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로 사는 삶 (4) : 혈루병이 낳은 여인

어느 덧 5월이 되었습니다. 올 해도 절반을 향해서 가고 있네요. 지난 넉 달 동안 우리는 올해 교회의 표어에 맞춰서 요한 계시록에 등장한 교회들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쓰시는 교회>, 창세기의 요셉을 통해서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라는 말씀을 나눴고, 지난 한 달 동안은 은혜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모두 은혜가 필요합니다. 내 힘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아도 막상 일이 닥치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됩니다. 99%의 노력에 1%의 영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노력이 무척 중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1%의 영감이 없다면 100%를 채울 수 없습니다. 영감 즉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우리의 삶이 온전해 짐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차별 없이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살펴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몸종 하갈이나 야곱의 첫째 부인 레아는 절대로 주인공이 되기 힘든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그들의 외침을 들으셨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 본 나인성 과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외아들을 잃은 여인은 아무 말이 없습니다. 단지 슬퍼할 뿐입니다. 그 모습을 예수님께서 보셨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관에 손을 대면서 여인의 아들을 살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도하신 일입니다. 아들을 잃은 여인이 불쌍해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은혜의 시작은“측은지심(惻隱至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을 향한 측은지심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습니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 자리를 엿보다가 쫓겨났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낙원을 잃어버린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애를 쓰셨습니다. 그 절정이 하나뿐인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게 하신 사랑입니다. 이 모든 사역이 하나님의 측은지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때, 은혜가 임합니다. 나인성 과부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는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는 은혜가 우리를 따라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셔서 친히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반면에 오늘 우리가 살펴본 본문의 여인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적극적으로 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병으로 앓은 여인은 사람들의 이목을 무릅쓰고 예수님께서 나와서 예수님의 옷깃을 만졌습니다. 적극적으로 예수님의 은혜를 구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힘이 남아있을 때는 힘을 다해서 은혜를 사모하고 찾아야 합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병을 앓던 여인에게 예수님의 옷깃만 만져도 병을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듯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은혜 가운데 살기 원합니다. 마음을 활짝 열고 은혜를 사모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참빛 식구들과 우리 교회에 충만한 은혜를 내려주시길 기도합니다. -河-

은혜로 사는 삶 (3) : 나인성 과부

은혜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은혜’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예수님을 보내주시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의지) 가운데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머리로만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없습니다. 은혜는 경험하고 느끼는 정(情)적인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느끼는 것입니다. 그 은혜에 감동하고 감격합니다. 우리에게 임한 은혜를 설명하려고 애쓰기보다 단순하게 느끼고 누리는 것입니다. 은혜 속에 들어가고, 은혜 속에 거하고,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던 과거의 사건부터 현재와 미래를 포함한 모든 삶에 은혜가 요청됩니다. 날마다 은혜가 필요하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하루 종일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아니 그 모든 것이 은혜임을 확신하고 은혜를 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은혜로 사는 사람은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레아가 남편의 사랑을 그리워했지만 결국에는 유다(“찬송”)를 낳고 하나님을 찬송했듯이 말입니다. 은혜로 사는 삶에 힘이 있습니다. 은혜로 사는 삶에 용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모험도 감수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이고 은혜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은혜로 사는 삶 속에 주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은혜 가운데 주님과 동행합니다.

은혜로 사는 삶에 치유와 회복도 있습니다. 앞에서 은혜는 느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은혜로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부어진다고 고백합니다. 은혜가 우리 안에 부어질 때, 마음속에 있는 상처와 쓴 뿌리가 치유되고 새 삶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뜨겁게 경험하기 원합니다. 온 교회가 은혜 속으로 들어가기 원합니다. 주일예배뿐만 아니라 주일 이후의 6일 동안 가정과 세상 속에서 은혜를 경험하고 그것을 간증하기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내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과 그 일행이 나인성에 들어가실 때 장례행렬을 만나셨습니다. 나인성에 사는 어떤 과부의 외아들이 죽어서 장례를 지내러 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그 과부를 보셨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측은지심입니다. 울지말라고 말씀하시면서 관에 손을 대시고 아이를 살려내셨습니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본문 속에서 나인성 과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단지 예수님께서 일하실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외아들을 잃은 과부를 측은히 여기시면서 찾아가셨고 아들을 살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河-

