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3

신령과 진정으로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은 점점 더 진지한 대화로 발전됩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유대 청년이신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마실 물을 달라는 것으로 대화가 시작되었지만 예수님의 깊은 뜻은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생수의 복음을 소개하고 싶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낮에 물을 길러 나왔던 여인의 깊은 곳을 건드리십니다. “네 남편을 데려오라” – 이것은 사마리아 여인의 모든 삶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요, 꼭꼭 숨겨놓고 싶은 사연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문제를 해결해 주고 싶으셔서 생수의 복음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향해서 선지자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는 예배로 넘어갑니다. 처음에 예수님께서 마실 물을 달라고 했고, 여인은 한 번 마시면 다시 목마르지 않는 기적의 물을 달라고 했는데 지금은 예수님이나 사마리아 여인이나 물에 관심이 없습니다. 대신에 여인이 제기한 예배의 문제를 놓고 예수님께서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 조목조목 가르쳐주십니다.

당시의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림신 산에서 따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여인이 살고 있던 수가성은 구약의 전통적인 성지인 세겜 근처에 있었는데 그곳에 그림신산이 있었고 주전 400년경부터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 산에서 예배했습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면서 예배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다윗과 솔로몬 시대 이후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한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반면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기 전부터 조상들이 세겜에서 예배했다면서 자신들이 정통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두고 예수님께서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가장 먼저 바뀌는 것이 예배에 대한 자세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당연히 교회에 나오고 예배에 참석합니다. 예수님을 깊이 만난 사람이라면 예배가 감격스럽고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합니다.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뿐만 아니라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예배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선지자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에 자신이 갖고 있던 예배에 대한 궁금증을 예수님 앞에 풀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림신 산이나 예루살렘과 같은 장소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배드리는 장소가 어디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어디서 예배하든지 하나님께 예배하면 됩니다. 아무리 자신들이 정통이라고 말해도 예배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올바른 예배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배자의 마음가짐도 강조하십니다.“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령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의 임재와 역사 가운데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영(spirit)이시기에 신령으로 예배해야합니다. 진정은 거짓 없는 진실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정직한 마음을 기뻐 받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여인이 메시야가 오시면 이 모든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을 보탭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바로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여인에게 드러내십니다. 여인은 물동이를 내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메시야를 만났다고 자랑하고 전도합니다. 자신을 구원해 줄 메시야를 만난 여인은 이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모든 상처와 아픔은 회복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과 삶을 만져주신 예수님께서 오늘 예배 가운데 우리 모두에게 같은 은혜를 내려주실 믿습니다. -河-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2

네 말이 참되도다

유대인이라면 상종하지도 않았던 사마리아땅을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당시에는 천대받던 여인에 먼저 말문을 여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내려오시던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성에 들렸을 때 생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사마리아를 지나가셨을 것입니다. 천년 가까이 이어져온 편견을 깨기 위함이었고, 무엇보다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사마리아에도 펼치기 위함이었습니다.

한 낮에 물을 길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먼저 말을 거셨습니다. 물을 달라는 화두로 사마리아 여인과 말문을 트신 것입니다. 먹는 물로 시작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로 발전합니다. 처음에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던 여인도 한번 먹으면 다시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신다는 말씀에 바싹 다가서면서 관심을 보입니다. 인적이 드문 한 낮에 물을 길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부담스러워서 한 낮에 왔을 것입니다. 살아가는 것이 버거우니 물을 길러 오는 것도 신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 모금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구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여인의 마음을 읽으셨음에 틀림없습니다. 우물가에서 여인을 만나는 순간 그녀의 심정을 알아차리셨기에 물을 달라고 먼저 말을 거셨을 것입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달라는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어쩌면 생뚱맞은 그러나 하기 힘든 말을 하십니다: “네 남편을 불러오라.” 예수님께서 여인의 개인사를 건드신 것입니다. 물을 달라고 했을 때 퉁명스럽게 대답할 정도의 여인이라면 남편을 불러오라는 말에 화를 낼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여인이 솔직합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마음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는데 지금 살고 있는 남자도 그녀의 남편은 아닙니다. 유대인의 율법에 의하면 세 번까지 결혼할 수 있는데 이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습니다. 이 한 가지 사실만 보아도 여인이 살아온 인생이 어떠했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인생이 자기 마음대로 풀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사람들의 이목이 부담스러워서 인적이 드문 한 낮에 물을 길러 우물가에 온 것입니다. 마음에 깊은 상처와 아픔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을 걸었을 때 퉁명스럽게 대답한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여인의 아픔을 이미 아시고 차근차근 그녀에게 생수와 같은 영생의 복음을 소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마음이 열린 사마리아 여인도 자신의 상황을 솔직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를 향해서“네 말이 참되도다”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선지자임에 틀림없다고 고백합니다. 우물가에 마실 물을 길러 온 여인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의 복음이 그녀에게 임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가장 깊은 곳을 만져주셨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들었던 마음의 아픔과 상처를 예수님께서 건드리셔서 그녀로 하여금 예수님을 선지자라고백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신앙은 마음 깊은 곳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때 임하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치유와 회복의 손길입니다 -河-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1

