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설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연결했습니다.

십자가가 하나님 사랑의 절정이라면,

부활은 하나님 사랑의 완성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죽음을 넘어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인생,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하지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은

자연법칙 안에서는 있을 수 없는 특별한 사건입니다.

그렇기에 부활은 말 그대로 기적(miracle)입니다.

 

저는 2천 년 전의 부활을 증명하기보다

지금 이곳에서 부활을 살아냄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여전히 효력이 있음을 드러내자고

자주 말씀드립니다.

 

2.

체스터튼(G. K. Chesterton, 1874-1936)이라는 영국 작가는

동화 속의 상상력을 갖고 기적을 설명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동화처럼  자유자재로

세상을 만들어 가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적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기꺼이 기적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체스터튼은 기적을 ‘더 큰 이성’이라고 했습니다.

과학을 비롯한 세상의 이치를 뛰어넘는

더 큰 세계라는 뜻입니다.

 

기적을 인정할 때,

사고나 상상력이 하나님의 세계로 이어지고 확장되지만,

기적을 인정하지 않으면, 이성의 영역에 갇힌다는 것입니다.

 

체스터튼에 영향을 받은 C. S. 루이스(1898-1963)는

<기적>이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1. S. 루이스에게 기적은 하나님께서 자연 세계의 문을 열고

잠깐 방문하시면서 생긴 특별한 사건(special divine event)입니다.

 

그러니, 기적을 믿고 인정할 때,

세상을 방문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3.

현대인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은

교회에서 흔히 듣는 진부한 말(cliché)이거나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이상한 말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인간이 되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기적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무한한 상상력이 펼쳐지는 동화와 같은 믿음의 세계입니다.

 

주의할 점도 있습니다.

기적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특별한 일입니다.

사람은 기적을 만들어내거나 조작할 수 없습니다.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상으로 생각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연을 뛰어넘는 일들이 매번 발생한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세계는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생로병사, 희로애락을 모두 겪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열심히 기도하면,

기적과 같은 특별한 일이 일어난다는 말도 듣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신비한 것만 쫓는 왜곡된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일상에서

십자가의 은혜와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알아가는 올해 하반기가 되길 바랍니다.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시편72:18)

 

하나님,

믿음의 눈으로 주님의 신비를 보는 새달이 되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7. 3. 이-메일 목회 서신)

우주의 신비

좋은 아침입니다.

 

1.

엊그제 월요일에는

매우 흥미로운 발표가 있었습니다.

지난 10년간 8억1천만 달러를 들여 건설한

칠레의 베라 루빈 천문대를 소개하는 자리였습니다.

.

과학에 문외한인 저에게는

공상 과학 영화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들렸지만,

앞에서 발표하는 과학자들의 얼굴은 상기되었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베라 루빈 천문대는

우주를 향한 인류의 새로운 발걸음이었습니다.

 

“베라 루빈”이라는 명칭은

암흑물질(black matters, 전 솔직히 모르겠습니다)의 존재를 발견한

미국의 여성 천문학자의 이름에서 왔답니다.

 

베라 루빈 천문대는 지름이 1.65 미터인 카메라 렌즈 3 개를 통해서 관측합니다.

32억 화소의 디지털 카메라입니다 (애플 핸드폰 카메라는 4,800만 화소).

베라 루빈 천문대가 찍은 사진을 한 번에 보려면,

농구장 크기의 초고해상도 TV 400대를 연결해야 한답니다.

 

앞으로 베라 루빈 천문대에서는

매일 같이 100장 이상의 고화질 우주 사진을 찍어서 정보를 축적하고

자격을 얻는 회원(국)들에게 공개할 계획이랍니다.

 

2.

이번에 천문대가 공개한 4개의 우주 사진은

정말 그림 같았습니다. 아름다웠습니다.

 

천문대에서 공개한 사진을 보면서

‘생뚱맞게’ 창조주 하나님이 떠올랐습니다.

 

저에게는, 그처럼 아름다운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다는 증명이었습니다.

창조주가 없이 우연히 그토록 아름답고 신비로운 우주가

만들어졌고, 현재도 만들어지고 있음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시편 기자는 밤하늘의 달과 별을 보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을 텐트처럼 펼치시고

손가락으로 달을 붙이시고 별들을 붙이셨다고

상상력을 총동원해서 동화처럼 묘사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늘을 만드신 그 크신 하나님께서

작고 작은 자신을 생각하고 돌보시는 것에 감격했습니다.

