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시작 : 룻과 보아스

보아스가 자신의 밭에서 마음대로 보리이삭을 주워갈 것을 허락했기 때문에 룻과 나오미는 양식 걱정을 하지 않고 한 철을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어머니 나오미가 룻울 불러놓고 마음에 있던 얘기를 합니다. 언제까지 여자 둘이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룻도 새로운 시작을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나오미는 룻이 보아스의 밭에 가서 보리 이삭을 주워올 때마다 룻을 보아스에게 시집보내고 싶은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룻을 불러놓고 자신의 의중을 얘기하면서 오늘 밤에 보아스가 타작마당에서 밤을 지새울 때 슬며시 그의 잠자리에 들어갈 것을 부탁합니다.

“목욕을 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3절)라는 나오미의 말은 룻으로 하여금 신부 장단을 하고 보아스에게 가라는 것입니다.“그 발치에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4절)는 것은 룻에게 보아스의 침상에 오르라는 야릿한 뉘앙스를 갖고 있는 히브리식 표현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어떤 사람이 죽으면 형제나 자식 아닌 가까운 친족이 남겨진 재산이나 부인을 취해서 가문의 대를 잇는 관습이 있었습니다(신25:5). 보아스는 돌아가신 시아버지 엘리멜렉의 친족입니다. 그러니까 나오미는 엘리멜렉이 룻에게 있어서 가장 적합한 남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룻을 보아스에게 시집보내기 위해서 꾀를 쓴 것 같습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말에 그대로 순종합니다. 마침 보아스는 보리 추수를 모두 끝내고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서”보리 낟가리 옆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수확한 것을 집에 가져가기 전까지 주인은 낟가리를 지키면서 그곳에서 잠을 잤습니다. 룻은 밤중에 슬며시 보아스의 침상에 오릅니다. 보아스가 한밤중에 깜짝 놀라서 잠을 깹니다. 룻이 자기 발밑에 있는 것입니다. 웬만한 사람 같았으면 모압여인 룻을 저주하고 날이 밝았을 때 마을 사람들 앞에서 아주 큰 창피를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도리어 룻을 축복합니다. 게다가 보아스는 룻의 마음속에서“인애(헤세드)”즉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다고 칭찬합니다(10절).모압 사람이지만 그녀의 부지런함과 시어머니를 모시는 효심으로 인해서 룻은 이미 마을에서 “현숙한 여인”(11절)이라는 평판을 얻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보아스도 아름다운 여인 룻을 마음에 두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룻은 보아스의 말대로 그 밤을 함께 머뭅니다. 그리고 동이 트기 전에 보리 여섯 되를 주고 룻을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돌려보냅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매우 현명한 여인입니다. 룻에게 자초지종을 듣고는 잠잠히 보아스의 처분을 기다리자고 제안합니다. 룻기의 사랑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지만 나오미의 지혜, 룻의 순종, 보아스의 배려로 룻과 보아스의 사랑이 움트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랑이 열매를 맺으면 보아스가 나오미와 룻을 책임지고 이들에게는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바로 보아스는 룻과 나오미에게 구세주(redeemer)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빈손으로 고향에 돌아온 나오미에게 이런 충만한 축복을 예비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헤세드 –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축복입니다.河-

룻이 보아스를 만나다

가뭄을 피해서 모압으로 피난 갔던 나오미가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잃고 모압 며느리 룻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금의환향해도 모자랄 판에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어서 돌아왔으니 나오미의 마음이 오죽했을까요? 동네사람들이 구경나온 자리에서 나오미는 자신의 현재 모습을 있는 그대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더 이상 기쁨 또는 즐거움이란 뜻의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고통스럽다는 뜻의 마라라고 불러달라고 당부합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에게 닥친 재난이 하나님께서 벌주신 것이라고 사람들 앞에서 담담하게 밝힙니다. 그렇게 나오미의 베들레헴 귀환은 빈털터리 초라한 모습으로 시작했습니다.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돌아오던 시기는 풍년이 들어서 보리를 추수하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나오미와 룻은 양식걱정을 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그때 선하고 부지런한 며느리 룻이 이삭을 주우러 들에 나가기로 결심합니다. 모압 여인이 이스라엘 들판에 나가는 것 자체가 비난을 무릅쓴 행위입니다. 그녀가 들에 나가면 또 다시 동네에 빅뉴스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룻은 시어머니를 위해서 생활전선으로 뛰어든 것입니다.

