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다스리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소위 근대(modernism)라고 불리던 시대에는

인간의 이성(reason)이 중요했습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했고, 실험을 통해서 검증했습니다.

사실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려고 애썼습니다.

 

근대 이후의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에서는

이성보다 “감정(emotion)”이 앞서고 있습니다.

생각하는 것에 앞서서 느낌이 와야 합니다.

감이 잡혀야 합니다. 마음에 다가와야 합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차근차근 조목조목 필요한 것을 점검하면서

사람을 사귀지 않습니다.

느낌이 오면, 마음이 통하면 곧바로 사귑니다.

청춘남녀의 연애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감정팔이”라는 용어도 생겼습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호소하면서

그 사람의 동의와 도움을 얻어내는 행위를 뜻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사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거나

관계를 형성하려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진 용어입니다.

 

2.

기독교 신앙은 어떨까요?

우리나라 기독교는, 거의 초반부터

감성에 호소하면서 발전해 왔습니다.

“은혜 받았다”는 고백은 대부분 감정에 기초합니다.

 

제가 목회를 시작하던 90년대 중반부터

무작정 감정적으로 믿지 말고, 생각하면서 공부하면서

“질문하는 신앙” “이해하는 신앙”을 갖기를

부탁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기독교가 감정에 호소하면서

발전하고 부흥을 경험하다 보니,

냄비 같은 신앙에 빠지기 쉽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에 관해서 이야기하라고 하면,

몇 마디 하지 못하고 말문이 막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3.

감정은 좋은 것입니다.

‘느낌’이 없고 ‘생각’만 있는 세상은 무미건조합니다.

 

그런데, 감정은 다스림의 대상입니다.

올바른 감정은 우리의 신앙과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실제로 만들어 줍니다. 확신을 줍니다.

 

반면, 그릇된 감정은

“자기애(自己愛)”에 빠지거나

다른 사람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그릇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변화가 심합니다.

 

영성가 리처드 로(Richard Rohr)는

우리의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서 전망대에 올라가기를 권합니다.

그가 말하는 전망대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탄식하면서 기도하실 정도로 감정이 풍부하신

성령 하나님의 자리(전망대)에 올라가서 우리 자신을 살피라는 것입니다.

 

필요한 감정인지,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감정인지,

집착하는 태도에서 나온 감정은 아닌지.

감성팔이처럼 남을 의식한 감정은 아닌지,

성령 하나님의 자리에서, 성령 하나님과 더불어 살피라는 권면입니다.

 

감정이 중요한 시대를 살다 보니

신앙과 삶이 감정에 따라 춤을 춥니다.

감정의 폭풍에 휘말리면,

바다 위에 떠 있는 조각배처럼 요동칩니다.

 

하나님 안에서 감정을 조절하고

올바르게 표현하고, 누리길 원합니다.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성숙함까지 갖춘다면

정말 근사한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골로새서 3장 15절)

 

 

하나님,

마음속에 평안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0. 9 이-메일 목회 서신)

불꽃 야구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유튜브를 통해서

<불꽃야구>라는 프로그램을 자주 시청합니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대한민국 최고였던 프로야구 선수들이 등장합니다.

저는 그 선수들이 현역으로 활동하던 모습을 보았기에

친숙하고 반갑게 경기를 시청하고 있습니다.

 

팀에는 유망주 젊은 선수들도 있습니다.

프로 야구팀에 들어가지 못한

대학교 또는 사회인 야구팀 출신들입니다.

 

은퇴한 선수들이나 젊은 선수들이나

열정이 넘칩니다.

특히 젊은 선수들은

레전드와 같은 선배들과 한 팀에서 운동하고 경기하는 것 자체가

특권이고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이번에 한 선수가 프로팀에 입단하는 경사도 있었습니다.

 

<불꽃 야구> 선수단의 감독은

야구의 신이라고 불렸던 김성근 감독입니다.

팔순이 넘으신 분입니다. 암 수술도 하셨던 분인데,

선수들을 지도하는 열정이 대단하십니다.

 

불꽃 야구팀이 경기하는 상대 팀들은

고등학교, 대학, 사회인 야구팀들입니다.

