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

2026년4월 5일 주일: 부활을 사는 것

https://www.youtube.com/watch?v=LKSYYMPVy10

 

 

좋은 아침입니다.

 

1.

우리 동네 주택가에서 조금 벗어나면

시에서 조성해 놓은 작은 공원이 있습니다.

산책로를 제외하면

잡초들로 방치되다시피 하던 곳이었는데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면서 시에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묘목을 갖다 심었습니다.

묘목 아래 사람들의 명패가 있는 것을 보니,

기부를 받아 수목 사업을 한 것 같습니다.

 

그전에도 일년에 한두 번 작은 트랙터를 동원해서

잡초들을 제거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2년 전, 잡초를 모두 없애더니

작은 나무 조각(우드칩)으로 그 넓은 공터를 덮었습니다.

 

그렇게 일 년 정도는 묘목만 있고

잡초는 거의 자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올해부터는 잡초가 나무 조각을 뚫고 나왔습니다.

예전처럼 들풀이 무성해졌습니다.

 

2.

매일 산책하는 곳이니

시가 관리하기 전의 모습,

관리를 시작한 모습,

그리고 지금 다시 원래로 돌아간 모습까지

모두 지켜보았습니다.

 

잡초라고 불리는

들풀의 강인함을 새삼 느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들풀 사이로 노랗고 하얀 들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이 자연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잠깐 피고 사라질 들꽃입니다.

누군가 특별히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그저  잡초일 뿐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관심을 갖고 바라보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습니다.

두껍게 덮어놓은 나뭇가지를 뚫고 나온

잡초들이 벌이는 승리의 향연 같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잠깐 있다가 사라질 들풀도

기르시고 입히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들에 핀 꽃에도 관심을 가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하물며 자기 백성을

먹이시고 입히시지 않겠냐는 말씀입니다.

 

  1. S. 엘리엇은 <황무지, 1922>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다”라고 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4월의 봄은 한 겨울의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올해 4월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세상은 패권 경쟁에 들어섰고,

이미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습니다.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니

우리 서민의 삶도 녹록치 않습니다.

 

이런 때일 수록

두껍게 덮인 나무 조각을 뚫고 올라와

예쁜 꽃을 피우는 들풀의 강인함을 닮고 싶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는 생명력입니다.

 

들풀까지 입히시고 기르시는

우리 하나님이 계시기에

가능한 소망이고 확신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마 6:30)

 

하나님,

들풀처럼 살아남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6. 4 9 이-메일 목회 서신)

힌네니

좋은 아침입니다.

 

1.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모리아 산의 사건을,

아브라함의 입장과 이삭의 입장에서

두 주에 걸쳐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을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상식과 윤리, 도덕을 존중하시는 하나님도

발견하기 힘든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부조리하게 보이는 하나님의 명령에

두말없이 순종했습니다.

 

지난주에는

노년의 아브라함이 하나님 명령을 따르기 위해,

10대에 접어든 아들 이삭의 협조가

꼭 필요했음을 나눴습니다.

 

이삭에게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신

예수님의 모습도 발견했습니다.

 

2.

아브라함과 이삭에 관한 설교를 마친 후,

제 마음에 계속 머무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뿐인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실 때,

그리고 칼을 들고 이삭을 죽이려는 순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아브라함이 대답한 한 마디 히브리어  <힌네니>였습니다.

 

히브리어 <힌네니>는

“보시옵소서. 내가 여기있습니다”

“말씀하옵소서. 제가 듣겠습니다” 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뿐 아니라,

모세, 사무엘, 이사야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에 <힌네니>라고 대답했습니다.

 

3.

<힌네니>,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Here I am)”는

하나님 백성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드릴 수 있는

최상의 언어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나’라는 자아도 내려놓았습니다.

어떤 주장이나 생각, 제안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무장해제하고

드리는 고백이 바로 <힌네니>입니다.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힌네니>의 정신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모든 것을 아버지 뜻에 맡기셨습니다.

 

우리도 <힌네니>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말씀하옵소서”라고 고백하며

주님 앞에 나가길 원합니다.

