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리그

좋은 아침입니다.

 

1.
아직은 섣부르지만
미국의 경우 백신 접종이 꾸준히 이뤄지면서
팬데믹이 조금씩 걷혀가는 것 같습니다.
동시에, 팬데믹 이후의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고 때로는 염려가 됩니다.

 

세상의 변화 가운데 한 가지는 “격차”가 아닐까 싶습니다.
빈부격차, 부자와 가난한 나라의 격차, 잘 나가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격차 등등
세상이 하나가 되기보다 차이와 간격이 넓어지면서
더욱 치열한 경쟁 체제로 재편될 가능성이 큽니다.

 

축구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엊그제 발표된 유럽의 “슈퍼 리그”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셨을 것입니다.
현재 세계 축구를 이끄는 유럽의 강팀들로 구성된
말 그대로 슈퍼 리그를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슈퍼 리그에 참여하는 팀들은 최고의 선수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축구 팬들을 확보한 구단들입니다.

 

거기에 미국의 JP Morgan 금융 그룹이 60억 달러를 투자할 계획이고
슈퍼 리그에 참여하는 클럽들은 수백억 달러의 보너스를 받고 시작하기에
펜데믹 기간의 적자를 메울 수 있고,
앞으로도 TV 중계권료를 비롯한 상당한 자본이 슈퍼 리그에 투입되면서
참가한 클럽은 물론 선수들도 돈방석에 앉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자칫 축구판이 ‘자본(돈)’에 의해서 좌우될 가능성,
최고 구단들만의 리그가 되면서
풀뿌리 유럽 축구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 등 저항도 만만치 않아서
벌써 탈퇴하겠다는 팀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국제축구연맹(FIFA)과 유럽 축구연맹의 전횡과 부정부패가
새로운 리그를 탄생시켰다고 해도
슈퍼 리그가 슈퍼 자본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께름칙합니다.

 

2.
어디 축구판만 그럴까요?
팬데믹 이후에 많은 경우, “돈”에 의해서 호불호가 정해질 가능성이 크고
잘 나가는 회사나 사람들은 슈퍼 리그로 올라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가만히 있어도 뒤처지는 격차를 느낄 수 있습니다.

 

더불어 산다는 말, 희생이라는 덕목,
룻기에서 배운 하나님 사랑 <헤세드>를 과연 세상에 찾아볼 수 있을는지요!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 희생, 내려감, 손해, 공정, 분배를 바라시는데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세상에서 빛으로 살아야 함을 알지만,
워낙 세상 물결이 강해서 우리도 모르게 휩싸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쉽지 않고 고민이 깊어집니다.

 

3.
함께 대처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혼자 이 길을 걷기 힘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공동체를 주셨을 것입니다.

 

세상 물결이 몰려오면 손에 손을 잡고 방어하고
더불어 주님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렇게 근사한 공동체로 세워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모두 참빛 공동체 속에서
같은 배를 타고 있는 동지임을 확인하고,
하나님 나라 가치관을 갖고 세상을 살기로 격려하고 도전하고
‘하나님 나라 슈퍼 리그’를 만들어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6)

 

하나님,

오늘도 제국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참빛 식구들과 함께 하시고 하늘의 지혜와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4. 22 이-메일 목회 서신)

묻어가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마다 룻기를 읽어가면서
제 마음에 깊이 다가오는 것 가운데 하나는
룻기의 주인공들이 만들어가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꼭 붙어서
베들레헴에 돌아오고,
시어머니를 위해서 보리 이삭을 주으러 밭으로 나갑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행여나 자신이 죽은 후에 모압(이방)여인 룻이 홀로 사는 것이 염려되어서
그를 돌봐줄 안식처, 남편을 생각합니다.

 

나오미가 마음에 두고 있는
베들레헴의 유력자 보아스는
예수님을 닮은 성품의 소유자입니다.

 

보리밭에서 일하는 일꾼들까지 귀하게 여기고
일꾼들도 주인인 보아스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모압 여인 룻이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는 것을 보고
민족이나 인종의 장벽을 넘어서
차별없이, 아니 더 세심하게 룻을 챙깁니다.

 

룻에게 베푼 보아스의 사랑을
시어머니 나오미는 “헤세드”라고 표현했습니다.
보아스 역시 시어머니 나오미를 돌본 룻의 사랑을 “헤세드”로 칭찬했습니다.

