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에서 기다림으로

Happy Thanksgiving!

 

1.

제가 처음 담임 목회를 시작했던

인디애나 교회는 장소와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서

수요 예배를 드리지 못했기에

수요 예배 대신에 목회서신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1, 2, 3 숫자로 단락을 구분하면서 서신을 작성했습니다.

 

그때까지 포함하면, 목회하는 내내 수요일 또는 목요일마다

교인들에게 목회서신을 보낸 셈입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교인들께 작은 힘을 보태기 위해서

서신을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어느덧 25년이 지났습니다.

시간이 빠름도 실감하고,

작은 것이라도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함을 스스로 배웁니다.

 

목요일마다 이-메일 서신을 보내기에

매년 11월 넷째 주 목요일 추수감사절을 비껴갈 수 없습니다.

대개 한 해의 감사한 일을 돌아보면서 준비합니다.

 

2025년 올해는

담임 목회를 시작한 지 25년,

샌프란 우리 교회에서의 목회 20년을 맞는 해이기에

그동안의 여정을 돌아보게 되고, 더욱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2.

지난주 설교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를 제안했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참되고 선하고 아름답게 인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물론,

힘들 때 조용히 다가와서

손을 꼭 잡아 주었던 이웃도 기억하길 원했습니다.

 

우리를 믿어주고,

힘들 때 함께 해주고

지친 손을 잡아 주면서 위로와 힘을 주었던 손,

예수님께서 보내주신 손길이었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며,

좋으신 하나님과 사랑하는 친지들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는 감사의 기념비를 세우는 마음으로

추수감사절을 뜻깊게 보내기 원합니다.

 

3.

감사절이 끝나면,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Advent)이 시작됩니다.

 

올해는 강단에 네 개의 촛불도 준비했습니다.

매주 하나씩 켜면서 온 교회가 예수님을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일찌감치 크리스마스트리도 준비해 놓았습니다.

주일에 부모님들과 아이들이 트리를 장식하면서

교회에서의 특별한 추억을 쌓고

성탄을 기다릴 것을 눈에 그리니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세상이 많이 어지럽습니다.

무엇보다 사분오열 갈라져 있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많이 그립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예수님의 마음을 갖고 살아갈 때

세상에 온전한 샬롬이 임할 것임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시간이기에 더욱 마음이 설렙니다.

 

2025년 성탄에는

우리들과 세상에 어떤 기쁜 소식을 갖고 오실는지요!

 

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 (렘33:15)

 

하나님,

감사함으로 우리 주님을 기다리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1. 27 이-메일 목회 서신)

온전함

좋은 아침입니다.

 

1.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의 마음에 이어서

지난주부터 예수님의 손과 발에 관한

연속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생각은 “생명”

예수님 마음은 “긍휼”

예수님의 손과 발은 “샬롬(평강)”이

핵심 메시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대한 첫 번째 말씀은

나병 환자를 고치신 사건이었습니다.

한 나병 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무릎을 꿇고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막1:40)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41절)고 말씀하시며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던 그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구약 시대는 물론 예수님 당시에도

나병처럼 보기 흉하고 치명적인 질병은

죄의 결과라고 보았습니다.

부정하였기에 그가 만지는 모든 것이 부정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손을 내밀어 만지시며

깨끗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인 것입니다.

그렇게 그를 살리셨습니다.

 

2.

마가복음은 이 사람을

나병환자(레프로스, leper)라고 정확히 알려줍니다.

 

그런데 나병에 대한 규정으로 알려진

레위기 13장 본문에는 “나병”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나병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가

오늘 날의 한센병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새번역은 “악성 피부병”이라고 옮겼습니다.

 

예배 후 한 집사님께서

레위기에서 묘사한 증상들이

오늘날 피부암에 가까운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피부암은 전염되지 않는데,

억울하게 격리되어서 암과 싸우는 경우도 생겼을 것 같습니다.

 

이처럼, 성경의 용어나 표현은

성경이 쓰일 당시에 통용되던 것입니다.

요즘의 과학이나 의학에 비교하면, 턱없이 미천한 수준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고 이해할 때는

성경이 쓰일 당시로 꼭 찾아가서

그 당시에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다”는 교리에 묶여서

당시의 상황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하나님 말씀으로 읽는 것은 위험합니다.

 

반드시

성경이 쓰여진 당시의 세계관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3.

레위기에서 피부에 발생한 질환과

그로 인해서 옷이나 물건까지 부정하다고 엄격히 규정한 것은,

하나님 백성의 “온전함(wholeness)”과 관련됩니다.

