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사람들 4

먹고사는 것이 풍족하고 세상에서 염려할 것이 없으면 자연스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거추장스럽고 하나님만 생각하라는 성경말씀이 부담스럽게 다가옵니다. 그러고 보면 기독교인에게 닥치는 어려움은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요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귀한 시간들입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을 간절히 믿은 사람들은 대개 어려움을 겪거나 세상에서 소외된 계층들이었습니다.

2천 년 전 예수님께 나온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상에서 죄인 취급받던 사람들, 질병으로 인해서 몸이 망가진 환자들, 낙심가운데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 말씀을 통해서 위로받고 힘을 얻었습니다. 그 가운데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았던 여성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성들의 활약은 두드러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는 순간에도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사람들도 물론 여인들이었습니다. 교회가 세워지는데도 여성들의 역할이 꽤 컸습니다.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해준 이래 여성들의 활동은 우리 민족의 복음화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전도 부인이 되어서 동네마다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보급하는 일도 담당했고, 사경회와 봉사를 통해서 교회가 굳게 서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더불어 신학문과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도 여성들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우리가 살펴볼 김세지라는 여성이 있습니다. 김세지는 1865년 평안남도 여유에서 딸 넷만 있는 집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열두 살 때 부친이 사망했고, 당시의 관습대로 만나본 적도 없는 남자에게 열여섯에 시집을 갔지만 2년 만에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때는 남편을 잃은 여자들을 보쌈해가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김세지는 보쌈의 공포 속에 시달리면서 하루하루를 살다가 시어머니의 주선으로 23세가 되었을 때 김종겸이라는 사람과 재혼합니다. 김세지의 새 남편은 학문과 재산을 겸비한 선비였지만, 나중에는 그만 주색잡기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김세지가 교회에 나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남편이 새사람이 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부인이 교회에 나가는 것을 안 남편은 그녀를 때리고 집에 가두곤 했습니다. 김세지는 자신을 핍박하는 남편을 위해서 기도하고 결국 남편을 예수님께로 인도합니다. 하지만 김세지의 인생에 또다시 어려움이 닥칩니다. 두 번째 남편도 콜레라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김세지는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을 신앙의 힘으로 이겨냈습니다. 그때부터 복음을 전하는 일에 더욱 매진합니다. 이름도 생겼습니다. 김세지 역시 당시 많은 여성들처럼 이름이 없었습니다. 선교사들은 그녀를“새디(Sadie)”라고 불렀는데 그것이 세지가 되었습니다. 김세지는 복음을 전하는 전도부인과 성경을 보급하는 매서인으로 열심을 냅니다. 평양의 남산현 교회에 출석하면서 일 년에 2천 번 넘게 심방했습니다. 그는 남성들도 하지 못하는 거친 일을 하면서 몸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쩌면 청상과부로 불우한 인생을 살수밖에 없었던 한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면서 한국 교회사에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남겼습니다. 복음이 그녀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마음과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동시에 내 몸처럼 이웃을 사랑할 때 신앙이 온전해 집니다. 김세지야말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본을 보여준 멋진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河-

믿음의 사람들 3

우리나라에 기독교 복음이 전파된 것을 두고 당나라에 전파된 경교(네스토리우스교)가 신라에까지 전해졌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하지만 증거가 확실치 않을뿐더러 설령 신라시대에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해도 그것이 한반도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습니다. 또한 일찌감치 천주교 선교사를 받아들인 일본이 임진왜란과 더불어 군종신부를 한반도에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고향인 경남 웅천에 군종신부 세스페데스가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처럼 천주교가 먼저 한반도에 전파되었습니다. 중국에 갔던 이승훈이 영세를 받고, 영정조 시대의 실학파 학자들이 서양문물과 더불어 천주교를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천주교는 조선시대에 금기시된 종교였기에 절두산이라는 지명이 생길 정도로 수많은 순교자를 냅니다.

