뺨을 돌려대어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주일 애가서 말씀 중에 까다로운 구절을 만났습니다: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어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애 3:30)

 

하나님 앞에서 큰 재앙을 겪고 있는 이스라엘에 주신 말씀입니다.
앞 구절에서는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에
선지자를 통해서 예고하신 매우 큰 재앙이 찾아왔음을 알립니다.

 

이스라엘은
어려움이 계속되는 가운데 그동안의 잘못을 조사하고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아침마다 의지했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애가서가 알려주는 깊은 신앙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온 이스라엘은
입을 땅의 티끌에 대면서 회개했습니다.
잘못했지만, “혹시”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소망을 구했습니다.

 

그 다음에
자기를 치는 자들에게 뺨을 돌려대서
치욕으로 배부르게 하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에 재앙이 찾아오니
주변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는 행위는
잘못한 것을 가볍게 피해가지 않고
충분히 죄의 값을 치르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수요일에 살펴보는 사무엘하 말씀에서
신하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다윗이
연거푸 치욕스러운 일을 겪는 것도 생각납니다.
다윗은 묵묵히 자신이 감당할 멍에를 지고
어려운 기간을 견디고, 주어진 길을 갑니다.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는 죄값을 충분히 감당하는 모습입니다.
그 다음에 비로소 하나님의 본심을 발견하고
온전한 신앙으로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2.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라는 말씀은
“오른편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마5:39)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떠올리게 합니다.

 

비폭력 운동을 주창했던 월터 핑크는 그의 저서 <예수와 비폭력 저항>에서
당시 유대의 습관을 갖고 예수님 말씀을 풀어갑니다.

 

(상황을 눈에 그리면서 자세히 읽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정상적인 관계에서 상대방의 오른편 뺨을 치려면 왼손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 관습에서 왼손 사용은 금지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른손 손등으로 상대의 오른편 뺨을
치욕스럽게 “찰싹찰싹” 때리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이것은 주인이 노예를,
또는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치욕을 줄 때 사용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애가서에서 첫 번째 뺨을 맞는 것도 비슷한 상황이었을 겁니다.

 

그때 왼편 뺨을 돌려대면,
상급자는 왼편 손등을 사용해야 상대방에게 치욕을 줄 수 있는데
왼손은 사용 불가이니 할 수 없이 오른손을 들어서 왼편 뺨을 때려야 합니다.
오른손을 충분히 사용하는 것은 상대방을 동등한 경쟁 상대로 여기는 행위이기에
상급자는 몹시 당황해서 더 이상 폭력을 사용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군가 오른편을 때리면 왼쪽 뺨을 돌려대서
상대방을 어이없게 만드는 식으로
폭력에 저항하길 알려주셨다는 것이 월터 핑크의 해석입니다.
“치욕으로 배불릴 지어다”라는 애가서 말씀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러고 보니,
예레미야 애가에서 뺨을 돌려 대면서 치욕을 감수하는 것은
한편에서 이스라엘을 조롱하고 뺨을 내리치는 사람에 저항하는 행위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얘가서 3장 30절에는 주어와 목적어가 모두 “그(he)”여서 누가 누구인지 헷갈립니다.

 

3.
때때로 어려운 성경 본문을 만납니다.
애가서처럼 재앙을 겪고, 그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벌로 여기는 말씀 앞에서
당혹스러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에 모순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차근차근 말씀을 곱씹으면
말씀에 담긴 새로운 의미와 그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본심을 발견합니다.
숨은 그림을 찾고 보물을 찾는 것과 같은 성경 읽기의 묘미입니다.

 

때때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렵지만,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성경을 사랑하는 우리의 열정이 만나서
성경이 우리 모두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길 바랍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애가 3:33)

 
하나님,
아침마다 주시는 주의 말씀, 그 깊이에 스며들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 27 이-메일 목회 서신)

멍에를 메고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주일 예레미야 애가 본문에서
“멍에(yoke)”라는 표현을 만났습니다.
젊었을 때 멍에를 메는 것이 좋고
그것조차 하나님께서 메게 하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주일설교에서 의미를 설명했지만,
멍에에 대한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했습니다.

