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서기

좋은 아침입니다.

 

1.

팬데믹이 많은 것을 바꿔놓았습니다.

 

밖에 나가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다닙니다.

마스크 없이는 공공건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팬데믹 전, 특히 미국에서 상상도 못 할 일입니다.

 

반가운 분들을 만나도 악수할 수 없습니다.

악수는 커녕 6피트 거리를 두고 얘기해야 합니다.

자칫 마음의 거리까지 멀어질까 염려됩니다.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큰 변화는

교회에서 예배로 모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대면예배 대신

영상으로 예배한 지 7개월이 넘었습니다.

 

팬데믹 전에는

주일에 교회에 와서 예배하는 것을

신앙생활의 필수 덕목으로 삼았습니다.

보수적인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성수를 목숨처럼 중요시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코로나바이러스가

길게는 수천 년 이어오던 주일 예배 개념을

단숨에 바꿔 놓았습니다.

 

이제는 유튜브 또는 zoom으로 드리는

예배와 모임이 일상화되었고

이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분들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2.

팬데믹과 동시에

신앙생활의 모습이 바뀌다 보니

개인과 가정의 역할이 훨씬 중요해졌습니다.

 

그동안 주일 예배 참석에

신앙생활의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면,

이제는 교회에 오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신앙을 관리하고, 세워가야 합니다.

 

더불어 함께 묻어가던 신앙에서

흩어진 자리에서 스스로 홀로서기를 시도해야 합니다.

쉽지 않지만, 그동안 안일했던 신앙을 되돌아보는 기회도 됩니다.

 

대신, 신앙의 홀로서기에 실패한다면

그동안 세워놓은 신앙의 집이 흔들흔들 위태로울 수 있습니다.

 

가정의 역할도 중요해졌습니다.

2500여년 동안 각지에 흩어졌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가정교육을 통해서 자신들의 신앙을 유지했듯이

우리도 가정에서의 신앙 교육에 힘을 써야 할 때가 왔습니다.

 

3.

하나님께서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심을 믿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도 믿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백성들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일을 쉬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 속에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자신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새로운 역사를 설계하며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회복을 꿈꾸었 듯이

우리도 팬데믹으로 집에 포로로(?) 잡혀있는 동안

과거에 당연하게 여겼던 신앙을 되짚어 보고,

진정한 신앙,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기 원합니다.

 

팬데믹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때로는 답답함에 손발이 꽁꽁 묶인 듯 하지만,

팬데믹이 깨우치는 교훈과 팬데믹 기간에만 누리는 선물을 통해서

우리 신앙이 더 깊어지고, 어디에 있든지 흔들리지 않는

홀로서기 신앙을 갖추기 원합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창32:24)

And Jacob was left alone.

And a man wrestled with him until the breaking of the day. (Gen 32:24)

 

하나님,

어떤 상황 속에서도

홀로 설 수 있는 믿음을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10. 22이-메일 목회 서신)

 

 

 

 

아가페 사랑

좋은 아침입니다.

 

1.

성경에서 사랑장을 찾으라면

“사랑은 오래 참고”로 시작하는 고린도전서 13장과

요즘 주일에 살펴보는 요한일서 4장일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사랑이 무엇인지 정의하고 알려줍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장에서

사랑의 시작점이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사랑을 믿음과 연결시켰습니다.

 

“사랑”만큼 흔한 말도 없습니다.

“사랑”만큼 말하기 쉬운 것도 없습니다.

“사랑”만큼 가짜가 판을 치는 것도 없습니다.

“사랑”만큼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것도 없습니다.

“사랑”만큼 어려운 것도 없습니다.

 

2.

사도 요한이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아가페입니다.

 

세상에서 흔히 발견되는

감정, 욕심, 서로 탐닉하는 에로스 사랑이 아니라

하나뿐인 아들을 세상에서 보내시고

화목 제물로 내어주신 아가페 사랑입니다.

그만큼 숭고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길 부탁하십니다.

 

키르케고르는

<사랑의 역사/The works of love>라는 책에서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음은

특권이라고 강조합니다.

 

아가페는 하나님의 전유물인데

남녀노소, 빈부 귀천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전유물인 아가페 사랑을 나눠 주시고

그 사랑을 사용하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천한 일을 하는 사람을 예로 들면서

그 사람도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는 순간

그 누구와 견줄 수 없는 최고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4.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4:8, 16)

 

아가페 사랑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입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받고,

그것을 세상에 나누기 원합니다.