그때 베들레헴에는 보아스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보아스는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척입니다. 그리고 보아스라는 이름이“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듯이 그는 베들레헴의 유력 인사였습니다. 룻이 들로 나가서 보리이삭을 주운 곳이 바로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우연히”라고 기록했습니다(2:3). 물론 우연히 벌어진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 우연은 없습니다. 운이 좋다는 말도 통하지 않습니다.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뜻이 깃들어 있는데 이것을“하나님의 섭리”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룻기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보아스는 부족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마음이 비단결처럼 곱고 말 그대로 신사였습니다. 그는 들에서 일하는 일꾼들과도 서로 하나님의 축복을 비는 인사를 했습니다. 모압여인 룻이 자신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 것을 보고 부정 탄다고 좇아낼 만도 한데 룻을 살뜰하게 챙겨줍니다. 아니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이방 여인에게 하나님의 복을 빌어줍니다. 이처럼 보아스는 하나님께 사로잡힌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마음을 소유한 인물이었습니다. 여기서부터 룻기의 말씀은 칠흑 같이 어두운 분위기에서 동이 터오는 새벽하늘 분위기로 서서히 전환됩니다.

룻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선합니다. 당시 사사시대는 도덕적으로 신앙적으로 매우 혼란스럽고 시끄럽던 때였는데 이상하리만큼 룻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착하고 말 그대로 “평화의 사람들”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복도 내리시지만 벌도 내리신다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앙)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이들이 하나님을 확실히 만났고, 혼탁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발버둥 치며 노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처럼 살았던 인물들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들처럼 선하고 구별된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소원합니다.河-

베들레헴에 돌아오다

모압땅을 떠난 시어머니 룻과 모압 며느리 룻이 드디어 베들레헴에 돌아옵니다. 그때는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아서 걷거나 기껏해야 낙타와 같은 짐승을 타고 여행했습니다. 나오미와 룻은 며칠을 걸어서 고향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중동의 뙤약볕에 얼굴도 많이 타고 옷차림도 아주 허름했을 겁니다. 고향에 와보니 소문에 듣던 대로 고향땅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어서 사람들이 보리를 수확하고 있었습니다.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온 자신의 처지와 비교하면 만감이 교차했겠지요.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돌아왔다는 소문이 작은 동네에 쫙 퍼집니다. 이것을 두고 오늘 본문 19절에서는 온 성읍이 나오미와 룻이 돌아온 것을 두고 들썩거렸다고 했습니다. 작은 동네 베들레헴에 빅뉴스였던 것입니다. 소문을 듣고 동네사람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모압에 가서 축복을 받고 성공을 해서 아주 큰 재산과 종들을 데리고 온 줄 알았습니다. 소위 금의환향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사실은 어떻습니까? 남편 엘리멜렉도 두 아들도 없습니다. 그리고 나오미가 외국 며느리를 데리고 거지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은 수군댔을 겁니다. 그리고 누군가 “이가 나오미냐?”라고 입을 열었습니다. 아니 나오미가 어떻게 이 지경이 되었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핀잔의 말을 했고, 어떤 사람은 진심으로 동정어린 마음에서“이가 나오미냐?”고 말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19절은 베들레헴에서 돌아온 나오미와 룻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는 모습을 가감 없이 전하고 있습니다.

나오미는 담담합니다. 조금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자신을 숨기려고 하지도 않고 그 나마 남은 자존심을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자신을 더 이상“기쁨”이라는 뜻의 이름인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고난”이란 뜻의 마라라고 부를 것을 부탁합니다. 고향을 떠날 때는 풍족해서 떠났는데 빈손으로 왔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도 잃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축복하신 것이 아니라 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빈털터리가 되었다고 담담하게 자신에게 닥친 쓰디쓴 인생길을 고향사람들에게 보고합니다.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누구나 자신의 약점이나 실패를 숨기려고 합니다. 더구나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두고 하나님 탓을 하거나 사람들 탓을 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이 모든 것을 자신의 가슴에 끓어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마라라고 불러달라고 얘기합니다. 대단한 용기입니다. 마음을 다 비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자신에게 닥친 알 수 없는 고난을 두고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회개하고 깊이 생각한 하나님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선포입니다.

