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걷는 길

샬롬

1.
오늘 저녁에 있었던
미국 스펠링 맞추기 대회(National Spelling Bee)에서
52년 만에 공동 우승자가 나왔다는 기사가 떴습니다.

각각 13,14살 먹은 소년들인데
이들은 주최측이 준비한 결승 단어들을
똑같이 맞췄습니다.

한 친구가 스펠링을 잘못 말하면서
우승자가 가려지는 듯 했지만
이어서 다른 친구도 실수를 했고
마지막 단어는 사이 좋게 같이 맞췄답니다.

이들이 맞춘 단어들은
외계어처럼 엄청 어렵습니다
(마지막 단어가 “fuelleton”).
웹스터 사전을 통째로 외워야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동 우승이 확정되자
함께 우승자가 되어서 더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자신들은 사전과 대결을 벌인 것인지
친구와 경쟁하지 않았다고 어른스럽게 대답했답니다.

특이한 점은
최근 8년 동안 스펠링 비의 우승자들이
모두 인도계 미국인들(Indian-Americans)이라는 사실이네요.
하여튼 대단합니다!

2.
공동우승(co-champion)이라는
신문기사를 보면서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어떻게든지 최종 우승자 한 명을 가려낼 수 있었을 텐데
두 소년을 공동우승자로 발표했습니다.
둘이 함께 챔피언이 된 것이지요.

요즘은 모두 경쟁합니다.
조금이라도 앞서 가려고 애를 쓰고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경쟁을 말하기 보다
개인을 말하기 보다
함께 걷는 신앙의 길과
함께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강조합니다.

이 다음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어린양 예수님의 신부로 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입니다.
모두가 챔피언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이 세상에서도
함께 걷습니다.

같은 생각을 갖고
같은 마음을 갖고
성삼위 하나님께서 하나이듯이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어서 한 길을 걸어갑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걸어가는
신앙의 순례길입니다.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 주고
서로의 손을 꼭 잡아 주고
서로 격려하면서 주님께로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4:12)
And though a man might prevail against one who is alone, two will withstand him–a

threefold cord is not quickly broken. (Ecc 4:12 ESV)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모두 서로에게
험한 세상을 함께 걷는
신앙의 동지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4.5.29 메일 목회서신)

삶의 기도

샬롬

1.
목사의 귀는 늘 교인들을 향해서
쫑긋 서 있습니다.

지나가는 말 속에서도 기도제목을 포착해내고
교회를 위한 아이디어나 성도님들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무엇보다 믿음이 자라가길 기대하면서 듣고 얘기합니다.

<신앙 터잡기>에서 배웠듯이
예배가 삶이 되고, 삶이 예배가 되길 기대하면서
우리 성도님들의 삶과 신앙이 통합되길 바라면서 목회합니다.

최근에 직접 또는 전해들은
우리 교회 칠순이 넘으신 어르신들의
흐뭇한 이야기가 있어서 나눕니다.

이야기 하나.
평생을 무뚝뚝하게 사신 어르신께서
아침마다 샐러드와 과일 주스를 손수 만들어서
부인께 선사해 드리신답니다.
대단한 섬김입니다.

이야기 둘
토요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친교를 하는데
참석하지 않으신 권사님이 계셔서
집에 오면서 전화를 드렸더니
아내와 단 둘이 나와서 아침을 먹으려고 일찍 왔습니다.”
멋지십니다.

이야기 셋
권사님께서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집에 가셨습니다.
그 날은 권사님의 생신이셨는데
집에 오셔서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나시니
남편 권사님께서 미역국을 끓어 놓으셨답니다.
감동입니다.