 

헤세드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가리키는 히브리어입니다.
신약의 헬라어 <아가페>에 해당합니다.

 

이렇게 룻기 속의 주인공들은 하나님 안에서
서로 축복하고, 헤세드(하나님 사랑)를 실천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섭리)을 경험했습니다.

 

2.
룻기의 배경이 되는 사사 시대는
모든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행하던 때인데
룻기의 베들레헴 사람들은 매우 인격적이고 서로를 배려하면서
사랑의 공동체를 세워갑니다.

 

룻기를 읽으면서
저 자신이 당시의 베들레헴에 있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보아스 기업의 종업원이었다면
기쁜 마음으로 주어진 일을 하고
모압 여인 룻을 도왔을 것입니다.

 

보아스와 룻이 속한 친족이었다면
홀로 된 여성 룻과 나오미를 돌보는데
조그만 힘이라도 보탰을 것입니다.

 

이렇게 룻기 속에 들어가 있으면
선한 사람들의 배려와 격려를 통해서
저 역시 저절로 선한 사람이 될 것 같습니다.

 

3.
공동체의 힘입니다.

 

좋은 공동체가 세워지면
그 속에 속한 구성원들은 자신도 모르게 선한 길을 갑니다.
서로 ‘묻어가는 것’입니다.

 

흩어져서 예배한 지 일 년이 넘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여기까지 온 것도
힘든 시간을 함께 겪고 있는 참빛 식구들,
신앙의 동지들이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서로서로 묻어갈 정도로 힘 있는
주님의 공동체로 세워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함께 그 길을 갑시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전도 4:12)

 

 

하나님,
서로에게 격려와 도전을 주는
참빛 공동체로 자라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4. 15 이-메일 목회 서신)

염려와 불안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목요 성경 공부에서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공부할 주제 중에
두려움과 염려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두려움(fear)은 사람, 상황,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느끼는 말 그대로 공포입니다.
적당한 두려움은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게 하지만
지나친 두려움은 그 자리에서 꼼짝달싹 못 하게 만듭니다.

 

꼭 필요한 두려움도 있는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경외(敬畏 the fear of God)라고 부릅니다.

 

두려움과 달리
염려(worry)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상황을 미리 걱정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사안이 없기에 두려움보다 강도가 작을 수 있지만
생각이나 삶을 어수선하게 하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면서 또 다른 두려움을 일으킵니다.

 

우리 안에서 생기는 염려의 대부분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것들임을 알면서도
연약한 우리 마음이 염려에 휩싸일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과 함께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라”는 부탁도 등장합니다.
그만큼 두려움과 염려가 우리를 억누르고 신앙까지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가 “불안(anxiety)”입니다.

 

불안은
마음과 생각이 과거, 현재, 미래를 오가면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상태입니다.
불안하면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2.
팬데믹이 길어지고
앞길에 대한 막막함, 맥락 없이 닥치는 어려움 등이 닥칠 때
두려움, 염려, 불안이 몰려올 때가 있습니다.

 

두려움이 밀려오면
우리가 진작 두려워할 대상이 하나님임을 다시 기억하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하나님의 손길을 의지해야 합니다.
피난처와 방패 되시는 하나님 품으로 달려들어야 합니다.

 

소리 없이 침투하는 두려움을 극복하는데
하나님 앞에서 소리 없이 침묵하면서
깊은 기도에 들어가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염려를 물리치는 길은 기도입니다.
염려가 생기면 그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던지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훈련해서 습관이 되면 어느 정도 염려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불안과 염려는 비슷합니다.
대신 불안이 심해지면
상담을 받거나 의사의 안내를 받는 것도 좋습니다.

 

일상적인 불안이라면
그 순간에 소리 내서 기도하거나 찬양하실 것을 권합니다.
찬양은 어두운 세력을 쫓아내는 힘이 있습니다.
마음이 밝아지고 가벼워질 때까지
한자리에 앉아서 찬양하면 불안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한 번에 끝날 것이 아니라 두려움, 염려, 불안이 찾아올 때마다
실천해야 할 신앙 훈련입니다.

 

3.
부활절 이후를 살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능력, 승리를 주십니다.

