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움

좋은 아침입니다.

 

1.

힘든 일이 갑자기 찾아오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당황스럽습니다.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되면

미리 대비하고 있었더라도 속수무책일 때가 많습니다.

 

모든 일이

예측 가능, 통제할 수 있게 닥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팬데믹 기간 중, 주일에

시편 91편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전염병처럼 갑자기 또는 통제할 수 없게 찾아오는

재난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구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시편 91편에

“밤에 찾아오는 공포” “낮에 날아든 화살” 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어둠에 사로잡힌 밤은 무섭기 마련입니다.

새벽이 찾아오길 기다리면서 밤의 공포를 견딥니다.

 

대낮에 날아드는 화살은

맥락 없이 찾아오는 고난입니다.

밝은 대낮에 화살이 날아올 것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인생길에서 가장 당황스러운 순간입니다.

 

2.

대낮에 날아오는 화살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신앙 가운데서 미리 생각해 놓으면 도움이 됩니다.

 

첫째, 화살이 날아온 것을 회피할 수 없습니다.

문제를 회피하고 도망가려다가 더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둘째, 대낮에 날아온 화살은 탄식을 불러일으킵니다.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흐르고 서럽습니다.

상황을 받아들이기까지 감정의 기복이 심할 것입니다.

마음껏 슬퍼해야 합니다. 한탄하고 탄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애통해하는 것입니다.

 

셋째, 갑자기 날아와서 몸이나 삶에 박힌 화살을

제거할 방법을 구해야 합니다.

제거해 낼 수 있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상처와 아픔은 아물 것입니다.

냉철함과 부지런함 그리고 치밀함이 요청됩니다.

 

넷째, 화살을 제거하기 힘들 수 있습니다.

그때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화살이 박혀서 아픈 상황을 내어드리고,

하나님의 도움과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견디고, 믿음으로 주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시편 91편 속의 기자(記者)가 처한 상황이 바로 그랬습니다.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자기가 믿는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2절).

 

하나님을 믿고 맡김에 힘이 있습니다.

신앙의 힘입니다. 우리 안에 없는 힘이 밖에서 들어올 것입니다.

 

다섯째,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어려움 속에서 허우적거리거나,

누구를 또는 상황을(때로는 하나님을)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꿋꿋하게 행하는 것이

하나님 뜻이요 하나님 방식입니다.

 

“왜 이런 일이 내게 닥쳤습니까?”라는 질문을 내려놓고

“지금 내가 어떻게(무엇을) 해야 합니까?” 를 질문하면서

상황을 마주하고 헤쳐 나가야 합니다.

 

3.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고,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결국에는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11절).

 

맥락 없이 갑작스레 닥치는,

대낮에 날아오는 크고 작은 화살 앞에서

넘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잠시 흔들릴 수 있지만, 하나님 백성답게 일어서서

주어진 인생길을 완주할 수 있는 실제적인 믿음을 구합니다.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시편 91:15)

 

하나님,

어려움 가운데서 건지시는 주님을 의지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3. 11. 2이-메일 목회 서신)

리트머스 시험지 세 가지

좋은 아침입니다.

 

1.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매사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롬12:2)이

무엇인지 찾고 구하게 마련입니다.

 

빛의 자녀 답게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빛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애씁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손색이 없기를 바라면서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찾으려는 노력입니다.

 

세상이 복잡해 지면서

Yes와 no로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는

회색 지대가 많아 졌기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이때 도움이 되는 세 가지를 정리해서 소개합니다.

 

2.

첫째는 지난 두 주 동안 주일에 말씀드린

생명과 평안”입니다(롬8:6).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시라고 했는데,

한국에서 주택 복권을 추첨할 때

구슬을 돌리는 기계를 연상하셔도 좋습니다.

 

구체적인 문제/선택지 등을 놓고

이모저모로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다가

마지막에 “생명” “평안”이라는 구슬이 떨어진다면 그 일을 추진해도 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늘 말씀드리듯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고민, 선택지의 주어에

“나” 대신 “예수님”을 대입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많이 알면 알 수록 답도 금새 나옵니다.