 

멍에는 고대 이스라엘은 물론 주변국들,
심지어 옛날 우리나라에서도
소나 나귀 같은 가축의 목에 걸어서 통제하고,
밧줄로 연결해서 농기구를 끌게 하는 기구입니다.

 

성경에서 멍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 쓰입니다.

 

우선, 노예 상태 또는 억압의 의미입니다(레26:13).
멍에에서 풀려나는 것을 해방으로 묘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멍에를 풀어주시는 해방자가 되십니다.

 

둘째로, 감당해야 할 짐입니다(렘27:2)
예레미야가 멍에를 매고 예루살렘에서 하나님 말씀을 전한 것,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것도 여기에 속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것을 감당하는 것을 멍에로 설명했습니다.

 

셋째로, 멍에는 연결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멍에 하나로 두 마리의 소를 연결해서
밭을 갈거나 농사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애가의 멍에는 두 번째 감당할 짐에 해당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이 감당해야 할 멍에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벗겨 주실 날이 분명히 올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쉼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참된 쉼을 얻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고 가던 율법의 멍에와 대비됩니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은 지키지 않으면서 백성들에게 과도한 멍에를 강요했습니다(마23:4)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자유가 없었고
신앙과 종교가 도리어 백성들을 억압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이것을 “종의 멍에”라고 불렀습니다(갈5:1)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참된 은혜의 종교,
진정한 해방의 복음을 전하시면서
이들에게 새로운 멍에를 소개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의 계명입니다(마22:36)

 

게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가 지고 가야 할 죄의 짐도 모두 없애 주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참된 쉼을 얻게 됩니다.

 

3.
주일 날 말씀드렸듯이
우리 모두 지고 가는 멍에가 있습니다.

 

행여나, 어떤 일이나 사람 또는 환경에 눌린 멍에가 있다면
하나님 안에서 자유케 되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또한 가정이나 세상 그리고 공동체 속에서
감당해야 할 멍에는 기쁘게 지고 예수님을 따르기 원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마음에 쉼을 얻으면서
올 한 해 주어진 인생길을 걷기 원합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마 11:29-30)

 

하나님,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멍에를 메고 살아가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 20 이-메일 목회 서신)

지루함을 넘어서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설교에서는
두세 문장의 <아침 기도>를 만들어서
매일 아침을 기도로 시작하시길 부탁드렸습니다.

 

아침 기도가 새날을 여는
아침 의식(morning ritual)이 되길 원했습니다.

 

실제로 많은 신앙의 위인들은
하루를 사는 기도문을 만들고
그것을 매일같이 반복해서 기도했습니다.

 

부족하지만, 저의 아침 기도문을 다시 소개합니다:
하나님,
새날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함께 해주시고 도와주세요.
저도 하나님 편에 서겠습니다.

 

2.
특정한 일을 반복해서 실천하면 그 일이 습관이 되고,
결국에는 성품과 인격으로 승화됩니다.
반복이 주는 효과요 선물입니다.

 

물론, 같은 일을 반복하다 보면
싫증이 나고 지루함도 느낍니다.
그때부터 그 일을 소홀히 하게 되고
많은 경우 자기도 모르게 슬쩍 내려놓습니다.

 

별것 아닌 일이라면 괜찮지만,
중요한 일이었는데 지루해서 포기했다면 꽤 아쉽습니다.

 

우리 말로
<원자 습관/Atomic habits> 이라고 직역할 수 있는 책의 저자는
원자 알갱이같이 작은 일들이 큰 결실을 맺을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책의 마지막 장 제목이 <딱 맞는 규칙 goldilocks rule>입니다.
어떤 일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너무 쉬운 과제도, 너무 어려운 과제도 아닌 딱 맞는 일을 찾아서
규칙적으로 실천하라는 제안입니다.

 

테니스를 배운다면,
너무 쉬운 상대를 택해서 쉽게 이길 생각을 하거나
너무 잘하는 상대를 만나서 기죽지 말고
자신과 비슷하거나 조금 잘하는 “딱 맞는 상대”와
이기고 지고를 반복하다 보면 실력이 일취월장한다는 것입니다.

