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든지 덥든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들 가운데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말씀을 두 주에 걸쳐서 전하려고 합니다. 라오디게아라는 도시는 알렉산더 대왕 이후에 셀류시드라는 왕조가 소아시아를 다스렸는데 그때 왕이었던 셀류시드 2세가 라오디세라는 부인의 이름을 따서 지은 도시였습니다.

라오디게아는 당시 금융과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또한 안약을 비롯한 의학도 발달해서 지금으로 말하면 의과대학 같은 학교가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도시가 부유하다보니 라오디게아 교회에 모여든 성도들도 세상의 부유함을 누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처럼 라오디게아 교회는 세상에서 자랑할 것이 많은 소위 ‘난사람‘들로 이루어진 교회였습니다. 본문 17절에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의 수준과 모습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는 라오디게아 교회였지만 이들의 믿음은 말 그대로 형편없었습니다. 자칭 부자라고 할 만큼 풍족한 생활을 했지만 이들의 영적 상태는 벌거벗은 모습이었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가난하다 못해서 가련해 보였고 영적인 눈이 가리어져 있었습니다. 겉만 화려한 신앙입니다. 또한 세상적으로 풍족하고 어려움이 없다보니 믿음이 식었습니다. 차지도 더웁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입니다. 간혹 본문의 찬 것과 더운 것에 초점을 맞춰서 말씀을 이해하려는 경우가 있는데, 본문의 핵심은 찬 것과 더운 것에 있지 않고“미지근함”에 있습니다. 차지도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을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것입니다. 세상의 물질과 명예가 교회에 흘러 들어와서 교인들의 신앙을 미지근하게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라오디게아는 물 공급이 어려웠습니다. 약 6마일 떨어진 히에라폴리스라는 도시에서 뜨거운 온천수를 갖고 왔지만 라오디게아에 도착하면 미지근한 물로 변했습니다. 또한 동쪽으로 11마일 떨어진 골로새에서 차가운 물을 갖고 왔는데 차가운 물 역시 라오디게아에 도착하면 미지근해졌습니다. 물이 미지근하면 먹기 힘듭니다. 물로서 가치가 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도 라오디게아 교회의 믿음을 미지근한 물에 비유하시면서 “내 입에서 너를 토해 내치리라”(16절)고 강력히 경고하십니다. 입에서 토해 내서 내친다는 말씀은 보통 무서운 말씀이 아니지요!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말씀은 풍족함을 누리는 미국이나 한국에 있는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주시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불경기라고 하지만 미국에 사는 우리들은 상대적으로 부유한 생활을 합니다. 세상의 물결이 교회에 흘러 들어와서 교회 안에 물질주의, 세상의 명예, 개인의 욕심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난 사람들이 그들의 신앙과 상관없이 교회에서 큰 소리를 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꽤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예수님의 명령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미지근한 신앙을 청산해야 합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미지근한 신앙으로 우물쭈물하는 것보다 확실한 신앙으로 무장하고 열심을 내야 합니다. 세상 것을 자랑하기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예수님의 이름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올 한 해 세상의 가치들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기뻐하고 그 능력을 누리시길 간절히 바랍니다.-河-

하나님 성전의 기둥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가운데 여섯 번째인 빌라델피아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는 두 번째 시간입니다. 빌라델피아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더불어 질책 없이 칭찬만 받았던 교회라고 했습니다. 두 교회 모두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았습니다. 오죽했으면 유대인들을 두고“사단의 회”라고 표현했을까요!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들은 몸에 할례를 받음으로 선택받은 백성의 표시를 지니고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이방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무엇보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기독교가 점점 커지자,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을 핍박했습니다. 동네나 도시에 있던 회당에서 기독교인들을 좇아냈습니다. 심지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을 저주하였습니다.

빌라델피아 교회도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회당에 들어 갈 수 없었습니다. 빌라델피아 교회가 큰 힘을 가진 교회가 아니었기에 유대인들의 핍박에 속수무책이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지켰고,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적은 능력의 교회였지만 예수님을 믿는 신앙 하나만은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빌라델피아 교회를 칭찬하시고 이들을 축복하십니다.

