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으로 임하는 축복

좋은 아침입니다.

1.
박근혜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한 것이 연일
한국신문의 톱기사를 장식합니다.

엊그제는 동행한 인사가운데
말도 안 되는 몰염치한 행동을 했다는
어이없는 기사도 있었지요.ㅠㅠ

양국 대통령의 오찬자리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서로의 이름을 갖고 말문을 연 것 같습니다.

자신의 이름에 “혜(惠)”자가 은혜/축복을 뜻하는데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버락”도
스와힐리어로 “축복받은(blessed)”이란 뜻임을 언급해서
오바마 대통령이 V자로 화답했답니다.

영화 라이언 킹의 유명한 대사 “하쿠나 마타타!’도
스와힐리어로
“근심하지 마, 걱정근심 다 떨쳐버려”라는 뜻이었지요.

스와힐리어는 케냐와 우간다 등
5천만 명이 쓰는 언어라고 하니
케냐에 뿌리를 둔 오바마 대통령의 이름 앞에
버락이 붙은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2.
축복받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바라크”입니다.

히브리어는 대개 세 개의 자음으로 구성이 되어서
그것들이 모음을 만나면서
동사가 되기도 하고, 명사가 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세 개의 자음들이 각기 다른 파생어를 만들어냅니다.

자세히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스와힐리어 버락과 히브리어 바라크가
서로 연관이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바라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성경에 많이 사용됩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바라크에는
축복받다는 뜻 외에
“무릎 꿇다”는 의미도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
무릎 꿇어야 함을 깨닫게 해주는 말입니다.

무릎을 꿇는 것은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가는 것입니다.
항복하는 표시로 두 손을 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함을
바라크라는 단어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다.
어디에 있든지 무릎 꿇고 살아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크 – 은혜와 축복을 겸해서 주실 것입니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시 95:6)

Oh come, let us worship and bow down; let us kneel[바라크] before the LORD, our Maker! (Psa 95:6 ESV)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도 무릎 꿇고 주님께 나가는
참빛교회 식구들을 한없이 축복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5.9 이-메일 목회서신)

여호와는 나의 힘

좋은 아침입니다.

1.
어느덧 5월이 되었습니다.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부릅니다.
봄기운이 온 세상에 가득하고
나무들은 청록색으로 변합니다.
(우리 동네는 5월이 되면 산이 갈색으로 변하지만)

날씨도 화창해서
몸과 마음이 환해지고
움직임이 활발해 집니다.

이처럼 5월은
고향 뒷동산에 활짝 핀 진달래처럼
봄기운이 만발한 계절입니다.

캘리포니아의 5월도
만만치 않게 아름답습니다.

이제 9월까지
화창한 날들이 계속될 것입니다.

이 즈음에 바닷가라도 나가보면
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의 조화 앞에서
찬양이 절로 나옵니다.
마음까지 확- 트이게 해줍니다.

주말이면 바닷가에 떠 있는
하얀 요트들까지
우리 동네 최고의 경관이 펼쳐지는 계절입니다.

2.
그렇지만 마냥 5월을
즐길 수만은 없습니다.

학생들은 5월이 잔인한 달입니다.
한 해 학업을 마무리하는 학기말 시험들이
5월에 몰려 있기에
정신 없이 보낼 수 밖에 없습니다.

어르신들은
어느덧 올해도 반이 지나간다는
세월의 빠름에 한숨이 절로 나오실 겁니다.

이처럼 5월은
올 해의 반환점을 향해서
올라가는 언덕 베기처럼 느껴집니다.

힘에 겹습니다.
등줄기로 땀이 쭉- 흘러 내립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도 예외가 아닙니다.
5월이 되니
올해 성경 일독이 어느덧 욥기까지 왔습니다.

이제 따라잡을 수 없다는 생각에
성경일독을 포기하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물론 아직 때가 이릅니다.

새해를 열심히 살았지만
그리 변화된 것이나
아직 열매로 드러나는 것들이 적습니다.
힘이 빠져서
저절로 손을 내려뜨리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처럼 제 각각입니다.
엇박자 입니다.

