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

오늘은 우리 교회가 새로운 성전으로 이사한 지 2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새성전을 구입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하나님의 뜻이면 새성전을 주시길 기도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년이 지났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가 온전하게 세워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몸소 경험해 왔습니다. 우리들 인생이 그렇듯이 교회에도 파도처럼 크고 작은 어려움이 밀려오곤 합니다. 그 속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손길들이 있기에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핏값을 주고 사신 교회를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심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엊그제 새벽기도회에서 읽은 요한계시록 13장과 14장 말씀에는 유사한 표현이 두 번 반복해서 나왔습니다. 13장 10절에“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와 14장 12절의“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라는 말씀입니다. 두 구절 모두 성도의 믿음과 인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 지금도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입니다. 믿음의 진수는 얼마나 끝까지 견디느냐에 있습니다. 인내가 없는 믿음은 거품과 같습니다. 대신에 끝까지 견디는 인내가 있을 때 믿음에 꽃을 피우게 됩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성도들의 믿음과 인내는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지난 2년여 우리 교회가 생각났습니다. 우리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책임지실 것이라는 믿음, 거기에 성령의 임재와 역사가 없었다면 오늘 이렇게 2주년 감사 예배를 드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묵묵히 잘도 견뎌냈습니다. 눈에 띨 정도로 화려하거나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자랑거리도 없는 말 그대로 평범한 우리들이지만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습니다. 힘껏 교회를 섬겼습니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우리 안에 성도의 믿음과 인내가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요즘은 기독교가 사람들로부터 높은 점수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너도나도 기독교를 얕잡아보고 지나칠 정도로 기독교를 비난합니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들은 더욱 더 믿음의 자리로 나와야 합니다. 성삼위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터를 잡고 세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제 말로 전도하는 시대는 지나갑니다. 우리들 각자가 세상 속에서 작은 예수가 되어서 마음으로 몸으로 진리와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 참빛 교회와 성도님들에게 이런 참다운 믿음과 인내가 더욱 넘치길 기도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아프리카에서 선교하시는 김평욱 선교사님을 모시고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 교회의 사명 가운데 하나가“구제와 선교하는 교회”입니다. 아직은 부족해서 마음껏 돕지 못하지만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을 쫓아서 선교하는 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김 선교사님의 말씀과 사역을 통해서 우리 모두 하나님의 꿈을 꾸고 그 꿈을 향해서 나가는 귀한 시간이 되기 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2주년 감사 예배를 드리면서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앞에 에벤에셀, 도움의 돌을 하나 놓고 앞으로 나갑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예수님의 사랑으로 온 교회가 하나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건강하고 아름답게 세워가기 원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 감사의 찬양을 올려드립시다. -河-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오늘은 개신교회들이 함께 지키는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말틴 루터가 당시 교회와 사제들의 잘못된 관행을 고발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부르그 성당 앞에 게시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성 베드로 성당의 건축비와 은행 빚을 갚기 위해서 신자들에게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면죄부를 사면 이미 죽어서 연옥(가톨릭에서 죽은 자들이 가서 대기하고 있는 장소라고 보는 곳)에 있던 영혼들이 쨍그랑하고 헌금이 험금통에 떨어짐과 동시에 천국으로 올라간다고 주장했습니다. 헌금을 걷기 위해서 만들어낸 방법인데, 멋모르던 백성들은 그 말을 믿고 조상들을 위로하기 위한 방편으로 너도나도 면죄부를 샀습니다.

이것을 본 수도사 말틴 루터는 마음에 분노가 일었습니다. 성경에도 없는 것을 갖고 교회가 필요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서 성도들을 속이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대학 교수이기도 했던 말틴 루터는 이러한 교회의 그릇된 관행을 고발하고 학교 안에서 관심 있는 사람들과 토론을 벌이고 싶어서 95개조 반박문을 성당 앞에 게시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프로테스탄트라고 불리는 개신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말틴 루터 역시 자신의 처음 의도와 다르게 종교개혁의 선봉에 서게 됩니다.

종교 개혁자 말틴 루터가 발표한 3대 논문 가운데 하나가 “교회의 바벨론 포로됨”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고 우상을 숭배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합니다. 당시의 강대국이었던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니 세상왕의 지배를 받게 되고 세상에 포로가 된 것입니다.

