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불

 

 1.
작년에 이어서
캘리포니아에 산불이 다시 극성입니다.

 

7월 중순에 시작된 딕시(Dixie) 산불은
샌프란 면적의 30배에 달하는 90만여 에이커를 태웠습니다.
아직도 60%정도만 진화된 상태라니 엄청난 규모입니다.

 

8월 중순에는 스탁턴 동쪽에 위치한 산악 지대에서
산불이 나서 20만여 에이커를 태웠고 절반 정도 진화된 상태입니다.

 

올해 북가주에서 발생한 산불을 대충 계산해 보니
130만 에이커에 달합니다.
이것은 샌프란시스코 전체 면적의 44배에 해당합니다.

 

북가주의 산불은
작년부터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여름철 가뭄이 심해지고
리노 북쪽의 산악지대에 눈이 일찍 녹으면서
마른 나무들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워낙 커다란 면적에 산불이 났기에
비가 오는 것을 기다릴 뿐
인간의 힘으로 진화하는 것도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집을 빠져나와서 대피하고
마을 전체가 타서 없어지는 등
산불이 난 지역의 주민들이 겪는 고통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2.
산불은 산의 생태계 유지에 필요한 면도 있습니다.
번개를 비롯한 자연의 현상으로 발생한 산불을 뜻합니다.

 

요즘 발생하는 산불은 인재에 가깝습니다.

 

지구 온난화(global warming)가 가속되면서
기후 변화(climate change)가 생겼습니다.

 

지구 온난화는 자동차나 화석 연료에서 발생하는 온실 가스로
지구 온도가 올라는 것이고,
기후 변화는 지구 온난화의 결과로 나타나는 이상 기온 등을 가리킵니다.

 

문제는 악순환입니다.
기후 변화로 서부지역에 가뭄이 찾아오니 산불이 잦아지고
산불은 산소를 만들어내는 산림을 태우는 것은 물론
화석 연료가 타는 것에 버금가는 온실가스를 증가시킵니다.
그러면 이상 기온이 나타나면서 악순환의 고리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정복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최초 명령을
자칫 자연을 지배하고 개발하라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서구 문명 속에 이 같은 인간 위주의 관습이 숨겨져 있습니다.
자연을 친화적인 동료가 아니라 개발과 정복의 대상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것은 “정복하라”는 하나님 말씀을 오해한 소치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한 인간에게
하나님을 대신해서 자연을 관리하고 유지할 책임을 주셨습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에덴동산, 낙원을 만들라는 것이지
인간이 우두머리가 되고 나머지 자연은 착취해도 된다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은 개발이라는 명목하에 자연을 유린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에게 기후 온난화와 기후 변화라는 난제가 닥쳤습니다.

 

지금이라도 힘을 합쳐서
탄소 배출량을 줄이고 지구의 온도가 상승하는 것을 막아내야 합니다.
어떻든지 후손들에게 살기 좋은 지구를 물려주어야 합니다.

 

정치 지도자들에게 결단과 추진력을 요청합니다.
우리 자리에서 지구를 살리는 일에 참여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복을 올바로 사용하기 원합니다.

 

“주님, 지구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사야 11:9)

 

하나님,
우리 지역에 단비를 흡족히 내려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9. 9 이-메일 목회 서신)

 

 

 

 

꼭 붙잡고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여를 방학 동안
기혼 그룹이 가족 여행을 가는 것을 보면서
예전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가 생각났습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여름 방학이 되면
제가 살던 인디애나 블루밍턴에서 가장 가까운
켄터키 루이빌에 있는 놀이 공원에 갔었습니다.

 

아이들은 전날부터 설레어서 잠을 설치고
아내는 새벽부터 도시락을 준비해서
두 시간 정도 자동차로 가는 여정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놀이공원에 있고 싶어 하는 아이들을 위해서
가능한 한 일찍 떠나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놀이기구는
무엇보다 롤러코스터였습니다.

 

루이빌에 있는 놀이 공원의 롤러코스터는
완전히 나무로만 얼기설기 빽빽하게 만든 것입니다.
처음에 롤러코스터가 올라갈 때는 삐그덕 소리가 나는 듯하지만
50마일 이상의 속도로 오르락내리락 달리는 방식입니다.

