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주 월스트리트저널(The Wal Street Journal)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습니다.

미국 고등학교 영어 시간에 사용하는 교과서 가운데 열 개를 특정해서

30년 전과 거의 동일하다는 보도였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이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스콧 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

스타인벡의 <생쥐와 인간>등입니다.

 

저자나 제목을 보면

30년 동안 교과서 목록에 들기에 손색이 없는

말 그대로 고전들입니다.

 

그런데 보도에 의하면,

시대가 바뀌었고 좋은 작품도 많이 있지만,

교과서를 바꾸는 절차가 생각보다 복잡하고 까다롭답니다.

그래서 30년 동안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신문 기사에서는 몇 가지 문제도 제기했습니다.

미국 공립 학교에서 백인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44%로 떨어졌는데,

상위 10권의 교과서에 속한 저자들이 모두 백인이라고 했습니다.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학생들의 독서 참여율이 뚝- 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2023년 기준으로 13세 이상 학생들의 일일 독서 참여율은 13%에 불과합니다.

2012년의 27%, 1984년의 35%에 비해서 현저히 줄었습니다.

종이책이든, 전자책이든 책을 읽는 학생들이 급격히 줄었습니다.

 

학생들이 30년 전에 교과서에 편입된 고전을

재미있게 읽는다는 보장이 없으니,

학생들의 독서를 위해서

유연한 도서 목록의 변화를 요청했습니다.

 

2.

시대가 많이 변했습니다.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변하고,

변해야 할 것은 멈춰 있는 아이러니도 발생합니다.

 

시대를 따라가는 것이 바른 것인지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는 말 대로

시대의 변화에 상관없이 옛것을 소중히 보관하는 것이

바른 것인지 헷갈릴 때도 많습니다.

 

쉽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욱더 분별력이 요청됩니다.

한 가지만 옳다고 고집을 부릴 수도 없고

옛것은 모두 틀렸다고 내다 버릴 것도 아닙니다.

이 사이에서, 적절한 긴장과 지혜로운 분별이 요청됩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나름 기준을 갖고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줏대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이것저것을 번갈아 채택하다 보면

자칫 누더기로 변한

자신과 자신의 인생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바로 전에 배운 ‘십자가의 신앙(얼 spirit)’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하늘까지 높이 오르기를 원합니다.

이웃을 향해서 양팔을 무한정 뻗어서

많은 사람을 품기 원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헷갈릴 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잣대를 사용하면 올바르게 결정할 수 있을 겁니다.

 

현명하고 꿋꿋하게

주어진 인생길을 걸어갑시다.

 

내가 주의 계명들을 믿었사오니

좋은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 (시편119:66)

 

 

하나님,

것을 고집하다가

날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지혜를 지나치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7. 31. 이-메일 목회 서신)

 

선지자 에스겔

좋은 아침입니다.

 

1.

<생명의 삶>의 순서에 따라서

아침마다 하나님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편의상 순서만 따를 뿐, 제가 묵상한 글을 보내고,

참빛 식구들도 본문을 읽고,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시길

제안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삶>에 실린 본문 해설이

마치 해답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우리만의 성경 읽기입니다.

 

<생명의 삶>을 통한 성경 읽기의 유익은

아침마다 조금씩 읽다 보면

8-9년 마다 성경을 통독한다는 것입니다.

 

새벽기도회로 모이지 못했던 2018년부터

<생명의 삶>을 읽기 시작했으니

앞으로 2-3년 후면 우리 모두 성경을 통독하게 됩니다.

 

제가 갖고 있는 기도 제목 가운데 하나가

모든 참빛 식구들께서 저와 함께 계시면서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성경을 통독하는 것입니다.

이 꿈이 이뤄질 날이 멀지 않았네요!

 

2.

이번 달에 읽기 시작한 본문이

구약성경 에스겔서입니다.

 

구약성경의 예언서는 읽기가 어렵습니다.

주로 심판 메시지가 많이 등장합니다.

