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유혹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아침에 읽는 요한 일서는

구십이 넘은 사도 요한의 편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에 걸맞게

사도 요한은 “사랑”을 갖고

신앙생활을 풀어가는 것이 특징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세상의 가치관과 분명히 구별된 삶을 살게 된다고 알려줍니다

초대교회 당시 요한 일서를 처음 읽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했습니다(요일2:16):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자기 몸을 위하고

더 많이 가지려는 탐욕으로 대표되는 육신의 정욕,

눈에 보이는 것을 쫓는 안목의 정욕,

이 세상에서 자랑할 것을 추구하는 이생의 자랑입니다.

 

2.

생각해 보면,

사도 요한이 말한 세 가지 유혹은

인간의 본성에 깊이 뿌리 박혀 있습니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악과를 보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창3:6)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에 이어서

하나님처럼 되려는 이생의 자랑까지 세 가지 유혹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러니

세상 속에 섞여 살면서

세 가지 유혹을 떨쳐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세상 것들에 빠져들게 마련입니다.

 

3.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이미 아시고

세 가지 유혹을 친히 당하시고 이기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인간의 몸을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40일 동안 계실 때,

마찬가지로 세 가지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첫째는, 돌로 떡을 만든 시험(먹음직하고, 육신의 정욕)

둘째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서 사람들의 눈에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라는 시험 (보암직도 하고, 안목의 정욕)

마지막으로 마귀에게 절하면

세상을 다스리게 하겠다는 권력에 대한 시험

(하나님의 지혜를 갖게 되는, 이생의 자랑).

예수님은 세 가지 시험을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우리도 올 한 해를 살아가면서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

광야의 예수님,

그리고 사도 요한이 세상의 것들이라고 정의한

세 가지 유혹을 순간순간 마주칠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어려울 수 있어도

우리를 위해서 모범을 보이신 예수님이 계시기에

말씀으로/믿음으로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

하나씩 내려놓고 이겨내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그 믿음의 길을 우리 함께 걸어갑시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있느니라 (히2:18)

 

하나님,

세상의 대세와 풍조에 휘말리지 않게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6. 1. 8 이-메일 목회 서신)

두 가지 기도

Happy New Year!!!

 

1.

말띠 해인 병오년(丙午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성경에서 “말(horse)”이 종종 등장합니다.

힘이 있는 동물로 묘사됩니다.

말이 끄는 전차가 대표적입니다.

구약 성경 스가랴에 나오는 네 가지 색깔의 말들은

요한 계시록에 그대로 등장하는데

세상을 정찰하고 심판하는 군대입니다.

 

‘말을 의지하지 말라’는 시편 말씀도 있습니다.

기마부대가 있는 이집트를 비롯한 제국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 백성답게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권면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말과 시합해서 이길 수 있는

믿음과 능력을 갖출 것을 요청했습니다: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렘12:5)

 

올 한 해

하나님 안에서 말과 경주할 수 있는

믿음과 힘을 갖출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지난 주일,

예수님의 손과 발 마지막 연속 설교에서

예수님의 가상칠언(架上七言)을 소개했습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능한 시간 순서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그렇게 정리한 예수님의 가상칠언은

신기하게도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속옷을 제비 뽑아 나누는 군병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자기를 해치는 군병들을 위한 기도이기에 더욱 고귀합니다.

이처럼 가상칠언 첫 번째는 <용서의 기도>입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에서 예수님은

자기의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依託)하십니다:

아버지,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 23:46).

 

인간의 몸을 입고 33년 동안, 세상에 사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드리신 마지막

그러나 가장 고요하고 고귀한 ‘맡김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에 평안(peace)이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도 언젠가 하나님께 갈 때, 예수님처럼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랬습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는

<맡김의 기도>는 언제나 필요합니다.

 

 

3.

2026년 한 해를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몸소 보여주신

예수님의 기도를 실천하면서2026년을 살아갑시다.

 

미움, 분노, 원망, 복수하려는 마음 등을 내려놓고

예수님처럼 용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용서의 기도’).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고 (‘맡김의 기도’)

예수님의 손을 꼭 붙잡고 한 해를 살기 원합니다.

 

용서하고 맡기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행복할 것입니다.

선하고 아름다울 것입니다.

