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겨루워 이긴 자, 야곱 (1)

야곱의 탄생: 발꿈치를 잡고

 

우리는 야곱의 일생을 살펴보는 시간을 갖습니다.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서 탄생부터 어린 시절을 거쳐서 인생의 모든 여정과 죽음까지 자세히 기록된 인물은 야곱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야곱이 걸었던 인생길을 천천히 되짚어가고 함께 걸어갈 예정입니다.

 

야곱에 대한 말씀은 크게 셋으로 나뉩니다. 형 에서와 장자권을 갖고 벌이는 경쟁,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속고 속이는 피난살이, 가나안 땅에 돌아와서 겪는 고초까지 나중에 야곱 자신이 말하듯이 그의 인생은 절대 평탄치 않았습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47:9).

 

야곱의 인생에서 두 가지 큰 경험을 합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서 외삼촌 집으로 갈 때,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길에서 노숙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곳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릅니다. 외삼촌 집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때,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하면서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깊이 그리고 확실하게 경험한 두 가지 사건이 그의 인생길에 큰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었습니다.

 

야곱은 타고난 싸움꾼이요 자기 목적을 이루고 마는 집요한 인물입니다. 세속적인 면도 있습니다. 물질에 집착합니다. 도덕적으로 결코 존경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 이삭을 속여서 장자권을 얻었습니다. 그런 야곱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부족함을 들어서 쓰십니다. 인간이 잘 나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심을 야곱을 통해서 보여주십니다. 우리 역시 야곱처럼 치열하게 세상을 살지만, 결국에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뒤에서 일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 속에서 희망을 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이 태어나는 과정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리브가를 아내로 맞았지만, 20년 동안 아기가 없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아기를 낳지 못하는 것은 신의 저주로 여겼습니다. 리브가와 이삭의 마음고생이 컸을 것입니다. 그때 이삭이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 기도했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셔서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쌍둥이 아들이었습니다.

 

복중에서 너무 심하게 싸우는 것을 느낀 리브가 역시 하나님께 나와서 “내가 어찌할꼬”라고 탄식합니다. 리브가의 복중에서 두 민족이 싸우고 있답니다. 훗날 이스라엘과 에돔의 갈등을 예고하는 말씀입니다.
쌍둥이 아들이 태어났는데 야곱이 에서의 발 뒤꿈치를 잡고 나왔습니다. 야곱에게는 발뒤꿈치를 잡은 자라는 별칭을, 몸에 털이 많고 붉은 첫째에게 에서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河-

너 근심 걱정 말아라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찬송가 382장)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의 본성에 염려(sorge)가 깃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두려움이 외부에 구체적인 대상을 갖고 있다면, 염려는 우리 존재 안에서 생기는 감정입니다. 존재의 불안함입니다. 죽음이 그 끝에 있으니, 인간이라는 존재는 마지막을 의식하면서 불안해하고 염려한다는 것입니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염려는 우리가 미래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과 연결됩니다. 미래를 알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모든 사람이 염려를 갖고 삽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 깃든 염려를 어떻게 관리하고 극복하느냐입니다.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지냅니다. 광야야말로 불안과 두려움, 미래에 대한 염려로 가득한 삶의 현장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셔서 먹거리에 관한 염려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발길을 인도하고 보호하셨습니다.

 

그래도 이스라엘은 불안했습니다. 약속의 땅이 눈앞에 있는데도 염려했습니다. 그때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을 의지할 것을 부탁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보다 앞서 가셔서 길을 만드실 것입니다: “그리하면 여호와 그가 네 앞에서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신31:8).

 

찬송가 382장 <너 근심 걱정 말아라>는 시빌라 마틴(Civilla Martin, 1866-1948)과 그의 남편이자 목사인 월터 마틴(Walter Martin, 1862-1935) 부부가 각각 가사를 쓰고 곡을 붙여서 탄생했습니다. 마틴 목사가 시골의 작은 교회에 설교하러 가는 날, 부인이 갑자기 아파서 설교를 취소할 생각을 합니다. 그때 아홉 살 먹은 아들이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는다면 설교하러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놀라운 말을 합니다. 아들의 말을 듣고 마틴 목사는 설교하러 떠났고, 그사이 부인 시빌라 마틴이 시를 씁니다. 남편이 돌아왔을 때 세 가족이 만든 찬송이 바로 <너 근심 걱정 말아라>입니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의 영어 제목은 <하나님이 당신을 돌보실 것입니다 God will take care of you>입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시는데 왜 근심하고 걱정하느냐는 찬송입니다. 매일 같이 그리고 항상 하나님께서 지키고 돌보실 것이라는 찬송입니다. 아홉 살 먹은 아들의 말을 따라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복음을 전하러 갔던 마틴 목사 부부의 신앙 고백입니다.

 

새달 5월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도 앞길을 알지 못하니 우리를 지키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주어진 인생길을 걸어갈 뿐입니다. 존재 한 가운데서 생기는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믿음으로 걷는 새달이 되기를 원합니다. -河-

이렇게 기도하라 (6)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여섯 번째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하나님의 뜻이 세상에도 이뤄지길 기도했습니다. 완벽한 기도입니다. 그다음에는 일용할 양식을 주시길 기도했습니다. 일용할 양식은 육적인 건강함을 위함이었고, 죄를 용서하고 용서받는 것은 영적인 건강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시험(temptation)에 들지 말고 악에 빠지지 않기를 기도하라고 부탁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나가서 40일 동안 금식하셨을 때, 마귀가 찾아와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성경에서 악한 것들은 악한 영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니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서 건져 주시길 기도하는 것은 악한 세력에 넘어가지 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길에 굳건히 서 있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의 순례길에 시험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내적인 시험은 마음에 의심과 부정적인 회의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실재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는 약속에 시비를 겁니다. 교회 생활이나 가정생활에도 그리스도인 답지 않은 언행이 시작되고 자꾸 하나님에게서 멀어집니다. 자기도 모르게 시험에 빠집니다. 악한 세력에 넘어간 결과입니다.

