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베드로 (2) :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베드로는 처음부터 예수님의 수제자가 될 성품이나 자격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성급하고 때로는 혈기가 앞섰고 세심하게 준비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었고, 무엇보다 초대교회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부족은 부족한 대로, 그의 장점은 장점대로 살려주시면서 복음을 전하는 증인으로 빚어 가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완벽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어찌 보면 교만입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하나같이 똑같은 모습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독재자들이 백성들을 조종하려는 일종의 계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완벽을 요구하시지 않고 각자 갖고 있는 은사와 재능대로 사용하십니다. 성격이 급하면 급한 대로 적합하게 쓰시고, 침착한 사람은 성품 그대로 주님의 일에 쓰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가 급한 성격으로 쓰임 받았다면, 요한은 침착한 성품으로 90넘게 살면서 요한 계시록까지 기록하는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의 성품대로 빚어 가시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누가복음 5장에 다시 등장합니다. 베드로가 동료 어부들과 함께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그날따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해변가에서 그물을 씻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많은 무리들이 모여 있었고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에 올라가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베드로도 그물을 씻으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말씀을 모두 전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잔뼈가 굵은 베드로에게 나사렛 목수 출신인 예수님께서 훈수를 두신 격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깊은 곳으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하신 것은 밤새도록 그물을 드리웠다가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실패의 현장으로 들어가서 다시 시작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깊은 곳으로 배를 몰고 가서 그물을 던집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물이 찢어지고 배가 가라앉을 만큼 고기가 많이 잡힌 것입니다. 베드로는 동료들의 도움으로 만선이 된 배를 뭍으로 끌고 옵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좋았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따랐더니 고기를 아주 많이 잡은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다음 베드로의 행동이 이상합니다. 그는 예수님 무릎 아래 엎드려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8절)라고 고백합니다. 좋아하고 감사해야 할 베드로인데 난데없이 자신은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장점이자 매력입니다.

베드로는 말씀을 듣고 그물을 내려서 고기가 많이 잡히는 순간 자신에게 말씀하신 분이 메시야 예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 자신이 작아집니다. 자신은 예수님 앞에서 낮고 낮은 죄인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람낚는 어부로 부르십니다. 베드로는 모든 것을 남겨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예수님의 수제자가될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근사한 모습이 베드로에게 그대로 나타납니다. 시몬이 아니라 게바의 모습입니다.-河-

시몬 베드로 (1) : 장차 게바라 하리라

앞으로 신약성경에서 사도바울과 더불어 매우 중요한 인물인 베드로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면, 사도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아서 예루살렘 이외의 소아시아와 로마 도시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3년을 함께 지냈고,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는 초대교회의 핵심 인물이 되었습니다. 사도로서 베드로의 권위를 따를 자가 없을 정도였기에 사도 바울도 예루살렘에 와서 그에게 선교보고를 했습니다.

하지만 복음서에 나타난 베드로는 완벽하거나 높은 지위를 가진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갈릴리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였습니다. 결혼을 해서 아내가 있었고 몸이 허약해서 병상에 있는 장모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동생 안드레와 어부 일을 했고 같은 마을의 요한과 야고보 형제와 동업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큰 부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난에 시달릴 정도로 힘겨운 삶을 살지도 않았던 보통사람입니다.

대부분의 뱃사람들이 그렇듯이 베드로 역시 다혈질에 가까운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30여년 고기를 잡으면서 생긴 팔의 단단한 근육만큼이나 그의 성품도 꽤나 단단해서 자신의 의견을 거침없이 얘기하고,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겠다고 말하고는 몇 시간도 채 안되어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부인하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마음 깊은 곳에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기에 결국에는 초대교회의 지도자로 우뚝 섰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죄송함과 감사의 마음을 갚기 위해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베드로의 원래 이름은“시몬”입니다. 시몬은 당시에 매우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처음 베드로를 만난 자리에서 장차 “게바”로 불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게바는 예수님 당시에 사용되던 아람어이고, 베드로는 헬라어로서 모두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는 예수님과 비슷한 연배의 갈릴리 어부였습니다. 그의 이름만큼이나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한 눈에 보아도 그에게 반석과 같은 믿음이나 견고함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동생 안드레 때문에 예수님께 나왔건만 예수님께서 그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온 베드로의 모습에서 세심함이나 침착함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반석(rock)이라기보다는 갈릴리 지방에 흔한 자갈(stones)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가 장차 게바(반석)이라고 불릴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베드로는 그 뜻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을 것입니다. 단순히 자신의 별명을 지어주셨다고 생각했을 뿐 베드로라는 새로운 이름이 무슨 의미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베드로 속에서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선뜻 따라나섭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열심이고 헌신입니다.

