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꿈을 꾸는 교회 (4) : “한 몸”

“하나님의 꿈을 꾸는 교회”라는 주제로 연속해서 설교하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첫째 시간에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 교회가 모델로 삼아야 할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예배, 전도, 훈련, 교제가 교회 안에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겉모습만 번드르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수함과 진실함이 교회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은 물론 세상에서 칭송을 받을 정도의 좋은 평판을 얻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이 모든 것을 성령의 임재와 역사를 통해서 이룰 수 있었습니다.

연속 설교 두 번째 시간에는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교회의 참된 모습임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전심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교회에서의 예배는 물론 6일 동안 우리의 삶 자체가 예배가 되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우리 교회가 꿈꾸는 구제와 선교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세상에서 소금으로/빛으로 사는 비결은 착한행실로 가능함을 마태복음 말씀을 통해서 배웠고, 구제와 선교는 교회가 행할 수 있는 착한행실이라고 했습니다. 구제와 선교를 위한 우리의 기도제목이 속히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오늘 마지막 시간의 주제는 “한 몸”입니다. 하나님의 꿈을 꾸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one body)을 이루는 것입니다. 몸에는 여러 지체가 있습니다. 심장처럼 생명을 유지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기관도 있고, 머리카락처럼 숫자가 줄어도 생명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 지체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몸을 이루는 지체들입니다. 버릴 것이 하나도 없고, 하나님 앞에서는 귀하고 천한 것도 없습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인 고전 12:12절에서는 “한 몸이 되었고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요, 우리를 사랑의 띠로 하나 되게 하시는 분은 우리들 안에 계신 성령님이십니다.

교회를 다른 말로 신앙공동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단지 우리교회와 같은 개체교회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신앙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여기서“공동체”라는 말은 목적이나 동기 심지어 운명까지 함께하는 모임 또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핏값을 주고 사신 성도들로 이루어진 교회야말로 진정한 공동체임에 틀림없습니다. 게다가 앞으로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될 이웃들이기에 이 세상의 어떤 공동체보다 더 찐하고 강력한 위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의 가족이 된 하늘나라 백성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꿈을 꾸는 교회는 가족 같은 교회입니다. 가족이라고 해서 늘 평화롭고 사랑이 넘치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 안에는 갈등도 있고 어려움도 있습니다. 하지만 피를 나눈 가족이기에 서로 받아주고, 도와주고, 품어주면서 어려움을 극복해 갑니다. 교회도 가족과 마찬가지로 동고동락하고, 갈등이 생겨도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면서 풀어가고,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마음껏 우리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요즘은 우리 교회가 말 그대로 평안하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더욱 겸손하게 그리고 서로 사랑하면서 예수님 안에서 한 몸을 이뤄야 합니다. –

하나님의 꿈을 꾸는 교회 (3) : 빛으로 소금으로

예전에 젊은이들과 함께 목회할 때, 개신교회는 왜 여러 교단으로 나뉘어졌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았습니다. 교회의 갈등과 분열이 고스란히 드러난 부끄러운 모습이라고 솔직히 답변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분열을 통해서도 일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각기 다른 신앙의 색깔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신앙에 맞는 교단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다양한 모습으로 세상에 전파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이 지역에 299개의 교회가 있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교회숫자가 참 많다는 생각과 동시에 한 개를 더 채워서 300개가 되면 좋겠다는 아쉬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교회가 많은 것이나 개신교 안에 여러 교단들이 있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음을 자각하고 규모가 크던지 작던지 개별 교회에 맡겨진 사명에 충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교회의 숫자는 많을수록 좋습니다. 더 많은 하나님의 사명을 다양하게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꽤 오래되었지만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오늘날 이 자리에 서 있는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신 사명에 주력하는 것이 우리 교회가 할 일입니다. 우리 교회의 사명은 주보 뒷면에 있듯이 세 가지입니다.: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에 충실하며, 2)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우고, 3) 구제와 선교에 힘씀으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려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구원의 복음을 확증하고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께 영광돌립니다. 삶을 통한 예배를 통해서 복음의 능력을 세상 속에서 발휘합니다. 교회와 성도들 안에 구원의 복음이 살아서 역사하기를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훈련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구원의 복음을 세상에 전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것 역시 훈련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교회적으로 중고등부와 청년부는 전도사님과 선생님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을 세워 나갑니다. 성인들은 구역 속회와 지속적인 성경공부를 통해서 신앙과 삶의 훈련을 받습니다. 올해도 새로 취임하신 권사님들의 헌금으로 교회안의 젊은이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게 되었습니다.