물론, 그 답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결심이 요청됩니다.

 

셋째는 처음 소개하는 것 같은데

“누가(무엇이)  나의 주인인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삼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행하는 맨 꼭대기에

예수님이 계셔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보다 위에 있는 것을 교만이라고 합니다.

더 나가면 우상숭배입니다.

 

“누가(무엇이) 주인인가?”에 대한 질문에

“하나님께서 주인이십니다”는 답이 나온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올바로 찾은 것입니다.

그대로 실천하면 됩니다.

 

3.

“생명과 평안,”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누가(무엇이) 주인인가?”

 

이상의 세 가지 질문을 리트머스 시험지 삼으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찾아가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습니다.

 

이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가 우리의 생각과 삶을 하나님께 집중하도록 돕고

기도할 때,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지혜를 주시고

우리의 모든 결정과 그 이후의 삶에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위의 세 가지 리트머스 시험지는

개인의 선택과 결정을 넘어서

우리가 세상을 보는 관점으로 확장해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여러 사안에 위의 세 가지 리트머스 시험지를 대입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찾아내는 데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 마음과 삶에

그리고 세상에 이뤄지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하나님,

주의 뜻을 찾고 그것을 실천할 믿음을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3. 10. 26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 편에 서라

좋은 아침입니다.

 

1.

<하나님 편에 서라 On God’s Side>는

짐 월리스라는 분이 쓰신 책 제목입니다.

짐 월리스는 복음주의 진영에서

가난, 전쟁, 차별과 같은 심각한 사회 문제에

비판적 목소리를 내시는 분입니다.

 

보수와 진보가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세상이 양극화되었습니다.

우리 편만 중요합니다.

자기는 늘 옳고, 상대방은 바른 일을 해도 비판합니다.

서로 미워하고 갈등하고 둘로 나눠서 싸울 뿐입니다.

 

짐 월리스는

보수는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고

진보는 사회의 책임을 중요시한다고 했습니다.

보수는 모든 것을 개인의 책임에 돌리는 경향이 있고,

진보는 사회 시스템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개인의 책임과 사회적 책임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습니다.

개인 혼자 세상을 살 수 없습니다.

사회적 책임도 결국 개인이 협조할 때 가능합니다.

 

짐 월리스는 이 지점에서

누구에게나 유익하고 필요한 “공동선(common good)”과

건전한 시민 정신을 강조하면서

성경에 기초한 일곱 가지 선언문을 만들었습니다.

 

처음과 마지막 두 가지 선언만 소개합니다:

 

첫 번째는

“우리는 서로 대화할 때,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1:19)는

성경의 정신을 반영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한다.”

 

마지막 일곱 번째는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때,

심지어 그들이 우리에게 반대하는 사람이거나 우리의 원수일지라도

그들을 미워할 수 없다고 믿는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우리에게 동의하는 사람들과 우리와 의견을 달리할 수 있는 사람들,

모두를 위해 기도하기로 다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와 함께 ‘그들도 하나가 될’(요17:22) 수 있도록

기도하셨던 우리 주님의 신실한 증인이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2.

세상이 너무 양극화되고 있습니다.

극우와 극우가 만나면 전쟁도 불사합니다.

극우와 극좌가 만나면 대화가 단절되고

상대방을 비판하고 자기주장만 쏟아냅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고 아름답게 만드신

이렇게 세상이 변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하나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지요!

 

지난주 말씀에서

하나님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했습니다.

 

그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상이 줄 수 없고 빼앗을 수 없는

평안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소원은 세상에

생명의 기운이 넘치고, 평화가 임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편에 서서

세상에 생명과 평화의 기쁜 소식을 선포할

주님의 자녀를 찾고 계실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 한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품고 기도하기 원합니다.

 

“하나님 편에 서게 하소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8:6)

 

하나님,

우리 마음에, 우리 세상에

생명과 평안을 간절히 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3. 10. 19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의 꿈

좋은 아침입니다.

