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설교의 주인공인 아람 장군 나아만은
엘리사 선지자의 말을 듣고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고 나병에서 깨끗해졌습니다.

 

<깁보르 하일, 용맹스럽고 유능한 사람>로 불렸던
아람 장군 나아만이었습니다.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그의 몸에 있는 나병입니다.
전염될 정도는 아니지만,
나병으로 엉망이 된 자기 몸을 볼 때마다 절망적이었을 것입니다.

 

나아만은
자기 집에 있던 이스라엘 ‘꼬마 여자 종’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로 내려갔고
선지자 엘리사의 말을 듣고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었습니다.

 

그의 말처럼
요단강에 몸을 씻는 것은 일상적인 일입니다.
절대로 특별한 치유법이 아니었습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나아만은 결국 엘리사의 말을 쫓았고
몸이 깨끗해 졌고, 하나님까지 만났습니다.

 

무엇보다 일곱 번을 채웠습니다.

 

2.
지난 금요일에는
생전 처음 자이언츠 구장에 가서 야구 경기를 보았습니다.

 

요즘 자이언츠의 성적이 그리 좋지 못해서
큰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경기는 예상대로 싱겁게 끝날 듯했습니다.
2점을 먼저 냈지만, 힘없이 한 회에 5점을 내주면서
8회까지 5대2로 지고 있었으니까요.

 

시간이 밤 10시를 훌쩍 넘었기에
함께 간 집사님 아이에게 그냥 가자고 했더니
‘꼬마 아이’가 끝까지 보겠다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졸려서 눈이 반쯤 감긴 것 같았는데 신기했습니다.

 

많은 관중이 이미 경기장을 빠져나간 상태에서 9회말 마지막을 맞았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첫 타자부터 홈런을 터뜨리더니 그다음에도 싱글 홈런이 나옵니다.
상대 팀이 흔들린 틈을 타서 베이스를 모두 채웠고
다음에 나온 타자가 초구를 쳐서 만루 홈런(끝내기 그랜드 슬램).
9회에만 6점을 내서 8:5로 승리했습니다.

 

처음 찾은 자이언츠 구장에서 인생 경기를 관전한 것입니다.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3.
주일 친교 시간에 야구장에 갔던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 집사님이
“목사님 오늘 설교의 일곱 번과 딱 맞는데요”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나아만이 일곱 번을 채우면서 몸이 깨끗해 졌습니다.
중간에 포기했다면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야구장에 수만 명(?)이 왔지만,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사람들만이
9회 말에 대역전하는 드라마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끝을 보는 것이 늘 중요합니다.
그 끝에서 무엇을 이루면 금상첨화입니다.
행여나 극적인 결과를 얻지 못해도,
어떤 일이나 과정을 끝까지 마무리했다는 것 자체에 의미가 큽니다.

 

나아만 장군의 일곱 번도
완전수 7과 더불어 끝까지 엘리사 말을 따랐다는 뜻이 강합니다.

 

오늘 하루,
진행 중인 일이나,
길을 걷고 있는 우리 인생에서 ‘일곱 번’을 꼭 채우기를 원합니다.
특별한 일이 아닌 요단강에서 생긴 일상의 사건이라는 사실도 기억하고 싶습니다.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왕하 5:14)

 
하나님,
매사에 일곱 번을 채울 수 있는
믿음과 끈기를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7. 21이-메일 목회 서신)

일상의 힘

좋은 아침입니다.

 

1.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일상을 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많은 경우, 신앙(특히 기도 응답)을 생각하면
특별한 기적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많은 기적이 등장하니
그것을 우리도 경험할 수 있다고 믿는 식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살아서 일하심을 믿습니다.
그런데 기적만 바라보는 신앙은 건강하지 않습니다.

 

특별한 것, 기적을 추구하는 것은
쉽게 눈에 띄고 많은 사람의 관심을 불러일으키지만,
자칫 한쪽으로 치우친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2.
우리는 일상을 삽니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삶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합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수행합니다.

 

특별해 보이지 않기에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합니다.
때로는 일상을 사는 것에 지치고 마음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우리 삶 대부분이 일상입니다.
특별한 순간은 구름 속에 잠깐 얼굴을 내밀고 세상을 비추는
해님처럼 금세 지나갑니다.

