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능력 1 : 구원

복음을 헬라어로 유앙겔리온이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옛날 로마시대에는 지금처럼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지난 가을 새에 대한 설교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비둘기를 비롯한 동물들이 통신수단에 동원되기도 했고, 산 위에서 연기를 지피거나 소리를 내는 것을 통해서 의사소통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정확한 통신수단은 역시 사람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이기면 달리기를 잘하는 병사로 하여금 왕에게 승전보를 알립니다. 전쟁에 나갔던 병사가 전해주는 승전보가 바로 기쁜 소식, 유앙겔리온이었습니다.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에는 새로운 왕이 등극했다는 뜻도 들어있습니다. 새로운 왕이 세워지면 백성들은 새로운 시대가 펼쳐질 것을 기대합니다. 백성들에게 기쁜 소식임에 틀림없습니다. 이것은 구약시대에 메시야가 올 것을 예언하는 것과도 맥을 같이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메시야를 보내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메시야가 세상에 왕으로 오신다는 것이 곧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3년간의 공생애 기간 동안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귀신들린 사람들을 온전케 해주시고, 굶주린 사람들을 오병이어로 배부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 말씀 자체가 무엇보다 가장 귀한 복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모든 것이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흘 만에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심은 최고의 복된 소식입니다. 죽음의 세력을 이기셨으니 그 어떤 승전보에 비할 것이 없는 위대한 사건입니다. 오순절에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가 임한 것도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이 우리 안에 임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는 것은 복음 안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신 복되고 기쁜 소식 – 복음의 능력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특별히 이번에는 로마서를 비롯한 사도바울이 기록한 바울서신에 나타난 복음의 능력에 초점을 맞춰서 말씀을 전할 생각입니다. 오늘 본문에 있듯이 복음은 능력입니다. 능력에 해당하는 헬라어 “뒤나미스”는 영어의 다이나마이트를 연상시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복음을 따라 사는 우리들에게 능력이 임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그 능력을 힘입지 못하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복음이 주는 능력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세상이 주는 능력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복음을 따라 살기 원합니다. 복음의 능력을 힘입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기쁜 소식을 받고 그 소식을 누리기 원합니다.

복음이 주는 최고의 능력은(은혜는) 구원(salvation)입니다. 죄를 사함 받은 능력,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주는 능력이 구원에 깃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옛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됨의 지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는 것이 구원입니다. 우리를 건져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이 우리 모두 위에 임하기를 바랍니다. -河-

사순절에 3 : 십자가의 길

2천년 전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예루살렘에는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라는 순례길이 있답니다. 비아 돌로로사는 라틴어입니다. “비아”는 길이라는 뜻이고, “돌로로사”는 고난이라는 뜻이니 합치면 “고난의 길”이 됩니다.예수님과3년 동안 함께 지냈던 제자 가룟유다가 은 삼십에 자신의 스승을 팔아 넘깁니다. 군병들에게 잡히신 후,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과 빌라도 총독에게 심문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예수님에 대한 재판과 십자가형은 하룻밤 사이에 일사천리로 진행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으신 곳에서부터 시작된답니다.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요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했다는 죄목으로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고소했습니다. 갈릴리 청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인한 것은 하나뿐인 하나님을 욕되게 한 신성모독죄라는 것입니다. 당시는 로마의 황제가 세상을 통치했습니다.식민지였던 팔레스타인에 그 어떤 통치자도 허락하지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으로 소위 로마 황제를 대적하는 쿠데타를 꾀했다는 모함입니다.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어떤 죄도 발견하지 못했지만 군중들의 소요가 두려워서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언도합니다. 비록 자신의 뜻과 다른 판결임을 표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손을 씻지만 2천년 교회의 역사에서 빌라도는 예수님께 십자가형을 언도한 인물로 낙인 찍혔습니다.