 

올 한 해도 우리 주님께 온전히 맡기고 시작합시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편 55:22)

 

주님

2026년을 주님께 맡깁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6. 1. 1 이-메일 목회 서신)

궂은 일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두 주 동안 주말마다

비행기를 탔습니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비행기가 3시간 이상 지연되고

엔진 고장으로 다른 비행기로 갈아타야 하는 해프닝도 있었지만,

안전하게 다녀왔습니다.

 

비행기에 탑승해서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니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비행기에 승객들의 짐을 싣고,

비행 정비와 안내하는 사람들입니다.

시애틀 공항에는 주말마다 비가 내렸는데

빗속에서 그 궂은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좌석이 뒤쪽에 있어서

차례를 기다려서 내리다 보면,

앞쪽 승객이 앉았던 곳을

청소하는 분들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면서

승객들이 남긴 쓰레기를 모으고

좌석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계셨습니다.

 

2.

미국은 물론 전 세계가 공통적으로

K자형 모습을 띠고 있답니다.

 

위쪽에 있는 계층은 어려움을 모릅니다.

모든 것이 풍요롭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세상을 살아갑니다.

 

반면, K자의 아래에 계신 분들은

예전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우선, 물가가 많이 올랐습니다.

미국에서 체류 신분을 지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어렵게 하루하루 살아내야 합니다.

 

K자의 위쪽 가지보다

아래쪽 가지에 속한 분들이 훨씬 많을 것입니다.

자기 의견을 말하지도 못하고 속으로 삭히면서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어쩌면, 공항에서 궂은일을 하고 계신 분들이

하루 벌어서 하루 살아가는

소위 아래에 속한 분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3.

궂은일을 하시는 분들이

우리 사회에 없다고 상상해 보았습니다.

여기저기서 예상도 못 한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분들이야말로

말없이 세상을 바치고 있는 분들입니다.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분들의 귀함을 다시 깨닫습니다.

 

우리도 한 해를 살면서,

궂은일을 도맡아서 한 적이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때로는 직장에서도 말없이 궂은일을 담당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빛이 나지도 않고 칭찬받을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은 참빛 식구들께

칭찬과 찬사를 보냅니다.

 

더불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궂은 일에 종사하고 계신 모든 분을 응원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예수님도 3년 공생애를 사시면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궂은일을 하셨습니다.

섬김의 자리를 지키셨습니다.

 

인자가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8)

 

하나님,

궂은 일을 하면서

섬김의 자리에 지키신 참빛 식구들을 축복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2. 18이-메일 목회 서신)

 

좋은 아침입니다.

 

1.

저는 여정(journey)

또는 그냥 ‘길’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한때는 동네를 산책하면서

제 앞에 있는 길들을 사진으로 남긴 적도 있습니다.

매일 보는 길인데 새롭게 보일 때가 있고,

갔던 길을 돌아올 때 새롭게 보이는 감회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걷는 인생길,

예수님과 더불어 걷는 신앙의 길,

우리가 실제로 걷는 길까지

인생은 말 그대로 걸어가는 여정입니다.

 

생로병사, 우여곡절, 희로애락 –

길을 걸으면서 만나는 단어들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니 힘든 것에는 제외되고

좋은 것만 누리는 특혜를 얻고 싶지만,

마음처럼, 기도하는 것처럼 길이 펼쳐지지 않습니다.

 

타락한 이후의 세계,

땀을 흘려야 하고, 아이를 낳아야 하며,

만물이 타락해서 신음하는 세상은 나름의 자연법이 존재합니다.

 

때때로 자연법의 창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기적이 일어나지만,

그것은 여느 기독교인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매번 일어나는 일상이 아니라, 매우 특별한 예외입니다.

 

그러니 행여나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자신이 잘못해서 생긴 일로 자책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물론 실수해서 생기는 문제도 있지요.

그것은 얼른 교정하면 되는데,

우리가 길을 걸으면서 닥치는 대부분의 문제와 어려움은

생각보다 복합적입니다. 인생이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2.

주일에 ‘예수님의 발’을 공부하면서,

우리가 밟고 걷는 여정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전역을 걸어 다니시면서

기쁨과 평화, 생명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힘든 백성들을 만나시고 만져 주시고 치유와 회복을 선물하셨습니다.