2.
요즘 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따로 기도시간을 만들어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 동안 나눈 감사의 기도, 탄식과 눈물의 솔직한 기도도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위에 소개한 권사님들의 아내사랑과 섬김도
삶을 통해서 드리는 진솔하고 애틋한 기도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삶이 예배가 되고
삶이 기도가 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일전에도 소개했던 리차드 포스터의 기도에 대한 글을 옮겨 왔습니다.
건전한 기도는 이 땅에서의 일상적이고도 평범한, 여러 가지 다양한 경험들을 필요로 한다. 산책이라든가 대화 혹은 건전하고 유익한 웃음거리들 그리고 정원에서 하는 일이나 이웃 사람들과의 한담, 유리창 닦기 등등, 이 모든 일들이 다 소중하다. 부부간의 사랑과 아이들과 놀아 주는 일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일하는 것도 기도하는데 모두 필요한 요소들이다. 영적인 히말라야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일상 생활의 작은 산들과 골짜기에서 정기적으로 훈련 받지 않으면 안 된다. <기도, 11>

3.
저는 일상생활 속의 신앙(everyday Christian)을 강조합니다.
특별한 만남보다
매일같이 부딪치며 살아가는 가족/동료와의 만남이 최고의 만남이고,
특별한 기적을 바라는 것보다
하루 하루의 삶이 기적이요 은혜이고,
특별한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주님 주신 사명임을 깨닫고
하루하루 소중하게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멋진 모습입니다.^^

우리의 삶이 기도가 되기 원합니다.

힘차게/기도로
하루를 시작합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후 5:16-18)

Rejoice always, pray without ceasing, give thanks in all circumstances; for this is the will of God in Christ Jesus for you  (1Th 5:16-18 ESV)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 자체가
기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4.5.22 메일 목회서신)

다람쥐와 솔방울

샬롬

1.
엊그제 아내와 함께 집 근처 호숫가를 산책하다가
다람쥐 한 마리가 커다란 솔방울을
두 발로 잡고는 끙끙 매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람쥐가 도토리를 갖고 있는 것은 흔한 광경이지만
자기 머리보다 훨씬 큰 솔방울을 잡고 있는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호기심이 발동해서
다람쥐에게 살금살금 다가갔습니다.

웬만한 다람쥐는
사람이 다가오면 줄행랑을 칩니다.

그런데 이 다람쥐는
30센티(1ft)까지 가도록
솔방울을 꼭 잡고는
숨을 죽이고 그 자리에 있습니다.

제가 마음이 좋은 사람이었기 망정이지
행여나 다람쥐를 잡아먹으려는 짐승이나
다람쥐 사냥꾼이었다면 꼼짝없이 잡혔을 것입니다.

2.
커다란 솔방울을 꼭 잡고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다람쥐를 보면서
집착이라는 단어가 생각났습니다.

다람쥐는 솔방울이
커다란 도토리라고 생각해서
꼭 잡고 있었을 테지만
결국에는 실속 없는 솔방울인걸요!

우리들도 살아가면서
별로 소용이 없는 것에 집착할 때가 있습니다.
위험에 처하는 줄도 모른 채
손에 든 것을 꼭 쥐고 놓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손을 펴고 살 길을 찾으면
훨씬 자유롭고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는데
그만 손에 쥐고 있는 것에 집착하다가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경우입니다.

정호승이라는 시인은
그의 수필집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손을 펴면 손바닥이 되고, 쥐면 주먹이 됩니다. 손바닥은 햇살을 받을 수도 있고, 물건을 올려 놓거나 쥘 수도 있고, 그것을 남과 나눌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먹은 그렇지 못합니다. 주먹은 홀로 주먹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115>

3.
누구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늘 손을 펴고,
하나님을 향해서 손을 들고 기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손을 꼭 쥐고 집착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들 손에 얹어주실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어려운 이웃에게 손을 내밀 수도 없습니다.
어깨가 축 쳐진 가족들의 등을 어루만져 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시편기자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 143:6)
I stretch out my hands to you; my soul thirsts for you like a parched land. (Psa 143:6 ESV)

어울리지도 않는 솔방울을 움켜쥐고 있다면
얼른 내려놓기 원합니다.