말틴 루터 시절에 교회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기보다 교황과 종교 지도자들의 잇속과 권력욕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행하는 성례전까지 순수성을 잃어버린 채 교권을 유지하는 도구로 전락했습니다. 진정한 믿음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종교 개혁자 말틴 루터는 교회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혔다고 비유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하나님 안에 거하지 않고 자신을 내세우거나 세상을 쫓았을 때 자신들도 모르게 세상에 포로가 됩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잡혀가서 포로생활을 했듯이 세상에 끌려가서 세상방식을 강요받습니다. 진정한 자유가 없습니다. 억압과 억눌림으로 괴롭습니다.

누가복음 4장 말씀은 메시야로서 사역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첫 번째 가르침입니다.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야에 대한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복음은 무엇엔가 포로된 사람들을 자유케합니다. 눈이 멀어서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줍니다. 억압받는 사람들도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임하면 자유를 회복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은 은혜의 선포입니다.

종교 개혁주일을 맞아서 우리들도 행여나 억압받고 무엇엔가 사로잡힌 채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기 원합니다. 죄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세상에서 각자 지고 가는 짐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말틴 루터의 말 대로 복음 아닌 다른 것들에 포로가 되어 있다면 거기서 헤어 나와야 합니다. 우리들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 속에도 복음이 임하면 진정한 자유가 임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와 세상을 자유케하기 때문입니다. 새장의 문이 열리면서 갇혀 있던 새가 창공을 향해서 날아오르는 것처럼 우리들도 복음 안에서 날아오르기 원합니다.-河-

좋으신 하나님

누군가 저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지체 없이“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제가 만난 하나님은 좋으신 분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저의 삶과 목회의 여정 속에서 결국에는 선을 이루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만났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지난주에 나눈 시편 23편 말씀 그대로 푸른 초장에 눕혀 주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말 그대로 평탄한 삶을 살았고,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자가 되셔서 인도해 주시는 길은 말 그대로 푸른초장이었습니다.

도리어 목회를 하면서 어려움이 종종 닥쳤습니다. 그때마다 목회가 영적인 싸움임을 깨닫고 더욱 더 기도의 자리로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려움은 늘 상대적이어서 제가 겪은 어려움이 가장 크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니 저는 다윗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닌 경험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도 제게는 힘겨운 순간들이었습니다. 그때마다 다윗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하셨습니다. 막대기로 저를 보호해 주셨고 지팡이로 가야할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푸른 초장에서 만난 하나님께는 저절로 감사가 나옵니다. 인생의 골짜기에서 만난 하나님 앞에서는 말없이 무릎 꿇고 그 크고 깊은 은혜에 감격할 뿐입니다.

어디 저만 그렇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모든 주님의 백성들은 푸른초장과 골짜기의 삶을 번갈아 경험하지만 그때마다 좋으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우리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어디서나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우리들을 인도해 주십니다. 저는 우리 참빛 교회 성도님들께서 삶의 순간 순간에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시고,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은 양희원 형제의 아버님께서 하나님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장교로 복무하시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시고 목회를 시작하신 훌륭하신 목사님이십니다. 한국이나 미국 각지에 계신 부모님들께서 우리 교회를 방문해 주시는 것은 커다란 축복입니다. 말로만 들으시다가 자식들이 섬기는 교회를 직접 와서 보시면 마음도 놓이시고 무엇보다 우리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시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양 목사님께서 섬기시는 교회와 가정위에도 그대로 임하길 기도합니다.

어느 덧 10월도 중순이 넘어갔습니다. 샌프란시스코는 사계절이 비슷하지만 조금만 남쪽으로 내려가면 낙엽이 지는 가을이 시작되었습니다. 가을은 말 그대로 결실의 계절입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계절입니다. 농부들이 들에 나가서 정성껏 곡식을 추수하듯이,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정성껏 헤아리고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기 원합니다. 자신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어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이 가을에 마음껏 찬양하고 예배하기 원합니다. -河-