예루살렘의 십자가의 길에는 예수님께서 군병들에게 희롱 받으신 장소도 포함됩니다.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웁니다. 얼굴에 침을 뱉고, 채찍으로 때렸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일개 군병들 앞에서 조롱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참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그 다음에는 십자가를 지고 예루살렘 도시 한 복판을 지나가십니다. 당시에 십자가형은 극악무도한 죄인들에게 언도하는 실형이었기에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도시를 지나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이 지치셨습니다. 더 이상 십자가를 지실 수 없었기에 구레네에서 온 시몬이라는 사람이 대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비아 돌로로사,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의 발걸음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결국 십자가형이 집행됩니다. 양손과 발에 못이 박히시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의 마지막 선포는 세상을 악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새로운 구원을 펼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외마디 외침이었습니다 (실제로 헬라어 본문은 “테테레스타이“라는 한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비아 돌로로사는 예수님께서 묻히신 무덤과 부활하신 후에 하늘로 올라가신 감람산까지 이어진답니다.

고난 주간을 맞으면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는 것도 신앙에 큰 유익이 될 것입니다. 비록 예루살렘의 성지를 순례하지 않아도 신약성경의 복음서를 차례로 읽어가면서 예수님께서 가신 고난의 길을 마음 속으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들 마음과 삶 속에 잔잔하게 스며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면, 우리의 인생길 자체가 예수님께서 걸으신 십자가의 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에 살다 보면 어처구니 없는 일에 휩싸일 때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인생의 짐, 우리들 각자가 지고 가는 십자가의 중압감에 쓰러질 때도 있습니다. 누군가 곁에서 도와주면 눈물겹도록 고맙지요. 하지만 대부분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각자의 비아 돌로로사, 십자가의 길을 걸어갑니다. 주님도 지고 가셨으니 우리도 그 길을 걷는 것입니다. 십자가 너머에 부활의 영광이 있음을 믿기에 묵묵히 믿음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갑니다.

찬송가 가사 그대로 즐거운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인생길을 걷기 원합니다. 이미 그 길을 가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면 슬픈 마음을 가진 이웃들이 우리를 보고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특별히 고난 주간을 맞아서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들 삶에 깊이 임하고 그 어떤 고난도 예수님과 더불어 극복해 나가는 멋진 신앙으로 거듭나길 간절히 원합니다.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2013년 3월 22일)

부활절 아침에

사순절을 보내면서 십자가의 길이라는 주제의 말씀을 세 번에 걸쳐서 나눴습니다. 이삭이 장작더미를 등에 지고 아버지 아브라함과 함께 올라간 모리아길, 젖먹이 송아지를 둔 암소 두 마리가 법궤를 실은 수레를 끌고 올라갔던 벧세메스의 언덕길, 십자가를 지시고 채찍에 맞고 조롱을 받으시면서 올라가신 예수님의 골고다 언덕길, 그리고 우리들이 지금 자기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걷고 있는 인생길을 살펴보면서 부활주일을 준비했습니다.

이삭은 죽음의 순간에 살아났습니다. 벧세메스의 암소들은 희생제사로 드려졌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들이 지고 가는 십자가의 길도 결국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는 길이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사도바울의 고백은 우리 모두의 고백이어야 합니다.:”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인생은 물론 타락한 세상의 삼라만상이 죽음에서 끝을 맺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죽음은 사라집니다. 영원한 생명의 길이 열립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생명이 임했습니다. 사망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죄의 세력들을 모두 물리치셨습니다. 신앙은 우리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능력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 제자들은 한정 없이 불안했습니다. 3년 동안 따랐던 예수님께서 무력하게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신들만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공포가 이들에게 엄습했습니다. 외로웠고 절망적인 상황에 앞길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들을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라고 인사하십니다. 부활은 평안을 가져다줍니다. 죽음의 세력이 사라지고 새로운 생명 속에서 누리는 평안입니다. 두려움이 사라지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스리는 새로운 세상이 주는 놀라운 평안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40일을 함께 지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도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예루살렘부터 땅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세상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이름 앞에 어떤 세력도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이 온 세상으로 전파된 것입니다.