무엇보다, 그들을 핍박하던 유대인들이 빌라델피아 교인들 앞에 절하는 일이 생길 것이랍니다.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빌라델피아 교회를 붙잡고 계시고,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는지를 보여주시겠다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지금 자신들을 괴롭히고 핍박하는 유대인들이 장차 그들의 발 앞에 절할 날이 온다는 사실은 빌라델피아 교인들이 믿음을 지키는데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 힘든 것을 예수님께서 보상하신다는 약속입니다.

둘째로, 끝까지 신앙을 지켰기 때문에 훗날 세상이 당할 시험을 면제해준다는 약속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계명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신앙은 인내입니다. 지금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끝가지 참고 신앙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보상해 주십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면 기쁨으로 단을 거둘 날이 있기 마련입니다.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신다는 말씀대로 빌라델피아 교회는 비교적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끝까지 참으면서 주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우리의 삶이 형통할 것입니다. 시험의 때를 면해 주신다는 약속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임할 줄 믿습니다.

셋째로,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생명의 면류관을 상급으로 주신답니다. 빌라델피아 교인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은 유대인들의 비난과 핍박을 참게 만들어 주는 소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면류관을 빼앗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얻게 된 구원을 빼앗을 세력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열어놓으신 열린문은 그 어떤 세력도 닫을 수 없습니다.

넷째로, 신앙으로 끝까지 승리한 자들을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십니다. 당시 빌라델피아에는 많은 신전이 있었고, 신전에 기둥이 있어서 그곳에 성자들의 얼굴이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성전의 기둥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빌라델피아 교인들을 기억하신다는 칭찬입니다. 세상의 신전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인 하나님 성전에서 안전하고 존귀하게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는 축복입니다. 이처럼 빌라델피아 교회는 칭찬과 축복만 받았습니다. 비록 적은 능력이었지만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결과입니다. 올 한 해,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된다는 기대와 소망을 갖고 끝까지 말씀 가운데 살아갑시다. 약속을 붙잡고 이기는 자의 신앙으로 나아갑시다. -河-

열린 문을 향하여

2011년 새해 첫 번째 주일을 맞고 있습니다. 새해가 되면 우리들의 마음도 소망과 기대로 가득 차게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365일이 어떻게 펼쳐질 지에 대한 기대요 결심입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몇 년을 돌아보니, 올 해처럼 홀가분하게 한 해를 시작한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하나님 안에서 갖는 기대도 크고 또한 늘 평안할 때 틈을 타는 사단의 유혹에 대한 경각심도 갖게 됩니다. 올해 교회의 표어대로 사랑으로 서로 섬기면서 가족 같은 교회를 세우기 원합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소아시아에 세워진 교회들이지만, 일곱 교회는 결국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들 각자가 성전이라고 하셨으니 일곱 교회의 모습은 우리들 자신의 모습입니다. 교회나 우리들 각 성도들이나 칭찬받을 것을 갖고 있습니다. 신앙을 지키고, 서로 섬기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믿음을 갖고 있는 것 자체가 칭찬받을 일입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과 교회를 섬긴 우리 서머나 식구들의 믿음은 말씀 속의 서머나 교회처럼 칭찬을 받기에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물론 완벽한 교회나 신앙은 없습니다. 교회든 우리들 각자이든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럽고 꾸지람을 받을만한 것들이 있습니다. 첫사랑을 잊어버린 경우,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서 거룩함을 상실한 경우, 죽은 믿음처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교회나 우리들의 삶과 신앙 속에 조금씩은 다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말씀에 비추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부끄럽거나 잘못된 것들은 깨닫는 대로 회개해야 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날마다 아니 순간마다 자신을 돌아보면서, 회개의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칭찬과 꾸지람에 이어서 하나님께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시는 약속이 나옵니다. 가장 귀한 약속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입니다.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하시고, 작은 일에 죽도록 충성한 성도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또한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것을 이김(승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기는 자에게 만나를 주시고 생명책과 흰 돌에 이름을 새겨 주십니다. 만국을 다스릴 권세와 새벽별을 주십니다.

지난주에 사데교회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요즘 세상이 사데교회처럼 죽은 신앙의 모습을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사데교회에도 흰옷 입은 자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목하시고 소망을 두시고 귀하게 사용하실 주님의 백성들입니다. 올 한 해 동안 서머나 식구들 모두 흰옷 입은 자로, 남은 자들로 하나님 앞에 나가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제 오늘 살펴본 빌라델피아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함께 꾸지람을 받지 않았습니다. 빌라델피아 교회는 작은 자들이 모여 있었고 교회의 사역이 그리 화려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적은 능력을 갖고 최선을 다해서 주님의 일을 감당했던 훌륭한 교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빌라델피아 교회에 열린 문을 주시겠답니다. 문도 열려있고 그 문의 열쇠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갖고 계십니다. 빌라델피아 교회와 성도들에게 열린 문에 들어갈 특권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열어놓으신 문을 그 누구도 닫을 수 없습니다.