주님을 향해서 손을 펴고
주님을 간절히 사모하면서 살아가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손에 채워주시는
은혜와 사랑 그리고 지혜와 용기를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욕심과 집착을 내려놓고
주님을 향해서 손을 활짝 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4.5.15 메일 목회서신)

기도의 사람

샬롬

1.
저는 매년 한달 정도는
기도에 대한 말씀을 준비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신앙 터잡기>에서 배웠듯이
말씀과 기도는
멋진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가는데
꼭 필요한 시작이자 끝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주일설교는 물론
새벽기도회와 수요예배, 속회모임,
그리고 종종 개설되는 세미나와 성경공부를 통해서 배워나갑니다.

기도 역시 늘 강조하지만
매년 시간을 떼어서 말씀을 전하므로
기도생활을 점검하고
다시금 기도의 자리로 나가길 원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한달 동안
참빛 식구들의 기도가 넓어지고 길어지고
높아지고 깊어지길 바랍니다.

2.
다음은 리처드 포스터의 <기도>에서 요약/발췌한 것입니다.

기도를 시작할 때 기도가 지금까지 부족했다고 해서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심지어 기도가 아예 없었을지라도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다. 하나님께 대한 갈망, 그 자체가 기도이다. 메리 클레어 빈센트(Mary Clare Vincent)는 말하기를 기도에의 욕구가 기도이며 그것은 갈망의 기도이다라고 했다. 때가 되면 그 욕구는 행동으로 나타나고 그 행동은 기도에 대한 열망을 증가시키게 될 것이다.

기도가 되지 않을 때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가 되게 하라. 또한 마음의 완고함으로 인해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기도로 마음이 풀어지기 때문이다. 기도가 부족한 것까지도 하나님께 내어 놓으라.

만일 당신이 기도를 습관적으로 하고 있지 않다면 하루에 열두시간씩 기도하기를 시작하는 대신 단지 몇 분만이라도 할애해서 모든 정력을 거기에 쏟아 넣으라.

또 하나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는 제언을 하고 싶다. 그것은 우리가 악한 일을 행하고 있을 때조차 기도하기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마음 속으로 분노와 욕망, 교만과 탐욕, 야심 따위와 싸우고 있다. 마음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 하나님께 이야기해야 하며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것들까지도 말해야 한다.

우리의 불순종까지도 아버지의 품에 안겨 들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무게를 지탱할 만큼 강하신 분이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분리시킨다. 하지만 죄를 숨기는 것은 우리를 더욱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에밀리 그리핀(Emilie Griffin)이 말하기를 주님은 우리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날 때 우리를 가장 사랑하십니다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제안하고 싶은 것은, 별로 중요한 사건이 없는 일상적인 기도에 먼저 힘쓰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시편기자의 태도를 배워야 한다. 그의 고백을 들어보자.

주님, 이제 내가 교만한 마음을 버렸습니다. 오만한 길에서 돌아섰습니다.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젖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듯이 내 영혼도 젖뗀 아이와 같습니다.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히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여라. (시편 131:1-3)

O LORD, my heart is not lifted up; my eyes are not raised too high; I do not occupy myself with things too great and too marvelous for me.  But I have calmed and quieted my soul, like a weaned child with its mother; like a weaned child is my soul within me.  O Israel, hope in the LORD from this time forth and forevermore. (Psa 131:1-3 ESV)

처음에는 우리 자신이 당연히 기도의 중심이요 주제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 마음에 코페르니쿠스적인 변혁이 일어난다. 천천히 그리고 거의 알아차리지 못하게 무게중심이 옮겨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우리 생활의 일부로 생각하다가 우리가 그의 생활의 일부임을 깨닫게 된다. 놀랍고 신비하게도 하나님이 우리 기도의 변두리에서 중심으로 바뀐다. 마음의 변화와 생각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역사이다. (리처드 포스터의 기도 29-31)

3.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 , 삶 자체가 기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 자신이 변화됩니다.
구체적인 기도 응답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기도의 축이
우리 자신에게 하나님께로 옮겨지기 원합니다.
기도의 사람(man of prayer)으로 자라가기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매 순간 주님 앞에 무릎 꿇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4.5.8 메일 목회서신)

욕심, 교만, 자랑

1.

