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시작합시다 (2): 아침마다 새로우니/ 애가 3장 19-24절
아침마다 새로우니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결심한 것이 3일이 지나면 잊어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새해가 되면 너도 나도 새해 결심을 정해서 노트하고 가족이나 이웃에게 알립니다. 그런데 새해 결심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새해 첫 달이 지나면서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회자됩니다.
우리가 살펴보는 예레미야 애가는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반역한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멸망하고 예루살렘이 죽음을 맞이한 듯 폐허가 된 것을 애도한 슬픔의 노래입니다. 절망이요 깜깜한 어둠입니다. 전쟁으로 나라를 잃고 나니 그 재난이 고스란히 힘없는 백성들에게 옮겨와서 어린이까지 거리에 내팽개쳐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쑥과 담즙과 같은 고난이 밀어닥친 것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역사적 비극의 현장에서 자신들의 과거를 돌아보고, 마음과 손을 들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낙심한 마음을 그대로 갖고 하나님을 찾은 것입니다. 그때 그 고난이 “오히려 소망”이 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죄를 심판하셨지만, 하나님의 본래 의도는 그들이 하나님 백성의 자리를 지키도록 회복시켜 주시는 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자(헤세드)와 긍휼(라헴)의 마음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따를 수 있는 근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침마다 성실하심으로 자기 백성을 찾아오셨습니다. “주의 성실”은 변하지 않으시는 신실하심입니다.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태양이 세상을 밝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규칙적이시고, 일정하시고, 틀림없으신 분입니다. 이렇게 성실하신 주님께서 아침마다 함께 하시니, 매일 아침이 새로울 수 밖에 없습니다.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도소이다”(애3:23). 올해 우리 교회 표어 <새롭게 삽시다>에 해당하는 주제절입니다. 매일같이 주님과 더불어 하루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억지로 또는 마지못해 맞이하는 아침이 아니라, 성실하신 주님과 더불어 시작하는 새로운 아침입니다. 이렇게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모습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다리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입니다:”내가 그를 바라리라.”(애3:24). 그리고 “하나님은 나의 기업”이라고 고백합니다. 기업(portion), 자신이 추구하고 갖고 싶은 몫입니다. 하나님만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올 한해 아침마다 새롭고 성실하신 주님과 동행합시다. -河-
새롭게 시작합시다 (1): 오히려 소망이 됩니다/ 애가 3장 19-24절
올해 우리 교회 표어는 “새롭게 시작합시다”입니다. 지난 2년여 우리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코로나바이러스 침투에 쩔쩔 맺습니다. 1년여는 집에서 갇혀 있다시피 했습니다. 백신 접종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많이 좋아졌지만, 우리 마음은 얼굴을 덮고 있는 마스크만큼 답답했습니다. 델타와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가 나올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그렇게 거의 2년을 보내고 임인년(壬寅年) 새해를 맞았습니다. 올해야말로 세상이 열리길 기대합니다. 새롭게 열리는 세상에서 호랑이처럼 포효하면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물론, 우리는 일상이 무너진 지난 2년 동안도 열심히 살아남았습니다. 새로운 일상(new normal)을 사는 삶의 지혜도 터득했고, 새로운 일상이 갖다 준 선물도 누렸습니다. 그래도 훨씬 자유롭고 마음까지 가벼운 새로운 세상을 기대합니다.
작년에 예레미야서 한 가운데 있는 소망의 말씀(렘30-33장)을 공부했습니다. 올해 우리 교회 주제절 역시 예레미야 애가 한가운데 있는 말씀입니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3:23). 앞으로 한 달 동안 애가서 3장 19절 이하의 말씀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예레미야 애가서는 예루살렘의 멸망 앞에서 부른 선지자의 슬픈 노래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다윗 왕조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그곳에 바빌론 군대가 몰아닥쳤습니다.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고, 많은 사람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바빌론 제국의 신 마르둑이 통치하는 세상에 던져진 것입니다. 각지로 흩어진 민족과 백성들이 다시 시작하거나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것입니다.
절망입니다.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애가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한가운데 소망의 말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고초와 재난”을 쑥과 담즙에 비유합니다. 그만큼 쓰라린 고난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뚝 떨어지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가운데 그 모든 어려움을 마음 속에 기억하고 하나님을 마음에 모셨습니다. 그 순간에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마음 깊은 곳에 임합니다. 그러자 그의 고난이 “오히려” 소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힘입니다.