 

내 생각이나 세상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고난 주간,

아니 오늘 하루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여 만일 만하시거든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39)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Here I am, Lord)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6. 4 2 이-메일 목회 서신)

두려움과 떨림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에는 창세기 22장,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

하나님 말씀대로, 하나 뿐인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인신제사를 금지하는 성경 전체의 흐름,

오늘날의 상식과 윤리로 보아도

이해하기 힘든 명령입니다.

 

그런데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두말없이 길을 떠났습니다.

아들을 결박하여 제단에 올려놓고

칼을 들어 죽이려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를 멈추시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제물로 드릴 양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여기서 “여호와 이레(예비하시는 하나님)”가 나왔습니다.

 

2.

키에르케고르는 <공포와 전율, Fear and Trembling>에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기사(knight of faith)”로 부르면서,

그의 믿음은 보편적인 윤리와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은 상식이나 도덕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선 “개별자”의 결단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일반적인 교훈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매우 고유한 사명입니다.

이를 보편화하여 모든 신앙인에게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도

쉽게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이 사건을 근거로 하나님을 시험하시는 분으로 규정하면,

신앙이 “두려움과 떨림”에 매일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잘못 형성될 가능성도 큽니다.

 

이처럼 키에르케고르는 이 사건을

하나님의 일반적인 방식으로 확대하기보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특별한 믿음의 사건으로

신중하게 이해할 것을 제안합니다.

 

3.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해야 할까요?

 

첫째, 이 말씀을 서둘러 결론 내리지 말고

아브라함의 이야기 속으로 천천히 들어가야 합니다.

모리아 산을 향하는 두렵고 떨렸을 여정,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 이삭을 묶고(아케다, 결박)

칼을 드는 마지막 순간까지

성경 본문 속으로 빨려 들어가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두렵고 떨리는 믿음이 무엇인지,

아브라함 믿음의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시험을 일반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괴롭히시는 분이 아닙니다.

설령, 우리에게 시험과 시련을 주셔도

아브라함에서 보듯이 분명한 목적을 이루십니다.

 

셋째, 믿음의 힘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상식과 한계를 넘어서는 자유를 경험하게 합니다.

신비의 세계입니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했던

“믿음의 도약(leap of faith)”을 이루기 원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한 걸음 더 뛰어오르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하나님,

온전한 믿음의 길을 걷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6. 3 26 이-메일 목회 서신)

기쁜 날

좋은 아침입니다.

 

1.

전쟁이 점점 격화되는 요즘입니다.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습니다.

우리 동네 주유소의 일반 개스(휘발류)값이

갤런당 5불 후반대를 찍은 곳도 있습니다.

 

2008년 금융위기 때,

샌프란 기름값이 5불 가까이 올랐습니다.

제가 처음 샌프란에 왔던 2005년보다 두 배나 오른 것입니다.

그때는 도로에 차가 거의 없을 정도였습니다.

 

미국이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심각했습니다.

부동산 가격은 반으로 떨어지고,

수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은퇴 계좌의 주식은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위기감을 함께 느끼며

함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고 3-4년이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경제는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미국의 저력을 보는 듯했습니다.

 

그러다가, 코비드 팬데믹을 지나며

많은 것이 왜곡되었습니다.

빈부 격차는 K자형으로

사회 전반에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전쟁까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간신히 유지되던 세계 평화와 질서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미국의 물가는 계속 치솟고 있습니다.

K자의 아래쪽에 계신 분들의 어려움은 심각합니다.

 

그래도 좋은 날은 올 것입니다.

당장은 멍이 들고, 심한 경우 피가 흐르는 상처를 입더라도

미국이라는 나라는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세상이

펼쳐질지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 같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더 힘겹게 살아가게 될까 염려됩니다.

 

2.

세상이 혼란하고

안타까운 일들이 계속 일어나니 마음이 무겁습니다.

