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 집 (1)

오늘은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신 새성전에서 첫 번째로 예배하는 날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듯이 우리 교회가 이토록 아름다운 성전을 갖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증거입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우리 모두 한 마음으로 감사의 찬양을 드리기 원합니다. 할렐루야!

우리 교회가 자체건물을 갖게 된 것을 두고 몇 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모인 에클레시아(부름받은 성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건물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 안에 성도가 없거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이 없다면 그곳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건물은 예배와 사역을 돕는 도구요 그릇임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이제는 참빛 교회 식구들 한 분 한 분이 하나님 백성으로 더욱 멋지게 세워지셔야 합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는 성도들로 우리 교회가 가득 차야 합니다. 아름다운 성전만큼이나 우리의 신앙도 멋지게 자라가야 함을 잊지 말고 이제는 신앙 성숙에 더욱 매진합시다.

둘째로, 교회는 하나님께 속해야 합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교회가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께서 주인 되신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거기에 성령의 임재와 역사가 임했을 때 주님의 교회가 온전해 집니다. 구약 성경의 솔로몬은 성전건축을 마치고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립니다. 앞으로 우리가 연속해서 살펴볼 말씀입니다. 말 그대로 봉헌(奉獻)- 하나님께 성전을 드리는 것입니다. 성전은 마땅히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전에서의 모든 활동과 사역들은 하나님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행여나 하나님보다 자신의 생각이나 이익을 앞세우는 일이 교회 안에 생기면 안 됩니다. 우리는 매사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실까”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임재하시고 우리 교회를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셋째로, 교회는 기도하는 집입니다. 교회에 기도의 불이 꺼지면 교회로서 존재가치가 사라진 것입니다. 솔로몬도 성전을 하나님께 바치면서, 성전에서 드리는 기도에 하나님의 응답이 임하기를 간절히 구했습니다. 부르짖는 기도와 외치는 기도, 상한 마음의 기도, 이웃과 세상을 위한 중보기도 – 기도가 살아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미국 교회를 사용하느라 기도할 시간을 낼 수 없었습니다. 이제 마음껏 기도할 수 있는 터전이 생겼습니다. 참빛 교회성전에 기도의 불이 활활 타오르길 바랍니다. 기도로 세워지는 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교회 뿐 아니라 우리들의 가정과 개인의 삶도 기도로 세워집니다. 성전에 오셔서 마음껏 부르짖으시고 외치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다시금 아름다운 성전을 허락하신 우리 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동안 교회 이전을 위해서 앞에서 뒤에서 그리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모든 성도님들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더욱 겸손히 멋진 교회를 세워나갑시다.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입니다. 할렐루야! -河-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이라는 찬양 가사처럼 우리들은 참 좋으신 하나님(God is so good)을 믿습니다. 여기서“좋다”라는 말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틀림없으시고(의로우시고), 선하시고,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분으로 임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하늘 아버지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호세아 말씀에서 가정을 버린 아내를 끝까지 찾아갔던 남편처럼 하나님께서는 등을 돌린 자신의 백성들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절대로 버리지 않으십니다. 무엇보다 우리들이 하나님만을 인정하고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 다른 모든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처럼 성경이 가르쳐주는 하나님의 모습을 차근차근 살펴보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말 그대로 좋으신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을 삶 속에서 체험한다면 우리들도 앞에서 소개한 찬양의 마지막 가사처럼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좋으신 하나님과 더불어 사랑의 하나님(God is love)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요한일서 4장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잘 가르쳐줍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8절/16절)고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말씀대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은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것을 통해서 증명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신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지를 가장 잘 보여줍니다. 그래서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두고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내리사랑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자식이 알아주지 않을 때가 많지만 부모님은 무조건적으로/변함없이 자식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내리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고 그 사랑에 감사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목숨까지 바치면서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지금도 공기처럼 우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우리가 할 일은 마음을 열고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좋으신 하나님/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 다음에는 받은 사랑을 이웃들에게 조건 없이 나눠줘야 합니다. 값없이 받은 사랑이기에 값없이 이웃과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분수처럼 넘쳐서 세상으로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갖고 있기보다 이웃과 더불어 나눌 때 더욱 풍성해 지고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죽음이나 심판이 와도 담대합니다.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임하고 그 사랑이 세상으로 흘러갈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이 하나님 나라로 변할 것입니다. 그때까지 더욱 열심히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과 나누기 원합니다.-河-