올 해도 어김없이 부활절을 맞았습니다. 인생길에서 매년 맞는 부활절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해마다 새로워야 합니다. 2013년 부활절 아침에 우리의 삶과 신앙을 돌아봅니다. 십자가위에서 자신을 못 박았는지, 사망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힘입고 있는지, 부활의 주님께서 허락하신 하늘의 평안과 새로운 삶에 대한 소망이 넘치는지, 우리 교회와 참빛 식구들 한분 한 분이 부활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선포하고 있는지 – 부활절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우리들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은혜가 새롭게 임하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셨습니다(He is risen). 할렐루야! -河-

사순절에 2 : 벧세메스의 암소

성경 속에는 갖가지 동물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노아는 홍수가 그치고 땅이 말랐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까마귀와 비둘기를 방주 밖으로 날려 보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양이나 염소 그리고 때로는 소와 비둘기가 쓰였습니다. 이 밖에도 독수리와 같은 날짐승, 사자와 같은 들짐승 그리고 고래처럼 큰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수많은 동물들이 성경에 등장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동물들 가운데 제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바로 구약성경 사무엘상 6장에 나오는 벧세메스 길을 걸어갔던 두 마리의 암소입니다. 살아가면서 또는 목회를 하면서 힘겨울 때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서 깊이 묵상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에 패하면서 하나님의 법궤를 팔레스타인에게 빼앗겼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팔레스타인의 신당에서는 그들의 신 다곤이 하나님의 법궤 앞에서 고꾸라지고 팔다리가 끊어졌습니다. 법궤가 가는 곳마다 전염병을 일으키고 큰 재앙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비록 전쟁에서 졌지만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능력 있는 신임을 적지 한 가운데서 보여준 셈입니다.

결국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법궤를 벧세메스라는 곳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하고 암소 두 마리를 데려왔습니다. 이들에게는 아직 젖을 떼지 않은 새끼들이 있었습니다. 한 번도 멍에를 메어보지 않은 신출내기입니다. 이 암소 두 마리에게 난생 처음으로 멍에를 메게 하고, 새로 짠 수레를 연결시킵니다. 수레 위에는 법궤를 올려놓습니다. 암소 두 마리가 스스로 법궤를 끌고 벧세메스를 향해서 곧장 나아가면 팔레스타인에 일어난 재앙이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임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두 마리의 암소가 발을 맞춰서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게다가 자신들의 발걸음을 주시하고 있는 수많은 팔레스타인들의 눈길이 얼마나 부담스러웠겠습니까? 멍에를 처음 메었으니 얼마나 불편하였겠습니까? 배가 고파서 엄마를 찾는 송아지들의 울음소리가 귓전을 울렸을 테니 어미의 마음이 오죽했겠습니까? 당장이라도 멍에를 떨쳐 버리고 새끼들에게 돌아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본문은 두 마리의 암소들이 울부짖으면서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꿋꿋하게 벧세메스를 향해서 나아갔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벧세메스에 도착하자마자 이들은 희생제물로 드려졌습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자신의 몸까지 제물로 드려진 벧세메스의 암소를 생각하면 비록 동물이지만 조용히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그리고 벧세메스로 향하는 두 마리의 암소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을 연상시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뜻을 모두 이루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또한 벧세메스를 향하는 암소는 삶의 고통과 아쉬움을 가슴에 품고 신앙의 순례길을 걸어가는 우리들의 모습, 아니 이 시간 벧세메스의 암소를 생각하면서 가슴을 쓸어 내리는 바로 당신의 모습입니다. 소리를 내지도 못한 채 속으로 울음을 삭히면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꿋꿋하게 벧세메스 길을 향해서 나아가는 당신!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그리스도인이십니다. 힘내십시오!(SF한국일보종교칼럼, 2007.4.17) -河-

사순절에 1 : 결박당한 이삭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더니 아버지 아브라함의 얼굴이 많이 상기되어 있었습니다. 종들에게 여행을 준비하랍니다. 어머니 사라와 무슨 얘기를 주고받는데 어머니 얼굴이 갑자기 깜깜해 집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러 갈 때는 어머니께서 환하게 웃으면서 이것저것 챙겨주셨는데 이번에는 저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십니다. 뭔가 이상했지만, 저는 기분 좋게 아버지를 따라 나섰습니다.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피어올랐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가는 여행이기에 기분도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예배하러 가는 길입니다. 기쁠 수밖에요.

