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기도하라 (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매년 한 달여 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올해 나눌 주제는 예배 마지막에 함께 부르는 주기도문 송의 가사인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주기도문은 우리 모두에게 익숙합니다. 때로는 중간에 있는 “기도”를 빼고 주문처럼 외웁니다. 본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중언부언 습관적으로 주기도문을 외우는 것입니다. 예배나 모임을 끝내는 형식적인 문구로 사용하곤 합니다. 주기도문이 알맹이 없는 형식이 되는 순간입니다.

 

이번에 주기도문을 차례로 살펴보면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속으로 들어가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맞춰서 우리 기도를 점검하고 바른 기도를 배우고 실천하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에서 주기도문은 산상수훈에 속해 있습니다. 구약 성경의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십계명과 율법을 받았다면,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산에 올라가셔서 백성들에게 팔복(the beatitude)과 산상수훈을 선포하셨습니다. 구약의 율법을 뛰어넘은 새로운 율법입니다. 주기도문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기도로 시작하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는 마침 기도로 마무리됩니다. 주기도문의 본문은 하나님에 관한 세 가지 기도와 우리에 관한 세 가지 기도로 균형을 이루면서 차례로 진행됩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우리가 매일 드리는 기도에 주기도문의 정신이 깃들어 있을 때 진정한 기도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주기도문의 시작입니다. 성경이 쓰일 당시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분으로 이해했습니다. 하늘 위를 가본 사람이 없으니 우주에 대한 지식도 부족했고, 하나님은 낮의 구름과 해, 밤의 달과 별 너머에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과 구별되시는 초월적 존재임을 가르쳐줍니다. 하늘의 하나님은 모든 세상을 내려다보실 것이니 세상을 통치하는 주권자가 되십니다. 거기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가능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인 인간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할 뿐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가 되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마음에 영접하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요1;12). “우리”는 하나님 백성의 연대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시작 기도에 우리의 진실함, 간절함, 감격과 소망, 하나 됨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河-

2023년 사순절

올해도 어김없이 사순절(Lent)을 맞이합니다. 지난 3년여 사순절 가운데 팬데믹 이전의 모습을 가장 많이 되찾은 사순절인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는 역사의 추를 되돌려서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팬데믹을 맞으면서 뉴-노멀이라는 말을 사용했다면, 팬데믹 이후는 치솟는 물가를 비롯해서 이전과 전혀 다른 세상입니다.

 

요즘 세상은 인공지능(AI)에 매료된 듯합니다. 무슨 질문을 하든지 척척박사처럼 답해주고 심지어 아이들 숙제와 대학 논문까지 불과 몇 분 내에 써서 보여주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인공 지능이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오면서 인류는 예전에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살 것 같습니다. 기대 반 우려 반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2천 년 전 초대교회부터 지켜왔던 사순절을 맞이합니다. 복음의 은혜와 능력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에도 일정함을 믿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변해도 하나님의 일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성령의 함께 하심을 인정하고 믿기에 변치 않는 마음으로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부활절 전 주일을 제외한 40일의 기간을 가리킵니다. 사순절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동참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절을 앞두고 금식하면서 절제와 경건 훈련에 힘썼습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사순절은 세례를 준비하는 기간이기도 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처음에는 1년 365일의 십분의 일인 36일간의 금식을 행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7세기 말 또는 8세기 초에 와서 재의 수요일부터 4일을 더하여 40일을 사순절로 지키게 되었답니다. 40일이라는 날 수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40일간 금식하신 것(마4:2, 눅4:2), 시내 산에서 모세가 40일간 금식한 것(출24:18, 신9:9), 엘리야가 하나님의 산에 가기 전 40일간 금식(왕상19:8)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봅니다. 40일이란 기간이 성경에서 왔음을 뜻합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기간이지만, 더 나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니 지나치게 금욕하면서 우울하게 보낼 필요는 없습니다. 사순절의 끝에는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순절 기간에 금식이 행하여졌다는 것은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면서 하나님을 더 많이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꼭 금식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신앙의 성장을 도모하는 사순절 계획을 세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순절 기간에 구제와 선행이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기억합시다.