 

20여 년 전이니
그때는 저희도 아이들과 함께 롤러코스터를 즐기곤 했는데
아이들은 두 손을 놓고 마음껏 즐기지만
저희는 앞에 있는 손잡이를 생명줄처럼 꼭 잡고 타야 했습니다.
불과 몇 분이 안 되는데도 내리면 어질어질했던 기억이 납니다.

 

2.
우리가 걸어가는 인생길을 롤러코스터에 비유하곤 합니다.

 

언덕배기를 오를 때는 천천히 힘겹게 오릅니다.
그러다가 내리막을 만나면 최고의 속도로 쏜살같이 내려갑니다.
그렇게 오르락내리락 몇 번 하고 나면 마지막 종착역에 도착합니다.

 

때로는 우리 신앙도 롤러코스터와 같을 때가 있습니다.
한창 좋을 때는 세상 모든 것을 잃어도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합니다.
입술에 찬양과 감사를 달고 살고, 오랫동안 기도해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실제로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 은혜, 평안에 잠겨 삽니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에 그 좋던 신앙이 사라지고 골짜기를 헤매곤 합니다.
기도와 말씀은 물론이고 교회 생활도 진부하게 느껴지고
심하면 하나님에 대한 회의까지 찾아옵니다.

 

그렇게 계속 골짜기를 헤맬 것 같지만,
어느 한순간의 말씀, 깨달음, 회개, 결심으로 다시 오르막을 탑니다.
이렇게 우리는 롤러코스터 인생, 롤러코스터 신앙의 길을 갑니다.

 

3.
이 모든 것이 정상입니다.

 

평탄한 길만 걸어가는 경우는 매우 특별하거나
롤러코스터 인생을 느끼지 못하는 착각일 것입니다.

 

어제 수요예배에서 살펴본 다윗을 보아도 인생길이 만만치 않음을 발견합니다.
자칫 이스라엘과 싸울 뻔했는데, 블레셋 장군들의 만류로 중간에 가족들이 있는
시글락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살려주신 겁니다.
사흘 길을 오면서 다윗은 찬송이 절로 나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족들이 있는 시글락에 와보니
그 사이 아말렉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다윗의 두 아내를 비롯한 아낙네들을 포로로 잡아가고 마을은 초토화되었습니다.

 

다윗이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서럽게 울었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을 탓하면서 돌로 치려고 덤볐습니다.
그때 다윗이 하나님을 찾습니다.
롤러코스터 손잡이를 잡듯이 하나님을 꼭 붙들고 일을 처리해 갑니다.

 

하나님 명령대로 아말렉을 쳐서 잡혀간 사람들을 데려오고
많은 전리품을 갖고 옵니다.
모든 일을 끝낸 다윗은 롤러코스터에서 내린 것처럼 어질어질했을 것입니다.

 

인생길이 롤러코스터처럼 느껴질 때,
하나님을 꼭 붙들고
힘과 용기를 잃지 않고
끝까지 완주해야겠습니다.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삼상 30:6)

 

하나님,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꼭 붙잡고 하루를 살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9. 2 이-메일 목회 서신)

 

 

 

지킴이 두 번째 이야기

좋은 아침입니다.

 

1.
2주 전 목요 서신에서
40년 전 우리 교회에서 결혼하셨다는
노부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사람들은 바뀌었지만,
1972년에 건축된 이래
말없이 자리를 지켰던 우리 교회 건물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8월 20일 자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SF Chronicle)에
건물과 관련된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습니다.

 

프랑스 이민자 후손인 라란(Lalanne)이라는 30대 여성이
그의 남편과 함께 어빙과 20가 교차로(intersection of 20th Ave and Irving St)에 위치한
100년이 넘은 집을 사서 입주했습니다. 2015년이었습니다.

 

이들 부부가 구입한 주택은
1904년, 덴마크에서 샌프란시스코에 이민 와서
목수 일을 하던 한슨(Hans Hansen)이란 분이 손수 지은 집입니다.
이분은 샌프란에 살면서 결혼했고 세 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2019년, 라란 부부가 지진 대비 공사를 하던 중에
지하실에서 한 묶음의 서류를 발견합니다.
1900년 1월 1일부터 쓰기 시작한 처음 집주인 한슨 씨의 일기였습니다.