물을 좀 달라

누구든지 조금씩은“편견(偏見)”을 갖고 사람들이나 세상을 바라보게 마련입니다. 말 그대로 한쪽으로 치우쳐서 판단하고 그것만이 옳다고 여기는 태도입니다. 편견이 지나치면 사고나 관계에서 균형을 잃게 됩니다. 만사를 자기중심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자칫 외톨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모든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빌4:5).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마22:39). 이처럼 신앙생활은 자기중심에서 하나님중심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거기서 이웃사랑까지 나가면 금상첨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년간의 공생애기간 동안 편견 없이 모든 사람들을 만나셨고 그들에게 하늘나라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사건이 앞으로 한 달 동안 살펴볼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 당시 사마리아는 자신들만의 신앙을 고집했고 그림신산에서 따로 예배하면서 예루살렘 사람들과 적대관계에 있었습니다. 물론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인들도 사마리아 사람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외국 사람들과 섞여 살면서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버렸다는 이유로 천한 백성 취급을 했습니다. 경건하다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땅을 밟는 것조차 부정하다고 생각해서 먼 길을 돌아서 다닐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내려가는 길에 사마리아를 들리십니다. 수가라는 동네의 우물가에서 쉬고 계실 때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 왔습니다. 우리 시간으로 정오에 혼자서 물을 길러 온 것을 보면 이 여인에게 특별한 사연이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말을 건네십니다.:“물을 좀 달라.” 외간남자가 여인네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것도 당시 관습에 맞지 않습니다. 게다가 유대출신인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접근하신 것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물가라는 환경에 맞게 물이라는 주제로 여인과 대화를 시작하십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말씀에 툴툴거리면서 답변을 하다가 한 번에 갈증을 해소하는 기적의 물을 말씀하시자 여인이 바싹 다가섭니다. 예수님께서 한번 먹으면 다시 목마르지 않는 특별한 물(magic water)을 주실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먹는 물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물가에서 여인을 만나셨고, 그 여인에게 특별한 사정이 있음을 감지하신 예수님께서 물이라는 소재를 갖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생수(living water)를 제시하십니다. 먹는 물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은 마시는 물이 아니라 생명으로 인도하는 영생의 물이었습니다. 생수의 샘이 복음 속에 들어있고, 복음을 체험한 사람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게 됩니다. 이처럼 우물가에서 시작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먹는 물로 시작해서 기적의 물을 지나서 생수로 발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땅을 밟으시고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시면서 편견을 깨뜨리셨습니다. 사람들이 꺼려하는 곳에 가셨고 당시로서는 천한 신분인 여인에게 생수의 복음을 소개하셨습니다. 우물가에 걸맞은 물을 주제로 여인의 관심을 끌어내셨습니다.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편견 없이 모든 사람에게 임합니다. 복음의 메시지는 우리들 각자의 상황에 맞게 다가옵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가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도 찾아오십니다. 생수의 복음을 주시기 위함입니다.-河-

일상의 기도

2012년 기도에 대한 연속설교 마지막 시간입니다. 올해는 특별히 구약의 인물 네 사람을 통해서 우리의 기도생활을 점검하고 다시금 기도의 자리로 나오길 결심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시간입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댕기는 줄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올려지고, 하나님을 마음에 모십니다. 기도하는 시간만큼은 세상의 시름을 잊을 수 있습니다. 기도 시간은 우리들 삶의 오아시스입니다. 기도는 온 세상을 마음에 품을 수 있을 만큼 지경이 넓습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구약의 인물은 창세기의 에녹입니다. 그동안 살펴본 히스기야나 한나 그리고 지난주의 다니엘과 달리 에녹은 기도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에녹에 대한 창세기의 말씀은 단지 4절밖에 되지 않고 그것도 아담의 족보 속에 등장할 뿐입니다. 그런데 에녹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갔습니다.:“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11:5).