 

거대한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이시라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명은 눈에 들어오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한 명’을 기억하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감동한 것입니다.

감사하고 신비로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3.

우주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하찮은 점일 뿐입니다.

 

샌프란에 사는 우리는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서로 다투고 시기하고

폼을 잡으면서 자랑하던 것을 생각하니

쥐구멍에라도 들어가야 할 정도로 부끄러웠습니다.

 

오늘날의 과학을 잠깐 옆에 두고,

시편 기자처럼 창조주 하나님을 마음에 떠올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이름을 부르시고 돌보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천문대가 공개한 사진만큼이나

우리가 마음으로 그리는 믿음의 세계도 신비롭습니다.

과학자들의 상상력이 현실이 되듯이,

우리 믿음의 상상력도 실제가 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잠깐 밖에 나가서

밤하늘의 별을 감상하면서

시편 기자처럼 창조주 하나님을 고백하면 어떨까요?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편 8:3-4)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있어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6. 26. 이-메일 목회 서신)

자라감

좋은 아침입니다.

 

1.

2025년은 제가 담임 목회의 길을 걸어온 지

25년이 되는 특별하고 감사한 해입니다.

 

그동안의 목회를 돌아봅니다.

25년쯤 하면 자신감이 생길 만도 한데

아쉽고 부족한 것이 여전히 많습니다.

물론 감사한 것도 많습니다.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제가 목회하는 25년 동안

재정적으로 돕는 형제도 있습니다.

인디애나와 이곳 샌프란까지,

한결같이 돕는 손길이 있다는 것은 저에게 큰 복입니다.

 

무엇보다, 교회를 함께 세워온 신앙의 동지들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 함께 교회를 세워온 참빛 식구들께는

앞으로도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살 것입니다.

 

2.

25년 목회하면서

제가 얼마나 자랐는지를 돌아봅니다.

제자리에 멈춰 있거나, 혹시라도 뒤로 후퇴했다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라는 하나님 말씀 위반입니다.

 

여러 가지 가운데, 목사에게 중요한 설교도 살펴봅니다.

저는 인디애나 시절의 설교 녹음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샌프란에서의 20년 설교 녹음도 있습니다.

 

가끔 예전 설교를 들으면서 저 자신을 점검합니다.

저는 목소리가 맑은 편이 아니지만,

그래도 젊을 때 목소리가 지금보다 낫습니다.

그런데,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발음이 뭉치고, 주어와 술어가 맞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긴장해서 그럴 것입니다.

 

그때 비하면, 지금은 많이 느려졌습니다.

주중에 설교를 여러 번 들으면서 모니터링하다 보니

발음도 비교적 명확해졌습니다. 조금 여유가 생긴 것 같습니다.

 

설교 내용은

그때그때 교인들의 상황에 맞게 설교했기에

각각의 설교에 의미가 있습니다.

 

설교만 놓고 보면,

모든 면에서 조금은 자랐습니다.

 

이다음 은퇴하면, 그동안의 설교를 아내와 함께 들으면서

그 시절 교인들을 떠올리며 차를 마시면서

하루를 시작할 생각입니다.

 

3.

우리는 익숙한 것에 멈춰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신앙이 그렇습니다.

내가 듣고 싶은 설교, 내 마음에 맞는 설교를 듣고 “아멘”합니다.

조금 불편하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립니다.

 

직장이나 세상의 일에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습니다.

요즘 AI가 대세이듯이 새로운 것에 빠르게 적응합니다.

실력을 키웁니다.

 

그런데 신앙은

그만큼의 시간을 내기도 어렵고

기도와 말씀, 신앙 서적 읽기, 개인 경건의 훈련 등에

시간을 쓸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에나 신앙이 멈춰 있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행사가 많지 않은데,

자칫 교회 행사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을 두고

신앙이 자랐다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열심 있는 교인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신앙의 환경도 바꿔보지만,

금세 지루해지니, 결국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내가 변하고, 내가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늘 말씀드리듯이,

예수님을 향해서 자라가는 각자의 방식을 개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멈추지 말고, 자라가야 합니다.

때로는 탈피, 껍질을 벗는 아픔도 필요합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자기 변화와 결단입니다.

 

그렇다고 조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날마다 새롭게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씩 조금씩 자라가면 됩니다.

대신, 멈추면 안 됩니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애가 3:23)

 

 

하나님,

예수님을 닮기까지 멈추지 않고 자라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6. 19. 이-메일 목회 서신)

아는 것 만큼

좋은 아침입니다.

 

1.