 

스토리텔링 작가였던 현재 집주인 라란은
한슨의 일기에 꽂혀서 덴마크어 필기체로 흘겨 쓴 일기를
구글의 도움을 받아서 한 단어씩 판독합니다.

 

당시의 신문, 인구조사 자료, 공문서 등을 샅샅이 조사해서
한슨의 덴마크 고향도 알아내고 그곳을 직접 찾아갑니다.
돕는 손길과 연결되어서 일기도 번역했습니다.

 

2.
그가 사랑하던 애나(Anna)라는 여성이 있었는데
그만 애나가 미국에 오면서 그들에게 이별이 찾아왔습니다.
대서양을 넘나들며 편지로 사랑을 나누었지만,
연락이 끊겼고 한슨은 사랑을 찾아서 대서양을 건넜습니다.

 

그런데 미시간에 정착한 애나는 이미 결혼해 있었습니다.
한슨도 아쉬운 발길을 뒤로하고 샌프란에 정착해서 가정을 꾸민 것입니다.

 

라란의 인구 센서스 자료를 통한 끊임없는 추적에 의하면
술주정뱅이 남편과 결혼했던 애나가 무슨 연고인지 샌프란으로 이주했고
한슨이 결혼한 것을 알았는지 재혼해서 샌프란에 살다가 남편이 세상을 떠나면서 홀몸이 됩니다.

 

웬일인지 한슨도 첫째 부인과 이혼하고
한슨과 아나 두 사람은 텐더로인 지역에서 몇 블록 사이를 두고 살게 됩니다.
현재의 집주인 라난은 두 사람이 노년을 함께 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어쩌면 영화나 드라마에 나올 법한 극적이지만
조금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입니다.

 

3.
샌프란에는 100년 이상 오래된 집이 많아서
종종 그 집에 살았던 사람들의 물건이나 서류 등이 발견된답니다.
대부분은 그냥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겠지요.
라란이라는 분의 호기심과 추적하는 열심이 특별한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죽음은 사람들에게 “기억(memory)”으로 남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좋은 기억을 많이 남겨놓고 하나님께 가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100년도 훨씬 넘어서 일기장이 발견된 것을 보면
기억을 넘어서 우리의 발자취, 흔적도 여기저기에 남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남는 것’이 있는 인생을 살아야겠습니다.
이다음 후대가 우리를 생각하면 흐뭇하고 미소지을 수 있는
좋은 것들을 많이 남겨야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요즘 주일에 살펴보는
수로보니게 여인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큰 믿음”을 남겼네요.
부럽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마태 15:28)

 

하나님,
오늘 우리의 삶이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는 일들로 채워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8. 26 이-메일 목회 서신)

고르반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주일 설교에서
<고르반>이라는 표현을 소개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본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이
장로의 유전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근거로
더 세세한 조항을 만들어서
부정한 것을 피하고 정결한 길을 가도록 도운 것이 장로의 유전인데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이 이것을
자기 식대로 해석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게
프레임을 씌우는 종교 무기로 사용했습니다.

 

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은 한 가지 행위를 갖고
완전히 나쁜 사람 취급하는 예루살렘 지도자들을 향해서
<고르반>이라는 당시의 관행으로 대응하십니다.
고르반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을 갖고
고르반의 그릇된 사용을 지적하십니다.

 

노부모님을 모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릴 적에는 부모가 보호자가 되고 그늘이 되지만,
부모님께서 연세가 드실수록 상황이 역전되어서
부모가 자식들의 짐이 되기에 십상입니다.
예수님 당시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어긴 사람들
또는 부모를 공경할 생각이 없는 자식들에게
일종의 면죄부를 팔았는데 그것이 바로 <고르반>이었습니다.

 

중세 시대에
면죄부를 사서 동전을 헌금통에 넣는 순간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죽은 부모와 친지들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백성들을 현혹했듯이,
성전에 일정액의 헌금을 바치고
<고르반>하면 부모를 공경할 책임이 면제된다는 식이었습니다.