 

1.

리처드 로(Richard Rohr)라는

영성가의 묵상글이 매일 이-메일로 배달됩니다.

항상 챙겨서 읽지는 못하고

제목을 보고 마음이 가면 클릭해서 읽곤 합니다.

 

지난 월요일(9일)에 배달된 편지의 제목은

“희망, 평화, 그리고 공의(Hope, Peace, and Justice)”였습니다.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 폐지를 위해서 평생 투쟁했던

데즈먼드 투투 주교의 “하나님의 꿈(God’s dream)”이라는 글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내게는 꿈이 있습니다”는 유명한 연설을

하나님 입장에서 다시 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꿈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게는 꿈이 있단다(I have a dream).

내 꿈이 이루어지도록 제발 나를 도와다오.

 

그것은 세상에 대한 꿈이지.

세상의 추함, 보기 흉할 정도로 잔악함과 가난,

전쟁과 적대감, 탐욕과 가혹한 경쟁, 소외와 위화감(disharmony)이

그와 반대되는 영광스러운 것들로 바뀌는 꿈이란다.

 

더 많은 웃음, 기쁨, 평화,

정의와 선함과 연민(compassion),

사랑과 돌봄과 나눔으로 바뀌는 꿈!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고,

내 자녀들이 한 식구가 되는 것이 내 꿈이란다.

온 인류가 하나님의 가족, 바로 내 가족이 되는 것이지.”

 

2.

또다시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서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번에는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인

하마스가 이스라엘 국경을 넘어왔습니다.

이스라엘 정부는 미국의 9.11에 버금가는 테러로 규정하고

무차별 보복을 선포했습니다.

 

민간인을 상대로 한 총격이나 폭격은

누구를 막론하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현재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서는

수천 명의 민간인 희생자가 나오고 있습니다.

 

뉴스를 읽고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픈데

팔레스타인이든 이스라엘이든

희생자 가족들의 마음을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힘없는 백성들이 희생되는 전쟁은

하루속히 끝내야 합니다.

 

3.

중동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요한 계시록의 아마겟돈 운운하면서

세상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기독교인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믿는 하나님이시라면,

백성들이 무차별 희생당하는 전쟁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평화와 기쁨, 돌봄과 나눔, 긍휼과 사랑,

무엇보다 아주 많은 웃음이 세상에 넘쳐나길 꿈꾸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꿈에 동참하고

그 꿈을 이뤄드리는 주의 백성들이 곳곳에 많이 생기길 기도합니다.

 

전쟁을 멈추십시오(Stop war)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기쁨)이라 (롬14:17)

 

 

하나님,

전쟁으로 희생당한 분들을 위로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3. 10. 12이-메일 목회 서신)

다시 시작하기

좋은 아침입니다.

 

1.

한국은 거의 일주일 동안

추석 황금연휴를 보냈답니다.

 

미국에 살면 살수록

추석이라는 큰 명절도 잊혀집니다.

한국의 친지들이 보내주는

추석 인사에 옛 추억을 되새길 뿐입니다.

 

한국 뉴스를 보니

추석 연휴 동안 중국에서 아시안 게임이 열리고 있습니다.

 

올림픽이나 아시안 게임과 같은

커다란 국제 대회에서는

여러 가지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번에도 신문에 보도된 것을 보니

롤러스케이트 3천 미터 계주 경기에서

너무 아쉬운 일이 생겼습니다.

 

마지막 계주가 우승인 줄 알고

결승전 바로 직전에 손을 번쩍 들었는데

그사이에 대만 선수가 스케이트 날을 들이밀면서

0.01초 차이로 금메달을 놓친 것입니다.

 

롤러스케이트는 이번에 처음 채택된 시범 종목이랍니다.

올림픽에도 같은 종목이 없고

4년 후 아시안 게임에 정식 종목으로 채택될지 확실하지 않다니

정말 간발의 차이로 우승을 놓친 선수들이 얼마나 아쉬웠을까요!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면

군대 면제의 혜택도 있다는데

0.01초 차이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은메달이라는 쾌거를 이루고도

웃지 못하고 시상대에 오른 선수들의 모습이

왠지 안쓰러웠습니다.

