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에

좋은 아침입니다.

1.
오늘은 3월 1일
94주기 삼일절입니다.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 독립 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학창시절 운동장에 모여서 부르던
삼일절 노래가 생각납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삼천만이 분연이 일어났던
삼일 운동은 일제강점기 동안 독립운동의 효시가 되었고
그 불씨가 꺼지지 않고 살아 있었기에
해방을 맞을 수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삼일운동을 주도했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기독교인이 16명이었습니다.
(천도교 대표도 15명, 불교 대표가 2명이었구요)

그때는 기독교가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했습니다.

요즘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꽤 많은 비난을 받고 있지만
우리들에게는 멋진 신앙의 선배들이 있기에
그들을 생각하면서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3.1절을 맞아서
우리의 뿌리인 민족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민족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기 원합니다.

내게는 내 동족을 위한 큰 슬픔이 있고, 내 마음에는 끊임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나는 육신으로 내 동족 내 겨레를 위하는 일이면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내 동족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이 있고, 하나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들이 있고, 율법이 있고, 예배가 있고, 하나님의 약속들이 있습니다. (롬9:2-4, 새번역)

2.
벌써 3년이 지났군요.
칼리지 코스타 오전 강해 때
“민족”이란 주제로 말씀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원고에서 한 부분을 가져왔습니다.:

“지금은 초대한국교회의 좋은 모습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역사를 뒤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환경이 변해서 다시 돌아가도 같은 효과는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선배들의 좋은 모습을 거울삼아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고, 신앙을 재구축할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서 9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민족을 생각합니다. 민족 때문에 자신이 그리스도와의 사랑에서 끊어진다고 해도 감수하겠답니다. 마음이 아파서 번민하고 고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갖고 자신의 민족, 공동체를 위해서 고민하고 자신이 죽어도 민족이 복음화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바울에게 있습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들은 대한민국, 우리 민족을 위해서 번민합니까? 안타까워서 근심합니까? 우리 가운데 한국으로 돌아가셔서 일하실 분들도 계십니다. 이곳에 남을 수도 있습니다. 한국에 가면 말할 것도 없지만 미국에 남아 있는다고 해도 우리 앞에는 “Korean”이 따라 다닙니다. 미국시민이 되어도 “Korean American”입니다. 우리의 뿌리를 뽑아낼 수는 없습니다. 얼굴에 써있고, 김치와 된장찌개를 그리워하는 우리들의 본성이 우리가 한국사람인 것을 증명합니다.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뿌리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이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을 생각하면서 근심하고 고뇌하였듯이 우리들도 한민족, 또 우리 나라를 놓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고,근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기다 우리 나라에 기독교가 전래되면서, 신앙의 선배들이 좋은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피를 흘리면서 신앙을 지켰고 또 교회와 나라를 지켰습니다. 세상 속에서 말 그대로 소금이 되었고 빛이 되었습니다. 그런 선배들의 뜻도 우리 안에 되살리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아침에 두고 온 조국과
온 세계에 흩어진 한민족을 가슴에 품고 기도합니다.
우리 민족이 온 세상에
복음을 비추는 빛이 되게 하옵소서.
겸비하여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이름만을 높이는 한국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3.1 이-메일 목회서신)

다윗의 영적 상상력

좋은 아침입니다.

1.

이번 학기 목요성경공부에서는
유진 피터슨의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을 읽고 있습니다.

다윗에 대한 말씀을
우리들 삶의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다시 쓴 매우 탁월한 책입니다.

오늘은 골리앗을 이긴
다윗에 대해서 읽었습니다.
(요약본은 청년부 Face Book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은
하나님께 집중하는 마음,
하나님이라면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피터슨 목사님은
하나님께 사로잡힌 상상력”이라고 불렀습니다.

반대로 사울과 이스라엘 군사들은
거인 골리앗에 사로잡혀 있어서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2.
다윗은
시냇가에서 다섯 개의 돌을 고를 때
물맷돌을 가지고 이리며 사자를 물리쳐서 양들을 보호했던 경험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골리앗도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 사로잡힌 상상력이 있었기에
다윗을 무시하는 골리앗도
다윗을 두고 안절부절못하는
형님들과 사울왕의 생각도 뛰어넘을 수 있었습니다.

다윗의 마음 속에는
위대하고 강하신 만군의 주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골리앗을 대면하러 뛰어나가는 다윗은
하나님의 팔로 무장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사로잡힌 상상력이
가져다 준 힘이었습니다.

3.
골리앗이 조소하는 가운데
시냇가에서 돌 다섯 개를 무릎 꿇고 줍는 다윗의 모습에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믿음으로 행하지만 초라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골리앗을 이길 것 같지 않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조소와 비난이 매우 거셌습니다.

다윗은 그때
하나님께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의 영적 상상력은 하나님께 도달해 있었습니다.