그런데 아버지 표정이 그리 밟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하나님을 예배하러 갈 때와 다릅니다. 중간에 종들을 놓아두고, 아버지와 저만 가는 것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말없이 걸으십니다. 그런데 제가 보니까 제물로 드릴 양이 없습니다. 말없이 한참을 걷다가 용기를 내서 물었습니다.“아버지 제물은 어디에 있어요?”“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셨지.”아버지께서 짤막하게 대답하십니다. 저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말씀을 믿었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드디어 제사를 드릴 산에 도착했습니다. 아버지를 도와서 제단을 만드는데 오늘따라 아버지의 손놀림이 이상하리만큼 느립니다. 저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십니다. 제단이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양을 올려놓을 차례입니다. 그때 아버지께서 저를 부르십니다.“내 아들 이삭아! 내 나이 100살에 하나님께서 너를 갖게 하셨다. 그리고 나는 너와 더불어 아주 행복한 시간을 가졌어.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네가 필요하신가보다. 너를 제물로 바치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너를 나에게 주셨으니 나는 다시 하나님께 너를 돌려 드릴 수밖에 없단다. 아들아! 미안하다.”

저는 깜짝 놀랐지만 겉으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습니다.“아버지, 저를 제물로 드리세요. 저도 아버지와 그동안 너무 행복했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아니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지는 것이 영광입니다. 얼른 저를 묶으십시오.” 아버지가 저를 묶는 것을 도와드렸습니다. 그리고 제단위에 누웠습니다. 눈을 꼭 감았습니다. 차마 아버지와 눈길을 마주칠 수 없었습니다. 솔직히 아버지가 들고 있는 칼이 무섭기도 했습니다. 그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버지 아브라함을 급하게 찾으십니다. 멈추랍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믿음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눈을 떠보니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두둥실 떠가고, 아버지의 얼굴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서 저를 내려다보고 계셨습니다. 그때 가까운 풀숲에서 양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창세기 22장 본문을 이삭의 입장에서 각색해 보았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한 이삭은 신약성경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신 예수님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결박당한 채 제단에 제물로 올리어진 이삭의 모습은 손과 발이 묶인 채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인생 속에 일어나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나가는 우리들의 모습도 이삭에게 있습니다. 믿음은 순종입니다. 그때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어린양을 예비해 주신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좇는 참빛교회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 -河-

소경 바디매오 4

여리고 성 길가에서 구걸을 하던 소경 바디메오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칩니다. 주변사람들이 그를 윽박지르고 핀잔을 주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외쳐 부르짖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자신의 불쌍한 인생에 빛이 비추고, 예수님의 은혜로 새로운 삶이 펼쳐질 수 있음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디메오 앞에서 발길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멈추심과 부르심은 소경 바디메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순간순간 필요한 은혜입니다. 우리들 삶의 여정에서 발길을 멈춰주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면 저절로 감사의 고백이 나옵니다.“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간이 무엇이관데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 8:4)라는 시편기자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소경 바디메오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바디메오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겉옷을 두고 뛰어나갔습니다. 겉옷은 일교차가 심한 중동 지역에서 밤마다 이불역할을 합니다. 앞에 펼쳐놓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귀에 동전을 던져줍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꼭 필요한 필수품을 버려두고 예수님께 나간 것입니다. 또한 겉옷을 둔 것은 자신을 두르고 있던 것을 버린 것입니다. 소경 바디메오가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갔음을 가르쳐줍니다.