그것도 이스라엘이 범한 비슷비슷한 죄들을 지적합니다.

우리와 매우 다른 시대적인 간격도 있고,

아무래도 심판 메시지를 읽는 것이 불편합니다.

에스겔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에스겔 (“하나님이 강하게 하다”)은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10년 전인 주전 597년에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제사장 가문 출신인 에스겔이

바빌론 그발 강가에서 신비로운 환상을 보면서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선지자로 준비하는 과정이 절대 쉽지 않았습니다.

좌우로 누워서 420일을 지냈고,

심판의 말씀이 가득 쓰인 두루마리를 먹었습니다.

지쳐서 일어날 수조차 없었습니다.

주님의 영이 에스겔의 몸속에 임하고,

에스겔이 선지자로 완전히 거듭 태어났습니다.

 

3.

에스겔의 예언을 듣게 될 청중들은 하나님을 완전히 떠났습니다.

가증하고 완악했습니다. 성전에서도 우상을 섬길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에스겔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습니다.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넜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에스겔을 선지자로 부르시고

듣지 않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길 부탁하십니다.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끈질긴 열심입니다.

 

질투에 가까울 정도로 강렬한 하나님의 사랑과 열심이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선포된 것입니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올 확률은 “제로(0)”에 가까웠지만,

하나님 말씀은 선포되어야 했습니다.

 

때때로 우리의 신앙이나 삶이

허공을 치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질문이 생기는 순간입니다.

 

그때도 우리는 하나님 백성의 길을 가야 함을

선지자 에스겔을 통해서 배웁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몸으로 느끼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겔3:27)

 

 

하나님,

무슨 일이 있어도

주님 안에 머물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7. 24. 이-메일 목회 서신)

아레테

좋은 아침입니다.

 

1.

“덕후”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어떤 분야에

깊은 열정을 쏟는 사람을 일컬을 때

종종 이 단어를 사용한답니다.

 

원래는 197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 팬들을 지칭하는 ‘오타쿠’에서 유래했지만,

이제는 단순히 ‘광적인 팬’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보다는,

한 가지 대상에 진심을 다하는 긍정적인 표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예수님의 덕후라고 불러도 좋겠습니다.

십자가에 관한 연속 설교를 마쳤으니,

십자가 덕후들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2.

헬라어 “아레테”는

‘탁월함’ ‘최고의 상태’ 등을 뜻합니다.

개역 성경은 이 단어를 “덕(德)”으로 번역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자기 재능이나 실력을 최고로 발휘한 상태입니다.

운동선수들이 갈고닦은 실력을 최고로 발휘해서

신기록을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도덕적으로

그리스 철학에서 말하는 네 가지 덕(정의, 지혜, 용기, 절제)을

추구하고, 갖춘 모습입니다.

 

이처럼 헬라어 “아레테”는

최고, 극치, 최선, 정상 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3.

저는 예수님의 아레테가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 철학의 아레테는 ‘정상에 오르는 것’이지만,

예수님의 아레테는

더 낮은 곳, 더 아픈 자리로 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가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세상이 줄 수 없는 최고의 아레테, 영원한 아레테를 이루셨습니다.

 

4.

우리의 아레테는 무엇일까요?

 

우리도 삶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갑니다.

남과 비교는 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장착해 주신 재능과 은사를

최고로 발휘하며 살아갑니다.

 

그리스 철학이 강조했던

“정의, 지혜, 용기, 절제”를 추구합니다.

동양에서 강조하는 “덕”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아레테, 탁월함을 추구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갑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사랑, 기쁨,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친절), 충성 온유와 절제(갈 5:2-23)를

우리의 삶과 성품 속에서 맺어갑니다.