요즘은
수요예배에서 로마서를,
청년부 성경공부에서도 로마서,
그리고 새벽기도회에서는 레위기를 읽고 있습니다.

레위기는 물론
로마서 전반부에서 다루는 주제가
(sin)”입니다.

기독교에서 죄는 매우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는 필연적으로 침투해 있고
어쩌면 성경 전체는 죄의 굴레로부터
자유케하는 것이 복음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의 전반부에서는
죄가 못된 바이러스처럼
사람들의 마음은 물론
하나님의 창조세계 속속들이 침투해 있다고 가르쳐줍니다.

레위기 역시
하나님의 계명을 한 가지라도 어기면 죄로 간주되기 때문에
얼른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일러줍니다.

이처럼 죄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지 않는 못된 세력(power)입니다.
타락한 세상 깊숙이 침투해서
사람을 비롯한 만물을 죽음으로 이끕니다.

죄의 문제가 매우 근본적이고
죄로 인해서 일어난 결과가 엄청나기에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깃든
대속(代贖)의 은혜입니다.

2.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는 죄의 속성이 남아 있어서
옛 성품의 모습이 불쑥불쑥 튀어나옵니다.

저는 우리들 안에 남겨있는 옛 성품을
광야에서 하나님을 거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에 빗대서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욕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루 분 만나와 메추라기를 매일같이 내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루 분에 만족하지 못하고

심껏 거두었다가 그만 만나가 썩는 경험을 했습니다.

욕심은 우리의 삶을 부패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빼앗아 갑니다.

둘째는 교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여간 해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고
망아지처럼 제 갈 길로 갔습니다.

하나님보다 앞서 가려는 마음이 교만입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앞에 두는 것이 교만이요
이것이 우상숭배로 이어집니다.

셋째는 자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택 받은 백성이라는 것만을 두고 자랑했습니다.

다른 민족들을 이방인이라고 부르면서
멸시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독점하고 자신만이 우월하다고
안하무인처럼 뽐내면서 자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과 함께 하심을 잊어 버린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니
욕심이 하늘까지 치닫고
교만으로 목이 곧아 지고
남에게 자랑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욕심과 교만과 자랑의 반대말은
스스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마음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비한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이지요.

3.
성경에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여러 가지 문제들이
욕심, 교만, 자랑
즉 죄에서 시작된다고 진단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 안에도
옛 성품의 모습이 남아 있는 것인데
이것들은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면서

감사와, 순종, 겸손으로
그리고 우리의 잘못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회개를 통해서
새로운 성품으로 차근차근 변화될 수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
그리고 삶의 변화를 통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주님의 백성으로 중심을 잡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는
참빛 교회 식구들 되시길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욕심과 교만과 자랑하는 모습, 죄의 속성들을
주님의 능력으로 없애주시고
날마다 새로운 마음을 창조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4.5.1 메일 목회서신)

출애굽기 40장

1.

새벽기도회에서는
출애굽기 읽기를 마쳤습니다.
보슬비에 옷이 젖는다고
새벽에 한 장씩 읽어가는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촉촉히 적셔줍니다.

출애굽기 마지막 장은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대로
성막(tabernacle)을 짓고 그것을 봉헌하는 장면입니다.

성막이 하나님의 임재 상징이었으니
광야길을 걷고 있던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벅찬 감동과 은혜의 시간이었을 겁니다.

2.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성막과 그 안에 있는 성물들에 기름을
바르게 해서 거룩하게 하십니다.

금은보화로 정성껏 만들었지만
여전히 사람이 만든 물건들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기름을 바르니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안에 계시는 거룩한 영 곧 성령이 생각났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실 때
질그릇 같은 우리들도 거룩한 주님의 백성으로 기름부음 받습니다.
또한 우리가 하는 일이나, 우리가 거하는 곳에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할 때
거룩한 일이 되고 거룩한 곳이 된다고 생각하니 더욱 감사했습니다.