부지런히 걸으셨습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걸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루살렘까지 걸어오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3년 공생애를 마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걷습니다.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요즘은 셀폰 앱이 있어서

우리가 걷는 곳을 다 표시해 줍니다.

 

우리가 가는 곳에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지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걷는 발길이 샬롬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길이길 원합니다.

 

예외 없이 때로는 무작위로 어려움을 겪지만,

그것도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라고 생각하면

억울함이 없어집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우리만 어려움에서 배제된다면

그야말로 욕심 아닐까요!

 

대신 인생의 희로애락 속에서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 모든 길을 걸으면서 예수님을 생각하고

순간순간 내려 주시는 힘, 지혜, 용기를 갖고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진지한 발길입니다. 소중한 발길입니다.

 

남은 올 한 해도 예수님을 따라서

뚜벅뚜벅, 때로는 사뿐사뿐, 꿋꿋하게 걸어갑시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23:10)

 

 

하나님,

우리가 가는 길에 빛이 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2. 11이-메일 목회 서신)

불가사리 이야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주에는

<오병이어의 기적>에 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작은 아이가 갖고 있던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가 드린 것을 손에 들고

하늘을 향해서 축사하시면서 생긴 기적입니다.

 

우리는 이번 연속 설교의 주제에 맞춰서
‘예수님의 손’에 주목했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우리의 문제, 기도 제목, 염려, 불안,

계획 등등 모든 것을 올려 드리기로 다짐했습니다.

 

동시에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드린

어린아이의 손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의 배고픔을 잊고

예수님께 내어드린 어린아이의 마음이

신기하고 대견했습니다.

 

이름도 없이 “한 아이’라고 기록된 손이

오 천명이 배불리 먹는 기적의 시작점이 된 것입니다.

 

2.

작은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종종 듣지만,

막상 작은 것을 실천하거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작은 자리에 있으면,

“이 작은 것이 세상에 도움이 될까”하는

회의가 찾아오고 때로는 주눅이 듭니다.

 

그때, 우리가 배운 오병이어의 기적,

특히 자기 도시락을 예수님께 드린

어린아이의 작은 손이 큰 힘이 됩니다.

 

제가 종종 인용하는 비슷한 예화도 생각납니다.

몇 가지 버전이 있지만, 제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한 노인이

큰 폭풍이 지나간 다음 날, 해변가를 걷고 있었습니다.

폭풍우에 밀려온 수천 마리의 불가사리가 해변가에 있었습니다.

 

저 멀리 한 아이가 불가사리를 한 마리씩 들어서

바다에 풀어주고 있습니다.

햇볕이 쨍쨍해서 금세 말라 죽을 상황입니다.

한 두 마리를 살려준다고 대세가 바뀔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아이의 행동이 이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노인이 아이에게 다가가서

그렇게 몇 마리를 살려준다고 무슨 큰 일이 생기겠냐고 물으니

아이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할아버지, 그래도 제가 바다에 던진 불가사리는 살아날 거예요.”

 

3.

그렇습니다.

작은 일이 소용없어 보여도,

오병이어의 작은 아이의 손처럼 큰 일로 이어지는

시작점이 될 수 있습니다.

 

해변가에서 죽어가는

수천 마리의 불가사리에 비하면 별것 아니지만,

그래도 바닷가에 들어간 불가사리는 생명을 유지할 겁니다.

 

작은 것에도 힘이 있습니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듯이

한 걸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작은 아이가 드린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받아 주신 예수님을 믿기에

우리는 작은 것에서 희망을 봅니다.

 

올 한 해,

각자의 자리에서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신

참빛 식구들께 박수를 보냅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것에도 불의하니라 (눅16:10)

 

 

하나님,

겨자씨 알에서

풍성한 열매를 아는 안목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2. 4 이-메일 목회 서신)

감사에서 기다림으로

Happy Thanksgiving!

 

1.

제가 처음 담임 목회를 시작했던

인디애나 교회는 장소와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서

수요 예배를 드리지 못했기에

수요 예배 대신에 목회서신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1, 2, 3 숫자로 단락을 구분하면서 서신을 작성했습니다.

 

그때까지 포함하면, 목회하는 내내 수요일 또는 목요일마다

교인들에게 목회서신을 보낸 셈입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교인들께 작은 힘을 보태기 위해서

서신을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어느덧 25년이 지났습니다.

시간이 빠름도 실감하고,

작은 것이라도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함을 스스로 배웁니다.