 

3.
일상을 사는 것은
아주 작고 사소해 보이는 일에 충실한 것입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소개했던
주일마다 저에게 신문을 전해 주시던
뉴욕의 집사님을 다시 생각합니다.

 

집사님은 교회에서 눈에 띄는 직책을 갖고 계시지 않았고
아이들이 어려서 중고등부를 맡았던 저와 겹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한국에서 막 도착한 중고등부 전도사에게
매 주일 신문을 모아서 슬쩍 전해 주셨습니다.
그 사실을 아는 교인들도 거의 없으셨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집사님께서 주시는 신문은
읽지 않으신 새 신문 같았습니다.
저에게 전해주기 위해서
조심스레 신문을 펼치고 읽으셨음이 틀림없습니다.
일상을 사시고, 일상에서 사랑을 실천하신 집사님이셨습니다.

 

그 정성과 마음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신문을 전해 주시던 집사님의 모습도 생각납니다.

 

집사님의 작은 사랑, 작은 배려가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제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일상의 배려와 사랑의 힘입니다.

 

사소하고 지나치기 쉬운 것에 성실하고
일상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진짜 특별한 순간입니다.

 

일상의 배려와 사랑이 모여서
우리 인생을 아름답게 수놓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과 인생이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
일상을 예술로 만들어 봅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전도서 3:11)

 

하나님,
작은 것에 충실하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7. 14이-메일 목회 서신)

악의 평범성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설교에서는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나오는
“악의 평범함 banality of evil>이라는 용어를 소개했습니다.

 

아이히만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조직적으로 주동한 인물입니다.
체포된 후에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한나 아렌트는 그 과정을 보고서 형식으로 기록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평범한 사람이었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성실한 정부 관리였고, 한 가정의 가장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유대인 학살이라는 엄청난 일을 저지르게 된 것은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환경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유대인 학살을
양심의 가책도 없이 실행했습니다.
죄 속에 들어 있을 때 느끼는 감정이요 행동인데
한나 아렌트는 이것을 <악의 평범함>이라고 불렀습니다.

 

2.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함>이라는 용어는
큰 울림을 주는 무서운 표현입니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도
죄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환경에 있으면
양심의 가책 없이 악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주일 설교에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Amazing grace>찬송가를 지은
존 뉴턴이 살던 영국 사회가 노예무역을
일반적이고 평범한 것으로 여긴 것이
<악의 평범함>의 한 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기독교인들도 노예무역과 노예를 두고 사는 것에
아무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행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지은 존 뉴턴도
노예 무역상의 선장으로 악의 평범함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목사가 되면서
노예무역의 부당함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윌리엄 윌버포스라는 정치인을 발굴하고 격려하면서
영국의 노예무역과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데 크게 공헌했습니다.
악의 평범함에서 벗어났고 악의 고리를 끊어버린 것입니다.

 

3.
존 뉴턴이나 윌버포스 같은 선각자들에 의해서
세상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래도 어디선가, 어떤 영역에서는
보통 사람들이 범하는 죄들이 존재할 것입니다.

 

<악의 평범함>
–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두고두고 곱씹을 용어입니다.

 

우리도 잘못된 일을 무심코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가 관행으로 받아들이는 일이기에
죄책감이나 문제의식 없이 행할 수 있습니다.

 

타인에 대한 편견, 배척,
관행처럼/습관처럼 내려오는 그릇된 일들,
“다른 사람도 하는데 뭐”라고 생각하면서 범하기 쉬운 오류들
– 평범함 속에 도사리고 있는 그릇된 일들을 찾아내고 시정해서
밝고 맑은 세상을 세워 나가기 원합니다.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변호해 주시며
궁핍한 자에게 정의를 베푸시리이다 (시 140:12)

 

하나님,
우리 안에 무심코 행하는 악한 일들이 있으면
깨우쳐 주시고 고칠 용기를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7.7 이-메일 목회 서신)

내려놓기

좋은 아침입니다.

 

1.
2022년 상반기 마지막 날입니다.

 

우리 교회는
팬데믹이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오길 기대하면서
<새롭게 시작합시다>라는 주제로 새해를 맞았습니다.

 

반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온전한 세상이 되지 못했고
7불에 육박하는 개스비와 높은 물가 상승,
전쟁과 총기 사고 등으로 세상이 뒤숭숭합니다.