한반도에 개신교가 전래된 것은 1627년 네덜란드인이자 개신교인들이었던 벨트브레(박연)이 귀화해서 제주도에 살게 되고 하멜이 제주도에 표류했다가 네덜란드로 돌아가면서 부터입니다.1832년에는 독일 선교사 구츨라프가 동인도 회사의 통역관겸 선교사로 한반도에 상륙해서 주기도문을 우리말로 번역해주고, 충청도 일대에 감자씨를 보급하기도 했습니다.1882년에는 만주 국경에서 개신교 선교사들과 복음을 받아들인 조선 청년들이 연합해서 한글 누가복음이 번역되었습니다. 나라의 문을 굳게 잠가두고 쇄국정책을 고집하던 조선에 복음의 빛이 서서히 비추기 시작한 것입니다. 1884년에는 알렌 선교사가 왕실의 주치의가 됩니다. 이때부터 서양 선교사에 대한 인상이 좋아지기 시작했고, 일본에서 기독교 복음을 접한 이수광이 미국의 선교본부에 한반도에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하면서 드디어 아펜셀러와 언더우드가 1885년 부활절 아침 인천항을 통해서 첫발을 내딛습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모두 미국 동부에서 학생시절 예수님을 만났고 선교사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 친구들이었습니다. 미혼인 언더우드는 장로교에서 파송한 선교사였고, 기혼인 아펜젤러는 감리교 본부에서 파송을 받고 일본을 거쳐서 한반도에 들어온 것입니다. 언더우드는 1887년 14명의 조선인 신자들이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새문안 교회의 전신입니다. 아펜젤러 역시 자기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는데 정동교회의 시작입니다. 아펜젤러가 학생 2명과 더불어 시작한 학교가 배재학교로, 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가 자기 집에서 고아원 스타일의 학교를 시작한 것은 경신학교로 발전했습니다. 새문안 교회는 언더우드가 세운 최초의 장로교회입니다.

이들은 20대에 조선에 와서 자신들의 젊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조선을 위해서 불태웠습니다.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정동교회안에 웹잇 청년회를 만들면서 그것이 YMCA로 발전하는 토대를 세웠습니다. 기독교 신문을 발행하였고 성경 번역에도 앞장섰습니다. 이처럼 지칠 줄 모르는 선교활동으로 인해서 40세임에도 불구하고 아펜젤러 선교사의 모습은 꽤 나이가 들어보였다고 합니다. 1902년 아펜젤러 선교사는 성경 번역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목포로 내려갑니다. 서해 어청도 앞을 지날 때 아펜젤러가 타고 있던 배가 짙은 안개로 시야를 잃고 다른 배와 충돌하면서 그만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때 아펜젤러의 나이는 44세였습니다.

오늘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한반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도착한 지 127년 째 되는 부활절입니다. 어두움과 죽음의 세력에 휩싸여 있던 조선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거듭 태어나게 한 젊은 선교사들이 있었기에 한국 교회가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빚을 갚기 위해서 수많은 선교사들이 복음이 없는 미지의 국가들과 종족들을 찾아갑니다. 이처럼 복음을 전하는 발걸음은 늘 아름답습니다. 복음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이 써 나가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할렐루야! -河-

믿음의 사람들 2

한국의 무디 김익두 목사님

지난 시간에는 전도자 무디 선생님을 소개하였습니다. 무디는 예수님을 믿은 후에 어려운 가정환경과 절망적인 삶에서 벗어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부흥사가 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소개할 분은 한국의 무디라고 불릴 정도로 일제 시대에 부흥사로 명성을 날리신 김익두 목사님 (1874-1950)입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구한말(고종 11년) 황해도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나셨습니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다가 16세에 과거에 응시하지만 낙방하고 맙니다. 과거를 포기하고 사업에 전념해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둘 즈음 친구에게 빚보증을 선 것이 문제가 되면서 가산을 모두 탕진합니다. 그때부터 청년 김익두는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듭니다. 결국에는 술주정과 망나니 노릇을 하면서 20대를 보냈습니다. 김익두의 별명이 “개망나니”일만큼 못된 짓을 골라서 했습니다. 시장터에서 그를 만나는 사람들은 그의 난폭함에 슬슬 피해 다녔고 시장에 있는 사람들이 김익두를 만나는 날에는 재수 없다고 저주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중 26세 때 친구의 권유로 교회에 갔다가 미국인 선교사 스왈렌이 전하는 영생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서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신앙생활에도 성격이 반영되는 것 같습니다. 청년 김익두가 세상에 홀딱 빠져서 생활하였듯이 이번에는 복음에 빠져들어 갑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복음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신약성경을 일 년 동안 100번을 읽습니다. 1년 후, 어머니와 함께 스왈렌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습니다. 하지만 김익두의 신앙이 아주 깊지는 않았습니다. 확신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옛날 습관대로 친구와 함께 술을 먹다가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잠시 정신을 잃더니 갑자기 뛰쳐나가서 산으로 올라갑니다. 그때 김익두는 온 몸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합니다. 훗날 그는 가슴에 불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고 표현했습니다. 성령을 체험한 후에 청년 김익두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스왈렌 선교사의 요청으로 전도하는 일을 돕습니다. 개망나니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청년 김익두가 전도를 하니 사람들은 어이가 없었지만 그의 설교에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을 확인한 사람들이 너도나도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이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살던 청년 김익두가 예수님을 믿은 후에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이 그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화끈한 성격과 뜨겁게 성령을 체험한 것에 걸맞게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28세에 황해도 신천에 전도사로 파송을 받으면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었습니다. 가정에서 하루 3번씩 예배를 드렸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의 손에는 항상 성경이 들려 있었고, 길을 걸을 때도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을 습관으로 삼았습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부흥사로 일제시대에 신유의 기적과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해방 후에도 북한에 머물러 계시다가 6.25전쟁 때 공산군의 총을 맞고 순교하셨습니다.