 

목요일마다 이-메일 서신을 보내기에

매년 11월 넷째 주 목요일 추수감사절을 비껴갈 수 없습니다.

대개 한 해의 감사한 일을 돌아보면서 준비합니다.

 

2025년 올해는

담임 목회를 시작한 지 25년,

샌프란 우리 교회에서의 목회 20년을 맞는 해이기에

그동안의 여정을 돌아보게 되고, 더욱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2.

지난주 설교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를 제안했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참되고 선하고 아름답게 인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물론,

힘들 때 조용히 다가와서

손을 꼭 잡아 주었던 이웃도 기억하길 원했습니다.

 

우리를 믿어주고,

힘들 때 함께 해주고

지친 손을 잡아 주면서 위로와 힘을 주었던 손,

예수님께서 보내주신 손길이었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며,

좋으신 하나님과 사랑하는 친지들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는 감사의 기념비를 세우는 마음으로

추수감사절을 뜻깊게 보내기 원합니다.

 

3.

감사절이 끝나면,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Advent)이 시작됩니다.

 

올해는 강단에 네 개의 촛불도 준비했습니다.

매주 하나씩 켜면서 온 교회가 예수님을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일찌감치 크리스마스트리도 준비해 놓았습니다.

주일에 부모님들과 아이들이 트리를 장식하면서

교회에서의 특별한 추억을 쌓고

성탄을 기다릴 것을 눈에 그리니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세상이 많이 어지럽습니다.

무엇보다 사분오열 갈라져 있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많이 그립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예수님의 마음을 갖고 살아갈 때

세상에 온전한 샬롬이 임할 것임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시간이기에 더욱 마음이 설렙니다.

 

2025년 성탄에는

우리들과 세상에 어떤 기쁜 소식을 갖고 오실는지요!

 

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 (렘33:15)

 

하나님,

감사함으로 우리 주님을 기다리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1. 27 이-메일 목회 서신)

온전함

좋은 아침입니다.

 

1.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의 마음에 이어서

지난주부터 예수님의 손과 발에 관한

연속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생각은 “생명”

예수님 마음은 “긍휼”

예수님의 손과 발은 “샬롬(평강)”이

핵심 메시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대한 첫 번째 말씀은

나병 환자를 고치신 사건이었습니다.

한 나병 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무릎을 꿇고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막1:40)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41절)고 말씀하시며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던 그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구약 시대는 물론 예수님 당시에도

나병처럼 보기 흉하고 치명적인 질병은

죄의 결과라고 보았습니다.

부정하였기에 그가 만지는 모든 것이 부정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손을 내밀어 만지시며

깨끗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인 것입니다.

그렇게 그를 살리셨습니다.

 

2.

마가복음은 이 사람을

나병환자(레프로스, leper)라고 정확히 알려줍니다.

 

그런데 나병에 대한 규정으로 알려진

레위기 13장 본문에는 “나병”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나병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가

오늘 날의 한센병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새번역은 “악성 피부병”이라고 옮겼습니다.

 

예배 후 한 집사님께서

레위기에서 묘사한 증상들이

오늘날 피부암에 가까운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피부암은 전염되지 않는데,

억울하게 격리되어서 암과 싸우는 경우도 생겼을 것 같습니다.

 

이처럼, 성경의 용어나 표현은

성경이 쓰일 당시에 통용되던 것입니다.

요즘의 과학이나 의학에 비교하면, 턱없이 미천한 수준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고 이해할 때는

성경이 쓰일 당시로 꼭 찾아가서

그 당시에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다”는 교리에 묶여서

당시의 상황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하나님 말씀으로 읽는 것은 위험합니다.

 

반드시

성경이 쓰여진 당시의 세계관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3.

레위기에서 피부에 발생한 질환과

그로 인해서 옷이나 물건까지 부정하다고 엄격히 규정한 것은,

하나님 백성의 “온전함(wholeness)”과 관련됩니다.

 

질환으로 인해서 피부가 온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나갈 수 없다고 규정한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의학이 발달한 시대에는

이 규정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습니다.

질병을 하나님의 벌 또는 저주라고 봐서도 안 됩니다.

올바른 성경 해석이 필요한 지점입니다.