 

지루해지거나 중간에 포기하기 쉬운 과제일수록
자신에게 딱 맞는 방식을 선택해서
끈기를 갖고 마지막까지 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3.
아침마다 드리는 기도 역시
언젠가 지루해질 것입니다. 시들해질 것입니다.

 

그래도 쉼 없는 반복을 통해서
아침 기도가 의식/습관이 되고
아침 기도의 유익과 힘을 실제로 맛보았을 때,
아침 기도가 흥미진진한 딱 맞는 기도(goldilocks prayer)가 될 것입니다.

 

아침 기도뿐 아니라
세상에서 소중하고 귀한 일들은 지루한 반복이 많습니다.
눈을 크게 뜨게 만들 정도의 흥미/재미가 없습니다.
그래도 지루함을 넘어서 신비로운 영역까지 꿋꿋하게 나가고
지루함을 예술로 발전시키는 카이로스를 살기 원합니다.

 

오늘 아침도 기도로 열고
힘차게, 열심히, 그리고 희망차게 시작합시다.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애가 3:23)

 

하나님,
지루함을 극복할 신앙의 신비를 맛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 13이-메일 목회 서신)

아침마다 새로우니

좋은 아침입니다.

 

1.

올해 우리 교회 표어는

<새롭게 시작합시다>입니다.

 

매년 맞이하는 새해는

달력이 알려주는 1월 1일입니다.

 

인류는 매우 지혜로워서

수천 년 전에 1년이 365일이라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밤에 뜨는 달의 변화를 보고 음력을 만들어서

농사를 비롯한 실제 삶에 적용했습니다.

 

4천여 년 전 고대 이집트인들은 현재 우리가 쓰는

태양력을 발명해서, 1년 365일, 12개월로 구분했습니다.

 

그런데 1년은 정확히 365.24219879일이어서

365일을 1년으로 하면 나중에 가서 차이가 생깁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그레고리력 (1582년)>에서는

4년마다 찾아오는 윤달로 차이를 조정했습니다.

 

이처럼 달력을 따라서 1년, 12개월을 사는 것은

매우 오래전부터 인류가 발명하고 실천한 삶의 양식입니다.

 

2.

달력을 따라서 사는 것을

헬라어로 <크로노스>라고 부르고,

단지 찾아오는 달력의 날짜를 살기보다

하루를 살더라도 의미를 찾으면서 창조적인 시간을 만드는 것을

<카이로스>라고 부릅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6일에 걸쳐서 세상을 만드셨다고 알려주지만,

6일이라는 시간 크로노스보다

빛으로 시작해서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신 창조 사건,

즉 하나님의 <카이로스>가 중요합니다.

 

크로노스라는 시간에 떠밀려 살면,

가는 시간이 아쉽고 오는 시간이 두렵습니다.

 

반면, 카이로스는 우리가 시간을 통제합니다.

같은 하루를 살아도 스스로 의미 있는 시간으로 가득 채워보는 겁니다.

그러면 시간의 흐름보다 시간에 채워 넣기(창조하기)에 집중하게 됩니다.

 

꿈 같은 휴가를 다녀오거나

중요한 프로젝트를 해내면

그 시간이 꽉 찬 것과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반면에 허송세월을 보내면

하루는 물론 일주일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는 생각에

후회가 밀려옵니다. 크로노스의 시간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3.

새롭게 2022년을 맞았습니다.

올해도 우리에게 어떤 일이 펼쳐질지

두려움과 기대가 섞여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기에

힘차게 그리고 담대하게 한 해를 시작합니다.

 

올해 주제 말씀처럼

아침마다 새롭게 찾아오실 하나님을 기대합니다.

매일같이 성실하심을 보여주실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간다면,

2022년 한 해는 카이로스, 창조적인 순간들로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애가 3:23)

 

 

하나님,

주님과 더불어 날마다 새로운 하루를 맞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6이-메일 목회 서신)

시작과 마무리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성탄절에 지구 한쪽에서는
25년간 100억 달러 이상을 투입해서 완성한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JWST)이
프랑스령 기아나에서 성공적으로 발사되었습니다.