3.
출애굽기 40장에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는 말씀이 여러 번 반복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설계도대로 성막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모질고
때로는 부숴지고 힘겹지만
하나님 말씀에 굳게 서 있을 때
하나님께서 성취해 가시는 은혜가 임할 줄 믿습니다.

4.
성막이 하나님께 드려졌을 때,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꽃으로 성막위에 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과 불이 성막에 있으면
광야길을 걸었습니다.
반면에 구름이 떠오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임재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과 철저히 동행한 것입니다.
가고 서는 것을 두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른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심을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40:37-38)
But if the cloud was not taken up, then they did not set out till the day that it was taken up.  For the cloud of the LORD was on the tabernacle by day, and fire was in it by night, in the sight of all the house of Israel throughout all their journeys. (Exo 40:37-38 ESV)

하나님 백성으로 거룩해 지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이루어주시는 삶이 되기 원합니다.
주님과 동행함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눈으로 보기 원합니다.

우리 자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서 있는 곳이
거룩한 나라가 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무엇보다 조국 대한민국 위에
주님의 긍휼하심과 공의가 강처럼 흐르길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백성으로
온전한 길을 걷게 하옵소서.
주님의 인도함을 눈으로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4.4.24 메일 목회서신)

사순절 마지막 주에

좋은 아침입니다.

1.
우리는 지금 사순절 마지막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다음 주일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이고
부활주일을 앞둔 다음 주간은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고난 주간입니다.

이렇게 일년을 교회력을 따라서
(매 주일 주보 예배 순서 앞에 있는)
사는 것이 신앙에 도움이 됩니다.

신앙을 <예수님 닮기>라고 요약할 수 있고
교회력은 예수님의 삶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
오늘 새벽에 나눈 출애굽기 34장 6절에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가르쳐줍니다.

여호와께서 그의[모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The LORD passed before him and proclaimed,
“The LORD, the LORD, a God merciful and gracious, slow to anger,
and abounding in steadfast love and faithfulness, (Exo 34:6 ESV)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는 어떤 부족함도 없으신 완전한 분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설명해 주시는
성품들이 쭉- 나옵니다.

지금 이 순간 잠시 멈춰서
한 가지씩 깊이 생각해 보길 권합니다.

“자비롭고” – 어머니의 품을 연상케하는 하나님의 마음(compassionate)
“은혜롭고” –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손길 (graceful)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 부족하고 때로는 무척 못된 우리를 끝까지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인내(patient)
“인자” – 우리를 무조건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steadfast love)
“진실: – 우리의 모습과 상관없이 끝까지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faithfulness).

다음 구절에도 하나님의 성품이 이어집니다.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Keeping steadfast love for thousands, forgiving iniquity and transgression and sin,
but who will by no means clear the guilty, visiting the iniquity of the fathers on the children
and the children’s children, to the third and the fourth generation.” (Exo 34:7 ESV)

인자를 히브리어로 “헤세드”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악함과 과실과 죄도 용서해주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자손 천대까지 용서해 주신다는 것은
우리의 죄나 허물을 절대로 기억하지 않으심을 강조한 말씀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뒤끝이 없으시네요!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이 섬뜩합니다.
벌은 면제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대까지 보응하신다니….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공의가 작동되면
벌까지 면제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죄는 용서하시지만
벌을 주시겠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벌은 죽음이니 큰 일 났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지점에서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죽으셨는지를 발견합니다.

3.
우리는 사망에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벌을 받지 않고 살아났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는 물론 우리가 받을 벌을 위해서도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깃든 대속(대속, redemption)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받을 벌을 대신 받으신 것이지요.

출애굽기 34장 7절을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습니다.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이 벌을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심으로 우리가 살았습니다.

사순절 마지막 주간을 보내고
고난주간을 맞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하기 원합니다.

우리의 죄는 물론
우리가 받을 벌까지 십자가에 묻어버리신
우리 주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내 대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의 은혜에 깊이 들어가게 하옵소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우리를 감싸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4.4.10 이-메일 목회서신)

빌립보서 4장 13절

좋은 아침입니다.