고등학교 선수들이 대한민국에서 최고였던 선배들과

한 운동장에서 경기한다는 것 자체가 영광일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불꽃야구 팀을 응원하는 팬들이 많아서

경기를 개방하는 날에는 운동장이 외야석까지 가득 찹니다.

응원 소리가 우렁찹니다.

 

은퇴한 선수들은 다시 듣는 관중들의 응원 소리에

가슴이 뛴다고 합니다.

고등학교나 대학팀 선수들이 그렇게 많은 관중들 앞에서

경기할 기회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선수가

진심으로 열심히 합니다.

감동입니다.

 

2.

무엇보다 저에게는 “불꽃”이라는

단어가 참 좋습니다.

 

매사에 불꽃이 꺼지면 안 됩니다.

에너지가 떨어지고, 하는 일에서 매너리즘에 빠지고

열정이 사라지면 인생 자체가 흔들립니다.

 

신앙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야 꾸역꾸역 불씨를 살리고

불꽃을 태우면서 이끌어가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신앙의 열정을 유지하고

불태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습관적으로 또는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기 십상입니다.

 

행여나 불꽃이 약해지고 있다면

다시 예전의 신앙 열정을 되찾아야 합니다.

가슴이 뛰던 순간을 다시 맞이해야 합니다.

 

한번 사는 인생이고, 이왕 믿는 신앙의 길입니다.

하루하루 신바람 나게, 흥이 넘치게 살고 믿어야지요!

 

관중이 가득 찬 운동장이 아니어도

우리의 인생과 신앙의 경주를 끝까지 지켜보시고

응원하시는 그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 앞에서 사는 것이다.

그것은 ‘코람 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삶을 사는 것이며,

청중을 의식하는 데서 돌이켜 오직 최후의 청중이요,

최고의 청중이신 하나님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오스 기니 <소명>-

 

 

하나님,

불꽃 인생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0. 2 이-메일 목회 서신)

두 예술가

좋은 아침입니다.

 

1.

키에르케고르는 <사랑의 역사 Works of Love>에서

진정한 기독교, 진정한 신앙은

사랑의 실천에 있다고 강조합니다.

 

꽤 두꺼운 책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의 실천에 대해서

차근차근  알려줍니다.

 

<사랑의 역사>에 두 예술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사람은 세계를 두루 다니면서

자신이 그리고 싶은 모델을 찾았지만,

끝내 찾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자신이 그려보고 싶은 얼굴을

한 명도 찾지 못한 것입니다.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마다

한두 가지 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헛수고만 하고 돌아왔습니다.

 

다른 예술가는 외국을 여행해 본 적도 없습니다.

자기를 예술가라고 부르는 것도 부끄럽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 친지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상에서 매일 만나는 가까운 친지들,

“거기에 있는 어떤 얼굴에서도 하찮은 얼굴이나

결함투성이의 얼굴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아름답고 이상적인 모습을 더 많이 찾아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예술 작업에 만족했고 행복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두 번째 사람이 진정한 예술가라고 평가합니다.

예술 작품을 그리려는 사람이

흠을 찾아내고, 모든 것이 완벽하지 않다고

까다롭게 따지는 것은 슬픈 일이라고 했습니다.

 

반면, 사랑할 대상의 결함이나 단점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사람들 속에서 아름다운 것들, 장점을 찾아내서

그것을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2.

키에르케고르가 두 예술가의 이야기를 소개한 대목은
“우리가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는 의무”

라는 장(障, chapter)에 나옵니다:

 

“우리의 과업은 사랑할 대상을 찾는 일이 아니라

이미 주어졌거나 선택된 대상에서 사랑할 만한 것을 찾고,

비록 상대가 어떻게 변한다 해도

그 상대를 계속 사랑스러운 존재로 생각하는 일이다.”

이러한 사랑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했습니다.

동시에,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한 것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라고 했습니다.

 

진실함을 찾기 힘든 시대가 되었습니다.

기준이 무너지고, 너무 쉽게 서로를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그리고 갈라섭니다.