새해를 시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들에게도 새해의 문을 활짝 열어주 신 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열어주신 구원의 문, 신앙의 문, 사랑과 소망의 문으로 서머나 성도님들 모두 들어가시는 귀한 은혜와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河-

흰옷 입은 자

오늘은 우리 교회가 지키는 성탄감사주일이자 올 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올해는 경인년 범띠 해였습니다. 범처럼 포효하면서 힘차게 한 해를 시작했고, 그동안 계속되던 불경기가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에 2010년을 맞이했었는데 여전히 미국의 경제는 한 겨울입니다. 더 힘든 한 해였다는 생각이 들만큼 서머나 식구들의 삶이 힘겨웠습니다. 그래도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시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때로는 안타깝고, 감사하고, 목사로서 더욱 힘껏 돕지 못해서 죄송했습니다.

우리 교회 역시 올해의 시작이 아주 상쾌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성도님들께서 한 마음으로 교회를 지켜주셨기에 감사함으로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습니다. 비록 큰 부흥은 이루지는 못했어도 교회가 양적으로 조금씩 자라가고, 교회의 사역도 소박하지만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있습니다. 올바른 곳으로 방향을 잡고 한걸음씩 나가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무엇보다 올 한 해도 전도사님과 연로하신 권사님들께서 건강하게 지내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해가 갈수록 기운이 떨어지신다는 말씀을 하시지만, 전도사님과 모든 권사님들께서 아름답고 견고한 믿음으로 새해를 맞으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돌아보니 우리 서머나 식구들과 우리 교회는 힘은 들었어도 감사한 가운데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살아있었고, 말씀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어떻게든 온전한 신앙의 길로 나가려는 마음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해를 신앙 가운데 열심히 사신 서머나 식구들께 감사와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

올 한 해 동안 주변을 돌아보니 안타까운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경제가 여전히 어렵고, 한국에서는 연평도 사건이후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또한 인터넷을 비롯한 세상의 여론은 기독교에 대해서 많은 반감을 갖고 있는 듯합니다. 심지어 성탄절을 맞아서 “메리 크리스마스”대신에 “해피 할러데이”라는 인사가 여기저기서 들립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에 주인공이신 예수님은 없어지고, 세상의 여러 풍조와 상술이 자리 잡고 있는 듯해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사데교회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사데교회는 죽은 교회였습니다. 교회라는 이름은 있었지만 진정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없으니 형식과 껍데기만 있는 추한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회복시키려 했지만 이미 복음이 사라진 교회를 되살리기가 불가능할 정도였습니다. 사데 교회를 묵상하면서, 메리 크리스마스에서 해피 할러데이로 성탄절의 참뜻이 놀고, 먹고, 마시는 세상의 휴가철로 변질된 요즘 세상이 생각났습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일그러지고 망가진 세상을 가슴에 품고 기도해야겠습니다. 하나님 통치와 주권이 세상에도 그대로 임하기를 기도해야겠습니다.

사데교회가 죽은 교회였지만 그곳에도 신실한 사람들은 남아 있었습니다. 이들 역시 지난 주 두아디라 교회의 남은 성도들처럼 “이기는 자”라는 칭찬을 받습니다. 사데교회가 거룩함을 상실하고 어두운 세상의 세력이 교회에 드리웠는데, 그곳에서 흰옷을 입은 성도들이 남아 있었다니 얼마나 귀한 모습입니까? 이들의 이름은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고, 예수님께서 이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친히 변호하신답니다. 흰옷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망가져도 서머나 성도님들은 흰 옷 입은 성도들로 이기자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시면서 새해를 맞으시길 기도하겠습니다.-河-