너는 내 백성이라

하나님 – 어려서부터 또는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던 분들에게는 익숙한 말이지만 뒤늦게 하나님을 믿으신 분들에게는 생소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이라고 말해도 그것이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어도 하나님에 대한 막연한 생각을 지우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경은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가르쳐주는데 그것이 쉽지 않았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에 보이는 신들을 찾아가서 그것들을 숭배했습니다. 대표적인 신이 가나안의 토속 신이었던 바알이었습니다. 바알은 황소와 같은 모습을 갖고 있었습니다. 바알을 숭배하면 큰 복을 받고 자식을 많이 낳는 번영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알을 믿는 종교는 성적으로도 문란해서 육체의 탐욕을 채워주기도 했습니다. 일단 눈에 보이고 자신들에게 물질적인 복을 갖다 주고 자유롭게 즐기면서 종교생활을 할 수 있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등지고 바알을 섬겼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구약 성경의 호세아서는 이스라엘에 바알을 비롯한 이방신들을 섬기는 우상숭배가 극에 달했을 때 선포된 예언입니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를 알기 쉽게 설명하십니다. 호세아가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한 것처럼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부부관계로 가정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신부로 생각하신다면 신부된 이스라엘은 남편 되신 하나님께 순결한 모습으로 나갔어야합니다.

남편만을 사랑하면서 평생을 사는 것이 올바른 신부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신랑 되신 하나님을 놓아두고 다른 신인 바알을 남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결혼한 부인이 다른 남자를 따라 나선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자신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을 다시금 신부로 맞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에서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19-20절은 신랑 되신 하나님께서 신부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대우해 주시는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약속은“의로움”“공평함”“은총”“긍휼”“진실함”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아무리 못되고 그릇된 길로 가도 우리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변덕스럽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약속을 지키십니다. 대신에 하나님은 신부된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 저희들도 하나님을 끝까지 사랑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길 기다리십니다. 그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땅에 임하십니다. 우리들 마음에 임하시고 우리의 삶속에 임하십니다. 우리의 생업에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실로 사랑하심을 이 땅의 복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신의 백성으로 삼아주시고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이에 대한 우리의 고백은 한 가지 뿐입니다.:“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23절) 아멘 -河-

하나님의 붙드심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커다란 주제로 다섯 번째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를 향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선한 뜻을 갖고 계시다는 믿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필요합니다. 사실 교회에 오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체험이라고 누누이 말씀드린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머리카락까지 세신 바 될 정도로 우리를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 특히 성령을 주셔서 새로운 생명을 허락하시고,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을 펼쳐 보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을 미리 알고 계십니다.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들의 백합화나 공중의 새와 비교할 수 없는 귀중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가장 최고의 자리에 모시고, 하나님을 가장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좋으신 분으로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우리가 마음 문을 열고 하나님을 받아들이면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 마음과 삶 속에서 활동하십니다. 우리보다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예비하시기에 우리들은 미리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염려하는 것은 믿음이 적다는 표시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여기 저기 두리번거리면서 마음이 분산되는 것 역시 올바른 믿음의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의 필요를 미리 아시고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만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신앙의 길을 경주할 때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길과 인도하심을 체험할 수 있음을 꼭 기억합시다.

