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8장 : 성령의 탄식

로마서 8장에는‘성령’이라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무려 스물한 번 등장하는데 로마서는 물론 성경 전체에서 한 장(chapter)에 성령이란 표현이 가장 많이 나오는 횟수일 것입니다. 성령뿐이 아닙니다. 로마서 8장에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하나님의 사역이 잘 나타납니다.

육신이 할 수없는 것을 성부 하나님은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죄인의 모습으로 세상에 보내셨고, 육신에 죄를 정하셔서 그를 믿는 자들을 죄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은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모두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성자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양자의 영을 받으므로 하나님을 향해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로마서 8장에서 성령은 “생명의 성령“ ”하나님이 영“ ”그리스도의 영“으로 다양하게 불립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 안에 거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생명과 평안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들을 괴롭히는 죄의 행실에서 해방되도록 돕습니다. 이처럼 로마서 8장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 모두 소개되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려줍니다. 25-26절은 18절부터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 얽매여 있던 우리가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해방되었습니다. 사망으로 이끄는 육신의 생각에 머물지 않고 생명과 평안을 주는 영의 생각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니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을 향해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의 모습이나 삶이 하나님 자녀의 완전한 모습은 아닙니다. 모든 세상이 죄로부터 완전하게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속에 살면서 종종 탄식이 나오고 한숨이 나옵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피조물들도 탄식한다고 본문은 말합니다(22절).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질병에서도 해방되고, 근심과 염려가 없는 말 그대로 천국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에서 매우 힘들게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현재의 고난이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지만 신음하고 탄식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도 쉽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의 탄식과 약함을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아신다고 말합니다. 신음이 나오고 탄식이 나올 때는 기도도 나오지 않고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다급한 상황입니다. 그때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니다. 우리들이 탄식하고 신음하듯이, 성령 하나님께서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기도해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모두 이해하시고 공감하신다는 뜻입니다.

무엇보다 성령 하나님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합한 기도입니다. 하나님과 성령이 통하시니 성령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탄식이 하나님께 전달됩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의 사역입니다. 지쳐서 기도할 수 없을 때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는 성령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더욱더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 원합니다. -河-

로마서 8장 : 생명과 평안

지난 시간에는 로마서 8장의 첫 번 네 구절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은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케되었다는 말씀을 나눴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누리는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이자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물론 그리스도 안에 있어도 육체에 죄가 침투하면 순간적으로 죄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이 우리를 다시 일으켜줍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날마다 새로운 생명의 삶을 살아갑니다.

오늘 읽은 로마서 5-8절에서는 사람을 둘로 구분합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와 영을 따르는 자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여전히 죄와 사망의 법에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육신의 일을 생각합니다. 육신의 일은 세상의 쾌락과, 자신을 위한 욕심과,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교만입니다. 세상 속에서 자신만이 주인입니다. 자기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길 원하기에 하나님을 마음에 모실 수 없습니다.

반면에 영을 따르는 자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입니다. 여기서 영은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을 가리킵니다. 9절에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영이 마음에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인생의 주님(Lord)으로 영접하는 순간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의 집이 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면 11절에 있듯이 우리의 죽을 몸도 살리시는 부활의 능력이 임합니다. 이처럼 영을 따르는 사람은 성령을 마음에 모시고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습니다.

육신을 따르는 사람과 영을 따르는 사람은 확실하게 차이가 납니다. 우선 육을 따르는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 되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을 겉으로 또는 속으로 대적합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부정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고 세상의 법을 따르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그가 무슨 일을 하든지 결국 죽음으로 끝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고 성령을 쫓아 행하는 사람은 생명과 평안을 생각합니다. 생각 자체가 육신을 쫒는 자와 다릅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영원한 생명에 참예하게 됩니다.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따라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결국 평안을 되찾습니다. 순간적으로 흔들려도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회복하고 신앙과 삶을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이 그를 인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합니다.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웃에게 받은 은혜와 사랑을 나누는 삶을 살아갑니다.