 

2.

0.01초 차이라니

허리만 펴지 않고 들어왔어도 우승했을 것입니다.

조금만 참고 우승이 결정된 후에 기뻐했더라면…

 

저도 아쉬운데 당사자 선수는 오죽할까요!

평생 그 순간이 트라우마로 남지 않기를

기도해 주었습니다.

 

0.01초 차이로 금메달을 놓친 선수처럼

잠시 잠깐 삐끗해서 실수하고

원하는 성적을 내지 못한 선수들이 많을 것입니다.

마음이 얼마나 힘들까요.

 

누구나 실수합니다.

실력이 모자라는데 더 열심히 하다가 실수하고,

실력은 충분한데 한순간의 방심으로 실수하고

너무 좋아서 흥분한 나머지 실수할 수 있습니다.

 

결승점에서 실수한 선수를 너무 나무라지 말고

그 선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려 주고

힘을 북돋아 주면 좋겠습니다.

 

금메달을 따고 좋은 성적을 낸 선수들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내지만,

행여나 마음에 커다란 짐을 갖고 경기를 끝낸 선수들에게

더 큰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조금 일찍 우승을 즐기다가 금메달을 놓친 선수부터

아시안 게임은 물론 우리 인생의 경주에서

잠깐 한눈팔다가 실수한 모든 분을 응원합니다.

 

인생은 단판 승부가 아닙니다.

실수를 만회하고

다시 시작할 기회가 반드시 찾아올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에

결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시편37:24)

 

 

하나님,

우리 손을 붙들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3. 10. 5 이-메일 목회 서신)

믿음으로 사는 것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에 로마서 12장 말씀을

함께 공부하고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서 16장 말씀 가운데

8장이 최고로 꼽힙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에서 해방했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낼 것이 없다는

보석과 같은 말씀입니다.

 

8장과 쌍벽을 이루는 말씀이

로마서 12장입니다.

 

“그러므로”로 시작하면서

로마서 전반부(1-11장)를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요약하고,

이어서 하나님 백성의 삶에 관해서 조목조목 교훈합니다.

13-15장은 12장의 부연 설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래서 저는 이번 연속 설교의 제목을

<진짜 그리스도인>이라고 붙였습니다.

가짜가 판치는 요즘 시대에

진짜 그리스도인(Authentic Christian)으로 살기 원해서입니다.

 

우리가 로마서 12장 말씀대로

믿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한없이 행복할 것입니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2.

우리는 믿음을 지나치게 추상화했는지 모릅니다.

‘영적’이라는 말을 중심으로

현실감 없는 믿음을 만들어서

신앙과 삶이 따로 놀게 했습니다.

 

교회에서의 신앙과 세상에서의 삶이 다르거나

연결조차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신앙과 생활의 통합이 결여된 모습입니다.

온전한 믿음은 아닙니다.

 

신앙을 저 멀리 하늘나라로 옮겨 놓아서

이 세상의 삶에 소홀하거나

세상의 삶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준비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역시 온전한 신앙은 아닙니다.

 

아니, 신앙 자체에 커다란 비중을 두지 않고

악세사리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3.

믿음으로 사는 것은

지난주 로마서 12장 1절에서 배웠듯이

우리 “몸(body)”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몸은 실체입니다. 현실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삶 자체입니다.

 

거룩한 산 제사는

일상이 예배가 되고

우리 일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 제사(living sacrifice)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살다 보면,

그 유익이 우리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작은 일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실제의 삶에 하나님을 초대합니다.

작은 일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평소에 흘려보내던 시간도

하나님과 더불어 만들어 가는 기회가 됩니다.

삶 전체가 소중합니다.

 

이처럼 믿음은 신비입니다.

느끼고 더불어 살아가는 경험입니다.