 

질환으로 인해서 피부가 온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나갈 수 없다고 규정한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의학이 발달한 시대에는

이 규정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습니다.

질병을 하나님의 벌 또는 저주라고 봐서도 안 됩니다.

올바른 성경 해석이 필요한 지점입니다.

 

구약의 율법이 ‘온전함’을 지향하듯이

우리의 성경 읽기 역시  ‘온전함’을 향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올바른 해석과 바른 신앙을 갖출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 5:48)

 

하나님,

매사에 온전함을 추구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1. 20 이-메일 목회 서신)

애통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에는

예수님의 마음에 관한 연속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의 울음, 예수님의 울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잃어버리고

몰락의 길로 향하는 예루살렘을 보고 우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러 가시면서

예수님의 의도를 모르니 슬퍼하는 친지들과 함께 우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날 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면서 우셨을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울음을 직접 언급한 적은 없지만,

아담과 이브에게 가죽옷을 입혀서 에덴을 내보내는 순간

하나님은 속으로 우셨을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직전, 인간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면서

하나님은 우셨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을 향해서 주야로 울었던

예레미야 선지자의 울음은 곧 하나님의 울음입니다.

 

2.

하나님께서 우시고, 예수님께서 우셨으니

우리 역시 우는 것이 결코 부끄러움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는 진실함도

울음 속에 들어 있습니다.

경우에 맞는 울음은 숭고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 팔복(八福)에서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복이 있다는 것은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젊어서는

애통하는 자의 복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말씀과도 부딪쳤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애통(哀痛)의 의미가 새롭고 깊게 다가옵니다.

 

‘애통’에 해당하는 헬라어 <펜토스>는

사랑하는 친지가 죽었을 때 느끼는 비통(悲痛),

자기의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면서 흐느끼는 통회(痛悔),

삶 속에서 닥치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모두 포함합니다.

 

인생이 우리 동네 날씨처럼 항상 맑을 수 없습니다.

열심히 살아도, 잘못이 없어도,

갑자기 밀어닥치는 손님처럼

애통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때는 마음껏 울 수 있습니다.

서러움에 흐느낄 수 있습니다.

소리치면서 엉엉 울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도 우셨고, 예수님도 우셨으니

애통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3.

저도 예전에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교회 강단에 엎드려서 한없이 울던 때가 있었습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가셨기에

아내 역시 자리에서 울면서 함께 애통했습니다.

 

그때 누군가 제 옆에 와서

제 어깨에 손을 올리면서 함께 울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돌아보니, 우리 교회 교육 전도사님이었습니다.

베트남 출신의 전도사가 새벽에 일부러 찾아와서 함께 울어준 것입니다.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울 수 있습니다.

 

우리 곁에서 함께 우시는 예수님이 되어서

누군가와 함께 우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힘이 될까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태 5:4)

 

 

하나님,

애통하는 자들을 위로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1. 13 이-메일 목회 서신)

방심은 금물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10월 19일 주일 오전 9시 30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람객이 방문하는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도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은 매해 8백만 명 이상이 방문합니다.

예약하지 않고는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문을 열자마자 수많은 관람객이 몰리는 곳입니다.

철저한 보안이나 경비는 필수입니다.

 

그런데, 박물관이 문을 열고 30분이 지난

휴일 아침 9시 30분에 도난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네 명의 범인은

박물관을 보수 중인 인부처럼 형광색 조끼를 입고

사다리차를 이용해서 귀중품들이 전시된 아폴로관으로 침투해서

전시해 놓은 유리 진열장을 부수고

나폴레옹이 왕비에게 선물한 사파이어 목걸이를 비롯한

귀중품 아홉 점을 훔친 후, 다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서

스쿠터를 타고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이들이 도난에 필요한 시간은 7분 내외였습니다.

 

도둑들이 훔친 귀중품들은 값을 매길 수 문화유산입니다.

대략 1억 달러로 추산합니다.

두 명은 잡혔는데, 훔쳐 간 귀중품의 행방은 묘연합니다.

 

밤중이나 새벽도 아닌

대낮에 세계 최고의 루브르 박물관이 도난당한 것은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은 이번만 도난 사건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1912년에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가장 유명한

모나리자가 이탈리아 출신 인부에 의해서 도난당했다가

2년 만에 다시 돌아온 경우도 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 도난사건 후에

귀중품이 전시되어 있던 아폴로관에

더 많은 관람객들이 몰린다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2.

세우기는 어려워도 허물기는 쉽습니다.