3.
5월을
힘차게 맞이하기 원합니다.

구원의 은혜, 기쁨과 평강의 복음의 능력이
5월의 신록처럼
우리 안에서 충만하게 임하길 원합니다.

더욱 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마지막 고백이
우리의 기도요 고백이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합 3:19)

GOD, the Lord, is my strength; he makes my feet like the deer’s; he makes me tread on my high places. (Hab 3:19 ESV)

참빛 교회 식구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 백성답게
꿋꿋하고 멋지게 5월 한 달을 살아내시길
새벽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빛 식구들의 발걸음이
사슴 발처럼 높고 험한 곳을 다니면서도
피곤치 않게 하옵소서.
복음의 능력이 신앙과 삶 속에 그대로 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5.2 이-메일 목회서신)

뿌리 신앙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새벽기도회 성경읽기는
로마서까지 왔습니다.
매우 조촐한 인원이 기도회를 갖지만
말씀의 은혜는 동일하게 임합니다.
새벽을 깨우는 신앙의 기쁨도 있습니다.

로마서 9장부터
오늘 읽은 11장 속에는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을 향한
바울의 비탄(파토스)이 서려있습니다.

선택된 민족이지만
그것이 올무가 되어서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바울은 그들로부터
배신자라고 낙인찍혀서 말할 수 없는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바울은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 끊어질지라도
형제와 골육 친척인 유대민족이
예수님의 복음 속으로 들어오길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요즘처럼 뒤숭숭한 시대에
두고 온 조국 대한민국과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미국을 가슴에 품고
바울의 심정으로 기도해야겠습니다.

2.
로마서 11장 18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Do not be arrogant toward the branches. If you are, remember it is not you who support the root, but the root that supports you.  (Rom 11:18 ESV)

여기서 뿌리는
모든 구원의 근원이 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킬 것입니다.
구약시대부터 구원을 주도적으로 이끌어오신 성부 하나님,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원사역을 완성하신 성자 예수님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고 구원을 이루도록 도우시는 성령 하나님!

가지는 유대인들이 믿던
율법과 그들의 신앙 전통들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뿌리에서 나온 가지들인데
유대인들은 가지를 갖고 자랑을 하다가
그만 뿌리에서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가지는
하나님께 접붙여져서
양자된 우리들 각각을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가지는 밖에 있어서
잎도 나고 예쁜 꽃도 피우지만
정령 가지를 보전하는 것은 뿌리입니다.

뿌리는 땅 속에 있어서 쉽게 눈에 띠지 않아도
수분을 흡수하고
가지에 영양분을 공급합니다.

가지 신앙은 겉으로 화려해 보일 수 있지만
금방 시들고, 쉽게 꺾입니다.

반면에 뿌리신앙,
즉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에 기초한 신앙은
흔들리지 않고 곧게 자라갈 수 있습니다.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18절)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붙잡고 계십니다.

오늘 하루도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참빛 교회 식구들 모두를 보전해 주시고
굳게 붙잡아 주시길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신앙이
삼위일체 하나님께 깊이 뿌리내리게 하옵소서.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뿌리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꼭 붙잡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4.25 이-메일 목회서신)

날마다 짐을 지시는 주

좋은 아침입니다.

1.
시간이 참 빠르게 흘러갑니다..
교회 홈페이지 <성경 Q&A>에
레위기에 대한 질문을 받고
답변한 것이 포스팅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 질문을 받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날짜를 보니 작년 3월입니다.
벌써 1년이 지났다니
이게 웬일입니까?

작년 이 맘 때는
8년 만에 한국을 다녀왔었습니다.
지금도 그때 만났던 그리운 분들과
한국의 변화된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아내가 아팠었기에 더욱 선명하게 기억이 되지요)
그런데 눈깜짝할 사이에 1년이 지났습니다.

이렇게 올 해도 지나갈 것 같습니다.

2.
4월도 중순입니다.
한 해의 삶이 지치기 시작할 때입니다.