베드로는 그의 이름대로 교회를 세우는 반석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처음 보셨을 때 그가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알고 계셨기에 반석이라는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새로운 인물,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천국의 열쇠를 갖고 이 땅에 교회를 세우는 귀한 사역을 감당할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구원자되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베드로에게 임한 축복입니다. 평범한 갈릴리 어부 시몬이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 게바가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河-

성령의 임재와 역사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하늘나라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함께 모여 기도하면서 성령이 오시길 기다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각자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전혀 새로운 사람들이 되어 있어서 예수님 말씀대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성령이 임하길 기다렸습니다.

생각같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성령이 임할지는 알려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단지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을 뿐이니 그 약속을 붙잡고 마냥 성령을 기다린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제자들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렇게 열흘이 지났고 그 때는 유대인들의 3대 명절중의 하나인 오순절이었습니다. 오순절에는 많은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믿는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을 찾았습니다. 예루살렘에는 각기 다른 나라 말을 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제자들은 여전히 성령을 기다리며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임했습니다. 처음 성령이 임했던 놀랍고 신비로운 사건을 사도행전 2장 1절 이하에서는 다음과 같이 알려줍니다.:“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서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여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1-4)

깜짝 놀랄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성령이 권능으로 임했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제자들은 예루살렘 시내로 나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히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복음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알아들을 수 있게 각 사람의 언어로 복음을 전합니다. 창세기의 바벨탑 사건 이후에 민족마다 각기 다른 언어를 쓰게 되었는데, 오순절 성령 강림에서 각기 다른 언어가 복음 안에서 통일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제자들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셨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생명의 복음입니다. 그동안 자기 마음대로 살았고 하나님을 무시했던 죄를 모두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심지어 유대인들을 향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한 것을 회개하라고 강력하게 경고했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삼천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베드로가 전한 말씀의 핵심은 회개하고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베드로의 권면을 받은 사람들은 성령을 체험했습니다. 가정에서부터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떡을 떼며 교제하면서 기도에 힘썼습니다.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이들은 날마다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했고 주님께서 구원받는 자들의 숫자를 날마다 더해 주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성령강림 주간에 부흥회를 갖습니다. 부흥회를 통해서 온 교회가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기를 사모하고 기도로 준비합시다. 성령을 기다리면서 한 마음으로 기도했던 제자들의 모습이 우리 안에도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河-

그리스도인의 능력 (6) : 예수님의 생명

우리는 지난 5주 동안 <그리스도인의 능력>이란 주제로 연속해서 말씀을 나눴습니다. 기독교가 세상 속에서 신용을 잃어가는 요즘 시대에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의 능력을 인식하고 그 능력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하루아침에 슈퍼맨이 되어서 온 세상을 정복하거나 아무도 따를 수 없는 초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셨지만 어쩌면 무력하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아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무너지셨습니다. 부활을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무력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십자가위에서 죽으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고 폭풍을 잠잠하게 하실 정도의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어려움이 닥칩니다. 그동안 배운 대로 사방에서 우겨쌈을 당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답답한 일이 닥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로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인생길을 가다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경험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사방에서 우겨쌈을 당해도 그대로 싸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답답하고 황당한 일을 겪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핍박을 받아서 목숨을 잃을지언정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지 않으시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꼭 붙잡고 계심을 믿기에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섭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임한 능력은 죽음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고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것임을 배웁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어려움을 당하지만 결국에는 그 속에서 소망을 발견하고, 주님의 임재와 도우심 그리고 구원해 주심을 경험합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두 가지 측면이 공존합니다. 세상의 어려움과 신앙의 여정 속에서 체험하는 어려움 즉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죽으심이 부활로 이어졌듯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의 생명이 있습니다.

질그릇에 보화가 담김으로 심히 큰 능력이 우리 안에 들어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입니다. 사망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힘입었기에 십자가의 고통을 이길 수 있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도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툭-치면 깨지는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 들어오셔서 심히 큰 능력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심히 큰 능력으로 힘차게 그리고 멋지게 살아갑시다. 할렐루야! -河-

시편의 기도 : 말씀

시편을 통해서 기도에 대한 교훈을 배우고 나누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시편의 네 가지 유형을 따라서 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는 감사시였습니다. 시편의 감사시는 하나님께서 시편기자 개인과 이스라엘 민족에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구원의 은혜,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에 대한 주님의 손길에 감사했습니다.