“새벽별을 주리라”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를 살펴보는 네 번째 시간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소아시아에 있던 일곱 교회에 주신 말씀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일곱 교회들은 명칭 그대로 각 지역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교회마다 장점이 있습니다. 동시에 책망 받을 일들도 갖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세상에 완벽한 교회는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의롭게 되었지만 여전히 죄를 짓는 부족한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 있기 때문이겠지요. 영적인 관점에서 보면, 공중 권세 잡은 악한 영들이 성도들의 신앙을 흔들고 교회를 무너뜨리는데 혈안이 되어 있기에 온전한 교회를 세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세상에 완벽한 교회는 없습니다. 교회마다 흠이 있습니다. 티가 있고 주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시고 사도들이 사역하던 초대교회들도 문제가 있었는데, 그로부터 2천여 년이 지난 지금 완벽한 교회를 기대하는 것은 욕심일 것입니다. 대신에,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를 차례차례 살펴보면서, 교회의 부족함과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유혹의 세력들을 분별해 내고,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다함께 기도하며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오늘 살펴 본 두아디라 교회는 처음 보다 나중이 좋았습니다. 지난번에 살펴 본 에베소 교회는 첫사랑을 잃어버려서 책망을 받았는데, 두아디라 교회는 끝이 좋았으니 그들의 섬김과 사역이 훌륭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가 있던 두아디라는 우상숭배와 세상 풍습이 만연했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버가모 교회가 산위에 세워진 요새와 같은 교회였다면, 두아디라 교회는 분지에 세워졌습니다. 그만큼 세상의 풍습과 물품들이 쉽게 흘러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복음이 전해져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믿음과 사랑 위에 인내까지 겸비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는 두 얼굴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냈지만, 동시에 우상을 겸해서 섬겼습니다. 이세벨이라는 자칭 여선지자가 교회를 혼란시켰기 때문입니다. 이세벨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아합왕의 왕비 이름입니다. 구약 성경의 이세벨이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에 들어와서 바알과 우상숭배를 전했듯이, 두아디라 교회의 이세벨도 교회에 음란한 세상 문화와 우상숭배를 전했습니다. 이들이 행했던 죄는 행음과 우상숭배입니다. 행음은 쾌락을 좇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섬겨야 할 교회가 다른 신들을 겸해서 섬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가 하나님과 우상을 겸해서 섬기는 것을 두고 혼합주의라고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하나님과 세상을 겸해서 섬기는 혼합주의가 만연해 있습니다. 하나님과 돈을 겸해서 섬기는 물질주의, 하나님을 이용(?)해서 성공하려는 세상의 욕심과 이따금 들려오는 성적인 타락 등이 대표적인 혼합주의 신앙의 모습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하는 것은 힘이 듭니다. 반면에 물에 물 탄 듯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식으로 적당히 행하기는 쉽습니다. 요즘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이처럼 쉬운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두아디아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경고와 축복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커다란 환난이 임한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와 성도들이 짓는 죄를 모두 알고 계시기 때문에“각 사람의 행위대로”심지어 자녀들까지 심판하시겠답니다. 반면에 하나님만을 섬기면서 신앙을 굳게 지킨 신실한 성도들을“이기는 자, 끝까지 주님의 일을 하는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에게 만국을 다스릴 권세와 새벽별을 주신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만국을 다스리고, 새벽별처럼 빛나는 영생의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끝까지 신앙을 지켜서 새벽별처럼 빛나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河-

흰돌에 새겨진 이름

진품(眞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조품 또는 위조품의 반대말입니다. 진품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진품의 가치는 더욱 커지고 저절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반면에 소위“짝퉁”이라고 불리는 위조품은 어딘가 어색하고 결국에는 가짜인 것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때가 되면 누구하나 거들떠보지 않고 아무런 가치도 인정받지 못합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일곱 교회를 살펴보고 있는 세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서머나 교회는 말 그대로 진품입니다. 죽도록 충성했고 비록 세상에서 고통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지만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받았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시간이 흐르면서 첫 사랑의 감격과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초심을 잃은 신앙은 위험합니다. 마지막 순간에 변질된다면 가짜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살펴볼 버가모 교회 역시 안티바라고 하는 순교자를 낼 정도로 명성이 있었지만 교회 안에 가짜 교리가 침투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버가모 교회에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을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로 소개하는 것만 보아도 그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교회가 있던 버가모라는 도시 자체가 영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그곳에는 각종 신전이 있었고, 쾌락과 세상 풍습이 판을 쳤습니다. 그렇기에 신앙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본문에서는 버가모 교회에 침투해서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무리들을 니골라당이라고 부릅니다. 니골라당에 대해서는 에베소 교회에서도 잠깐 언급되었습니다.(계 2:6). 교회사에 의하면, 니골라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일곱 집사 가운데 한 명으로 여겨집니다. 그는 유대교로 개종했던 헬라인으로 다시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행 6:5). 사도행전에서 일곱 집사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 가운데 선출되었습니다. 니골라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니골라는 교회를 인도하는 집사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교회를 분열시키는 이단의 우두머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니골라당은 성경을 자기 좋을 대로 해석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그 다음에는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영적인 일이기에 육체와는 아무 상관이 없답니다. 하나님은 영에만 관심을 가지실 뿐, 육체는 어떻게 살든 관여하지 않으신답니다. 그래서 니골라당은 버가모에서 유행했던 세상의 음란과 쾌락을 마음껏 즐겼습니다. 육체로 짓는 죄는 구원과 상관이 없다는 교리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쾌락과 음란 그리고 거짓을 일삼으면서 자기 편할 대로 즐길 것 다 즐기면서, 교회에 와서는 거룩한 척하면서 사람들을 포섭했기에 사단의 무리라고 부른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직접 검으로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랍니다.