1.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즐겨 암송하는 구절가운데 하나가
빌립보서 4장 13절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I can do everything through him who gives me strength. (Phi 4:13 NIV)

그런데
지난 주 설교시간에 말씀 드렸듯이
11-12절을 한꺼번에 읽어야
그 본 뜻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1-12)

I am not saying this because I am in need, for I have learned to be content whatever the circumstances. I know what it is to be in need, and I know what it is to have plenty. I have learned the secret of being content in any and every situation, whether well fed or hungry, whether living in plenty or in want. (Phi 4:11-12 NIV)

사도 바울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족하고, 감사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알고 있었습니다.

비천이든, 궁핍이든, 풍부이든,
배부름이든, 배고픔이든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족하고 감사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터득했습니다.

등산가들이 힘겹게 산 정상에 오른 다음에
“야~ 호”를 외치듯이,
사도 바울 역시
이 모든 일체의 비결을 터득한 후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고 선포합니다.

2.
빌립보서 4장13절이
그리스도인의 성공의 열쇠로 인용되곤 합니다.

어떤 큰 일을 앞두고
할 수 있다는 자기 암시식으로
빌립보서 4장13절을 암송합니다.

앞에 커다란 장애물이 있을 때,
예수님의 능력으로 능히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읽습니다.

틀린 적용은 아닙니다.

하지만 11-12절의 문맥을 따라 읽을 때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사도바울의 고백을 더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처지와 삶이 어떠하든지
그 속에서 예수님의 은혜를 깨닫고,
어느 곳에나 예수님의 능력이 임한다고
바울처럼 고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3.
지난 주일 설교문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 상황에 적응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일체의 비결을 익혔다면 말 그대로 거침없는 사람입니다. 어떤 일이 생겨도 감사합니다. 스스로 만족하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일체의 비결을 배웠으니 어떤 상황이 닥쳐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일체의 비결 – 인생의 매스터 키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 닥쳐오는 세상이
의외로 강하고 만만치 않지만,
질그릇인 우리 안에 들어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살기 원합니다.

사도바울처럼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그래서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할 수 있기 원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I can do everything through him who gives me strength. (Phi 4:13 NIV)

하나님 아버지
오늘 주신 삶에 자족하게 하옵시고
주님 안에서 일체의 비결을 터득한
멋진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4.4.3 이-메일 목회서신)

귀 뚫은 자

좋은 아침입니다.

1.
어제 새벽기도회에서 읽은
출애굽기 21장에는 흥미로운 구절이 나옵니다.

십계명으로 시작된 출애굽기 20-23장은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지에 대해서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21장은 종에 대한 규정으로 시작합니다.
6년 동안은 종으로 살지만
7년째가 되면 종에서 해방시켜서 자유인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한번 종인 사람이 영원히 종이 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종들은 자유인이 될 7년째를 고대하면서
여섯 해를 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유인이 되는 일곱 번째 해가 되어도
영원히 주인을 섬기려는 종들이 있었습니다.
주인으로부터 처자식을 얻게 된 경우입니다.
그러면 처자식을 놓고 홀몸으로 나가야 합니다.

이런 경우,
영원히 주인의 종이 되기로
마음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 주인은 종을 데리고 하나님의 재판장에게 갑니다.
그리고 문설주에서 송곳으로 귀를 뚫습니다.
이것은 영원히 주인의 종이 되겠다는 표시입니다.

2.
본문을 읽으면서
두 가지 구절이 크게 다가왔습니다.

하나는
종이 주인 집에 남아있기로 한 이유입니다.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출21:5).
‘I love my master, my wife, and my children; I will not go out free,’ (Exo 21:5 ESV)

종이 주인의 집에 억지로 남는 것이 아닙니다.
종은 자신의 가족은 물론 주인까지 사랑합니다.
스스로 자원해서 자유인을 포기하고
주인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주인과 가족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다른 한가지는 영원히 주인의 종이 되겠다는 표시로
문설주에 귀를 뚫는 의식입니다.
문은 주인집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귀를 뚫는 것은
영원히 주인의 집에 속해 있을 것이라는 표시입니다.