복음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이전 것은 모두 지나가고 새로운 삶이 펼쳐지게 마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면서 날마다 새로운 삶을 살기 원합니다.-河-

믿음의 사람들 1

D. L. 무디

우리는 지난 다섯 주에 걸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지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왜 기쁜 소식(복음)이 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지금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계셔서 진리와 능력으로 인도하신다는 말씀 앞에서 우리 모두가 복 받은 사람들임을 절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임한 복음이 얼마나 풍성하고 부요한 것인지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구약 성경은 물론 2천년 교회사를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인생이 바뀐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5주에 걸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은 믿음의 인물들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19세기 최고의 부흥사로 이름을 남긴 무디 선생님 (D.L. Moody, 1837-1899)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무디 선생님은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네 살 때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학교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습니다. 차분하게 책을 읽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농부였던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어떤 일을 시작하면 끝까지 해내는 끈기가 있었습니다. 당시는 10대 후반이 되면 자신의 인생길을 스스로 개척해야 했습니다. 무디는 열일곱 살 때 보스턴으로 가서 삼촌이 경영하는 양화점(구둣가게)에서 일을 합니다. 그때 그를 고용한 삼촌과 몇 가지 약속을 했습니다.: 열심히 일할 것, 삼촌이 없을 때는 직원들에게 물어가면서 일을 배울 것, 밤에 거리에 나가지 않을 것, 주일에는 교회에 갈 것.

만남이 중요합니다. 무디는 교회에서 킴벨이라는 선생님을 만납니다. 킴벨믄 무디가 신앙심이 깊지 못했지만 예수님을 믿고 변화된다면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그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무디는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일하는 구둣가게를 찾아와서 어깨에 손을 얹고 눈물로 기도해 주는 캠벨 선생님의 모습에 감동을 받아서 마음을 엽니다. 결국 구둣가게 뒷방에서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신앙의 길에 접어듭니다. 그날의 사건을 무디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나는 1837년에 육체를 입고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1856년에 성령으로 거듭 태어났습니다. 육신으로 태어난 나의 몸은 죽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내 영은 영원히 살게 되었습니다.”

무디가 복음을 마음에 받아들임과 동시에 새로운 인생길이 펼쳐집니다. 주일학교 교사로 불우한 아이들을 주님께 인도했습니다. 시카고에 와서 교회를 세우고 복음전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지 않았지만 평신도로 미국은 물론 영국까지 다니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유명한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영혼을 사랑하고 한 사람에게라도 복음을 전하려는 무디의 열정은 수많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남북 전쟁으로 인해서 분열되고 혼란스러웠던 미국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회복시키고 영적 부흥을 일으켰습니다. 보스턴 구둣가게에서 일하던 무디에게 복음의 빛이 비추니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부흥사가 된 것입니다.