 

비록 우리 사랑의 지경이 넓지 않고

사랑의 분량도 크지 않고

자랑할 만한 사랑도 아니지만,

우리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께 받은

<아가페> 사랑을 이웃과 나누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을 할 때나

“사랑”을 실천할 때,

그 사랑이 하나님께 속한 <아가페> 사랑임을 꼭 기억합시다.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딤전1:5)

The aim of our charge is love that issues

from a pure heart and a good conscience and a sincere faith. (1Tim 1:5)

 

하나님,

<아가페>사랑을 나눌 특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10. 15이-메일 목회 서신)

 

 

 

 

 

 

 

소중한 하루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번 사도 요한을 소개하면서

100세 가까이 장수하면서

요한복음, 세 권의 요한 서신, 요한 계시록을 기록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붙여주신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노년의 사도 요한은 아가페,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는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100세 시대가 되었다지만

단지 100세를 사는 것보다

100년을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웃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감사하고 의미 있는 이야기로 꽉 채워진 100세를 산다면

그야말로 사도 요한에 버금가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2.

비록 100세를 채우지 못하시고

9월 30일에 하나님께 가셨지만,

94년의 성상을 멋지게 사신 선배 그리스도인이 계십니다.

 

경기도 남양주 매그너스 요양병원에서

대한민국 현역 최고령 의사로 일하셨던 한원주 원장님이십니다.

실제 직책은 과장이지만, 사람들은 “원장님”으로 불렀답니다.

 

한 원장님은

구한말 할머니가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전형적인 기독교 집안 출신입니다.

 

아버지를 따라서 의사가 되었고,

물리학을 전공한 남편과 함께 유학 길에 올라서

내과 전문의가 된 후에 미국에서 10년 동안 의사 생활을 하다가

1968년에 귀국해서 병원을 개업하셨습니다.

당시는 유학을 다녀온 의사가 드물어서 돈을 많이 버셨답니다.

 

그런데

병원을 개원한 지 10년 만인 1978년,

남편이 먼저 하나님께 가면서

한원주 원장님의 인생에 가장 큰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하늘처럼 의지하던 남편이 없으니 얼마나 당황했을까요!

 

그때 한 원장님을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제 남편 대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십니다.

 

“뭘 그렇게 울고불고하느냐, 넌 누구보다도 부요하게 살아왔다.

부모님 사랑도 많이 받았고, 미국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미국 구경도 많이 했고

병원이 잘 돼서 돈도 많이 벌지 않았느냐.

너는 네 주변 사람들을 돌아봤냐?

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다.

정신 차려라.” -신앙세계, 2019-

 

한 원장님은 월수입이 백여만 원밖에 안 되는

<우리들 의원>을 개원하고 의료선교를 시작해서

20년 동안 어려운 이웃을 치료하셨습니다.

 

82세로 우리들 의원에서 은퇴하신 후에도

의료 봉사를 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 가시기 직전까지

남양주 요양병원에서 치매 환자를 돌보신 것입니다.

 

운동이 필요하다며

2시간 반 동안 대중교통을 이용하시고,

환자들의 병상을 몸소 방문하시고, 함께 걸으시면서

대한민국 최고령 현역 의사로 활동하셨습니다.

 

한원주 원장님께서 하나님께 가시면서

가족들과 직원들에게 다음의 세 마디를 남기셨답니다:

“힘내” “가을이다” “사랑해”

 

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인생은

‘단 한 번”입니다.

 

매일 맞이하는

우리 인생의 한 날이 그토록 소중한 이유입니다.

 

94세를 멋지게 사신 한원주 원장님의 삶도

하루하루가 모여서 94년이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 안에서 멋지고, 근사하게 사시는

참빛 식구들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도움이시라 (시편 46:1)

God is our refuge and strength,

a very present help in trouble. (Ps 46:1)

 

하나님,

오늘 하루, 우리 모든 참빛 식구들께서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삶을 살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10. 8이-메일 목회 서신)

거룩의 길

좋은 아침입니다.

 

1.

신앙생활을 하면서

무겁게 느껴지는 말이 “거룩(Holiness)” 입니다.

거룩의 길을 가는 것을 더 어려운 말로

“성화(sanctification)” 라고 부릅니다.

 

용어도 어렵지만

거룩과 거룩의 길을 가는 것이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11:44)고 하셨고,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고 부탁하셨습니다.