 

때로는 너무 근사한 것, 이상적인 것,

세상에서 찾기 어려운 것을 끊임없이 쫓습니다.

어쩌면 저 멀리 있는 무지개와 같은 것인데 말입니다.

 

없는 것을 쫓기보다,

완벽한 것을 기다리며 찾기보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가까이 있는 이웃들의 장점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길 원합니다.

 

오늘 하루,

참된 예술가로 살아갑시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요일 4:12)

 

하나님,

일상에 감사하고 사랑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9. 25 이-메일 목회 서신)

나는 양의 문이라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주일 예배에서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일곱 가지 <에고 에이미 I am>를

하나씩 공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자기 소개문입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시작하신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라” “나는 양의 문이라”

지난 주일에 “나는 선한 목자라”까지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남은 세 가지 예수님의 <에고 에이미>를 미리 말씀드리면

“나는 부활과 생명이라” “나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

“나는 포도나무라”입니다.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의도(목적)를

파악하고 배울 기회입니다.

 

동시에, 우리도 “내가 누구인지”

우리 자신의 <에고 에이미 I am>를 생각해 보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의 생각을 닮고, 예수님의 삶을 닮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최고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2.

요즘 세상이 파편처럼 갈라지고 있습니다.

‘파편’은 전쟁 용어입니다.

특히, 수류탄이 폭발하면서 표피가 파편이 되어서

매우 위험한 살상무기가 됩니다.

그러니 “세상이 파편처럼 갈라져 있다”는 소름 끼치는 표현입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말씀드렸듯이

서로 ‘다른 것’이 정상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똑같을 수 있겠습니까?

모습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배경과 환경이 다르고

하는 일이 다릅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것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른 것을 인정하고

서로 소통하고, 경청하고, 때로는 도전하면서

배워가는 자세입니다.

 

그런데 ‘다름’이 ‘적’이 되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파편’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SNS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유튜브를 비롯한 소셜 미디어에서는

사적인 생각을 가감 없이 표현합니다.

공공의 선(common good)을 추구하면서

생각이나 행동을 모아가지 않습니다.

 

목소리가 큰 사람들,

생각이나 상황을 단순하게 정리하는 사람들,

교묘하게 사실 관계를 왜곡하는 사람들,

거기에 우리가 믿는 신앙이 개입하면 더 복잡해집니다.

 

3.

저는 요즘 세상을 보면서

예수님의 세번 째 <에고 에이미>,

“나는 양의 문이라”가 자꾸 생각납니다.

 

문을 만들지 않고

각자의 벽을 쌓고 있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커다란 대문 정도는 아니어도, 작은 창문이라도 만들면

서로에게 숨통이 트일 것 같은데 안타깝습니다.

 

양의 문인 예수님을 통해서 들어가고 나간다면

더없이 좋겠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공감대를 만들어 갈 수 있으니까요!

 

예수님을 닮은 우리가

세상에서 서로를 연결해 주는 “문”이 되길 바랍니다.

위험천만 파편처럼 갈라진 세상이

하나로 이어지는 “의와 기쁨과 평화”의 하나님 나라가 되기를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에베소서 2:14)

For he himself is our peace, who has made us both one

and has broken down in his flesh the dividing wall of hostility (Eph 2:14)

 

하나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불쌍히 여겨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9. 18 이-메일 목회 서신)

집짓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제가 사는 동네에

아주 커다란 오피스디포(Office Depot)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물론 교회에 필요한 문구들을

손쉽게 구할 수 있었던 곳입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손님이 줄기 시작했습니다.

빈 진열대가 늘어가더니 결국 문을 닫았습니다.

저는 옛 친구를 잃은 것처럼 허전했습니다.

 

앞뒤에 널찍한 주차장까지 갖춘 커다란 건물이

한동안 버려진 것처럼 덩그러니 서 있더니

어느 날 아파트가 들어온다는 소식이 동네 게시판에 올라왔습니다.

동네 사람들 사이에 갑론을박이 벌어졌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파트 건축이 시작되었습니다.

늘 오가는 길이어서 그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천막으로 가리고 옛 건물을 부수더니

기초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꽤 깊이 파고, 쇠기둥을 박고, 한참 동안 공사가 이어졌습니다.