그렇다면 에녹이 어떻게 해서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께 갈 수 있었을까요? 창세기 5장 24절에 의하면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여기서 동행의 의미는 하나님과 더불어 인생길을 걸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것이라고 풀어서 설명합니다. 에녹은 하나님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모든 인생길을 하나님과 더불어 행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로마서 12장 1절 말씀대로 삶 자체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드려졌다는 것입니다.

에녹은 아담의 7대손으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 하나님께서 최초로 만드신 아담이 살아있었습니다. 노아의 홍수 이전에는 인간의 수명이 꽤 길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의 족보를 살펴보면 에녹은 아담과 더불어 308년을 함께 살았으니 아담으로부터 하나님이 누구신지, 에덴동산은 어떤 곳이었는지,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경위까지 많은 얘기를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에녹은 비록 타락한 세상에 살지만 에덴동산처럼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했고 하나님께서 그를 기쁘게 여기셔서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 데려가신 것 같습니다.

에녹이 어떻게 하나님과 평생을 동행했을까요? 그는 하나님과 친밀하게 대화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단둘이 만나는 기도의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매사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데 온 마음을 쏟았을 것입니다. 그의 삶 자체가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심을 매순간 경험했을 것입니다.

지난주일 다니엘에게서 배운 대로 우리는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시간에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약속을 지키는 신실함입니다. 또한 히스기야나 한나처럼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 어려운 상황을 솔직히 아뢰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의 삶 자체도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리면서 일상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연초에 나눠드린 <하나님의 임재연습>에 나오는 로렌스 형제처럼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기도가 되기 원합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깊이 누리시길 바랍니다. 참빛 교회 성도님들께서 일상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체험하시길 바랍니다.-河

다니엘의 기도

2012년 기도에 대한 연속설교에서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기도의 인물들을 통해서 올바른 기도에 대해서 배우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인물은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에 의해서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단순한 포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총명한 소년들을 장차 왕을 보좌할 관리로 키우기 위해서 특별히 데려온 것입니다. 다니엘과 함께 왕궁에 잡혀온 소년들 가운데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하나님을 잘 믿었습니다. 다니엘서의 처음 여섯 장에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이방 땅 바벨론에서 어떻게 그들의 신앙을 지켰고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였는지 알려줍니다. 흥미진진합니다.

이들에게는 매 순간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포로로 잡혀왔기에 하나님을 마음대로 섬길 수도 없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도 시험거리가 되었습니다. 왕궁에서 특별 교육을 받으면서 진수성찬을 먹을 수 있었지만 식탁의 고기들은 대부분 바벨론 신에게 제사지낸 음식들입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해서 이방의 음식으로 자신의 몸을 더럽히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채식만 먹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얼굴을 다른 소년들보다 더 빛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네 소년가운데 다니엘은 더욱 뛰어났습니다. 그는 꿈을 해석하는 능력까지 갖고 있었는데 당시는 꿈을 정확히 해석하는 것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왕의 꿈을 해석합니다. 그리고 바벨론의 고위관리가 됩니다. 다른 소년들도 이방 땅에서 출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신앙이 출세에 걸림돌이 됩니다. 사람들이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하나님 믿는 것을 두고 모함했기 때문입니다. 쇠를 녹이는 풀무 불에도 들어갔지만 하나님께서 살려 주셨습니다. 다니엘과 세친구들은 목숨걸고 끝까지 신앙을 지켰습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했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니엘이 120명의 고위 관리들 가운데 세 명뿐인 총리로 임명되었을 때 그를 모함하던 사람들로 인해서 사자 굴에 던져지는 말씀입니다. 다니엘은 군계일학이어서 그의 총명함과 유능함을 견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유다라는 조그만 나라에서 포로로 잡혀온 사람이 출세를 하니 시기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왕궁의 대신들이 다니엘을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위해서 음모를 꾸밉니다. 30일 동안 바벨론 왕이 아닌 다른 누구에게라도 절을 하면 사자 굴에 던져서 죽게 하자는 법을 신설합니다. 이것은 다니엘을 겨냥한 음모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왕이 이 조서에 도장을 찍어서 만방에 공포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니엘에게 또 다시 위기가 닥친 것입니다. 집에 돌아온 다니엘은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창문이 열린 방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향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성전을 바라보면서 기도한 것입니다.“전에 하던 대로”- 다니엘은 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어려운 순간에만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늘 기도했습니다. 방은 다니엘의 기도처였고, 하루에 세 번씩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했습니다. 기도로 무장된 다니엘이었기에 사자 굴에 던져 진다해도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다가 순교하는 것이기에 감사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으면 건져주실 것이니 감사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구해주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과 함께 하심을 다니엘을 통해서 다시금 배웁니다.-河-