반면에 본문에서는 회개하고 끝까지 진품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두 가지 약속이 나옵니다.:“감추었던 만나”와 “흰 돌에 새겨진 이름”입니다. 감추었던 만나는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생명의 양식이자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가리킬 것입니다.“흰돌”에 새겨진 이름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는 구원입니다. 니골라당이 세상의 풍습을 따라갔지만, 진짜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의 은혜를 양식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니골라당이 검으로 심판을 받고 죽을 운명이지만, 진품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은 흰돌에 새겨져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흰돌에 새겨진 이름에 걸맞게 순결하고 거룩해야 함을 다시금 배웁니다. -河-

12월을 맞으며

“올 해의 마지막 달을 살고 있습니다. 한 해가 얼마나 빠르게 흘러가는지요! 우리말로 나이가 드는 것을 두고 “나이를 먹는다”고 합니다. 시간이 흐르는 것을 먹는 것으로 비유한 표현이 흥미롭습니다. 실제로 음식을 먹어 치우듯이 지나간 시간은 사라집니다. 좋은 음식을 먹으면 몸에 유익이 되고 삶 속에 열매로 남습니다. 시간도 먹으면 (나이를 먹듯이) 그것이 우리 삶에 귀한 열매로 나타납니다. 반대로 나쁜 음식을 먹으면 도리어 몸에 해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옳게 사용되지 않은 시간은 우리의 삶과 인생길에 도움이 되지 않고 도리어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나이를 먹는 것이나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시간을 잘 선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무척 부끄럽고 창피할 것입니다. [중략] 2010년 한 해 동안 336일을 먹고 이제 29일이 우리 앞에 남겨져 있습니다. 남겨진 날들 하루하루, 믿음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이웃을 섬기면서 살아봅시다.“

위의 글은 지난 목요일에 보낸 이-메일 서신 가운데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저 역시 목요일에 메일을 보내고, 올 한 해를 알차게 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시간을 헛되게 보낸다 싶으면 얼른 정신을 차립니다. 그동안 보낸 시간이 과연 하나님 앞에 기쁘게 드려졌는지 돌아보고, 제가 보낸(먹은) 시간이 어떤 열매로 나타날지 겸허하게 기다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인생 통장에 365일을 꼬박꼬박 넣어주시는데 연말연시가 되어야 시간의 귀중함을 깨닫게 되니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만, 그래도 남은 한 달여 열심히 살기로 결심해 봅니다.

저는 올 해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큐티를 강조했습니다. 주보에 있는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대로 따라 사시기를 부탁드렸습니다. 저와 함께 교회를 세우고 신앙생활을 하시는 서머나 성도님들께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전하고, 말씀의 은혜를 체험하실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저의 가장 큰 관심입니다. 아침에 하나님 말씀을 읽기 시작했다는 얘기를 전해들을 때 저는 춤을 출 듯이 기쁩니다. 송이꿀보다 달고, 살아있는 하나님 말씀의 은혜와 능력이 서머나 식구들에게 임하기를 뒷전에서 정말 애절하게 기도합니다.

