. 종교 권력의 남용이었습니다.
병에서 나은 사람은 자기를 고쳐준 사람이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해서 걷고 있다고 답변합니다. 맞습니다. 이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이 중요했습니다.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걷는 것이나,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사실은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저 기뻤을 뿐입니다. 게다가 고침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병만 고쳐 주시고 자리를 뜨셨기 때문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의 사람들이 헛된 희망을 갖고 천사가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면, 안식일에 병에서 해방된 사람을 정죄한 유대인들은 과거의 율법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을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38년 된 병에서 고침 받은 사람만이 예수님을 만났고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河-
2025년 3월 4주 말씀
요한복음 5장 (2): 일어나 걸어가라/ 요 5:5-9
요한복음 5장 (2)
38년 된 병자 (1): 일어나 걸어가라
예수님께서 찾아가신 베데스다 연못은 절망적일 정도로 안타까웠습니다. 수많은 병자가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천사가 내려와서 연못물이 소용돌이 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바람만 조금 불어서 연못 물이 움직이면 천사가 내려왔다고 생각해서 연못으로 뛰어드는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모두 목이 빠지게 천사와 연못의 물이 움직일 때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게다가 한 명만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경쟁자입니다. 자기만 살아남아야 합니다. 베데스다 연못에 희생, 양보, 배려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지 나만 살면 됩니다. 베데스다 연못의 분위기를 눈에 그리면 끔찍할 정도입니다.
그곳에 예수님께서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매우 아프셨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귀신도 쫓아내셨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보게 하셨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의 입도 열어 주셨습니다. 모든 것이 가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더욱 안타까우셨을 것입니다.
베데스다 사람들의 관심은 오직 연못물에 있었기에 예수님이 오신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에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불가능할 줄 알면서도 자기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자기 체면을 걸었을 가능성도 큽니다. 어차피 모든 사람이 병을 고칠 수 없으니, 동병상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렇게 베데스다 연못에 머물러 있습니다. 참 이상한 모습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에 38년 동안 병을 앓고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거의 평생 병을 앓고 누워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가능성도 큽니다. 예수님께서 자리를 깔고 누워있는 38년 병자를 찾아가셔서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당연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베데스다 연못의 시스템을 생각하면 쉽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은 천사가 내려와도 일등으로 연못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낫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실제는 불가능합니다.
이 사람이 솔직히 말합니다:”주여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절). 가족이나 친구도 없이 혼자 누워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희망의 줄 한 가닥을 붙잡고 베데스다 연못에서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전적인 은혜가 이 사람에게 임했습니다. 38년 동안 자리에 누워있던 사람이 곧 나아서 예수님 말씀대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믿고 순종한 결과였습니다. 그에게 새로운 인생이 펼쳐졌습니다. 할렐루야! -河-
2025년 3월 3주 말씀
요한복음 5장 (1): 베데스다 연못/ 요 5:1-4
요한복음 5장 (1)
베데스다 연못
오늘부터 한달여 요한복음 5장을 공부하겠습니다. 요한복음 5장부터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11장까지 한 묶음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특별히 ‘표적(sign)’이라고 부릅니다. 표적은 예수님의 기적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초점을 맞춥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곱가지 기적을 소개하고, 각각의 기적 후에는 그 의미를 설명합니다. 표적(sign)이 되는 것입니다.
일곱가지 표적 가운데, 세 가지는 갈릴리에서 나머지 네 가지는 예루살렘에서 행하셨습니다.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갈릴리에서 행하신 첫 번째 표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는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 표적은 갈릴리에 있는 관리의 아들을 방문하지도 않고 말씀으로 고치신 것, 세번째는 우리가 살펴볼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 네번째는 갈릴리에서 행하신 오병이어, 다섯번 째는 물위를 걸으시고, 여섯번째는 날때부터 앞을 보지 못한 사람을 고치신 표적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표적은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예고했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공부할 요한복음 5장은 유대인의 절기를 따라서 펼쳐지는 예수님의 사역 첫번째입니다. 5-11장까지 한 묶음입니다. 안식일(5장), 유월절(6장), 초막절(7장), 하누카(10장)로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사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베데스다(“은혜의 집”)라고 불리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이 연못은 예루살렘 북쪽에 위치했습니다. 행각 다섯이 있었는데, 혹자는 그것이 모세의 다섯 두루마리를 뜻하면서 여전히 율법에 얽매인 예루살렘을 상징한다고 보았습니다. 19세기 후반 독일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베데스다 연못터가 발견되어서 요한복음 5장의 역사성이 증명되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는 행각에는 수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천사들이 내려오는 때가 있는데 그때 연못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의 병이 낫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많은 병자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 다리를 저는 사람들, 피가 돌지 않아서 몸이 마비되는 사람들이 천사들이 내려와서 물이 심하게 움직일 때를 기다리며 머물고 있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물이 동할 때, 연못으로 뛰어들어가는 한 명만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점에서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을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이 동하기를 막연히 기다리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찾아가셨습니다.-河-
2025년 3월 2주 말씀
찬송가 해설(12):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요한복음 20장 11-18절
찬송가 해설(12)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엊그제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부터 2025년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은 부활절 전까지 주일을 제외한 40일을 가리킵니다. 초대 교회부터 지켜오던 전통입니다. 사순절은 세례를 받기 위한 준비 기간이었습니다. 초대 교회에 기독교인이 되는 첫 관문인 세례가 그만큼 엄격했습니다. 사순절 기간에는 금식하며 경건의 훈련을 했습니다. 금식해서 절약된 양식과 재정으로 어려운 이웃을 도왔습니다.
매년 맞는 사순절이지만, 2025년 사순절은 다시 찾아오지 않습니다. 올해 사순절도 특별한 기간으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과 더욱 가까워지고, 금식과 절제를 통해서 신앙을 돌아보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을 준비를 하는 사순절로 만듭시다.
우리가 오늘 살펴보는 찬송가 442장 <저 장미꽃 위에 이슬>의 배경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 무덤을 찾아갔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관점에서 쓰인 찬송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이 지난 안식 후 첫날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동이 트지 않은 이른 아침이었기에, 예수님의 무덤이 있는 동산으로 가는 길옆에 핀 장미꽃에는 아침 이슬이 맺혀 있었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도착해보니 무덤을 막아 놓았던 돌이 옮겨졌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감히 무덤 안을 들여다볼 생각도 못 하고 서둘러 내려와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알렸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한 명의 제자가 무덤으로 뛰어갑니다. 또 다른 제자는 요한으로 보입니다. 베드로가 무덤 안으로 들어갑니다. 예수님을 쌌던 세마포와 수건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고 예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미처 생각하지도 믿지도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자기들이 머물던 곳으로 돌아갑니다.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던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 안을 들여다봅니다. 흰옷을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이 누우셨던 머리와 발에 앉아 있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고 묻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체를 누군가 훔쳤고 어디에 두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하고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마리아는 “랍오니 (선생님)”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만지는 것을 허락치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찬송가 442장 <저 장미꽃 위에 이슬>을 지은 오스틴 마일즈(Austin Miles)는 요한복음 20장 말씀을 읽고 감동해서 이 찬송을 지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을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듯이 묘사했기에 더욱 은혜롭습니다.-河-
2025년 3월 1주 말씀
찬송가 해설(11): 찬송가 310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 딤후1:12
2025년 2월 4주 말씀
기도의 힘(4); 느헤미야 9장 30-3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