오늘 살펴볼 시편 139편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심을 가르쳐줍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두 가지 모습을 연상해야 합니다. 첫째는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5절에 있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두르시고 우리를 안수해 주십니다.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 안에 내재(內在)하십니다. 동시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멀찍이 존재하십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하늘에 계신다고 말했고 이런 하나님을 초월적인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이 세상은 물론 우리들의 인생길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십니다. 9절 말씀대로 우리가 바다 끝에 가 있더라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위치를 다 파악하십니다. 여기서 바다 끝은 절박한 상황을 가리킵니다. 시편이 쓰이던 당시에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지 못해서 바다 끝에는 폭포수와 같은 낭떠러지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바다 끝에 있다는 것은 백척간두의 아찔한 순간에 처해 있음을 뜻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능하신 손으로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오장육부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우리의 신체가 얼마나 신묘막측합니까? 우리들이 모태에서 조성되기 전에 이미 우리를 알고 계셨다고 오늘 시편기자가 고백합니다(15절). 그 하나님을 우리가‘아버지’라고 고백할 때, 하나님은 언제나 좋으신 하나님으로 우리들 각자에게 임하십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다음 한 주간 우리를 감싸시고, 하늘에서 돌보시고, 우리를 신묘막측하게 창조하신 하나님을 사모하면서 그 하나님의 마음과 손길을 삶 속에서 체험하시길 바랍니다.-河-

너희는 먼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우리들은 염려를 달고 살아갑니다. 밖에서 밀려오는 염려에 대처하고 나면 마음속에서 염려가 생깁니다. 반대로, 안에서 생기는 염려를 해결하고 나면 밖에서 염려가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이러한 현상은 예수님을 따라 나섰던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산상수훈을 말씀하시면서 먹고 사는 것과 관련해서 염려하지 말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염려는 믿음이 적다는 표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모두 알고 계시는데 염려한다면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중의 새들이나 들의 백합화를 먹이시고 입히십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목숨까지 바꾸면서 사랑하신 우리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실 겁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안다면 하나님을 신뢰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갖고 있을 때 마음의 염려가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에 맞추는 것입니다.“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먼저”입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가 눈앞에 닥칠 때에도 그 문제보다 먼저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신앙에서 먼저 하나님을 찾는 우선순위만 확실히 정해지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저절로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들은 여기서 실패하곤 합니다. 그래서 수 천길 아래 낭떠러지 밑에 있는 물을 먼저 바라보고는 잔뜩 겁을 먹습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된 곳은 어디나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고 주관하신다면 우리 마음도 곧 하나님 나라가 됩니다. 가정과 교회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들이 사는 세상에도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희락의 하나님 나라가 임해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하나님 뜻대로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가 여기에 어울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거룩함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듯이 우리들도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바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손색이 없도록 멋지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더해 주시는 “더함의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둘째로 34절에 있듯이 내일 일을 두고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가 염려하는 것들의 거의 대부분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보다 앞서가시는 여호와 이레 하나님을 믿는다면 내일 일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일의 염려는 그때 닥쳐서 해도 됩니다. 오늘 이 순간을 하나님께 드리려는 삶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오늘(present)은 하나님께서 우리들 각자에게 주신 선물(present)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주어진 삶에 충실할 때 미래의 염려가 사라집니다. 염려가 밀려올 때는 그 자리에서 기도하고 지금 주어진 삶 속에서 먼저 하나님을 찾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십니다.-河-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우리가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여긴다면 두 가지를 꼭 인정해야 합니다.

첫째는 히브리서 11장 6절에 있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반드시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막연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지금도 우리의 삶과 세상사에 간섭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번 연속 설교에서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의 섭리는 참새 한 마리까지 기억하실 정도임을 인정하고 믿는 것이지요.