은혜로 사는 삶 (2) : 레아

감리교의 창시자 웨슬리는 “은총의 수단”이라고 불리는 은혜 받는 방법을 소개하였습니다. 무엇보다 기도를 강조했습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골방기도부터 회중이 함께 드리는 통성기도까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둘째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을 것을 부탁했습니다. 셋째는 성만찬에 참석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금식과 성도간의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은총의 수단이지만 이것들을 형식적으로 행하는 것은 소용이 없고 진정한 마음으로 즉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말씀을 대하고, 성만찬에 참여하고 금식과 성도의 교제를 행할 때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들어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말 그대로 은혜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이기에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구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은총의 수단”이라는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은총의 수단에는 아무 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지면 그것은 마른 잎사귀요 그림자입니다. 또 내가 그것을 사용한다고 해서 업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사용하는 것 자체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하나님의 영외에는 구원의 능력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 외에는 아무 공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일지라도 당신이 오로지 하나님만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영혼에 은혜를 전달하지 못합니다.”이처럼 하나님을 바라보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값없이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비로소 충만한 은혜 속으로 들어갑니다.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구하는 열심히 요청됩니다. 흘러넘치는 은혜를 경험하기 원합니다. 온 교회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 속으로 들어가길 간절히 바랍니다.

지난주에는 은혜를 받을 자격도 없고 은혜 받을 일을 하지 않은 사라의 여종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고 살길이 열렸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전적인 은혜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인물은 야곱의 첫째 부인 레아입니다. 레아라는 이름에는 “지침(weary)” “둔함(dull)” 또는 ”들소(Wild cow)”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레아는 그의 이름 그대로 뭔가 조금 부족했습니다. 그런데 레아 역시 하갈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버지 라반에 의해서 야곱에게 시집갔습니다. 야곱은 처음부터 라헬을 사랑했기에 레아에게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야곱의 첫째 부인이 되었지만 레아의 결혼생활을 결코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레아를 돌아보셨습니다. 그녀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여섯 명을 낳았고 딸까지 낳게 되었습니다. 다윗과 예수님의 조상인 유다와 훗날 이스라엘의 제사장 지파가 되는 레위까지 레아의 아들입니다. 야곱은 레아에게 눈길을 두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눈길은 레아를 향했습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 아들인 스불론을 낳고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후한 선물을 주셨다고 찬양할 정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사랑받지 못해서 외롭고, 누군가의 위로가 꼭 필요한 사람에게 풍성히 임합니다. 할렐루야! -河-

은혜로 사는 삶 (1) : 하갈

오늘은 교회력에 따라서 부활절 둘째 주일입니다. 교회력에 의하면 앞으로 6주간 성경강림절까지 부활 절기를 살게 됩니다. 부활절이 지난 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앞으로 50여일이 부활절의 연속인 셈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늘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행1:3).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도 회개하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셨고, 부활하셔서 승천하기 전에도 하늘나라에 대해서 알려주셨습니다. 더불어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성령이 임할 것을 기다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제자들이 두려움에 모두 흩어졌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성령이 임하길 기다렸습니다. 그로부터 10여일 후인 오순절에 약속하신 대로 성령이 임하고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거듭났습니다.

이처럼 부활절부터 성령강림절까지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주님께서 명령하신대로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함께 기도했듯이 우리들도 기도하는데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전해주시는 하나님 나라 복음을 묵상하고, 우리가 사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빛으로 소금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 가운데 성령 강림절을 준비하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 은혜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기독교를 은혜의 종교라고 부릅니다. 은혜(grace)는 값없이 임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해서 얻게 되는 보상이 아닙니다. 자격이 있어서 받는 상급도 아닙니다. 우리가 한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니 할 수 있는 여력도 없습니다. 그런데 은혜가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은혜 속에 사는 것은 감사와 기쁨이 넘칩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살아갑니다. 무엇보다 아무 조건도 없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깊이 만납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성경에 나오는 네 명의 여성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특별한 상황에서 은혜를 경험한 인물들입니다.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몸종인 하갈입니다. 하갈이라는 이름에는 “훌쩍 떠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이삭이 태어나자 하갈은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사막으로 쫓겨납니다. 마실 물이 없는 사막에서 하나뿐인 아들을 키울 여력이 없자 죽음을 택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들 모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샘물이 터지게 하시고 사막에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십니다. 주인에게 추방당한 여종과 그녀의 아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차별없이 임합니다. 할렐루야!河-