신비가 현실이 될 때, 깜짝 놀랄 경이(驚異)를 맛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놀랍고 행복할 뿐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히11:1)

 

 

하나님,

믿음으로 살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3. 9. 28이-메일 목회 서신)

라면 이야기

좋은 아침입니다.

 

1.

미국 사람들에게

맥도널드의 “빅맥”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라면”이 있습니다.

 

빅맥은 1967년 펜실베이니아에서 처음 선을 보였습니다.

당시 가격은 0.45센트였습니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2022년 기준으로 $3.95).

 

우리나라 라면의 역사는 1963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춥고 배고프던 시절이었습니다.

 

남대문 시장의 노동자들이

미국 부대에서 흘러나온 “꿀꿀이 죽”을

(부대찌개의 원조라고 하면 더 서글퍼지는군요)

단돈 5원에 사 먹기 위해서 줄을 길게 섰습니다.

 

그것을 본 삼양식품의 창립자 고 전중윤 명예회장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라면 제조 기술을 배워와서

1963년 9월 15일에 처음으로 삼양라면을 세상에 출시했습니다.

꿀꿀이 죽보다 비싼 10원에 팔았지만,

30원 하던 김치찌개보다 훨씬 저렴했습니다.

 

엊그제 9월 15일,

우리나라 라면이 회갑을 맞았습니다.

 

2.

쌀이 부족하던 1960-70년대,

정부는 보리나 콩을 섞어서 먹는 혼분식을 장려했습니다.

저도 국민(초등)학교 때 점심시간이 되면

선생님들이 도시락 검사를 하던 기억이 납니다.

보리밥이 절반을 차지하지 않으면 벌을 받던 시절입니다.

라면이 쌀 부족을 톡톡히 메꿔주었습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매운맛이 가미된 농심 신라면, 오뚜기 진라면,

영화 기생충의 짜파구리(짜파게티와 너구리)까지

다양한 라면이 경쟁적으로 출시되었습니다.

떡볶이에 라면을 넣은 “라볶이”도 유행했습니다.

 

꼬들꼬들한 면발은 물론

국물까지 호로록 마시는 라면 먹기의 정석,

과자처럼 라면을 부숴서

그 위에 스프를 끼얹어 먹는 라면 먹기의 변칙,

꿀꿀이 죽에서 시작된 부대찌개에 라면을 넣어 먹는 아이러니,

건강을 생각해서 자제하다가도 불현듯 생각나는 라면의 치명적인 유혹!

 

우리 국민의 라면 사랑은 여전히 식지 않아서

국민 한 명당 한 해에 77개의 라면을 먹는다니,

거의 4-5일에 한 번은 온 국민이 라면을 먹는 셈입니다.

 

라면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수출 상품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라면 업체들의 매출 절반이 해외에서 옵니다.

세계에서 라면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국가도 대한민국이 아닌 베트남입니다.

라면 업체들이 BTS 멤버까지 광고 모델로 쓰면서 홍보하는 이유입니다.

 

라면 출시 60주년을 맞은 삼양 라면은

음식과 과학을 융합한 신제품을 출시하겠다는 비전을 선포했습니다.

앞으로 라면의 진화를 기대해 봐야겠습니다.

 

3.

삼양 라면이 60주년을 맞은 9월 15일,

유엔 식량농업기구(FAO)는 전 세계 인구의 9.2%가

장기적인 식량 부족으로 고생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세계 인구 10명 가운데 한 명이 기아선상에 있다는 뜻입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에 기아 인구는 더 심해졌답니다.

 

모든 사람이 최소한 먹거리는 해결하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뜻임에 틀림이 없으니

세상에 춥고 배고픈 사람들이 없어지길 기도할 뿐입니다.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신 15:4)

 

하나님,

배고픈 이웃을 돌봐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3. 9. 21이-메일 목회 서신)

책임감

좋은 아침입니다.

 

1.

인류가 큰 역병을 거치고 나면

세상을 지배하는 사상과 종교, 가치관이 바뀌곤 했습니다.

