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9): 하나님께서 하신 일/ 행 15:36-16:5
하나님께서 하신 일
교회력에 의하면 오늘이 부활절 둘째 주일입니다. 성령 강림절까지 부활절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는 물론 우리 신앙의 기초석입니다. 여기서부터 모든 신앙과 삶이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면서 예루살렘에 모여서 기도한 제자들처럼 우리도 성령의 임재와 역사를 기대하면서 부활절을 살기 원합니다.
다시 사도행전 본문으로 돌아왔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함께 떠났던 1차 전도 여행은 말 그대로 힘든 여정이었지만, 가는 곳마다 성령의 역사가 있었고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안디옥 교회에 돌아와서 선교 보고를 하고 성도들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면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안디옥 교회에 가르쳤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들과 논쟁했지만, 결국 베드로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지도자로 있는 예루살렘 교회의 자문을 구하기로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간 바울과 바나바가 그곳 성도들에게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지만, 예루살렘에도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강조하는 예수님을 믿은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이 임할 수 있고, 할례나 모세의 율법이 구원의 조건이 아님을 선포합니다. 대신 우상을 섬기지 말고, 우상에게 드려진 피와 이방 종교의 음란한 예식에 참여하지 말라는 조건을 만들어서 바울과 바나바 편에 안디옥 교회에 보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돌아온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을 성도들에게 전하니 분열되었던 교회가 다시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제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 편지를 들고 자신들이 복음을 전했던 소아시아 지역을 방문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런데 지난번 전도 여행에서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간 바나바의 조카 마가를 두고 의견이 갈립니다. 결국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온 지도자 실라와 소아시아로, 바나바는 마가와 함께 자기 고향 구브로로 떠났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바울이 돌에 맞아서 죽을 뻔했던 루스드라를 다시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이 믿음의 아들이라고 불렀던 후계자 디모데를 만납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루스드라에 왔을 때 예수님을 믿었고, 약 5년이 흐른 가운데 칭찬받는 기독교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헬라인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디모데가 바울의 후계자가 된 것에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을 관통하고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河-
부활주님을 만난 자들의 놀라운 변화 (정한옥 목사님)
요한복음 20장 11~16, 19~20, 26~29절
https://www.youtube.com/watch?v=OdFclerI5gE
고난 주간을 지내고 부활의 아침을 맞았습니다. 팬데믹 이후 세 번째 맞는 부활절입니다. 지난 두 해와 달리 2022년 올해는 비교적 많은 참빛 식구들과 교회에서 예배할 수 있어서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는 물론 온 세상이 코비드 바이러스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6백만명이 목숨을 잃었고, 미국만 98만명 이상이 희생되었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가족과 친지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지 감히 우리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고난 주간을 마치고 부활절을 맞지만, 지난 2년여 자체가 고난의 해였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올해 부활을 기점으로 세상에 희망의 빛이 비치길 다시 한번 간절히 소원합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모든 죄를 지고 죽으신 현장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다는 신성 모독으로, 로마 제국 입장에서는 로마 황제를 배제하고 식민지 유대의 왕이라고 불렀다는 정치범으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적이 이유일 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첫걸음이자 파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찢어졌습니다. 매년 성전에 나가서 드리던 제사를 “한 번에 영원히(once and for all)” 해결하심으로 더 이상 성전의 제사가 아니라 믿음과 은혜로 하나님께 나가는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이라고 외치므로 예수님께서 그 길을 가셨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와 죽음이 판치는 세상에 생명의 빛이 되셨습니다. 죽음을 지배하는 악한 세력을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상한 것과 전혀 다른 구원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로마 제국은 물론 구약 시대부터 죽을 죄를 지은 사람들을 나무에 달았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용서와 생명의 십자가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모든 것을 역전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이 없는 영원한 세상을 개척하시고 말 그대로 온 세상의 왕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십자가를 지나서 부활의 주님을 믿음으로 생명을 얻었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염려, 근심, 두려움, 그리고 죄를 극복하고 새로운 생명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온 세상에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필요합니다. 여전히 죽음의 세력과 씨름하는 세상에 부활의 빛과 능력이 비추길 기도합니다. 우리 안에도 부활의 능력과 생명이 임하고 부활을 살기 원합니다. “예수 부활하셨습니다”-河-
예루살렘 회의: 현명한 결정
바울과 바나바가 첫 번째 전도 여행을 마치고 안디옥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전도 여행 가운데 하나님께서 일하신 것과 무엇보다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온 것을 보고하고 안디옥 교회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안디옥에 내려왔습니다. 이들이 교회로 들어와서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교리를 가르칩니다. 예수님을 믿었어도 이방인들은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고 몸에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차별적인 가르침이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모세의 율법과 할례를 강조하는 유대주의자들과 심하게 다투고 논쟁을 벌였지만, 쉽게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와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 교회에 보내서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있는 예루살렘 교회의 자문과 판단을 구하기로 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 일행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도 복음을 전합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사도들과 장로들이 이들을 환영하고, 바울과 바나바는 전도 여행 중에 임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하면서 다 함께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이었다가 예수님을 믿고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이 안디옥에 내려온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방인에게도 모세의 율법을 지키게 하고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백성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보다, 구약시대부터 전해지는 전통에 얽매여 있습니다.