쏟아지는 뉴스를 보며

그저 멍하니 앉아 있을 때가 많습니다.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몇일, 찬송가 285장 “주의 말씀 받은 그날”을

계속 흥얼거리고 있습니다: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뜬금없어 보일 수 있지만,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를 씻어 주시고

악한 세력을 물리치고 승리하신

우리 주 예수님의 능력이 온 세상에 임하길 간절히 바랍니다.

 

구속(redemption), 구원(salvation)의 은혜와 능력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실제로’ 임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정말 기쁜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모두에게 기쁜 날이 되기를 원합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롬15:13)

 

하나님,

세상 모든 사람이 함께 기뻐할 날이

속히 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6. 3 19 이-메일 목회 서신)

쓴 나물

좋은 아침입니다.

 

1.

저는 한쪽 귀는 거의 들리지 않지만,

냄새를 맡는 후각과 맛을 보는 미각은

그런대로 괜찮습니다.

 

스타벅스를 비롯한 커피숍에 가득한

커피 향기를 좋아합니다.

한국에서는 한의원 약재 냄새도 좋아했습니다.ㅎㅎ

 

제가 좋아하는 냄새와 맛 가운데 하나가

‘쓴맛’입니다.

쓴맛이 나는 베이비 아루굴라(arugula)를 아주 좋아합니다.

신기하게도 먹고 나면 뒷맛이 깔끔합니다.

 

한번은 아마존에서

민들레 뿌리를 말린 차를 발견했습니다.

유기농(organic) 루마니아 산이라고 했습니다.

민들레 뿌리의 쓴맛이 우러난 차라니,

‘유레카’를 외치며 서둘러 주문했습니다.

 

배달되자마자 설레는 마음으로

봉지를 뜯어 차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쓴맛을 기대했건만, 그냥 풀 맛입니다.

나뭇가지를 말려 놓은 맛입니다.

 

알고 보니

반품도 되지 않는 물건이었습니다.

그래도 억울해서 아마존에 항의했더니

그냥 갖고 있거나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라면서

전부 환불해 주었습니다.

 

2.

성경에도

“쓴(bitter)” 것과 관련된 구절이 등장합니다.

 

잘못하여 받는 벌을

성경은 종종 “쓴 쑥”에 비유합니다.

고통스러운 형벌을 뜻합니다.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사람들에게 자신을 “마라(쓴, 고통)”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금의환향이 아니라, 쓴맛을 보고 돌아왔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해방된 것을 기억하는 유월절에

양을 잡은 고기와 함께 “쓴 나물”을 먹었습니다.

 

이집트에서 400년 동안 고생하던 때를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3.

솔직히, 쓴맛을 즐기는 제 개인적인 취향이

특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쓴맛에는

단맛이 주지 못하는 특별한 풍미가 있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는 달콤한 인생을 기대하지만,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은

쓴맛을 보았던 순간들입니다.

 

유월절에 쓴 나물을 먹게 하신 것은

고통스러웠던 때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

그리고 지금의 삶에 감사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지나온 ‘쓴 나물’의 시간을 기억할 때

현재 누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게 다가옵니다.

정말 힘들었던 때를 떠올리면

지금의 삶에 더욱 감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밤에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나물과 아울러 먹되 (출애굽기 12:8)

 

하나님,

나물 속에 깃든 은혜를 잊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6. 3 12 이-메일 목회 서신)

또 다시

1.

우리는 매 주일

하나님 앞에 모여 예배합니다.

구약과 유대교 전통에서는 안식일을 지켰지만,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날, 곧 주일에 모입니다.

 

그래서 일요일을 주일(主日),

주님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사순절 기간에도

주일은 40일에 세지 않을 만큼 기쁜 날입니다.

부활의 기쁨을 기억하는 생명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 안타깝게도,

많은 비극이 주일에 일어났습니다.

 

2004년 12월 26일 주일에는

인도양 지진과 쓰나미가 발생해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거나 실종되었습니다.

 

2005년에는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남부를 강타하여

뉴올리언스의 80%가 물에 잠겼고

수많은 이들이 삶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2017년 텍사스의 한 교회에서는

예배 중 총기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같은 해, 라스베이거스 총기 난사 사건 역시

주일 밤에 일어났습니다.