흘러 넘치는 은혜 7 : 임재

“흘러넘치는 은혜”라는 제목의 연속설교 마지막 시간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흘러넘치는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과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넘쳤을 때 어떤 일이 생기는 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무엇보다 흘러넘치는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서 죄와 허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밧세바를 범한 다윗은 하나님께 나와서 통회자복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새롭게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는 자신에게 실망한 나머지 예전 생활로 돌아갔지만 그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고 초대교회를 세우는 사도로 거듭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깊은 죄사함을 경험한 여인은 예수님의 발에 옥합을 깼습니다. 죄와 허물로부터 자유로워야 은혜가 우리 안에 들어와서 자리 잡습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가 정결하게 씻음 받았을 때 비로소 거룩한 성령이 활동합니다. 이처럼 흘러넘치는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죄사함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은혜가 우리 안에 부어지면 위로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손 마른 자가 예수님을 만나니 그의 오른손이 활짝 펴졌습니다.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면서 기름통이 마르지 않는 공급하심을 경험했습니다. 은혜 가운데 살 때에 로마서 8장 28절 말씀이 현실이 됩니다.:”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지난주에 살펴본 창세기의 요셉이 그랬습니다. 형들에 의해서 노예로 팔려가고, 감옥에 갇히는 내리막길의 삶이 이집트에서 총리가 되는 과정이었고, 결국에는 아버지와 형들을 가뭄에서 구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쓰임 받았으니 그의 모든 삶의 여정이 합력해서 선을 이룬 셈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할 때 은혜가 더욱 넘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들의 모든 것들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살기 원합니다.

흘러넘치는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서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가 개인적으로 또는 가족이나 공동체 또는 민족이 겪는 고난입니다. 만사가 형통할 정도로 일이 잘 될 때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베풀어주신 은혜를 간증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반면에 어려움이 닥쳐오면 감사가 사라지고 염려와 근심이 몰려옵니다. 심하면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믿음에 대한 회의가 생깁니다. 햇볕이 비출 때 은혜를 경험하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먹구름이 인생길을 덮고 있을 때도 한결같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 거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난 가운데서도 흘러넘치는 은혜를 경험해야 진정한 신앙입니다. 고난을 은혜로 감쌀 수 있을 때 비로소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시편 23편의 전반부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로 시작되는 목가적이고 은혜가 넘치는 다윗의 고백입니다. 햇볕이 비추는 밝은 날의 감사요 은혜체험입니다. 하지만 중간에는 사망의 음침할 골짜기가 등장합니다. 캄캄한 어두운 인생길을 걸어가는 다윗입니다. 고난의 내리막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인도하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나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벅차게 고백합니다. 흘러넘치는 은혜를 그의 삶 속에서 실제로 경험한 것입니다.

흘러넘치는 은혜는 고난을 관통합니다. 고난이 은혜를 이길 수 없습니다. 고난 속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은혜야 말로 가장 값진 선물입니다. 할렐루야! -河-

흘러 넘치는 은혜 6 : 섭리

지난주에는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서 1)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확실해야 하고, 2)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먼저 살피고, 구체적인 삶의 상황 속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지를 생각하고, 3) 자신의 자리를 지키면서 그곳에서 맡겨주신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해야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은혜를 경험하는 토대입니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맞추는 과정입니다. 남들과 비교하거나 지난날에 대한 추억 또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로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그동안 살펴본 인물 가운데 다윗이나 베드로의 경우처럼 유혹에 넘어가서 지은 죄들이나 특별한 환경 속에서 범한 실수들이 은혜를 경험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죄나 실수 앞에 멈춰있거나 뒷걸음질 쳐서는 안 됩니다. 자칫 그것들이 우리 안에 쓴 뿌리로 남아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데 커다란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다윗처럼 얼른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달려가야 합니다. 부족할수록 하나님을 더욱 찾고 그 품에 안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을 용서해 주심은 물론 사랑으로 감싸주십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덮어주시고 새로운 인생길을 열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들어있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들어서 사용하시고 그것을 통해서 영광받기 원하신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가장 잘 가르쳐주는 말씀은 로마서 8장 28절입니다.:“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들 삶의 모든 것들이 결국에는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을 때 순간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겨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 어려움을 극복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충분히 경험한 후에 우리의 인생까지 손수 빚어 가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멋진 신앙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요셉이야말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한 평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편안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 되어서 이집트에 종으로 팔려갑니다. 요셉을 시기한 형들이 그를 팔아넘긴 것입니다. 요셉은 이집트에서 보디발이라는 고위 관리의 집에서 충성을 다하면서 인정받고 집안의 모든 일을 관할하는 청지기가 됩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였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그를 모함해서 감옥에 갇힙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감옥은 가장 밑바닥 삶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감옥에서도 최선을 다합니다. 결국 바로왕의 꿈을 해몽해 준 덕택에 이집트의 총리에 오릅니다. 이 모든 과정을 두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하신 결과라고 가르쳐줍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셉은 자신을 팔아버린 형들과 화해하면서 자신에게 생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고백합니다. 인생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흘러넘치게 체험한 사람의 멋진 고백입니다.