나오미는 이렇게 고향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솔직히 내보였습니다. 나오미도 사람입니다. 그녀의 마음이 편할 리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나오미와 룻을 진심으로 지켜보는 분이 계셨습니다. 바로 자신을 사랑하는 자, 자신이 부른 사람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복음성가의 가사대로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께서 나오미와 룻을 주목하고 계셨습니다.河-

나오미와 룻

지난주에는 모압땅으로 피난갔던 나오미의 가정에 밀어닥친 고난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병약한 두 아들과 가족을 살리려고 모압으로 피난을 갔는데 피난길이 남편과 두 아들을 잃게 된 고난의 길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래도 나오미는 두 며느리와 함께 모암땅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향 베들레헴에 가뭄이 그치고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나오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합니다. 그런데 이제 남은 두 며느리들이 문제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의 관습에 따라서 나오미가 두 며느리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그들로 하여금 다른 남자를 찾아서 결혼할 수 있도록 남겨놓고 떠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오늘 본문에도 나오듯이 나오미에게 다른 아들이 있다면 그들과 결혼시키는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첫째 아들이 결혼해서 죽으면 그의 아내는 결혼하지 않은 다른 형제들이 아내로 맞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두 아들을 모두 잃었기에 더 이상 며느리들을 시집보낼 아들이 없었습니다.

결국 두 며느리를 모압땅에 두고 가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며느리들에게 자세하게 사정을 설명해 줍니다(12-13절). 매우 자상한 시어머니입니다. 자신이 늙어서 자식을 낳을 수도 새로 남편을 얻을 수도 없고, 설령 남편을 얻어서 아들을 낳아도 그들이 장성하기를 기다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처음에는 나오미가 두 며느리와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것은 며느리들에게 못할 일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나오미는 두 며느리를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두 며느리는 게다가 이스라엘 출신이 아니라 모압 여인들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에 가면 문화도 다르고 워낙 이스라엘 민족이 배타적이어서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자신보다 두 며느리에게 좋은 결정을 합니다. 매우 힘든 상황 속에서도 사랑하는 두 며느리를 진심으로 배려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나오미의 마음씨가 얼마나 곱습니까?

처음에는 두 며느리 모두 나오미를 떠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결국 오르바라는 며느리는 나오미의 간곡한 부탁에 모압땅에 남기로 합니다. 그런데 룻은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가겠답니다. 14절에 보면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꼭 붙잡았습니다. 시어머니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함께 가게 해달라고 통사정을 했습니다. 나오미와 함께 생사를 같이 하겠답니다. 그가 나오미를 버리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벌하실 것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룻의 결심이 완강한 것을 알아차린 나오미가 그녀와 함께 베들레헴에 돌아가기로 결정합니다.

나오미가 두 며느리와 이별하고 혼자서 고향땅에 가기로 결심하는 장면은 언제보아도 눈물겹습니다. 나오미의 외롭고 기구한 운명이 그대로 들어나기 때문입니다. 그 와중에도 나오미와 룻이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은 매우 감동적입니다. 룻은 끝가지 시어머니를 모시겠답니다. 나오미는 룻을 위해서 모압에 남으라고 설득합니다. 아픈 마음을 뒤로 하고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은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됩니다. 하물며 이들을 지켜보신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셨을까요?河-

피난길이 고난길이 되다

앞으로 6주에 걸쳐서 구약성경의 룻기를 연속으로 설교할 예정입니다. 룻기의 배경은 구약의 사사시대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출애굽하여 40년 광야시대를 지나서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 땅에 들어간 직후가 바로 사사시대입니다.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도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에 하나님께 갔고 그 다음에는 사사들이 등장해서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사사는 재판관이라는 뜻이지만 이들은 실제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였습니다. 삼손과 기드온이 당시의 유명한 사사들입니다. 사사시대는 이스라엘이 매우 어지러운 때였습니다. 사사들이 없으면 백성들은 가나안땅의 우상을 섬기고 연이어 이웃나라가 쳐들어와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사사기 후반부에는 이스라엘 민족 안에 내분이 생겨서 처참한 동족상잔의 비극이 발생합니다.

룻기의 배경이 되는 사사시대는 이처럼 하나님께 불손종한 백성들이 판을 치고,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했으며, 폭력이 난무한 어지럽고 절망스러운 시대였습니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극심한 가뭄까지 들었습니다. 그때 베들레헴에 엘리멜렉(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엘리멜렉은 가뭄을 피하기 위해서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땅으로 피난을 갑니다.