둘째로, 우리가 찬양하듯이 하나님께 나가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의로우신 분인데 우리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인 인간이 의로우신 하나님께 나가기 위해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의 죄가 십자가의 보혈로 모두 용서함 받게 되고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인정하고 믿을 때 우리들은 비로소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존재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믿은 후에는 자신이 믿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머리로 믿어도 그것이 마음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면 신앙이 냉랭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체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기도가 응답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린 진실된 기도가 그대로 응답된다면 그리고 이런 경험이 반복된다면 우리들은 비로소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임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없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인생길에서 염려와 근심이 밀려올 때 기도해야합니다. 염려와 근심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생기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분산되었을 때 염려가 생기고 근심이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또한 염려와 근심은 우리들이 두 마음을 품었을 때 생깁니다.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보면 마음에 혼란이 찾아오고 그것이 깊어지면 염려와 근심으로 발전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두 마음을 품지 말라고 교훈합니다.

오늘 본문은 산상수훈에 속한 말씀으로 산에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거듭 부탁하십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믿기로 따라나선 제자들이라면 염려하지 말라는 권고입니다. 하나님께서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들의 백합화도 공중에 나는 새들도 입히시고 먹이시는 하나님이신데 자신을 믿는 기독교인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지 않겠느냐는 반어법적 교훈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염려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근심이 밀려오면 입히시고 먹이시는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염려하는 대신에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먼저”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찾고 먼저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인정할 때 가능합니다. 그때 우리 안에서 먹물처럼 올라오는 염려와 근심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와 공급하심이 참빛 교회 식구들 신앙과 삶 속에 임하고 흔들림 없는 신앙으로 나가시길 기도하겠습니다. -河-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좋으신 하나님(God is so good)”이라고 고백합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목소리로 들려주시지도 않는 하나님을 좋으신 분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하면 자신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하나님이 좋으신 분이라고 말하고 또 찬양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정말로 좋으신 분일까요? 이 질문에 쉽게 대답하긴 어렵습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세상에 선한 일만 생기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커다란 세상일 말고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봐도 좋은 일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좋으신 분이라고 고백하는 것을 망설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선하신 분으로 소개합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누가복음 12장 말씀대로 하나님은 하찮은 참새 한 마리도 기억하시고, 우리들의 머리카락의 숫자까지 세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정도로 세심하게 우리를 사랑하시고 생각해 주신다면 좋으신 하나님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을 아버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아버지들은 자식을 끔찍이 생각합니다. 자식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생선 대신 뱀을 줄 아버지가 없습니다. 알을 달라고 할 때 전갈을 주는 아버지도 없습니다. 자식을 낳은 친 아버지라면 절대로 이런 일을 자식에게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악한 아버지라도 자기 자식을 챙기는 것이 인륜지도(人倫至道)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아버지를 언급하신 다음에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라고 하나님을 소개하십니다. 지난주일 설교에서 참새 한 마리와 머리카락을 언급하신 다음에 제자들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하신 것과 같은 패턴입니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합니다. 육신의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좋은 것으로 주는 것처럼,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더욱 좋은 것으로 자녀된 우리들에게 주실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육신의 부자지간은 아버지와 아들의 친자관계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하나님과 분명한 관계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기도문 서두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하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되심을 확실히 알고 믿는 것이 무척 중요합니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마음에 모셨을 때 비로소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때 성령께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보증합니다. 또한 로마서 8장 26절에 보면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면서 탄식하시며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게 되는 것부터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기도응답을 받게 되는 모든 과정에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성령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진리의 길로 가야합니다. 생선이나 계란과 같은 육적인 필요를 넘어서 우리의 영적인 필요를 채워주시는 성령 하나님께 순종할 때 비로소 하나님이 좋으신 분임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자녀 삼아주셨기에 가능함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을 믿고 성령을 좇아 행하시는 참빛 교회 식구들 되시길 부탁드립니다.-河-

참새 한마리와 하나님

오래 동안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하나님을 믿는 것을 그냥 일상의 삶으로 받아들이곤 합니다. 삶 자체가 신앙이 된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일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매너리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감격과 감탄을 상실한 무덤담한 신앙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는 하나님을 오래 믿었지만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믿음이 약해서 회의를 머리에 달고 살 수도 있습니다.