무디를 새롭게 변화시키고 그를 통해서 놀라운 부흥을 이루신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누구에게나 임해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펼쳐 보입니다.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河-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5

지난 한달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임한 복음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가장 잘 알 것 같고 누구보다 복음의 은혜를 누리고 있을 것 같은데 막상 복음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거나 날마다 복음의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당황하기 쉽습니다. 복음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데도 말입니다. 2012년 사순절을 지내면서 우리가 믿는 복음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려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연속설교를 준비했었습니다.

지난 한 달 동안 살펴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요약하였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주신 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함 받았습니다. 사흘 만에 죽음의 세력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들 역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곧 복음입니다.

셋째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고 대신에 성령 하나님께서 오신 것이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시공간을 초월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들 각자의 마음속에 계시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시고, 도와주시고, 격려해 주시면서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임을 변호해 주십니다. 세상을 살아갈 능력을 주시는 분도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임했다는 사실이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고 진리를 알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들도 모든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고 누구에게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임하기를 기도하고 전파해야 합니다.

오늘은 연속설교 마지막 시간입니다. 이번 연속설교에서 소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마지막 덕목은 예수님을 믿었을 때 우리에게 임하는 부요함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구원에 이르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죄로 인해서 건널 수 없던 간격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메워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의 죄가 사라지고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임합니다. 영적인 부요함입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임했으니 기쁜 소식임에 틀림없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리는 복음의 부요함이 있습니다. 우선 오늘 본문에 의하면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 수 있는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12절에서는 부끄러움을 넘어서 부요함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매사에 흘러넘치는 은혜를 가리킬 것입니다. 풍성한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함께 하심을 체험했을 때 누리는 부요함입니다. 여기서 감사가 나오고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고 영적인 부요함과 이 세상에서의 부요함을 누릴 수 있음이 곧 기쁜 소식입니다.

그동안 함께 살펴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참빛 교회 식구들 위에 깊이 임하길 원합니다. 그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복음의 능력과 부요함의 은혜까지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복음에 웃고 복음에 울고 복음에 감사하면서 복음 붙잡고 예수님 다시 오실 때까지 꿋꿋하게 견디며 앞으로 나갑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4

그리스도인들은 기쁜 소식을 가슴에 품고 살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신 복음은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특권이자 축복입니다. 어쩌면 이 기쁜 소식이 너무 크고 존엄해서 피조물인 우리가 실감을 못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이 세상의 풍조와 세상이 주는 기쁨에 도취되어서 복음을 간과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신 기쁜 소식을 체험한 사람은 그 귀함과 위대함을 압니다. 그리고 모두가 한 목소리로 감사의 고백을 하나님께 올려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있듯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되었습니다. 이처럼 복음의 문은 모든 사람들에게 활짝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로마서 3장 22절에서“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0장 12절에서도 “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쓰일 당시에는 인종이나 신분 간에 차별이 심했던 시절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임한다고 가르쳐줍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셔서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고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계신 성령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차별 없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기쁜 소식 즉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임합니다. 전에는 악한 행실과 하나님을 외면하고 적대시하던 우리들이지만 예수님께서 이미 2천 년 전에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하셨습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막힌 담을 헐어내시고 화평케하셨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들 자신을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시켜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지위의 변화에 그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질까지 완전히 변화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죄로 인해서 더럽혀진 우리들이 거룩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그렇게 변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인정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무엇보다 믿음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구원과 하나님 백성의 삶을 유지하고 보호하는 방패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 거할 때 우리의 삶이 안전하고 세상의 풍파에도 요동치 않습니다. 둘째는 믿음의 터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서있다는 말씀은 매사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로 결심하고 준비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셋째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힘들어도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진리의 영이시고 능력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에 절대로 낙심하거나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 모두는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 태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임한 기쁜 소식입니다.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3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말씀을 나누는 세 번째 시간입니다. 첫째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주신 것이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우리들을 위해서 하나뿐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참빛 되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죄와 죽음의 세력은 물러갔고 타락한 세상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구원이 임했습니다. 둘째 시간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의 죄인됨을 친히 담당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지간이었을 때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이만큼 넓고 깊습니다. 우리는 이 정도로 큰 사랑을 입었으니 그것만으로도 큰 복을 받은 셈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행복합니다. 동시에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인생의 갈보리 언덕도 기쁨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임하신 것이 기쁜 소식임을 살펴볼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성령이 임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 대신에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성령님께서 오실 것이랍니다. 오순절에 약속하신 성령님이 오셨습니다. 그 이후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성령님께서 들어와 거하십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언제든지 어디에나 동시에 임하십니다. 우리들 각자의 마음에 임하시고 교회들안에도 임하십니다. 이처럼 성령님은 내주(內住)하는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성령 하나님은 거룩하신 영이기에 죄와 더불어 거하실 수 없습니다. 거룩한 주님의 백성이 순간순간 회개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거하시기에 충분한 마음과 삶을 준비하기 위해서 회개는 필수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정결하고 거룩한 마음을 갖고 있을 때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마음껏 일하실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보혜사 즉 우리를 돕는 분입니다. 진리의 영이시기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맞춰 살도록 가르쳐주시고 직접 인도해 주십니다. 위로와 격려의 영이시기에 우리의 마음을 만져 주십니다.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눈을 열어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 속에서 근사하게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주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릏 더해 주십니다. 자만, 아집, 욕심, 추하고 죄악된 행실을 벗어버릴 때 성령의 능력만이 우리들 안에 드러날 것입니다. 또한 성령 하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변호해 주십니다. 우리들을 위해서 탄식하면서 기도해 주시는 분도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은 우리와 친숙한 분입니다. 우리들 마음속에서 바른 길을 알려주시고, 하나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주시는 말 그대로 도우미(helper)가 되십니다. 우리는 매사에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과 대화하고 교제하면서 감사와 기쁨 가운데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이토록 친밀하신 성령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임재 하신다는 사실이 곧 복음입니다. -河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2