고향을 등지고 살 길을 찾아서 모압땅에 왔지만 그곳에서 이들은 더 큰 재난을 경험합니다. 말 그대로 피난길이 고난길이 된 것입니다. 먼저 가장인 엘리멜렉이 죽습니다. 그의 부인 나오미와 두 아들만 남게 된 것입니다. 나오미는 그곳에서 두 아들을 모압 여인들과 장가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이들이 모압에 가서 10년쯤 살았을 때 두 아들마저 죽습니다.

룻기는 이렇게 한 가족에 임한 고난으로 시작합니다. 이들에게 닥친 고난은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하지만 룻기는 이 고난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바뀌는지 매우 흥미롭게 설명해 줍니다. 이들의 고난 뒤편에 하나님께서 계셨습니다. 또한 룻기에 나오는 세 명의 주요 등장인물들(나오미, 룻, 보아스)은 모두 하나님을 진실 되게 믿는 아름다운 믿음의 소유자들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당시의 세상은 매우 혼탁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기보다 내부의 분열과 싸움으로 불신의 벽이 높아지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었고, 하나님은 이들을 주목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서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룻의 후손 가운데 다윗 왕이 탄생하고 천여 년 후에는 룻의 가보에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 룻기 연속설교를 통해서 서머나 식구들게 다음과 같은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우리 자신과 역사 속에 임하는 하나님의 귀한 섭리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나오미가 겪은 고난의 삶에 우리들 삶의 여정을 대입해보고 그 안에서 위로와 힘을 얻는 것입니다. 셋째로, 혼탁한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쓰신 나오미, 룻, 보아스의 성품을 살펴보고 이들을 닮는 멋진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결심하는 것입니다. 룻기 연속설교를 통해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잔잔히 그리고 깊이 임하기를 바랍니다.-河-

고넬료와 베드로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고 예루살렘에서부터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복음이 폭발적으로 전파되면서 핍박이 이어졌습니다. 핍박을 피하기 위해서 많은 기독교인들은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오직 성령이 너희가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1:8)는 예수님의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교회가 핍박을 받으면서 성도들이 사방으로 흩어졌고, 그들은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전화위복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핍박을 사용하셔서 복음이 사방으로 전파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 와중에 스데반은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서 순교합니다.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 있었던 사울이라는 청년은 다메섹으로 가는 중에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감옥에 잡아넣으면서 핍박을 가하던 유대청년이 한 순간에 예수님을 만나서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가는 곳마다 기적을 일으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핍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불길처럼 온 세상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늘 본문은 고넬료라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사건입니다. 고넬료는 가이사랴 지방에 파견된 로마 장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곳에서 유대인들로부터 하나님을 소개받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당시 유대교에서는 유대인이 아니면서 하나님을 믿는 이방인을 두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God-fearer)”이라고 불렀는데 본문 2절에 고넬료를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고넬료는 매우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을 성심껏 도와서 그들로부터 매우 좋은 평판을 얻었습니다. 로마 군인이 식민지의 백성들로부터 칭찬받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고넬료는 또한 시간을 정해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루는 고넬료가 오후 세시에 기도하는데 천사의 음성을 듣습니다. 욥바로 사람을 보내서 그곳에 있는 베드로를 데려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고넬료는 곧바로 욥바로 사람을 보냅니다. 그때 베드로는 욥바에서 도르가라는 여제자가 죽은 것을 살려내는 기적을 행하고 그곳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베드로 역시 기도하는데 환상을 봅니다. 구약의 율법을 따르면 먹을 수 없는 짐승들이 가득 들은 광주리였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먹으라고 하십니다.“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10:15)는 말씀에 베드로는 당황합니다. 그때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를 부릅니다. 베드로는 그들과 함께 고넬료 집에 와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고넬료와 그 집에 모인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믿은 첫 번째 로마사람이 된 것입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온 백성을 구제하면서 이웃을 섬겼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깨끗한 그릇이었습니다.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화가 담겼으니 얼마나 기쁘고 감사하였겠습니까?  -河-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복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복음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너희가 예수를 죽였다는 설교를 듣고“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2:37)라며 회개하면서 성령을 선물로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복음에 대해서 저항하고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막는 훼방꾼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나 초대교회 때나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언제나 복음에 대해서 적대적이었습니다. 자기들이 구축해 놓은 기득권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했고, 그들이 믿는 신념에 꽁꽁 매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부류는 이 모든 상황을 멀찍이 떨어져서 관망하는 구경꾼들입니다. 이들은 복음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자신들의 일이 아니기에 무관심할 뿐입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구경꾼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증인”들입니다. 지난 번 설교에서 증인은 1)“마르투스”라는 헬라어 의미 그대로 순교의 각오를 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이라고 했습니다. 2) 예수님의 증인이기에 예수님만을 전하지 자신의 뜻이나 생각을 전하지 않습니다. 3) 재판정에 증인이 서듯이 이들은 세상 속에서 예수님을 변호하는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은 성령을 체험하고 권능을 받고 난 후에 아주 훌륭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면서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변호한 것이 대표적인 증인의 모습입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에 전해지면서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싫어하는 훼방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권력을 갖고 있었기에 앉은뱅이를 고친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무슨 이유와 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지 심문했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각오한 베드로는 담대하게 답변합니다.:“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행4:10). 다시는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종교 지도자들의 위협에 베드로와 요한은 더욱 담대하게 답변합니다.:“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행4:19). 불과 두어 달 전에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이런 용기가 생긴 것이 의아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잡혀있는 동안에 다른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을 졸이면서 기도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감옥에 갇히면 복음도 갇힌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풀려났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교회에 닥친 첫 번째 위기를 넘긴 것입니다. 그때 모든 사람들이 일심으로 소리를 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서 복음은 더욱 빠르고 강하게 예루살렘에 전파됩니다. 이렇게 주님의 교회는 그 생명력을 이어갔고 더욱 크게 부흥해 갔습니다. 할렐루야! -河-