둘째는 탄식시였습니다. 역시 개인의 탄식과 민족의 탄식 즉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자신을 토해내는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금방 임하지 않을 때 탄식이 나왔습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막막하니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 더욱 잘되고 하나님을 믿는 자신의 삶이 힘겨울 때 하나님 앞에서 탄식했습니다. 하지만 시편에 나오는 탄식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하는 고백으로 끝이 납니다. 아직 상황이 좋아지지 않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솔직히 기도하면서 평안을 느꼈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셋째는 지난 시간에 배운 찬양시였습니다. 탄식이 우리들 안에서 생기는 기도라면 찬양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 세계와 하나님의 커다란 섭리를 발견하고 밖에서부터 주님께 드리는 경배입니다. 기도 속에 찬양이 있어야 하고, 또한 찬양 자체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기도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 때 찬양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찬양을 듣는 것도 은혜가 됩니다. 무엇보다 우리들 안에 있는 감사와 기쁨을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으로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찬양은 염려와 불안 그리고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높이 올려드립니다.

이제 오늘 마지막으로 살펴볼 시편의 기도는 말씀을 통한 기도입니다. 시편에는 지혜시라는 유형이 있습니다. 시편 1편, 37편, 119편이 대표적입니다. 시편의 지혜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실제적인 교훈입니다. 시편이 말하는 지혜 한 가운데 말씀이 있습니다. 주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 주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지혜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시편 119편은 성경에서 가장 긴 장(障)입니다. 히브리어 알파벳순으로 말씀이 기록되었고, 176절에 이르는 각 절마다 주님의 말씀을 뜻하는 표현이 들어 있습니다. 주의 말씀이 하나님 백성의 생명줄이요, 등불이요, 능력이라는 고백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할 때 말씀을 붙잡고 기도합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 속에서 주의 뜻을 분별해 내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기도에 있어서 하나님 말씀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기 위해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 말씀이 거하면 그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참빛 식구들의 기도에 하나님 말씀에서 시작되고, 말씀 가운데 응답되는 놀라운 은혜가 임하길 간절히 바랍니다. 말씀으로 우리의 기도가 풍성해 지고 깊어지길 원합니다. 올 한해 남은 날들도 무릎 꿇고 기도 살아갑시다! -河-

시편의 기도 : 찬양

시편의 기도 세 번째는 ‘찬양’입니다. 탄식과 감사와 함께 찬양은 시편의 커다란 주제입니다. 150편에 이르는 시편을 두고 요약해서 찬양과 기도라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시편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 모여서 다함께 찬양하고 기도하던 고백이자 선포였습니다.

시편의 마지막 다섯 장은 “할렐루야(주님을 찬양하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 되심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주셨고 인도해주심을 찬양합니다. 땅에서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찬양합니다. 시편의 찬양은 목소리뿐만 아니라 다양한 악기를 사용합니다. 이처럼 시편 속에서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시편을 읽다보면 앞에 표제어(타이틀)들을 만납니다. 다윗의 시라는 표제어는 시편의 주제가 어떤 인물인지 알려주는 표시입니다. 시편의 성격을 가리켜주는 표제어도 있습니다. 이때 많이 등장하는 표제어가 “노래(예: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입니다. 여기서 노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미즈모르’인데 여기서 시편(psalms)이 나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시편은 노래 즉 찬송이라는 뜻입니다.

특히 히브리어에서 찬양과 기도는 한끝차이입니다. 찬양을 다른 말로 “테힐라”라고 하고 기도를 “테필라”라고 합니다. 두 단어 모두 열린 소리입니다. 찬양도 입을 열어서 주님께 드리는 것이고, 기도도 마음을 열고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편의 찬양을 갖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시편 말씀에 곡을 붙여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온 세상을 지으시고,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찬양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04편도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송축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송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니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영혼’은 우리들의 목숨 또는 우리의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모든 것을 드려서 하나님을 송축하라고 시편기자가 우리를 초청합니다. 말 그대로 온 몸을 다해서 드리는 찬양과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송축하는 이유도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심을 조목조목 소개합니다. 하늘과 땅을 만드셨고, 바닷물을 주관해서 땅에 이르지 못하도록 경계를 만드시고, 세상 만물을 입히시고 먹이셨습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세상만물의 주인이십니다. 세상 만물을 입히시는 아버지요 공급자가 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쁨으로 세상을 주관하시고 자연만물을 다스리십니다. 시편 기자는 이것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며 찬양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처럼 크고 위대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시편기자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을 주목하셨음을 고백합니다. 주님의 백성들이 드리는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대적하는 악인들을 소멸하시고 선을 이루어주신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언제나 자신들과 함께 하시니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저절로 찬송이 나옵니다.