영을 쫓는 자들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성령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변호해줍니다.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영원한 생명을 누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면서도 기뻐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생각으로 충만하니 생명과 평안이 그를 다스립니다. 생명의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힌 참빛 교회 식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河-

로마서 8장 : 생명의 성령의 법

어느덧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올해 우리 교회 표어가 <배우며 자라가는 교회>였습니다. 표어대로 전반기에는 전교인을 대상으로 <신앙터잡기> 성경공부를 하였고, 주일 설교에서도 참빛 성도님들의 신앙성숙을 위한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제 2014년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더욱 튼튼히 하고 새해를 맞이하기 원해서 로마서 8장 말씀을 연속해서 전하기로 했습니다.

로마서 8장은 신약성경은 물론 성경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말씀이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로마서가 16장이니 8장은 정확히 중간에 위치해 있습니다. 무엇보다 로마서 8장은 1-8장에 이르는 로마서 전반부의 결론이자 9장 이후를 열어주는 대문입니다. 로마서 앞부분을 모두 읽지 않아도 8장만 올바로 이해한다면 로마서 말씀을 쉽게 포착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로마서 8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첫 번째인 1-17절은 성령 안에서 새롭게 된 그리스도인의 지위와 삶을 설명합니다. 두 번째 18-27절은 성령의 능력으로 새롭게 된 그리스도인들이 장차 누릴 영광을 밝히 보여줍니다. 1-17절이 예수님을 믿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모습이라면, 18-25절은 장차 완성될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인들의 삶으로 미래를 지향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26-39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어느 정도로 사랑하시고 안전하게 보호해 주시는 알려주는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이처럼 로마서 8장에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관통하며 우리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1-4절은 로마서 8장의 서두이자 7장과 8장을 이어주는 다리역할을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죄로 말미암아 비참하게 무너지는 자신의 모습을 놓고 탄식했습니다.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싶지만 실제로 육체의 법에 종이 되는 자신을 보면서“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7장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표현이“육신(flesh)”입니다. 여기서 육신은 우리의 몸(body)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 지배를 받는 삶의 영역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살아가는 것이 곧 육신의 삶입니다.

바울이 육신에 침투한 죄와 그 결과를 놓고 고민했지만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바울에게 새로운 소식, 기쁜 소식이 임했습니다. 7장 25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찬송합니다. 그리고 8장 1절에서 “그러므로 이제”라고 하나님께 감사했던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이제”라는 표현은 과거의 삶이 지나가고 새로운 세상이 열렸음을 암시합니다. 바울의 고민과 비참함이 사라졌음도 예고합니다.

죄가 사람들을 정죄합니다. 여기서 정죄는 재판정에서 유죄판결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정죄함이 없다고 선포합니다. 죄가 사라졌습니다.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을 이기고 우리를 해방시켰습니다. 죄가 사망의 법을 갖고 오는데 비해서 성령은 생명의 능력을 갖고 왔습니다. 따라서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에게 자유함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보내시고 우리의 죄를 예수님께 담당시키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성령의 법은 능력이요 은혜요 사랑입니다. 할렐루야! -河-

신앙의 인물 – 땅콩 박사와 최씨부인

이번 연속설교에서는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로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본받을만한 신앙의 인물들을 차례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시간으로 땅콩박사로 유명한 조지 워싱턴 카버(Washington Carver)와 한국인 최초 해외선교사였던 최씨 부인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워싱턴 카버는 흑인 노예의 아들로 1864년에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노예상인들에게 잡혀가면서 어린 시절을 힘겹게 보냈습니다. 워싱턴 카바는 매우 총명한 소년이었습니다. 그림과 예술에도 재능이 있었고 비록 노예 신분이지만 싹싹하고 붙임성 있는 성품 때문에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림을 배우러 다니던 부부의 추천으로 흑인들을 받아주는 대학에 들어가고, 나중에는 아이오와 주립대학으로 옮겨서 농학을 공부하게 됩니다.

워싱턴 카버가 관심을 가진 분야는 땅콩이었습니다. 농부들이 땅콩을 많이 재배하고 수확하는데 보관할 방법이 없어서 버려지곤 했습니다. 대학 연구소에서 일하던 위싱턴 카버는 땅콩을 사용해서 피넛 버터를 만드는 등 땅콩을 사용한 가공식품을 발명하게 됩니다. 땅콩 연구로 유명해 진후에는 농민들의 권익을 위해서 수입땅콩에 관세를 높게 책정해야 한다는 세법개선책을 의회에서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아무런 희망이 없는 노예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평생 땅콩을 연구하면서 사회에 공헌하는 아름답고 복된 삶을 살았습니다.