예수님께서 바디메오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바디메오는 소경입니다. 그가 예수님께 불려나왔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눈이 뜨는 것을 원했을 텐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질문하십니다. 바디메오는 “(다시)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얼른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이나 바디메오의 대답이나 당연한 것을 묻고 답한 셈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보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을까요? 본문이 속한 마가복음 10장 앞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그를 시험하기 위해서 이혼에 대한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여느 경우와 마찬가지로 지혜롭게 대답하십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나와서 예루살렘에 가셔서 왕이 되면 자신들을 좌우에 앉혀 달라고 부탁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는지 되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소경 바디메오를 부르신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소경에게 먼저 질문하십니다.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당시의 기득권자들인 유대지도자들이나 제자들은 예수님께 질문하고 부탁했지만, 불쌍한 소경을 앞에 두고는 예수님께서 그에게 질문하십니다. 시험하는 질문도 아니고 어려운 것을 요구하는 질문도 아닙니다. 소경의 입장에서 가장 답하기 쉬운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여리고 소경의 입에서 다시 보기를 원한다는 고백을 듣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상황을 구체화하시면서 소경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시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바디메오의 눈이 밝아 졌습니다. 다시 보게 되었으니 하고 싶은 일들이나 가고 싶은 곳도 많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을 만나서 자신이 더 이상 죄인이 아님을 밝히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디메오는 그 길로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소경 바디메오는 예수님을 부르짖는 행동부터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결심까지 우리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바디메오의 외침을 외면하지 않으신 예수님, 그에게 다정하게 말씀하시고 다시 보게 해 주신 예수님, 우리들도 예수님의 긍휼하심을 간절히 구하고 은혜의 손길을 체험하기 원합니다. -河-

소경 바디매오 3

연속해서 살펴보고 있는 여리고 소경 거지 바디메오는 자신이 스스로 표현했듯이 불쌍한 인생입니다. 길가에 주저앉아서 남의 손끝만 바라보는 절망적 삶을 살고 있습니다. 중간에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서 시력을 잃었기에 바디메오가 느끼는 좌절감은 말할 수 없을 만큼 컸을 것입니다.

그가 사는 길은 은혜를 힘입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스스로 일어날 수 없는 저주받은 인생이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그를 죄로부터 풀어주어야 합니다. 앞을 못 보게 된 것이 죄를 지은 결과라는 사람들의 판단과 따가운 눈초리로부터 자유케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죄의 권세를 주관하는 하나님의 용서가 꼭 필요합니다. 바디메오의 눈을 뜨게 해서 새로운 삶을 살수 있도록 이끌어 줄 수 있다면 금상첨화입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기적도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소경 바디메오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다가왔을 때 사생결단을 하고 외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절박한 외침입니다.

복음서 속에 나타난 예수님은 밝은 눈과 귀를 갖고 계심에 틀림없습니다. 웬만한 외침을 그냥 스쳐지나가지 않으십니다. 뒤로 슬며시 다가와서 옷깃을 만진 여인의 손놀림도 예수님은 감지해 내십니다. 38년 동안 병을 앓고 있는 베데스다 연못의 중풍병자도 외면치 않고 포착해 내십니다. 나인성에 들어갈 때 장례행렬과 마주칩니다. 외아들을 잃고 슬픔에 가득 차 있는 나인성 과부의 모습과 마음도 알아차리십니다. 키가 작은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의 얼굴을 한번만 보고 싶어서 사람들의 이목을 무릅쓰고 나무에 올라가서 앉아 있었는데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다가오셔서 그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을 찾고 부르는 사람들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셨고, 자신의 은혜와 능력을 구하는 사람들을 친히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애타게 부르짖던 여리고 소경의 외침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소경이 예수님을 부른다고 윽박질렀지만 예수님은 여리고 소경의 외침에 발걸음을 멈추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발걸음을 멈추는 순간 사람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을 것입니다. 이제 현장에는 예수님과 여리고 소경만 남겨져 있는 듯 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입을 여십니다.:“그를 부르라”

소경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목소리가 남달랐을 것입니다. 불쌍한 인생 소경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신 목소리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 조용히 하라고 소경을 야단치던 사람들이 이제는 소경을 향해서 부드럽게 말합니다.:“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이처럼 군중들의 심리는 조변석개처럼 변덕스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의 말을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여리고 소경처럼 예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드리고, 오직 예수님께만 집중하는 영적 집중력이 매 순간 요청됩니다.