 

사도바울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4:5)고 했습니다.

 

2.

알다시피 거룩은

“구별됨(separation)”입니다.

 

섞여 있거나 혼란스러운 것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의하면

창조 이전의 세상은 혼돈(chaos)과 공허(emptiness)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물과 육지를 나누시고

경계를 정해 주셨습니다. 구별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창조 사역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니

하나님 백성인 우리도 구별되어야 합니다.

생각이 구별되고, 삶이 구별되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하나님 백성의 구별됨이 겉까지 드러나야 합니다.

 

물론, 혼란한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도

하나님 백성이 가야 할 거룩의 길입니다.

 

 

3.

유진 피터슨은 거룩한 삶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

 

거룩한 삶은 우리 언행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과 현존을 표현하는 행위이다.

거룩한 삶의 저변에는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설사 그것이 아무리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행동과 연계되어 있다는 확신이 깔려 있다.

(묵시: 현실을 새롭게 하는 영성)

 

거룩함은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할  때,

하나님의 속성이 우리에게 임해서 성취되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셀폰에 WIFI가 연결되지 않으면

셀폰 자체는 그냥 기계에 불과함과 같습니다.

 

이처럼 거룩함도

하나님과 친밀하고 깊은 관계를 통해서 성취됩니다.

 

4.

흩어진 각자의 자리에서

새달 10월을 맞고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답게 생각하고  행동하기 원합니다.

평범해서 눈에 띄지 않더라도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하나님과 연결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은혜와 능력으로

‘저절로’ 거룩한 길을 가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참빛 식구들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present your bodies as a living sacrifice, holy and acceptable to God,

which is your spiritual worship. (Rom 12:1)

 

하나님,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연결되고

거룩의 길을 가는 참빛 식구들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10.1이-메일 목회 서신)

레갑 족속

좋은 아침입니다.

 

1.

엊그제 아침 묵상에서

예레미야 35장의 레갑 족속을 만났습니다.

 

레갑 족속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습니다.

레갑은 모세의 장인이 속했던 겐 족속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지만, 가나안 땅에 거주했습니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여호나답)이 성경에 나옵니다.

엘리야가 바알을 섬기던 이스라엘 왕 아합 가문을 심판하도록

예후를 기름 부어 세웠는데

예후가 레갑의 아들 요나답을 동역자로 불렀습니다(왕하10:15-17).

 

요나답은

예후의 초대에 기꺼이 응합니다.

 

2.

예레미야 35장에 의하면

레갑 족속은 바빌론 느부갓네살 왕이 침입하자

예루살렘에 옮겨와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그들의 조상 요나답의 명령대로

200여년 동안

포도주를 입에 대지 않고,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소유하지 않고

집도 짓지 않고 평생을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는 유목민으로 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에 잠시 이주해서 살고있는

레갑 족속을 성전으로 초대해서

그들에게 포도주를 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 말씀대로 했더니

레갑 사람들이 자신들은 조상 요나답의 명령을 따라서

절대로 포도주를 입에 대지 않는다고 강력히 거부합니다.

 

하나님께서 레갑 족속을 통해서

하나님 말씀을 내동댕이친 이스라엘 백성을

따끔하게 교훈하시려는 의도였습니다.

 

레갑 족속은

조상의 명령도 목숨 걸고 지키는데

이스라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냐는 하나님의 탄식입니다.

 

3.

지금도 전해 내려오는 전통을

그대로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국 동부와 중서부에 많이 있는 아미쉬들이 대표적입니다.

전기는 물론 문명의 이기를 거부한 채

자신들 만의 생활방식을 고수합니다.

 

헨리 나우웬이 활동했던 라르쉬(방주the ark) 공동체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생활하는 전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삶은 물론 물질과 재능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부루더호프 공동체도 있습니다.

 

오래된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면서

자신들의 신앙과 생활방식을 유지하는 현대판 레갑 족속인 셈입니다.

 

이런 공동체를 통해서

혹시 세속에 물들어 있는 기독교 공동체와

기독교인들이 도전을 받습니다.

 

4.

우리에게도 레갑의 전통이 필요합니다.

 

우리 참빛교회만 갖고 있는 전통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계속 계승하고 발전시킬 전통을 만들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축복입니다.

 

가정 별로도 레갑의 전통을 세워가는 겁니다.

자신의 가정만이 간직하는 레갑의 전통입니다.