이제 2010년은 한 달도 남지 않았고, 다시는 2010년이라는 시계추를 되돌릴 수 없습니다. 남은 한 달여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무엇보다, 말씀 붙잡고 사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큐티하시고, 성경말씀을 모두 이해하지 못하셔도,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을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받고 그 말씀을 곱씹으면서 하루하루 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이 위로가 되고 힘이 되고 소망이 됨을 분명히 체험하실 겁니다. 둘째는 기도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할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도입니다. 기도가 살 길입니다. 기도는 하늘과 땅을 잇는 신비로운 능력입니다. 장소가 허락한다면 연말연시에 특별기도회를 가지면서 우리의 신앙과 삶을 하나님께로 맞추고 싶지만 그럴 여건이 되지 않습니다. 대신에 각자의 골방에서 은밀하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은밀한 중에 들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은밀하게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만 덧붙인다면, 사랑이 그립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작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수요예배에서 배운 말씀을 마음에 품고 말입니다:“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河-

첫 사랑의 회복

올해 하반기에는 줄곧 큐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 주간동안의 큐티 본문가운데서 설교 본문을 정해서 말씀도 나누고 있습니다. 이제 12월의 큐티 본문은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밧모섬에 있던 요한이 환상가운데 보고 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이루어 질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상징적인 표현을 통해서 기록했습니다.

요한 계시록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신앙과 삶을 마지막 날을 기준삼아서 다시 정돈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의 어려운 말씀이나 표현에 신경 쓰기보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어떻게 맞이하며, 마지막에 성취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게 될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에 될 일에 지나친 관심을 기울이고 호기심을 갖는 것보다, 현재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고 점검하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의 첫 장에 의하면, 요한 계시록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주신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요한 계시록 말씀은 교회와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이 어떤 자세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해야 할지를 깨우쳐주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도적같이 다시 오신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교회와 성도들은 지금 이 순간에 각자의 신앙을 점검하고 예수님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앞으로 7주에 걸쳐서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일곱 교회가 어떤 상황에 있었기에 하나님 말씀이 그들에게 임했는지 살펴보고, 우리 교회와 성도님들 각자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이 시점에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고 새롭게 다짐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오늘은 첫 번째로 에베소 교회에 주신 말씀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2년여를 머물면서 특별한 애정과 열심을 갖고 세운 교회였습니다. 에베소는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의 마지막 행선지이기도 합니다. 에베소를 떠나서 예루살렘에 간 바울은 그곳에서 체포되고 로마로 호송되기 때문입니다. 로마 감옥에 갇힌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썼는데 그것이 곧 에베소서입니다. 에베소서 말씀은 이번 큐티와 주일설교에서 줄곧 나누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배운 대로 실천했습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을 사모하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를 바랐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가 옛 사람의 모습을 모두 버리고 새 사람을 입기를 지속적으로 권면합니다. 교회는 물론 가정과 사회생활에서도 빛의 열매를 맺기를 부탁했습니다. 이렇게 에베소 교회는 모범이 되었고, 예수님을 향한 첫사랑이 뜨거웠던 교회입니다.

그런데 오늘 요한 계시록 본문에서 에베소 교회를 두고 첫사랑을 버렸다고 책망합니다. 얼른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회복하기를 촉구합니다. 에베소 교회가 시간이 흐르면서 신앙이 급격하게 식어진 것 같습니다. 첫 사랑을 잃어 버렸습니다. 아무리 처음이 좋아도 끝이 망가지면 소용이 없습니다. 처음과 나중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역시 처음과 나중이 똑같이 하나님을 믿고 따르기를 기대하십니다. 처음보다 끝이 좋고, 아니 처음과 끝이 똑같은 서머나 식구들이 되시길 부탁드립니다. -河-

새 사람을 입으라

지난 설교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에베소서에는 예수님을 믿기 전의 모습과 예수님을 믿은 후의 모습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본 본문에서도“옛사람”과 “새사람”이라는 표현과 더불어 예수님을 믿은 후에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우리 앞에 펼쳐지는 삶은 천사들이 흠모할 만큼 매력적인 삶입니다. 요즘은 세상적인 축복에 관심을 많이 기울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우리가 흔히 축복이라고 말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이 세상에서 조금 편하게,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쭐대고 싶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비롯한 성경에서는 “가지는 것(having)”을 크게 강조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일용할 양식 정도, 남에게 꾸지 않을 정도의 삶이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대신에 성경에서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being)에 관심을 갖습니다. 신앙의 정도는 겉으로 보이는 것이나, 많이 소유한 것으로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니라, 신앙 인격과 그것이 겉으로 표현된 삶에 따라서 정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제시하는 구체적인 덕목들도 우리들의 인격과 교회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관계에 대한 말씀들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새롭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스타일이 180도 바뀌어야 합니다. 세상의 유혹과 욕심에 따라 사는 것은 옛 모습입니다. 심령이 새롭게 되고 그리스도로 옷 입은 새 사람은 “의와 진리의 거룩함”을 좇아 살아갑니다. 여기서 의는 바른 것입니다. 무엇 보다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진리는 거짓이 없는 참된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의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갖고 살아간다면 진리를 좇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의와 진리로 살면 자연스레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천국 백성으로 구별된 모습입니다.