작년 이맘쯤, 우리 부부는

Ely Lilly라는 재단의 재정 지원으로

40일 동안 유럽 여행을 하며 휴가를 보냈습니다.

 

감리교가 시작된 런던을 시작으로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의 독일,

이태리 로마, 그리스의 아테네와 고린도까지

대부분 기차를 타고 여행했습니다.

 

유럽에서 흔하다는 소매치기도 당하지 않고

안전하고 건강하게 다녀왔습니다.

저희 인생에 이렇게 긴 여행,

여러 도시를 방문하는 여행은 다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여행이 끝났을 때,

“다 했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더 이상 하면 몸이 지칠 것 같았습니다.

계획한 곳들을 거의 모두 방문했습니다.

 

일 년이 지났지만, 엊그제 다녀온 것처럼

저희 마음에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평생에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입니다.

 

2.

여행을 다녀온 이후,

여행 관련 유튜브를 자주 시청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제가 다녀온 곳들을 중심으로

복기(review)하듯이 유튜버들의 설명을 듣고,

다시 방문하는 듯한 느낌으로 영상을 봅니다.

 

저희가 갔던 장소가 나오면 반갑고 익숙합니다.

방문하지 않았던 곳이 나오면

‘미리 알았더라면 꼭 들렀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생깁니다.

 

‘여행은 아는 것만큼 보이고 즐긴다’라는 말이 맞습니다

철저하게 준비해서 가면,

그만큼 여행의 깊은 참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작은 것에도 의미를 찾고, 세심하게 감상할 것입니다.

 

또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여러 도시를 방문하는 것은 작년으로 충분하고

한두 도시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미리 공부해서 골목까지 속속들이 충분히 즐기고 싶습니다.

 

3.

여행만 그럴까요!

우리 인생 여정도 비슷합니다.

대충대충 지나가면,

정말 귀하고 소중한 것을 놓칠 가능성이 큽니다.

 

인생길에 만나는 이웃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를 아는 만큼, 이야기한 만큼

이해하고 격려하며 도울 수 있습니다.

만남의 깊이를 더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3년 공생애를 마치시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도,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분명히 아셨고,

만날 사람들, 해야 할 일을 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벌써 6월입니다.

부지런히 공부하고 배우고 익히면서,

인생의 여정도, 신앙의 여정도 충분히 누리길 바랍니다.

 

아쉬움은 뒤로하고

감사가 넘치는 한 해를 만들어갑시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시편 25:4)

 

 

 

하나님,

주님의 생각을 알고, 길을 걷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6. 12. 이-메일 목회 서신)

레드우드 나무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말에는

전교인 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몸이 편찮으신 권사님들,

출타한 식구들이 참여하지 못하셨지만,

아이들부터 권사님들까지 뜻깊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수련회 장소는 완벽할 정도로 훌륭했습니다.

그 넓은 장소를 우리만 사용하는 호사도 누렸습니다.

 

수련회장(場)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하늘까지 치솟은 레드우드 나무(redwood tree)였습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레드우드 나무는

세계에서 가장 높이 자라는 나무에 속합니다.

100미터 이상 곧게 자랍니다.

 

레드우드 나무가

높이 자랄 수 있는 것은

뿌리가 서로 엉켜 있어서 좀처럼 쓰러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련회장에 있는 레드우드 나무를 살펴보니

하나의 뿌리에서 두 그루가 자라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 북부에 서식하는 레드우드 나무는

뿌리에서 공급하는 수분과 더불어

안개를 먹고 자란답니다.

 

우기와 건기가 구분되는 우리 지역에서

레드우드 나무가 그처럼 높이 자랄 수 있는 것이

안개 때문이라는 사실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수명이 무려 천 년에서 삼천 년이 된다고 하니

수련회 장에서 만난 레드우드 나무를 보면서

수천년 전까지 시간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레드우드 나무도 처음에는 작은 싹이었을 것입니다.

천년을 자라서 100미터가 되었다면

해마다 10센티씩 자란 셈입니다.

 

2.

레드우드 나무를 보면서,

우리의 신앙을 떠올렸습니다.

 

신앙도 하나님을 향해서 곧게 자라야 합니다.

눈에 띄지 않아도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자라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바라보고 자라갈 때,

레드우드 나무 못지않은 높은 신앙을 갖게 될 것입니다.