철저하게 대비하고 지키지 않으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될 때가 많습니다.

 

대낮에 발생한 루브르 박물관 도난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도둑들의 박물관 침입, 탈취와 도주까지 모든 과정은

영화 같은 극적인 장면도 없이 자연스러웠습니다.

성능이 떨어진 CCTV가 설치되었다는

박물관 책임자의 변명은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키지 않으시면

파숫군의 밤샘 지킴이 헛되다는 시편 말씀이 생각납니다.

물론 철저히 준비해야 하지만,

마음먹고 달려드니 세계 최고의 박물관도 털리니 말입니다.

 

새달이 시작되었습니다.

대부분 조심조심 새달을 시작합니다.

기도로 시작할 수밖에 없는 우리네 인생입니다.

방심은 금물입니다.

 

낮의 해가 상하지 않고

밤의 달이 해치지 않도록 지키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와 말씀으로 신실하게 새달을 살기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시편 127편 1절)

 

하나님,

깨어 있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1. 6 이-메일 목회 서신)

팁의 유래

좋은 아침입니다.

 

1.

미국에 살면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문화가 ‘팁(tip)’입니다.

팁을 지불하는 것이 당연하고

팁이 없는 한국에 가면 뭔가 허전할 정도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많은 것을 바꿔 놓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팁플레이션(tipflation)”이라고 불릴 정도로 높아진 팁입니다.

 

27년 전 처음 미국에 왔을 때,

보통 감사의 표시로 5-10%의 팁을 주었기에

팁이 부담되지 않았습니다.

커피처럼 간단한 것을 살 때는

특별한 서비스를 받는 경우를 제외하면 팁을 주지 않았습니다.

 

요즘 우리 동네에서는 18-25%의 팁이 계산기에 찍혀 나옵니다.

간단한 것을 사도 자동으로 팁을 줄 것인지 물어보니

난감할 때가 많습니다. 솔직히 큰 부담입니다.

 

2.

팁의 유래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저는 팁이 미국의 유일한 전통인 줄 알고 있었는데

16-17세기 유럽에서 시작되었답니다.

귀족들이 서비스 종사자들에게

감사의 표시를 한 것이 시작이랍니다.

 

영국의 선술집에서

TIP(to insure promptitude)이라고 쓰인 통에 돈을 넣으면

빠른 서비스를 제공했다는 전통에서

TIP이라는 용어가 나왔다고 봅니다.

 

유럽을 방문했던 미국인들이

팁을 주는 사람은 뭔가 있어 보이고

하찮은 일을 하는 사람을 도왔다는 자부심도 들어서

미국에 도입합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남북전쟁과 노예 해방이 되면서

팁은 석방된 노예들의 임금을 보장해 주는 데 이용됩니다.

주인들이 따로 임금을 주지 않으니

종업원들은 팁으로 먹고살아야 했습니다.

약간 서글픈 미국식 팁의 역사입니다.

 

3.

미국 연방 정부에서는

팁을 받는 종업원의 최소 임금을 $2.13으로 규정하고

팁 수입이 적으면 고용주가 $5.15의 크레딧을 주어서

최소 임금 $7.25를 맞춰야 합니다. 그리 높지 않습니다.

 

캘리포니아는 연방 정부 가이드라인을 따르지 않습니다.

무조건 캘리포니아(또는 각 카운티나 시) 최소 임금을 보장해야 합니다.

현재 $16.50입니다. 팁은 종업원들에게 그대로 돌아갑니다.

연방 정부 가이드라인에 비하면 꽤- 파격적입니다.

 

우리가 사는 캘리포니아는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하는 법률이나 규정이 많이 있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치우치지 않는다면 좋은 전통입니다.

 

노예에서 해방된 노동자들에게

따로 임금을 주지 않고 팁으로 먹고살게 했다는

팁의 역사가 씁쓸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습관적으로 행하는 많은 것에 특별한 역사가 있습니다.

힘없는 민초들의 서러움과 눈물이 베어 있기도 합니다.

 

불평하거나 무작정 반대하기보다

세심하게 살피고, 어려운 이웃을 배려하면서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기 원합니다.

 

p.s.

요즘 팁의 비율이 너무 높습니다.

현실적으로 조정되거나,

팁에 걸맞은 훌륭한 서비스를 제공받아서

팁이 아깝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

Whatever you wish that others would do to you, do also to them (Mt 7:12)

 

하나님,

서로에게 기쁨이 되는 세상이 되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0. 30 이-메일 목회 서신)

깨달음

좋은 아침입니다.