복음은 기쁜 소식이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또는 예수님을 통해서 임한 기쁜 소식을 뜻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이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아무런 이익도 없이 순전히 우리를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상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우리들에게 쉼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의 멍에를 가볍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기쁜 소식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두 번째야말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임한 최고의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함 받았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우리가 예수님을 마음에 받아들임으로 임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은혜이고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복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가 연약할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고 가르쳐줍니다. 우리들은 실제로 힘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연약하다 못해 무력합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연약한 인간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연약함을 담당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연약함은 죄 가운데 빠진 상태는 아닙니다. 단지 자신의 의지를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연약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제 죄인이 되었습니다. 죄 가운데 빠졌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죄를 지었으니 벌을 주어 마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위해서도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죄를 지어서 십자가에 달려 죽을 사람은 우리들인데 예수님께서 대신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증명해 보여주셨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때도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연약한 것은 인간의 실존입니다. 죄를 짓는 것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하나님과 화해시켜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은 우리들이 연약할 때, 죄인되었을 때, 심지어 원수되었을 때도 사랑으로 임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죽으심으로 우리들은 강해졌고, 의롭게 되었고, 또한 하나님과 화해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우리는 요즘 2012년 사순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경건생활을 훈련하는 기간이지만 그에 앞서 우리에게 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되새기고 체험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모든 참빛 교회 성도님들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마음껏 누리고 감사하면서 사순절을 보내시길 기도하겠습니다.-河-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1

