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의 기도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대화 또는 사귐이라는 말을 깊이 생각해 보면 기도가 얼마나 커다란 특권인지 깨닫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께 기도하는 우리들의 마음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라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이 믿음이 없다면 기도는 자기최면이나 허공에 외치는 한탄에 불과할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서머나 식구들 신앙 가운데 든든히 자리 잡기를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기도드리는 하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구약성경 시편 50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친히“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시 50:12)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주인되심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의 은혜로 없애주시고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신 구원자이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고백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기도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만약에 우리의 기도가 허공을 치고 힘이 없다면, 그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거나 식었다는 표시입니다. 우리가 기도의 자리로 나올 때마다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하나님의 성품, 손길, 역사를 묵상하면서 하나님 품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역대하 7장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고 솔로몬이 하나님께 드린 긴 기도(역대하 6장)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솔로몬은 예루살렘 성전이 기도의 집이 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백성들이 성전에서 기도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길 바랐습니다. 솔로몬이 기도한 대로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드리는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이는 내가 이미 이 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으로 여기 영영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 있으리라”(대하 7장 15-16). 하나님은 기도하는 백성들과 함께 하십니다. 기도하는 백성들에게 귀를 기울이시고 그들을 바라보시며 그들을 항상 생각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겸손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에 응답하십니다.“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으로 일컫는 백성, 즉 “하나님의 백성”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세상에 살면서 죄를 짓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 속한 백성들이라면 악한 길에서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와 허물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겸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나가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우리들의 망가진 삶을 고쳐주심을 기억하십시다. 겸손히 주님 앞에 나가시는 서머나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河-

믿음의 기도

앞으로 3주 동안은 기도에 꼭 필요한 덕목들과 기도하는 마음가짐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기도에 대해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흔히 기도를 두고 자신의 바람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기도의 지경은 넓습니다. 자신을 위한 기도로부터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기도까지 기도의 지경이 확장되어야 한다고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또한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간구”입니다. 기도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친밀하게 사귀는 시간입니다.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하지만 동시에 기도를 하나님과 나누는 친밀한 대화라고 정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기도는 우리의 기도제목만을 하나님께 간구하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양방향 소통인 셈입니다. 또한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신비로운 체험입니다.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믿는 것입니다. 기도는 허공에 대고 외치는 하소연이나 자기 최면이 아닙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들 마음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시게 되고, 우리들 역시 살아계신 하나님 품속에 거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믿음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열왕기하 19장의 히스기야 왕은 성전에 올라가서 당시의 강국인 앗시리아 왕이 보낸 선전포고문을 펼쳐놓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믿음은 물론 하나님께서 자기 앞에 펼쳐놓은 선전포고문을 읽을 수 있으시고 자신의 기도를 들으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훼방하러 보낸 말을 들으시옵소서.”(왕하 19:16). 하나님을 향한 히스기야 왕의 믿음은 이처럼 실제적이었고 확실했습니다. 그에게 이정도로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에 죽을병에 들었지만 기도함으로 15년의 생명을 연장받기도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야고보서 말씀에서도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믿음이라고 깨우쳐 줍니다. 여기서 믿음은 단지 우리가 기도한 것이 응답될 것이라는 자기 최면식의 믿음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또한 믿음에 반대되는 표현인 의심이라는 말도 반복해서 나옵니다. 의심 역시 우리가 기도한 내용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염려하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한다면 그 기도가 응답되기가 힘이 듭니다. 오늘 본문 6절을 다음과 같이 읽을 수있습니다.:“오직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지 말라”(6절).이것이 올바른 기도의 첫 번째 덕목입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을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입니다. 바람이 불면 바닷물은 한 군데 있지 못하고 요동을 칩니다. 의심하는 마음은 이처럼 하나님께 마음을 고정시키지 않고 세상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둘째로 의심을 “두 마음”이라고 표현합니다. 두 마음은 하나님의 존재 유무를 두고 갈팡질팡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려지는 믿음의 기도가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기도에 응답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河-

기도의 지경

기도에 대한 말씀을 연속해서 나누고 있습니다. 지난 세 주 동안에는 기도의 파장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기도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시작해서 가정과 교회로 동심원을 그리면서 펼쳐나가야 합니다. 반대로 그 파장은 교회와 가정으로부터 우리들 각자가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은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안으로 밀려들어와야 합니다.