 

사순절을 지내면서 기도와 말씀에 더욱 힘쓰기 원합니다. 교회와 가정, 공동체 속에서 또한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진실하게 예배합시다.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고, 받은 은혜를 이웃과 나눕시다. -河-

순례자의 길 (7)

존 번연의 <천로역정 Pilgrim’s Progress>을 통해서 올해 표어인 <푯대를 향하여>에 관한 말씀을 나누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허영의 도시에서 신앙의 동지 믿음(Faithful)이 목숨을 잃었기에 크리스천은 다시 혼자가 되었습니다. 그때 허영의 도시에서 믿음과 크리스천의 말과 행실을 보고 신앙의 순례길을 시작한 소망(Hopeful)을 만납니다. 다시 길동무가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힘겨운 신앙의 순례길 길목마다 쉼의 장소를 허락하셨습니다. 해석자의 집, 크리스천이 성경 두루마리를 두고 왔던 쉼터, 예수님께서 주인이셨던 크고 아름다운 집에서의 환대에 이어서 생명수가 흐르는 강가를 만납니다. 강둑을 따라서 크리스천과 소망이 걷습니다. 기쁨의 길입니다. 강물을 마시니 지친 마음에 활기가 생깁니다. 강 양편에 각종 열매를 맺는 푸른 나무들이 있었는데 그 열매는 모든 질병을 치료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온전케 하는 능력입니다.

 

강가를 걷는데 앞에 두 길이 나왔습니다. 하나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좁은 길이고, 다른 하나는 푸른 초장이 펼쳐진 큰길입니다. 소망은 계단을 올라가고 싶었지만, 크리스천은 천국이 가까웠으니 큰길을 가고 싶어 합니다.

 

푸른 초장이 펼쳐진 넓은 길을 가는데 앞에 절망 거인과 그의 아내 자포자기가 사는 의심의 성이 있습니다. 신앙의 순례길을 시작할 때 절망의 늪에 빠져서 혼쭐이 났는데 순례길 마지막에 다시 절망을 만난 것입니다. 절망과 그의 아내 자포자기는 크리스천과 소망을 위협합니다. 신앙의 순례길을 중단하고 심지어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깊은 감옥에 가둬버렸습니다.

 

크리스천과 소망이 이름에 걸맞지 않게 믿음을 잃고 절망 가운데 빠졌습니다. 그때 크리스천이 자기에게 있는 한 가지 능력을 발견합니다. 약속입니다. 크리스천이 몸에서 약속이라는 열쇠를 찾아냅니다. 의심성에 있는 모든 자물쇠를 열 수 있는 만능열쇠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니 절망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절망의 감옥을 빠져나온 크리스천과 소망이 천국이 보이는 기쁨의 산에 올라갑니다. 그곳에 있는 목자들이 크리스천과 소망을 맞이합니다. 임마누엘, 주님께서 기쁨의 산의 주인이십니다. 목자들이 천국에 가는 길을 자세히 알려줍니다. 마지막 관문이 남았습니다. 강물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거칠게 흘러가는 강물을 건널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강물은 믿음으로 걸으면 낮아지고 그렇지 않으면 깊어지는 신비한 강물입니다. 크리스천은 거의 빠져 죽을 뻔하지만, 소망이 크리스천을 격려하면서 믿음으로 강물을 건넜습니다.

 

마침내 천국문에 이르렀습니다. 나팔수들이 크리스천과 소망을 맞이합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평안과 기쁨만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게 될 천국입니다. 할렐루야! -河-

순례자의 길 (6)

존 번연의 <천로역정 Pilgrim’s Progress>을 갖고 올해 표어인 <푯대를 향하여>에 관한 말씀을 나누는 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믿음(Faithful)이라는 신앙의 동지를 만난 천로역정의 주인공 크리스천은 한결 힘차게 순례길을 걷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지만 결국 지식에 그친 수다쟁이와의 대화는 신앙의 길이 요란한 빈 수레가 될 수 없음을 확인했습니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허영의 도시(Vanity Fair)”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사고파는 시장입니다. 인간의 욕망이 구체적으로 표출된 곳입니다. 허영의 도시를 주관하는 세 사람은 귀신의 왕들인 바알세불, 아폴리온, 그리고 군대(Legion)입니다. 화려해 보이지만, 크리스천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로 가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 가셔서 마귀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돌이 떡이 되게 하는 욕망과 물질에 관한 시험, 성전에서 뛰어내리면 천사가 구해 줄 것이라는 하나님 아들로서 명예에 관한 시험, 마귀에게 절하면 천하만국을 주겠다는 권력에 대한 시험을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이처럼 허영의 도시는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물질, 명예, 권력이 판치는 곳입니다.

 

크리스천과 믿음은 허영의 도시에 눈길도 주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유혹에 말씀과 신앙으로 담대하게 대처하다가 감옥에 갇혀서 재판까지 받게 됩니다. 재판 과정에서 믿음이 순교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예루살렘 사람들처럼 허영의 도시 사람들이 믿음을 죽인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간신히 살아남습니다.

