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 여인 (1)

물을 좀 달라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에 관한 말씀에 이어서, 앞으로 한 달여 요한복음 4장 속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에 관한 말씀을 공부하겠습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 남성이었고 이스라엘의 지도자였습니다.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그에게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영적인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거듭남에 관한 복음(기쁜 소식)을 듣고 숨은 제자로 살았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니고데모와 모든 면에서 비교 불가입니다. 유대인들이 차별하는 사마리아 출신입니다. 당시에 매우 열등한 위치에 있던 여성입니다.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이 여인에게는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니, 세상에서 부정한 여인으로 낙인이 찍혔을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다면, 사마리아 여인도 대부분 사람들이 집에 머무는 정오에 물을 길으러 우물을 찾았습니다. 사람들을 피해서 온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것과 달리, 사마리아 여인은 우물에 물을 길러 왔다가 우연히 예수님을 만납니다. 여인이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먼저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하면서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니고데모에 비해서 사마리아 여인이 훨씬 수동적입니다.

 

“물”이라는 주제는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이 변해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과 더불어 요한복음 2-4장에 지속적으로 등장합니다. 니고데모를 향해서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푼 것도 요한복음 3장 후반부에 나옵니다.

 

물은 정결 예식과 함께 깨끗함 즉 회개의 상징입니다. 또한 물은 생명수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생수의 근원이라고 했고(렘17:13). 에덴동산에도 네 개의 강이 흘렀고, 마지막에 성취될 하나님 나라에도 생명수가 흐르는 강이 등장합니다. 그런 점에서 “물을 좀 달라”는 사마리아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은 마실 물을 넘어서는 영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우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우물가에서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만났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만난 것도 우물가였고, 미디안 광야로 나간 모세도 우물가에서 아내 십보라를 만났습니다. 이처럼 우물가는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에서 만났습니다. 우연한 만남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곳은 “야곱의 우물”이라고 불리는 유서 깊은 곳입니다.

 

이렇게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과 대화가 시작됩니다. ‘물을 좀 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사마리아 여인을 복음으로 초청하는 시발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름도 없는 사마리아 여인을 먼저 찾으셨습니다.-河-

부활의 은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 새벽,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은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혹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서 그가 살아났다고 헛소문을 낼 것을 염려한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제안으로 무덤 문을 큰 돌로 막아 놓았었습니다. 병사들을 배치해서 무덤을 단단히 지켰습니다. 그런데 무덤이 비어 있었으니 얼마나 놀랐을까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겁니다.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마28:7)는 천사의 말을 전하기 위해서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달려가고 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여인들이 땅에 엎드려서 부활하신 주님의 발을 잡고 경배합니다. 부활의 주님께서는 언제나 “샬롬 – 너희가 평안하냐?”고 인사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어도 믿지 않았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환상을 보았다고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도 베드로가 제일 먼저 일어나서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빈 무덤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훗날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말도 헛된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 정도로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했습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께서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물론 500명이 넘는 형제자매들에게 한꺼번에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내던 시기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20여 년 후로 추정하니 사도 바울의 기록에 신빙성을 더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세상에 계시다가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약속대로 열흘이 지난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오순절 성령을 체험한 사도들이 예수님의 증인이 됩니다. “증인(마르튀스)” 이라는 헬라어에서 “순교자(martyr)”라는 영어가 나왔습니다. 실제로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목숨 걸고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자신들도 부활해서 영원히 살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능력입니다.

 

부활에 힘이 있습니다. 부활은 우리를 죽음에서 다시 살려냅니다. 부활은 죽음을 이깁니다. 부활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부활은 십자가 너머에 있는 승리의 완성입니다. 우리도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때, 그리스도인이 됩니다:“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10:9).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합니다. 세상 속에서 부활을 삽니다. 부활의 은혜입니다.-河-