구제와 선교 역시 우리 교회에 맡겨진 중요한 사명입니다. 구제는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돕는 것입니다. 선교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는데 참여하는 것입니다. 조전도사님께서 시작하신 소년소녀돕기 사역이 성도님들의 참여덕분에 매월 30여명에게 생활비를 보내줍니다. 올해부터 네팔의 박재면 선교사님을 미력하나마 돕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농촌교회나 지방의 작은 교회들도 도울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매월 홈리스 돕기 무료 배식은 성도님들의 자원봉사를 통해서 100여명의 노숙자들을 기쁨으로 그리고 거뜬히 돕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한 마음으로 교회를 세우시는 성도님들께 박수를 보냅니다. 하나님의 꿈을 꾸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이처럼 방향을 잘 잡았으니 이제 속도와 힘을 더하면 될 것 같습니다. 우리 서머나 교회가 단지 많은 교회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올바로 감당하는 특별한(unique) 교회로 자라가기를 기도하면서 함께 노력합시다.-

하나님의 꿈을 꾸는 교회 (2) : 예배

이번 연속 설교의 제목이“하나님의 꿈을 꾸는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꿈이 무엇인지 알아야 그에 걸맞은 교회를 세울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오순절 성령강림과 동시에 탄생한 초대교회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꿈꾸시는 교회의 특징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가장 커다란 꿈인“예배”에 대해서 배우는 시간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교회가 가장 중요시해야 할 책임이요 사역입니다. 이에 대해서 존 스토트 목사님은 살아있는 교회(The Living Church)라는 책에서 진정한 예배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진정한 예배는 성경적인 예배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구체적으로 계시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예배는 성경에 근거하고, 성경말씀을 읽고 함께 나누는 순서가 예배의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진정한 예배는 모든 성도들이 함께 참여하는 예배입니다. 시편 113편 1절에서“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하였듯이 우리 모든 주님의 백성들이 한 마음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의 성호를 영화롭게 찬양해야 합니다.

셋째로 진정한 예배는 영적예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선포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으며, 영으로 찬양하고 기도하는 예배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진정한 예배입니다.

마지막으로 진정한 예배는 도덕적 예배입니다. 이것은 예배에는 당연히 올바른 삶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삶이 뒷받침되지 않는 예배는 위선일 뿐이요 허공을 치는 예식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것이 예배로 이어질 때 우리의 예배는 살아있는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로마서 12장 1절도 우리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산제사, 즉 살아있는 예배가 어떠해야 하는지 가르쳐줍니다. 무엇보다 예배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자일 뿐입니다. 성도들이 예배의 주체가 될 수 없고, 성도들이 예배의 기쁨을 독차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고, 그 다음에 그 기쁨과 은혜를 성도들이 공유할 때 온전한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예배는 거룩한 산제사가 되어야 합니다. 거룩함은 존 스토트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영적예배와 도덕적 예배를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성도의 삶이 세상 속에서 거룩하게 구별되었을 때 그 예배가 곧 살아있는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요즘에는 우리를 비롯한 대부분의 교회들이 첨단기기와 악기들을 동원해서 예배합니다. 예배에 오는 청중들은 찬양가운데 뜨거움을 체험하고 잘 준비된 메시지에은혜를 체험합니다. 물론 예배와 더불어 친교와 교회의 사역도 매우 조직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예배의 순서와 프로그램에 하나님이 아닌 인간들이 주역이라면 그것은 올바른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를 통해서 기쁨과 영광을 받으실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의 예배는 그리 화려하지 않고 소박합니다. 하지만 꼭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라면 그것이야말로 살아있는 예배라는 사실입니다. 서머나 식구들의 삶과 우리 교회의 예배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의 꿈을 꾸는 교회 (1)

제 마음속에 간직된 교회의 아름다운 풍경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다녔던 고향교회입니다. 언덕배기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십자가가 높이 세워져 있어서, 한간에서는 십자가 꼭대기에 설치된 피뢰침 때문에 온 동네에 낙뢰가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교회 마당에는 우물이 있었습니다. 우물 옆에는 종탑이 있었는데, 주일아침이 되면 종소리가 온 마을에 울려 퍼졌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리스도인들은 아니었지만, 교회의 종소리를 두고 불평하거나 시끄럽다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근방에 교회가 하나뿐이어서 산을 넘어서 교회에 오시는 성도님들도 계셨습니다. 그 교회가 감리교회였기에 저는 선택의 자유도 없이 저절로 감리 교인이 될 수밖에 없었지요. 지금은 커다란 도시가 들어섰고 교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제 마음속에 영원한 고향처럼 교회의 모습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목사로서 우리 성도님들은 우리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실지 늘 궁금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수십 년을 한 교회만 지키신 성도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것이 우리 교회의 저력이기도 합니다. 작년에 새로운 예배처소로 이사 오면서 교회가 단순히 건물이 아니라 그 이상임을 우리 모두 공감하고 있습니다.