 

우리 안팎에서 밀려오는 두려움, 염려, 불안을
부활의 능력으로 극복하기 원합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부활의 주님을 따라서 주어진 인생길, 신앙의 길,
일상을 살기 원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부활을 살게 하소서.
찾아오는 두려움, 염려, 불안을 이기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4.8 이-메일 목회 서신)

나그네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예배에서 룻기를 읽고 있습니다.
룻기는 베들레헴에 가뭄이 들면서
가족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이민간
엘리멜렉의 가족사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엘리멜렉과 그의 두 아들이 모압에서 죽고
엘리멜렉의 아내 나오미만 살아남았습니다.
잘 살기 위해서 꿈을 갖고 떠난 이민길에
예상치 못한 재난이 닥친 것입니다.

 

나오미는 남편을 잃은 두 며느리와
10여년을 모압에서 이민자(나그네)로 살았습니다.
나오미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 지
당시 홀로된 여성의 삶과 중첩되어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2.
모압 출신 며느리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서 베들레헴에 옵니다.

 

어머니의 민족이 자기 민족이 되고
어머니가 섬기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끝까지 함께 하기로 맹세하고 떠난 여정입니다.

 

나오미는 고향으로 역이민을 했지만,
모압 출신 룻은 베들레헴의 이민자가 되었습니다.
상황이 바뀐 것입니다.

 

베들레헴에 온 룻은 언제나
“모압 출신” “모압 여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습니다.
선민의식이 컸던 이스라엘에서 룻이 겪었을 나그네 서러움이 느껴집니다.

 

3.
룻과 나오미만 이민자로 산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처음부터 나그네(이민자)로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가나안 땅에 온 아브라함,
형 에서를 피해서 외삼촌 동네로 피난 갔던 야곱,
형들에 의해서 이집트에 팔려간 요셉과 그의 후손들까지
이스라엘은 말 그대로 나그네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와 함께 특별히 나그네를
환대하고 대접하라고 부탁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사셨습니다.
3년 공생애 동안 머리 둘 곳 없는 노숙자로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면서 사셨습니다.

 

예루살렘의 기득권자들은
예수님을 핍박했고 결국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대신, 당시에 나그네로 살았던 땅의 백성들이 예수님을 찾아왔고
나그네로 살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훗날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 바울도
나그네로 소아시아와 유럽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4.
요즘처럼 미국에서 나그네로 사는 심정이
복잡한 때도 별로 없었습니다.

 

인종 차별은 미국의 고질적 문제라고 생각했고
1992년 LA 폭동과 소소하게 일어나는 유사한 갈등으로 경각심을 가졌지만
팬데믹 이후 아시안 혐오가 미국의 큰 사회문제가 되고 보니
우리의 이민 생활이 나그네 삶인 것을 실감합니다.

 

스스로 조심해야겠습니다.
우리의 목소리도 내야 합니다.
타인을 배제하거나 무시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불어 사는 세상이 오길 기도해야 합니다.

 

룻기의 보아스가
모압 여인 룻을 배려하고 돕듯이
우리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모든 사람을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이 세상에 나그네로 왔다가
본향인 하나님께로 가는 이민자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사정을 아느니라 (출23:9)

 

 

하나님,
참빛 식구들이 걸어가는 나그네 길에
주께서 꼭 동행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4.1 이-메일 목회 서신)

숨은 보물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주
미국 신문과 방송에 흥미로운 보도가 있었습니다.

 

동부 코네티컷 뉴헤이븐 근처에서
어떤 사람이 연꽃 모양의 도자기 그릇을
거라지 세일(garage sale)에서 샀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신원을 밝히지는 않았는데
아마도 도자기에 조예가 깊은 사람임이 틀림없습니다.

 

6 인치에 불과한 도자기 그릇 하나가 35불에 나왔으니
우리가 알다시피 거라지 세일치고는 비싼 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전혀 흥정하지 않고 35불에 도자기를 삽니다.

 

그리고 곧바로 사진을 찍어서 진품 여부를 알아보았고
이 도자기는 세계에서 여섯 개밖에 없는
15세기 명나라 영락 황제 시대의 유물로 밝혀졌습니다.

 

결국 소더비 경매에서 이 도자기 그릇 한 개가
무려 $721,800에 낙찰되었습니다.

 

소더비에서 중국 유물을 담당하는 맥카티어(McAteer)라는 분은
자기도 생전에 이런 고대 유물을 볼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면서
고대 유물들이 평범한 모습으로 우리 주변에 숨어 있을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2.
중국 도자기를 야드 세일에서 산 사람은
귀한 유물을 알아보는 안목을 갖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다녀갔지만,
35불이나 주고 “연꽃 그릇 (lotus bowl)” 한 개를
구입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도리어 다른 물건에 눈길을 주었겠지요.