요셉에게 임한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 모두에게도 그대로 임할 줄 믿는 믿음과 확신으로 주어진 인생길을 꿋꿋하게 걸어갑시다.-河-

흘러 넘치는 은혜 5 : 죄사함

성경에서 은혜와 죄사함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은혜는 죄인됨을 인정하고 고백하였을 때 임한다고 성경은 가르쳐줍니다. 여기서 죄는 하나님 없이 살거나 하나님보다 위에 올라서려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린 채 자신이 온 세상의 주인인 것처럼 마음대로 사는 것이 곧 죄라고 성경은 가르쳐줍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 인간을 만드신 분임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섬기는 것이 인간된 도리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거역한 것이 가장 근본적이고 커다란 죄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살았을 때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죄의 모습은 교만과 우상숭배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교만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결국 에덴 동산의 아담과 이브도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뱀의 유혹에 빠져서 선악과를 따먹었는데 결국 하나님처런 눈이 밝아지겠다는 일종의 교만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모셔야 할 자리에 다른 것을 모셔놓고 섬기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서 바알신이나 이방신들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이방신들은 금이나 나무 매우 화려하게 만들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어서, 부와 재물은 물론 쾌락까지 보장했습니다. 어차피 거짓 신이니 사람들 비위만 맞춰서 세를 불리면 그만이었던 셈입니다.

현대인들도 교만과 우상숭배의 죄를 범합니다. 점점 더 하나님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고, 자신이 삶을 통제하고 자신이 주인이 되려고 합니다. 현대판 우상숭배는 재물과 권력과 명예 그리고 쾌락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을 너무 많이 섬기고 도리어 하나님 섬기기를 불편해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죄들이 아주 많음에 틀림없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인간의 죄된 본성을 인정하고,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은혜로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쳐줍니다. 말 그대로 기쁜소식 복음입니다. 쉬워보이지만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생각하면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속의 여인도 죄를 많이 지으며 살았습니다. 여인은 도덕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죄인이라고 낙인이 찍힐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으로부터 복음을 듣습니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자신을 예수님께서 받아주시고, 그 여인에게 죄사함의 복음을 들려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죄사함의 은혜는 물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 은혜가 하도 커서 예수님께 옥합을 갖고 왔습니다. 꽤 비싼 옥합인데 그것을 깨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결로 딱습니다. 발에 붓는 것과 머릿결로 닦아주는 것은 자신을 가장 낮춘 겸손이자 예수님을 최고로 높인 경외심입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죄가 용서함받았음을 확신했습니다. 사회적으로 죄인취급받던 자기를 예수님께서 받아 주심이 너무 감사해서 은혜가 넘쳤습니다. 그래서 아끼고 아끼던 옥합을 깼습니다. 옥합을 깬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옛 모습, 자신의 삶을 깨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예수님 앞에서 결심한 것입니다. 여인의 삶 속에 은혜가 흘러넘쳤기 때문입니다.-河-