온 세상을 향한 시편기자의 고백이 우리의 것이 되기 원합니다:”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33절).아멘! -河-

시편의 기도 : 탄식

지난주에는 시편을 통해서 배우는 감사기도를 살펴보았습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일을 두고 감사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심을 감사했고, 근심 중에 기도했을 때 응답해 주시고 바른 자리로 인도해 주심을 감사했습니다. 매일같이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적으로 알고 만족케 하심에 감사했습니다. 시편기자의 감사는 개인의 감사를 넘어서 모든 성도들이 함께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시편의 유형 가운데 두 번째가 탄식(lament)입니다. 시편의 탄식 역시 개인이 겪는 어려움을 놓고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하는 개인의 탄식과 나라와 민족이 겪는 어려움을 하나님께 드리는 공동체의 탄식이 있습니다. 시편의 탄식은 “언제까지 니이까?(how long)”라는 기도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언제까지 근심과 고통가운데 두실 것인지 답답함을 토로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하나님을 찾았지만 하나님의 응답이 지연되고 있음에 주님의 도우심을 간청하는 호소입니다. 또한 “주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기도로 시작되기도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풀어나갈 수 없습니다. 자신 있게 인생길을 걸어갔지만 넘지 못할 벽을 만났습니다. 그때 시편기자는 주님 앞에 나와서 탄식하면서 “주님, 보시옵소서. 나를/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처럼 시편의 탄식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닥친 문제를 주님께 갖고 나와서 탄식하면서 기도합니다. 여러 해 동안 기도했지만 여전히 오리무중인 기도 제목일 수도 있습니다. 침묵하시는 하나님께 항의하듯이 드리는 탄식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계시다면 분명히 선과 악, 옳고 그름이 판가름나야하는데 악한 사람들이 판을 치고 선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현실에 시편기자는 하나님께 나와서 탄식합니다. 주님의 긍휼과 구원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편의 탄식은 분풀이가 아닙니다. 탄식에 머무르지도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상한 마음을 전부 토해낸 후에는 지난 시간에 배운 한나처럼 잠잠히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립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셨음을 확신할 때까지입니다. 그때 비로소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낍니다. 감사가 나옵니다. 하늘의 평안과 주님의 구원하심을 확신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눈물의 기도를 기뻐 받으십니다. 탄식하며 드리는 솔직한 기도를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을 낱낱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셨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길게/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주시는 응답과 평강이 있습니다. 눈물이 기쁨으로 변합니다. 눈물을 닦아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탄식의 끝에 있습니다. 다음 한 주간 솔직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고 결국에는 확신으로 나가시길 바랍니다. 위로의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만져주시고, 하늘의 힘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河-

시편의 기도 : 감사

저는 매년 기도에 대한 말씀을 준비해서 전합니다. 교회는 물론 우리의 인생도 기도로 세워짐을 믿고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말하듯이 그리스도인이 기도하지 않으면 신앙을 올바로 유지하기 힘이 듭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만약에 기도하지 않았는데도 잘 살고 있다면 그것은 누군가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탄식하면서 기도하셨기에 우리가 숨을 쉴 수 있고 하나님의 자녀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두고 하나님과의 사귐이라고 부릅니다. 기도는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우리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아바(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마음의 소원을 하나님께 말씀드립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을 느낍니다.

기도의 방법과 유형은 다양합니다. 소리 내서 기도할 수 있고 묵상으로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고 글로 써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골방에서 하나님과 단둘이 교제하며 기도할 수 있고, 속회나 소그룹에서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고, 온 교회가 통성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입술로 기도할 수 있지만 우리의 삶이 기도가 될 수도 있습니다. 회중기도 하듯이 격식을 차려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삶 속에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대화하듯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이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만나는데 방법에 제한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앞으로 4주 동안 구약의 시편 말씀을 중심으로 기도에 대해서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시편은 구약 성경의 처음 다섯 두루마리인 모세오경을 본떠서 다섯 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함께 불렀던 찬양이자 기도가 시편입니다. 시편 안에는 다윗으로 대표되는 개인의 삶과 신앙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짖는 기도이자 찬양입니다.