 

우리 개인의 신앙과 삶에도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끝까지 간직하려는 자신만의 레갑 전통을 갖고 있다면

그것만으로 근사한 기독교인이 될 것입니다.

 

정신 차리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끝까지 간직하고 싶은 레갑의 신앙을 꼭 만들기 원합니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앞에 사람이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예레 35:19)

Jonadab the son of Rechab shall never lack a man to stand before me.(Jer 35:19)

 

하나님,

우리 교회, 우리 가정, 개인마다

시대와 상관없이 변하지 않는 레갑의 전통을 세우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9. 24이-메일 목회 서신)

 

 

예수님의 손길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에는

6개월 동안 묵혀 놓았던

<예수님 우리 예수님>이라는 말씀을 마저 나눴습니다.

 

마태복음 8장과 9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적을 차례로 살펴보는 연속 설교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5-7장)을 통해서 구약의 모세 율법을 뛰어넘는

새로운 계명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음 두 장에서

산상수훈을 선포하신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기적을 통해서 증명하셨습니다.

 

2.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맹인 두 사람이

“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면서

집요하게 쫓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맞아 주십니다.

보이지 않는 눈에 ‘손을 대시면서’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시니

맹인들의 눈이 밝아져 보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나누면서

예수님의 손길에 주목했습니다.

 

예수님 정도면

굳이 맹인들의 눈을 만지지 않으시고

말씀하심으로 그들의 눈을 뜨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맹인들의 눈을 만지셨습니다.

 

3.

맹인만이 아닙니다.

산상수훈 이후에 행하신 첫 번째 기적에서

예수님은 나병 환자의 몸을 만지셨습니다.

나병은 접촉을 통해서 옮깁니다.

나병 자체도 부정했지만, 부정한 나병 환자를 만지는 것은 절대 금기 사항입니다.

예수님은 나병 환자를 만지시면서 그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죽은 관리의 딸을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죽은 상태에 있는 것도 부정했습니다.

구약의 율법에서 생명이 없는 것을 만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관리의 딸을 만지시면서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 말씀하고 살려 주셨습니다.

 

3.

코로나바이러스 이후에

우리는 거리두기(distancing)라는 말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가까운 친지를 만나는 것도 조심스러울 정도이니

낯선 사람과 악수하던 것은 아주 옛날 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예수님의 손길이 특별했습니다.

 

예수님은 부정한 나병 환자도, 죽은 소녀도

그리고 앞을 못 보는 맹인들도 만지셨습니다.

 

말씀을 나누면서

예수님께서 우리 참빛 식구들도 만져주시길 기도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누군가의 손길이 그리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주님의 손길을 다시 한번 구합니다.

예수님께서 참빛 식구들을 꼭 안아 주시고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시고, 함께 걸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가족 안에서 서로에게 예수님의 손길을 나누고,

몸으로는 떨어져도, 마음으로는  친지들과 이웃들에게

예수님의 손길을 전하기 원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마태 9:29)

Then he touched their eyes, saying,

“According to your faith be it done to you.”(Mt 9:29)

 

하나님,

참빛 식구들이

예수님의 손길을 깊이 느끼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9. 17이-메일 목회 서신)

 

 

기도하는 삶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7주 동안

시편 77편을 갖고

2020년 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어려움을 맞아서

기도의 자리로 나온 시편 기자는

밤에도 손을 들고 하나님과 씨름했습니다.

 

지체되는 기도 응답을 두고

행여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셨는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지

하나님께 질문하고 은혜를 구했습니다.

 

이렇게 시편 전반부는

어려움 한가운데서 하나님께 드린

개인 탄식시였습니다.

 

2.

시편 기자가 결국 하나님을 만납니다 (10절)

기도 응답을 넘어서 진정한 기도의 결실을 맺은 것입니다.

 

그리고 시편 77편의 후반부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빌론의 마르둑은 물론 그 어떤 신보다

크고 위대하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속량(구원)을 구했습니다.

 

바다에 아니 폭풍 속에서도 곧게 길을 내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주의 인도를 구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으니

시편 77편은 상황의 변화에 상관없이

소망의 빛을 바라는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3.

기도의 끝(열매)은 단지 기도 응답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 우리 자신이 변화되는데 있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만나고

더 깊은 신앙의 길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기도가 중요합니다.

 

4.

팬데믹을 맞아서

우리가 있는 곳이 기도처가 되었습니다.