 

중세 시대 페스트가 지나간 자리에

신(神)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는

신본주의 사상이 뒷전에 밀리고

인간이 스스로 길을 개척해야 한다는

인본주의가 태동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지나간 자리에는

기후 위기까지 겹치면서

예측불허의 어지러운 세상이 찾아왔습니다.

기록적인 폭우가 내리고, 100년 만에 지진이 나고

극한의 더위 또는 한파가 발생합니다.

 

우선 나만 살고 보자는 이기주의,

분노와 불만이 사람들 마음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기후 위기에 버금가는 예기치 않은 사건사고가 이어집니다.

 

“불안”이라는 두 글자가

팬데믹이 지나간 자리를 차지한 느낌입니다.

 

2.

한국에서는

학부모들의 과도한 요구와 괴롭힘에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일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그림자도 밟지 않았다는 말은 그만두고

학생은 물론 학부모도 선생님을 향한 예의가 각별했습니다.

제가 어릴 적 다녔던 시골 국민(초등)학교에는

농사일 중간에 학교를 찾아오신 어머니들께서 “선상님”하고 부르면서

자기 자식들을 부탁하시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물론, 선생님들의 학생 폭력이 도가 지나친 적이 많았습니다.

일제와 군사 독재의 잔재인 것처럼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심하게 구타하고 인격을 모독했었습니다.

 

그래도 스승과 제자의 예의범절은 깍듯했는데,

요즘 한국의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은

갈피를 잡기 힘들 정도로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책임을 지려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쉬쉬”하면서 덮기에 급급합니다.

 

3.

언젠가 “내 탓입니다”는 표어가 유행해서

자동차 범퍼에 달고 다니던 때가 있었습니다.

우선 내 탓이라고 말하고, 함께 문제를 풀어가자는 캠페인이었습니다.

 

남의 탓만 할 것이 아니라 손수 나서서 사태를 수습하고,

책임감을 갖고 세상을 이끄는 지도자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자기편을 챙기는 것을 넘어서,

공공선(公共善common good)을 추구하는 어른들도 보고 싶습니다.

 

교회가 앞장서면 어떨까요?

예수님 말씀대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신앙, 기복적인 신앙,

방어하기에 급급한 자기중심의 편협한 신앙을 극복하고

세상을 품을 정도의 관대함, 어지러운 세상을 살리는 책임감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나를 넘어서는 공적인 신앙이 꼭 필요한 요즘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지금도 각박한 세상에서 간신히 살아가시는 분들을

주님께서 꼭 붙들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우리도 함께 울고, 같은 마음으로 응원하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마5:13)

 

 

하나님,

신실한 주의 백성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3. 9. 14 이-메일 목회 서신)

함께 거하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5년 만에 야외예배를 다녀왔습니다.

팬데믹 이후 처음 갖는 야외 예배였기에

감회가 더욱 새로웠습니다.

 

노동절 연휴와 겹쳐서

출타하신 참빛 식구들도 많이 계셨지만,

가능한 분들은 거의 모두 참석해 주셨습니다.

올해는 애완견들도 함께 했습니다.

 

정성껏 준비한 풍성한 먹거리,

서로를 소개하고, 힘들 줄도 모르고 뛰고 즐겼던 놀이,

알차게 준비했던 주일학교 아이들 프로그램까지

뜻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2.

우리 기독교에서는

“거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가 말씀 안에 거합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서 위로와 힘을 줍니다.

 

어떤 것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신앙은 하나님과 더불어 거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들어가서 머무는 것입니다.

기도 역시 하나님 마음과 생각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거하는 것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는 말씀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별칭도

“임마누엘” –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의 함께 함을 강조했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울라고 권면했습니다(롬12:15 ).

사자성어 “동고동락(同苦同樂)”이 생각납니다.

함께 웃고 함께 울면서 같은 길을 가라는 부탁입니다.

 

3.

교회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무슨 일을 많이 하는 것보다

함께 있는 것, 함께 공감하고,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어주는 것이 공동체의 특징입니다.