 

기아나가 어디인지 구글 지도를 찾아보니
남미 브라질 위에 위치한 국가로 생전 처음 들어온 지명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을 때
그곳을 찾은 동방 박사들이
유대 땅 베들레헴이 어디인지 생소했을 것과 비슷합니다.

 

이번에 발사된 우주 망원경은
1990년에 발사된 허블 망원경의 관측 능력보다
100배가 큰 성능을 갖추었답니다.

 

테니스장 크기의 태양 막과
18개의 육각형 거울이 달린 6.5m의 주경까지
크기나 정확도에서 엄청난 망원경입니다.

 

우주 망원경은 다음과 같은 임무를 수행한답니다:
– 은하의 형성과 진화 연구
– 별과 행성계의 형성 연구
– 행성계와 생명의 기원 연구.

 

전문가가 아니어서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지만
“행성계와 생명의 기원”을 연구하게 된다는 것에 눈이 갑니다.

 

앞으로 최첨단 우주 망원경이 보내오는 우주의 자료들을 갖고
과학자들은 연구에 연구를 거듭할 것입니다.
과연 과학자들이 밝혀내는 우주와 생명의 처음(기원)은 어떤 결과일지요?

 

2.
혹자는 미국의 NASA가 주도하는 우주개발이
현대판 바벨탑이라고 부를 것 같습니다.
인간이 신의 영역을 탐하고 차지하려는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견에 반대할 생각은 없지만,
자칫 세상에서 고립되어서
문명을 거부하고 따로 생활하는 아미쉬들과 같은
배타적 기독교가 될 수 있다는 염려도 생깁니다.

 

물론, 하나님 없이 진행되는 과학 문명의 발달에
비판 없이 편승하는 것도 조심할 일입니다.

 

저는 이번에 발사된 우주 망원경이 가져올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대한 정보가 무척 궁금합니다.

 

혹시 이들의 정보를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3.
인간은 성탄절에 망원경을 쏘아 올려서 우주의 기원을 찾겠다고 나섰고,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인간은 위로 올라갔고, 하나님은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인간은 생명의 처음(기원)을 찾아 나섰지만,
하나님은 생명 자체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마지막,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을 알리십니다.

 

세상의 처음, 창조의 기원과 현장을 정확히 알지 못해도
올 한 해 생명 되신 예수님을 마음에 품고
예수님을 따르며 살 수 있어서 행복하고 감사했습니다.

 

샬롬!!!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계21:6)

 

처음과 나중이신 하나님,
시작과 마무리를 주도하시는 하나님,
올 한 해 우리를 귀히 여겨주시고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2. 30이-메일 목회 서신)

 

케노시스

좋은 아침입니다.

 

1.
기독교는 말 그대로 “기독(基督)”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성육신(incarnation)입니다.

 

성탄절은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처럼
세 가지 예물을 갖고 예수님을 찾아온 동방박사들처럼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성육신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자 매력입니다.

 

2.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과 동일한 본체셨는데
자기를 비워서 종의 형체, 즉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고 선포했습니다.

 

“자기를 비워(emptied himself)”에 해당하는
헬라어의 명사형이 “케노시스(kenosis)”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같은 본성,
하나님과 같은 지위를 모두 비우시고
사람이 되셨다는 케노시스의 정신은 기독교의 독특함입니다.

 

흉내만 내시거나, 겉모습만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기에
예수님은 우리를 완벽히 이해하고 공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의지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또한, 케노시스
– 모든 권리를 내려놓고 가장 낮은 종의 모습,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연약한 자와 함께 하고
고난받는 자를 같은 심정으로 위로하고
사랑받고 대우받기보다, 사랑하고 섬기는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3.
2021년 성탄절이 내일 모레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휴일 기분에 도취되거나
욕심과 탐욕,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느라
진정 중요한 케노시스(비움)의 예수님 마음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려놓을 것을 내려놓고
흘려보낼 것을 흘려보내고
지나치게 높은 곳에 눈길을 주다가
진정 지금 여기서 돌보고 사랑해야 할 것을 놓치고
훗날 아쉬워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베들레헴 작은 마을, 마구간에 오신
우리 예수님을 경배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갖기 원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2:5)

 
하나님,
예수님을 많이 생각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꼭 갖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2. 23이-메일 목회 서신)

토네이도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말에
미국 중서부 여덟 개 주에 30회 이상의 토네이도가 덮쳐서
100여 명에 가까운 사상자와 상당한 재산 피해를 가져왔습니다.