기독교인의 아레테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탁월함의 자리, 예수님을 닮은 삶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진짜 멋진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가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앎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경건에 이르게 하는 모든 것을,

그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그의 영광과 덕[아레테]누리게 주신 분이십니다. (벧후 1:3, 새번역)

 

 

하나님,

하나님 주시는 능력으로

아주 근사한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7. 17. 이-메일 목회 서신)

자기 십자가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주에는

십자가에 대한 연속 설교를 마친 후,

잠시 숨을 고르며 찬송가를 해설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찬송가 311장, <내 너를 위하여>에 깃든 이야기였습니다.

 

설교 말미에, 제가 좋아하는 예화를 소개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십자가를 메고 산꼭대기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는 황금 십자가, 꽃으로 장식된 십자가 등

여러 십자가가 놓여 있었습니다.

 

원하면 십자가를 바꿔서 지고 갈 수 있다는 예수님 말씀에

처음엔 황금 십자가를 들어보았지만, 너무 무거웠고,

다음엔 장미꽃으로 된 십자가를 선택했지만,

조금 가다 보니 가시에  찔려 포기했습니다.

 

결국, 그는 자기가 메고 온

십자가를 다시 지고 산을 내려가면서

그렇게 감사하고 기뻐했다는 예화였습니다.

 

저는 여전히 이 예화가 좋습니다.

지금 내게 주어진 그리고 앞으로 주어질 인생길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최고의 선물임을

다시금 되새기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2.

물론, 이 예화가 오늘날에도

과연 설득력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현실에 안주하라는 메시지로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무거운 건 가볍게, 불편한 건 편하게 바꿔서

최고로 만드는 시대를 살아고 있습니다.

문제를 감내하기보다는 해결할 때 경쟁력을 갖춥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십자가 예화는 수동적이고

현실 순응적인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시대가 많이 변하고 있네요.

 

예전에 인터넷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속담을

해학적으로 바꾼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는 길도 물어서 가라”는 “아는 길은 그냥 곧장 가라”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도 곱다”는 “가는 말이 고우면 얕본다”

“시작이 반이다”는 “시작은 시작일 뿐, 이미 늦었다” 등입니다.

농담처럼 들리지만, 오늘날의 현실을 반영한 해석이기도 합니다

 

우리 역시 시대에 맞는

지혜와 유연함이 필요합니다.

필요한 것을 배우고 장착하면서,

변화에 대처하고 더 나은 길을 찾아내야 합니다.

 

3.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화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예화에서 주목한 것은

여러 가지 십자가를 보고 ‘마음’이 흔들린 지점입니다.

결국에는 처음에 메고 온 십자가에 마음을 확정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산을 내려갑니다.

 

우리는 종종

남과 비교하며 마음이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나는 왜 이런 십자가를 지고 있을까?’

‘왜 내 인생은 이리 무거울까?’

 

처음 마음을 꼭 간직하면서

세상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남과 비교하다가, 마음이 흔들리면 지는 겁니다.

 

외적인 조건에 좌우되지 않고

우리 각자가 지고 가는 십자가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모든 지킬 만한 중에 더욱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언 4장 23절)

 

하나님,

십자가 붙들고

흔들림없이 주어진 길을 걷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7. 10. 이-메일 목회 서신)

기적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설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연결했습니다.

십자가가 하나님 사랑의 절정이라면,

부활은 하나님 사랑의 완성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죽음을 넘어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인생,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하지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은

자연법칙 안에서는 있을 수 없는 특별한 사건입니다.

그렇기에 부활은 말 그대로 기적(miracle)입니다.

 

저는 2천 년 전의 부활을 증명하기보다

지금 이곳에서 부활을 살아냄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여전히 효력이 있음을 드러내자고

자주 말씀드립니다.

 

2.

체스터튼(G. K. Chesterton, 1874-1936)이라는 영국 작가는

동화 속의 상상력을 갖고 기적을 설명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동화처럼  자유자재로

세상을 만들어 가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적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기꺼이 기적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체스터튼은 기적을 ‘더 큰 이성’이라고 했습니다.

과학을 비롯한 세상의 이치를 뛰어넘는

더 큰 세계라는 뜻입니다.