번째로 살펴볼 최씨 부인 최나오미는 1873년 개성에서 출생했습니다. 당시 풍습에 따라 젊은 나이에 시집을 갔는데 남편이 술주정뱅이에 노름꾼입니다.. 게다가 아이를 갖지 못한 탓으로 시댁 어른들의 냉대도 극에 달했습니다. 어려운 삶을 살던 최씨 부인은 서양 사람들이 이상한 종교를 전한다는 소문을 들었고 선교사들이 주관하는 예배에 참석하게 됩니다. 낙천적이고 활발한 성격의 최씨 부인은 성실하게 예배에 나갔고 결국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핍박도 신앙의 힘으로 이겨냈습니다.

외출이 잦은 아내를 의심한 남편이 최씨 부인의 뒤를 쫓아서 몰래 예배에 참석합니다. 남녀가 따로 앉아 있고 선교사가 전하는 말씀이 틀리지 않은 것을 보고는 결국 남편도 예수님을 믿게 되고 나중에는 선교사 집에서 집사로 일하게 됩니다. 최씨 부인의 열심은 대단했습니다. 감리교회의 전도부인으로 임명되어서 원산 근처에 있는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자기 몸에서 낳은 아이는 없지만 어려운 아이를 양자로 들여서 친자식처럼 키웠습니다.

남편을 잃고 홀로 된 최씨부인은 시베리아 선교사로 자원했습니다. 한국인 최초로 해외 선교사가 된 것입니다. 시베리아에서 일 년 동안 선교를 하고 귀국해서 개성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면서 평생 여성운동을 펼치다가 1949년 하나님께 갔습니다. 여성의 몸으로 해외선교사로 나갈 정도의 열심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더 많은 인재를 키우는 선교사역에 힘쓴 최나오미 부인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모두 완수하면서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았던 신앙의 인물입니다.

이처럼 우리 앞에 귀감이 되는 신앙의 선배들이 계심이 자랑스럽고 도전이 됩니다. 우리들 역시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충성되고 세상에 도움을 주는 인생길을 걷기 원합니다.-河-

신앙의 인물 – 우찌무라 간조

오늘 살펴볼 신앙의 인물은 일본 기독교 역사에 토대를 놓았고 기독교는 물론 일본의 사회와 문화 발전에 공을 세운 우찌무라 간조(内村鑑三)입니다. 우찌무라 간조는 1861년 무사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는 전형적인 군인이었고, 아버지는 문무를 겸비한 학자였습니다. 일본에는 천주교가 1549년에 일찍이 전래가 되었지만 200여년간 박해를 받아서 30만 이상의 순교자를 냈습니다. 명치유신이후에도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가 금지되었다가 1873년 기독교 금령이 해제되었습니다.

우찌무라 간조가 기독교를 접하게 된 것은 삿포로 농업대학에 입학하면서 부터입니다. 그곳에는 선교사들은 물론 기독교를 믿는 학생들이 열심히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친구의 소개로 기독교 모임에 나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학 시절 우찌무라 간조는 기독교에 반대하는 아버지를 전도하기 위해서 마가복음 주석을 선물하기도 합니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서양종교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주석을 모두 읽고는 예수님을 믿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 이후에 우찌무라 간조를 통해서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우찌무라 간조는 미국으로 유학을 왔습니다. <우찌무라 간조 회심기, How I became a Christan>라는 책에 그가 미국에 와서 경험한 일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님을 마음속에 진심으로 받아들인 것도 미국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그가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은 곳이 바로 샌프란시스코였습니다. 우찌무라 간조는 미국에 처음 왔을 때의 느낌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1884년 11월 24일 새벽에 나는 황홀한 눈으로 기독교 국가의 희미한 윤곽을 처음으로 포착했다. 다시 한 번 나는 내가 묵었던 3등 선실로 내려가 거기서 무릎을 꿇었다. 여러 사람들의 흥분에 뒤섞이기에는 너무도 진지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나지막한 해안 산맥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자 내 꿈이 실현되었다는 생각에 감사하는 마음이 나를 압도했고,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금세 금문교를 지났고, 눈앞에 펼쳐진 굴뚝과 돛대들은 모두 하늘을 향해 우뚝 서 있는 교회 첨탑처럼 보였다.”