건물을 짓는데 기초공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지상 위 건물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아파트라면 수많은 가구의 상하수도, 전기, 가스,

요즘은 인터넷까지 설치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

지상에서의 작업이 본격화되더니,

요즘은 1층 건물이 올라갔습니다.

 

많은 사람이 동원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인부들은 자기가 맡은 일만 하는 듯 보였지만,

아파트는 차근차근 세워지고 있습니다. 신기합니다!

 

2.

성경은 우리의 신앙을 집 짓기에 비유합니다.

예수님을 건물의 모퉁잇돌로 설명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을 비교하시면서

반석 위에 세운 집은 홍수가 나도 끄떡없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손으로 지은 육체의 장막집은 무너지지만,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원한 집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모퉁잇돌 삼아 인생과 신앙의 집을 지어갑니다.

하지만, 단숨에 세워지는 집이 아닙니다.

기초공사에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하루는 기둥을 세웁니다. 하루는 송 판때기로 천장과 벽을 만듭니다.

집에 필요한 것들도 하나하나 설치합니다.

 

집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리며 차근차근 지어가야 합니다.

지루한 작업의 연속입니다. 이마에 땀이 흐릅니다.

곳곳에 위험도 숨겨져 있어서 조심조심해야 합니다.

이 모든 과정을 겪으면서 우리는 각자의 집을 짓습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 인생의 집 한 부분에서

묵묵히 지루한 작업을 이어가야 할 수도 있습니다.

땅 밑에서 기초를 다지며 땀을 흐릴 수도 있습니다.

 

집이 정말 세워질지 의심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연장을 들고 인내로 집을 짓습니다.

우리 모두 예외 없이 가야 할 인생 여정입니다.

 

한 가지 한 가지에 최선을 다하길 원합니다.

꿋꿋하길 원합니다.

 

예수님을 모퉁잇돌 삼아

묵묵히 집을 짓고 계시는 참빛 식구들을 응원합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지어가는

세상에서 유일하고 가장 멋진 집이 될 것입니다.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되며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 (잠언 24:3-4)

 

하나님,

꿈을 갖고 신앙과 인생의 집을 짓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9. 11 이-메일 목회 서신)

도마뱀

좋은 아침입니다.

 

1.

저희 부부가 가끔 산책하는

동네 호숫가 산길에서 마주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사슴 가족이 대표적입니다.

엄마 아빠 아기 사슴들이 사뿐사뿐 가볍게 산을 탑니다.

호숫가에는 오리 떼가 헤엄을 치고 있습니다.

요즘은 터키 또는 타조 비슷한 커다란 새들도 보입니다.

 

산책길 초입부터 우리를 반기는 작은 친구도 있습니다.

바로 도마뱀입니다.

요즘처럼 날씨가 더울 때는 더 많이 눈에 뜁니다.

 

제가 어릴 적 살던

시골 마을에도 도마뱀이 있었습니다.

학교가는 길에도 가끔 출몰했습니다.

 

도마뱀을 잡아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똑똑해진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어서,

도마뱀보다 잽싸고 빠른 아이들은

도마뱀을 잡아서 주머니에 넣기도 했습니다.

 

산책길에 도마뱀을 만나면,

어릴 적 좋은 추억 때문인지 반갑습니다.

 

2.

도마뱀은

지구상에 가장 많이 서식하는 파충류라고 합니다.

따라서 종류도 매우 많습니다.

카멜레온이나 이구아나도 도마뱀 종류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도마뱀은 “자절(自切, Autotomy)”이라고 불리는

위험한 상황에서 연골로 이뤄진 꼬리를 자르고

살아남는 생존 기법으로 유명합니다.

신체 구조상 꼬리 자르기가 여러 번 가능하지만,

재생하는데 들어가는 에너지나 시간,

기형적으로 재생되는 확률을 고려하면

그 횟수가 제한적이랍니다.

 

3.

성경에도 도마뱀이 두 번 나옵니다.

사막이 많고 날씨가 더운 팔레스타인 지역에

도마뱀이 많았을 텐데 의외로 많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첫째는 레위기 11장 29-30절입니다.