 

기적을 인정할 때,

사고나 상상력이 하나님의 세계로 이어지고 확장되지만,

기적을 인정하지 않으면, 이성의 영역에 갇힌다는 것입니다.

 

체스터튼에 영향을 받은 C. S. 루이스(1898-1963)는

<기적>이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1. S. 루이스에게 기적은 하나님께서 자연 세계의 문을 열고

잠깐 방문하시면서 생긴 특별한 사건(special divine event)입니다.

 

그러니, 기적을 믿고 인정할 때,

세상을 방문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3.

현대인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은

교회에서 흔히 듣는 진부한 말(cliché)이거나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이상한 말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인간이 되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기적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무한한 상상력이 펼쳐지는 동화와 같은 믿음의 세계입니다.

 

주의할 점도 있습니다.

기적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특별한 일입니다.

사람은 기적을 만들어내거나 조작할 수 없습니다.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상으로 생각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연을 뛰어넘는 일들이 매번 발생한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세계는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생로병사, 희로애락을 모두 겪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열심히 기도하면,

기적과 같은 특별한 일이 일어난다는 말도 듣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신비한 것만 쫓는 왜곡된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일상에서

십자가의 은혜와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알아가는 올해 하반기가 되길 바랍니다.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시편72:18)

 

하나님,

믿음의 눈으로 주님의 신비를 보는 새달이 되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7. 3. 이-메일 목회 서신)

우주의 신비

좋은 아침입니다.

 

1.

엊그제 월요일에는

매우 흥미로운 발표가 있었습니다.

지난 10년간 8억1천만 달러를 들여 건설한

칠레의 베라 루빈 천문대를 소개하는 자리였습니다.

.

과학에 문외한인 저에게는

공상 과학 영화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들렸지만,

앞에서 발표하는 과학자들의 얼굴은 상기되었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베라 루빈 천문대는

우주를 향한 인류의 새로운 발걸음이었습니다.

 

“베라 루빈”이라는 명칭은

암흑물질(black matters, 전 솔직히 모르겠습니다)의 존재를 발견한

미국의 여성 천문학자의 이름에서 왔답니다.

 

베라 루빈 천문대는 지름이 1.65 미터인 카메라 렌즈 3 개를 통해서 관측합니다.

32억 화소의 디지털 카메라입니다 (애플 핸드폰 카메라는 4,800만 화소).

베라 루빈 천문대가 찍은 사진을 한 번에 보려면,

농구장 크기의 초고해상도 TV 400대를 연결해야 한답니다.

 

앞으로 베라 루빈 천문대에서는

매일 같이 100장 이상의 고화질 우주 사진을 찍어서 정보를 축적하고

자격을 얻는 회원(국)들에게 공개할 계획이랍니다.

 

2.

이번에 천문대가 공개한 4개의 우주 사진은

정말 그림 같았습니다. 아름다웠습니다.

 

천문대에서 공개한 사진을 보면서

‘생뚱맞게’ 창조주 하나님이 떠올랐습니다.

 

저에게는, 그처럼 아름다운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다는 증명이었습니다.

창조주가 없이 우연히 그토록 아름답고 신비로운 우주가

만들어졌고, 현재도 만들어지고 있음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시편 기자는 밤하늘의 달과 별을 보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을 텐트처럼 펼치시고

손가락으로 달을 붙이시고 별들을 붙이셨다고

상상력을 총동원해서 동화처럼 묘사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늘을 만드신 그 크신 하나님께서

작고 작은 자신을 생각하고 돌보시는 것에 감격했습니다.

 

거대한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이시라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명은 눈에 들어오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한 명’을 기억하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감동한 것입니다.

감사하고 신비로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3.

우주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하찮은 점일 뿐입니다.

 

샌프란에 사는 우리는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서로 다투고 시기하고

폼을 잡으면서 자랑하던 것을 생각하니

쥐구멍에라도 들어가야 할 정도로 부끄러웠습니다.