 

레드우드 나무의 뿌리가

서로 얽혀서 크고 높게 자라듯이,

공동체가 서로 의지하고 삶의 뿌리가 서로 얽혀있을 때,

건강하고 힘있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레드우드 나무가 안개를 먹고 자란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우리에게는 매일 아침 읽고 묵상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안개와 같을 것입니다.

당장 눈에 띄지 않아도 매일의 성경 묵상이 우리 신앙을 높이 자라게 할 것입니다.

 

뿌리부터 견고하게

하나님을 향해서 곧게 높이 자라는

우리의 신앙이 되길 바랍니다.

 

오직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벧후 3:18)

 

 

하나님,

우리의 신앙이 높이 자라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5. 29. 이-메일 목회 서신)

나랏빚

좋은 아침입니다.

 

1.

신용평가 회사 무디스에서

미국의 신용등급을 최상에서 한 계단 내렸습니다.

미국의 국가 부채가 지나치게 많고

그에 따른 이자 부담과 자금 조달 능력이 의심된다는 평가였습니다.

 

미국의 국가 부채는

2025년 5월 현재, 36조 달러(한화5경원)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천문학적인 숫자입니다.

 

이에 대해서 미국이 지불하는 이자 비용은

국가 예산의 16%로 국방예산(15%)보다 많습니다.

빚과 이자가 눈덩이처럼 늘어나는 악순환입니다.

 

국가 부채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미국은 예산의 70%가 사회보장, 고령자와 저소득 의료보험 지원

기타 실업 급여 등의 의무 지출(mandatory spending)입니다.

 

나머지 30%를 국방과 기타 예산으로 할당하니

거기서 흑자를 내고 부채를 갚아야 하는데

부채는커녕 이자 상환도 쉽지 않습니다.

 

2.

미국의 빈부격차도 매우 큽니다.

 

미국의 국가 부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을 때,

소위 수퍼 리치들의 자산은 천문학적으로 늘었습니다.

상위 1%의 미국 전체 자신의 30%를 독점하고 있습니다.

하위 50%가 갖고 있는 자산은 3%에 불과합니다.

 

100개의 피자 조각이 있다면, 한 명이 30개를 갖고 있고

하위 50명은 세 조각을 갖고 나눠 먹는 실정입니다.

 

어제 미국 하원에서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안(one big, beautiful bill)”이 통과되었습니다.

저소득층 지원을 축소하고

부자들의 세금을 감면해 주는 내용입니다.

 

격차가 더욱 심해질 것이 뻔합니다.

그나마, 중간 계층과 팁을 받는 노동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랄 뿐입니다.

 

하여튼, 국가 부채를 해결하기 위한

지혜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누군가 손해를 봐야 할 겁니다.

동네 피자를 독식하는 수퍼 리치들에게서

세금을 더 거둬야 할 것 같습니다.

 

2024년 한 해 동안,

우리가 알만한 부자들 19가정의 자산이

자그마치 1조 달러가 늘었다기에 하는 말입니다.

 

3.

사도 바울은 사랑의 빚만 지라고 했는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님의 마음과 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욕심 때문일 겁니다.

 

지도자들에게 하늘의 지혜가 임하길 기도합니다.

국가 재정의 문제를 힘없는 서민에게

직간접적으로 떠넘기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렘 29:7)

 

 

하나님,

세상에 평안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5. 22. 이-메일 목회 서신)

견딜힘

좋은 아침입니다.

 

1.

창세기를 읽으면서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한편 짠한 생각과 함께 깊이 공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야곱이 아들 요셉이 총리로 있던 이집트에 내려갔을 때입니다.

요셉이 이집트 바로에게 아버지 야곱을 소개합니다.

바로가 “네 나이가 얼마냐”고 묻자, 야곱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이가 얼마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창4:9)

 

“험악한 세월”에 쓰인 히브리어 <라아>는

“악(evil)”을 가리킬 때 주로 쓰는 단어입니다.

우리 성경의 “험악한 세월”이라는 번역이 매우 적절합니다.

 

야곱의 답변은

130년 동안 살면서 겪은 고단한 인생 여정, 그 험악한 세월이

그의 얼굴과 몸에 고스란히 새겨졌다는 뉘앙스로 읽힙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야곱의 삶은 거칠고 험했습니다.

 

형 에서를 속이고 장자의 권리를 빼앗은 뒤 도망쳐야 했고,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는 14년을 종처럼 살았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던 길에는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잃었고,

라헬이 낳은 첫째 아들 요셉이 짐승에게 물려 죽었다는

거짓 소식에 수십 년을 속고 살았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이집트에 팔아넘긴 것이었지요.