베드로가 먼저 나서서 로마 백부장 고넬료와 그의 가정에 임한 복음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를 증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의 은혜와 구원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이방인들 가운데 행하신 성령의 역사, 기사와 이적을 소개합니다. 자기들이 직접 경험한 것을 증거하니 베드로, 바울과 바나바의 증언에 힘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구약 성경(아모스 9:11-12)을 갖고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해질 수 있음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대신, 우상의 더러운 것, 생명과 같은 피는 삼가고, 음행하지 말 것을 조건으로 삼고, 이방인들도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음을 문서로 정리해서 공포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를 비롯한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은 장차 이방인 선교에 중요한 지침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현명한 판단과 결정으로 복음의 문이 온 세상과 모든 사람에게 활짝 열렸습니다. 할렐루야! -河-
더베에서 안디옥으로
우리 모두 길을 가는 나그네들이기에 인생이나 신앙이나 길로 표현되는 여정(journey)입니다. 그길을 가면서 예수님을 푯대(목표)삼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의 귀한 뜻을 이뤄갑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가는 길이 늘 안정되고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거친 길, 자갈길, 구부러진 길, 오솔길, 내리막과 오르막길을 번갈아 만납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도움과 인도를 구하면서 신앙 안에서 주어진 인생길을 걸어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떠났던 바울의 첫 번째 전도 여행은 특별한 여정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는 순간은 온 몸에 전율이 생길 정도로 신비롭고 기뻤을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생기고 그들이 모여서 교회가 세워지는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까지 일어서게 하는 기적까지 경험했으니 바울과 바나바는 신명 나서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반면에, 가는 길목마다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구약의 메시아를 기다리던 유대인들입니다. 예수님을 가장 먼저 받아들이고 믿어야 할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고 바울과 바나바를 향해서 돌팔매질을 하면서 죽이려고 달려드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복음 전파가 영적인 싸움이고 복음을 훼방하는 악한 세력이 확실히 존재함을 알았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의 유대인들이 루스드라까지 쫓아와서 바울을 돌로 쳤습니다. 바울은 기적처럼 다시 일어났고, 그 밤에 루스드라로 다시 들어가는 당당함도 보였습니다. 이튿날은 상처 입은 몸을 이끌고 60여 마일 떨어진 더베로 향했습니다.
더베는 루스드라보다 헬라화 된 농촌 지역인데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니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첫 번째 전도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 더베에서는 훼방이나 핍박이 없습니다. 순탄한 길이었습니다. 그동안 험한 일을 겪으면서 복음을 전했던 바울과 바나바에게 더베에서의 선교는 커다란 위로와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기들을 죽이려고 달려들었던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을 다시 방문합니다. 예수님을 새로 믿은 사람들의 마음을 굳게 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킬 것을 부탁하면서, 교회를 이끌 장로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복음 전파 이후 후속 사역까지 깔끔히 마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파송한 안디옥에 돌아옴으로 첫 번째 전도 여행을 마무리했습니다. -河-
루스드라 (2)
바울과 바나바가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하면서 루스드라 사람들은 예전에 그곳을 찾았다고 전해지는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다시 루스드라를 방문했다고 믿었습니다. 제우스 신전의 제사장이 소를 몰고 바울과 바나바를 찾아올 정도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구약의 하나님을 모르는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그들이 헛된 것을 신봉하고 있음을 깨우치고 천지를 지으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전했습니다. 농경 지대였던 루스드라에 비를 주시고 추수하게 하셔서 기쁨과 보람으로 감사하게 한 모든 선한 일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깨우쳤고 루스드라 사람들은 바울이 자기들의 상황에 맞게 전하는 복음을 받아드렸을 것입니다.
그때 바울을 핍박했던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의 유대인들이 100여 마일 떨어진 루스드라까지 내려와서 루스드라 사람들을 선동했습니다. 이고니온 사람들은 군중들을 선동하는데 특별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까지 신처럼 받들던 사람들이 바울을 향해서 돌을 던집니다. 이고니온에서 돌로 치면서 바울을 죽이려 했던 계획을 루스드라에서 이뤘습니다. 이들은 바울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도시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루스드라에서 예수님을 믿은 제자들이 쓰러져 있는 바울을 둘러섰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과 대조됩니다. 바울이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기적이 일어났고 그것을 루스드라의 제자들이 목격했습니다. 바울은 그 밤으로 루스드라로 들어갑니다.
바울을 죽이려고 루스드라까지 내려온 유대인들을 보면서 악한 세력의 집요함을 발견합니다. 돌을 들고 죽이는 악의 폭력성도 발견합니다. 순식간에 변하는 루스드라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라고 외치던 예루살렘 군중들도 떠오릅니다. 예루살렘 밖 골고다에서 죽으신 예수님처럼 바울도 도시 밖으로 버려졌습니다. 바울이 다시 의식을 되찾은 것도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처럼 바울이 겪은 어려움은 예수님의 고난, 죽으심, 부활과 겹칩니다. 바울은 그렇게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갔습니다.
바울에게서 돌에 맞아 순교한 스데반의 모습도 발견합니다. 그때는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했고 스데반 죽음의 증인이었는데, 지금은 자신이 스데반처럼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참 신비롭습니다. 훗날 바울은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다고 고백하는데 루스드라 사건도 바울의 몸에 새겨진 예수님의 흔적 가운데 하나였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