 

오늘날의 과학을 잠깐 옆에 두고,

시편 기자처럼 창조주 하나님을 마음에 떠올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이름을 부르시고 돌보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천문대가 공개한 사진만큼이나

우리가 마음으로 그리는 믿음의 세계도 신비롭습니다.

과학자들의 상상력이 현실이 되듯이,

우리 믿음의 상상력도 실제가 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잠깐 밖에 나가서

밤하늘의 별을 감상하면서

시편 기자처럼 창조주 하나님을 고백하면 어떨까요?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편 8:3-4)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있어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6. 26. 이-메일 목회 서신)

자라감

좋은 아침입니다.

 

1.

2025년은 제가 담임 목회의 길을 걸어온 지

25년이 되는 특별하고 감사한 해입니다.

 

그동안의 목회를 돌아봅니다.

25년쯤 하면 자신감이 생길 만도 한데

아쉽고 부족한 것이 여전히 많습니다.

물론 감사한 것도 많습니다.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제가 목회하는 25년 동안

재정적으로 돕는 형제도 있습니다.

인디애나와 이곳 샌프란까지,

한결같이 돕는 손길이 있다는 것은 저에게 큰 복입니다.

 

무엇보다, 교회를 함께 세워온 신앙의 동지들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 함께 교회를 세워온 참빛 식구들께는

앞으로도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살 것입니다.

 

2.

25년 목회하면서

제가 얼마나 자랐는지를 돌아봅니다.

제자리에 멈춰 있거나, 혹시라도 뒤로 후퇴했다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라는 하나님 말씀 위반입니다.

 

여러 가지 가운데, 목사에게 중요한 설교도 살펴봅니다.

저는 인디애나 시절의 설교 녹음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샌프란에서의 20년 설교 녹음도 있습니다.

 

가끔 예전 설교를 들으면서 저 자신을 점검합니다.

저는 목소리가 맑은 편이 아니지만,

그래도 젊을 때 목소리가 지금보다 낫습니다.

그런데,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발음이 뭉치고, 주어와 술어가 맞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긴장해서 그럴 것입니다.

 

그때 비하면, 지금은 많이 느려졌습니다.

주중에 설교를 여러 번 들으면서 모니터링하다 보니

발음도 비교적 명확해졌습니다. 조금 여유가 생긴 것 같습니다.

 

설교 내용은

그때그때 교인들의 상황에 맞게 설교했기에

각각의 설교에 의미가 있습니다.

 

설교만 놓고 보면,

모든 면에서 조금은 자랐습니다.

 

이다음 은퇴하면, 그동안의 설교를 아내와 함께 들으면서

그 시절 교인들을 떠올리며 차를 마시면서

하루를 시작할 생각입니다.

 

3.

우리는 익숙한 것에 멈춰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신앙이 그렇습니다.

내가 듣고 싶은 설교, 내 마음에 맞는 설교를 듣고 “아멘”합니다.

조금 불편하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립니다.

 

직장이나 세상의 일에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습니다.

요즘 AI가 대세이듯이 새로운 것에 빠르게 적응합니다.

실력을 키웁니다.

 

그런데 신앙은

그만큼의 시간을 내기도 어렵고

기도와 말씀, 신앙 서적 읽기, 개인 경건의 훈련 등에

시간을 쓸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에나 신앙이 멈춰 있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행사가 많지 않은데,

자칫 교회 행사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을 두고

신앙이 자랐다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열심 있는 교인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신앙의 환경도 바꿔보지만,

금세 지루해지니, 결국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내가 변하고, 내가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늘 말씀드리듯이,

예수님을 향해서 자라가는 각자의 방식을 개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멈추지 말고, 자라가야 합니다.

때로는 탈피, 껍질을 벗는 아픔도 필요합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자기 변화와 결단입니다.

 

그렇다고 조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날마다 새롭게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씩 조금씩 자라가면 됩니다.