이처럼 기도의 파장이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퍼져나가고 밀려들어올 때, 온 교회로부터 각 성도님들에 이르기까지 기도의 물결에 몰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강력한 기도의 파장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물론 가정과 개인의 삶이 기도를 통해서 세워짐을 구체적으로 체험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모두 기도의 물결에 참여하고 실제로 기도의 사람, 기도의 가정, 기도하는 교회를 세워나갑시다.

이제 오늘은 우리의 기도가 어떤 지경으로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언제부터인지 한국 기독교에‘나만 복 받으면 된다’는 식의 개인주의가 팽배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여기서 기도의 지경이 자기 자신, 자기 가정 그리고 기껏해야 자기 교회정도에서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기도하는 내용의 대부분은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것도 복을 달라고 하는 간구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우리들이 연약하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필요하기에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른 곳에 눈을 돌릴 틈이 없을 만큼 다급할 때도 많습니다. 또한 처음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믿으면, 기도가 자신의 소원이나 마음을 드리는 것에 머물게 됩니다. 처음 예수 믿는 신앙을 어린아이의 믿음이라고 합니다. 어린아이가 자기 것을 먼저 챙기고 자기만 더 많이 가지려고 하듯이, 어린아이의 신앙을 가졌을 때는 자기를 위한 기도를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도의 지경이 늘 어린아이의 신앙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자란 표시 가운데 하나가 자신을 위한 기도에서 하나님을 위한 기도로 발전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달라는 간구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해야 할지를 묻는 기도로 바뀌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의 신앙이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자기만 생각하던 어린아이가 철이 들면서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행실을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때가 되면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배운 대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대신에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실천하려고 애를 씁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위한 기도를 할 수 있다면 괜찮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연령으로 말하면 사춘기를 지나서 청년기에 접어든 셈입니다.

우리들이 나이가 들면서 주변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래서 연락하지 않던 지인들과도 교제를 시작하고, 무엇보다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의 마지막 지경은 이웃을 위한 기도입니다. 자신을 위한 기도에서 하나님 중심의 기도를 거쳐서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위한 기도까지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시편 말씀이 기도의 지경을 잘 보여줍니다.: “1)하나님이여 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2)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3)땅에 있는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아멘 -河-

기도의 사람

기도에 대한 연속 설교 세 번째 시간입니다. 첫 번째 시간에는 교회가 기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살펴보았고 두 번째 시간에는 우리들의 가정이 기도하는 가정이 되어야 함을 배웠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필요한 공동체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서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우리가 생각해도 그리 완벽해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체로 모이기를 바라십니다. 나 혼자 잘되고 나 혼자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 아니라 비록 부족하더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기를 바라십니다. 따라서 좋은 교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를 세우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이고 의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교회가 그냥 세워지지 않습니다. 교회는 말씀과 기도로 세워집니다. 서머나 식구들께서 기도의 체인으로 연결되고, 기도 가운데 사랑을 실천하실 때 더욱더 멋진 교회가 세워질 것입니다.