다음 한 주간 우리의 인생길에 머물러 서서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을 만나길 원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서로 소통을 하지만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멈추시는 발걸음과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河-

소경 바디매오 2

여리고 소경 거지, 디메오의 아들 바디메오 –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마가복음 본문 속의 주인공입니다. 자신의 이름도 잃어버린 채 아무런 존재감도 없이 길가에서 구걸을 하며 살아가는 저주받은 인생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기에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할 수 없습니다. 일어서서 마음대로 걸어갈 수 없는 주저앉아 있는 인생입니다. 길가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타인 의존적 인생이기에 더욱 불쌍합니다.

바디메오가 앉아 있는 곳에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모여든 군중들이 다가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각자가 커다란 기대를 갖고 예수님과 더불어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는 군중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따르는 성공지향적인 발걸음들입니다.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가족과 생업을 버리고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남달랐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들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군대처럼 많은 귀신들도 예수님 앞에서 벌벌 떨었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고 계십니다. 오죽했으면 요한과 야고보 형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했을까요.

소경 바디메오는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오시는 길목에서 두 명의 소경을 고쳐주셨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

입니다. 여리고 세무서장 삭개오도 예수님께서 찾아 주셨고 그에게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복을 선포하셨다는 소식도 들었을 것입니다. 앞은 볼 수 없지만 귀는 밝습니다. 게다가 귀동냥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소경 바디메오가 “나사렛 예수”가 오신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이 다가오고 계신 것입니다. 눈을 뜰 수 있는 행운이 자신에게도 찾아 온 것입니다.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그 만큼 절박했을 것입니다.

바디메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은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의 자손 가운데 메시야가 태어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나사렛 출신 예수가 곧 메시야라는 말이 “다윗의 자손 예수”라는 고백입니다. 바디메오가 일자무식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막무가내로 달려 나가는 몰상식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바디메오는 괜찮은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가 중간에 시력을 잃은 것 같습니다. 디메오의 아들로 불린 것을 보면 아버지 디메오가 지명도가 있는 인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꾸짖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예수님을 정확히 메시야라고 부르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현재 모습만 보고 저주하고 꾸짖습니다. 거지, 소경 주제에 감히 어디를 나서냐는 것입니다. 바디메오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재차 부르짖습니다.:”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불쌍히 여겨달라는 외침은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인 인간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를 사모하는 외침이기 때문입니다.

바디메오는 주위의 면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그의 마음은 오직 예수님을 향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했습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한 주간 주님을 향해서 부르짖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키리에 엘레이손)”-河-