그리스도와 함께 (2)

2015년 부활의 아침 밝았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를 부활의 종교라고 부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신 사건에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29절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세례도 헛되고 믿음도 헛되다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망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기에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고 선포합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자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공통된 신앙고백입니다.

오늘 부활절에 세례 받는 자매와 아기가 있습니다. 세례 받고 예수님을 믿는 신앙에 첫 걸음을 내딛는 성도님을 축하하고 앞으로의 신앙 여정을 위해서 온 교회가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유아세례의 경우 그 책임감이 더욱 클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님의 믿음으로 세례를 받기에 앞으로 자녀가 멋진 그리스도인으로 자랄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다음 성인이 되었을 때 자신의 입술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게 기도로 키우고 부모님들이 먼저 본이 되어야 합니다. 세례예식은 공동체가 함께 행합니다. 교회는 오늘 세례 받는 성도님과 아기를 책임감을 갖고 지원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의 의무이자 특권입니다.

부활절을 맞아서 온 세상에 새로운 생명이 전파되길 원합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폭력, 미움, 시기, 불의, 차별 등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모두 해결하셨건만 여전히 세상은 그것들을 손에 쥐고 쩔쩔매며 싸우고 갈등합니다. 세상뿐만 아니라 우리들 마음속에도 욕심과 염려와 알게 모르게 지은 죄들이 남아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함께 살펴보았듯이 그 모든 것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기 원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담대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두 번째로 살펴볼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처럼 우리들은 여전히 육체 가운데 거하지만,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모든 것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여기서 믿음은 신뢰(trust)입니다. 신뢰는 우리를 위해서 목숨까지 내어주신 예수님께 우리의 삶을 붙들어 매는 것입니다. 믿음은 또한 결단입니다. 저절로 믿어질 수 없습니다. 믿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매 순간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듯이 매 순간 예수님을 의지하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은 예수님의 길을 함께 걷는 동참입니다. 믿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삶에 참여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을 만드는데 동참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죽으면 사는 것이 기독교의 신비입니다. 내려놓으면 얻게 되고 나를 비우면 예수님으로 채워지는 것이 신앙의 세계입니다. 물론 십자가를 지고 걷는 갈보리 언덕길이 힘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길을 가는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교회가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도우면서 함께 걷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나서 부활의 영광을 맛보기 원합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He is risen!) -河-

그리스도와 함께 (1)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지금 구원해 주소서”)>라고 외쳤습니다. 구약의 예언대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대우한 것입니다. 백성들은 죽은 사람까지 살려내신 예수님께서 로마권력을 물리치고 그들이 간절히 바라던 메시야 왕국을 세워주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각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정치범 또는 강도들이나 달리는 수치의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모두 담당하시고 속죄 제물로 죽으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구원이 아니라 온 인류를 향한 구원 계획을 갖고 세상에 오셨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언하신대로 사흘 만에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사망권세와 세상을 지배하는 악한 세력들에 대해서 승리하신 것입니다.

이번 주간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기억하며 동참하는 고난주간입니다.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우리의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기 원합니다. 우리들 신앙이 대체로 이기적이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들 자신을 지향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가르쳐주는 온전한 신앙은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번 고난주간에는 하나님을 사모하고 바라보기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마음에 품고 그 십자가 앞에 나가기 원합니다. 예배는 물론 삶의 중심을 예수 그리스도로 삼는 것입니다.