한나의 기도

2012년 기도에 대한 연속설교에서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기도의 인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올바른 기도에 대해서 배우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민족적으로 커다란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에도, 앗시리아 왕에게 항복하지 않고 하나님을 꼭 붙들었던 히스기야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적군이 보낸 선전 포고문을 앞에 펼쳐놓고 기도하는 히스기야왕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만큼 구체적으로 아니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눈으로 보시고 귀로 들으심을 확신하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기도의 인물은 한나입니다. 한나라는 이름 속에는 “은혜”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한나는 에브라임땅 명문가에 시집왔습니다. 그녀의 남편 엘가나는 사려가 깊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한 가문에 시집을 왔으면 대를 이어야 하는데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엘가나에는 다른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때 풍속은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한나는 마음이 늘 무거웠습니다. 그때마다 남편 엘가나는 한나에게 더 많은 정을 주면서 위로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브닌나입니다. 브닌나가 아들을 낳으면서 한나를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브닌나는 한나를 매우 힘들게 하였습니다. 약이 오를 만큼 지능적으로 괴롭혔다는 의미도 본문에 들어있습니다.

남편이 잘해주었지만 한나는 괴로웠습니다. 남편의 사랑으로 채워질 수 없는 그 무엇이 한나의 마음에 있었던 것입니다. 한번은 온 가족이 예루살렘에 제사를 드리러 갔을 때 한나가 식음을 전폐합니다. 남편의 위로도 소용없을 만큼 마음이 무척 상했습니다. 결국 슬며시 성전에 들어가서 기도합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 제사장 엘리는 한나가 술이 취한 줄 알았습니다. 이처럼 한나는 주위를 의식하지도 않고 오직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쏟아놓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한나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사무엘이라는 아들을 주셨습니다. 한나는 하나님께 서원한 대로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이처럼 한나는 자신의 어려운 순간에, 사람으로 위로를 받을 수 없는 가슴 속의 응어리를 안고 하나님 전에 나왔습니다. 히스기야와 마찬가지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확실히 믿고 하나님 앞에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모두 털어놓았습니다. 하나님께 서원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만큼 한나의 사정이 다급했고 아들을 낳게 해달라는 한나의 마음이 간절했음을 뜻합니다. 한나의 사정을 들은 엘리 제사장이 한나에게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셨다고 확신시켜줍니다. 기도가 응답된 것을 확신한 한나의 얼굴은 곧바로 밝아졌습니다. 음식도 먹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믿고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이처럼 한나는 기도의 능력과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솔직하고 간절한 한나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그녀의 태를 열어주셨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솔직히 아뢰는 것입니다. 우리들 마음속에게는 주변에 아무리 좋은 사람들이 있어도 사람으로부터 해결될 수 없는 응어리가 있습니다. 그것을 혼자서 풀려고 애써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와서 솔직히 아뢰어야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쏟아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솔직한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간절한 기도, 절박한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한나와 같이 각자의 사정을 하나님께 솔직히/ 간절히 믿음으로 구하는 참빛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 -河-

히스기야의 기도

우리 교회에서는 매년 이맘때가 되면 기도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눕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영혼의 호흡이라고 불립니다. 숨을 쉬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듯이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인 호흡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 있습니다. 친구 간에 속삭이듯이 기도합니다. 연인처럼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의 진실된 사랑을 고백합니다. 부모님 앞에서 응석부리듯이 하나님께 우리의 소원을 아뢸 수 있습니다. 다급할 때는 울부짖으면서 긴급히 도움을 요청합니다. 상한 심령을 토해내면서 기도합니다. 온 교회가 한 목소리로 통성으로 기도할 수 있고, 개인적으로 골방에 들어가서 고요한 가운데 깊은 기도를 드릴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영적인 특권입니다. 기도의 지경은 넓고 깊고 높습니다.