 

그래도 각자의 자리를 지키시고
지난 반년을 꿋꿋하게 살아오신 참빛 식구들을
응원하며 큰 박수를 보냅니다.

 

2.
서양에서는 일찍이 누구나 피하고 조심해야 할
7개 죄악(seven deadly sins)의 목록을 만들었습니다:
교만(pride), 시기(envy), 분노(wrath), 게으름(sloth),
욕심(greed), 식탐(gluttony), 색욕(lust).

 

일곱 가지 모두
성경에서 삼가라고 거듭 강조하는 것들입니다.

 

올해의 반년을 보내고 하반기를 맞으면서,
일곱 가지 죄들 가운데 “욕심”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욕심에서 “욕(慾)”의 한자어는
“하고자 할 욕(欲)”자 아래 마음 심(心)이 합쳐진 글자입니다.
무엇을 얻고자 하고, 하고자 하는 마음이 지나친 것이 욕심입니다.

 

말 그대로 탐욕입니다.
과한 것입니다.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갖고 싶은 마음입니다.
혼자서 독점하려는 마음입니다.

 

욕심에 해당하는 영어 greed 역시
물질이나 소유에 대해서
과할 정도로 갖고 싶은 마음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우리 안에는 더 많이 갖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많이 갖는 것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의 본성을 신앙으로 제어하고,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욕심만 내려놓아도 우리 삶이 한결 가볍고
많은 것에서 자유로울 것입니다.

 

3.
우리 안에 있는 욕심을 제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과한 것은 없습니다.

로마서에서는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어떤 빚도 지지 말고
사랑할 때 모든 율법을 이룬 것이라고 했습니다 (롬13:8).

 

믿음, 사랑, 소망 세 가지 덕목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입니다(고전13:13)

 

우리 가운데 사랑이 있을 때
욕심이 슬며시 사라집니다.
그런 점에서 욕심의 반대말은 사랑입니다.

 

2022년 한반기를 맞으면서
욕심은 내려놓고 사랑을 장착하고 싶습니다.
하루에 한 가지씩만 작은 사랑을 나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눅12:15)

 

하나님,
우리 안에 욕심이 사랑이 되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6. 30 이-메일 목회 서신)

스윗 스팟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설교에서 잠깐 언급했던
스윗 스팟(sweet spot)은 스포츠 용어에서 유래했습니다.

 

테니스 라켓에서 힘을 많이 쓰지 않고도
강하고 정확하게 공을 보낼 수 있는 지점을 가리킵니다.
테니스는 물론 골프와 야구에도 스윗 스팟이 있답니다.

 

스윗 스팟이라는 용어는
스포츠뿐 아니라 다양하게 확대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가장 잘 관람할 수 있는 자리를
스윗 스팟이라고 부릅니다. 뒤에서 3분의 1지점이랍니다.
상점에서도 상품이 가장 잘 팔리는 곳이 스윗 스팟입니다.

 

거래에서도 사고 파는 사람의 이해관계나 가격대가
정확히 맞았을 때, 그 지점을 스윗 스팟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스윗 스팟은
어떤 일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지점을 가리키는 용어로
두루 사용되고 있습니다.

 

2.
스윗 스팟(sweet spot)의 문자적 의미는
“달콤한 지점”입니다.

 

여러 가지 것들이 한군데로 모여서
달콤하고 기쁘고 경이로운 지점이 형성될 때
그곳이 바로 스윗 스팟입니다.

 

신앙의 스윗 스팟은 어디일까요?
신앙에 대한 지식/교리 (머리, head)
하나님을 경험하는 체험, (가슴, heart)
배우고 느낀 것을 실천하는 삶, (손, hands)
– 세 개의 H가 모이는 곳이 신앙의 스윗 스팟일 것입니다.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이웃을 향한 사랑
자기 자신을 위한 사랑
– 세 가지 사랑이 모이는 곳이 스윗 스팟입니다.

 

그러고 보니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활동과 관계가
하나님 사역의 스윗 스팟이 될 것 같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주일에 함께 모이는 예배와 친교가
때때로 힘겹고 지루한 일상에
달콤함을 주는 스윗 스팟이길 바랍니다.