미국에 온 우찌무라 간조는 성경식 이름이 많이 있는 것에 다시 한 번 놀랍니다. 사람들이 성스러운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을 보고 또 한 번 놀랍니다. 소매치기도 당하고 처음 미국에 온 대가를 혹독하게 치릅니다. 팁을 요구하는 것을 보고는 “자선까지 물물교환을 하는 이 나라에 대해 놀라움과 씁쓸함을 감추지 못하고 망연자실”했다고 적었습니다. 시카고를 거쳐서 보스턴에 간 우찌무라 간조는 애머스트 대학과 커네티컷 하드포드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일본으로 돌아가서 신학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지난주에 배운 썬다싱이나 종교개혁자 루터가 한 순간에 예수님을 체험한 것과 달리 우찌무라 간조는 끊임없는 고민과 질문을 통해서 차근차근 기독교의 진리를 깨우쳤습니다. 일본에서는 신앙의 동지들과 기도하고 말씀을 읽으면서, 미국에 와서는 그의 스승들과 목사들과 교제하면서 신앙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무엇보다 성경 말씀에 기초한 신앙을 중요하게 여겼고 기독교를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사명감을 갖고 평생을 살았습니다.“맑고 기분 좋은 날이다. 고요하다. 아직도 너무 외로울 때가 많지만 나의 하나님을 의지한다.”그의 일기 중에서.-河-

신앙의 인물 – 썬다싱

우리가 믿고 있는 기독교 신앙은 2천년 교회사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물론이고 교회사 속에 등장하는 신앙의 선배들 역시 우리에게 커다란 귀감이 됩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와 그의 동역자 필립 멜랑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일으키셔서 타락한 중세 가톨릭에 대항하는 프로테스탄트 개신교를 탄생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성취하심을 보여준 좋은 예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인물은 인도의 성자라고 불리는 썬다싱입니다. 썬다싱은 1889년 인도의 핀잡 람플이라는 작은 동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종교심이 매우 깊어서 아들이 자신들이 믿는 시크교의 수도사가 되길 원했습니다. 특별히 마음이 곱고 지혜로웠던 그의 어머니는 썬다싱이 열네 살 때 돌아가셨지만 썬다씽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썬다싱은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종교심이 깊은 사람으로 자랐습니다.

썬다싱은 마을에 있는 선교사들을 대적했습니다. 선교사가 전해준 성경을 불사르고 그들의 전도를 애써 뿌리치면서 자신이 믿던 종교의 수도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신이 강림하지 않으면 새벽기차에 몸을 던져 죽겠다는 결심을 하고 신의 임재를 구합니다. 그때 이상한 빛이 방을 비췄습니다. 불이 난 것처럼 환한 빛이었는데 썬다싱은 그 빛 속에서 자신이 믿던 신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 예수님을 만났던 사도바울을 연상시킬 정도입니다.

썬다싱은 세례 받고 30일 만에 성경 하나 들고 전도자의 길을 떠났습니다. 수많은 고난과 핍박을 무릅쓰고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목숨 걸고 전했습니다.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다니면서 손과 발에 동상이 걸리고 추위와 배고픔이 밀려왔지만 영혼을 향한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습니다. 목숨의 위협을 당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번번이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주셨습니다.

한번은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출신의 스토크라는 수도사를 만났습니다. 그때는 썬다싱이 계곡을 다니다가 쓰러져서 간신히 목숨을 구했던 때였는데 스토크 선교사가 편하게 예수를 믿지 왜 고생을 사서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선다씽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답니다:“나는 참 행복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생하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우리들의 신앙을 돌아봅니다. 썬다싱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 편하게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신앙은 태만해져있고 불평과 불만을 입에 달고 삽니다. 영혼구원에 대한 열심도 많이 식었습니다. 기독교인은 목숨을 내놓고 예수를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신앙은 매우 이기적입니다. 내 욕심을 먼저 챙깁니다. 썬다싱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받은 은혜를 이웃 사랑으로 실천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길을 꿋꿋하게 걸어가기 원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꼭 붙들고 나가는 근사한 참빛 식구들 되시기 바랍니다.-河-

종교개혁 주일에

개신교에서는 10월 마지막 주일을 종교개혁주일로 지킵니다. 1517년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그 성당에 당시 로마 가톨릭의 타락과 비리를 고발하는 95개조의 반박문을 게시하면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날이 바로 10월 31일이었습니다. 개신교회가 시작된 날입니다.