솔직히 하나님을 믿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선,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감각으로 감지할 수 없는 분이시기에 쉽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보통 좋으신 하나님이요 완벽하신 분이라고 믿는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좋으신 하나님의 작품과 거리가 멀게 느껴집니다. 세상에서 선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불공평과 불의가 판을 치는데도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신앙에 회의가 찾아 올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여주셔야(계시하셔야) 하나님을 알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를 감지하기에는 우리들이 너무 부족합니다. 게다가 우리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하나님을 믿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기 까지 하셨지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입니다. 그 가운데 한명인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지 못한 채 사단의 꼬임에 넘어가서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래도 나머지 열 한명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까지 예수님과 동고동락했습니다. 훗날에 이들은 약속하신 성령을 받고 초대교회를 세우는 사도들이 됩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시대를 역행하면서 예수님을 따라나섰던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수만 명이 예수님 곁에 모여들었지만 그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병이 낫고 귀신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려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였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위하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신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한 영혼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시고 그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무엇보다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따라나선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소개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앗사리온(페니)에 팔리는 참새 한 마리도 기억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머리카락의 숫자도 세고 계실 정도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런 작은 것에 관심을 가지신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자신을 따라 나선 그리스도인들의 형편과 처지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세상에서 지극히 작은 자인 우리들의 머리카락까지 세신바 되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우리가 만나고 체험했을 때 우리들의 신앙이 살아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감격과 감사가 넘칠 것입니다. 거기에 그치 지 않고 세상에 나가서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河-

사도행전 속의 교회들 (5) : 에베소 교회

사도행전 속의 교회들에 대해서 살펴보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그동안 함께 살펴본 사도행전의 교회들은 어렵게 시작되었지만 하나님의 예배하심 가운데 복음의 전진기지로 굳건하게 세워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향하여 마음이 열린 사람들을 예비해 놓으셨고, 이들은 교회가 세워지는데 초석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역시 복음전파가 지체되고 심지어 감옥에 갇히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꿋꿋하게 주님의 때와 능력을 기다리면서 교회를 세워나갔습니다. 2천 년 전, 회당에서 또는 가정에서 세워진 하나님의 교회들이 오늘 우리가 모여서 예배하고 공동체로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의 시작점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더욱 감격스럽고 책임감도 느껴집니다.

이제 오늘은 마지막으로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에베소는 처음에 살펴보았던 안디옥 교회가 있었던 소아시아에 위치에 해 있었습니다. 에베소는 항구도시로서 로마에서 아시아로 오는 무역선들이 마지막으로 머무르곤 했습니다. 당시 인구가 25만 명에 이를 정도였고, 로마,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안디옥에 이어서 네 번째로 큰 로마도시에 속했습니다. 에베소에는 아데미(다이애나)라는 여신을 숭배하는 신전들이 있었고 무엇보다 로마 황제를 신으로 섬겼습니다.

에베소가 당시에 중요한 항구도시였기에 바울도 선교여행 중에 에베소를 자주 들렸습니다. 유럽에서의 2차 전도여행을 마친 바울일행은 에베소를 거쳐서 자신들의 파송 교회인 안디옥으로 귀환합니다. 그때 바울이 고린도에서 만났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에베소에 남겨두었는데 이들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했던 것 같습니다.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 가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고 이들을 통해서 복음의 씨앗이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떠나면서 제일먼저 에베소를 들렸습니다. 그때 바울이 에베소에서 제자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이들은 세례요한이 베푼 세례를 받았지만 성령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었지만 형식적으로 믿을 뿐 마음 깊은 곳에 확신과 능력이 없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소개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시 세례를 주니 이들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이때 세례를 받은 열두명의 제자들이 곧 에베소 교회를 세우는 일꾼이 됩니다.