 

허영의 도시에서 믿음과 크리스천이 꿋꿋하게 버텼습니다. 자신이 믿는 신앙을 사람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을 본 어떤 한 사람이 감동을 받고 신앙의 순례길을 따라나서기로 결심했는데, 그의 이름이 소망(Hopeful)입니다. 믿음에게 소망이라는 새로운 길동무가 생긴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이 사심(By-ends)을 만납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사심의 친구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자기들의 욕심을 채웠습니다. 하나님만 믿는 것은 어리석고 세상의 즐거움도 적당히 맛보면서 신앙의 길을 갈 것을 유혹합니다. 믿음과 소망은 이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길을 가다 보니 은광(Silver-mine)도 만납니다. 은광에 가는 길목에서 예수님을 잘 믿다가 세상으로 나간 데마가 크리스천을 유혹합니다. 힘들지 않게 돈을 벌 수 있는 은광이 가까운 곳에 있으니 잠시 와서 재물이 주는 기쁨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만났던 사심과 그의 친구들은 데마의 말을 듣고 은광으로 향합니다. 그곳이 멸망의 길인 줄도 모르고 잠시 잠깐의 욕망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크리스천과 소망은 허영의 도시와 은광을 뒤로하고 다시 순례길을 떠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요일2:16)을 뿌리치는 것이 쉽지 않은데 크리스천은 세상의 유혹을 근사하게 극복했습니다. -河-

순례자의 길 (5)

겸손의 골짜기에서 마귀 아폴리온을 만났던 천로역정의 주인공 크리스천에게 또 다른 어려움이 닥칩니다. 신앙의 순례길이 고난의 좁은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겁쟁이와 불신이 가던 길을 포기하고 돌아왔는데, 이번에도 두 사람이 크리스천이 가는 길에서 마주 달려옵니다. 앞에 죽음의 골짜기 있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도 그 길을 가면 결국 죽게 될 것이라고 겁을 줍니다. 크리스천도 겁이 났지만, 다시 망할 세상으로 되돌아갈 수 없기에 사망의 골짜기를 향해서 앞으로 나갑니다. 다윗왕도 한때 빠졌던 위험한 수렁이 왼쪽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도 조금만 발을 헛디디면 빠질 수밖에 없는 수렁입니다.

 

조심조심 앞으로 나갑니다. 깜깜한 길입니다. 지옥의 불이 그를 향해서 달려듭니다. 크리스천은 아폴리온을 물리쳤던 검을 들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면서 앞으로 갑니다. 수많은 마귀 떼가 달려듭니다. 크리스천이“나는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믿고 걸어가리라”(시71:16)는 말씀을 마귀들에게 선포하니 마귀들이 기가 죽어서 물러갑니다. 기도와 말씀에 힘이 있습니다.

 

그렇게 날이 밝고 아침이 되니 사망의 골짜기에 햇볕이 비칩니다. 날이 밝아서 사망의 골짜기를 살펴보니 곳곳에 “덫과 함정들 구렁텅이와 그물들”이 여기저기에 깔려 있었습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두려웠지만, 빛으로 밝아지니 손쉽게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빛이 중요합니다.

 

사망의 골짜기를 빠져나오니 저 앞에 혼자 순례길을 걷는 사람이 보입니다. 아름다운 집에 있던 문지기 할아버지가 말했던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크리스천이 앞에 가는 순례자를 따라갑니다. 그 사람은 크리스천과 같은 동네 사람이었습니다.

 

크리스천이 떠난 후에 동네에서는 앞으로 장차 망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 돌았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당장 눈앞에 있는 향락을 즐길 뿐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는 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답니다. 도리어 길을 떠난 크리스천을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크리스천의 뒤를 이어서 신앙의 순례길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믿음(Faithful)이었습니다.

 

크리스천에게 든든한 길동무가 생겼습니다. 두 사람이 오손도손 이야기하면서 길을 걸어갑니다. 크리스천은 믿음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자세히 묻습니다. 믿음은 절망의 늪도 그냥 지나왔습니다. 대신 바람둥이(Wanton)라는 여인을 만나서 요셉이 당했던 유혹을 받았지만, 믿음으로 극복했습니다. 믿음이 걸어온 순례길은 크리스천이 왔던 길이나 만났던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믿음의 길이 다양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다양한 신앙의 순례길을 걷습니다. 내가 걷는 길입니다. 그 길을 기도와 말씀으로 걸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걷는 나의 순례길입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