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고 담대하라 (1)

시편 27편 1-3절

 

코로나 팬데믹이 지나고 교회에서 모이기 시작하던 2022년 가을에 “두려워 말라”는 주제로 두 달여 연속해서 말씀을 나눴습니다. 2020년 3월부터 교회가 문이 닫히고 온라인으로 전환되면서 거의 2년 가까이 교회에서 모이지 못했습니다. 과연 교회에서 다시 모여 예배할 수 있을지 막막했던 어둠의 터널과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예상보다 빠르게 우리는 지구 전체를 뒤덮었던 코로나 팬데믹을 극복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 한쪽에 두려움이 남아 있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 변종이 나타났다는 뉴스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기도 했습니다. 그 무렵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던 두려움을 극복하기를 원했습니다. 구약 성경을 갖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나눴습니다. 지금도 유튜브에 있으니, 언제든지 다시 들으실 수 있습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났습니다. 세상은 전쟁에 휩싸였습니다. 2022년 연초에 시작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은 3년도 넘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두 나라에서 25만 명 이상의 군인들이 죽었습니다. 민간인 사상자의 숫자도 수만 명에 이릅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에 이어서 이란과의 전쟁도 아직 진행 중입니다. 우리가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서 그렇지 조금만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전쟁의 참혹함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텍사스에서 새벽에 갑자기 내린 폭우로 캠핑과 여름 휴가를 즐기던 아이들과 가족들 300명 가까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습니다. 미국이 세계 최고의 문명국가이지만, 갑자기 내리는 폭우를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을 비롯한 유럽과 미국의 동부는 살인적인 더위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지구 온난화에 이은 기후 위기를 실감하는 요즘입니다.

 

우리 각자의 삶도 녹록지 않습니다. 물가가 너무 많이 올랐습니다. 세상은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평생직장이라는 말도 사라졌고, 보장되고 확실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교회도 팬데믹 이후에 예배 참석 숫자부터 예전 같지 않습니다. 팬데믹 직전에 교회가 부흥했었는데, 많은 교인이 귀국하고 직장을 찾아 떠났습니다. 게다가 샌프란시스코에 새로 오는 한인의 숫자가 매우 줄었습니다. 몸이 편찮으셔서 교회에 오지 못하시는 권사님들도 계십니다. 그래도 자리를 지키고 교회를 세우시는 참빛 식구들이 계시니 든든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시편 27편 1절 말씀에 힘이 있습니다:”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염려와 근심, 불안과 두려움이 일상이 된 시대에 시편 27편 말씀을 통해서 힘을 얻기를 원합니다.-河-

찬송가 해설 (14)

내 너를 위하여 (찬송가 311장)

 

십자가에 관한 연속 설교를 시작하면서, 찬송가 <갈보리산 위에>를 소개하였습니다. 아이오와 출신의 조지 버나드(1873-1958) 목사님은 십자가의 은혜에 관한 찬송가를 만들고 싶었지만, 시상(詩想)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미시간에서 부흥 집회를 인도하는데, 가사가 생각나면서 단숨에 써 내려간 찬송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버나드 목사님 자신이 갈보리산 현장에 있다고 생각하고 쓰신 은혜로운 찬송입니다.

 

십자가에 관한 연속 설교를 마치면서 오늘은 <내 너를 위하여>라는 찬송가에 얽힌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이 찬송가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끝을 맺습니다:“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1절).

 

오늘 읽은 빌립보서 2장 말씀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리를 포기하고 자신을 비우고,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2:7).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우는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케노시스(비움)”입니다. 케노시스라는 헬라어에는 “헛된 것이 되다”는 뜻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케노시스(자기 비움)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는 시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종의 형체, 즉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외롭게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흩어졌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을 군중들 앞에 세워놓고 “보라, 이 사람이로다”(요19:5)라고 소개합니다. 예루살렘 군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강도 바라바를 놓아주라고 외칩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부활로 이어질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를 비워서(케노시스)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의 죽음이 헛된 것(케노시스)이 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거기가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가 배웠듯이 속죄, 화해, 승리였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찬송가 <내 너를 위하여>는 프란시스 해버갈(Frances Havergal, 1836-1879)이 “이 사람을 보라”에 해당하는 라틴어 <에케 호모 ecce homo>라는 주제의 그림을 보고 만들었습니다. 총독 빌라도에 의해서 군중 앞에 서신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림 아래에는 “나는 너를 위하여 이 일을 하였는데 너는 날 위해 무엇을 하였느냐?”는 글귀가 쓰여 있었습니다. 여기서 <내 너를 위하여>라는 찬송이 탄생했습니다. 훗날, 필립 블리스의 <케노시스>가 찬송가의 곡조가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관한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너는 날 위해 무엇을 하였느냐?”는 질문에 답하면서, 예수님을 따라서 십자가의 길을 걷기 원합니다. -河-

 

십자가의 은혜 (9)

십자가와 부활

 

우리는 그동안 예수님의 십자가에 관해서 공부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약 율법의 완성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약과 연결해서 읽어야 할 이유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핍박과 박해를 견뎠습니다. 죄인들이 죽는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가 기독교의 핵심이 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만큼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을 확신했습니다.