마틴 루터는 당시의 가톨릭교회가 면죄부를 팔면서 교인들의 돈을 착취하고, 교황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이 정치 세력화되는 것을 보면서 분개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물론 교회의 사명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던 마틴 루터는 타락한 교회를 반박하는 95개 조항을 조목조목 기록해서 비텐베르그 성당에 게시했고 이 사건이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마틴 루터로부터 시작된 개혁의 불꽃은 독일은 물론 온 유럽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교회가 하나님보다 위에 올라가있고, 백성들 위에 군림하던 종교지도자들의 타락에 환멸을 느낀 백성들이 종교개혁에 동참했습니다.“오직 신앙으로”“오직 성경으로”“오직 은혜로”라는 캐치 프레이즈 그대로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고, 타락한 가톨릭 교회에 저항하는 종교개혁이 펼쳐진 것입니다.

개신교라는 것은 신앙의 개혁을 추구하는 교회라는 뜻입니다.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 부패하게 마련입니다. 부와 권력을 갖게 되면 하나님을 뒷전으로 옮겨놓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려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회개하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어서 날마다 교회의 모습을 돌아보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교회가 되길 기도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개신교를 프로테스탄트라고 합니다. 당시에 철옹성 같았던 로마 가톨릭에 저항해서 종교개혁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잘못 된 것, 하나님의 뜻에 위반되는 교회와 세상의 모습에 개신교는 저항합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조용하게 도운 인물이 오늘 우리가 살펴볼 필립 멜랑톤입니다. 그는 루터보다 14세나 아래여서 마틴 루터를 스승으로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멜랑톤은 학자였습니다. 루터가 과격하게 몸으로 종교개혁을 주도했다면 멜랑톤은 학문적으로 또한 그의 삶을 통해서 루터를 돕고 종교개혁에 동참했습니다. 루터가 당시 가톨릭 교회와 싸우면서 종교개혁을 주도했다면 멜랑톤은 타협과 평화를 주장하면서 종교개혁의 속도를 조절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누군가 먼저 시작할 때 불꽃이 타오를 수 있음을 루터를 통해서 배웁니다. 하지만 한 사람이 개혁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앞에서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고, 뒤에서 은밀하게 돕는 손길도 있어야 하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함께 참여하는 발걸음도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진정한 혁이 성취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주일을 맞아서 우리들 개인의 신앙과 삶이 새로워지길 원합니다. 개신교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이 임하길 기도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주님의 나라가 되길 소원하면서 그 길로 나가기 원합니다. 우리 참빛 교회도 날마다 새로워지고 주님의 나라를 이루는데 귀하게 쓰임받길 원합니다.-河

시편 119편 읽기 : 내 길의 빛

시편은 감정을 실어서 읽어야 하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말 그대로 시(詩)들을 모아놓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시 속에는 여러 가지 상징들이 들어있습니다. 시인들만이 사용하는 표현들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시는 읽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야 합니다. 성경 말씀 가운데 시편이 바로 그렇습니다.

시편은 곱씹으면서 읽어야 합니다. 한 장이 짧다고 해서 서둘러 읽거나 대충 넘어가면 하나님 말씀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없습니다. 한 말씀 한 말씀이 귀중합니다. 한번 읽고 두 번 읽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시편 말씀의 단맛을 경험합니다. 그때 우리도 하나님 말씀이 송이꿀보다 달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시편은 소리 내서 읽어도 좋습니다. 시를 낭송하듯이 하나님 말씀인 시편을 소리 내서 읽을 때 입으로 나온 소리가 다시 우리들 귀를 통해서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경험합니다. 소리 내서 읽으면 눈으로 읽는 것보다 훨씬 더 하나님 말씀이 우리 안에 울려 퍼집니다. 물론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소리 내서 시편말씀을 차근차근 읽으면 은혜가 더욱 풍성해 집니다.