고난 주간을 보내면서 오늘 본문인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한 단어 한 단어, 각 구절과 표현들을 꼼꼼히 읽고 말씀을 곱씹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과 똑같이 고백하면서 부활절을 맞기 원합니다. 바울은 이제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없습니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그의 삶에 드러납니다. 바울의 과거도, 그가 범한 죄들도, 그를 유혹하는 악한 세력들도, 그를 핍박하고 힘겹게 하는 모든 것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바울이 육신의 몸을 입고 살고 있지만 그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영은 온전히 그리스도로 옷 입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과거에 얽매입니다. 죄에 지배를 받습니다. 악한 영이 우리를 시험하고 유혹합니다. 자아가 강해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지만 여전히 자신이 주인으로 살아갑니다. 염려와 근심을 온 몸으로 느낍니다. 두렵습니다. 바울은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십자가에 모두 던졌습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믿었습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십자가의 능력에 동참했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부활절을 맞이합니다. 부활은 죽음의 세력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요 새로운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아남으로 온전히 변화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원합니다.-河-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8)

우리들 인생사가 꽤 복잡합니다. 인간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걸어가는 인생길도 다양하고 때로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습니다. 그때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께 나와서 도우심을 구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생길을 인도해 주신다는 믿음을 갖고 살아갑니다. 이것을 섭리(providence)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참새 한 마리가 얼마에 팔려나가는지 아시듯이 우리의 삶을 꿰뚫고 계시며 결국에는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우리들이 그럴 자격이 있기보다 하나님께서 선하시고 그를 믿는 백성들을 무척 사랑하셔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시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우리들 자신과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하는 것이 신앙의 여정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믿음을 갖고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빛으로 소금으로 세상에 보내셨음을 믿고 세상 속에 녹아들어갑니다. 동시에 세상 속에서 거룩하신 하나님 백성으로 구별된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멋진 모습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창세기의 요셉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세상 속에서 지혜롭게 살아남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서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지만 이름이 바뀌고 이집트 제사장의 딸과 결혼을 하면서도 살아남았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이집트 총리까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고 성경은 그 자체를 두고 그를 형통한 자라고 불렀습니다. 이집트 바로왕 역시 요셉을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자라고 불렀습니다. 이처럼 요셉이 이집트에서 살아남은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요셉을 통해서 그의 아버지 야곱과 가족들이 이집트로 이주하게 됩니다. 갑작스레 형들을 대면한 요셉이 서두르지 않고 절차를 밟으면서 형들과의 용서와 화해를 시도합니다. 마음 깊은 곳에 있었던 응어리를 풀어낸 후에 형들에게 자신이 요셉임을 밝힙니다. 그 과정에서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습니다. 자신을 이집트에 보내신 것은 아버지와 가족을 구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과 온 가족을 고센 땅에 정착시킵니다. 그곳은 이집트 사람들은 가기 싫어하지만 목축을 하기에 적합한 땅입니다. 이집트에 와서 나그네로 살면서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으면 자기 가족들을 따로 한적한 곳에 정착시켰을까요? 아이러니컬하게도 이것이 이스라엘이 400년 동안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게 된 시작입니다. 하지만 그 긴 종살이 동안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모세를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들 각자는 물론 세상 속에도 임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어떤 삶의 모습이든지 결국에는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 믿음과 지혜를 요셉을 통해서 그동안 배웠습니다. 우리들 역시 요셉처럼 주도적으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과 긍정적인 태도를 갖고 세상에서 근사하게 살아야합니다. 참빛 교회 식구들께서 좋으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날마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자로 살아가시길 기도하겠습니다. -河-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7)

신앙생활은 마라톤과 같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여러 가지 기적들도 나오고 한 번에 모든 일이 해결되는 듯 하지만 거기까지 이르기에 인고(忍苦)의 시간이 있었고, 때로는 정상에 섰다가도 다시 추락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이러한 예들을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서 발견하면서 인생이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배웁니다. 동시에 창조주되신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인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고 변덕스러운지를 깨닫습니다. 그때마다 언제나 거기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다시금 하나님 품에 안겨서 “주님,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뿐입니다. 이렇게 살아계신 하나님 바라보면서 주어진 인생길을 자기 속도대로 걷기도 하고 때로는 뛰는 것이 신앙의 여정입니다.