 

흉년이 닥치자, 양식을 구하러 자식들을 이집트로 보냈는데,

그 과정에서도 막내 베냐민을 보내야 한다는 일로 마음고생 합니다.

이집트에 총리로 있던 요셉을 만나는 과정도 절대 쉽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인생 말년에 이집트로 내려와 가족들과 함께 지냅니다.

짐승에게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을 다시 만난 것으로

큰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타향살이입니다.

 

말 그대로 야곱은 ‘험악한 세월’을 살았고,

그의 인생이 그의 모습에 그대로 새겨졌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야곱은 끝까지 견뎠습니다.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겼던 ‘이스라엘’답게 꿋꿋이 견뎠습니다.

 

2.

쉬운 인생은 없습니다.

희로애락을 모두 겪으면서 걷는 인생길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잘 된다는 설교나 간증이

‘나’에게 임하는 경우도 흔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그런 말에 감동하는 횟수도 뚝 떨어졌습니다.

 

대신, 조상들에 비하면 나이가 많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이집트 바로 앞에서 솔직히 말하는

야곱의 고백이 더 마음에 와닿습니다. 깊이 공감됩니다.

 

그렇습니다. 쉬운 인생은 없습니다. 그래도 견뎌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고난을 면제해 주시지는 않지만,

끝까지 견딜 수 있는 힘을 반드시 주십니다.

고난을 헤쳐 나갈 지혜와 용기도 주십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 바라보면서

행여나 기죽지 말고,

꼿꼿하게 걸어갑시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시편28:7)

 

 

 

하나님,

견딜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5. 15. 이-메일 목회 서신)

투덜이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아침 묵상 본문이 구약성경 민수기입니다.

민수기는 이집트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생활에 대한 말씀입니다.

민수기의 히브리어 성경 타이틀이

“광야에서”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모세가 신 광야 가데스 바네아에서

각 지파의 대표 12명을 정탐꾼으로 뽑아,

40일 동안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정탐하게 했습니다.

 

그 가운데 여호수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의 지도자가 부정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

백성들은 부정적인 의견에 동조했고,

결국 40일을 햇수로 계산한 40년을 광야에서 지내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먹이시고 입히시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을

몸소 경험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광야 생활 내내

불평과 불만, 원망을 달고 살았습니다.

 

이집트에서 해방된 직후,

앞에 홍해가 가로막고 뒤에서는 이집트 군대가 쫓아오자

“이집트에서 잘 살고 있었는데 왜 데리고 나와서 죽게하느냐”고

모세에게 강력히 항의했습니다(출14)

 

두 달도 채 되지 않아서는 물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이집트에 있을 때는 고기를 배불리 먹었는데,

굶어 죽게 생겼다고 불평했습니다(출16).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셨습니다.

 

심지어, 이집트에 있을 때는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 마늘”을 충분히 먹었다면서

하나님께서 매일 내려주시는 만나에 대해 불평했습니다(민11).

여기서 참외는 멜론 종류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불평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이집트를 떠난 1세대만 그런 것이 아니라,

40년 광야 생활 끝에 도달한 2세대조차

“차라리 죽는 것이 나았겠다”고 말할 정도로

불평과 원망의 끝판왕이 되었습니다.

 

2.

불평과 불만은 비교해서 비롯됩니다.

과거와 비교해 현재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불평과 불만이 생깁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의 사정이 나쁘면

불평과 불만이 생깁니다.

자신이 기대한 것과 현실 사이에 차이가 생길 때도

불평과 불만이 생깁니다.

 

불평과 불만의 지경이 꽤 넓어서

상황과 환경, 친지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향한 불평까지 총망라됩니다.

 

이스라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불평과 불만을 달고 사는 ‘투덜이’입니다.

 

불평과 투덜거림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태도는 아닙니다.

감사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고쳐야 합니다. 벗어나야 합니다.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희망 가운데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헤아릴 때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불평과 불만을 몰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불평과 불만은 하나님과 멀어졌다는 표시임도

꼭 기억하고 잊지 맙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5:16-18)

 

 

하나님,

오늘 하루 불평없이 감사하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5. 8. 이-메일 목회 서신)

품격

좋은 아침입니다.

 

1.

엊그제 정기 검사를 위해서

담당 의사를 만났는데,

프란치스코 교황 이야기를 합니다.

 

제 의사는 약간 보수적인 가톨릭 신자입니다.

물론 제가 목사인 것을 압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진보적인 면은 탐탁지 않지만,

그는 매우 서민적인 훌륭한 분이었다고 칭찬합니다.