아주 멋지게 골리앗을 무너뜨립니다.
우리들도 다윗처럼
참으로 신중하고
참으로 대범하기 원합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삼상17:45-46)

You come to me with a sword, a spear, and a javelin, but I come to you in the name of the LORD of hosts, the God of the armies of Israel, whom you have taunted. This day the LORD will deliver you up into my hands, and I will strike you down and remove your head from you. And I will give the dead bodies of the army of the Philistines this day to the birds of the sky and the wild beasts of the earth, that all the earth may know that there is a God in Israel, (1Sa 17:45-46 NAU)

하나님께 사로잡힌 영적 상상력과 관련해서
피터슨 목사님께서 던지신 질문을 우리들 각자에게 적용해 보면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들의 믿음을 점검하기 원합니다.

그 순간 시냇가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다윗의 모습은 [돌 다섯 개를 줍기 위해서]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무언가를 보여준다. 우리는 풍부한 상상력을 가지고 스스로 우리의 무릎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그저 관습적으로 남들을 따라 살 것인가? 나는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성령님이 기름 부으시고 예수님이 구원하신 존재로서 살 것인가? 아니면 사실은 별 볼일 없는 전문가들에게나 기대고 의지하며 살 것인가? 골리앗 공포증과 하나님, 둘 중의 무엇이 우리 삶의 행로를 결정짓게 할 것인가? 사울을 올려다보며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 것인가?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60쪽-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과 능력에 이를 수 있는
영적 상상력을 주옵소서.
우리의 마음과 삶이
하나님께 온전히 사로잡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2.21 이-메일 목회서신)

2013 사순절

좋은 아침입니다.

엊그제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부터
2013년 사순절(Lent)이 시작되었습니다.

자세한 것은 첨부한
사순절에 대한 자료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매년 같은 자료를 함께 나누는데
우리 모두 하도 바쁘게 살다 보니
사순절에 대한 자료는 물론
일년에 한번 맞는 사순절이 매년 새롭게 다가옵니다.^^

사순절은
기독교 최고의 절기인
부활절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부활절은 축제입니다.

따라서 사순절 기간 동안
지나친 금욕이나
율법에 얽매인 또는 억지로 하는
경건의 훈련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들 각자가
일년 365일 가운데
약 10분에 1을 구별해서 하나님 앞에서 지낸다는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 다음에는
사순절 기간을 어떻게 보낼 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원하시는 안성맞춤의 경건의 훈련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것을 실천하면 됩니다.

성경읽기 (신약통독, 복음서 통독, 로마서 통독 등)
시간을 정해서 기도하기 또는 기도문 쓰기,
일주일에 한끼라도 정기적으로 금식하기,
이웃사랑을 실천하기 등
각자에게 꼭 필요한 신앙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이 각박합니다.
점점 이기적으로 변해 갑니다.
이런 때에 사순절을 맞는 우리들은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이웃들을 위해서 시간을 내고
다른 이들을 섬기고 기쁨이 되는
이웃사랑의 실천을 강력히 추천합니다.

2013년 사순절을 맞아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
우리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참빛 교회 성도님들 위에 깊이
그리고 뜨겁게 임하길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2013년 사순절을 지내는
주님의 백성들 위에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부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2.14 이-메일 목회서신)

영혼의 닻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수요예배에서는
히브리서를 읽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핍박으로 인해서
신앙을 저버리기 쉬운 상황에 처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히브리서라는 제목이 보여주듯이
유대교에서 개종하였거나
유대교와 밀접하게 연관된 기독교인들에게
구약의 전통을 갖고 예수님께서 메시야되심을
강력하게 호소합니다.

따라서 히브리서에는
구약성경의 인용과
유대교와 관련된 용어들이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구약의 제사와 연관시키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약의 제사가 폐지되었음을 선포합니다.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길 부탁하면서
구약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인물들을
창세기의 아벨부터 차례로 소개합니다.

믿음 장이라고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에 이름을 올린
구약의 인물들처럼
히브리서를 읽는 성도들은 물론
오늘날 우리들까지 믿는 이들이 들어가는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길 바라고 있습니다.

2.
지난 수요일에 살펴본 히브리서 6장 20절에는
“영혼의 닻(the anchor of the sould)”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We have this as a sure and steadfast anchor of the soul, a hope that enters into the inner place behind the curtain, (Heb 6:19 ESV)

닻(anchor)은 배들이 항구에 도착해 있거나
바다에서 어떤 임무를 수행할 때
배를 고정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옛날에는 바위덩어리나
쇠를 바다에 던져서 배를 고정시켰답니다.
항구에 들어오면 밧줄 같은 것으로
기둥(닻)에 묶어서 배를 고정시키기도 했습니다.

배가
풍랑에 흔들리지 않고
바다로 흘러가지 않도록 확실하게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영혼”에는
“목숨” 또는 “삶(life)”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혼의 닻은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고정시키는 닻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서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믿으면서 생긴 소망이
영혼의 닻이라고 가르쳐줍니다.