 

구약의 율법이 ‘온전함’을 지향하듯이

우리의 성경 읽기 역시  ‘온전함’을 향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올바른 해석과 바른 신앙을 갖출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 5:48)

 

하나님,

매사에 온전함을 추구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1. 20 이-메일 목회 서신)

애통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에는

예수님의 마음에 관한 연속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의 울음, 예수님의 울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잃어버리고

몰락의 길로 향하는 예루살렘을 보고 우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러 가시면서

예수님의 의도를 모르니 슬퍼하는 친지들과 함께 우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날 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면서 우셨을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울음을 직접 언급한 적은 없지만,

아담과 이브에게 가죽옷을 입혀서 에덴을 내보내는 순간

하나님은 속으로 우셨을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직전, 인간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면서

하나님은 우셨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을 향해서 주야로 울었던

예레미야 선지자의 울음은 곧 하나님의 울음입니다.

 

2.

하나님께서 우시고, 예수님께서 우셨으니

우리 역시 우는 것이 결코 부끄러움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는 진실함도

울음 속에 들어 있습니다.

경우에 맞는 울음은 숭고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 팔복(八福)에서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복이 있다는 것은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젊어서는

애통하는 자의 복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말씀과도 부딪쳤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애통(哀痛)의 의미가 새롭고 깊게 다가옵니다.

 

‘애통’에 해당하는 헬라어 <펜토스>는

사랑하는 친지가 죽었을 때 느끼는 비통(悲痛),

자기의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면서 흐느끼는 통회(痛悔),

삶 속에서 닥치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모두 포함합니다.

 

인생이 우리 동네 날씨처럼 항상 맑을 수 없습니다.

열심히 살아도, 잘못이 없어도,

갑자기 밀어닥치는 손님처럼

애통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때는 마음껏 울 수 있습니다.

서러움에 흐느낄 수 있습니다.

소리치면서 엉엉 울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도 우셨고, 예수님도 우셨으니

애통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3.

저도 예전에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교회 강단에 엎드려서 한없이 울던 때가 있었습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가셨기에

아내 역시 자리에서 울면서 함께 애통했습니다.

 

그때 누군가 제 옆에 와서

제 어깨에 손을 올리면서 함께 울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돌아보니, 우리 교회 교육 전도사님이었습니다.

베트남 출신의 전도사가 새벽에 일부러 찾아와서 함께 울어준 것입니다.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울 수 있습니다.

 

우리 곁에서 함께 우시는 예수님이 되어서

누군가와 함께 우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힘이 될까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태 5:4)

 

 

하나님,

애통하는 자들을 위로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1. 13 이-메일 목회 서신)

방심은 금물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10월 19일 주일 오전 9시 30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람객이 방문하는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도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은 매해 8백만 명 이상이 방문합니다.

예약하지 않고는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문을 열자마자 수많은 관람객이 몰리는 곳입니다.

철저한 보안이나 경비는 필수입니다.

 

그런데, 박물관이 문을 열고 30분이 지난

휴일 아침 9시 30분에 도난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네 명의 범인은

박물관을 보수 중인 인부처럼 형광색 조끼를 입고

사다리차를 이용해서 귀중품들이 전시된 아폴로관으로 침투해서

전시해 놓은 유리 진열장을 부수고

나폴레옹이 왕비에게 선물한 사파이어 목걸이를 비롯한

귀중품 아홉 점을 훔친 후, 다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서

스쿠터를 타고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이들이 도난에 필요한 시간은 7분 내외였습니다.

 

도둑들이 훔친 귀중품들은 값을 매길 수 문화유산입니다.

대략 1억 달러로 추산합니다.

두 명은 잡혔는데, 훔쳐 간 귀중품의 행방은 묘연합니다.

 

밤중이나 새벽도 아닌

대낮에 세계 최고의 루브르 박물관이 도난당한 것은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은 이번만 도난 사건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1912년에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가장 유명한

모나리자가 이탈리아 출신 인부에 의해서 도난당했다가

2년 만에 다시 돌아온 경우도 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 도난사건 후에

귀중품이 전시되어 있던 아폴로관에

더 많은 관람객들이 몰린다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2.

세우기는 어려워도 허물기는 쉽습니다.

철저하게 대비하고 지키지 않으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될 때가 많습니다.