특별히 구약의 시편에는 몇 가지 특별한 유형들이 들어있습니다. 첫째는 오늘 살펴볼 감사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하는 시편들입니다. 둘째는 탄식입니다. 개인이나 민족의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께 나와 탄식하면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셋째는 찬양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송축하며 찬양하는 시편입니다. 넷째로 시편에는 하나님 백성이 갖춰야 할 지혜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시편의 네 가지 유형을 중심으로 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시편이야말로 하나님 백성들에게 살아있는 신앙의 교과서이자 기도문들입니다. 이번 기회에 시편이 주는 기도의 가르침을 충실히 익혀서 참빛 교회 식구들의 기도가 깊어지고 높아지기 원합니다. 우리 교회와 모든 성도님들께 기도의 불꽃이 타오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河-

그리스도인의 능력 (5) :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의 시작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기독교는 세상에 없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이 오순절에 성령을 체험하면서 목숨걸고 복음을 전하는 담대한 그리스도의 사도들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교회력에 따라 부활절을 지나서 오순절 성령강림을 향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도하면서 성령을 기다리고 부탁하셨고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우리들도 성령강림절을 향해 나가면서 예배로 모이면 한 마음으로, 세상으로 흩어지면 각자의 자리에서 성령충만을 사모하길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무력하게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제자들은 심히 낙심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쫓아다녔는데 극악무도한 죄수들이나 달리는 십자가에 죽으셨으니 허탈함에 쌓이는 것도 당연합니다. 모든 것이 끝이 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진 고문과 조롱을 받으시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렸으니 더 이상 희망은 사라졌습니다. 이처럼 낙심과 절망가운데 쌓여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평안으로 인사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절망가운데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어두움에 빛이 비췄습니다. 절망에 소망이 생겼습니다. 질그릇에 보화가 들어오니 심히 큰 능력이 제자들에게 임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본 말씀대로 십자가의 예수님은 거꾸러뜨림을 당하셨습니다. 채찍에 맞아서 넘어지셨습니다. 해골이라고 불리는 골고다 언덕에서 아무런 저항도 없이 숨을 거두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은 부활로 이어지는 길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완전히 죽지 않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속에 오늘 본문의 뜻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에서 거꾸러뜨림은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던져버린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것입니다. 처량합니다. 화가 납니다. 힘이 없으니 뭐라고 한 마디 대꾸도 못합니다. 그렇지만 질그릇을 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망하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납니다. 힘이 들수록 심히 큰 능력이 발동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능력입니다.

늘 말씀드리듯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에게도 인생의 폭풍우가 밀려옵니다. 심한 경우 오늘 본문처럼 거꾸러뜨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가 끝이 아닙니다. 그 아무도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심히 큰 능력은 어떤 어려움도 뚫고 나가는 힘입니다. 할렐루야! -河-

부활의 주님

올해도 어김없이 부활절을 맞았습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1년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고 사순절 끝에 부활절을 맞은 것입니다. 이처럼 매년 부활절을 맞으면서 새로운 생명과 힘을 얻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부활절은 실제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예배하는 날입니다. 기독교회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 즉 일요일을 주일(the Lord day)이라고 부르면서 매주 모여서 예배합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하고 사망권세를 이기신 생명의 주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무덤을 찾아갔던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스승을 잃고 실의에 빠진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평안(be peace with you)”으로 인사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없었던 의심 많은 도마가 선생님의 손에 있는 못자국와 옆구리의 창자국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친히 그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때 도마는 예수님을 향해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와 갈릴리 어부 출신의 제자들에게는 여전히 다시 시작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고향 갈릴리로 내려가서 고기 잡는 어부의 일을 합니다. 그렇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지냈습니다.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을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으로 제자들 마음에 깊이 자리 잡았습니다. 이처럼 복음을 맛보고 다시 어부가 되려니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들을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물으시고 베드로에게 양을 먹일(교회를 세울) 권세를 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부활의 소식을 들었지만 설마하면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 곁에서 동행하십니다. 그들의 궁금증을 성경을 인용해서 풀어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신비로운 형상을 했기에 두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숨기시고 친절하게 메시야에 대해서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마을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십니다. 그때 비로소 제자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해주실 때에 마음이 뜨거워졌던 것도 기억이 났습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들에게 하늘의 평화를 전하셨고, 다시금 제자의 길을 가도록 새 힘을 주셨습니다. 친절하게 말씀을 풀어주시면서 마음에 뜨거움을 경험케 하셨습니다. 부활절을 맞아서 우리 각자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이하기 원합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은혜와 생명의 능력이 부활절 예배에 오신 모든 성도님들 마음과 삶에 충만히 임하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살아나셨습니다(He is risen)!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