 

1.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은혜 받았다”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목사 입장에서는 설교나 예배 후에

“은혜받았습니다”는 말을 들으면 내심 흐뭇하곤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은혜받았다는 것은

종종 감정이 움직였다는 의미로 쓰이곤 합니다.

 

설교를 비롯한 예배 시간에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뜨거워질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나 기도할 때도

비슷한 감정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은혜를 감정과 연결하다 보니

기복이 심합니다.

 

자기가 듣고 싶은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고

은혜받았다고 말하는

주관적인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감정이 동하지 않거나 자기 확증이 되지 않으면,

좋은 말씀이나 예배조차 ‘은혜’로 느끼지 못합니다.

 

2.

저는 ‘은혜받았다’는 표현을

‘깨달음’으로 이해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어떤 말씀에

커다란 깨달음이 임했습니다.

예배나 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깨달음은 감정을 동반할 수도 있지만,

감정과는 다른 ‘특별한 경험’입니다.

때로는 낯설거나 불편한 말씀을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깨달음은 변화를 가져옵니다.

큰 깨달음은 우리의 존재 자체를 변화시켜

새사람으로 거듭 나게 하고,

세상을 보는 가치관을 바꿉니다.

새로운 세상에 들어서는 경험입니다.

 

3.

지난주에 제가 존경하던

필리스 트리블(Phyllis Trible)이라는

여성 구약학자께서 92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저는 90년 중반 신학교 시절, 트리블 교수님의 저서

<공포의 텍스트, Text and Terror>를 처음 읽었습니다.

100쪽 남짓한 작은 책을 통해서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평소에 제가 무심코 지나쳤던

구약 성경의 네 여성(하갈, 다말, 사사기의 어떤 여성, 입다의 딸)에 관한

교수님의 해석에 무릎을 쳤습니다.

 

그동안 저를 비롯한 기독교인들이

하찮은 네 명의 여성에게 얼마나 무관심했고

가부장적인 입장에서 또는 기독교 전통 속에서

이들의 아픔을 지나쳤는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들도 사랑하셨습니다.

성경은 이들을 위해서 큰 목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보는 눈을 새롭게 뜰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성경 본문 자체에 집중하면서, 성경 본문이 우리에게 건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가르쳐 준 ‘교과서(text)’였습니다.

 

트리블 교수님의 소천 소식을 듣고,

책꽂이에서 교수님의 책을 꺼내서 다시 훑어보았습니다.

곳곳에 밑줄이 쳐져 있었습니다. 깨달음의 흔적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은혜가 필요합니다.

특별히, 우리의 존재와 삶을 변화시키는

깨달음의 은혜가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 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창 21:19)

 

하나님,

눈을 밝히셔서 깨달음의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0. 23 이-메일 목회 서신)

꿈을 쫓는 인생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에 공부했던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을 통해서 복음을 듣게 될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요17:20).

 

이때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이었습니다.

3년 동안 동고동락했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기 위해서 뛰쳐나갔습니다.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고백했던 베드로조차

곧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 마음도 비통해서

잠시 후 겟세마네 동산에 가시면

“이 잔을 내게서 치워달라”고 기도하실 겁니다.

물론, 아버지 뜻이 이뤄지길 기도하시고

말씀대로 십자가의 길을 가십니다.

 

이러한 순간에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 속에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모습은 눈에 그리셨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을 통해서,

복음을 전해 들을

후대의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예수님은

미래를 내다보시고 꿈을 꾸시는 비전가(visionary)셨습니다.

 

2.

‘꿈을 꾸는 사람’을 생각하면

창세기의 요셉이 떠오릅니다.

 

형제들이 요셉을 보고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라고 했습니다.

형제들은 요셉이 꾼 꿈을 가리켰지만,

성경을 읽는 우리는 믿음의 사람 ‘비전가’ 요셉을 떠올립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마음에 품었습니다.

이집트에 종으로 팔려가고, 감옥에 갇히는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꿈을 잃지 않고, 꿈을 현실로 만들었습니다.

 

만약 요셉이

형제들의 잘못과 그들을 향한 미움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이집트에서의 성공도,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일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순간순간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앞으로 나갔던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3.

꿈을 쫓는 사람은

미래를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과거에 미련을 갖고

자책하거나 후회하는 것을 자제합니다.

 

아쉬움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누구나 실수하고 실패합니다.