25-32절에는 의와 진리로 거룩함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체적으로 가르쳐줍니다. 무엇보다,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해야 합니다. 거짓된 언행에 악한 세력이 임하고 자신과 이웃까지 시험에 들게 만듭니다. 분을 다스려야 합니다. 화를 낼 때도 사탄이 틈타기 때문입니다. 도적질과 같은 나쁜 습관도 고쳐야 합니다. 고칠 뿐만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언어생활도 조심해야 합니다.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선한 말만 사용해야 합니다. 새사람을 입은 그리스도인의 의롭고 참된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믿고도 옛 습관을 그대로 갖고 살면, 마귀가 틈을 탑니다. 무엇보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근심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었다면 구원은 보장 될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 그 이후의 삶이 옛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자꾸만 시험에 들고 성령을 근심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은 이후의 삶과 신앙의 성숙이 꼭 필요합니다.

마지막 31-32절은 오늘 본문의 요약입니다: “너희의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오늘 말씀만 잘 지키면, 멋지고 매력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성도님들이 모여 있는 우리 교회는 말 그대로 천국이 될 것입니다. 여기까지 나가기를 기도 가운데 노력합시다.-河-

하나님의 선물

선물 – 언제 들어도 마음 설레는 말입니다. 남에게 선물을 줄때도 기분이 좋지만, 선물을 받고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업습니다. 그래서 잠언 19장 6절에서는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을 주기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선물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고받는 사람 모두에게 행복을 선사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에베소서 말씀에도 선물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2장 8절에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교훈합니다. 이 말씀 속에 나오는 “은혜”와 “선물”은 각각 다른 헬라어가 사용되었지만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은혜는 값없이 베풀어주는 호의입니다. 선물은 눈에 보이고 피부로 느낄 정도로 구체적인 사건 또는 물질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그렇습니다. 2장 1-3절에 있듯이, 우리들은 본질상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였습니다. 영적인 죽음입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추한모양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세상 풍속을 따릅니다. 여기서 세상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공중권세 잡은 악한 영을 따르는 모든 행위가 일어나는 곳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를 구체적으로 표시해 주는 두 번째 삶의 모양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본능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마지막 세 번째 삶의 모양은 두 번째 모습과 비슷한데 마음이 추가되었습니다. 육체의 욕심이 충동적이고 말초적이라면, 마음의 욕망은 고상해 보이지만 그 안에 역시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마음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알지 못하거나 무시하면서 자기 멋대로 사는 것을 허물과 죄로 인해서 죽은 삶이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믿음을 갖고 예수님을 믿는 삶은 겉모습과 삶의 목적에서 차이가 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만큼 커다란 사랑을 입었으니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찬양가사가 딱-맞습니다. 육체를 좇는 삶은 이 세상의 삶이 끝입니다. 지나갈 것들입니다. 그래서“죽음”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은 영생의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에서 살려내셨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결국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 나와서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했을 뿐인데 이렇게 큰 은혜가 우리들에게 임했습니다. 할렐루야!

은혜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은 선물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삶 자체가 선물인 것을 깨닫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사해야 합니다. 또한 구원받은 삶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삶의 모습도 구체적으로 가르쳐줍니다. 첫째는,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고 그것을 오는 세대에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은혜는 분수처럼 세상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둘째로, 구원을 놓고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갖고 서로 키재기를 하거나 자랑을 한다면 그것은 선물을 남용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의 겸손이 나오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각자를 위해서 예비해 놓으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곧 선한 일입니다. 그 일이 어떤 일이든지 기쁨으로 감당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행복입니다. 다음 한 주간 하나님의 선물인 여러분 각자의 삶을 귀하게 여기고 누리기시를 바랍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