어르신들은
벌써 넉 달이 지났다는 사실만 갖고도
마음이 우울해 지십니다.

학생들은
한 학기를 마무리할 시점이고
졸업을 앞둔 청년들은 다음 단계를 계획할 시기이기에
마음이 분주합니다.

사업을 하시든지, 직장생활 또는 연구를 하시든지
4월은 쉽게 넘어가는 달이 아닙니다.
미국 전체로 보면
세금보고를 하는 달이어서 경제까지 가라앉습니다.

게다가
엊그제 터진 보스턴 테러사건으로
마음이 참 무겁습니다.

전쟁보다 무섭고 잔인한 것이 테러입니다.
예고도 없이, 그것도 무고한 시민들의 목숨을 앗아가거나
심각한 해를 입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개인이나 특정단체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시민들을 볼모로 잡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3.
이렇게 힘겨운 4월의 한가운데를 보내면서
저도 오늘 새벽 무거운 마음으로
강단에 무릎 꿇고 하나님 말씀을 읽어갔습니다.

샘물처럼 제 마음을 시원하게 적셔주는
말씀을 만났습니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시편 68:19)
Blessed be the Lord, who daily bears us up; God is our salvation.  (Psa 68:19 ESV)

본문을 히브리어 어순 그대로 읽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을 송축합시다.
그분은 날마다(day by day) 우리의 짐을 져 주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되십니다.

주님을 송축하고 찬양할 이유가
차례로 열거되었습니다.

한참을 묵상했습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음도
하나님께서 날마다 제 짐을 지고 가셨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제 짐을 지고 가실 겁니다.
저의 하늘 아버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하나님은 우리 인생길의 짐꾼(porter)이십니다.
죄송스럽기도 하고
그렇지만 얼마나 감사한지요!

우리 주 하나님께서
참빛 교회 식구들의 짐도 몽땅 져주시고
순간순간 구원자로 임해 주시길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우리의 짐을 져주시는
하나님과 더불어
믿음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4.18 이-메일 목회서신)

부활절 그 이후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우리 동네 날씨가 참 좋습니다.
베이 지역에 살다가
다른 곳으로 이주하신 분들은
하나같이 이곳 날씨를 가장 그리워하십니다.

늘 말씀 드리듯이
베이 지역은 지중해성 기후로
예수님께서 활동하셨던
팔레스타인 지역과 매우 비슷합니다.

요즘은
겨울철 우기가 끝나고
여름철 건기로 접어드는 경계점에 있는데
팔레스타인 지역도 마찬가지입니다.

2.
성경대로 하면
지금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과 함께 40일 동안 지상에 계셨던 기간에 해당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일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행1:3).

갈릴리 호숫가에서 고기잡던
제자들을 찾아가신 것도
바로 이 즈음입니다 (요21장).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던
제자들을 위해서 조반을 차려주시고
자신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네가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똑같이 물으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께서는
따뜻한 봄 날씨 속에서
제자들과 더불어 부활후의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낙심가운데 있던 제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데
날씨도 한 몫을 하지 않았을까요?

3.
베이 지역의 화창한 봄을 맞으면서
2천년 전 갈릴리 호숫가를 거니셨던
부활하신 주님을 묵상합니다.

이른 봄날 아침,
베드로를 찾아가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예수님께서
베이 지역의 화창한 봄날을 즐기고 있는
우리를 찾아 오셔서 같은 질문을 하실 것 같습니다.

푸르고 높은 하늘을 향해서 두 팔을 벌리고
우리의 사랑을 힘차게 외치며 고백하기 원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시편 18;1)
I love you, O LORD, my strength. (Psa 18:1 ESV)

하나님 아버지
부활하신 주님과 지속적으로
사랑의 교제를 하게 하옵소서.
부활의 은혜를 잊지 않고
그 능력 안에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4.11 이-메일 목회서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1.

오늘은 성금요일(Good Friday)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날입니다.

“Good”이라는 단어와 관련해서
대체로 세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good의 고어적 의미에 holy가 들어있기에
우리 말 그대로 성금요일로 읽는 시도입니다.