시편은 우리들의 삶과 직접적으로 맞닿아있습니다. 시편말씀을 읽다보면 우리의 마음을 잘 대변해 주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아서 답답해합니다. 사람들이 자꾸만 괴롭혀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더 잘됩니다. 그때마다 스스로 주눅이 들고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섭섭함과 죄송함이 교차합니다. 나라를 잃고 하나님을 예배할 성전을 잃은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탄식합니다.

늘 힘든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삶 속에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시고, 경험하게 하시는 하늘의 기쁨입니다. 그때 우리도 시편 말씀처럼 하나님을 향해서 손을 높이 들고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 만물을 보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이뤄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 백성이 된 것이 가장 큰 감사입니다. 이처럼 시편에는 감사와 기쁨, 찬양과 고백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오늘 살펴보는 시편 119편 105절 말씀에서는 하나님 말씀이 우리들 발의 등이요 길의 빛이라고 가르쳐줍니다. 발의 등은 가까운 거리를 비춥니다. 길의 빛은 먼 인생길을 비춰주는 전조등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들 인생길의 안내자요 지침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말씀이 가르쳐준다고 시편기자가 고백합니다.

시편 119편 속에 나타난 시편 기자의 상황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비방합니다. 기도의 응답이 지체됩니다. 순간순간 생기는 탐욕과 헛된 것을 향한 욕망이 자신을 괴롭힙니다. 때로는 사망의 골짜기를 걷는 느낌이 듭니다. 그 순간에 시인은 하나님 말씀을 붙잡습니다. 자신의 마음과 삶에 말씀을 세웁니다. 말씀으로 살아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으로 주의 말씀이 발의 등이요 길의 빛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은혜와 능력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10월이 시작되었습니다. 올 가을에는 온 교회가 주의 말씀에 깊이 빠져봅시다. 할렐루야! -河-

시편 119편 읽기 : 내가 사랑하는 계명들

시편 119편이 무려 176절에 달하는 성경에서 가장 긴 장이지만 한 구절 한 구절 마음을 열고 읽다보면 말씀의 은혜가 곳곳에 배어있음을 발견합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33-40절에서는 주의 말씀을 세워주시길 간구했습니다. 탐욕이 밀려오고 헛된 세상 것들에 곁눈질을 하면서 살아가지만 주님의 말씀가운데 새로운 생명을 주시길 간청했습니다. 사람들의 비방으로 두려움이 밀려오지만 하나님 말씀에 삶을 붙들어 매고 그 안에서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길 기도했습니다.”나를 살아나게 하소서“라는 시편 기자의 기도소리가 애절하게 들려왔습니다.

오늘은 이어지는 41-48절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42절에서 시편기자를 비방하는 사람들과 이유를 발견합니다. 시편기자의 상황이 쉽지 않은 것을 두고 세상 사람들이 그를 비방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세상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왜 그런 일이 닥치느냐?”고 비아냥거립니다. 자신의 처지가 좋지 않기에 떳떳하게 답변할 수 없으니 마음이 편치 않고 심하면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시편기자의 상황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이 사람은 왕들 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직무를 갖고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직책을 갖고 있는데 어려움이 생기니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기가 더욱 쉽습니다.

이런 상황은 우리 모두 세상 속에서 종종 경험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세상의 기준에 딱 맞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세상의 부귀영화가 따라오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고 그 힘과 지혜로 세상에서 근사하게 사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하나님을 열심히 믿어도 세상에서는 힘겨운 고난의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때 주눅이 듭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지 않은 말을 하면 마음이 상합니다. 이런 어려움이 계속되면 혹시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까 두려운 마음도 생깁니다. 세상을 사는 주님의 백성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어려움입니다.

이런 어려운 순간에 시편기자는 주님의 말씀을 꼭 붙들고 있습니다.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과 구원을 베풀어주시길 기도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구원이 임하면 자신이 겪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주님의 말씀 즉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자신을 비방하는 사람들에게 대답하길 원합니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입에서 하나님 말씀이 떠나지 않길 기도합니다.