우리의 삶이나 세상이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지난 2년여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분들, 마음에 상함을 경험하신 이웃들이 너무 많습니다. 쑥과 담즙과 같은 시간을 보낸 분들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임하길 기도합니다. 우리 각자의 삶에 어려움이 오히려 소망이 되는 역전이 일어나길 기대합니다. -河-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사야 60장 1-3절
2021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는 표어로 올해를 시작했습니다. 연초만 해도 소띠해인 2021년에 온 세상이 다시 일어나서 뚜벅뚜벅 주어진 길을 걸어갈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백신 접종이 시작되면서 바이러스 전파도 둔화되고 결국에는 마스크까지 벗고 일상을 회복할 것을 기대했지만, 델타 바이러스와 최근의 오미크론 바이러스까지 변이가 등장하면서 올해 표어가 무색할 정도로 계속되는 팬데믹을 살고 있습니다.
2년여의 힘겨운 기간이었지만 참빛 식구들 모두 각자의 자리를 지키시고 꿋꿋하게 견디셨습니다. 우리 교회도 주님의 은혜와 인도하심, 성도님들의 헌신과 섬김에 힘입어 어려운 시기를 잘 지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사망의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다윗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팬데믹이라는 긴 기간을 지나고 있지만, 우리 역시 어떤 어려움과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다윗과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으로 올 한 해도 살았습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있는 힘입니다. 믿음 가운데 누리는 확신입니다.
올해도 주일 예배에서 신구약 성경을 오가면서 연속해서 말씀을 나눴습니다. 새해 첫 달의 시편 91편 말씀은 전염병을 비롯한 재앙에서 자기 백성을 지키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룻기를 통해서 삶 속에 임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예레미야서를 통해서 우리 마음속에 새겨 주시는 하나님의 새 언약을, 수로보니게 여인의 특별한 믿음을, 하박국 선지자를 통해서 회의하면서도 질문하고 끝까지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구도자의 마음을, 빌레몬서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용서와 회복을 배웠습니다.
그동안 나눈 말씀을 모두 기억할 수 없지만, 주일마다 나눈 말씀이 생명의 양식이 되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한 해 동안 참빛 식구들과 하나님 말씀을 나눌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주일 설교가 유튜브에 남아 있기에 언제든지 다시 들을 수 있는 것도 팬데믹이 우리에게 준 선물입니다.
2021년 한 해 동안 지나온 발걸음이 결코 쉽지 않았지만, 우리와 함께 하시고 보호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기 원합니다. 룻에게 임했던 깜짝 놀랄 만한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했다면 하나님께 깊이 감사하기 원합니다.
주님의 은혜에 다시 감사드립니다. 올 한 해도 변함없이 함께 해 주신 참빛 식구들께도 감사드립니다. 하박국처럼 주님 한 분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주의 백성이 되기 원합니다.-河-
평화의 왕/ 누가복음 2장 8-20절
2004년에는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남아시아에 쓰나미가 덮쳐서 2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날은 성탄절 다음 날이었습니다. 성탄절 휴가로 태국을 비롯한 휴양지에 모였던 사람들이 대부분 희생되었기에 더욱더 안타까웠습니다.
올해도 성탄절을 보름 정도 앞두고 미국 중서부에 토네이도가 밀어닥쳤습니다. 토네이도 경보에 미리 몸을 피했음에도 불구하고 100여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집을 비롯한 재산을 잃은 사람들은 매우 많습니다. 이재민들에게 2021년 성탄절은 기쁜 날이 아니라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슬픈 날이 될 것 같습니다.
2천년 전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실 때도 세상은 혼란스러웠습니다.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고, 예루살렘에는 이두메(에돔) 출신 헤롯 일가가 로마의 섭정 아래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 이권을 챙기는 데 혈안이 되었고,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은 로마 황제에게 인정받는 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소위 암 하렛츠(땅의 백성)라고 불리는 일반 백성들은 굶주리고 지쳐 있었습니다. 희망이 없었습니다.
들에서 양을 치고 있던 목자들도 비슷한 처지의 백성들이었습니다. 밤에 양을 칠 정도면 목자들 가운데서도 그들의 순번이 꽤 아래에 속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탄생을 들에 있던 목자들에게 제일 먼저 알리셨습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2:7).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 온 세상을 구할 그리스도께서 나셨다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목자들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서 경배하고 베들레헴 사람들에게 구주가 태어났다고 천사들이 알려준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천군 천사가 하늘에서 찬양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예수님께서 세상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평화가 없는 세상이었기에 예수님께서 오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평화를 찾기 어렵습니다. 자연재해와 전염병 그리고 사람들 마음속에 깃든 시기와 질투 그리고 분쟁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아름다운 세상을 먹물처럼 흐려 놓았습니다. 그래서 평화의 주님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합니다.
다시 한번 주님의 평화를 구합니다. 우리 마음에 임한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를 세상에 전하기 원합니다. 천군 천사처럼 하늘에서는 영광, 땅에서는 평화라고 찬양하면서 성탄절을 맞기 원합니다. -河-
사랑받는 형제 빌레몬 (6): 그리스도 안에서/ 빌레몬 1장 19-25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