Good이 God과 관련이 있다는 견해도 있는데
꽤 임의적입니다.

세 번째 견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만 놓고 보면
슬프고 애석한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이 임했기에 “선한(good) 사역”입니다.

저에게는
세 번째 견해가 마음에 깊이 다가옵니다.

2.
올해 성금요일에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있는
바울의 고백을 함께 묵상하고 싶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It is no longer I who live, but Christ who lives in me. And the life I now live in the flesh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Gal 2:20 ESV)

한 단어 한 단어를 쉽게 읽고 넘길 수 없습니다.
한 구절인데 자꾸만 걸립니다.
멈춰서 생각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을 믿는다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바울처럼 고백할 수 있을 겁니다.

바울의 고백을 여러 번 읽고
마음에 새기면서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 속에 깊이 들어가기 원합니다.

우리의 고백이
삶으로 이어지기 원합니다.

거기에
기쁨이 있습니다.
확신이 생깁니다.
힘이 생깁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이 Good Friday인가 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날,
우리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오르게 하시고
그 은혜에 참여하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3.28 이-메일 목회서신)

너희는 먼저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free way를 운전하다 보면,
운전하면서 텍스트 메시지를 보내면
159불 이상의 벌금이 부과될 것이라는
전자 표시판을 곳곳에서 발견합니다.

한 통계에 의하면
운전하면서 텍스트를 보내는 운전자는
그렇지 않은 운전자에 비해서
교통사고 위험이 23배 높답니다.

손이 느려서 텍스트는 엄두를 내지 못하지만
저 역시 운전 중에
이어폰을 끼고 전화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전화를 받는 것은 비교적 안전했지만
전화를 걸다가
자동차가 휘청거린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교통사고는 자신은 물론
상대방에게 인명사고까지 일으킬 수 있습니다.
벌금보다도 우리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
운전 중 셀폰 사용을 자제해야겠습니다.

2.
현대인들은 무척 바빠서
두 가지 이상의 일을
동시에 처리해야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운전 중에 텍스트 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같은 이유일 수 있습니다.

바쁘지 않아도
습관적으로 멀티 태스킹을 즐기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고
인터넷을 하면서 설거지를 하는 등…

반면에
동시에 할 수 없는 일들도 있습니다.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받는 우리들이기에
지금 해야 할 일과 나중에 해야 할 일을 구분해야 합니다.
지금 가야 할 곳과 나중에 가야 할 곳도 구분해야 합니다.
그때 우선순위(prioritizing)가 중요합니다.

3.
오늘은 날씨가 꿀꿀했지만
요 며칠 아주 맑은 날씨가 계속되더니
교회 앞에 있는 나무들이 새봄을 맞아서 꽃을 피웠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니
어떤 나무는 잎이 먼저 나오고 나중에 꽃이 핍니다.
어떤 나무는 반대로 꽃이 먼저 핀 다음에
잎이 파랗게 돋아 나옵니다.
각각의 나무마다 순서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물론 우리들 삶에도
순서가 있습니다.

지금 해야 할 일,
나중에 해도 되는 일,
만사를 제치고 가장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천천히 해도 되는 일, 등등.

새 봄을 맞아서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서
삶의 우선순위를 정돈해 봅시다.

두 가지 일을 욕심껏 한꺼번에 하다가
자신은 물론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들이 있다면
얼른 내려놓기 원합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께서 주신 시간을
소중하게 사용하고
귀한 열매를 맺는 참빛 식구들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마 6:33-34)
But seek first the kingdom of God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will be added to you. Therefore do not be anxious about tomorrow, for tomorrow will be anxious for itself. Sufficient for the day is its own trouble. (Mat 6:34 ESV)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도 주님을 먼저 생각하고
주님 뜻을 따르게 하옵소서.
우리 안에 있는 염려와 근심을 주님께 맡기고
범사에 감사하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4.4 이-메일 목회서신)

주의 평안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에는
김연아 선수가
우리에게 기쁨을 안겨주었습니다.