 

신앙에도 안목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도
밭에서 일을 하다가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서둘러 집에 와서는 모든 것을 팔아서
보화가 숨겨진 밭을 사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숨은 보화를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시고
수많은 기적을 베푸셨지만,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선입견, 자기주장, 자기 생각이 가득 차서
진작 중요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3.
팬데믹이라고 하지만
어느 세대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물질만 있으면
하나님 나라도/신앙도 내팽개칠 기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을 꼭 붙들고 삽니다.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보화와 같은 복음을 살 수 있습니다.

 

가장 귀한 보화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입니다.

 

오늘도 일상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손길, 신앙의 보물을 찾아내시는
참빛 식구들 되시기 바랍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마 13:44)

 

하나님,
예수님 한 분으로 기뻐하고 행복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3. 25 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의 섭리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설교에서
룻이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갔고
그때 마침 보아스가 밭에 온 사건을 두고
예정과 섭리를 비교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어찌 보면
룻이 보아스의 밭에 간 것이나
보아스가 밭에 온 것이
처음부터 예정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만남을
운명적으로 계획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룻이나 보아스의 행동은
하나님에 의해서 프로그램화된 것이 되고 맙니다.
룻이나 보아스의 의지가 사라집니다.

 

예정(predestination)이 갖고 있는 맹점입니다.
룻이나 보아스나 엄연히 자신의 의지로 결정해서
보리밭에 왔고 서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2.
섭리(providence)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룻과 보아스의 만남을 봅니다.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의 허락을 받고
보리 이삭을 주으러 밭에 나왔습니다.
그것은 룻의 결단이고 룻이 스스로 행한 것입니다.

 

그 시간에 보아스도
베들레헴에서 밭에 나왔습니다.
룻과 보아스가 각자 자기의 생각대로
보리밭에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룻의 발걸음을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때 마침 보아스를 보리밭에 오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룻과 보아스에게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미리’ 예정된 것이 아닙니다.
‘그 순간’에 일어난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그 순간’에 임한 하나님의 간섭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룻과 보아스가 각자 밭으로 왔을 때
하나님도 그들과 함께 하셨고
두 사람의 발걸음을 보아스의 밭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섭리(providence)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물론,
우리 마음대로/욕심대로 행하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가 아닙니다.

 

성경의 자유는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에 서로 섬기면서 세워줍니다.
자기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합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스스로 행하기에 자유입니다.

 

룻과 보아스는
기쁜 마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했고
그 순간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셔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3.
참새 한 마리가 얼마에 팔리는지
머리카락의 숫자까지 세신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주목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결정을 하고 어떤 인생길을 걷든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결국에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오늘 하루 참빛 식구들 위에
세심하게 임하길 기도하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하나님,
참빛 식구들의 마음과 삶에 함께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3. 18 이-메일 목회 서신)

 

하루 한 가지

좋은 아침입니다.

 

1.
“하루에 한 가지”는
아마도 가장 구태의연한 표현(cliché)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영어 공부를 할 때는
하루에 한 가지 영어 표현만 배워서 익히면
불과 몇 년 안에 영어 도사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루에 열 단어 외우기도 별책 부록처럼 따라다녔습니다.

 

한창 성령이 충만할 때는
하루에 한 구절 성경 암송에 도전했습니다.
하루에 성경을 세 장씩만 읽으면,
일 년에 성경을 통독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작은 일 한두 가지를 지속해서 하면
그것이 모여서 큰 업적을 이루는 것이 사실입니다.
작심삼일, 결심한 것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2.
하루하루를 살지 않고
건너뛸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하루살이 인생길을 예외 없이 걷고 지나야 합니다.

 

인생은
하루 (1일)라는 작은 벽돌이 모여서
전체를 이루고 세워가는 건축물 같습니다.

 

그러니 아래부터 차근차근 쌓아가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매사가 그렇습니다.
직장이나 사회생활도 마찬가지여서
아래부터 차근차근 위를 향해서 올라간 사람은
일의 전후 사정을 모두 파악하고
아래 사람의 어려움을 깊이 공감합니다.

