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같은 죄인 살리신/ 롬 5:6-11
https://www.youtube.com/watch?v=7rd2I1_MPBg
2022년 기도에 대한 연속 설교를 마쳤습니다. 참빛 식구들 모두 각자에게 맞는 기도 방식을 개발해서 그것을 습관으로 만드시길 부탁드렸습니다. 기도는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삶입니다. 일상입니다.
기도에 대한 연속 설교를 마치고 다음 주제로 넘어가기 전에 찬송가에 얽힌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오늘은 누구나 가장 즐겨 부르는 찬송가 가운데 하나인 <나 같은 죄인 살리신 Amazing Grace>을 지은 존 뉴턴(John Newton)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존 뉴턴은 1725년 영국에서 태어났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와 당대의 부흥사 조지 휫필드와 같은 유명한 신앙 지도자들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인물입니다.
뉴턴의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지만, 뉴턴이 여섯 살 때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뉴턴의 아버지는 무심한 성격의 무역선 선장이었습니다. 뉴턴이 공식적인 교육을 받은 것은 단 2년뿐입니다. 아버지의 강요로 열 살이 되었을 때 배를 타기 시작해서 20여 년 이상을 바다에서 보냈습니다. 스무 살 때는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 노예로 팔려서 죽을 고비를 당할 정도로 고생했습니다. 노예 무역선의 선원이던 뉴턴이 3년 동안 노예들의 노예가 되는 특별한 경험을 한 것입니다.
뉴턴은 아프리카에서 구출되어서 영국으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바다에 심한 폭풍이 불어서 난파될 정도가 되었을 때, 간절히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어릴 적 어머니가 전해주신 신앙이 다시 살아났고, 틈틈이 읽었던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와 같은 신앙 서적의 내용이 떠오르면서 1748년 3월 21일 하나님을 만나는 회심을 경험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뉴턴은 노예 무역선에 올랐지만 6년 후 뇌전증(간질병)이 생기면서 배를 타지 못하고 독학으로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비롯한 신학을 공부해서 39세에 영국 성공회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 40년 이상 목회하면서 영국의 영적 부흥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노예무역선 선장이었던 자신의 과거를 뉘우치면서 윌리엄 윌버포스의 노예 해방 법안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뉴턴은 변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는데, 자기가 죽을 죄인이었다는 사실과 그런 죄인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거기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이라는 역대의 찬송이 탄생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잃었던 생명을 찾았고 광명을 얻은 뉴턴의 신앙 고백은 여전히 우리 모두에게 감동과 은혜를 줍니다. -河-
힘쓰고 애써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통해서 살펴본 2022년 기도에 대한 연속 설교 마지막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셨고, 예수님께서 가시는 그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가셨지만, 돌 던질 만한 거리에서 무릎을 꿇고 혼자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잔을 옮겨 달라고 솔직히 간청하신 후에 “그러나” 예수님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길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길 원하는 절대적인 순종의 기도였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그러나 기도>를 배우고 실천하길 다짐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단지 두 문장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무릎을 꿇은 자세만큼 처절하고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때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님께 힘을 더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길 바라면서 한 주간 살았습니다. 외롭고 힘들 때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길 기대했습니다.
오늘 본문(44절)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셨는지 보여줍니다. “힘쓰고 애써”라는 말씀에 예수님의 심정이 잘 나타납니다. 헬라어 본문은 “고뇌 속에서 매우 간절히 기도하셨다”는 뜻입니다. “고뇌(agony)”라는 단어 속에 십자가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마음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오죽했으면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셨을까요!
하지만 우리 성경이 고뇌가 아닌 “힘쓰고 애써”라고 번역한 것은 고뇌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고니아>에 비장한 결심 또는 각오라는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큰 경기를 앞둔 운동선수가 긴장하는 모습입니다. 경기를 앞둔 비장한 각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경기에서 승리하겠다는 다짐입니다. 담대하게 경기에 임하겠다는 용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앞에서 비겁하지 않으셨습니다. 헬라의 사상가들이 비판했듯이 죽음을 두려워하신 것이 아니라, 죽음을 담대히 맞이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힘쓰고 애쓰며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바닥에 떨어지는 땀이 핏방울이 될 정도였습니다.
기도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은 자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기도하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음을 보고 앞으로 닥칠 일을 생각하며 슬퍼하면서도 잠들고 말았습니다.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안타깝습니다-河-
힘을 더하더라
십자가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께서 감람산에 가셔서, 하나님의 뜻(계획)이라면 앞에 닥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옮겨주시길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솔직한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고 가셔야 할 십자가가 얼마나 무거운지 보여주는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바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대로 이뤄지길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과 함께 우리 모두 닮아야 할 모범입니다. 예수님께서 습관을 쫓아서 감람산에 가셨습니다. 감람산에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특정한 장소, 그곳(the place)이 있었습니다. 겸손과 순종의 표시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예수님의 소원을 솔직히 간청하신 후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그러나 기도>로 마무리하셨습니다.