 

또한 2001년 10월 7일 주일,

미국과 영국 연합군이 아프가니스탄을 공습하면서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20년 동안 이어졌고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그리고 엊그제 3월 1일,

또다시 전쟁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미국과 이스라엘,

그리고 이란 사이의 무력 충돌이 현실이 된 것입니다.

 

지도자들은 단기간에 끝날 것이라고 말하지만,

전쟁은 쉽게 멈추지 않습니다.

양측 군인은 물론

민간인 사상자들까지 발생하고 있다는 보도에 마음이 무너집니다.

 

2.

주일 예배 전,

일찍 교회에 온 한 아이에게

또다시 전쟁이 일어나 마음이 슬프다고 했더니,

“우리 동네도 위험해요?”라고 물었습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일이니

괜찮을 것이라고 안심시키면서,

전쟁터에 있는 아이들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금세 표정이 어두워졌습니다.

 

전쟁은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갑니다.

생활 터전도 사라집니다.

우리는 뉴스에서 전쟁의 참상을 보고 듣지만,

누군가는 온몸으로 전쟁을 맞닥뜨리고 있습니다.

 

3.

지금, 힘없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뿐입니다.

 

추상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우리가 마음을 모아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 힘이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전쟁을 멈추게 하시고,

지도자들의 마음을 돌이키시며,

무고한 생명을 지켜주시기를 간절히 구합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생명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주님, 세상을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전쟁을 멈추시고 생명의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엡2:14)

 

하나님,

하루속히 전쟁이 멈추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6. 3 5 이-메일 목회 서신)

팀셸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설교에서는

우리 지역 출신 작가 존 스타인벡의 소설

<에덴의 동쪽>을 소개했습니다.

 

이 소설은 창세기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선과 악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공들이

자신의 운명을 선택해 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소설에서 형은 아론, 동생은 갈렙입니다.

아론은 이상적이며 순진하고 선한 인물입니다.

갈렙은 형을 향한 아버지의 편애에 불만을 품고,

형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복잡한 내면을 지닌 인물입니다.

 

1955년 영화 <에덴의 동쪽>에서는

제임스 딘이 갈렙을 실감나게 연기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갈렙이 형에게 어머니의 비밀을 말하면서

아론은 군에 입대했다가 목숨을 잃고,

아버지 아담도 그 충격으로 쓰러져 생을 마감합니다.

 

이 집안에서 중심을 잡아 주는 의외의 인물은

중국인 하인 Lee입니다.

 

Lee는 죽어가는  갈렙의 아버지 아담에게

죄책감에 빠져사는 아들을 용서하고

힘과 희망을 주라고 부탁합니다.

아버지가 마지막 힘을 다해 남긴 히브리어 단어가

바로 <팀셸 timshel>입니다.

 

2.

소설 중반부에서

Lee는 창세기 4장 7절에 나오는

<팀셸>이라는 단어의 뜻에 의문을 품고,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 있는

아흔이 넘은 중국 노인들을 찾아가서 해석을 부탁합니다.

 

이분들은 유대인 선생을 초빙해 히브리어를 배우며

약 2년 동안 연구와 토론을 거친 끝에

마침내 <팀셸>의 의미를 밝혀 냅니다.

 

영어 흠정역(King James Bible)은

약속과 예정(운명)의 의미가 담긴

“너는 죄를 다스리게 될 것이다(Thou shalt rule over him/sin)”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삶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미국 표준역(American Standard Version)은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Do thou rule over him)”

라고 명령문으로 번역하였습니다.

히브리어 문법에 가까운 번역이지만,

가인은 이 명령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스타인벡이 소설에서 강조한 해석은

“너는 죄를 다스릴 수도 있다(Thou mayest rule over him)”입니다.

인간에게 선택의 가능성과 책임이 함께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스타인 벡의 해석을 따르면,

<팀셸>이라는 단어는

우리 인생이 단순한 운명이나 명령이 아니라,

매 순간 선택의 자리에 서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만큼 존귀한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뜻입니다.