 

3.
기도에 대한 말씀을 전하면서
각자에게 맞는 기도 방식과 내용
즉 기도의 스윗스팟을 개발하시길 부탁드렸습니다.

 

억지로 기도하는 것,
일이 잘못된 것을 두고 기도하지 않았거나 덜해서 그렇다고 자책하는 것
기도 응답에만 연연하는 것
남에게 보이려는 기도 등
– 이런 식의 기도가 절대로 스윗 스팟이 될 수 없습니다.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때가 가장 즐겁다”로
시작하는 찬송가 364장의 제목이
“Sweet hour of prayer/달콤한 기도 시간”이듯이
하나님과 만나는 기도가 가장 즐거운 시간이길 바랍니다.

 

기도가 우리 신앙과 삶의 스윗 스팟이 되길 원합니다.
기도가 습관이 되고, 기도가 즐겁고 기쁘며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이어지는 경이로움을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골4:2)

 

하나님,
우리의 기도 시간이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경이로 채워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6. 23 이-메일 목회 서신)

그러나 기도

좋은 아침입니다.

 

1.
2022년 기도에 대한 연속 설교는
누가복음의 겟세마네 기도가 본문입니다.

 

십자가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께서
습관대로 감람산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계획)이라면
앞에 있는 잔을 옮겨주시길 요청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십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누가 22:42)

 

2.
저는 주일 설교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를 <그러나 기도>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아버지께 모든 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듯이
하나님을 향해서 “아바(Abba)”아버지라고 친근하게 부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솔직하게 구하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마지막은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길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러나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최선이라는 믿음에서 “그러나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을 확실히 믿고,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모든 기도를 예수님처럼
“그러나 기도”로 마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신앙입니다.

 
3.
우리가 기도할 때,
기도의 응답에 초점을 맞출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드린 기도의 응답 여부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신앙이 좌에서 우로 크게 움직입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의 기도가 나 중심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내가 드린 기도에 응답하시고,
하나님의 계획도 나의 계획에 맞춰서 조정되길 바라는
이기심이 우리 기도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존재 여부, 신앙의 확신이
하나님이 아닌
내가 드린 기도의 응답에 매이게 됩니다.

 

늘 말씀드리듯이
신앙은 나에서 하나님께 중심축을 옮기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기도에 대한 연속 설교를 나누면서
기도가 습관이 되고
참빛 식구들께 “그러나 기도”가 온전히 장착되길 바랍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누가 22:42)

 

하나님,
우리의 기도와 신앙이 하나님을 향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6. 16 이-메일 목회 서신)

감사

좋은 아침입니다.

 

1.
찬송가 288장을 작사한
시각장애인 패니 크로스비에 대한 말씀을 지난번에 나눴더니
아내가 우연히 재미 금융인 신순규씨가 출연한
예능 프로그램을 유튜브에서 보았다고 알려줍니다.

 

신순규는 녹내장과 망막 바리라는 질병으로
아홉 살 때 시력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당시에 시각장애인들이 주로 갖는 직업이었던
안마사가 되는 것보다 피아니스트가 되길 바라서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점자책을 손수 만들어서 아들에게 주었고
어머니의 수고에 감사한 아들은 그것을 갖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열다섯 살에 홀로 미국에 유학와서 피아노 수업을 하다가
일반 학교로 전학해서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때 만난 미국 양부모님의 격려와 도전이 큰 힘이 되었고,
일반 학교 선생님들도 신순규라는 학생을 위한 특별 교재를 만들고
양궁 수업까지 시켜 주었답니다.

 

앞을 못 보지만 활달하고 도전적인 성격 덕분에
학생회장도 하고, 결국 전액 장학금을 받고 하버드에 입학했고
MIT에서 석사과정을 밟다가 월스트리트와 연결되어서
27년째 세계적인 금융회사에서 애널리스트로 일하고 있습니다.

 

2.
이분에 대해서 검색해 보니
이미 한국에서 두 권의 책을 출판했습니다.
그 가운데 2021년 팬데믹 기간에 출판한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들>을 전자책을 구입해서 단숨에 읽었습니다.