2년의 공백 후에 출전한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김연아 선수는 멋진 스케이팅으로
우승컵을 품에 안았습니다.

어느덧 예전의 앳된 모습이
많이 사라지고
대학을 졸업한 20대중반의 성숙한
모습으로 링크에 등장했습니다.

김선수는 매우 침착했습니다.
행동이나 표정이 흩으러 지지 않았습니다.
심판들의 편파판정이 있었다는 말에도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했습니다.
거칠 것 없이 스케이트를 지쳤고
아주 높게 점프를 하면서 날아올랐습니다.
어디서 저런 침착함과 자신감이 나올까 의아할 정도였습니다.

김연아 선수의 스케이팅을 보면
참 아름답습니다.
그의 표정과 손끝에 이르는 동작까지
매우 섬세하고 우아합니다.

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2.
김연아 선수의 스케이팅 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분을 향해서 “아버지”라고 고백한다면
우리의 마음과 삶이 흔들릴 수 없습니다.

물론 작은 흔들림과 순간적인 폭풍이 올 수 있지만
곧바로 평정심을 되찾고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길을
멋지게 지쳐가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 그리고
부활의 능력을 기억한다면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세상 속에서 자신 있게 살아야 마땅합니다.
시편기자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시 119:165).
Great peace have those who love your law; nothing can make them stumble. (Psa 119:165 ESV)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인생길을 걸어가는 주님의 백성들입니다.

“큰 평안(Great peace)”는
많은 평안이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한번만 임하는 평안이 아니라
시시때때로 많이 임하는 평안(샬롬)입니다.

“장애물”은 말 그대로
걸려 넘어뜨리는 물건/사건/사람 등입니다.
주님 안에 있을 때 장애물이 없습니다.
영어 번역 그대로 장애물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자신감이 나옵니다.

사순절 끝자락에
우리들의 신앙을 다시금 돌아보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자신감을 누리기 원합니다.

우리들 각자의 삶의 무대에서
김연아 선수보다 더 침착하고
멋지게 주님과 더불어 춤을 추기 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결국에는 책임지십니다.
그리고 끔찍이 사랑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도 주님과 더불어 걷게 하옵소서.
침착하고 멋진 하루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의 큰 평안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3.21 이-메일 목회서신)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

좋은 아침입니다.

1.
성경에는 “반석(바위,rock)”에 대한 표현이 많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지형이
바위가 포함된 산악지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물이 없을 때
모세가 반석을 치니 물이 나왔습니다.

시편기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반석”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인데
“바위”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래 위에 지은 집은 홍수가 나면 휩쓸려 무너지지만
반석 위에 세운 집은 견고해서 끝까지 견딜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삶을 반석 위에 지은 집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반석은 견고함의 상징입니다.

2.
시편 40편 2절은 웅덩이와 반석을 비교합니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발을 반석 위에 두사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He drew me up from the pit of destruction, out of the miry bog, and set my feet upon a rock, making my steps secure. (Psa 40:2 ESV)

본문에서 기가 막힐 웅덩이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잡혀서 떨어졌던 물도 없는 함정입니다.
요셉의 형들도 그를 웅덩이에 던졌습니다.

수렁은
진흙탕으로 움직일수록 빠져들어가는 곳입니다.
숨을 쉬기 힘들 정도의 웅덩이,
감옥처럼 자유도 없고 꼼짝달싹 못하는 상태,
게다가 어떤 조치를 취하기 위해서 움직이면 점점 더 힘들어지는 곳이
기가 막힐 웅덩이와 깊은 수렁입니다.

반면에 반석은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려져서
견고하게 서 있는 장소입니다.

수렁에서는 움직일수록 빠져들어갔는데
반석에서는 손쉽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3.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웅덩이에서 건져내셔서
반석 위에 세우셨다고 고백합니다.

시편의 다른 말씀과 연결시키면
“반석”은 하나님을 뜻합니다.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시31:3)

그렇다면
반석 위에 세워지고,
반석 위를 걸어가는 것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을 돌아보면 뒤죽박죽입니다.
혼란스럽고
때로는 어디론가 빠져드는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우리들 개인의 삶도 웅덩이처럼 꽤 답답하고
복잡하게 얽힐 때도 있습니다.