 

물론 아담과 이브, 그리고 가인처럼

하나님이 허락하신 능력을

그릇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신 인간을 끝까지 믿으시며,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을 찾고

선한 길을 선택하기를 기다리십니다.

 

질그릇처럼 연약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가 이처럼 크다는 사실 앞에서

더욱 커다란 책임감을 느낍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시편 25:12)

Who is the man who fears the LORD?

Him will he instruct in the way that he should choose.(Ps 25:12)

 

하나님,

기쁜 마음으로 주의 길을 걷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6. 2 26 이-메일 목회 서신)

신명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올해 성경 통독이 어느덧

신명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신명기는 모세오경의 마지막 책이자,

약속의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한

모세의 설교입니다.

 

우리 성경 제목, 신명기(申命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듭’ 펼쳐서 기록한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영어 제목 Deuteronomy는 그리스어에서 왔는데

“두 번째 율법/Second law”이라는 뜻이니 우리 말 신명기와 비슷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와 레위기에서 첫 번째 율법을 주셨고,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 번째로 당부하신 말씀이 신명기입니다.

신명기 5장에는 출애굽기와 마찬가지로 십계명이 나옵니다.

 

신명기 말씀은 매우 명확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부탁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율법)을 사랑하고 지켜야 합니다.

 

2.

신명기에서 말하는 하나님 말씀은

인과응보(因果應報)에 가까울 정도로 강력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키면 복을 받고,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습니다.

중간 지대가 없습니다.

 

신명기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순도 100%의 완벽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길 꿈꾸면서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신명기 법전의 정신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최고 사랑합니다.

이웃을 차별 없이 공평하게 사랑합니다.

함께 어울려 사는 의로운 세상을 만들어 갑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니 신명기가 꿈꾸는 세상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선과 악의 심판이 신명기에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악(惡)은 없고 선(善)만 있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그곳에 살고 있는 가나안 족속을 멸절하라고 말씀하신 것도

그 땅의 악을 진멸하고 완전한 나라를 세우라는 부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정도로 이스라엘을 향한 기대가 크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대를 버렸습니다. 신명기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신명기에 이어서 기록된 신명기 역사서(여호수아-열왕기하)는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멸망한 후에

신명기 말씀에 비추어서 과거를 돌아보면서 기록한 말씀입니다.

 

3.

신명기 말씀이 너무 완벽하고

축복과 저주가 확실해서 읽기가 불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명기 말씀에 깃든 정신을 생각하면

신명기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더 나가서,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두 마음을 품고

갈팡질팡하는 우리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선과악의 이분법, 축복과 벌의 이분법,

인과응보 논리는 언제나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길 원합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것이요 복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며

너희가 차지한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리라 (신명기 5장 33절)

 

하나님,

오늘 하루 만이라도

완벽한 신앙을 꿈꾸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6. 2 19 이-메일 목회 서신)

배려

좋은 아침입니다.

 

1.

미국의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배타적’인 모습 때문이랍니다.

예수님은 절대 배타적이지 않으셨는데,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가 배타적이 된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마태복음이 하나님 나라가 아닌

“천국(천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십계명을

애지중지 지키는 유대인들을 위한 ‘배려’라고 했습니다.

 

저에게 배타적인 것의 반대말을 꼽으라면

“배려”를 선택하겠습니다.

 

예수님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가 맞지만,

자칫 구원의 문을 닫아버리는 배타적인 신앙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한 끗 차이 같습니다.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도 필요하지만,

다른 종교나 다른 신들을 악마화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중동 분쟁이 유일신 하나님/알라를 믿는

이스라엘과 이슬람 국가 간의 싸움인 것이 좋은 예입니다.

각자 믿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우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삼위일체 교리를 갖고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교리입니다.

그런데 삼위 하나님이 서로 소통하십니다.

서로 손을 잡고 춤추시는 ‘페리 코레시스’의 하나님이십니다.

매우 색다른 유일신 신앙입니다.

 

2.