 

3.
면죄부나 고르반의 관행은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성경에도 없는 것을 사람들이 만들어서
그것이 신앙인 것처럼 믿고 따릅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천로역정과 같은 신앙을 가르치기보다
편하고 값싼 은혜를 설파합니다.

 

루터의 말이 마음을 울립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필요한 사람에게 꾸어 주는 것이
면죄부를 사는 것보다 선한 일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우리 안에 슬며시 자리 잡은 그릇된 신앙의 관행이 없는지요?
추하고 얌체 같은 편이주의(便易主義)는 없는지요?
<고르반>하고 면피(面皮)하려는 얄팍한 속셈은 없는지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되고 바른 신앙을 갖추기 원합니다.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하게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잠언 12:22)

 

 

하나님,

우리의 중심, 온 마음이

주님을 향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8. 19  이-메일 목회 서신)

 

 

 

지킴이

좋은 아침입니다.

 

1.
제가 샌프란에 온 지 16년이 지났습니다.
16년이면 짧은 기간이 아닌데,
샌프란은 도심의 높은 빌딩 외에 변한 것이 거의 없습니다.

 

예를 들면, 도심에서 바닷가를 연결하는
Geary Blvd를 운전하다 보면16년전과 같습니다.
저보다 훨씬 오래 사신 권사님들도 옛날 그대로라고 하실 정도입니다.

 

그러다 보니
샌프란은 100여 년이 공존하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싹- 갈아엎고 현대식으로 다시 짓는 것보다
과거와 현재, 첨단 건축과 기술이 공존하는 방식이 마음에 듭니다.

 

2.
지난주일 예배를 마치고 교인들을 배웅하고 있는데
60대 정도로 보이는 미국 아주머니가 교회 계단으로 올라오셨습니다.
종종 예배를 위해서 오시는 분들이 계시기에
예배가 끝났다고 친절히 말씀드렸더니 들어가도 되냐고 물으십니다.

 

갑자기 밖에 계신 남편을 부릅니다.
설레발을 치신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매우 감격해 하시면서
“40년 전에 저희가 이 교회에서 결혼식을 했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교인이 깜짝 놀랐습니다.

 

아주 활발하신 아주머니셨습니다.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그대로 인 것을 보시고
약간 흥분한 듯 환호성을 치셨습니다.

 

강단 앞에서 사진을 찍어 드리고,
아래층으로 내려가겠냐고 물었더니
결혼식 후에 축하연을 지하에서 했답니다.

 

3.
우리 교회는 1972년 그리스 사도교회(Greek Apostolic Church)
(그리스 정교회가 주류이고 사도교회는 소수 개신교회)
목사님과 교인들이 교회 부지를 구입해서 건축했습니다.

 

건축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목사님이 하나님께 가시고
교세도 축소되어서 여러 교회가 렌트를 얻어 사용했습니다.

 

주일에 오셨던 분에 의하면 1980년대 초반,
성령 충만한 은사 중심의 교회가 우리 건물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130여 명이 임시 의자를 갖고 앉을 정도였고
교회에 들어오면 예배실은 물론 아래 친교실까지 성령의 임재가 충만했답니다.
엄청난 능력의 교회였다고 자랑하셨습니다.
저도 처음 듣는 우리 교회 건물에 깃든 역사였습니다.

 

4.
교회 건축 후 50여 년 동안
우리 교회 모습은 거의 변한 것이 없습니다.

 

강단은 우리가 설치한 커다란 TV 두 개 외에는
스테인리스 아름다운 십자가와 하얀 벽면까지 그대로입니다.
오죽하면, 엊그제 오신 부부께서 “그대로야, 그대로야”를 외치셨을까요!

 

그렇게 우리 교회 건물은 지난 50여 년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다양한 교회와 교인들이 렌트를 얻어서 예배했으니
그 모든 다양함을 말없이 품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건물 자체가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는 지킴이였습니다.