고대 히브리어를 현대의 영어나 한국어로 번역하는 데 한계가 있지만,

카멜레온까지 서너 가지 종류의 도마뱀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땅에서 기어다니는 부정한 짐승입니다.

먹을 수 없습니다. 닿기만 해도 부정합니다.

성경에 도마뱀이 자주 등장하지 않는 이유일 것입니다.

 

둘째는 잠언 30장 24-28절입니다.

레위기와 달리 잠언에서는

땅에 사는 작지만, 지혜로운 짐승들과 함께 등장합니다.

힘이 없지만 여름에 부지런히 먹을 것을 준비하는 개미,

연약하지만 바위틈에 집을 짓고 사는 사반(바위 토끼),

손에 잡힐 정도로 작지만, 웅장한 왕궁에 사는 도마뱀입니다.

 

도마뱀이

땅에 사는 지혜로운 짐승들의 반열에 당당히 올랐습니다.

게다가 임금님의 거처인 왕궁에 사는 짐승으로 묘사됩니다

도마뱀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똑똑해진다는 전설이 생각납니다.

 

4.

뱀띠해를 맞던 올해 초,

신앙적으로 비둘기처럼 순수해야 하지만,

세상에서는 뱀처럼 지혜로워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도마뱀처럼

세상 한 가운데서 살아남아야 합니다.

 

도마뱀에게 끈질긴 생명력을 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도 도우시고 살아남을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주님 주시는 지혜와 힘으로 오늘 하루도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상을 삽시다.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넷이 있나니…

손에 잡힐 만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니라 (잠언 30:24,28)

 

 

하나님,

세상을 살아갈 지혜를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9. 4 이-메일 목회 서신)

한 책의 사람

좋은 아침입니다.

 

1.

하나님 말씀인 성경이

쉽게 읽히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내용이 어렵고 시대 상황과 동떨어졌습니다.

성경보다 더 재미있는 글이나 영상들이 넘쳐나니

성경은 뒷전으로 밀립니다.

‘하나님께서 현대에 맞는 성경을 다시 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요즘 아침마다 읽는

에스겔을 비롯한 예언서입니다.

거칠고 어렵습니다.

비슷한 심판 예언이 반복되고,

공개적으로 읽기 난감한 대목도 있습니다.

 

그래도 40대 이상은 성경에 친숙합니다.

성경에 대한 애정이 있습니다.

하지만, 30대 이하로 내려가면 성경은

이상한 책일 수 있습니다.

번역은 어렵고, 문장은 낯설며,

무슨 말인지 알기 힘듭니다.

흥미를 잃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해석이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저는 성경을 역사적으로 읽는 훈련을 받아왔고

(역사비평, historical criticism)

여전히 역사적 읽기를 즐깁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상력을 동원한 본문 해석,

독자를 고려한 성경 읽기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자기 마음대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더 깊은 실력과 내공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쉽지 않은 과업입니다.

 

하지만 요즘 각 분야에서 탁월한 실력을 갖춘 마니아(mania)들을 보면서,

성경을 사랑하는 마니아들도 생겨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을 손에 들고 가슴에 품고 씨름하는 성경 덕후들이지요.

성경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보화를 발견하며

성경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들이 있는 한, 희망은 있습니다.

 

2.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는

“한 책의 사람(homo unis libro, a man of one book)”으로 불렸습니다.

 

여기서 “한 책”은 바로 성경입니다.

그렇다고 웨슬리가 성경만 읽은 것은 아닙니다.

그는 모든 책을 사랑하는 진정한 독서가였습니다.

원시 의학에 대한 책을 직접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웨슬리는 세상에 일만 가지 책이 있어도

성경이 그 가운데 최고라고 고백했습니다.

성경을 진정으로 사랑했습니다.

 

웨슬리는 우리가 읽는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였고,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같은 성령이 역사한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을 것을 제안했습니다.

 

웨슬리가 활동하던 19세기도 오늘날에 못지않게

이성과 과학은 물론 산업혁명까지

성경보다는 세상 학문과 기술문명이 인기를 끌 때였습니다.