흘러 넘치는 은혜 4 : 사랑

지난주에 살펴본 다윗은 실수라고 하기에는 너무 커다란 죄를 범했습니다. 신하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하고, 그 신하를 전쟁터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다윗이 치명적인 죄를 범한 것입니다. 다윗은 그가 범한 죗값을 톡톡히 치렀습니다.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병으로 죽었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 아들을 낳고 이름을“솔로몬”이라고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고 무엇보다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라면서(샬롬) 그렇게 이름을 지었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이름을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는 뜻인 “여디디야”로 바꿔주십니다. 다윗을 위로하시고 새로운 힘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다윗 정도는 아니지만 신약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 베드로입니다. 반석과 같은 믿음을 갖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라고 예수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합니다. 예수님께서 미리 예고하셨건만 베드로는 그만 두려움에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다짐을 저버렸으니 자신과 예수님께 큰 잘못을 범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향 갈릴리에 가서 어부의 생활을 다시 시작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그가 범한 실수로 인해서 더 이상 사도의 직분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밤새도록 일했지만 고기가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 오셨습니다. 처음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될 때와 매우 비슷한 상황입니다(눅 5장). 숯불에 아침식사를 차려주시고, 베드로에게“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연거푸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며칠 전 모닥불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숯불을 피어놓으신 것과 좋은 대비를 이룹니다. 베드로가 세 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사랑하는 지 세 번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많이 망설였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무조건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지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폐로 물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예수님을 세 번씩 부인한 터라 면목도 없고 자신도 없었을 베드로는 아가페로 대답하지 못하고 평범하게 사랑한다고 동료간의 사랑(필레오)로 대답합니다. 결국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마음으로 내려오셔서 아가페가 아닌 필레오로 물으십니다. 거기서 베드로가 무너집니다.:“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의 음성이 베드로의 삶에 깊이 새겨집니다.:“내 양을 먹이라. 나를 따르라.”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를 보내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 여디디야라고 불러주셨던 하나님과 베드로를 직접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씩 물으시고 그에게 주님의 양을 맡기신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의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합니다. 흘러넘치는 은혜는 부서진 마음이 용서받고, 회복되었을 때 임합니다. 그 일을 우리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 오셔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말끔하게 용서해 주십니다. 베드로에게 양을 치는 사명을 주셨듯이 용서와 회복 후에는 주님의 일을 맡겨주십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위해서 행하시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할렐루야!-河-

흘러 넘치는 위로 3 : 위로

하나님의 은혜는 여러 가지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인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그의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물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하나님 사랑의 절정입니다. 흘러넘치는 은혜라는 주제로 말씀을 듣는 세 번째인 오늘은 우리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위로’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설명하는 여러 가지 표현들 가운데‘위로의 하나님’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위로하십니다. 아니 타락한 세상에 사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위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나함”입니다. 나함이라는 히브리어에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사랑,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해 주려고 마음을 고쳐먹는 것, 어떤 사람에게 유감의 뜻을 표하지만 결국 관계를 회복한다는 의미가 두루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사정을 모두 공감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을 예비해 놓으십니다. 자신의 백성을 끔찍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들에게 위로로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다짐하지만 우리는 매 순간 넘어지고 죄를 짓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우리의 죄를 내려놓으면 붉은 죄가 흰 눈처럼 깨끗하게 사해집니다.

죄의 용서를 받으면 죄책감에서 해방될 수 있고 가벼운 마음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죄로 인해서 막혀 있었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께 불의한 모습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를 가로막고 있던 죄를 없애시고 예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양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지나서 살아계신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덮어주시고 막혔던 담을 헐어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아주 커다란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전쟁에 나간 신하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고, 신하마저 전쟁터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런데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하나님께서 데려가십니다. 다윗이 범한 죄값을 그렇게 물으신 것입니다. 다윗은 금식을 하면서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구했지만,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죄의 값을 치르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하나님은 거기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다윗과 밧세바사이에 또 다른 아기를 주셨는데 그가 바로 다윗에 이어서 왕이 된 솔로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솔로몬을 “여디디야”라고 부릅니다. 여디디야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는 뜻입니다. 선지자 나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커다란 죄를 짓고, 죄의 값을 치루면서 매우 힘들어했을 다윗에게 임한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다윗은 여디디야를 안고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느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시는지 실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우리가 범하는 죄보다 훨씬 크고 깊습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임했을 때 우리의 삶이 회복되고 그 은혜가 흘러넘칩니다. 할렐루야. -河