 

우리가 처음 건축한 교회에 이어 두 번째 건물주가 되었는데
우리 건물은 우리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요?
아니 우리는 건물에 어떤 추억을 남겨놓아야 할까요?
40년 후에 우리 건물에서 누가 예배하고 있을까요?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교인(하나님께 부름 받은 성도)이라고 늘 말씀드렸는데
엊그제 주일의 만남을 통해서
건물의 귀함과 교회 건물에 깃든 영성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우리 교회 건물이 우리 모두에게 추억이 되고,
우리의 신앙은 물론
교회 건물도 소중하게 간직하는 지킴이가 되기 바랍니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시편63:2)

 

 

 

하나님,

우리 교회의 신앙이

우리 건물 속까지 스며들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8. 12  이-메일 목회 서신)

 

 

 

 

생명 싸개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수요 예배에서는
구약성경 사사기에 이어서 사무엘상을 읽고 있습니다.

 

사사기는 약속의 땅에 정착한 하나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 땅의 우상을 따라나서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기록했습니다.
습관적인 죄와 회개를 반복하면서 이스라엘 전체가 자기 마음대로 행동했습니다.

 

그러면서 왕을 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길 원하셨건만
백성들은 다른 나라들처럼 왕의 통치를 받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그때 주신 왕이 사울입니다.
사울은 외모가 탁월한 인물이었습니다.
왕으로 세워질 때는 짐짝 뒤에 숨을 정도로 수줍음이 많았는데
왕이 되면서 권력과 명예욕에 취해 버립니다.
그러더니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마음대로 행동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십니다.
하지만, 사울의 시기와 질투심에 다윗이 곧바로 왕이 되지 못하고
광야에서 도피 생활을 하게 됩니다.

 

사울이 집요하게 다윗을 쫓아다닙니다.
그래도 다윗은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운데 몸을 숨깁니다.

 

2.
그렇다고 다윗이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한번은 광야에서 나발이라는 부자에게 사람을 보내서
다윗과 그의 사병들에게 음식을 조달해 주길 부탁했습니다.

 

다윗은 광야에서 나발의 가축 떼를 돌봐준 적이 있었기에
쉽게 양식을 구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완고하고 어리석은 나발은 다윗의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나발의 거절에 화를 참지 못한 다윗이 군대를 이끌고 그를 죽이러 나갑니다.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지혜롭고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다윗이 자기 가족을 치러 온다는 소식을 들은 아비가일은
서둘러 양식을 준비해서 다윗을 만나러 갑니다.

 

아비가일이 다윗 앞에 엎드려 예의를 갖춘 후에, 다윗을 설득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앞으로 큰일을 할 다윗이니
모든 사람이 어리석게 여기는 나발을 죽여서
다윗의 이력에 흠집을 내지 말라는 충언입니다.

 

다윗이
자기가 죽이러 나가는 나발의 아내,
즉 원수의 아내인 아비가일의 말을 하나님 말씀으로 듣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위대한 점이고 믿음입니다.

 

다윗은 사울과 달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를 갖고 있었습니다.

 

3.
아비가일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생명 싸개(the bag of the living)”로 싸고 계시니
어떤 사람이나 세력도 다윗을 해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생명 싸개는 다윗의 생명을 감싸고 있는 주머니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안전하게 감싸고 계신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주머니에 다윗이 들어 있으니, 누가 다윗을 해칠 수 있겠습니까?

 

아비가일이 이렇게 아름다운 말로 다윗을 설득했으니
다윗의 마음이 녹아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아비가일의 남편 나발이 죽자 아비가일을 아내로 맞이할 정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의 생명을 감싸주심을 믿습니다.

 

우리도 종종 광야의 모진 바람을 혼자 맞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보호해 줄 사람이 없어서,
불어오는 인생의 폭풍을 외롭게 견디고 있다는 참담함도 느낍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생명 싸개로 감싸 주심을 꼭 기억합시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생명 주머니에 들어 있음을 기억합시다.

 

오늘도 우리 주님과 더불어 생명의 길을 가시는
참빛 식구들을 응원하고 축복합니다.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삼상 25:29)

 
하나님,
참빛 식구들을 주님의 생명 보자기로
감싸주시고 보호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8. 5 이-메일 목회 서신)

 

작은 영웅

좋은 아침입니다.