 

반면,
낙하산처럼 갑자기 윗자리에 앉은 사람은
일의 순서는 물론,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애로사항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3.
코로나 팬데믹으로
집에서 포로가 되어 지낸 지 정확히 일 년이 지났습니다.
하루하루를 살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흩어져서 예배한 지도 일 년이 지났습니다.
지난 일 년 동안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참빛 식구들이 많습니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정해진 것도 없습니다.

 

작년 이맘때, 팬데믹이 이렇게 길어질 것을 예상했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과연 일 년을 견딜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염려에 휩싸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한주 한주 영상으로/zoom으로 만나다 보니
일 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참빛 식구들 대부분이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계십니다.
하루하루 작은 벽돌의 힘이요 하나님 은혜입니다.

 

4.
힘들수록, 지루할수록
우리가 걷는 인생길을 잘게 잘게 끊어서
생각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해결하려고 하면
도리어 부담이 되고 막막한 마음에 실망합니다.
하루를 길게 펼쳐 놓고, 꼼꼼히 채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찬송가 545장 가사가 생각납니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면
이 귀에 아무 소리 아니 들려도/하나님의 약속위에 서리라.
걸어가세 믿음 위에 서서/눈과 귀에 아무 증거 없어도.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애가 3:23)

 

 

하나님,
오늘 하루도
주의 성실하심을 경험하고 그것으로 하루를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3. 11 이-메일 목회 서신)

폼페이 람보르기니

좋은 아침입니다.

 

1.

가끔 고속도로를 운전하다 보면

배트맨 영화에 나올 법한 자동차를 만납니다.

그 위용에 “와”하는 탄성이 나옵니다.

아우디를 만드는 폭스바겐 계열사인

이태리제 “람보르기니/Lamborghini”라는 자동차입니다.

 

람보르기니는

또 다른 이태리제 고급 차인 페라리와 쌍벽을 이룹니다.

“무조건 페라리를 이겨라”는 창업자의 구호에 따라

람보르기니가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정말 멋있습니다.

물론 가격도 우리 같은 서민은 언감생심 근처에도 갈 수 없는

최하 20만 불에서 최고 3백만 불에 이릅니다.

 

2.

엊그제 미국 공용방송 NPR에

“폼페이 람보르기니 발견”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폼페이는 주후 79년

나폴리 연안에 있던 베수비오 화산이 갑자기 폭발하면서

2천여 명이 목숨을 잃고, 도시 전체가 화산재에 덮였습니다.

 

16세기부터

폼페이 유적발굴이 시작되었는데

화산재를 맞고 얼음처럼 굳어버린 연인들,

거리의 주민들, 동물들의 형상이 유명합니다.

 

이번에는

폼페이의 람보르기니라고 불릴 정도의

호화스러운 전차 유물이 발견된 것입니다.

 

그동안 발견된 폼페이의 마차들과 차원이 다른 최고급 전차랍니다.

유물을 발견한 사람들이 얼마나 깜짝 놀랐으면

이태리 람보르기니를 생각해 냈을까요!

 

그런데

보도된 사진을 보니2천여 년이 지나면서 녹이 슬었습니다.

고고학자들이 아니라면 그 고급스러움을 알아채기 힘들게 변했습니다.

 

3.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최고급 승용차 람보르기니를 보면서

누가 저런 차를 타고 다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2천 년 전,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폼페이를 헤집고 다니던 당시의 최고급 전차를 보면서

그때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2천 년이 지나고 나니,

그때의 위용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3백만 불이 넘는 이태리제 람보르리니도 언젠가는 같은 길을 가겠지요.

 

어제 읽은 마태복음 19장 23절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기보다 어렵다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4.

지금도 고속도로를 누비는 21세기 람보르기니,

화산재로 덮이기 전까지 폼페이를 누렸던

폼페이의 람보르기니를 보면서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다시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 생명, 복음, 그리고 사랑과 섬김

– 요즘 세상에서 잊혀 가는 가치들을 다시 붙잡고 싶습니다.

 

내 마음속의 람보르기니를 지우고

시간이 가도 절대 변하지 않는 “영원”을 살고 싶습니다.

 

우리의 삶이 어떠하든지

작은 것까지 소중히 여기고,

그 안에 깃든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섭리)을 발견하기 원합니다.

 

참새 한 마리가 얼마에 팔리는지,

우리 머리카락까지 세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핵심을 붙잡고 싶습니다.