 

언론과 유튜브 등에서 보도되는
토네이도가 훑고 지나간 참상을 보고 있으면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초토화되었습니다.

 

가장 큰 피해를 당한 켄터키의 경우
아주 오래된 교회 건물이 거의 사라졌고
시청 건물도 반 이상이 무너졌습니다.

 

일리노이의 아마존 창고도 토네이도로 인해서
절반이 무너지고 사상자가 났으니
아무리 견고하게 짓고 오랫동안 견뎌왔던 건물이라도
이번에 몰아닥친 토네이도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2.
예전에 인디애나에 살 때
토네이도가 지나간 자리를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10m 정도 되는 넓이로 토네이도가 지나간 흔적이었는데
마치 트랙터로 집이며 나무를 밟고 지나간 것처럼
명확히 길이 날 정도로 부서져 있었습니다.

 

그 옆을 지나면서 저도 모르게
“와—” 하는 안타까움과 놀라움의 탄성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종종 중서부를 강타하는 토네이도의 위력은 대단합니다.
지붕이 날아가고, 토네이도 한 중심은 자동차도 날려 보낼 기세입니다.

 

그 위력을 알기에
중서부에서는 정기적으로 토네이도 대비 훈련을 합니다.
토네이도 경보가 울리면, 우선 건물 밖으로 대피하는 식입니다.
혹시 집 안에 있다면, 건물이 파괴될 것을 예상해서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곳으로 피신해야 합니다.

 

100여 명에 가까운 숫자가 적지 않지만
이번에도 미리 대피했기에 사상자 숫자를 줄였을 것입니다.

 

3.
최대한 피해를 줄이려 노력할 뿐
자연재해를 인간의 힘으로 막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여름철 플로리다와 동부에 밀어닥치는 허리케인,
중서부의 토네이도
서부의 지진과 최근의 산불 등
미국에도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자연재해가 있습니다.

 

성경에도 가뭄, 홍수와 해일, 지진 같은
자연재해를 하나님의 심판 또는 하나님께서 펼치시는 능력으로 여겼는데
수천 년이 지나고 과학 문명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난제로 남아 있습니다.

 

막을 수 없는 재난과 그에 따른 고난인데
그때마다 피조물인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를 깨닫습니다.

 

아침에 읽는 욥기에도 토네이도 급의 폭풍이 등장합니다.
욥이 믿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고 주관하심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폭풍 속에 임하신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을 듣고
욥이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욥이 창조주 하나님을 만난 에피파니(epiphany)의 순간입니다.

 

4.
토네이도 정도는 아니어도
크고 작은 어려움에서 면제되는 인생은 없기에
철저하고 올바르게 준비할 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고,
이 세상보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사는 것도 꼭 필요합니다.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더 없는 축복입니다.

 

성탄절을 앞두고 밀어닥친 토네이도로
어려움을 겪을 이재민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힘이 임하길 기도합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겠으니 내게 대답할지니라 (욥 38:6-7)

하나님,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2. 16이-메일 목회 서신)

엘리후

좋은 아침입니다.

 

1.
아침마다 읽는 말씀이
내일(금)부터 다시 욥기로 돌아갑니다.
욥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셈입니다.

 

다시 읽을 욥기는
엘리후의 연설(32-37장)과
폭풍속에서 욥을 찾아오신 하나님 말씀(38-42장)이 주요 장면입니다.

 

욥기 전체에서 엘리후의 연설이 차지하는 비중이 큽니다.
혹자는 엘리후가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볼 정도로 엘리후의 연설이 탁월합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에돔 출신의 이름을 가진 세 친구와 달리
엘리후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다”)는 이스라엘 배경도 갖고 있습니다.

 

엘리후는 욥이나 친구들에 비해서 젊습니다.
당시에는 젊은 사람보다
나이가 든 장로들이 지혜롭다는 생각하였습니다.