 

1.
우여곡절 끝에
도쿄 올림픽이 열리고 있습니다.
2020년 도쿄(Tokyo 2020)라는 명칭을 보면서,
팬데믹으로 잃어버린 1년을 되찾는 느낌도 받습니다.

 

올림픽이 열릴 때마다
감동, 안타까움, 절망과 희망 등
수많은 이야기가 생성됩니다.

 

엊그제는
미국 최고의 체조선수 바일스(Biles)가
경기 중간에 기권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바일스는 체조 코치의 성폭력을 폭로한 선수로 유명합니다.
미국 최고의 스포츠 영웅(GOAT; Greatest of All Time)칭호도 받았습니다.

 

24세로 체조계에서는 노장에 속하는 바일스이지만,
첫 번째 경기 성적이 좋게 나오지 않자
그 중압감에 “내 마음을 지켜야겠다”라면서 나머지 경기를 포기했습니다.

 

2.
바일스 뿐만 아니라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들의 스트레스 정도가 무척 높답니다.

 

평소에는 주목받지 못했던 종목이나 선수들은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이 명예와 부(富)를 얻을 유일한 기회입니다.
올림픽에 인생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에
경기에 임하는 부담감이 상당하답니다.

 

한순간에 4년은 물론 평생의 꿈이 무너질 수 있으니 말입니다.
게다가, 자신들의 조국을 대표해서 경기하는 부담감도
자부심 못지않게 클 것 같습니다.

 

바일스의 경기 포기를 두고
올림픽 선수들의 심리, 정신적 부담감이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동시에 각계에서 바일스의 포기를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부담감을 숨기고 억지로 경기하는 것보다
자신을 찾으려는 솔직함에 박수와 격려를 보내준 것입니다.

 
3.
평소에도 스포츠에 관심이 많은 저는
미국 올림픽 중계사인 NBC를 켜 놓고 일하곤 하는데
올림픽이 아니면 볼 수 없을 것 같은 비인기 종목들도 매우 많습니다.

 

동네에서 자주 보던 스케이드 보드도 올림픽 종목이었고
13살 소녀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비인기 종목에서 자기와 싸우고,
조국을 위해서 땀을 흘린 선수들이 주는 감동이 큽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자기의 길을 가는 작은 영웅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인기 종목이 아니어도
올림픽을 준비하고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선수들,
행여나 메달권에 진입하지 못해도 올림픽에 참가했다는 것으로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는 선수들,
중간에 경기를 포기할 정도로 부담감에 휩싸였던 유명 선수까지…

 

생각해 보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각자의 길을 걸어갑니다.

 

청중이 없는 경기장에서 올림픽이 열리는 것이 어색하다고 하지만,
우리는 매일같이 청중이 없는 곳에서 주어진 일상을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청중이 되심을 믿고 걷는 길이요, 인생의 경주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작은 영웅, 일상 영웅인 셈입니다.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신앙의 경주, 인생의 발걸음을 뚜벅뚜벅 내딛으시는
참빛 식구들을 응원합니다.
발걸음마다 우리 주님께서 동행하심을 믿습니다.

 

여러분 모두 작은 영웅이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시편37:23-24)

 

 

하나님,

오늘도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걷는

참빛 식구들의 손을 붙들어 인도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7. 29 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의 눈과 귀

좋은 아침입니다.

 

1.

엊그제 화요일 아침에는

하나님께서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을 들으시고

그들을 안전한 곳으로 인도해 주신다는 시편 12편 말씀을 나눴습니다.

 

여기서 “가련한 자들”은 폭력에 희생될 정도로

업신여김을 받는 힘없고, 돈 없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의지할 곳이 한 군데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궁핍한 자”는 필요한 것을 갖지 못하고

결핍된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일용할 양식이 부족합니다.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이 없으니

한숨이 나오고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눌림과 탄식을 보시고

직접 일어나셔서 그들이 원하는 안전한 곳으로

인도해 주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힘없는 사람들이 겪는 눌림(학대)과 업신여김을 보고,

하나님의 귀는

꼭 필요한 것조차 없는 궁핍한 사람의 탄식을 향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편이 되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2.