신구약 성경 속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대부분 기도의 인물들이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였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2012년 기도에 대한 연속설교에서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기도의 인물들 네 사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히스기야왕입니다. 히스기야는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진 시대에 남유다의 왕이었습니다. 스물다섯 살에 왕위에 올라서 29년을 통치했습니다. 그가 통치하는 시대는 앗시리아라는 초강대국이 이스라엘을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앗시리라는 북이스라엘을 침공해서 수도 사마리아를 점령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남쪽 유다까지 정복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앗시리아의 산헤립이라는 왕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화친을 시도하지만 앗시리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히스기야의 남유다를 침공합니다. 앗시리아에는 랍사게라고 하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랍사게는 이스라엘 말을 구사할 정도의 지략가였습니다. 랍사게가 예루살렘 사람들을 말로 현혹시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것은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하나님만을 의지하자고 말하는 것은 헛된 말이라고 백성들을 꾀고 있습니다. 당시 최고의 강대국인 앗시리아와 산헤립왕을 의지하면 잘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싸움을 해도 질 것이 확실하니 미리 항복하라고 백성들을 유혹하고 급기야 히스기야 왕에게 전쟁을 포고하는 문서를 보냅니다.

오늘 본문은 앗시리아로부터 온 편지를 받아든 히스기야가 하나님 전에 들어가서 드린 기도입니다. 히스기야가 세계 최강인 앗시리아와 맞서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나라가 무너질 수도 있는 위기일발의 순간입니다. 히스기야는 랍사게로부터 온 편지를 앞에 펴놓고 기도합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간절합니다. 그는 먼저 온 천지를 창조하시고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15절).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앗시리아와 산헤립의 말과 행동을 귀로 들으시고 눈으로 보시길 간청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을 살펴보시길 바라는 기도입니다. 마지막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천하만국에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보여주시길 간구합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다급하고 간절한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앗시리아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해주셨습니다. 간절한 기도,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친히 응답해 주십니다. 히스기야처럼 하나님 앞에 나와서 간절히 기도할 때 세상을 이길 얻을 수 있음을 기억하고 다음 한 주간 기도생활에 진력합시다.-河-

믿음의 사람들 5

믿음의 사람들이라는 연속설교 마지막 시간입니다. 첫째 시간에는 시카고 구두공이 부흥사가 된 무디 선생님, 둘째 시간에는 인생의 쓴맛을 경험한 후 술주정뱅이가 되었다가 한국의 무디로 변화된 김익두 목사님, 셋째 시간에는 신혼의 단꿈을 뒤로 한 채 동방의 작은 나라 조선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와서 순교한 아펜셀러 선교사님, 그리고 지난 시간에는 계속되는 인생의 역경 속에서 신앙과 인생을 꿋꿋하게 헤쳐나간 멋진 조선의 여인 김세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 분들의 공통점은 예수님을 인생길 한 가운데서 만났고 그로부터 인생이 변화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한 후에 새로운 인생이 펼쳐진 것입니다.

이제 오늘 마지막으로 살펴볼 믿음의 사람은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의 작사가인 존 뉴턴(John Newton)입니다. 존 뉴턴은 지금부터 약 300년인 1725년 영국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배를 타고 아프리카와 인도를 오가면서 무역을 하는 선장이었습니다. 존 뉴턴의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아기 때부터 뉴턴을 목사로 키우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뉴턴이 여섯 살 때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 이후로 존 뉴턴은 새엄마 밑에서 자랐고 조금 큰 후에는 기숙학교에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는 매우 포악한 성격을 갖고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아버지를 따라서 배를 타게 되는데 그의 입에서는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상스러운 말들이 나왔습니다. 훗날에는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사와서 파는 노예선의 선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사고를 하도 많이 쳐서 노예들과 함께 지내기도 했습니다.