 

그러니, 웨슬리는 세상 한 가운데서

성경의 진수(眞髓)를 맛보았고 경험한 것입니다.

 

혹자가 “요즘 세상에 누가 성경을 읽겠습니까?

그냥 갖고 있는 책이지…”라고 말한다면,

“아니요, 우리는 여전히 성경을 사랑하고 읽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성경을 두고 누가 뭐라고 해도,

성경이 아무리 어렵고 읽기가 곤란해도

그냥 한 책의 사람이길 원합니다.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시편 19:8)

 

 

하나님,

주의 말씀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8. 28. 이-메일 목회 서신)

진실함

좋은 아침입니다.

 

1.

아침마다 읽는 에스겔서에서는

이스라엘의 우상숭배(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섬기고 쫓는 것)와

진실을 버린 모습을 질타합니다.

 

에스겔서뿐만 아니라

구약 예언서에서 알려주는 네 가지 핵심 메시지가 있습니다:

진실(에메트), 정의(미쉬파트), 공의(차디카), 인애(헤세드)입니다.

 

진실은 거짓이 없는

솔직함입니다. 정직함입니다.

숨기는 것이 없고, 꾸미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솔직한 모습으로

심지어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갑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이웃과 다른 사람 앞에서

숨김없이 정직하게 살아갑니다.

서로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줍니다.

진실한 신앙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진실은

그 다음 세 가지 덕목의 기초가 됩니다.

정의는 거짓 재판을 없애고, 공평하게 판정하는 것입니다.

약자의 편에 서면 진실과 정의는 실천됩니다.

공의는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똑바로 정돈된 상태입니다.

하늘 향해서 부끄러움이 없는 진실함이 곧 공의입니다.

진실이 빠진 인애(사랑)는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거짓 없는 사랑이 곧 참사랑입니다.

 

2.

요즘 세상은 진실이 많이 왜곡되고 있습니다.

가짜가 판을 칩니다. 거짓말이 진실을 덮고 있습니다.

유튜브 쇼트가 자꾸 올라오는데,

진짜 같은 가짜가 너무 많습니다.

심지어 자연재해도 가짜로 만들어서 올리는데

진짜 같아서 깜빡 속을 때도 있습니다.

 

가짜 정보도 난무하고 있습니다.

가짜일수록 화려하고 그럴듯하기에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귀를 속이고

심지어 마음과 생각을 속입니다.

 

AI가 발달하면서,

진짜 같은 가짜가 더욱 많아질 것 같습니다.

우리 각자가 매의 눈을 갖고 살피는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겉모습이 아니라 우리 내면이 진실하길 원합니다.

참됨이 거짓을 이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사람들 앞에 섰을 때,

부끄러움 없기를 바랍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흠과 티가 많아서 주름이 깊어도

솔직하길 원합니다.

 

생명과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갑시다.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목에 매며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잠언 3:3-4)

 

하나님,

진리가 승리하는 세상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8. 21. 이-메일 목회 서신)

완벽함 넘어서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11일 The New Yorker라는 잡지에

“완벽주의의 고통(The Pain of Perfectionism)”

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이 ‘완벽주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완벽주의는 의기소침이나 절망감을 느끼게 할 뿐 아니라.

소화불량이나 통증처럼 몸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답니다.

 

기사에 등장하는 심리학자 프렛(Frett)과 휴잇(Hewitt)은

완벽주의를 세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1) 자기 자신이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기 지향적 완벽주의

2) 타인에게 완벽을 요구하는 타인 지향적 완벽주의

3) 사회가 자기에게 완벽을 요구한다고 느끼는 사회 규범적 완벽주의.

 

자기 지향적 완벽주의는

완벽을 위해서 쉬지 않고 자신을 몰아붙입니다.

자기 안에 작은 단점이라도 발견되거나,

무심코 실수해도 자신을 탓하고 심한 우울과 좌절을 경험합니다.

 

한시도 편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에게 완벽을 요구하는 마음의 목소리를
“잔혹하고 지루한 독백자”라고 했습니다.

심하게 말하면, 완벽주의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갉아먹고 삽니다.