둘째로 가정이 기도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은 보금자리입니다. 세상의 삶에서 지치고 힘들 때 가정에 돌아오면 편안한 쉼과 재충전을 얻는 오아시스와 같은 곳입니다. 가정은 자녀들을 하나님의 사람들로 키우고 세우는 터전입니다. 요즘은 그리스도인들의 가정들까지 세상의 풍조와 유행을 따르고 있기에 안타까움이 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부부로 맺어주셨고 그 안에서 가정을 허락하셨음을 믿고 신앙의 가정을 세워가야 합니다. 이것이 기도로 가능합니다. 부부가 서로 손을 잡고 기도하고, 부모와 자식들이 둘러앉아서 기도하고, 할머니 권사님들도 장성한 자녀들과 후손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해주셔야 합니다. 기도하는 가정은 어떤 세상의 파도가 닥쳐와도 능히 뛰어넘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세 번째 시간은 우리 자신이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함을 배웁니다. 교회와 가정이 서로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가족과 교회 식구들이 여러분을 위해서 뒷전에서 기도해 주십니다. 이 모든 것들이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작 중요한 것은 내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각자가 기도의 사람이 되어서 매일같이 규칙적으로 골방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골방기도가 풍성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 기도하는 것은 실제로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남들의 눈치를 살필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나가서 벌거벗은 것처럼 모든 것을 다 내어놓고 기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골방기도, 은밀한 기도를 말씀하시면서 문을 닫고 골방에 들어가라고 하셨겠습니까? 하나님과 만나는 그 시간만큼은 세상과 통하는 문을 차단하고, 온전히 하늘 문을 열어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요란을 떨면서 기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불필요한 말이나 미사여구로 하나님의 마음을 사로잡을 생각을 해서도 안 됩니다. 솔직한 기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간절한 기도가 바로 골방기도입니다. 은밀한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의 사랑의 밀어입니다. 친밀한 기도입니다.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신비로운 기도입니다. 교회가 기도하고, 가정이 기도하고, 우리 각 서머나 식구들이 골방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고 우리들 각자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河-

기도하는 가정

지난주에는“서로 기도하라”라는 제목으로 신앙공동체인 교회가 서로 서로 기도의 체인으로 연결되어야 함을 배웠습니다. 온 교회가 죄를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병이 낫는 일은 물론 영생을 얻는 은혜가 임한다고 했습니다. “믿음의 기도”/“의인의 간구”는 하늘을 움직일 정도로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기도 가운데 서로 서로 연결되고, 기도를 통한 섬김이 더욱 풍성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Mother’s day입니다. 미국에서는 어머니날과 아버지날이 따로 정해져 있지만, 한국에서는 5월 8일을 어버이날로 지킵니다. 이 세상에 부모님 없이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세상에 살아있는 모든 사람은 육신의 부모님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부모님께 공경하라는 덕목은 성경은 물론 세상의 모든 윤리와 도덕의 근간을 이룹니다. 그 만큼 부모님의 은혜가 크고, 자식으로서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십계명의 다섯 번째가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이어서 부모님을 공경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하는 약속이 나옵니다.:“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다시 한 번 명심합시다.

우리 교회에는 자녀들보다 부모되신 성도님들께서 많이 계십니다. 성경에는 부모들에게 주는 교훈도 나옵니다.:“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5:4). 부모라고 해서 자식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자식들에게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자녀들의 심령에 상처를 입혀서도 안 됩니다. 자녀들을 주의 말씀으로 훈계하면서 양육해야 합니다. 이 모든 일이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신앙으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초기 교육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자녀들이“나를 위해서 늘 기도하시는 부모님이 계셔”라고 느끼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장성한 자녀들은 연로하신 부모님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야합니다. 이처럼 우리들은 기도하는 가정을 세워야 합니다. 교회가 서로 서로 기도로 연결되듯이, 가정 역시 부부사이에 그리고 부모와 자식들 간에 기도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믿음으로 기도하고 죄를 회개하면서 간절히 간구하듯이, 가정에서도 믿음과 간절함으로 드리는 기도가 끊이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날 가정에 이런 일들이 많이 부족합니다. TV와 인터넷과 같은 매체들과 이민가정의 경우 언어의 장벽으로 인해서 가정에서의 대화와 기도가 많이 부족합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기도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은 부모님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부모님들도 자녀들을 위해서 매일같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들 가정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해야 합니다. 가정 안에 기도가 막혀서는 안 됩니다. 서머나 가정들이 기도로 굳건하게 세워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河-