대신, 멈추면 안 됩니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애가 3:23)

 

 

하나님,

예수님을 닮기까지 멈추지 않고 자라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6. 19. 이-메일 목회 서신)

아는 것 만큼

좋은 아침입니다.

 

1.

작년 이맘쯤, 우리 부부는

Ely Lilly라는 재단의 재정 지원으로

40일 동안 유럽 여행을 하며 휴가를 보냈습니다.

 

감리교가 시작된 런던을 시작으로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의 독일,

이태리 로마, 그리스의 아테네와 고린도까지

대부분 기차를 타고 여행했습니다.

 

유럽에서 흔하다는 소매치기도 당하지 않고

안전하고 건강하게 다녀왔습니다.

저희 인생에 이렇게 긴 여행,

여러 도시를 방문하는 여행은 다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여행이 끝났을 때,

“다 했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더 이상 하면 몸이 지칠 것 같았습니다.

계획한 곳들을 거의 모두 방문했습니다.

 

일 년이 지났지만, 엊그제 다녀온 것처럼

저희 마음에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평생에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입니다.

 

2.

여행을 다녀온 이후,

여행 관련 유튜브를 자주 시청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제가 다녀온 곳들을 중심으로

복기(review)하듯이 유튜버들의 설명을 듣고,

다시 방문하는 듯한 느낌으로 영상을 봅니다.

 

저희가 갔던 장소가 나오면 반갑고 익숙합니다.

방문하지 않았던 곳이 나오면

‘미리 알았더라면 꼭 들렀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생깁니다.

 

‘여행은 아는 것만큼 보이고 즐긴다’라는 말이 맞습니다

철저하게 준비해서 가면,

그만큼 여행의 깊은 참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작은 것에도 의미를 찾고, 세심하게 감상할 것입니다.

 

또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여러 도시를 방문하는 것은 작년으로 충분하고

한두 도시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미리 공부해서 골목까지 속속들이 충분히 즐기고 싶습니다.

 

3.

여행만 그럴까요!

우리 인생 여정도 비슷합니다.

대충대충 지나가면,

정말 귀하고 소중한 것을 놓칠 가능성이 큽니다.

 

인생길에 만나는 이웃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를 아는 만큼, 이야기한 만큼

이해하고 격려하며 도울 수 있습니다.

만남의 깊이를 더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3년 공생애를 마치시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도,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분명히 아셨고,

만날 사람들, 해야 할 일을 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벌써 6월입니다.

부지런히 공부하고 배우고 익히면서,

인생의 여정도, 신앙의 여정도 충분히 누리길 바랍니다.

 

아쉬움은 뒤로하고

감사가 넘치는 한 해를 만들어갑시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시편 25:4)

 

 

 

하나님,

주님의 생각을 알고, 길을 걷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6. 12. 이-메일 목회 서신)

레드우드 나무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말에는

전교인 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몸이 편찮으신 권사님들,

출타한 식구들이 참여하지 못하셨지만,

아이들부터 권사님들까지 뜻깊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수련회 장소는 완벽할 정도로 훌륭했습니다.

그 넓은 장소를 우리만 사용하는 호사도 누렸습니다.

 

수련회장(場)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하늘까지 치솟은 레드우드 나무(redwood tree)였습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레드우드 나무는

세계에서 가장 높이 자라는 나무에 속합니다.

100미터 이상 곧게 자랍니다.

 

레드우드 나무가

높이 자랄 수 있는 것은

뿌리가 서로 엉켜 있어서 좀처럼 쓰러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련회장에 있는 레드우드 나무를 살펴보니

하나의 뿌리에서 두 그루가 자라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 북부에 서식하는 레드우드 나무는

뿌리에서 공급하는 수분과 더불어

안개를 먹고 자란답니다.

 

우기와 건기가 구분되는 우리 지역에서

레드우드 나무가 그처럼 높이 자랄 수 있는 것이

안개 때문이라는 사실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수명이 무려 천 년에서 삼천 년이 된다고 하니

수련회 장에서 만난 레드우드 나무를 보면서

수천년 전까지 시간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레드우드 나무도 처음에는 작은 싹이었을 것입니다.