그때 잠잠히 반석이신 하나님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웅덩이에서 끌어올리셔서 반석 위에 세워주시고
발길을 견고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원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이 생각납니다.:
“거기 계신 하나님 (The God who is there)”
우리 하나님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우리들의 마음과 삶이 어떻든지
언제나 거기에 계시는 신실하신 분임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반석 되신
하나님을 속으로, 입술로, 몸으로 찬양하면서 하루를 시작합시다.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 행하신 모든 것 완전하시네
나의 생명 되신 하나님/ 내게 행하신 일 찬양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의 모습과 지경이 어떠하든지
반석되신 하나님,
우리를 건지셔서 반석 위에 세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3.14 이-메일 목회서신)

길에서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한달 동안 주일설교에서
여리고 소경 바디메오에 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이번 주까지 한번 더 바디메오와 지내고 싶었는데
사순절을 맞아서 전하려는
또 다른 주제의 말씀이 있었기에
지난 주에 마무리했습니다.

여섯 구절밖에 되지 않는
말씀을 차근차근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시간에는 길가에서 구걸을 하는 소경 바디메오의 실존,
그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불릴 만큼 존재감이 없었습니다.
소경은 저주받은 사람입니다.

지나가는 행인들의 손끝에서 떨어지는
동전 소리에 인생을 걸고 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처절할 정도로 불쌍한 인생입니다.

둘째 시간에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나사렛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는
바디메오의 간절함을 나눴습니다.
주님, 불쌍히 여기소서 (키리에 엘레이손)
– 그는 강력하고 가장 훌륭한 외마디 기도문을 후대에 남겼습니다.

셋째 시간에는 관점을 조금 바꿔서
소경 바디메오가 아니라 그의 외침을 듣고 발길을 멈추신
예수님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던
소경 바디메오의 간절한 외침을 들으셨고,
발길을 멈추셨습니다.
“그를 부르라” – 소경을 부르셨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불려 나온
소경 바디메오와 예수님의 만남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해 주기 원하느냐는 질문을 통해서
바디메오와 대화를 시도하십니다.
단순히 눈을 뜨게 해주는 사건을 넘어서
바디메오와 교제하시고,
그를 사람들 앞에서 귀한 존재로 높여주셨습니다.

“다시 보기를 원하나이다 (let me recover my sight).
– 소경 바디메오에게는
오직 한 가지 구체적인 소원이 있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예수님의 선포에
바디메오는 다시 보게 됩니다.

믿음
– 우리들 인생길에서 꼭 붙잡아야 할 끈입니다.

2.
바디메오에 대한 말씀은
마지막 해설(narration)까지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막10:52)
 And immediately he recovered his sight and followed him on the way. (Mar 10:52 ESV)

한번 더 말씀을 전했다면
“길에서(on the road) 예수님을 좇는 바디메오”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함께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첫째는 즉각성입니다.
바디메오는 눈이 뜬 그 순간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자신의 길을 가지도 않았고, 미루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매 순간 순간 즉각적인 결단임을 바디메오를 통해서 배웁니다.

둘째는 현장성입니다.
눈이 뜨인 바디메오는 자신의 삶의 처소였던
길에서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있는 자리에서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셋째는 역동성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바디메오는 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움직일 수 없는 앉은뱅이 인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 바디메오는 움직입니다.
길 가에서 길 위로 올라왔습니다.
자신의 발로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역동적인 삶을 시작합니다.

우리들도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을 좇는 제자의 삶을 살기 원합니다.
이런 저런 일들로, 세상의 염려와 바쁨 속에서,
자신의 문제에 얽매여서 주저앉아 있지 말고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 나서기 원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을 따라 나서는 하루가 되길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바디메오의 기도
바디메오의 믿음
바디메오의 헌신을 배우게 하옵소서.
힘차게 주님 따라 나서는 우리의 인생길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3.7 이-메일 목회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