서로 기도하라

지난주일 목요서신에서도 말씀드렸듯이, 교회력에 따르면 우리들은 지금 부활절을 지나고 오순절 성령강림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40여일을 함께 계시면서 하늘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실 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함께 기도하면서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기를 기다리라고 제자들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성령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로부터 열흘 정도가 지나서 유대인의 절기인 오순절을 맞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그때 함께 모여서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예수님의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말 그대로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성경은 성령강림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오순절이 되어서 그들은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다. 그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 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길이 치솟아오를 때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것 같은 혀들이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사도행전 2:1-4, 표준새번역).

이처럼 오순절 성령강림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진리의 영이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께서 제자들 위에 임한 사건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을 체험한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면서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오순절 성령 강림에서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알아들었습니다. 제자들이 각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각 지방의 방언으로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의 바벨탑 사건 이후에 온 세상의 언어는 혼잡하게 되었고 서로 이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 강림에서 나뉘었던 언어가 다시 하나가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은 온 교회와 세상을 진리 가운데 하나로 묶어주는 능력입니다.

부활절을 지낸 우리들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사모하면서 앞으로 50여일을 지내야 합니다.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함께 기도했듯이 우리 교회도 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비록 기도처가 없어서 각자의 자리에서 기도할 수밖에 없지만, 6월 둘째 주 성령강림주간까지 온 교회가 매일 밤 10시에, 그리고 하루에 5분씩 기도하기 원합니다. 우리 교회는 물론 서머나 식구들의 신앙과 삶 속에 성령의 임재와 역사를 기대하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은 성도로서, 부활의 생명을 체험한 성도로서 앞으로의 인생길이 성령 충만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근사한 인생이 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눈 야고보서 5장 말씀에서 온 교회가 서로를 위해서 기도할 것을 권면합니다. 죄를 고백하고 서로 기도할 때 기도의 능력이 나타날 것임을 약속합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기 때문입니다.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면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였던 제자들처럼, 성령 충만함을 사모하면서 간절히 기도하시는 서머나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 -河-

부활절 아침에

올해도 어김없이 부활주일을 맞습니다. 한국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할 때, 부활주일에 삶은 계란에 색깔을 입혀서 나눠주곤 했습니다. 계란 속에서 병아리가 태어나는 것은 계란 속에 생명이 들어 있다는 표시로 계란을 나눠준 것입니다.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계란을 갖고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합니다.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예쁜 색깔의 계란을 가지려 아우성입니다. 그래도 집에 가서 예쁘게 색칠한 계란을 보면서,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오듯이 예수님께서도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부활절은 교회가 지키는 가장 큰 절기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기독교는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시작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 바울이 고백하듯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들이 전하는 복음도 헛것이고 우리들의 믿음도 헛된 것이 될 것입니다 (고전15:14). 아니 기독교 자체가 이 세상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의 믿음은 죽음에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살아나셨기에 우리들도 육체의 죽음 너머에 계속되는 영원한 생명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해 줍니다. 부활신앙으로 무장하면 죽음의 세력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지 못합니다. 죽음을 뛰어넘는 영원한 생명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1장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베다니의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려내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러 가면서 그의 누이 마르다에게 말씀하십니다.:”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요11:23). 나사로가 죽은 지 이미 나흘이 지난 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다시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르다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부활신앙이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11:25-26).