 

결코 새 사람이 될 것 같지 않았고 누구하나 관심을 갖지 않는 뉴턴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찾아가셔서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한번은 항해를 하다가 커다란 폭풍우를 만납니다. 모든 선원들이 물을 퍼내고 짐을 모두 바다에 던지면서 배의 침몰을 막았습니다. 그때 뉴턴은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다급한 순간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됩니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의 뿌리가 뉴턴의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계기가 되어서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뉴턴은 목사가 되어서 당시의 유명한 장로교 부흥사였던 조지 휫필드와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열심히 복음을 전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자신의 삶이 죄악 가운데 빠져있었음을 알았기에 자신을 구원해 준 하나님의 은혜에 더욱 감격했습니다. 뉴턴 자신은 죄에 대해서 무력했고 고의로 죄를 짓는 못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뉴턴을 찾아 오셨고 그에게 복음의 빛을 비춰주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찬송시로 적어서 고백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즐겨 부르는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Amazing Grace)”입니다. 단순히 시를 쓴 것이 아니라 뉴턴 자신의 삶과 신앙의 고백이 깃들어 있기에 진정으로 은혜를 끼치는 찬송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그 큰 사랑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그 사랑을 깊이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믿음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인생, 멋진 인생을 살아갔습니다. 에베소서 2장 4절 말씀대로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이 참빛 교회 식구들 위에 그대로 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河-

믿음의 사람들 4

먹고사는 것이 풍족하고 세상에서 염려할 것이 없으면 자연스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거추장스럽고 하나님만 생각하라는 성경말씀이 부담스럽게 다가옵니다. 그러고 보면 기독교인에게 닥치는 어려움은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요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귀한 시간들입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을 간절히 믿은 사람들은 대개 어려움을 겪거나 세상에서 소외된 계층들이었습니다.

2천 년 전 예수님께 나온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상에서 죄인 취급받던 사람들, 질병으로 인해서 몸이 망가진 환자들, 낙심가운데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 말씀을 통해서 위로받고 힘을 얻었습니다. 그 가운데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았던 여성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성들의 활약은 두드러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는 순간에도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사람들도 물론 여인들이었습니다. 교회가 세워지는데도 여성들의 역할이 꽤 컸습니다.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해준 이래 여성들의 활동은 우리 민족의 복음화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전도 부인이 되어서 동네마다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보급하는 일도 담당했고, 사경회와 봉사를 통해서 교회가 굳게 서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더불어 신학문과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도 여성들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우리가 살펴볼 김세지라는 여성이 있습니다. 김세지는 1865년 평안남도 여유에서 딸 넷만 있는 집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열두 살 때 부친이 사망했고, 당시의 관습대로 만나본 적도 없는 남자에게 열여섯에 시집을 갔지만 2년 만에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때는 남편을 잃은 여자들을 보쌈해가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김세지는 보쌈의 공포 속에 시달리면서 하루하루를 살다가 시어머니의 주선으로 23세가 되었을 때 김종겸이라는 사람과 재혼합니다. 김세지의 새 남편은 학문과 재산을 겸비한 선비였지만, 나중에는 그만 주색잡기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김세지가 교회에 나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남편이 새사람이 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부인이 교회에 나가는 것을 안 남편은 그녀를 때리고 집에 가두곤 했습니다. 김세지는 자신을 핍박하는 남편을 위해서 기도하고 결국 남편을 예수님께로 인도합니다. 하지만 김세지의 인생에 또다시 어려움이 닥칩니다. 두 번째 남편도 콜레라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김세지는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을 신앙의 힘으로 이겨냈습니다. 그때부터 복음을 전하는 일에 더욱 매진합니다. 이름도 생겼습니다. 김세지 역시 당시 많은 여성들처럼 이름이 없었습니다. 선교사들은 그녀를“새디(Sadie)”라고 불렀는데 그것이 세지가 되었습니다. 김세지는 복음을 전하는 전도부인과 성경을 보급하는 매서인으로 열심을 냅니다. 평양의 남산현 교회에 출석하면서 일 년에 2천 번 넘게 심방했습니다. 그는 남성들도 하지 못하는 거친 일을 하면서 몸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쩌면 청상과부로 불우한 인생을 살수밖에 없었던 한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면서 한국 교회사에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남겼습니다. 복음이 그녀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마음과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동시에 내 몸처럼 이웃을 사랑할 때 신앙이 온전해 집니다. 김세지야말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본을 보여준 멋진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河-