누군가를 탓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절대 가룟 유다 탓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요셉도 형제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형제들을 통해서 이집트에 팔려 온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꿈꾸는 사람은 원망 대신 감사를,

절망 대신 소망을 붙듭니다.

우리도 그 길을 걷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을 가슴에 품고

희망을 노래하며 하루를 시작합시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롬15:13)

 

하나님,

희망을 노래하고

꿈을 쫓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0. 16 이-메일 목회 서신)

감정 다스리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소위 근대(modernism)라고 불리던 시대에는

인간의 이성(reason)이 중요했습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했고, 실험을 통해서 검증했습니다.

사실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려고 애썼습니다.

 

근대 이후의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에서는

이성보다 “감정(emotion)”이 앞서고 있습니다.

생각하는 것에 앞서서 느낌이 와야 합니다.

감이 잡혀야 합니다. 마음에 다가와야 합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차근차근 조목조목 필요한 것을 점검하면서

사람을 사귀지 않습니다.

느낌이 오면, 마음이 통하면 곧바로 사귑니다.

청춘남녀의 연애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감정팔이”라는 용어도 생겼습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호소하면서

그 사람의 동의와 도움을 얻어내는 행위를 뜻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사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거나

관계를 형성하려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진 용어입니다.

 

2.

기독교 신앙은 어떨까요?

우리나라 기독교는, 거의 초반부터

감성에 호소하면서 발전해 왔습니다.

“은혜 받았다”는 고백은 대부분 감정에 기초합니다.

 

제가 목회를 시작하던 90년대 중반부터

무작정 감정적으로 믿지 말고, 생각하면서 공부하면서

“질문하는 신앙” “이해하는 신앙”을 갖기를

부탁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기독교가 감정에 호소하면서

발전하고 부흥을 경험하다 보니,

냄비 같은 신앙에 빠지기 쉽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에 관해서 이야기하라고 하면,

몇 마디 하지 못하고 말문이 막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3.

감정은 좋은 것입니다.

‘느낌’이 없고 ‘생각’만 있는 세상은 무미건조합니다.

 

그런데, 감정은 다스림의 대상입니다.

올바른 감정은 우리의 신앙과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실제로 만들어 줍니다. 확신을 줍니다.

 

반면, 그릇된 감정은

“자기애(自己愛)”에 빠지거나

다른 사람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그릇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변화가 심합니다.

 

영성가 리처드 로(Richard Rohr)는

우리의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서 전망대에 올라가기를 권합니다.

그가 말하는 전망대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탄식하면서 기도하실 정도로 감정이 풍부하신

성령 하나님의 자리(전망대)에 올라가서 우리 자신을 살피라는 것입니다.

 

필요한 감정인지,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감정인지,

집착하는 태도에서 나온 감정은 아닌지.

감성팔이처럼 남을 의식한 감정은 아닌지,

성령 하나님의 자리에서, 성령 하나님과 더불어 살피라는 권면입니다.

 

감정이 중요한 시대를 살다 보니

신앙과 삶이 감정에 따라 춤을 춥니다.

감정의 폭풍에 휘말리면,

바다 위에 떠 있는 조각배처럼 요동칩니다.

 

하나님 안에서 감정을 조절하고

올바르게 표현하고, 누리길 원합니다.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성숙함까지 갖춘다면

정말 근사한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골로새서 3장 15절)

 

 

하나님,

마음속에 평안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0. 9 이-메일 목회 서신)

불꽃 야구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유튜브를 통해서

<불꽃야구>라는 프로그램을 자주 시청합니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대한민국 최고였던 프로야구 선수들이 등장합니다.

저는 그 선수들이 현역으로 활동하던 모습을 보았기에

친숙하고 반갑게 경기를 시청하고 있습니다.

 

팀에는 유망주 젊은 선수들도 있습니다.

프로 야구팀에 들어가지 못한

대학교 또는 사회인 야구팀 출신들입니다.

 

은퇴한 선수들이나 젊은 선수들이나

열정이 넘칩니다.

특히 젊은 선수들은

레전드와 같은 선배들과 한 팀에서 운동하고 경기하는 것 자체가

특권이고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이번에 한 선수가 프로팀에 입단하는 경사도 있었습니다.

 

<불꽃 야구> 선수단의 감독은

야구의 신이라고 불렸던 김성근 감독입니다.

팔순이 넘으신 분입니다. 암 수술도 하셨던 분인데,

선수들을 지도하는 열정이 대단하십니다.

 

불꽃 야구팀이 경기하는 상대 팀들은

고등학교, 대학, 사회인 야구팀들입니다.