거기서 공동체의 힘이 발휘됩니다.

 

우리 참빛교회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주님의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함께 있어서 기분이 좋고,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아도

그냥 함께 있고 싶은 신앙의 동지들이 되길 바랍니다.

 

저는 엊그제 야외예배에서 그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6개월 된 아기부터 80대 후반의 권사님들까지

함께 예배하고 함께 식사하고 함께 같은 공간에 머물렀습니다.

얼마나 귀하고 아름답던지요!

 

참빛교회를 허락하시고

참빛 식구들을 한 공동체로 불러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보라,

형제자매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편133:1)

Behold, how good and pleasant it is when brothers dwell in unity! (Ps 133:1)

 

하나님,

주님 안에서 하나된 교회로 자라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3. 9. 7 이-메일 목회 서신)

2035년…

좋은 아침입니다.

 

1.

5월 캐나다 동부에서 시작된 산불은

그리스 국가 면적을 태웠고 아직도 완전히 잡히지 않았습니다.

팬데믹 때 캘리포니아 산불로 경험했던 붉게 물든 대기 현상이

뉴욕을 비롯한 미국 동부까지 나타났습니다.

 

보름 전에는 캘리포니아 남부에 태풍이 찾아왔고

LA인근에 강도 5가 넘는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그 영향으로 우리 지역도 건기인 8월에 비가 내렸습니다.

 

올해 7월이 인류 역사상 가장 더웠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애리조나 피닉스는 110도 이상의 기온이 한 달 이상 계속되면서

선인장도 말라 죽는 일이 생겼습니다.

 

2.

2017년 파리기후조약이 체결된 이래

산업화가 시작된 19세기 말의 지구 온도에서

섭씨 1.5도가 높아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지구 온도가 1.5도가 올라가면

폭염이나 폭우와 같은 급격한 기후변화, 해수면 상승 등

재앙이 찾아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난 5월 한 보고서에 의하면

2027년에 지구 온도가 1.5도 높아질 확률이 66%까지 올라갔습니다.

 

지금이라도 지구의 온도를 낮춰야 합니다.

적어도 1.5도가 상승하지 않도록 모든 인류가 힘을 합쳐야 합니다.

탄산가스를 많이 배출하는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 책임이 큽니다.

 

3.

우리가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는

1970년 발효된 미국의 청정 공기법(CAA)에 따라서

미국 전체에서 가장 엄격한 탄소 배출량 기준을 만들어야 합니다.

캘리포니아가 제정한 기준은 다른 주들이 연방 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고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이 됩니다.

 

그러니 탄소 배출량에서 캘리포니아는 무조건 앞서가야 합니다.

 

이것을 반영하듯이

캘리포니아에서는2035년 이후에 내연기관 자동차 신규 판매가 금지되고

전기 또는 수소로 움직이는 자동차만 새로 판매할 수 있습니다.

 

이 밖에도 화석연료가 아닌

태양 에너지를 비롯한 친환경 에너지의 개발이 계속될 것입니다.

적극 환영할 일이고

정책이 흐지부지되지 않고 결기를 갖고 추진되길 바랍니다.

 

4.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지구를 맡기셨는데

인간의 욕망으로 엉망이 되었으니

그리스도인들이 창조 질서의 회복에 앞장서야 합니다.

 

또한 정책을 만들고 실행하는 지도자들을  잘 선출해야 합니다.

지금도 화석연료 사용을 추진하고,  기후위기를 부정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면, 그나마 작은 희망의 불씨도 꺼지고

후손들에게 큰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매우 답답합니다.

당장 기후 위기의 피해가 곳곳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구를 지키는 청지기의 사명을 회복하고

다시 지구를 살리는 일에 온 인류가 앞장서기를 바랄  뿐입니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시편104:30)

When you send your life-giving breath, they are created,

and you replenish the surface of the ground. (Ps 104:30)

 

하나님,

하나뿐인 지구를

하나님 뜻에 맞게 보존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3. 8. 31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