믿음의 사람들 3

우리나라에 기독교 복음이 전파된 것을 두고 당나라에 전파된 경교(네스토리우스교)가 신라에까지 전해졌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하지만 증거가 확실치 않을뿐더러 설령 신라시대에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해도 그것이 한반도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습니다. 또한 일찌감치 천주교 선교사를 받아들인 일본이 임진왜란과 더불어 군종신부를 한반도에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고향인 경남 웅천에 군종신부 세스페데스가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처럼 천주교가 먼저 한반도에 전파되었습니다. 중국에 갔던 이승훈이 영세를 받고, 영정조 시대의 실학파 학자들이 서양문물과 더불어 천주교를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천주교는 조선시대에 금기시된 종교였기에 절두산이라는 지명이 생길 정도로 수많은 순교자를 냅니다.

한반도에 개신교가 전래된 것은 1627년 네덜란드인이자 개신교인들이었던 벨트브레(박연)이 귀화해서 제주도에 살게 되고 하멜이 제주도에 표류했다가 네덜란드로 돌아가면서 부터입니다.1832년에는 독일 선교사 구츨라프가 동인도 회사의 통역관겸 선교사로 한반도에 상륙해서 주기도문을 우리말로 번역해주고, 충청도 일대에 감자씨를 보급하기도 했습니다.1882년에는 만주 국경에서 개신교 선교사들과 복음을 받아들인 조선 청년들이 연합해서 한글 누가복음이 번역되었습니다. 나라의 문을 굳게 잠가두고 쇄국정책을 고집하던 조선에 복음의 빛이 서서히 비추기 시작한 것입니다. 1884년에는 알렌 선교사가 왕실의 주치의가 됩니다. 이때부터 서양 선교사에 대한 인상이 좋아지기 시작했고, 일본에서 기독교 복음을 접한 이수광이 미국의 선교본부에 한반도에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하면서 드디어 아펜셀러와 언더우드가 1885년 부활절 아침 인천항을 통해서 첫발을 내딛습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모두 미국 동부에서 학생시절 예수님을 만났고 선교사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 친구들이었습니다. 미혼인 언더우드는 장로교에서 파송한 선교사였고, 기혼인 아펜젤러는 감리교 본부에서 파송을 받고 일본을 거쳐서 한반도에 들어온 것입니다. 언더우드는 1887년 14명의 조선인 신자들이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새문안 교회의 전신입니다. 아펜젤러 역시 자기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는데 정동교회의 시작입니다. 아펜젤러가 학생 2명과 더불어 시작한 학교가 배재학교로, 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가 자기 집에서 고아원 스타일의 학교를 시작한 것은 경신학교로 발전했습니다. 새문안 교회는 언더우드가 세운 최초의 장로교회입니다.

이들은 20대에 조선에 와서 자신들의 젊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조선을 위해서 불태웠습니다.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정동교회안에 웹잇 청년회를 만들면서 그것이 YMCA로 발전하는 토대를 세웠습니다. 기독교 신문을 발행하였고 성경 번역에도 앞장섰습니다. 이처럼 지칠 줄 모르는 선교활동으로 인해서 40세임에도 불구하고 아펜젤러 선교사의 모습은 꽤 나이가 들어보였다고 합니다. 1902년 아펜젤러 선교사는 성경 번역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목포로 내려갑니다. 서해 어청도 앞을 지날 때 아펜젤러가 타고 있던 배가 짙은 안개로 시야를 잃고 다른 배와 충돌하면서 그만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때 아펜젤러의 나이는 44세였습니다.

오늘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한반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도착한 지 127년 째 되는 부활절입니다. 어두움과 죽음의 세력에 휩싸여 있던 조선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거듭 태어나게 한 젊은 선교사들이 있었기에 한국 교회가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빚을 갚기 위해서 수많은 선교사들이 복음이 없는 미지의 국가들과 종족들을 찾아갑니다. 이처럼 복음을 전하는 발걸음은 늘 아름답습니다. 복음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이 써 나가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할렐루야!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