고난의 길

올해도 어김없이 부활절을 맞습니다. 부활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로마 시대에 황제에 반기를 들었거나 세상을 어지럽힐 정도의 극악한 죄인들이 달리는 형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처럼 죗값을 치르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를 모두 담당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달려야 할 십자가에 예수님께서 대신 달리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의 죄가 사해지고, 의롭게 되므로 하나님께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매년 또는 수시로 제물을 드리던 성전 중심의 형식적인 신앙이 예수님을 믿는 내면과 삶의 신앙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 마음이 성전이 되는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지도자들과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외에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군병들이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얼굴에 침을 뱉고 때렸습니다. 예수님은 말없이 모든 것을 참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 예수님의 여정을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에 비유했습니다(사53장).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죽음 자체보다도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 자체가 고난이었습니다. 쉬운 길이 아니었기에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은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36:39)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그 길을 가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고난 받는 종의 노래들(the servant songs)가운데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50:1-3) 앞에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고 마음이 완고해진 백성들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팔렸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들을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종이 세상에 온 것입니다. 주님이 보내신 종은 학자의 혀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는 탁월한 능력입니다. 본문의 종은 메시아 예수님을 가리킬 것입니다.

 

고난받는 하나님의 종은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수염이 뽑히고, 뺨을 맞고, 모욕과 침 뱉음을 당했습니다. 수치를 당해도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자기 백성을 구하려는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고난의 길입니다. 이사야 시대는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어두운 세상도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메시아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사람에게 빛이 임했습니다. 구원이 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고난의 십자가 길을 묵상하는 고난 주간이길 바랍니다. -河-

예수님과 니고데모 (4)

거듭남 (2)

 

예수님께서는 밤중에 찾아온 바리새인이자 유대의 지도자인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의 비밀을 알려주십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듭남을 어머니를 통해서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리와 위력으로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을 예로 드시면서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그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헬라어와 히브리어에서 바람은 모두 성령을 가리킵니다. 비로소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장대에 매어 들어 올린 구리 뱀을 예로 드십니다. 뱀에게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대에 달린 구리 뱀을 쳐다보는 순간 살아났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도 살 것입니다. 장대에 달린 뱀을 쳐다보는 것,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이쯤에서 니고데모는 거듭남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차리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을 것입니다. “아멘 아멘”으로 응답하고 그때부터 예수님의 숨은 제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구원받고 하나님께 나오길 바라십니다. 그런데 어두운 세상은 구원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어두움 속에 있는 것이 심판입니다:“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19절).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것도 행위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악한 행실이 빛으로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서 예수님을 거절했습니다. 그 자체가 심판입니다. 벌써 심판을 받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거듭나기 전에는 심판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거나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을 통해서 심판에서 구원으로 옮겨집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 신앙생활에서 필수적인 이유입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십니다. 악한 길을 떠나서 참되고 선한 주님의 길을 걷습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품고 삽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참된 모습입니다.-河-

 

예수님과 니고데모 (3)

거듭남 (1)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였습니다. 니고데모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가야 하는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황한 유대인의 지도자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고 덧붙여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과 니고데모 대화의 주제는 “거듭남”이었습니다.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이 뜻하듯이 하나님으로부터 즉,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입니다. 육체로 태어난 것에 그치지 않고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러니 새로운 태어남 “신생(新生)”입니다. 여전히 니고데모는 거듭남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람을 갖고 설명하십니다. 바람이 불어오지만, 바람을 볼 수 없고 단지 느끼고 경험할 뿐입니다. 눈으로 볼 수 없어도 바람의 위력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니 거듭남 자체는 실체이고 동시에 신비로운 사건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9절)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런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고 핀잔 섞인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니 진정한 선생은 예수님 뿐입니다. 땅의 생각을 갖고 하늘의 일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늘의 일을 알려주어도 믿지 못합니다. 니고데모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구약성경에 정통한 니고데모에게 출애굽 당시 광야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예로 드십니다(민21:4-9). 이집트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했습니다. 자기들 생각과 달리 광야 생활이 막연하고 힘들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시니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모세가 백성들을 구해주실 것을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하나님께서 구리로 뱀의 형상을 만들어서 기둥 위에 매달아 놓으면,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은 살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뱀에게 물린 사람이 기둥 위에 매달린 구리 뱀을 보면 살아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둥에 달린 광야의 구리 뱀을 장차 십자가에 달리실 자신과 연결하십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믿는(쳐다보는)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땅의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 말씀을 듣고 니고데모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을 것입니다. 거듭남의 신비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누구나 거듭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입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