 

행여나, 세상 풍조에 밀려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고

복음이 주는 지혜와 행복을 꼭 붙드는 사순절이길 바랍니다.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네가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이에 비교할 없도다 (잠언 3:15)

She is more precious than jewels, and nothing you desire can compare with her. (Prov 3:15)

 

하나님,

세상 흐름에 휩쓸려가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3. 4 이-메일 목회 서신)

2021 사순절에

좋은 아침입니다.

 

1.

사순절(Lent)을 보내고 있습니다.

 

교회력에서 사순절은

부활절을 기다리는 매우 중요한 절기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사순절 기간 동안

금식하고, 기도하고 구제하면서

예수님의 3년 공생애부터 십자가 죽으심까지

예수님의 삶을 닮으려 애썼습니다.

 

부활절에 세례를 받기로 예정된 분들은

사순절 동안 세례 교육은 물론

기독교인의 삶을 연습하면서 세례를 기다리고 준비했습니다.

 

2.

사순절을

모든 것을 금지하고 참는

금욕의 시간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수도원이나 세상에서 따로 격리된 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가능할 수 있지만,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지나친 금욕은

자칫 위선적인 모습의 신앙이 될 수 있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사순절의 정신을

“절제 (self-control)” 정도를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지나칠 정도로 세상에 빠져 있었다면

삶의 축을 하나님께로 옮겨 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에 몰두한 것이 있다면,

탐닉하는 것에서 빠져나와서 신앙과 삶의 균형을 잡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이런 저런 핑계로 무늬만 그리스도인인 경우가 있었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훈련(discipline)”도 사순절에 생각할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길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처럼 지루한 천로역정입니다.

 

훈련하지 않으면

중간에 포기하거나 대충대충 믿기 쉽습니다.

 

기도와 말씀, 사랑의 실천,

배려, 신중함과 지혜로움, 근사함 등등 –

신앙의 덕목을 훈련해서 몸에 익히기 원합니다.

 

3.

사순절은

1년 365일 가운데 십 분의 일에 해당합니다.

 

삶의 십일조를 드린다는 마음으로

2021년 사순절을 맞기 원합니다.

 

팬데믹으로 흩어져서 사순절을 보내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깊은 신앙,

웬만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신앙,

누가 보아도 구별된 성도의 신앙을 훈련하고 장착하는 사순절이기 바랍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 5:16)

In the same way, let your light shine before others, so that they may see your good works

and give glory to your Father who is in heaven. (Mat 5:16)

 

하나님,

사순절을 지나면서

참빛 식구들의 신앙이 깊어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2. 25 이-메일 목회 서신)

성도

좋은 아침입니다.

 

1.

몇 주전,

아침마다 큐티를 전송하시는

어떤 목사님의 유튜브를 보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이다음 하나님께 가시면

자신의 묘소에 “OOO 성도”라는 묘비를

자녀들에게 부탁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聖徒, 거룩한 무리/백성)에 해당하는

영어식 표현은saints입니다.

성자를 The Saint라고 하는데,

우리 일반 그리스도인들도 saints라고 부릅니다.

 

헬라어 <하기오스>역시

거룩하다는 단어에서 파생된 <성도>라는 뜻입니다.

 

2.

교회에서는 “성도”라는 말을

집사나 권사가 아닌 일반 교인을 가리킬 때 사용합니다.

 

성도라는 말을 쓰거나 듣는 것은

초신자 같은 느낌이거나

교회에 오래 다녔지만

직분을 갖지 못한 분을 부를 때입니다.

 

말 그대로 ‘거룩한’표현인 성도가

직분을 가리키는데 쓰이는 것은 유감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 “성도”로 불리기를

기대하고 소원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다음 하나님께 가면

목사, 장로, 권사, 집사와 같은

이 세상의 직분은 아무 소용이 없고

우리 모두 “성도”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테니까요.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계19:8)

 

 

3.

기독교와 교회가 세상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요즘이기에

“성도”라는 말이 더 깊이 다가옵니다.

 

“성도”의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단지 교회에서 직분이 없는 분을 부르는 호칭이 아니라

“성자”의 반열에 걸맞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의 본래 모습을 회복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거룩하고 선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마5:16).

 

그 어떤 호칭보다

“성도”라고 불리길 바랍니다.

얼마나 근사하고 고귀한 말인지요!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 모두 거룩한 성도로 하나님 앞에 나가기 원합니다.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계19:8)

 

 

하나님,

주님 백성의 거룩함을 회복하고

성도로 세상과 주님 앞에 서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2. 18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