형들에 의해서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온 요셉의 인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셔서 가는 곳마다 형통했습니다. 가정의 총무였던 그가 이집트 제국의 총리가 되는 펼쳐지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신앙의 갈등은 심해졌고 히브리 사람 요셉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세력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겼습니다.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간 후 20년의 시간이 지나고 첫째 아들 므낫세를 낳으면서 비로소 고향에 대한 마음을 접고 이집트에 정착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셉 앞에 열 명의 형들이 나타납니다. 아버지와 형들이 살던 가나안 땅에도 극심한 가뭄이 닥쳤고 아버지 야곱의 분부대로 양식을 구하러 형들이 이집트에 온 것입니다. 형들은 자신이 노예로 팔아버린 동생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있으리라고 상상하지 못했기에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금방 형들을 알아보았습니다. 형들의 무감각과 요셉의 알아차림이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요셉은 형들을 거칠게 다룹니다. 형들에 대한 옛 감정이 되살아나서 그것을 조절할 필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관계가 단숨에 회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한 용서와 화해를 위해서 거쳐야 할 과정이 꼭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거칠게 다루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시므온을 볼모로 잡고, 동생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명령합니다. 형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20년 전 자신들이 동생 요셉에게 했던 일을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형들의 말을 옆에서 들은 요셉은 울컥합니다. 하지만 아직 형들 앞에 자신을 드러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가뭄이 계속되면서 아버지 야곱은 요셉의 요구대로 사랑하는 아들 베냐민을 다른 아들들과 함께 이집트로 보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베냐민을 지켜주시길 기도합니다. 이집트에 도착한 형들은 세 번씩이나 요셉에게 몸을 굽혀 절합니다. 요셉의 꿈이 이뤄진 것입니다. 친동생 베냐민을 본 요셉은 감정을 조절할 수 없을 정도로 격해 집니다. 하지만 아직도 준비가 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잃고 20년을 상심하면서 살았는데 이제 나머지 아들들을 이집트로 보내고 노심초사 기다릴 뿐입니다. 형들은 영문도 모르고 이집트에서 당하고 있습니다. 요셉 역시 형들과 완전한 화해와 용서가 가능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하면서 아슬아슬하게 형들을 마주합니다. 이 모든 상황을 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요셉의 꿈을 이뤄 가시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본문 속에 깃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요셉과 그의 가족의 삶이 하나님에 의해서 빚어집니다. 마라톤과 같은 삶이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니 소망이 생깁니다.-河-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6)

사순절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습니다. 사순절에 해당하는 영어 <렌트, Lent>는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사순절을 지나치게 금욕하고 절제하는 어두침침한 느낌으로 묘사하곤 했습니다. 물론 사순절 기간 동안 자신을 돌아보고 행여나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부분이 있다면 회개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순절은 예수님의 고난을 넘어서 부활을 준비하고 대망하는 기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근사하게 살기로 결단하고 그것을 실제로 실천하는 절기입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찾아가서 따뜻한 말 한마디 또한 작은 선행을 실천하시면 좋겠습니다.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가정의 총무, 감옥의 총무를 거쳐서 당시의 제국 이집트에 총리가 되는 펼쳐지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형들에 의해서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는데 총리가 되었으니 고진감래(苦盡甘來)의 표본이 될 만합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요셉에 대한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그의 성공에 있지 않습니다. 창세기 본문은 요셉이 총리가 된 것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삶이 형통했다고 말합니다.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가서 보디발 집의 노예로 있을 때도 형통했습니다. 그의 인생 최악의 순간일 수 있는 감옥에서 죄수로 살 때도 형통했습니다. 요셉에게 있어서 성공 또는 형통함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었지, 이집트의 총리가 된 것만이 성공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요셉은 형통한 삶을 살았습니다.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된 이후에도 그의 삶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그가 30년 동안 믿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이집트 총리로서의 생활방식이 부딪쳤습니다. 이집트 태양신 또는 왕의 형상이 새겨진 반지를 껴야했습니다. 이집트 귀족들이 입는 옷에도 태양신의 문양이 들어가 있었을 것입니다. 왕이 타는 수례를 내주었지만 거기도 이집트 신들의 형상이 새겨져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요셉이지만 사방에 이방신들의 우상들이 있고 바로는 물론 태양신을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야했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산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지어준 이름 요셉도 “사브낫바네아”라는 이집트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요셉이 이집트의 모든 것을 주관하는 청지기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름이 바뀌는 것은 그가 완전히 이집트 사람이 되었다는 표시입니다. 바로왕은 요셉을 이집트의 제사장 딸과 결혼시킵니다. 이집트에서 가장 유명하고 지위가 높은 제사장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요셉은 바로왕에 의해서 이집트사람으로 변해갑니다.