세상살이가 만만치 않습니다. 인생길이 어렵고 힘겹습니다. 인생이 잘 풀려도 내심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이왕이면 돈 많이 벌고 권력까지 얻어서 큰소리치면서 살고 싶은 생각에 열심히 일합니다. 큰 야망이 없다면, 남에게 싫은 소리 듣지 않고 아쉬운 소리 하지 않을 만큼만 살기를 소원합니다. 그렇지만 뭔가 허전하고 아쉬운 것이 우리네 인생길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까만 속이 보입니다. 속에서 나오는 추한 것들을 성경이 정리해 놓았는데 어찌 그리도 잘 맞는지요! “악한생각, 음란, 도적질, 살인, 간음, 탐욕, 악독, 속임, 음탕, 흘기는 눈, 훼방, 교만, 광패”(막7:21-23)-13가지 우리 마음에 담긴 그릇된 모습을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잡초처럼 끊임없이 마음속에서 생겨납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시기, 악독, 수군수군, 비방, 하나님을 미워함, 능욕, 교만, 자랑, 악을 도모함, 부모거역, 우매, 배신, 무정, 무자비”(롬1:29-31)- 21가지 악한 모습을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계시는 듯해서 등골이 오싹합니다. 우리들은 이처럼 내적인 부조화, 부도덕한 심성 때문에 갈등을 겪고 자기 스스로 함정에 빠지곤 합니다. 물론 이러한 추한 모습들이 우리가 사는 사회로 그대로 전이되어서 세상도 우리 마음 이상으로 왜곡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것들을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생긴 죄의 결과라고 가르쳐줍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선한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단의 꼬임에 넘어가서 하나님처럼 되려다가 우리들 자신은 물론 우리가 사는 세상까지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기독교에서는 원죄(original sin)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많은 문제들이 야기됩니다. 우리들 안에서는 위에 나열한 죄의 모습들 외에도 불안함과 두려움을 일으킵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지만 죽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외롭습니다.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사람들을 찾아 나섭니다. 그런데 인간관계들이 실망으로 끝나기 일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시기와 질투, 경쟁과 갈등, 그리고 거짓과 악행이 난무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떠난 세상의 모습들입니다.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나라를 잃고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춥고 배고팠습니다. 희망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산으로 들로 모였습니다.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 귀신들린 사람들도 예수님께 나와서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세상에서 소외되고 사람취급 받지 못하던 여인들과 천민들도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회개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기쁜 소식으로 임하십니다. 우리 힘으로 풀 수 없는 죽음, 고통, 불안, 죄의 문제를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십니다:“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河-

축복하는 교회 (5) : 시편 118편 4

시편 118편 말씀을 함께 나누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시편 118편은 어려움을 겪었던 백성들과 지도자(왕 또는 제사장)가 성전에 나와서 지나온 어려움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이 겪은 어려움은 최악이었습니다.“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17절)라고 말할 정도로 죽음에 근접한 어려움이었습니다. 적군이 쳐들어와서 에워쌓습니다. 포위망이 점점 좁혀져서 꼼짝없이 죽게 되었을 때, 여호와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끊어내고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여호와의 오른손의 권능이 이들에게 임함으로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경험도 했습니다. 이 모든 일은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 나와서 부르짖는 기도를 통해서 가능했습니다.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한 것입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심을 확신했습니다.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함을 몸소 체험하고 그것을 감사의 찬양으로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시편 118편의 피날레입니다. 이보다 더 즐겁고 기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감사의 찬양을 아무리 많이 올려드려도 부족합니다. 여호와의 구원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니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이미 정해놓으셨고 드디어 그 날이 임했습니다. 이처럼 선하신 뜻을 친히 이루시는 하나님 앞에서 이들은 한 마음으로 또 한 번 주님께 기도합니다.:“이제 구원하소서. 이제 형통케 하옵소서.” 앞길을 하나님께 맡기는 찬양이요 간구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임하면 그 길은 아무리 어려워도 형통한 길입니다. 여기서 형통함은 성공이라고 옮길 수 있습니다. 번성케 되고 인생길이 활짝 열리는 것을 뜻합니다. 광활한 곳에 세우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인생길을 활짝 열어주시길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26절은 이들이 성전에서 서로 축복하는 장면입니다.“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는 주님의 백성들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마태복음 21장 9절에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예수님을 향해서 백성들이 찬양했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와 같은 표현입니다. 26절의 후반부는 성전에 모여서 서로 축복하는 모습입니다. 비록 구약의 말씀이지만, 오늘 본문 속에서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셨을 때, 하나님의 구원이 성취되고 구원받은 백성들이 함께 모여서 축제의 시간을 갖는 것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찬양이 27절 이하에도 계속됩니다. 여호와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얼굴빛을 비춰주셨습니다. 어두움이 물러나고 밝은 세상이 되었습니다. 죽음의 세력과 얽어매고 있던 모든 것들이 끊어지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백성들은 희생제물을 제단 뿔에 묶어놓고 다 함께 행진하면서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8-29절).

시편 118편을 끝부분에서 백성들이 부르는 찬양은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 모두가 합창할 찬양일 것입니다. 한 주간 동안 세상에서 주님의 이름과 그 오른손의 능력을 체험한 우리들이 성전에 모여서 함께 노래할 찬양이기도 합니다. 그 찬양이 세상으로 흘러넘칠 때 우리 교회가 축복하는 교회가 되고 우리 각자는 축복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