미국 교회를 빌려서 예배하는 불편함도 있고, 하루속히 아담한 예배처소를 얻는 것이 우리의 기도제목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함께 예배하고 교회를 세워나가는 성도님들임을 다시 한 번 절감했습니다. 교회의 크기나 건물의 유무를 떠나서, 우리 성도님들께서 서머나 교회를 마음속의 고향으로, 신앙의 주춧돌로, 정겹고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있는 교회로 생각해 주시길 바라면서 목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서머나 교회의 두 번째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간을 맞고 있습니다. 그 동안의 일들을 모두 뒤로 하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 앞에 세워주신 푯대를 향해서 앞으로 나갈 시점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들이 교회의 기초를 어떻게 세우는가에 따라서 우리 교회의 미래가 결정될 것입니다. 토대를 깊고 넓게 만든 후에, 차근차근 교회를 세워나간다면 우리 교회는 홍수가 나도 무너지지 않는 반석위에 세워진 교회가 될 것입니다. 반면에 적당히 교회를 세우고, 그냥 지나쳐가는 이민교회 정도로 생각한다면 우리 교회의 미래를 누구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늘 말씀드리듯이 우리 안에 십자가 복음이 살아있고 온 성도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하게 쓰실 겁니다. 그런 점에서 저와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을 출발점에 서는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 가지 교회의 모델이 있지만,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눈 사도행전 2장 42-47절의 초대교회 속에서 우리 교회가 나가야 할 목회와 사역의 방향을 찾고 싶습니다.: 1) 마음을 같이해서 모이는데 힘쓰는 교회, 2) 가르치고 배우는데 힘쓰는 교회, 3) 기쁨과 순전함으로 떡을 떼며 교제하는 가족 같은 교회, 4)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하는 공동체로 우리 서머나 교회가 더욱 성숙해 가기를 바랍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교회에 오는 것이 기쁘고, 예배하는 것이 감사하고, 서머나 교인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운 교회를 세우기 원합니다. 여기에 세상 사람들의 칭찬까지 곁들인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 “하나님의 꿈을 꾸는 교회”라는 연속설교를 통해서 우리 가운데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뜨거워지고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교회를 세우기로 결단하기 원합니다.-河

위로 받고 나누고

우리는 지난 2월부터 위로에 대한 연속 설교를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2월 한 달 동안은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외로울 때, 마다하지 않고 찾아오십니다(잃은 양 한 마리). 신앙생활이나 인생길에서 힘들고 지쳐서 죽음을 생각할 만큼 절망가운데 있을 때, 힘을 공급해 주시고 앞으로 나갈 길을 가르쳐주십니다(로뎀나무 밑의 엘리야). 인간관계에서 소외감을 느끼면서도 사람들에게 연연하고 있을 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차근차근 인도해 주십니다(레아가 만난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이나 인생길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던 것들을 잃어버린 상실의 슬픔을 위로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나인성 과부).

지난 세 번에 걸쳐서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위로를 받기만 하면 그것은 욕심이요 이기적인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실 때는 그 은혜를 누릴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웃에게 나눠주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깊이 경험할 때는 인생의 골도 그만큼 깊었다는 뜻입니다.

때때로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사건이나 질병 등을 경험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따뜻한 위로를 체험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위로를 우리와 똑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주어야 합니다. 아니 우리에게 위로를 주심은 동병상련에 있는 이웃들을 위로해 주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것을 헨리 나우웬의 말을 빌려서 ‘상처 입은 치유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했다고 인생길이 늘 행복한 것만은 아닙니다. 인생길의 어려움은 태평양의 파도처럼 쉬지 않고 밀려옵니다. 우리 모두 죄로 인해서 어그러지고 부서진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들이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깃든 대속, 구속, 화목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마음에 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에 평화가 깃듭니다.