개신교 목사에게 은근슬쩍 자랑하고 싶었나 봅니다.

 

저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존경받을 분이라고 치켜세웠습니다.

 

2.

지금부터 12년 전입니다.

교황이 연설하는데,

한 아이가 교황의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개의치 않고 연설을 계속했습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교황이 한 아기를 안았는데

그 아기가 교황의 모자(“주케토”)를 벗기고 머리를 만졌습니다.

아이가 모자를 벗기고 머리를 만져도

교황은 웃음을 잃지 않고 아이를 안아주었습니다.

 

이 두 개의 그림만 생각해도

프란치스코 교황은 서민적이었습니다. 소박했습니다.

약하고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섰습니다.

 

2016년 트럼프 대통령이 멕시코 국경에 담을 쌓겠다고 했을 때,

“다리는 세우지 않고 벽만 세우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니다”라고

따끔하게 충고했습니다.

 

“프란치스코”라는 이름도

재산을 모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사제의 길에 접어든 이태리 아시시의 성자 프란치스코에서 왔습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평화의 기도”를 지으신 분입니다.

교황 중에 처음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가졌답니다.

 

3.

교황의 유해가 성 베드로 성당에 안치되고

일반인들의 조문을 받을 때였습니다.

 

가까이는 남성 사제들만 들어갈 수 있는데

키가 150cm에 불과한 80대 수녀가

가장 가까이 다가가서 말없이 조문하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자넹그로스라는 수녀였습니다.

그는 교황과 수십 년 동안 우정을 쌓아온 분입니다.

소외 계층을 위해서 헌신한 분입니다.

 

교황은 이 조그만 수녀를 향해서
“앙팡 테리블(무서운 아이)”라고 불렀답니다. 작은 거인쯤 됩니다.

자넹그로스 수녀는 교황을 회고하면서

아버지 같고 형제 같고 친구 같은 분이라고 했습니다.

“계속 앞으로 나가라”고 말하면서 격려했던 눈빛과 격려를 회고했습니다.

 

4.

지도자들에게서

‘품격’을 찾아보기 쉽지 않은 요즘 세상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진정한 품격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아니 높은 자리에 있어도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고,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성육신(incarnation)의 신앙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모습입니다.

 

너무 폼을 잡지 않고 이해관계에 민감하지 않고

조금 어리숙해 보여도 일상의 작은 행동과 말투,

오랜 우정과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품격을 갖추고 싶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5:9)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shall be called sons of God (Mat5:9)

 

하나님,

근사하고 아름다운 주님의 자녀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5. 1. 이-메일 목회 서신)

부활의 삶

좋은 아침입니다.

 

1.

부활절이 지났지만,

앞으로 일곱 주간은

교회력에 따른 부활 절기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셨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한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앞으로 50여 일 동안 부활을 삽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을

오늘날 과학의 잣대로 증명할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도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의 부활이 쉽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믿어야 한다고 강요할 것도 아니고,

믿어지지 않는 것을 믿는 척할 것도 아닙니다.

 

그동안 우리는 신앙의 많은 부분을

주입했고 믿도록 강요했습니다.

건강한 신앙이 아닙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은 (괄호)에 넣고

자신에게 확실한 것을 중심으로

신앙을 펼쳐 나가는 것도 현명한 자세입니다.

 

3.

눈에 보이지 않고, 증명할 수 없어도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그대로 따라 사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사랑”입니다.

사랑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을 주고받습니다.

사랑하면서 살아갑니다.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의 과학 지식을 대입하면서

부활의 문제와 씨름하기보다 부활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부활을 살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부활을 연습하라(Practice Resurrection)”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부활을 연습해야

훗날 하나님 앞에서 부활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부활의 주님께서 생명과 평안을 주십니다.

죽음의 세력에 휘말리지 않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립니다.

차분하고 침착합니다. 요동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우리도 걸어갑니다.

예수님께서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듯이

우리도 매일같이 자존심, 자만심, 교만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룹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갑니다.

이 모든 것이 부활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살 때,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가 되고,

역사적인 사실일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리가 부활을 살 때 우리는 자신보다 더 큰 무엇으로 끊임없이 들어가게 된다.

부활을 살 때 우리는 살아 계시며 현존하시는 예수님과 동행하게 된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우리보다 더 잘 아신다.

그 길은 언제나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유진 피터슨 <부활을 살라: Practice Resurrection>-

 

하나님,

부활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4. 24.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