요즘 세상은 매우 풍요롭습니다.

필요한 것 이상을 갖고 있고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을 수 있습니다.

 

욕심이 한이 없고

우리의 삶이 상대적이어서 결핍과 뒤처짐을 느끼지만,

시편 12편에서 말하는 가련한 자들과 궁핍한 자들에 비하면

우리는 호사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어려운 이웃들이 많이 있습니다.

꼭 게으르거나 노력하지 않아서 어려운 삶을 사는 분들이 아닙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궂은일에 종사하지만

결코 생활이 나아질 수 없는 분들입니다.

 

3.

지난주 제 전화기에 도착한

월스트릿 저널의 기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경제가 열리면서, 여기저기서 사람을 구하고

많은 사람이 실제로 직장으로 복귀했습니다.

경쟁력을 갖춘 분들은 팬데믹 기간 동안 전혀 어려움을 겪지 않았고

경제가 열리니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팬데믹이 끝나도 예전의 직업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라는 기사였습니다.

 

레이티온(Raytheon)이라는 항공 산업 관련 업체는

비행기 여행이 감소하면서 21,000명을 해고했는데,

팬데믹 기간 동안 공장 자동화를 비롯한 기업의 혁신으로

해고한 사람들을 모두 재고용할 필요가 없어졌답니다.

 

하얏트와 같은 호텔들 역시 팬데믹이 찾아오면서

많은 종업원을 해고했는데

팬데믹 이후에는 룸서비스 횟수를 대폭 줄이면서

그곳에서 종사하던 저임금 직원들을 다시 부르지 않을 예정이랍니다.

 

이런 현상은 고속도로 톨 게이트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이미 감지되었는데

팬데믹 이후에 저임금, 비전문인 고용이 부쩍 줄어들 것이라는 기사였습니다.

문제는 이런 분들이 다른 직업을 갖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사회의 궁극적이고 커다란 문제점이 제기됩니다.

세상이 잘 나가는 사람들만의 리그로 변하면,

경쟁에 뒤쳐진 사람들은 가련함과 궁핍함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들 편이라고 시편 기자는 힘주어 말하고 있네요.

 

4.

개인의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우리 사회 시스템의 문제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눈과 귀가 이들을 향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들에게 마음을 두고,

어려운 분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고,

적어도 함께 울며 기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하나님께서 꿈꾸시는 세상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시편 12:5)

 

 

하나님,

힘겹게 살아가는 참빛 식구들,

땅의 백성들과 함께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7. 22 이-메일 목회 서신)

방심

좋은 아침입니다.

 

1.
델타 바이러스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우리 지역도 백신 접종률이 80%에 이르지만
바이러스 감염곡선이 머리를 들고 위를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실내에서는 아직 많은 분이 마스크를 착용하지만
야외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식당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만큼 규정도 완화되었습니다.

 

우리 지역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지난주일 영국에서
영국과 이탈리아의 유럽 축구 결승전 경기가 있었는데
제 눈을 의심할 정도로 수많은 관중이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영국도 감염자 숫자가 늘고 있다는 보도를 접했기 때문입니다.

 

2.
제 컴퓨터에서 홈페이지로 쓰는
MSN에 설문조사가 열렸습니다.

 

설문조사에 응한 사람들은
80%가 두 번의 백신 접종을 마쳤다고 답했습니다.

 

델타 바이러스가 걱정되느냐는 질문에
31%는 전혀 염려되지 않고, 26% 약간 염려되고
32%는 신경이 쓰일 정도, 11% 만이 크게 염려된다고 답했습니다.
백신 접종을 완료한 사람들은 변이 바이러스를 무서워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절반 이상이 올여름 다른 주로 여행을 갈 계획이고
편안하게 극장에도 출입하겠다고 답한 사람들이 57%였습니다.

 

75%가 식당 안에서 식사를 한 적이 있고,
72%는 식료품점에 갈 때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았다고 답했습니다.
우리 지역은 대부분의 사람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장을 보는데
마스크 없이 상점에 드나드는 지역도 많은 것 같습니다.