 

지난 설교에서 말씀드렸듯이

교회에 모여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님을

코로나바이러스가 일깨워주었습니다.

 

기도는 삶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도가 영혼의 호흡이라는 말도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도

기도가 삶이 되었을 때 가능합니다.

 

팬데믹을 맞아서

삶의 기도를 더욱더 연습하고 몸에 익히기 원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기도가 먼저 나오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을 진행하고 기도로 마무리하기 원합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무슨 상황에서도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연결되는

기도의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2021년, 내년에 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눌 때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지금보다 훨씬 밝아지길 소망합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아픔입니다. 나의 약함입니다.

그런데 지존자의 오른손이  변화시켰습니다.(시편 77:10)

This is my sorrow/sickness. The right hand of the Most High changed (Ps 77:10)

 

하나님,

오늘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9. 10이-메일 목회 서신)

숨마 쿰 라우데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번에

기적의 해라는 뜻의 라틴어
<안누스 미라빌리스>를 소개했습니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이

전염병으로 고향에 머물던 2년을

기적의 해로 장식했다는 일화도 소개했습니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새로운 일상을 사는 2020년을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안누스 미라빌리스>로 만들길 소망했습니다.

 

2.

미국 대학에서 최우등으로 졸업하면

<숨마 쿰 라우데 Summa cum Laude >라는 타이틀을 얻습니다.

평생 이력서에 쓸 수 있는 최고의 명예입니다.

 

<숨마  쿰 라우데> 역시 “최고의 찬사로”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숨마”는 최정상을 뜻합니다. 영어 summit이 생각납니다.

“쿰”은 전치사로 “라우데”와 함께 “찬사로”라는 뜻입니다.

 

졸업식에서

<숨마 쿰 라우데>로 졸업하면 얼마나 큰 명예이겠습니까?

하지만 모든 사람일 최우등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성적순으로 줄을 세워서

맨 앞에 있는 몇 사람에게만 주는 상이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상대 평가입니다.

 

3.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를 기억합니다.

 

주인은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나 두 달란트 받은 종이나

그들이 열심히 일해서 갑절로 남겼을 때 똑같이 칭찬했습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마태 25:21)

 

세상 방식대로 하면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 <숨마 쿰 라우데>가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최선을 다한 두 명의 종에게 똑같은 찬사를 보내셨습니다.

두 사람 모두 <숨마 쿰 라우데>인 셈입니다.

 

4.

세상은 팬데믹이 유행인 와중에도

끊임없이 줄을 세워서 누군가를 평가합니다.

 

팬데믹이 끝나면

우리 사회의 격차는 모든 면에서 더 커질 것같습니다.

 

모두 다 같이 겪는 팬데믹보다

이 상황에서도 격차가 생기고,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게 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곁눈질하면서 인생을 살면

무한 경쟁, 무한 욕망에 빠질 것입니다.

그것은 기독교인의 바람직한 삶의 태도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우리가 목표할 것은

“잘 하였도다”라는 하나님의 찬사뿐입니다.

 

하나님의 찬사를 기대하면서

하루하루 일상의 삶을 살아갑시다.

 

하나님 안에 있으면

우리 모두 <숨마 쿰 라우데>입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마 25:21)

Well done, good and faithful servant.(Mt 25:21)

 

하나님,

참빛 식구들을 마음껏 칭찬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9. 3이-메일 목회 서신)

북극곰 살리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우리 지역이 산불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베이 지역만 해도 수십 건의 크고 작은 산불이 났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샌프란의 경우, 9월에 한 번 닥치는 인디언 썸머 외에는

도시 전체가 냉장고처럼 선선한 것이 특징입니다.

여름에도 히터를 틀어야 할 정도로 춥습니다.

그런데 보름 전쯤 90도가 넘는 더위가 찾아왔습니다.

건기인 8월에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소나기도 내렸습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몸살을 앓고 있는데

더위, 천둥 번개, 산불까지 우리 마음을 심란하게 만듭니다.

 

미국 동부에 허리케인 로라가 상륙해서

커다란 폭풍우가 예상됩니다.

 

한국에서도

건물이 반쯤 잠길 정도의 폭우를

동반한 장마가 길게 이어졌습니다.

태풍도 찾아왔습니다.

 

북극과 남극의 얼음이 녹아 내리고 있습니다.

캐나다에 있던 5천 년 된 만년설이 녹고 있다는 소식

남극의 얼음이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리는 광경까지

지구가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80년 후인 2100년이 되면 북극에 얼음이 녹아서

북극곰이 멸종할 것이라는 예상도 있습니다.