유쾌하게 되는 날

최근에 마음을 활짝 열고 화통하게 웃어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눈코 뜰 새 없이 돌아가는 이민생활에 늘 이마가 찌푸려있지는 않으십니까? 그동안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면 왠지 모르게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는 것처럼 느끼십니까? 인간관계도 원만치 못하고, 세상살이도 늘 흐림이었고, 재미있는 일들도 자주 일어나지 않는 지지부진한 인생을 사셨습니까? 다른 사람의 얘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모두의 얘기요 하소연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읽어가면서 눈이 번쩍 뜨이는 말씀을 만나셨을 겁니다. 바로 사도행전 3장 19절의“유쾌하게 되는 날”이라는 표현입니다. 어찌 보면 개역 성경이 아주 멋지게 번역했습니다. 왜냐하면 헬라어 본문의 뜻은 “새롭게 되는 때(refreshing time)”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나프스크시스“라는 헬라어 속에는“영적인 힘(spiritual strength)”라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 가지 의미를 모두 합치면 이런 뜻이 됩니다. 새롭게 되는 날은 유쾌한 날입니다. 바로 영적인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3:1-8:3절까지는 예루살렘에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약속대로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권능을 받은 제자들이 제일 먼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증인이 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유대교의 중심지였습니다. 여전히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었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종교지도자들이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그 한 가운데 성령이 임했고, 그곳에서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예루살렘의 전도가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앉은뱅이가 나은 것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고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해서 먹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다가 앉은뱅이를 보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걷게 합니다. 성전 밖에 있던 앉은뱅이는 걷고 뛰면서 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것을 보고 모여든 군중들 앞에서 다시 한 번 설교합니다. 그때 베드로의 설교 가운데 등장한 말이 바로“유쾌하게 되는 날”“새롭게 되는 날”“영적인 힘을 얻는 날”입니다. 이것은 앉은뱅이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었듯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예수 이름의 권세가 임할 때 유쾌함이 임합니다.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하늘의 힘과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앉은뱅이는 당시 예수님의 복음을 듣지 못한 모든 사람들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그들은 비록 걷고 뛰었지만 영적으로 앉은뱅이였습니다. 유쾌함이 없었고 늘 이마를 찌푸리고 살았습니다. 앉은뱅이에게 예수 이름의 권세가 임했을 때 걷고 뛰었고 하나님을 찬미하였듯이 예수님을 믿을 때 유쾌한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을 누리는 비결이 19절 앞에 나와 있습니다.:“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예수님 안에서 유쾌함을 누리는 서머나 식구들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河-