 

외적인 시험은 유혹입니다. 요즘에는 세상의 유혹이 매우 큽니다. 관계가 깨지면서 용서하고 용서받는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시비와 분쟁과 경쟁이 겉으로 드러납니다. 개인은 물론 교회 공동체에 손해를 끼치는 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시험입니다.

 

시험에 대비하고 시험에서 벗어나는 것은 예수님 말씀대로 깨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막14:38).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허락하신다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시험을 견디고 극복해야 합니다(고전10;13).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 있듯이 바위에 뿌려진 씨는 시험이 닥치면 마르고 맙니다. 좋은 밭에 뿌리를 깊이 내린 신앙이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흔들림 없는 견고한 신앙입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에서 앞에 나오는 “다만”이 눈에 띕니다. 헬라어 본문은 “그러나”라는 단어입니다. 지금까지 기도한 모든 것에 더해서 악에서 건져주시길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악한 세력의 지배를 받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통한 자유와 해방입니다. 악에서 선으로 옮겨지는 것이 신앙입니다. 따라서 악에서 구해주시길 기도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요한 웨슬리는 여섯 번째 기도를 다음과 같이 다시 썼습니다: “주님, 우리가 유혹을 받을 때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우리에게 피할 길을 마련하셔서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게 하소서.” -河-

이렇게 기도하라 (5)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에 이어서 등장하는 다섯 번째 기도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2절)입니다.

 

죄를 용서받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전제 조건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주기도문 후에 다섯 번째 기도에 대한 부연 설명이 나옵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14-15절).

 

그런 점에서 주기도문의 다섯 번째 기도는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용서라는 실제적인 행동과 연결됩니다. 기도는 말이 아니라 삶입니다. 삶으로 연결되고 삶이 변화되지 않는 기도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뜻 없는 말을 반복하는 중언부언에 그칠 것입니다.

 

다섯 번째 기도를 헬라어 본문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해 준 것 같이 우리 빚을 탕감해 주시고(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죄를 빚으로 표현했습니다. 죄를 용서하는 것은 빚을 갚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 빚을 모두 갚아 주셨습니다. 우리 힘으로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을 탕감받았습니다.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고 그들의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 정상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천국의 비유가 나옵니다. 주인이 1만 달란트(노동자 한 명의 6천만 일치 임금)의 빚을 진 사람에게 빚을 갚지 못하면, 가족들 모두 종이 되고 남은 재산을 팔아서 갚으라고 독촉합니다. 빚진 자가 모두 갚을 테니 조금만 봐 달라고 간청합니다. 주인이 종을 불쌍히 여겨서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백 데나리온(100일 임금에 해당) 빚진 사람이 있었는데, 만 달란트를 탕감받고 나오면서 그 사람을 고소해서 감옥에 넣어버립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이 원래 주인에게 알리니 주인이 노발대발하면서 만 달란트 탕감받은 사람을 다시 불러들여서 감옥에 가둡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했다면, 이웃을 용서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것이 천국의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형제가 우리에게 빌려 간 백 데나리온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 정상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입고서 작은 것을 용서하지 않는 것은 도리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용서는 그리스도인이 꼭 해야 할 의무입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 매우 의미심장합니다.-河-

 

이렇게 기도하라 (4)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고, 하나님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길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모시겠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모든 뜻이 세상에 임하길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자연스럽게 우리에 대한 기도로 넘어갑니다. 첫 번째가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입니다. 여기서 “일용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우시오스>가 관심을 끕니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에만 각각 등장합니다. 초대 교회의 신학자 오리겐은 <에피우시오스>가 육신의 양식(떡)이 아니라 우리 존재에 꼭 필요한 영적인 떡을 가리킨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리겐의 관점을 계승한 견해가 교회에 많이 있었는데, 헬라어 <에피우시오스>는 시간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개역 성경은 물론 영어 성경에 보면 “일용할 양식”에 “내일 양식”이라는 주(註)를 달아 놓았습니다. 헬라어 <에피우시오스>에 다음 날이라는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기도문의 네 번째 기도를 다음과 같이 읽을 수도 있습니다:“오늘날 우리에게 내일의 양식을 주옵시고.”

 

헬라어 <에피우시오스>를 어떻게 해석하든지 네 번째는 매일 같이 필요한 양식을 공급해 주시길 구하는 간청입니다. 예수님 당시 하루 벌어서 하루를 먹는,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어려운 백성들의 삶이 기도 속에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에서 나온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매일같이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신 것과 연결됩니다. 안식일을 제외한 평일에는 하루분 양식만 가져가야 했습니다. 욕심을 내서 더 가져가면 다음 날 썩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매일의 삶을 책임져 주심을 믿고,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마실지에 대한 내일의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는 훈련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일용할 양식에 세 가지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첫째는 실제로 우리의 일상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대표적인 것이 먹거리였으니 양식으로 표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는 간청의 기도입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부탁하신 성찬의 떡입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으로 오셨음을 믿고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하라는 말씀입니다. 셋째는 신앙에 꼭 필요한 영적인 양식, 즉 생명의 말씀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매일 읽어야 할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고 그것으로 살겠다는 결심이 기도 속에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십니다. 우리 역시 욕심부리지 않고 꼭 필요한 것에 만족하고 감사해야 합니다(잠30:8). 거친 세상을 살면서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기 원합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