 

대단한 분입니다.
헬렌 켈러와 패니 크로스비가 그랬듯이
결코 자기의 장애(disability)를 장애가 아닌 능력(ability)으로 바꿨습니다.
앞에 있는 세 가지 철자 dis를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겠다는 결심(determination),
장애인이 아닌 우리 사회의 일원이라는 정체성 (identity)
자신만의 기술(skill)로 바꾸면서 가능성의 문을 열었습니다.

 

눈이 두 개를 넘어서 세 개 네 개여야 하고
쏟아지는 정보를 읽고 분석해서 투자를 결정하는 월스트리트에서
장애를 극복하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인 신순규씨가
여기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감사”라고 했습니다.

 

불평하고 절망하면 자기만 손해입니다.
이분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감사하면서
앞에 놓은 과제와 삶을 마주하고 해결하는 것이 습관이 된 것 같았습니다.

 

3.
신순규씨는 특별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모두 신순규씨가 될 수 없고 그렇게 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장애와 역경을 이겨내고
자기만의 삶과 직업을 개척한 분을 보면서
인간의 가능성이 무한함을 발견합니다.
은근히 부끄러워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때때로
의기소침하고 주춤거릴 때가 있습니다.
미국에서의 삶이 쉽지 않고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느낌도 듭니다.
그때, 장애를 이기고 자신의 길을 개척한 분들의 삶이 도전됩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재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이 무한한 가능성의 문을 열어줍니다.
앞으로 나갑시다. 우리만의 길을 만들어 갑시다.
길이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시편 139:10)

 

하나님,
어려움과 방해물을 만났을 때
그것을 훌쩍 뛰어넘을 힘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6. 9 이-메일 목회 서신)

예외가 없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1.
작년과 올 초에
고난에 관해서 공부했습니다.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햇볕이 비치고 비가 내리듯이
고난도 맥락 없이 찾아옴을 배웠습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만 고난에서 면제된다면
세상은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자연법칙은 망가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크고 작은 고난에서 면제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면제되는 곳(시간)은
이다음 완성된 하나님 나라뿐입니다.
그곳에는 의와 기쁨과 평화만 있고 고난은 없습니다.

 

고난이 면제되는 곳이
이다음 완성될 하나님 나라뿐이라면,
세상을 살면서 고난에서 면제되길 기도하기보다
고난이 찾아왔을 때, 고난을 이길 힘과 지혜를 주시길 구해야겠습니다.
고난을 믿음으로 마주하고, 파도를 타듯이 뛰어넘어야겠습니다.

 

2.
저도 예외 없이
5월 초에 코로나에 걸렸습니다.
2-3일은 열도 오르고 목도 아프고
두통과 몸살기로 몸이 무거웠습니다.

 

심한 증세는 아니었지만,
작은 집에서 세 식구가 격리해서 지내는 것이나
주일 예배를 저 혼자 온라인으로 전송하는 등 한 차례 큰일을 겪었습니다.

 

코로나를 앓으면서,
세상에 예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구나 전염병에 노출되어 있고, 아무리 조심해도
언제 어떤 경로로든 감염될 수 있음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러니 이겨내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3.
다시 코로나가 유행하면서,
그동안 감염되지 않은 분들을
도미노를 쓰러뜨리듯이 차례로 감염시키는 느낌입니다.
이토록 끈질긴 팬데믹에서 언제나 벗어날 수 있을지요!

 

저는 교회에 다음과 같이 광고했습니다:
“가능하면 조심하셔서 코로나에 걸리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행여나 감염되면 너무 겁내지 말고, 코로나와 마주하시고,
증세가 심하고 기저 질환이 있으시면 의사에게 코로나 치료제를 요청하시기 바랍니다.”

 

맥락 없이 코로나가 찾아옵니다.
까닭 없이 고난도 닥칩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피할 수도 없습니다.

 

그때,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백성답게
담대하게 마주하고, 싸우고, 넉넉히 이겨내야 합니다.
그 힘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 주시는 힘으로
찾아오는 삶의 파도를 훌쩍 뛰어넘기를 원합니다.