초대교회가 시작되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사도들에게 임하면서 하루에 3천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불과 50여일 전까지만 해도 나사렛 예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듯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3년 동안 갈릴리와 예루살렘을 두루 다니시면서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기사와 이적을 행하셨지만 결국 힘없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에수님께서 40여 일 동안 세상에 계셨지만 그때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치셨고, 약속하신 성령이 임할 때 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도할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그리고 홀연히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40일 만에 승천하시기까지의 기간은 성령의 임재를 준비하는 고요한 시간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성령이 임할 것을 믿고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리고 오순절에 약속하신 성령이 임했습니다. 성령을 체험한 제자들은 거리고 나와서 각 족속의 언어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베드로가 설교하니 3천명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인구를 10만 명 정도로 추산했을 때, 인구의 3%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순식간에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다. 그때부터 예루살렘에는 나사렛 예수와 제자들에 대한 소식이 단연 톱뉴스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오순절에 성령이 임한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예루살렘을 뒤흔들어버린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성령의 임재와 역사가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탄생한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성령이 임하고 사도들을 통해서 놀라운 기사와 이적이 자꾸만 나타나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날마다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솔로몬의 행각이라는 곳에 모여서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각자 흩어지면 가정에서 말씀을 듣고 기도에 힘썼습니다. 우리들이 구역속회로 모이는 것과 유사한 형태입니다. 그렇게 처음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가정에서 가정으로 퍼져나갔고 이것이 교회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처음 생긴 교회는 지난 번 설교에서 성경의“능력”을 소개할 때 사용했던 3가지(다이너마이트와 같은 폭발력, 다이나모 발전기 같은 지속력, 다이내믹한 역동성) 능력을 모두 갖춘 교회였습니다. 기사와 이적이 폭발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기도에 힘쓰면서 날마다 새로운 힘을 공급받았습니다. 무엇보다 재산을 서로 나눌 정도의 역동적인 공동체였습니다.

이러한 초대 교회의 모습은 오늘 날 교회의 모델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을 영어의 “WELL(우물)”이라는 글자를 따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배(Worship), 전도(Evangelism), 가르침/교육(Learn), 사랑의 교제(Love). 우리 서머나 교회 속에도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 교회도 폭발적이고, 날마다 새로워지는 역동적인 공동체로 자라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성령의 임재와 역사가 있을 때 가능함을 잊지 맙시다. -河-

오순절 성령강림

120명의 사도들은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대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열흘쯤 지났을 때 오순절이 되었습니다. 오순절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유월절과 가을에 추수감사절처럼 지키는 수장절과 함께 구약시대의 3대 절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순절은 유월절이 지나고 50일이 되었을 때 지키는 절기여서 오순(五旬)절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구약에서는 오순절이라는 말 대신에 유월절이 지나고 7일마다 지키는 안식일이 7번 찾아왔을 때 지킨다는 뜻에서 칠칠절 또는 다른 말로 맥추절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처럼 오순절은 유월절에 씨를 뿌린 곡식을 처음으로 수확한 것을 기념하는 첫 열매 수확의 감사 절기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이 끝나고 잡히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사흘 만에 살아나셔서 40일 동안 세상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오순절이 되었으니 제자들이 열흘 쯤 기도했을 때 오순절을 맞았고 그때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임했습니다. 오순절에 제자들이 경험한 성령강림은 기독교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오순절 날이 되었을 때 제자들은 한 곳에 모여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때 갑자기(홀연히,suddenly) 하늘에서 급하고 강한 바람과 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소리가 제자들이 앉아 있는 집 전체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불의 혀와 같은 것이 임했는데 제자들은 그것을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불의 혀와 같은 뜨거운 기운이 그곳에 있는 모든 제자들에게 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약속한 성령이 열흘 만에 임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4절에 보면, “저희가 다 성령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성령임재와 충만의 표시로 제자들이 방언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제자들은 집을 나와서 예루살렘 성전과 거리고 나온 것 같습니다. 그때 오순절을 맞아서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많은 사람들이 제자들이 방언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제자들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쓰는 언어로 예수님의 복음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전했습니다. 이것을 보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때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는 즉석에서 복음을 전해서 3천명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생긴 사건들입니다. 그때부터 제자들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오늘이 바로 2천 년 전 오순절의 성령강림을 기념하는 성령강림주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오늘 저녁에 이전감사 및 임원취임 축하예배로 모입니다. 기독교 역사의 뜻 깊은 날, 우리 교회도 새로운 교회에 와서 뜻 깊은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에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우리들 역시 새로운 마음으로 교회를 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난 한 달 동안 사도행전 1장 8절을 갖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제 그 말씀이 열매를 맺어서 우리 교회에 성령의 임재와 역사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들 역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동참함으로 교회의 역사를 새로 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