흘러 넘치는 은혜 2 : 공급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을 가르쳐주는 표현이 여럿 나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여호와 이레”입니다. 여호와 이레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하나뿐인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드릴 때 하나님께서 이삭대신에 양을 미리 준비해 놓으신 것에서 유래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실제로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는 것을 확인하시고 서둘러 중단시키신 후에 이삭대신 양을 제물로 바치게 하십니다. 거기서 여호와 이레가 나왔습니다. 여호와 이레를 직역하면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모든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앞서 가셔서 필요한 것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이처럼 여호와 이레 하나님은 예비하시는 하나님,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탈출해서 가나안 땅으로 향할 때 광야에서 40년을 보냈습니다. 광야는 물과 먹을거리가 없는 곳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바위를 쳐서 물이 나게 하셨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서 백성들을 먹이셨습니다. 무한정 먹을거리를 내려주신 것은 아닙니다. 일을 하지 않는 안식일을 제외한 6일 동안 매일같이 하루 분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말 그대로 일용할 양식(daily bread)을 공급해주신 것입니다. 하루분만 주신 것은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라는 뜻입니다. 만약에 일 년치씩 내려주셨다면, 백성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교만해졌을 것입니다. 또한 만나를 하루 분만 주신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자신들을 먹이신다는 믿음을 심어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매일같이 만나를 내려주실 지 의심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어기고 이틀 분 만나를 거뒀다가 썩어서 버리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광야 40년 동안 매일같이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앞에는 가뭄이 찾아오자 하나님 말씀대로 그릿 시냇가로 피했던 엘리야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왕상17:4).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로 갔을 때,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동원하셔서 아침 저녁으로 떡과 고기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엘리야 선지자는 먹을거리를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사르밧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곳에 사는 어떤 과부가 엘리야에게 가뭄이 끝날 때까지 먹을 것을 공급해 줄 것이랍니다. 엘리야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사르밧에 갔을 때 한 과부가 땔감을 줍고 있었습니다. 그녀에게는 밀가루 한 줌과 기름 몇 방울 밖에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음식을 만들어서 아들과 함께 먹으면 끝입니다. 그 정도로 긴급한 상황에 처한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야는 음식을 만들어서 자신에게 가져오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면 가뭄이 그칠 때까지 주님께서 먹을거리를 공급해주실 것이랍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의 말대로 합니다. 그때부터 가뭄이 그칠 때까지 하나님께서 사르밧 과부에게 먹을거리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공급해 주십니다. 믿음대로 행하였을 때 살 길을 열어주십니다.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서 앞길을 예비해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흘러넘치는 은혜입니다. -河-

흘러 넘치는 은혜 1 : 회복

요한일서 4장 8절에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명쾌하게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구약에서는 히브리어 ‘헤세드’를 사용해서 표현합니다. 구약성경 호세아에서 자신의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무조건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세드로 표현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헬라어 ‘아가페’를 갖고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합니다. 아가페는 세상에 속한 사랑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말씀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신의 유산을 팔아달라고 요청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재산을 팔아서 무슨 일을 할 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아들의 요구를 들어줍니다. 아들을 존중하는 아버지이십니다. 아들은 먼 나라에 가서 흥청망청 아버지의 유산을 모두 써버립니다. 결국 농장에서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를 먹으면서 연명합니다. 그러던 중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생각난 것입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아버지께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아들이 집을 나간 후 아버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저 멀리 아들의 모습이 보이자 뛰어나가서 아들을 맞이합니다. 아들은 자신을 종으로 받아주길 바라면서 아버지 앞에서 잘못을 뉘우칩니다. 그렇지만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는 종이 아니라 아들로 지위를 회복시켜주고 그를 위해서 잔치까지 베풀어줍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아들을 위해서 자신의 재산을 팔아주는 아버지입니다. 아들이 다시 돌아오기만 기다릴 뿐입니다. 재산을 모두 없애고 돌아온 아들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어주고 옛날 그대로 아들로 대우해 주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구약성경의 ‘헤세드’이고 신약에서 말하는 ‘아가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지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은혜로 임합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값을 치루는 것은 거래이지 선물이 아닙니다. 선물에는 주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아무한테나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거나,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에게 선물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무엇보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기셨습니다. 이 보다 더 큰 선물, 하나님의 은혜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오른손이 마른 병을 갖고 있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회복된 사건이 나옵니다. 오른 손이 말랐으니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몸에 장애가 있으니 사람들의 시선도 곱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몸의 일부가 말라 들어간 것 자체가 절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런 조건도 없이 이 사람의 손을 고쳐주십니다. 손이 마른 사람에게 회복의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들이 갖고 있는 연약함 속에 임합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흘러넘치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한량없는 사랑, 충만한 은혜라고 부릅니다. 앞으로 몇 주간 흘러넘치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차근차근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그 은혜가 흘러넘칠 때 우리 자신은 물론 가정과 교회 그리고 세상이 밝아질 것입니다.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들어가서 그 은혜를 누리는 참빛 교회 식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