 
의인이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시편 34:17)

 

하나님,
예외 없이 닥치는 어려움에서 건져주시고, 이길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6.2 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 형상 (2)

1.
지난주 목요 서신에서
버팔로와 남가주 총기사고를 보면서
하루속히 총기 규제가 이뤄지길 촉구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모든 사람이 귀하기에,
사람에게 총을 쏘는 행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월요일
텍사스의 한 초등학교에서
19명의 아이들과 두 명의 선생님이
목숨을 잃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2012년 코네티컷 샌디 훅 초등학교에서 20명의 아이들과
8 명의 어른이 희생당한 사고가 있은 지
정확히 10년 만에 발생한 사고였기에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그때 모든 정치인이
총기 규제를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엄격한 총기 규제는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미국 총기 협회(NRA)의 로비를 비롯한
정당과 정치인들이 각자의 이익을 좇느라
실제적인 정책을 내놓지 못한 것입니다.

 

총기를 구입하는 사람의 배경(background)을 세밀하게 점검하고,
총기 거래 과정을 명확하게 추적하려는 법안들이
민주/공화 양당 간에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는 총기 규제가 상대적으로 엄격하지만,
블랙마켓에서 은밀히 거래되는 총기가 워낙 많고
아직도 법에 허점(loopholes)이 많기에 아슬아슬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2.
미국은 수정 헌법 2조에서
“무기를 소장하고 휴대하는 인민의 권리는 침해될 수 없다”고
무기 소지를 허용하기에 총기 규제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헌법을 고쳐서라도
강력한 총기 규제를 해야 할 시점이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 큰 희생을 치르게 될 것입니다.

 

18세 이상의 성인에게 총기 구입을 허용하는 것에 연령을 높이거나,
불법으로 총기를 거래하는 것을 엄격히 단속하고,
위험한 총기는 GPS 추적 장치를 탑재하도록 의무화하거나
요즘같이 AI가 발달한 세상에서 마음만 먹으면
어느 정도의 확실한 규제가 가능할 것입니다.

 

3.
살기 좋은 세상을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은
모든 어른의 의무이자 책임입니다.

 

지혜를 모아야겠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도움을 요청해야겠습니다.
행동해야겠습니다.

 

희생된 아이들의 천진난만했던 사진을 보고 있으니
저절로 눈물이 흐릅니다.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들의 부모님과 사랑하는 가족들의 아픔은 오죽하겠습니까?
주님의 위로와 소망을 구합니다.

 

이 땅을 회복시켜 주소서.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시편 93:13)

 

하나님,
하루속히
강력한 총기 규제가 이뤄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5. 26 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 형상 (1)

1.
요즘 연거푸
총기 사고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뉴욕주 버펄로에서는
인종 차별주의자인 18세 청년이
슈퍼마켓에 들어가서 무차별 총격을 가하고
생중계까지 시도한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엊그제 주일에는
남가주에 있는 대만 회중 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마치고 친교 하던 중에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같은 대만 출신 60대 남성이
교회에 모여 있던 연로한 성도님들에게 총격을 가했습니다.

 

산호세에서도 총격 사건이 있었고
쉬지 않고 총기와 관련된 사건사고가 이어지고 있어서
안타까울 뿐입니다.

 

무엇보다 인종차별과 연결된
혐오 범죄여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2.
우크라이나에서는
80여 일 이상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임시 매장지에서 슬프게 우는 병사의 어머니,
도심에 나뒹구는 시신들,
– 전쟁이 일어나면
사람의 목숨과 인간의 존엄성이 한순간에 무너집니다.

 

언론이나 유튜브 영상을 접하면서
안타까움을 넘어서 허무할 정도입니다.

 

3.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따라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비록 죄로 인해서 그 형상이 망가지고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서 형상이 지워졌지만,
본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성경은 하나님 형상의 회복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열외 또는 배제는 없습니다.

누구나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 은혜에 들어갈 자격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나무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웨슬리는
모든 사람에게 선재적 은총(prevenient grace)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미리 은혜를 주셨고
그 은혜에 반응하면 곧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4.
그렇다면 모든 인간은 존귀합니다.
각 사람에게 주어진 한 번뿐인 생명은
그 누구도 빼앗을 권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신성 모독입니다.

 

그러니 총격 사건과 전쟁이
귀한 생명을 무차별 앗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도전이요 반항입니다.
해서는 안 되는 반인륜적 행위입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탄식이 나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주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할 뿐입니다:

“주님, 이 땅에 평화를 주소서”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7)

 

하나님,
이 세상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의 손으로 회복시켜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5. 19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