 

타인 지향적 완벽주의는 더 큰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완벽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완벽을 요구하고,

불완전함이 드러나면 참지 못하고 벌을 주거나 화를 냅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완벽을 요구하면,

결혼생활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을 자기 마음에 맞추려고 하니

스스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상대방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줍니다.

 

사회 규범적 완벽주의는

소셜 미디어가 유행하고 서로를 비교하기 쉬운 요즘 세상에서,

자신만의 개성과 삶을 찾아가는 것을 방해합니다.

세상에 자신을 완벽하게 맞춰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2.

평생 완벽주의를 연구한 프렛과 휴잇은

완벽주의를 버리고 “존재의 가치(mattering)”에 집중할 것을 제안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발견하고,

자신의 삶에 집중하고,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완벽주의는 어떤 일을 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존재의 가치는 말 그대로 “나”라는 존재를 귀하게 여깁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내가 귀한 겁니다. 내가 자랑스러운 겁니다.

 

완벽주의를 벗어나기 위해서

단순히 기준을 낮추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기준만 낮췄을 뿐 여전히 완벽주의에 얽매일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함, 결함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부족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3.

기사를 읽으면서,

요즘 세상이 요구하는 완벽주의가 얼마나 무서운지 실감했습니다.

완벽주의를 추구하다가 42세에 생을 마감한 예도 있었거든요.

 

존재의 가치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부족해서 더욱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완벽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완벽주의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완벽주의라는 굴레를 벗어버리고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나를 찾아갑시다.

 

수고하고 무거운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 11:28)

Come to me, all who labor and are heavy laden,

and I will give you rest. (Mat 11:28)

 

하나님,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가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8. 14. 이-메일 목회 서신)

낯설게 하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어느덧 8월이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여러 가지 특별한 일이 많았습니다.

한 달, 한 주간, 어떤 때는 하루의 삶이

우여곡절일 때도 있었습니다.

다이내믹한 우리의 삶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일상을 삽니다.

밋밋한 인생길의 반복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아침 기도와 함께 하루를 시작합니다.

저녁에 침대 앞에서 무릎 꿇고 감사의 기도를 드릴 때까지

매일 반복되는 일상입니다.

 

다이내믹한 인생길이거나

반복되는 일상이거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갑니다.

 

반복되고 예사로운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니라

순간순간이 의미 있고 창의적인 “카이로스”를 삽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이 바로 이것입니다.

전도서에서 모든 것에 “때”가 있다는 말도

특별한 시간, 카이로스를 살라는 부탁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억지로 새로운 일을 꾸며서 해보지만,

그것도 금세 식상하고 맙니다.

 

2.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라는

문학 용어가 있습니다.

20세기 초, 러시아 형식주의에서 사용했던 말입니다.

 

작가는 지루한 일상의 것들을

낯설게 만드는 문학 기법을 익혀야 하고,

독자들 역시 문학 작품 속에 깃든 낯선 요소들을 찾아내서

문학 작품을 만끽해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문학 용어인 ‘낯설게 하기’는 우리의 삶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거나 도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반복되는 일상을 ‘낯설게’ 바라보고

그 속에 숨어 있는 ‘새로움’을 발견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를 통해 삶의 ‘설렘’을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의 삶을

새롭고 특별하고 낯설게 대하는 것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익숙한 일을 “그냥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깃든 특별한 의미를 찾고,

때로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자주 듣는 진부한 것(cliché)이 아니라

그것을 낯설게 만들고, 그 속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면서

하나님의 특별한 말씀으로 받고 읽는 것입니다.

 

주변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에서는 ‘가족’이라는 말이

특별하지 않은 익숙한 사람이라는

밋밋한 의미로 쓰일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매일 만나는 가족을(친한 이웃들도)

처음 만난 사람처럼 대하면

호기심도 생기고, 기대도 커지고

무엇보다 함부로 대하지 않고 예의를 갖출 것입니다.

새로운 의미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오늘을

새롭게, 낯설게 만들면서

그 속에 깃든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 (애가 3:23)

 

 

하나님,

다시 오지 않을 새날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