요셉은 두 명의 아들을 낳습니다. 첫째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모든 고난과 아버지집의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는 뜻의 므낫세로, 둘째는 ‘하나님께서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는 뜻의 에브라임입니다. 요셉이 이름도 바뀌고 이집트 여인과 결혼하면서 세상 속에 완전히 동화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두 아들의 이름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했습니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음을 아들의 이름에 새겨둔 것이 인상 깊습니다. -河-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5)

지난주일 오후에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참빛 가족들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참빛 보이스 두 번째 시간을 가졌습니다. 작년에 있었던 첫 번째 시간에는 뇌에 대해서 배웠고, 이번에는 노화와 면역을 연구하는 형제들께서 훌륭한 정보를 알려주셨습니다.

우리 몸에서는 끊임없이 쓰레기가 만들어지고, 그것을 청소하는 기능은 나이가 들면서 약화된다는 의견에 우리 모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우리 몸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걸작품이니 쓰레기를 잘 소제되고 건강한 몸을 유지해서 더욱 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적당히 먹고, 잠을 푹 자고, 규칙적인 운동과 무엇보다 깊은 기도와 묵상을 통해서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우리 몸안에 어떤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마치 군대조직처럼 일사불란하게 대처하는 면역기능이 있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장에 들어있는 공생균들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장을 모두 펼치면 테니스 코트만큼 넓다는 설명에 창조의 신비를 다시금 느꼈습니다. 이 세상에서 건강하게 사는 것이 큰 복입니다. 아프면 자신은 물론 주위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삶의 질이 뚝 떨어집니다. 마음껏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참빛 교회 식구들 모두 건강하시길 바라고 바쁜 중에도 재밌고 쉽게 설명해주신 발제자들, 또한 기발한 질문으로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켜주신 모든 성도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주인집 아내의 유혹을 거절해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요셉은 감옥에서도 범사에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 자체가 형통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요셉의 생활태도가 간수의 눈에 들어서 요셉은 감옥에서도 총무의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요셉은 감옥에 있는 사람들과 두루 친분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왕에게 술을 공급하는 관리와 떡을 공급하는 관리가 꿈을 꾸었다고 요셉에게 말해줍니다. 요셉은 명쾌하게 두 사람의 꿈을 풀어줍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야곱의 집에서 꿈을 꾸었던 요셉이 이제는 꿈을 해몽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셉이 해석한 대로 한 사람은 죽고 다른 관리는 사흘 후에 복직됩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요셉이 이집트 바로왕의 꿈을 해석하게 됩니다. 요셉의 꿈 풀이대로 복직된 관리가 왕에게 히브리 소년 요셉을 소개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요셉의 인생을 인도하고 계심을 봅니다. 바로왕의 꿈은 7년의 풍년이 있은 후에 7년의 흉년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7년 풍년동안 흉년을 잘 대비해야 한다고 요셉이 조언합니다. 바로왕은 요셉의 말을 그대로 듣습니다. 그뿐 아니라 요셉을 이집트 총리로 세워서 앞으로 닥칠 흉년을 대비하게 만듭니다.

요셉은 보디발 집의 가정총무, 감옥의 총무를 거쳐서 이제 한 나라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요셉의 인생이 동심원처럼 펼쳐집니다. 이러한 요셉을 보고 이집트 관리들은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자“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 속에서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입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