사랑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모든 외로움, 낙심과 절망, 소외감과 상실감을 은혜로 채울 수 있습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도 지고 신앙의 갈보리 언덕을 올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 각자의 등에 지어주신 십자가가 가장 가볍고 귀한 것임을 깨닫고 인생길을 걸어갈 때 자신도 모르게 찬양과 감사가 흘러나옵니다.

이제 오늘은 위로받은 자의 삶에 대한 마지막 말씀입니다. 현재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나라도 잃고 성전도 잃고 절망과 낙심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렸다고 푸념합니다. 자신들이 이렇게 힘이 든데 하나님은 뒷짐을 지고 계시다고 불평합니다.

그런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만 바라보라고 명령합니다. 능력을 주시고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새 힘을 주시고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비상(飛上)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교훈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사람들이 해야 할 사명은 더 이상 우울하거나 기죽지 않고 하늘로 솟구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힘차게 뛰어오르는 삶이 곧 위로받은 자의 참모습입니다. -河-

부활절 아침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이 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거나 삼삼오오 모여서 허탈감을 달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몇 번씩 예언하셨지만, 제자들은 그것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적어도 다시 살아나실 분이면 죽으실 때 무엇인가 암시를 주시거나,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는 기적이라도 베푸시고 돌아가셔야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모든 사람이 가야만 하는 죽음의 길을 가셨고 그것도 매우 그 비참하게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맥을 놓고 있을 때, 예수님을 죽인 대제사장과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냈습니다. 이들은 빌라도를 다시 찾아가서 적어도 사흘 동안은 무덤 문을 아주 굳게 지켜 줄 것을 부탁합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은 것은 아닙니다. 행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다는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간 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세상을 혼란케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살아생전에 부활을 말씀하셨지만, 실제로 그것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안식일이 지나고 첫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습니다. 이들은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을 장사했을 때, 이미 예수님의 무덤을 확인해 두었습니다. 당시의 무덤은 동굴식이어서 무덤을 막아놓은 돌을 치우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고, 장사지낸 후에는 향품을 갖고 무덤을 찾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8장에서는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 큰 지진이 나고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서 예수님의 부활을 여인들에게 알려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때 여인들의 반응은 “무서움과 큰 기쁨”이었습니다. 복음서마다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마태복음에 의하면 무서움과 기쁨이 교차해있던 여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평강의 인사와 더불어 두려워말라고 안심시키십니다. 여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서 경배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제제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전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전하는 첫 번째 부활절 아침에 있었던 일입니다.

창세기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말씀으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일곱째 날에는 안식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에서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주일(주님의 날)로 지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죄로 인해서 망가진 세상이 다시 재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부활로 인해서 창세기의 창조가 다시 회복되고 구원의 문이 새롭게 활짝 열렸습니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이브의 죄로 인해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는 것도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2010년 부활절을 맞아서 서머나 식구들 위에 부활의 소망이 삶속 깊이 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새벽 미명에 여인들을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서머나 식구들 마음속에도 찾아오실 줄 믿습니다. 우리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음껏 찬양하고 예배합시다.-河-

십자가 마음에 품고

예수님을 구주(救主)로 영접하고 죄와 죽음에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가장 큰 은혜와 위로는 십자가에서 시작됩니다.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자 가장 숭고한 정점(crux)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십자가는 로마 시대에 악한 죄를 저지른 죄수들을 죽이는 나무로 만든 형틀이었습니다. 당시는 로마가 세상을 지배하고 많은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었기에, 로마에 반역하거나 세상을 소란케 하는 죄인들은 십자가에 달아서 죽였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그리 신선한 이미지도 아니고, 희망의 이미지는 더군다나 아니었고, 죄와 죽음의 상징이었습니다. 속된 말로 저주와 재수 없음을 뜻하는 나무 형틀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아주 초라한 모습으로, 로마와 유대지도자들에게는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의 모습으로 그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구약성경 신명기 21장 23절 말씀대로 하면 저주를 한 몸에 받고 나무에 달려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런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악한 죄인들만 달리는 십자가에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사실 – 이것이 십자가의 아이러니요 역설입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고 가르쳐줍니다. 원래 우리가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얻었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막힌 담이 헐렸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패배가 아닌“승리”라고 성경이 전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11에서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죽음과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두 가지 대조되는 단어가 사용됩니다.“죽음”과“생명”입니다. 헬라어 본문을 따라 말하면 “예수의 죽음”과“예수의 생명”이라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은 곧 생명이신 예수님의 부활과 연결됩니다. 죽으심은 살아나심의 한 과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들이 생명을 얻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을 그의 몸에 갖고 산다고 했습니다. 자신 때문에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항상 기억하고 그 안에서 은혜와 위로를 받는 다는 고백입니다.“짊어진다”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를 연상시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자신의 인생길을 갔습니다. 그래도 항상 기뻐했고 감사했습니다. 그 길이 생명의 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길이“예수의 생명”을 체험하는 과정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우리 자신을 십자가 아래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지고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길을 묵묵히 걷는 것입니다. 힘들 때도 있고, 손해 볼 때도 있고, 낙심과 절망이 밀려올 때도 있습니다. 그 길은 엄연히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길이 곧 “생명 되신 예수님”을 만나는 길이고,“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는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고 걸어갑니다. 아니 십자가를 마음에 품고 주어진 인생길을 감사와 찬양가운데 걸어갑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위로를 받은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살아야 할 인생임을 다시금 느끼면서 십자가를 마음에 품고 앞으로 나갑니다. -河-