예수님을 믿을 때 죽음과 삶의 경계가 무너진다는 놀라운 선언입니다. 죽은 자들이 마지막 날에 부활하게 될 것은 마르다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살아서 믿는 자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씀이 새롭습니다. 우리들도 살아서 예수님을 믿고 있으니 그 말씀이 더욱 마음에 깊이 다가옵니다.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생명을 누리고 산다면 이 말씀을 금방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곧 생명을 품고 있는 셈입니다. 생명은 죽음의 반대말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으니,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이 우리 안에 주어진 것입니다. 살아서 주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계란이 생명을 품고 있듯이, 우리들은 생명이신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살아갑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들 안에 계십니다. 2011년 부활절 아침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이 서머나 식구들께 그대로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할렐루야! -河-

십자가의 길

지난주에는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한 가운데 위치합니다. 처음부터 십자가가 신앙의 상징이 된 것은 아니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구약은 물론 로마 시대의 십자가는 반역죄나 살인 등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을 처형하는 형틀이었고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대속의 은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들이 죽음에서 영생으로 옮겨지는 구원을 받았습니다(구속의 은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를 가로막던 담이 무너지고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화목의 은혜).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죽음의 세력을 이기셨습니다. 이렇게 형틀이었던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그 위에 달리심으로 더 이상 형틀이 아니라 구원과 승리의 십자가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깃든 은혜라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생전에 예언하신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가 영광스런 부활로 이어지는 길목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비롯한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했습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십자가 복음을 전했고,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기쁜 소식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초대교회 이후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회는 십자가의 은혜를 세상에 전했고 그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오르신 갈보리 언덕길을 생각하면서, 기독교인들 역시 세상 속에서 외롭고 힘든 신앙과 삶의 순례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가 부활로 이어짐을 믿기에 소망 가운데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죄인들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듯이, 기독교인들도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을 몸소 실천해야합니다. 자기를 비우고 희생했을 때,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하늘의 신령한 은혜가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갈 2:20). 자신의 모든 것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는 철저한 자기부정입니다. 자존심도, 고집도, 욕심도 십자가에 못 박고 온전히 새로운 존재로 거듭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을 때, 우리 앞에는 하나님께서 예비 놓으신 새로운 인생이 펼쳐질 것입니다. 이것이 곧 십자가의 은혜요, 우리들이 그 은혜 속에서 경험하는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이제 고난주간을 맞습니다. 서머나 식구들 모두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시고 그 은혜를 흠뻑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한 걸음 나가셔서,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가기로 결단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들 각자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인생의 골고다 언덕을 오를 때, 2천 년 전에 이미 그 길을 오르셨던 예수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은 골고다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매일같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河

고린도전/후서 강해를 시작합니다.

우리 교회 수요예배에서는 주일예배와 구별해서 성경강해나 신앙생활에 필요한 덕목을 심층적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동안의 수요예배를 회상할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년 가깝게 구약의 소예언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빼놓지 않고 살펴 본 것입니다. 이어진 예수님의 비유에 대한 말씀은 비유 속에 깃든 예수님의 구체적인 교훈을 배우고 삶에 적용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사실 요즘은 성경 본문을 차례로 살펴보는 것에 열심을 내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단지 듣기에 좋고 재미있는 설교나 축복을 강조하는 말씀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성경 본문을 갖고 강해를 하고, 본문과 씨름하는 성경공부는 자칫 지루하고 너무 딱딱하게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 말씀인 성경 위에 뿌리를 내리고 그 안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한 구절 한 구절 읽고, 공부하고, 외우고, 묵상하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웬만한 시험에 넘어지지 않고,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갈 수 있습니다.

이제 이번 주 수요일부터 고린도전/후서 강해를 시작합니다. 바울 서신가운데 에베소서와 빌립보서를 부분적으로 강해한 적은 있지만 이번처럼 한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강해하기는 처음입니다. 이번 공부에 앞서서, 지난 여섯 시간에 걸쳐서 <성경 바르게 읽기>라는 주제로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방법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관찰-해석-적용으로 이어지는 귀납적 성경연구도 간단히 소개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이번 성경강해가 기대가 됩니다.