시편 기자는 주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특징입니다. 그때 자유함이 임합니다. 말씀을 세우고 말씀에 붙어서 행하면 삶의 기준과 가치관이 확실해 집니다. 반면에 말씀을 뒤로 한 채 세상 것들을 둘러보면 도리어 세상에 종이 되고 맙니다. 시편기자는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도리어 자유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유함 속에는 “넓은 곳”을 다닌다는 뜻도 들어있습니다. 말씀으로 신앙과 삶의 지경을 자유롭게 넓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주님의 말씀을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이라고 부릅니다. 말씀을 사모할 뿐만 아니라 말씀을 사랑합니다. 말씀 안에서 기쁨을 누립니다. 주의 말씀을 향해서 손을 듭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립니다. 시편기자가 하나님 말씀을 얼마나 사모하고 사랑하는 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우리도 이 가을에 주님의 말씀 앞에서 손을 들고 읊조리면서 말씀의 은혜를 깊이 누리기 원합니다.-河-

시편 119편 읽기 : 말씀을 세우소서

<신앙 터잡기>에 대한 네 번의 말씀을 마쳤습니다. 참빛 식구들과 우리 교회의 신앙의 터가 깊고 넓게 자리 잡아서 결코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신앙으로 자라가길 원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끊임없이 사모하고 주님께 날마다 가까이 가려는 말씀읽기와 기도가 있을 때 가능합니다.

지난 수요예배때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말씀인 씨가 좋은 밭에 뿌려져야 열매를 맺습니다. 길가에 뿌려진 말씀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가 와서 빼앗아 갑니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받을 때는 기쁘지만 어려움이 닥치면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시들어 버립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는 인생의 가시덤불인 염려, 욕심, 쾌락, 재물에 대한 유혹으로 인해서 크게 자라지 못하고 중간에 질식해 버립니다. 여기서 씨는 하나님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러고 보니 말씀이 우리 안에 어떻게 자리잡느냐에 따라서 신앙은 물론 삶이 결정됨을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 서너 주는 시편 119편을 통해서 하나님 말씀의 소중함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시편 119편은 176절로 구성된 성경에서 가장 긴 장(障)입니다. 또한 히브리어 본문을 보면 알파벳 순서로 각 문단이 시작되는 운율이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시편 1편과 더불어 대표적인 지혜시에 속하는데 특별히 시편 119편은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강조합니다. 176절에 달하는 각 구절마다 하나님 말씀을 가리키는 표현들이 매번 등장합니다. 여호와의 율법, 여호와의 증거, 주의 법도, 주의 판단, 주의 계명등입니다. 기회가 되시면 시편119편을 펼쳐놓고 각 구절마다 말씀과 관련된 표현들에 동그라미를 치면서 살펴보십시오. 하나님 말씀의 중요성을 다양한 표현을 가지고 설명하고 강조하고 있음을 발견하실 겁니다.

176절에 달하는 시편 119편을 모두 살펴볼 수 없기에 듬성듬성 <배우며 자라가는 교회>라는 우리 교회 표어에 맞는 말씀들을 택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시편 119편이 기록되던 시대는 이스라엘 민족이 나라도 잃고 신앙도 무너진 위기의 시대였습니다. 나라가 어려우니 개인의 삶도 어렵습니다. 고초의 삶이 지속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꼭 붙들고 견뎌야 하는데 그것마저 힘겹습니다. 그때 시편 기자는 하나님 말씀이 생명줄임을 깨우쳐줍니다.

오늘 본문(33-40절)에서는 시편 기자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대개 기도는 우리들 개인의 문제나 세상의 문제를 하나님께 아뢰고 해결책을 간구하게 마련인데, 본문 속의 시편기자는 하나님 말씀을 가르쳐주시고, 깨닫게 해주시고, 행하게 해 주시길 간구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켜 행하기 원하는 소원을 기도로 표현합니다.

시편기자는 자신의 본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즐거워하고 말씀을 따라 살고 싶지만 그의 마음은 자꾸만 탐욕을 향하고 있습니다. 아침안개처럼 헛된 것에 마음과 힘을 쏟고 있습니다. 거기서 돌이키고 싶은데 자신의 의지로서는 역부족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사모합니다. 말씀의 능력으로 주님의 길을 걷고 싶어서 도움을 구합니다. 생명의 길로 나가고 싶은 것입니다. 시편 기자 마음에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환경도 그리 좋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비방합니다. 사람들의 이목이 두렵습니다. 세상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고역입니다. 그때도 시편기자는 말씀을 사모합니다. 말씀으로 세워지고 의롭게 되는 인생이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말씀 속에 은혜와 능력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