천년을 자라서 100미터가 되었다면

해마다 10센티씩 자란 셈입니다.

 

2.

레드우드 나무를 보면서,

우리의 신앙을 떠올렸습니다.

 

신앙도 하나님을 향해서 곧게 자라야 합니다.

눈에 띄지 않아도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자라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바라보고 자라갈 때,

레드우드 나무 못지않은 높은 신앙을 갖게 될 것입니다.

 

레드우드 나무의 뿌리가

서로 얽혀서 크고 높게 자라듯이,

공동체가 서로 의지하고 삶의 뿌리가 서로 얽혀있을 때,

건강하고 힘있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레드우드 나무가 안개를 먹고 자란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우리에게는 매일 아침 읽고 묵상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안개와 같을 것입니다.

당장 눈에 띄지 않아도 매일의 성경 묵상이 우리 신앙을 높이 자라게 할 것입니다.

 

뿌리부터 견고하게

하나님을 향해서 곧게 높이 자라는

우리의 신앙이 되길 바랍니다.

 

오직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벧후 3:18)

 

 

하나님,

우리의 신앙이 높이 자라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5. 29. 이-메일 목회 서신)

나랏빚

좋은 아침입니다.

 

1.

신용평가 회사 무디스에서

미국의 신용등급을 최상에서 한 계단 내렸습니다.

미국의 국가 부채가 지나치게 많고

그에 따른 이자 부담과 자금 조달 능력이 의심된다는 평가였습니다.

 

미국의 국가 부채는

2025년 5월 현재, 36조 달러(한화5경원)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천문학적인 숫자입니다.

 

이에 대해서 미국이 지불하는 이자 비용은

국가 예산의 16%로 국방예산(15%)보다 많습니다.

빚과 이자가 눈덩이처럼 늘어나는 악순환입니다.

 

국가 부채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미국은 예산의 70%가 사회보장, 고령자와 저소득 의료보험 지원

기타 실업 급여 등의 의무 지출(mandatory spending)입니다.

 

나머지 30%를 국방과 기타 예산으로 할당하니

거기서 흑자를 내고 부채를 갚아야 하는데

부채는커녕 이자 상환도 쉽지 않습니다.

 

2.

미국의 빈부격차도 매우 큽니다.

 

미국의 국가 부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을 때,

소위 수퍼 리치들의 자산은 천문학적으로 늘었습니다.

상위 1%의 미국 전체 자신의 30%를 독점하고 있습니다.

하위 50%가 갖고 있는 자산은 3%에 불과합니다.

 

100개의 피자 조각이 있다면, 한 명이 30개를 갖고 있고

하위 50명은 세 조각을 갖고 나눠 먹는 실정입니다.

 

어제 미국 하원에서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안(one big, beautiful bill)”이 통과되었습니다.

저소득층 지원을 축소하고

부자들의 세금을 감면해 주는 내용입니다.

 

격차가 더욱 심해질 것이 뻔합니다.

그나마, 중간 계층과 팁을 받는 노동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랄 뿐입니다.

 

하여튼, 국가 부채를 해결하기 위한

지혜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누군가 손해를 봐야 할 겁니다.

동네 피자를 독식하는 수퍼 리치들에게서

세금을 더 거둬야 할 것 같습니다.

 

2024년 한 해 동안,

우리가 알만한 부자들 19가정의 자산이

자그마치 1조 달러가 늘었다기에 하는 말입니다.

 

3.

사도 바울은 사랑의 빚만 지라고 했는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님의 마음과 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욕심 때문일 겁니다.

 

지도자들에게 하늘의 지혜가 임하길 기도합니다.

국가 재정의 문제를 힘없는 서민에게

직간접적으로 떠넘기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렘 29:7)

 

 

하나님,

세상에 평안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5. 5. 22.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