소경 바디매오 1

앞으로 4주 동안 함께 나눌 말씀은 소경 바디메오가 예수님을 만난 사건입니다. 여섯 구절 밖에 되지 않는 짧은 말씀이지만 바디메오가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되는 과정을 차근차근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본문의 시점은 갈릴리 사역을 마치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때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십니다. 무거운 발걸음이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의연하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여리고라는 도시가 있었습니다. 여리고는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여서 사막을 지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상인들이 꼭 지나가는 곳입니다. 종려나무로 유명했던 여리고에 커다란 세관이 있었는데 그곳의 세리장이었던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것도 성경에 나옵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15마일 정도 떨어져 있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예수님을 쫓는 허다한 무리들이 여리고성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퍼졌기에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예수님께서 어떤 기적을 베푸실 지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따랐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늘 말씀하시던 대로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실 줄 알고 예수님을 추종하던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이나 무리들은 개선장군처럼 여리고를 떠나서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이 십자가의 길임을 아셨던 예수님의 마음은 무거우셨을 겁니다. 그때 여리고 어귀에 한 소경이 앉아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디메오라는 사람의 아들입니다. 자신의 이름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유명했든지 아니면 당시의 풍습대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불렸을 것입니다. 바디메오의 직업은 거지입니다. 길 가에 앉아서 구걸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는 뜻입니다. 당시에는 소경으로 태어난 것을 두고 자신이 죄를 지었든지 아니면 부모가 죄를 지어서 그랬다고 믿었습니다. 바디메오의 경우 날 때부터 소경이었는지 아니면 중간에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하여튼 저주받은 인생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 가에 앉아 있지만 외로운 인생입니다. 남의 손을 바라보면서 구걸하면서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바디메오는 타인 의존적인 삶을 살면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여리고 도시의 한 켠 길가에 앉아서 구걸을 하는 바디메오의 모습 속에는 우리의 모습이 거울처럼 들어있습니다. 물론 우리들은 바디메오에 비할 데 없이 훌륭합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들 역시 사람들이 오가는 길가에 앉아 있는 소경 바디메오처럼 세상에 털썩 주저앉아서 사람들의 처분을 기다릴 때가 종종 있습니다. 사람들의 도움은 궁극적인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바쁘고 흥청거리는 세상 속에 살지만 혼자서 외로움을 곱씹기도 합니다. 두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만 정작 하늘의 진리를 분별하는 영적인 눈이 감겨 있을 때도 있습니다.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한 채 필요 없는 것들을 바라보면서 헛된 꿈을 꿉니다. 어쩌면 소경 바디메오보다 더 불쌍해 보입니다. 그러다보니 늘 갈증을 느낍니다. 영적 목마름입니다. 예수님께 나가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 때 궁극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입니다. 우리들에게도 예수님의 도움의 손길이 꼭 필요합니다.-河-

참된 예배자 – 온전한 삶으로

올해 주제인 <참된 예배자가 됩시다>에 대한 연속 설교 마지막 시간입니다. 처음 시간에 이사야 말씀을 갖고 소개했듯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예배하는 존재로 지으셨고 주님의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사43:7). 이사야 43장 21절에서도 “이 백성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찬송은 말 그대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는 대표적인 행위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신앙 한 가운데 예배가 있음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이기에 예배하는 우리들의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배웠듯이“영과 진실로”예배해야 합니다. 시편 50편에서는 예배자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들을 자세히 소개하였습니다.:감사하는 마음, 서원을 갚는 신실함과 순종, 어려울 때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는 믿음. 신명기 6장 말씀을 살펴보면서 예배자의 마음 한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사랑고백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배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되시고 구원자 되신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서, 목숨을 다해서, 힘을 다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는 시편 51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은 상한심령이라는 말씀을 나눴습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부서진 마음까지 기뻐 받으십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의 상한 심령이 새롭게 재창조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이처럼 예배는 우리들 신앙 한 가운데 위치해 있습니다.

참된 예배자로서의 마음가짐이 준비되었다면 그것이 삶으로 이어져야합니다. 오늘처럼 주일에 교회에 와서 성도들과 더불어 예배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찬양과 기도 그리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예배후의 교제를 통해서 서로를 격려하고 성령 안에서 하나됨을 확인합니다. 여기까지는 대부분의 교회나 성도님들이 잘 하시는데 그 다음 단계를 깜빡할 때가 많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세상으로 나가서 살아가는 엿새 동안의 삶도 예배가 되어야한다는 사실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이 말하듯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삶의 예배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로마서 12장 1절에 있듯이 우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몸은 우리의 존재 또는 삶 전체를 아우르는 말입니다. 우리들의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예배로 드려져야 하고, 우리의 모든 삶이 예배가 되어야한다는 말씀입니다.

몸으로 드려지는 예배, 즉 우리의 몸이 가는 곳이 예배처소가 되고 우리가 하는 일이 곧 예배가 되는 것이 삶을 통한 예배입니다. 세상 속에서 이런 삶을 사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세상은 교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심한 경우 하나님을 대적하는 곳에서 우리가 일을 하고 부대끼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도 우리의 예배를 기다리십니다. 좋을 때는 감사의 예배를, 힘들 때는 부르짖는 외침의 예배를, 마음이 상했을 때는 부서진 마음을 드리면서 삶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와 허락하신 생업과 가정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삶 속에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일터가 하나님 나라로 변할 것입니다. 삶이 주님 앞에 드려지면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깊이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