 

엘리후는 이러한 관습에 도전합니다.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속에 있는 영에 하나님의 숨결이 임했을 때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엘리후가 그렇게 주장할 만합니다.
그는 욥이나 세 친구와 달리
하나님의 창조 사역, 개인과 역사에 임하는 섭리를 강조합니다.
엘리후에게 하나님을 바라보는 넓이가 깊이가 있습니다.

 

2.
엘리후는
스스로 의롭다고 주장하는 욥과
욥에게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세 친구를 싸잡아 비판합니다.

 

엘리후는 자기 지식을 과신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섣불리 결론을 내리고
거침없이 자기 주장을 펼칩니다.

 

이런 엘리후를 보고 있으면
신학교를 갓 졸업하고 목회에 나온 젊은 전도사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때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고
신학교에서 배운 것을 기초로
세상이나 신앙에 관해서 거침없이 판단하고 자기 주장을 펼치기 때문입니다.

 

특히,
욥이나 욥의 친구 모두 잘못했고
자신만 옳다는 일종의 양비론(兩非論)과
엘리후의 자기 교만이 마음에 많이 걸립니다.

 

등장하자마자
욥과 친구들을 향해서 화를 내는 것도
엘리후가 아직 성숙하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그런 점에서 엘리후와 예수님을 비교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엘리후에게 점수를 후하게 준다면,
이어서 등장하시는 하나님과 욥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 정도입니다.

 

3.
우리는 빌레몬서를 함께 읽으면서
“품격”을 계속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사도의 권위나 연장자라는 나이를 들어서
빌레몬에게 명령하거나 그를 몰아붙이지 않았습니다.

 

빌레몬이 도망친 종 오네시모를 받아 주기를
신사적으로, 절차를 지키고 배려하면서 부탁했습니다.

 

그에 비하면 엘리후의 연설은 자기 과시입니다.
아무리 바르고 옳은 말을 해도
말하는 사람의 성품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말에 힘이 생기지 않습니다.
도리어 듣는 사람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을 살고 있습니다.
한 해 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 돌아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해 동안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살았는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 인격’을 갖췄는지 돌아보고 싶습니다.

 

마음 씀씀이, 언어 습관, 소소한 행위와 삶을 돌아보면서
믿음과 사랑이 함께 가는 주님의 사람, 예수님을 닮은 주의 백성이 되기 원합니다.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빌1:5)

 

하나님,
한해동안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주님의 사람으로 성장했는지 돌아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2. 9 이-메일 목회 서신)

생명의 약속

좋은 아침입니다.

 

1.
조심스럽기는 했지만,
지난주 감사절 목요 서신을 보낼 때만 해도
세상이 코로나바이러스에서 벗어날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의 발걸음도 가볍고
마스크 속의 입가에 환한 미소도 살짝 보였고
거리에 자동차도 예전만큼 늘었습니다.
드디어, 끝이 보일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남아공에서 들려온
오미크론 바이러스 소식에 세상이 다시 긴장하고 있습니다.
“오미크론”은 헬라어 24개 알파벳 가운데 열다섯 번째이고
영어 “O”(오) 음가를 갖습니다. 정말 “오—“하고 깜짝 놀랄 일이 생겼습니다.

 

델타 변이 때는 백신이 막아 줄 수 있다고 했는데
오미크론 변이는 기존의 백신으로 장담할 수 없다는 분석에
세계가 더욱 긴장하고 여러 나라가 서둘러 문을 걸어 잠그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비즈니스, 학교, 여행 등의 길이 열렸는데
며칠 만에 분위기가 급냉각되고 있습니다.

 

감염속도는 빠르지만, 치명적이지 않다고 하는데도
지난 2년 동안 워낙 힘들게 살았기에
지레 겁을 먹는 경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2.
언제까지 마스크를 써야 할지요?
언제까지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고 이웃들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지요?
과연 우리 교회는 내년 3월에 완전히 열 수 있을지요?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바이러스가 사라지지 않는 것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은 무슨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고 싶으신 것일까?
바이러스가 이처럼 오래 지속될 때 하나님께서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 등등.