비록 귀가 뚫렸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기에 행복했을 것입니다.

3.
귀를 뚫는 종을 묵상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우리들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안에 영원히 거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주님(Lord)으로 모시고
주님 앞에서 종으로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귀 뚫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귀가 뚫렸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스스로 종이 되었습니다.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가족들과 성도들을 사랑한 나머지
스스로 귀 뚫린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들도 주님 안에서 행복한 종들입니다.

이제 우리들이 할 일이 분명해졌습니다.
– 주인 되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해나가면 됩니다.
– 내 삶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것임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임을 믿고
“주님! 사랑해요” 고백하면서 그리스도인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종이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귀 뚫린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과 특권을 마음껏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4.3.20 이-메일 목회서신)

제단 뿔

좋은 아침입니다.

1.
하나님께서는 광야길을 걷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성막(tabernacle)을 지으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25장부터 마지막 40장까지는
성막을 짓는 방법(설계도)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직접 알려주시고
모세가 하나님 말씀대로 성막을 짓고, 제사장을 세우는 말씀입니다.

설계도의 도면을 제시하듯이 수치까지 정확하게 지시하셔서
너무 자세하다는 느낌도 받습니다.
그러다 보니 비슷한 말씀이 반복되어서 지루할 정도입니다.

출애굽기 27장 1-8절에서는
제단(altar) 만드는 법을 알려주십니다.

가로와 세로가 다섯규빗(약2.5미터)되고
높이가 삼규빗(약1.5미터)되는 정사각형입니다.
제단의 네 모서리에는 뿔이 있습니다.

짐승을 잡아서 제사드릴 때
네 모서리의 뿔에 제물의 피를 묻힙니다 (레 4:7).
피의 제사임을 나타내줍니다.

제단 뿔에 피를 바르는 것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
우리의 생명을 드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시고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아났듯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예배하는 자들을
구원해 주실 것을 구하는 예식입니다.

이처럼 제단 뿔에 피를 묻히는 것은
무엇보다 구원의 상징입니다.

2.
제단 뿔에는 다른 기능도 있습니다.
훗날에 예루살렘에 성전이 생기고
성전에도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네 모퉁이에 뿔이 있는 제단이었습니다.

그때
제단의 뿔은 용서함의 상징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짓고 성전에 들어와서
제단 뿔을 잡고 있으면 죄를 용서함 받았습니다(왕상2:28)

실제로 반역을 도모했던 아도니야가
제단뿔을 잡고 있으니까
솔로몬이 그에게 죄를 묻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단 뿔을 잡았다고 모든 죄가 용서함 받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단뿔을 노리고 일부러 죄를 짓는 경우는
거침없이 벌을 받기도 했습니다(출21:14).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만홀히(경하게 여기는 교만) 여기는 것을
매우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3.
요즘 우리 시대에
제단 뿔이 무엇일까를 묵상하면서
제일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떠올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그 보혈로 우리의 죄가 용서함 받았고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십자가 든든히 붙잡고
신앙의 길을 걸어갑니다.

십자가를 붙드는 손에
주님의 위로와 힘이 임합니다.
십자가를 붙드는 마음에
용서함과 불쌍히 여기심이 임합니다.
십자가 붙잡고 가는 인생길을 주님께서 인도해 주십니다.

각자의 삶 속에서 제단 뿔을 잡고 살기 원합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할 때도 제단 뿔을 잡기 원합니다.

우리 삶에 십자가 드리우고
그 십자가를 꼭 붙잡고 걷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니라 (히12:2)

Fixing our eyes on Jesus, the author and perfecter of faith, who for the joy set before Him endured the cross, despising the shame, and has sa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throne of God. (Heb 12:2 NAU)

하나님 아버지
제단 뿔을 꼭 붙잡고
주님의 구원과 용서함을 구하는 심정으로
날마다 십자가 든든히 붙잡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4.3.27 이-메일 목회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