기쁨과 찬양으로

전도용 주보에 “우울증을 극복하려면”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습니다. 어느 때부터인지 우울증(depression)이라는 말을 자주 듣고, 우울증을 앓고 있던 유명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사회적인 이슈가 되기도 했습니다. 심각한 경우는 아니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금씩 우울증 증세를 경험한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예외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우리가 삶 속에서 겪는“우울함”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동안 살펴보았던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는 순간들(외로움, 두려움과 절망, 관계의 단절과 소외, 상실감)은 자칫 잘못하면 우울함으로 빠질 수 있는 길목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길목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면 새로운 차원의 삶이 시작됩니다. 반대로 그 순간에 하나님의 손길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문제 속으로 들어간다면 우울증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가장 많이 체험한 사람이 있다면‘다윗“일 겁니다. 다윗은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장차 이스라엘 왕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고 기름부음까지 받았습니다. 그리고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을 물리치는 큰 공적도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다윗에게 찾아온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이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달려듭니다. 다윗은 광야로 피신했습니다. 다윗에게 광야는 외로움과 두려움 그리고 절망이 밀려오는 곳이었습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입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섭리 가운데 광야의 어려움을 통과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던 사울 왕에 이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하지만 다윗에게 어려움은 계속해서 닥쳐옵니다. 부하의 아내인 밧세바를 범하는 사건을 기점으로 그의 삶에 먹구름이 드리웁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는 상실감, 친아들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밤중에 도피해야 하는 관계의 상실과 소외를 다윗이 경험합니다. 그런 점에서 다윗왕이야 말로 우울증에 빠질법한 위기의 삶을 살았던 인물입니다.

구약성경 시편에 처절한 한평생을 살았던 다윗의 삶과 심정이 매우 솔직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절규합니다. 자신이 지은 죄를 놓고 애통하며 회개합니다. 침상이 젖을 만큼 눈물을 흘립니다. 자신을 무너뜨리려는 원수들 앞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합니다. 피골이 상접하는 육체의 고통도 경험합니다. 그런데 이런 인생의 위기와 고통은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하는 길목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다윗을 향해서“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다윗은 시편 30편 11-12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슬픔이 춤이 되게 하시고 기쁨이 되게 하셨다고 선포합니다.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감사합니다. 우울증에 걸릴법한 갖가지 어려움을 경험한 다윗이지만, 그는 그 어려운 길목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했습니다. 그때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절망이 변하여 감사가 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제시한 우울증을 극복하는 비결 여섯 가지 가운데 두 가지가 “노래하라. 음악을 즐기라”“하나님께 찬양하고 감사하라”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이“기쁨의 찬송과 감사”임을 기억합시다. -河-

“상처입은 치유자”

4주에 걸쳐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고, 또한 하님께서는 우리를 친히 위로해 주시는 분임을 배웠습니다. 잃은 양 한 마리가 느끼는 외로움, 로뎀나무 밑의 엘리야가 처절하게 느꼈던 두려움과 절망,야곱의 첫 번째 아내인 레아가 느꼈던 관계의 단절과 소외,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하나뿐인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나인성 과부의 상실감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들도 삶의 여정에서 예외 없이 느끼는 것들입니다.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목자의 마음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기도를 드리는 엘리야에게 해야 할 일과 미래를 활짝 열어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레아가 느끼는 슬픔을 아시고 그에게 아들을 주시고 결국에는 그녀의 입에서“내가 이제는 주를 찬양하리이다”라고 고백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상실감에 한없이 슬퍼하는 나인성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고 아들을 살려주신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그동안 살펴본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임하는 것을 체험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릴 때 하나님의 위로가 임합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지쳐서 하나님께 나갈 의지나 힘도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로뎀나무 밑의 엘리야와 나인성 과부를 찾아오셨듯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힘을 주시고 살 길을 열어 주십니다.