 

머릿속에서는 질문이 계속되지만,
결국 저도 모르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세상을 살려주세요!”

 

인간의 연약함을 절실히 느끼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3.
엊그제 아침 묵상에서
아들 같은 자기 후계자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는 사도 바울이
“생명의 약속(the promise of life)”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생명에 해당하는 헬라어 <조에>는
죽음의 반대, 말 그대로 살아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온 피조물이 신음하는 타락한 세상이지만,
코로나바이러스로 세상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지만,
죽음까지는 아니어도 사람들 마음에 두려움이 쌓여가지만,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생명의 약속”을 꼭 붙들고 싶습니다.

 

새로운 변종 바이러스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세상에
빛과 생명을 선포하고, 생명의 약속이 있음을 보이고 싶습니다.
어려울수록 힘차게 살아가는 하나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아침에,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주의 긍휼을 구합니다.
생명의 약속, 소망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딤후 1:7)

 

하나님,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우리 안에 심어진 “생명의 약속”을 꼭 붙들고
그것을 세상에 전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2.2이-메일 목회 서신)

 

행복한 감사절

감사절 아침입니다!

 

1.
지난주일
교회 정리를 마치고
근처 쇼핑몰에 들렸는데
주차 자리를 찾기 위해서 20여 분을 돌아야 할 정도로
커다란 주차장이 차들로 꽉- 찼습니다.

 

오랜만에 활기를 되찾은 모습을 보니
주차 자리를 찾는 것이나 줄을 길게 서는 것에
짜증보다 왠지 마음이 환해졌습니다.
예전의 일상으로 회복한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작년에는 감사절을 지킬 엄두를 내지 못했고
문을 열지 않은 상점도 많았습니다.
가족 모임까지 제한했습니다.

 

그에 비하면
올해 감사절은 거의 예전 수준으로 돌아온 느낌입니다.

 

2.
여행 전문 기관인 AAA의 예측에 의하면
올 추수감사절에 5천 3백만(53 mil) 정도가 이동한답니다.
2005년 이래, 한 해 여행객 증가율 최고 수치입니다.
그만큼 작년에 발이 묶였던 셈입니다.

 

가스 값이 무척 비싼 데도
자동차 여행이 으뜸으로 전체의 90%를 차지하고
비행기와 기타 대중교통 수단이 나머지 10%입니다.
항공편을 이용한 여행객은 작년보다 배가 늘었습니다.

 

AAA에서는
올해 감사절 여행을 즐기되 마스크를 꼭 챙기고,
도로는 물론 공항까지 인파로 붐빌 것을 예상하고
지혜롭게 계획을 세우라는 팁을 전했습니다.

 

3.
팬데믹 한 가운데 있을 때는
이 정도의 일상 회복도 기약할 수 없었는데
함께 노력하고, 조심하니 이런 날이 찾아왔습니다.
어두운 밤이 계속될 것 같아도
새벽이 찾아오듯이 …

 

팬데믹 뿐 아니라
우리 삶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들도
결국에는 빛에 굴복하고 좋은 날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때를 기대하고, 신앙 가운데 앞을 보면서
인생의 골짜기를 걷는 것이지요.

 

4.
아직은 아슬아슬한 측면이 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 변이가 등장할 수도 있고
백신 접종에도 불구하고 돌파 감염이 늘어나서
다시 문을 닫는 유럽 국가도 있습니다.

 

감사절을 맞아서 출타하신 참빛 식구들도 많으신데
안전한 여정이길 기도합니다.
오랜만에 가족과 친지들과
마음껏 즐기시고 좋은 시간 가지시길 바랍니다.

 

행여나
추수감사절을 맞는 마음이 무거우시다면,
저 앞에 빛으로 계신 우리 주님을 바라보면서
소망 가운데 감사절을 지내시길 바랍니다.

 

결국에는 빛이 찾아올 것입니다.

 

 

해피 땡스기빙!!!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시편 36:9)
For with you is the fountain of life;
in your light do we see light. (Ps 36:9)

 

하나님,
감사절을 맞는 참빛 식구들께
풍성함을 더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11. 25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