 

2.

1951년부터 1980년까지 지구 온도를 기준 삼아서

지구의 평균 온도를 15도로 보는데

지난 10년 동안 지구가 점점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평균기온이 2도 이상 높아지면,

빙하가 녹으면서 해수면이 상승하고

바닷가에 가까운 도시는 물에 잠길 수 있답니다.

 

이 모든 것이

이산화탄소 배출로 인한 지구 온난화의 결과입니다.

지역적으로 폭우가 내리고, 가뭄이 찾아오고

폭염은 물론 예측 못 할 생태계의 변화가 생깁니다.

 

스웨덴의 십 대 환경운동가 그레타 쿤베리는

어른들이 손을 놓고 있으니,

장차 지구에서 살아갈 십 대가 나서야 한다면서

환경운동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압도적으로 많은 중국,

일 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 1위인 미국,

– 세계를 주도하는 나라들이 지구온난화의 주범입니다.

 

이미 늦었다는 비관론도 있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라는 마음으로

지구 살리기에 온 인류가 앞장서야 합니다.

그래야 장차 이 땅에서 살아갈 후손들에게 건강한 지구를 물려줄 수 있습니다.

 

정신 차려서 북극곰을 살려내야 합니다.

 

3.

지구는 우리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만드셔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후손들이 살아갈 생활 터전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선물을 소중하게 간직하기 원합니다.

 

이 일에 앞장서는 지도자들이 생기고

우리가 그들을 후원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조심하면서

고온으로 아파하는 지구를 살려야겠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Gen 1:31)

 

하나님,

지구를 살리는데

개인과 모든 나라가 힘을 합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8. 27이-메일 목회 서신)

행복점 찾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에 살펴보는 시편 77편 말씀대로

하나님을 만난 후 변화된 삶은

하나님 손길의 ‘경이로움’을 경험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경이로움(His wonders),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하나님 안에서 경험하는 깜짝 놀랄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렙니다.

 

그동안 함께 읽었듯이

시편 77편에서 시인의 삶은 여간 어렵지 않았습니다.

밤에도 손을 들고 기도하고

기도해도 안정은커녕 불안함과 한숨이 나오는 현실입니다.

 

그래도 사람의 위로까지 마다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질문하고 사정하면서

그 어려운 시간을 견뎠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약함과 슬픔을 인정하고

지존자의 오른손이 행하신 변화를 경험하면서

말 그대로 터닝 포인트를 경험했습니다.

 

이렇게 시편 77편은 10절을 중심으로

전과 후가 나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전반부가 하나님과 씨름하는 고통의 시간이었다면

후반부는 하나님의 경이와 하신 일을 고백하고 찬양하는

감사의 시간입니다.

 

이전에는 옛일을 기억하면 불안했는데

이제는 옛일을 기억하니 감사와 찬양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이 생각납니다.

 

2.

저도

팬데믹 기간은 물론

그 이전의 옛날을 기억해 보았습니다.

 

힘들었던 일이 먼저 생각났습니다.

앞으로 펼쳐질 시간을 예상해도 마음이 밝아지지 않고

여전히 어두운 먹구름이 몰려오는 듯했습니다.

 

교회가 코로나바이러스의 온상지가 되었다는

조국의 뉴스에 한숨이 나왔습니다.

 

시편 77편의 터닝포인트를 경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시편 말씀처럼 전과 후가 완전히 갈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만큼 우리의 현실이 녹록지 않습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옛일을 기억해 보았습니다.

 

예전의 행복했던 순간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했던 날들

주의 경이로움이 넘쳤던 순간들

교인들, 이웃들, 가족들과 더불어 행복했던 기억을 생각했습니다.

 

지나온 <행복점>들을 찾아서

지금 이곳으로 가지고 오니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는 찬송이 나왔습니다.

 

3.

주의 경이로움을 생각하는 주간입니다.

 

그 비결 가운데 하나가

예전의 행복했던 순간을 찾아내서

그 속에 깃든 주의 손길, 주님의 기적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행복점 찾기>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때의 하나님께서 지금도 함께하시고

앞으로도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시편77:11)

I will remember the deeds of the LORD;

yes, I will remember your wonders of old.(Ps 77:11)

 

하나님,

참빛 식구들의 마음 속에 기쁨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0. 8. 20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