이제 앞으로 4주 동안은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할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나”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가 많습니다. 그때 기독교인들은 이기적이고, 기독교가 배타적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받은 은혜를 세상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얻고 힘이 생겼다면, 슬픔 가운데 있는 사람들, 소외되고 외로운 이웃들, 상실감에 빠져서 절망가운데 있는 이웃들에게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위로자>로 다가가야 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인상처 입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은 헨리 나우웬의 책 제목과 일치합니다. 우리 모두는 상처를 갖고 삽니다. 그래서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합니다. 상처를 입었지만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했기에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그들을 위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온 몸에 상처를 입으셨습니다.”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실 만큼 외로우셨고 그 순간만큼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고 느끼실 만큼 소외감과 상실감에 휩싸이셨습니다. 물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십니다. 동시에 그 상처로 우리를 치유하시고 위로하십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예수님이야말로 “상처 입은 치유자”이십니다.

이제 우리들도 세상에 치유자로 위로자로 나가야 합니다.“예수님처럼 해방을 선포하는 사람은 자신의 상처뿐 아니라 남의 상처도 돌보아야 합니다.”<헨리 나우웬>.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일로 부르셨다고 교훈합니다.“하나님께서 보내신 위로자”로 세상에 나가시는 서머나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 -河-

위로의 하나님 : 아픔을 싸매주심

지난주에는 위로의 하나님 세 번째 시간으로 야곱의 첫 번째 아내인 레아를 위로해 주신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버지의 뜻대로 야곱의 아내가 된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그리워하면서 살았습니다. 세 번째 아들을 낳기까지 레아의 마음을 오직 남편뿐이었습니다.

레아는 아들을 낳을 때 마다 아들의 이름을 르우벤(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시므온(주님께서 내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하소연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또 이렇게 아들을 주셨구나), 레위(내가 아들을 셋이나 낳았으니 이제는 남편도 별수 없이 나에게 단단히 매이겠지)라고 지으면서 남편의 사랑을 그리워합니다.

하지만 레아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네 번째 아들을 낳고 “유다(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했습니다. 오매불망 남편만을 바라보던 레아가 네 번째 유다를 낳고 “이제는”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레아를 불쌍히 여기셔서 아들을 주시는데, 레아는 그동안 하나님 안에서 위로를 얻기보다 아들 낳은 것을 갖고 남편의 마음을 얻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레아의 마음이 남편이 아니라 자신을 향할 때 까지 기다리시고 네 번째 아들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위로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릴 때까지 한결같이 임한다는 사실을 레아를 통해서 배웁니다.

오늘 본문속의 주인공은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나인성에 사는 한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아들 하나를 바라보면서 남편 없이 살던 과부였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뿐인 아들이 죽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아들의 시신을 메고 동구 밖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과 많은 사람들은 나인성으로 들어가고 있었고, 마을 어귀에서 장례행렬과 마주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외아들을 잃은 과부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불쌍히 여기사”라고 예수님의 마음을 표현해 놓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여인을 보시고 마음이 아프셨다는 뜻입니다. 여인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실 만큼 측은하게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가가셔서 여인의 아들을 살려내십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우리의 슬픔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여인의 슬픔을 보시고, 그녀를 불쌍히 여기시면서 위로하시고 그녀의 아들을 살려주셨듯이, 예수님께서 우리들 마음속에도 그대로 임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위로해 주시고, 우리의 아픔을 치유해 주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을 구약성경에서는“헤세드”라는 히브리어로 표현해 놓았습니다. 변함없고, 공평하고, 아주 애절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시편 103편 1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김”은 어머니가 자식을 품에 안고 보호하는 것과 같은 모성적인 사랑입니다.

우리 모두는 상처를 갖고 삽니다. 아주 오래전에 받은 상처부터 최근의 것까지, 무심코 한두 번 만난 사람들로 받은 상처부터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 받은 상처까지 우리들의 마음은 상처투성이입니다. 우리들의 상처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과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치료되고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서머나 식구들의 아픈 마음위에 포근하게 임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