 

3.
물론 MSN 홈페이지를 방문한 사람들의 설문 조사이고
80%가 백신 접종을 끝낸 사람들이지만,
델타 바이러스의 전파 속도를 고려했을 때
사람들의 생각과 생활이 매우 느슨해졌음을 느꼈습니다.

 

하긴, 팬데믹이 이렇게 길어질 것을 상상도 못 했습니다.
집에 있는 것도 지칠 만합니다.
혹자는, 백신 접종을 끝냈으니 감기 정도로 지나갈 것을 예상하고
편하게 생활하자고 큰 소리로 이야기합니다.

 

그래도 아직은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잘- 참았으니
마지막까지 말 그대로 유종의 미를 거두길 기대합니다.

 

4.
코로나 바이러스만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과 삶도 느슨해지지 않았는지요?
마스크를 착용하고, 손을 깨끗이 닦고
거리 두기를 하던 습관이 슬며시 무너지지 않았는지요?

 

처음보다 마지막이 더 어렵습니다.
시작은 잘해야 절반이니 자칫 중간에 망가질 수 있습니다.
이제 남은 팬데믹 시국을 깔끔하게 마무리해야겠습니다.
자칫 공든탑이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참빛 식구들께서도
방심하지 마시고, 처음 마음을 갖고 더욱더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팬데믹 뿐만 아니라 매사에
처음보다 끝이 좋은,
아니 처음과 끝이 한결 같은 신앙과 삶을 간직합시다.

 

 

******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살후2:13)
we ought always to give thanks to God for you, brothers beloved by the Lord,
because God chose you as the first fruits to be saved, through sanctification
by the Spirit and belief in the truth. (2The 2:13)

 

 

하나님,
처음 사랑과 처음 마음을
끝까지 간직하게 하고
오늘 하루를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7. 15 이-메일 목회 서신)

눈물

좋은 아침입니다.

 

1.
7월 한 달 동안
주일 예배에서 읽을 말씀은
구약성경 예레미야서입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나눴듯이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눈물로 외쳤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는 백성들을 보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나라가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또 울었습니다.
그래서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 (렘9:1)

 
2.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도 우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러 무덤으로 가시면서
나사로의 누이들과 친지들이 슬퍼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도 우셨습니다 (요11:32)

 

곧 나사로를 살리실 예수님이신데도
형제들의 슬픔에 잠시라도 진심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면서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이 망가진 것을 보고
두 번째로 우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는데
히브리서에서는 “심한 통곡과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히5:7).

 

이처럼 예레미야와 예수님의 눈물은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안타까움의 눈물이었습니다.

 
3.
우리도 눈물을 흘릴 때가 있습니다.
예레미야와 예수님처럼
안타까운 세상이나 사람들을 보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우리 자신이 힘들 때도 눈물이 나옵니다.
마음 아픈 과거를 생각해도,
어려움이 예상되면 여지없이 눈물이 나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눈물이 나옵니다.
밤잠을 설치고, 침상을 적셨던
시편 기자의 고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눈물의 또 한가지 기능은
카타르시스(정화)입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슬픈 일을 겪었을 때
실컷 울고 나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눈물이 가져다 주는 선물입니다.

 

모든 눈물에는 진심이 담겨 있습니다.
가식적으로 눈물을 흘린다면 그것은 연기이지요.
예레미야나 예수님은 가슴으로 우셨습니다.

 

4.
인생길을 걷다 보면
눈물을 흘리면서 울 일이 많이 생깁니다.
그때는 마음껏 우셔야 합니다.
물론, 골방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더불어
우시기는 것도 꼭 잊지 마십시오.

 

한 걸음 나가서
누군가를 위해서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더없이 고귀한 순간입니다.

 

지난 주일 설교 마지막 부분을 다시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 한 주간, 예레미야의 파토스, 그 마음을 닮아 봅시다.
함께 울고, 함께 공감하고, 정말 같은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세상에 못된 사람들, 미운 사람들을 위해서도 한번 울어봅시다.
특히, 흩어진 참빛 식구들을 눈에 그리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마음으로 하나되는 우리 교회이길 원합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11:35)
Jesus wept (John 11:35)

 

 

하나님,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참빛 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7. 8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