누가가 전하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독특합니다. 마태과 마가와 달리 예수님의 기도가 한 번뿐입니다. 무엇보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힘을 더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43절).
누가복음에 천사가 등장하는 본문이 몇 군데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탄생을 사가랴와 마리아에게 각각 알려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천사의 거룩한 영광으로 오신다고 예고하셨습니다(9:26). 거지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거지가 죽었을 때,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16:22). 하나님 나라에서 부활한 우리의 모습은 천사와 같은 초월적인 존재요 하나님의 자녀라고 했습니다(20:36).
구약 성경에서 엘리야 선지자가 이세벨을 피해서 광야로 나갔을 때, 로뎀 나무 아래서 죽음을 생각하는 엘리야에게 힘을 준 것도 천사였습니다(왕상19:5-8). 중간기 문서인 마카비서에도 엘리에젤이라는 제사장이 순교할 때 하늘 문이 열리고 두 명의 천사가 내려와서 그를 돕는 장면이 나옵니다.
처럼 누가복음은 물론 이스라엘 전통에서 천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使者, messenger)였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세상에 내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고, 하나님 백성을 돕습니다. 그 천사가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도우신 것입니다. 기도 역시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님을 배웁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기도 속에도 천사의 도움과 하늘의 힘이 임하길 기대합니다. -河-
2022기도: 겟세마네 기도 (3)/ 누가 22:39-46
아버지의 뜻
예수님께서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그곳(the place)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부탁하신 후에 조금 더 나가셔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눈에 그립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신 겸손함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순종입니다. 간절히 하나님께 구하시는 모습입니다.
지난 두 시간은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우리도 예수님 닮기를 원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크게 세 부분입니다. 우선, “아버지여”하고 하나님을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대상이 분명합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기도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깊은 교제를 이어 오셨습니다. 모든 종교마다 기도하는 예식이 있지만,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께 있음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요즘 시대에 아버지라는 표현이 가부장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아버지는 모든 것을 주관하고 책임지시는 가장, 왕, 주인을 뜻했습니다. 아버지를 성적인 편향으로 읽기보다 아버지되신 하나님의 속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둘째는 예수님 앞에 닥치는 잔을 옮겨주길 기도하십니다. 곧 잡히셔서 심문받으시고 결국 십자가에 죽게 되실 예수님의 솔직한 마음입니다. 예수님도 수치, 조롱, 핍박, 죽음 앞에서 고뇌하고 괴로워하셨다는 사실에 깊은 공감을 느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셨고,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 가는 길을 가셨음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우리와 공감하시고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키케로와 같은 당대의 사상가들은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그리스-로마의 철학자들이 담대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과 비교하면서 예수님께서 의연하게 죽음을 맞지 않으셨다고 비판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심을 간과한 생각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고백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임을 알고 계셨기에 그 길을 가시겠답니다. 예수님의 원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시겠다는 예수님의 <그러나> 기도와 무릎 꿇은 모습이 일치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의 본을 보이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 역시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고백으로 모든 기도를 마무리하기 원합니다.-河-
무릎을 꿇고
우리도 누가복음 속의 예수님처럼 기도가 습관이 되길 바라면서 한 주간 살았습니다. 습관은 생각하고 의도해야 나오는 행동이 아니라 저절로 몸과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기도가 습관이 되면, 자기도 모르게 기도의 자리로 나옵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 수시로 또는 무심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 하나님 앞에서 부족함을 뉘우치는 회개의 기도, 필요한 것을 구하는 간청, 이웃을 위한 기도를 저절로 실천합니다. 기도가 습관이 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에 가신 예수님께서 늘 가시던 “그곳(the place)”에 도착하자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고 부탁하신 후에, 돌을 던질 만한 곳까지 조금 더 가셔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그곳”은 예수님께서 습관처럼 기도하기로 정해 놓으신 특정한 장소, 예수님의 기도처였습니다. 40절의 “유혹”과 마지막 46절의 “시험”이 짝입니다. 우리 성경은 유혹과 시험으로 다르게 번역했지만, 같은 헬라어 <페이라스모스>가 쓰였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부인한 것이 곧 유혹에 넘어간 결과였습니다.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이 요구”하고 있다고 하셨듯이(21:31),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갈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부탁하십니다. 끝까지 가능성을 놓지 않으시고, 제자들의 실패를 안쓰럽게 생각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탄의 유혹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믿는 것을 방해합니다. 믿음을 사방으로 흩어 놓습니다. 그것을 이기는 비결이 기도입니다.
마태/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들은 한곳에 머물게 하시고, 세 명의 제자(베드로, 야고보, 요한)를 데리고 조금 더 깊이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혼자 더 깊이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은 이러한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홀로 가신 것을 강조합니다. “돌 던질 만큼”의 거리는 가까운 거리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도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잠이 들었다니 유혹의 위력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항복의 표시입니다. 또한 특별하고 다급한 기도를 위해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는 모습을 눈에 그리는 것만으로도 은혜가 됩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