 

십자가의 의미와 은혜를 속죄, 화목, 승리로 정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희생양이 되셨고 동시에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이제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아도 됩니다. 제사장 없이 예수님을 통해서 직접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듯이, 우리도 누군가의 허물을 담당하고 희생하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를 이어 주셨음을 십자가의 세로목으로 설명했습니다. 십자가의 가로목은 이웃과의 용서와 화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이웃을 이어 주셨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평화를 만드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야 합니다.

 

십자가는 승리였습니다. 초대교회가 십자가를 자랑한 것도 십자가의 승리를 믿었고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죽음을 지배하는 악한 세력을 이기셨습니다. 십자가의 승리를 믿을 때, 죽음에 매이지 않습니다. 세상을 이길 힘을 얻습니다.

 

십자가는 영광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기 전에 자신의 죽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됨을 거듭 말씀하셨습니다(요12:23; 13:31-32; 17:1).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서 죽을 때 많은 열매를 맺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십자가에 달려서 고난받으시는 예수님 속에서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히2:9).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모든 사람의 죽음을 맛보시고 담당한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죽음이 영광과 존귀라고 고백하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역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이 영광이 되는 것은 그 끝에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은 없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예수님 사역의 절정이라면, 부활은 예수님 사역의 완성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헛된 것이 됩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십자가는 물론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감사와 찬양이 되길 바랍니다. -河-

 

십자가의 은혜 (8)

십자가의 삶: 승리

 

십자가의 은혜를 속죄, 승리, 화목으로 나눠서 살펴보고, 이제는 십자가의 은혜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공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어 주셨듯이 우리도 하나님과 세상을 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웃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하고, 예수님의 화목의 은혜로 초청해야 합니다. 또한 세상 속에서 평화를 만드는 “화평케 하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치러야 할 죗값을 예수님께서 대신 치르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신 속죄의 은혜를 마음껏 누려야 합니다.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예수님 안에서 자유함을 얻어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가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담당하셨듯이 우리도 이웃의 짐을 대신 지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때 가능한 사역입니다(마 16:24).

 

오늘은 마지막 세 번째 십자가의 승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악을 물리치셨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악한 세력들입니다. 인간과 세상을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세력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공중 권세 잡은 자(에12:2)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은 역설적으로 모든 악한 세력에 대한 승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십자가에서 성취하셨습니다:“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사25:8). 사도 바울은 부활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에서 이사야 말씀을 인용해서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전15:54)고 선포했습니다.

 

십자가의 승리는 하나님 백성의 얼굴에서 눈물을 씻겨 주시는 위로로 임합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당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눈물을 씻겨 주십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조롱을 받습니다. 수치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조롱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옷이 모두 벗겨지시는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그렇게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조롱과 수치를 없애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십자가의 길을 가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예수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떠난다고 하시니,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십니다. 장차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할 제자들을 미리 격려하십니다:”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십자가는 모든 악한 세력과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河-

십자가의 은혜 (7)

십자가의 삶: 속죄

 

십자가의 은혜를 속죄(atonement), 승리, 화목으로 나눠서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져야 할 죄와 죽음을 예수님께서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승리의 상징입니다. 죽음은 물론 모든 악한 세력에 대한 최후 승리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 우리들 간의 관계를 이어 주셨습니다. 화해 또는 화목의 은혜였습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십자가의 삶을 십자가의 은혜와 연결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했으니, 우리도 십자가를 살아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화목의 삶을 살아야 함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가 화해하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을 마음껏 누리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이웃과의 화목으로 연결됩니다. 십자가의 세로목과 가로목을 갖고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은 이웃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연결하는 화목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또한, 이웃과의 화목을 도모해야 합니다. 용서와 화해가 꼭 필요합니다. 세상 속에서 평화를 만드는 “화평케 하는 자(peace-maker)”가 되어야 합니다. 화목의 십자가를 세상 속에서 실천하면서 십자가를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십자가의 삶은 “속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그의 생명을 내주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께서 담당해야 할 잔을 옮겨달라고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기억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최종적으로 자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길 기도하셨습니다. 자신을 내려놓으셨습니다.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목숨까지 희생하셨습니다. 자기 부인입니다. 자기 희생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하셨듯이(요15:13),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담당하셨습니다. 덕분에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이 임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과 맞바꿈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은 특별한 존재입니다.

 

이제 우리도 누군가의 어려움이나 무거운 짐을 담당해야 합니다. 대신 지고 가야 합니다. 희생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우리 안에 예수님의 얼(십자가의 정신)을 심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는 고백이 가능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신앙과 삶이 예수님을 닮아서 이웃을 위해서 희생하고 이웃의 짐을 담당하게 될 것입니다. 아름답고 멋진 사명입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