고린도전/후서는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세운 교회였습니다. 고린도는 로마의 항구도시로 우상숭배는 물론 여러 가지 세상의 모습들이 섞여 있던 말 그대로 세속도시였습니다. 이처럼 세상 풍습이 가득 차 있던 곳에 복음이 들어갔고 교회가 세워졌지만, 고린도 교회 역시 분열, 우상숭배, 음란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때 사도바울이 자신이 개척해서 세운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이것이 바로 고린도 전/후서입니다.

저는 이번 공부를 통해서, 우리 교회가 다시 한 번 하나님 말씀에 굳게 서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고린도서를 공부해 가면서, 교회의 망가진 모습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아름다운 모습간의 차이를 발견하고, 우리 교회에 부족한 것과 그릇된 것은 회개하면서 더욱 아름다운 교회로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교회가 하늘나라의 모델하우스임에 분명한데, 죄인들인 사람들이 모여 있기에 부족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통해서 우리들 자신은 물론 교회의 모습을 점검하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안이 넘치는 교회로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한된 시간에 모든 말씀을 살펴볼 수 없을 것입니다. 대신에 저는 각 장에서 중요한 구절이나 사건을 깊이 공부하고 그 말씀이 주는 교훈을 우리들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하는 시간이 되도록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 이번 수요일부터 시작되는 고린도전/후서 강해에 많은 분들의 참여를 부탁드립니다.-河-

웃음 가득한 인생 10 : 브엘세바

이삭에 대한 연속 설교 마지막 시간입니다. 이삭은 약속의 자녀로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희생 제물로 드려지는 줄 알았지만, 모든 것을 예비하신 여호와 이레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났고, 그의 이름 뜻 그대로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이삭이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세 가지는 1)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거한 것, 2)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 3) 앞서 행하시는 여호와 이레 하나님을 믿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이삭은 하나님과 홀로 교제하고 기도했습니다. 그의 인생은 매우 단순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토를 달거나 핑계를 대지 않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쫓아다니면서 괴롭히고 훼방할 때마다 양보했고 자신을 희생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삭의 인생은 소리 없이 강했습니다. 그에게 포기나 낙심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넓은 곳 르호봇에 이르기까지 우물을 파고 또 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고향 브엘세바에 돌아온 이삭을 하나님께서 찾아 오셨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이 고향에 돌아온 확인하십니다.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끝까지 또 다시 말씀하십니다. 다시 돌아온 고향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시고 축복하실 것임을 확인한 이삭은 그 자리에서 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하나님을 예배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삭이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게 된 또 하나의 비결이“예배하는 삶”이었음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된 예배자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축복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할 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삭은 고향땅 브엘세바에 와서도 우물을 팝니다. 그때 그를 괴롭히고 훼방했던 블레셋 그랄땅의 아비멜렉왕이 관리들을 데리고 찾아 왔습니다. 이삭은 깜짝 놀랐습니다. 블레셋 땅에서의 좋지 않은 기억들이 다시 살아났을 것입니다. 이삭은 당황해서 다음과 같이 질문합니다:“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로 너희로 떠나가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그때 아비멜렉 왕이 이삭에게 평화조약을 제안합니다. 아비멜렉의 입에서 이삭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언급됩니다.:“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이삭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분명히 이루어졌음을 세상 사람들이 증명해준 것입니다. 아비멜렉이 자신을 공격할 의도가 없음을 확인한 이삭은 그에게 잔치를 베풀어주고 서로 평화협정을 맺습니다.

아비멜렉이 떠나던 날, 우물을 찾던 종들이 돌아와서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라고 이삭에게 보고합니다. 블레셋에서 우물을 얻었던 이삭이 고향에 돌아와서도 물(생명수)을 얻은 것입니다. 이제 고향에서도 살 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축복하셨습니다. 이삭은 아버지를 따라서 그 땅을“브엘세바(맹세의 우물)”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향하신 약속을 지키셨고, 이삭 역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 것입니다.

이삭이 가는 곳마다 함께 하셨고 그를 축복하셨던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께서 서머나 식구들 가운데 그대로 임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