고등학교 선수들이 대한민국에서 최고였던 선배들과

한 운동장에서 경기한다는 것 자체가 영광일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불꽃야구 팀을 응원하는 팬들이 많아서

경기를 개방하는 날에는 운동장이 외야석까지 가득 찹니다.

응원 소리가 우렁찹니다.

 

은퇴한 선수들은 다시 듣는 관중들의 응원 소리에

가슴이 뛴다고 합니다.

고등학교나 대학팀 선수들이 그렇게 많은 관중들 앞에서

경기할 기회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선수가

진심으로 열심히 합니다.

감동입니다.

 

2.

무엇보다 저에게는 “불꽃”이라는

단어가 참 좋습니다.

 

매사에 불꽃이 꺼지면 안 됩니다.

에너지가 떨어지고, 하는 일에서 매너리즘에 빠지고

열정이 사라지면 인생 자체가 흔들립니다.

 

신앙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야 꾸역꾸역 불씨를 살리고

불꽃을 태우면서 이끌어가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신앙의 열정을 유지하고

불태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습관적으로 또는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기 십상입니다.

 

행여나 불꽃이 약해지고 있다면

다시 예전의 신앙 열정을 되찾아야 합니다.

가슴이 뛰던 순간을 다시 맞이해야 합니다.

 

한번 사는 인생이고, 이왕 믿는 신앙의 길입니다.

하루하루 신바람 나게, 흥이 넘치게 살고 믿어야지요!

 

관중이 가득 찬 운동장이 아니어도

우리의 인생과 신앙의 경주를 끝까지 지켜보시고

응원하시는 그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 앞에서 사는 것이다.

그것은 ‘코람 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삶을 사는 것이며,

청중을 의식하는 데서 돌이켜 오직 최후의 청중이요,

최고의 청중이신 하나님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오스 기니 <소명>-

 

 

하나님,

불꽃 인생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0. 2 이-메일 목회 서신)

두 예술가

좋은 아침입니다.

 

1.

키에르케고르는 <사랑의 역사 Works of Love>에서

진정한 기독교, 진정한 신앙은

사랑의 실천에 있다고 강조합니다.

 

꽤 두꺼운 책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의 실천에 대해서

차근차근  알려줍니다.

 

<사랑의 역사>에 두 예술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사람은 세계를 두루 다니면서

자신이 그리고 싶은 모델을 찾았지만,

끝내 찾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자신이 그려보고 싶은 얼굴을

한 명도 찾지 못한 것입니다.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마다

한두 가지 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헛수고만 하고 돌아왔습니다.

 

다른 예술가는 외국을 여행해 본 적도 없습니다.

자기를 예술가라고 부르는 것도 부끄럽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 친지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상에서 매일 만나는 가까운 친지들,

“거기에 있는 어떤 얼굴에서도 하찮은 얼굴이나

결함투성이의 얼굴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아름답고 이상적인 모습을 더 많이 찾아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예술 작업에 만족했고 행복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두 번째 사람이 진정한 예술가라고 평가합니다.

예술 작품을 그리려는 사람이

흠을 찾아내고, 모든 것이 완벽하지 않다고

까다롭게 따지는 것은 슬픈 일이라고 했습니다.

 

반면, 사랑할 대상의 결함이나 단점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사람들 속에서 아름다운 것들, 장점을 찾아내서

그것을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2.

키에르케고르가 두 예술가의 이야기를 소개한 대목은
“우리가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는 의무”

라는 장(障, chapter)에 나옵니다:

 

“우리의 과업은 사랑할 대상을 찾는 일이 아니라

이미 주어졌거나 선택된 대상에서 사랑할 만한 것을 찾고,

비록 상대가 어떻게 변한다 해도

그 상대를 계속 사랑스러운 존재로 생각하는 일이다.”

이러한 사랑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했습니다.

동시에,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한 것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라고 했습니다.

 

진실함을 찾기 힘든 시대가 되었습니다.

기준이 무너지고, 너무 쉽게 서로를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그리고 갈라섭니다.

 

때로는 너무 근사한 것, 이상적인 것,

세상에서 찾기 어려운 것을 끊임없이 쫓습니다.

어쩌면 저 멀리 있는 무지개와 같은 것인데 말입니다.

 

없는 것을 쫓기보다,

완벽한 것을 기다리며 찾기보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가까이 있는 이웃들의 장점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길 원합니다.

 

오늘 하루,

참된 예술가로 살아갑시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요일 4:12)

 

하나님,

일상에 감사하고 사랑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9. 25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