바울은 세달 동안 회당에 가서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대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에베소에서도 바울을 핍박하는 유대인들이 생깁니다. 마음이 굳어진 사람들입니다. 완고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자리 잡을 틈이 없었던 사람들인데 이들이 바울을 공개적으로 비난합니다. 바울은 회당을 떠나서 두란노라는 서원에 가서 날마다 성경을 가리킵니다. 그렇게 바울은 에베소에 2년 간 거하면서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또한 에베소에 머물면서 그동안 개척한 교회들에게 편지를 써서 권면하고 격려했는데 고린도전/후서가 대표적입니다. 훗날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요한도 에베소를 중심으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섬겼습니다. 이처럼 에베소 교회는 소아시아 있는 하나님의 교회로 훌륭하게 자라갔습니다.

어떻게 에베소 교회가 이렇게 굳건하게 세워졌을까요? 그것은 첫째로 에베소 교회에 성령의 임재와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말씀 위에 세워졌습니다. 셋째로 에베소 교회에 훌륭한 지도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새로운 이름으로 새로운 처소에서 교회를 세우게 될 우리 참빛 교회 위에 무엇보다 더 크고 강력한 성령의 임재와 역사가 임하기를 기도합시다.-河-

사도행전 속의 교회들 (4) : 고린도 교회

지난주에 살펴본 데살로니가가 마게도니아 지방의 수도였듯이, 고린도는 마게도니아 밑에 있는 아가야 지방의 수도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사도 바울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고 그곳에 교회를 세운 셈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바울의 전략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의 파장이 당시 강대국인 로마를 거쳐서 땅 끝까지 전파되는데 대도시를 사용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점에서 세계적인 도시 가운데 하나인 샌프란시스코에 세워진 우리 교회의 사명이 적지 않음을 다시금 느낍니다.

고린도는 우상숭배가 만연해 있었고 무역의 요충지였기에 경제적으로도 윤택했습니다. 무엇보다 고린도에 아프로디테 여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음란한 행위가 합법적으로 자행되곤 했습니다. 게다가 항구에 접해 있어서 여러 사람들의 발길이 고린도를 오갔습니다. 고린도는 이처럼 소위 양반의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유행하는 말 가운데 도덕적으로 문란한 경우를 두고 “고린도 스럽다(to act the Corinthian)”는 말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복음을 전하러갑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복음은 준비된 사람에게 임했고, 그들이 교회를 세우는 기초석이 되었습니다. 고린도에 도착한 바울은 그곳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귀한 동역자를 만납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만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로마에 살다가 글라우디오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으로 인해서 고린도로 이주한 부부였습니다. 이들은 텐트와 가죽을 수선하는 사람들로 사도 바울과 직업이 같았습니다. 이처럼 공통점이 많았기에 이들은 바울과 쉽게 친해졌고 고린도에서의 사역은 물론 그 이후에도 평생 동역자가 됩니다.

바울은 전례대로 유대인의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숫자가 많아지면서 다시 한 번 유대인들과 부딪칩니다. 바울은 회당 옆에 있는 디도 유스도라는 사람의 집에서 별도로 모임을 갖습니다. 회당 옆집에서 모임을 갖다보니 유대인의 회당장 그리스보와 그 가족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건도 생겼습니다. 회당에서 쫓겨났는데 결국은 회당장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니 이것도 기적입니다.

이렇게 고린도라는 세상적인 도시에 복음이 들어갔고 그곳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집니다. 하나님께서는 핍박 가운데 복음을 전하는 바울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힘을 불어넣으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것을 부탁하십니다.“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고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주님의 백성들이 많으니 복음 전파에 더욱 열심을 내라고 격려하십니다. 바울은 그곳에 1년 6개월 거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준비되고 헌신된 사람들을 통해서 세워짐을 또 다시 배웁니다. 로마에서 추방당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바울의 동역자가 되었고, 핍박으로 교회를 옮겼을 때 회당장 그리스보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많은 사람들이 고린도에 있다는 말씀을 통해서 바울과 교회에 비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것이야말로 커다란 축복입니다. 한없이 부족한 우리들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에게도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더욱 헌신할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우리 함께 세계적인 도시 샌프란시스코에 멋진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봅시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