 

대낮에 발생한 루브르 박물관 도난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도둑들의 박물관 침입, 탈취와 도주까지 모든 과정은

영화 같은 극적인 장면도 없이 자연스러웠습니다.

성능이 떨어진 CCTV가 설치되었다는

박물관 책임자의 변명은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키지 않으시면

파숫군의 밤샘 지킴이 헛되다는 시편 말씀이 생각납니다.

물론 철저히 준비해야 하지만,

마음먹고 달려드니 세계 최고의 박물관도 털리니 말입니다.

 

새달이 시작되었습니다.

대부분 조심조심 새달을 시작합니다.

기도로 시작할 수밖에 없는 우리네 인생입니다.

방심은 금물입니다.

 

낮의 해가 상하지 않고

밤의 달이 해치지 않도록 지키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와 말씀으로 신실하게 새달을 살기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시편 127편 1절)

 

하나님,

깨어 있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1. 6 이-메일 목회 서신)

팁의 유래

좋은 아침입니다.

 

1.

미국에 살면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문화가 ‘팁(tip)’입니다.

팁을 지불하는 것이 당연하고

팁이 없는 한국에 가면 뭔가 허전할 정도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많은 것을 바꿔 놓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팁플레이션(tipflation)”이라고 불릴 정도로 높아진 팁입니다.

 

27년 전 처음 미국에 왔을 때,

보통 감사의 표시로 5-10%의 팁을 주었기에

팁이 부담되지 않았습니다.

커피처럼 간단한 것을 살 때는

특별한 서비스를 받는 경우를 제외하면 팁을 주지 않았습니다.

 

요즘 우리 동네에서는 18-25%의 팁이 계산기에 찍혀 나옵니다.

간단한 것을 사도 자동으로 팁을 줄 것인지 물어보니

난감할 때가 많습니다. 솔직히 큰 부담입니다.

 

2.

팁의 유래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저는 팁이 미국의 유일한 전통인 줄 알고 있었는데

16-17세기 유럽에서 시작되었답니다.

귀족들이 서비스 종사자들에게

감사의 표시를 한 것이 시작이랍니다.

 

영국의 선술집에서

TIP(to insure promptitude)이라고 쓰인 통에 돈을 넣으면

빠른 서비스를 제공했다는 전통에서

TIP이라는 용어가 나왔다고 봅니다.

 

유럽을 방문했던 미국인들이

팁을 주는 사람은 뭔가 있어 보이고

하찮은 일을 하는 사람을 도왔다는 자부심도 들어서

미국에 도입합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남북전쟁과 노예 해방이 되면서

팁은 석방된 노예들의 임금을 보장해 주는 데 이용됩니다.

주인들이 따로 임금을 주지 않으니

종업원들은 팁으로 먹고살아야 했습니다.

약간 서글픈 미국식 팁의 역사입니다.

 

3.

미국 연방 정부에서는

팁을 받는 종업원의 최소 임금을 $2.13으로 규정하고

팁 수입이 적으면 고용주가 $5.15의 크레딧을 주어서

최소 임금 $7.25를 맞춰야 합니다. 그리 높지 않습니다.

 

캘리포니아는 연방 정부 가이드라인을 따르지 않습니다.

무조건 캘리포니아(또는 각 카운티나 시) 최소 임금을 보장해야 합니다.

현재 $16.50입니다. 팁은 종업원들에게 그대로 돌아갑니다.

연방 정부 가이드라인에 비하면 꽤- 파격적입니다.

 

우리가 사는 캘리포니아는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하는 법률이나 규정이 많이 있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치우치지 않는다면 좋은 전통입니다.

 

노예에서 해방된 노동자들에게

따로 임금을 주지 않고 팁으로 먹고살게 했다는

팁의 역사가 씁쓸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습관적으로 행하는 많은 것에 특별한 역사가 있습니다.

힘없는 민초들의 서러움과 눈물이 베어 있기도 합니다.

 

불평하거나 무작정 반대하기보다

세심하게 살피고, 어려운 이웃을 배려하면서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기 원합니다.

 

p.s.

요즘 팁의 비율이 너무 높습니다.

현실적으로 조정되거나,

팁에 걸맞은 훌륭한 서비스를 제공받아서

팁이 아깝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

Whatever you wish that others would do to you, do also to them (Mt 7:12)

 

하나님,

서로에게 기쁨이 되는 세상이 되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10. 30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