엊그제 성경 통독에서 읽은

레위기 마지막 27장에는

하나님께 서원하는 규정이 나옵니다.

사람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하였다면,

율법이 정한 값을 제단에 바치라는 것입니다.

 

한창 활동할 연령인 20-60세 남성은 은 오십 세겔,

같은 연령대의 여성은 30세겔,

5-20세의 남성과 여성은 각각 20세겔과 10세겔,

1개월에서 다섯 살까지 남자와 여자아이는

각각 은 다섯 세겔과 삼 세겔입니다.

 

요즘 은 값이 많이 올랐는데,

최근 은 값으로 환산하니 남성 은 오십세겔은 약 1,500불입니다.

예수님은 성인 여성의 서원값인 은 삼십 세겔에 팔리셨지요.

은 삽십 세겔은  노예 한 명에 해당하는 값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 가난한 백성들에 대한 규정이 나옵니다.

정해진 서원값을 지불할 수 없으니, 하나님께 나올 수 없습니다.

가족을 위해서 기도하기도 힘이 버겁습니다.

 

율법은 가난한 백성들을 무시하거나 배제하지 않습니다.

정해진 서원값을 지불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제사장을 찾아가고, 제사장은 “서원자의 형편대로” 값을 정해줍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하라는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신약 성경은 물론

구약 성경에도 이처럼 아름다운 모습,

공동체 속에서의 배려가 차고 넘치게 등장합니다.

 

그렇습니다.

크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모든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 ‘배려’입니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

하나님 사랑/이웃 사랑의 시작이랍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빌4:5)

 

 

하나님,

넉넉한 마음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6. 2 12 이-메일 목회 서신)

가짜가 판을 치는 세상

좋은 아침입니다.

 

1.

AI가 이끌어가는 세상은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마주하면서

깜짝 놀라면서도 솔직히 두렵습니다.

과연 어디까지 발전할지 감을 잡을 수 없습니다.

 

편리한 것도 많습니다.

Chatgpt같은 프로그램은

사용자의 의도와 목적에 따라서

한 번도 불평하지 않는 훌륭한 조력자(비서)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 10년여

권사님이 하시던 예배 통역을

지난 연말부터 애플 에어팟으로 바꿨습니다.

누구나 에어팟이 제공하는 언어로 들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오순절 성령 강림에서

제자들의 말을 각자의 언어로 들은 것이 생각날 정도입니다.

 

과학 이론이나 기계의 원리를 잘 모르는

저에게는 모든 것이 신비의 세계일 뿐입니다.

 

2.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커다란 아나콘다에 온몸이 칭칭 감긴 아기 코끼리가

뛰어가다가 결국 넘어지는 유튜브 쇼트가 있었습니다.

갑자기 표범이 달려와서 아나콘다를 제압하고

코끼리는 달아났습니다.

 

처음에는 진짜인 줄 알았는데,

표범의 생김새나 뛰어가는 모습을 보니 가짜였습니다.

깜짝 같이 속을 뻔했습니다.

 

분별해 내기가 어려울 정도의

진짜 같은 가짜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보이스 피싱은 물론

우리 생활 전반에 가짜가 침투해서

감쪽같이 속는 일이 많이 생길 것 같아서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개인의 영역을 떠나서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가짜가 활동해서

세상을 교란하는 일도 생길 수 있습니다.

 

인간이 뒷전으로 밀려나고 인류에 재앙이 닥치는

공상 과학 영화에 나왔던 일들이

현실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과학 문명이 올바른 길로 발전할 수 있는

기준, 규범, 때로는 제재가 필요해 보입니다.

 

3.

가짜가 판치는 세상이 될수록

진리(眞理)를 설파하는 종교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생각, 마음, 하신 일을 따를 때,

길을 잃고, 거짓에 휩싸이고, 죽음의 세력에 지배되는

세상을 지키고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가짜가 판치는 세상에서

진리의 길을 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 매우 큽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진리 가운데 붙들어 주시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길을 가는 하루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목에 매며 마음판에 새기라 (잠언 3:3)

 

하나님,

진리의 길을 걷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6. 2 5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