여기서 “소망”은
구원의 소망,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소망,
앞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갖게 되는 소망이기에
세상이 주는 소망과 다릅니다.

소망으로 영혼의 닻을 삼는 것은
우리의 인생과 삶이 예수님께 매여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꼭 붙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망망대해 인생의 바다로 흘러갈 수도 있습니다.
정처 없이 헤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혼의 닻을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소망에 내린 우리들은
삶이 튼튼하고 견고합니다.
예수님께 우리의 삶을 고정시켰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들 삶의 닻을 예수님께 내리고
힘차게 시작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 영혼의 닻을
예수님께 내리고
흔들림 없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2.7 이-메일 목회서신)

은혜

좋은 아침입니다.

1.

우리나라가 드디어

나로호 인공위성을

성공적으로 쏘아 올렸습니다.

이제 대한민국도

우주강국이 되었다고

신문에서 앞다투어 보도합니다.

과학에 문외한인 저로서는

위성의 움직이는 속도가

1초에 7.9km라는 것과

하루에 지구를 14바퀴를 돈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와- 굉장한것이구나’라고 감탄할 뿐입니다.

비행기를 타면 비상시에 산소 마스크를 써야 한다는

승무원의 설명을 듣습니다.

고도가 높으면 산소가 모자라기 때문이겠지요.

비행기가 대개 10km높이로 난다고 하는데도 산소가 모자란다면

나로호는 300km-1500km위를 돌고 있으니

도대체 그곳은 어떤 곳일지 막연히 궁금해졌습니다.

대기권 밖 우주공간이니

당연히 공기는 없겠지요.

나로호를 생각하다가

엉뚱하게도 공기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생각에 도달했습니다.

숨을 한번 크게 쉬어봅니다.

우리 동네 공기가 참 상쾌합니다.

몸 속 깊이 공기가 들어가는 것이 느껴집니다.

심호흡을 연거푸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이처럼 공기(산소)가 중요한데

그 귀중함을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2.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공짜로 숨을 쉬듯이

은혜도 거저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은혜”라는말 자체가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이 은혜로 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값을 지불하셔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이니

값싼 은혜는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도,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도,

여전히 부족하지만 이 만큼 자라있는 것도 생각해 보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공기처럼 늘 우리 곁에 있어서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너무 귀한 것이어서

미처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공기가 없어진다면

우리의 목숨이 거기서 끝이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거두어가시면

우리들의 생명도 그 순간 끝날 수 있는데 말입니다.

이것을 감지한 다윗은

하나님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애원했습니다.

나를 주 앞에서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편51:11)

Cast me not away from your presence, and take not your Holy Spirit from me. (Psa 51:11 ESV)


나를 주 앞에서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우리들 사방에 공기처럼 임해 있는

주님의 은혜를 감지하고 감사하기 원합니다.

아무런 공로 없이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 안에 넘치기 원합니다.

나로호가 우주공간을 향해서 쏘아올려져듯이

오늘 하루는 시간을 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찬양을

높이 높이 올려 보냅시다.


하나님 아버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너무 귀하고 커서 때로는 감지할 수 없지만

주님의 은혜,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고 느끼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1.31 이-메일 목회서신)

나다니엘

좋은 아침입니다.

1.

오늘 아침 새벽기도회에서는

요한복음 1장을 읽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의 마지막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를 부르시고

빌립을 부르십니다.

같은 동네 벳세데 출신 사내들입니다.

빌립이

나다니엘을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나다니엘이 오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는 참 이스라엘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것이 없도다. (요1:47)

Here is truly an Israelite in whom there is nodeceit!” (Joh 1:47 NRS)

예수님께서는 빌립이 나다니엘을 만나기 전에

그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단지 그를 바라만 보신 것이 아니라

그의 인물 됨됨이와 성품까지 꿰뚫어 보셨습니다.

깜짝 놀란 나다니엘이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임금이로소이다 (요1:49)

“Rabbi, you are the Son of God! You arethe King of Israel!” (Joh 1:49 ESV)

예수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가십니다.

이것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랍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

나다니엘 –

“하나님께서 내게 주셨다” 또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니엘을 보시고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 속에 “간사함(deceit)”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간사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돌로스”는

“고기를 잡는 미끼”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간사함은 남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꼼수를 부리는 것입니다.

거짓말로 덫을 놓는 것입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 나다니엘에게는

간사함이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예수님을 향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이신 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이쯤 해서 우리는 창세기의 야곱을 떠올리게 됩니다.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간사한 인물이었습니다.

형 에서를 속이면서 장자권을 빼앗았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서 외삼촌 집으로 피난갈때

돌베개를 베고 길에서 잠을 잡니다 (창28장).

그때 하늘에서 내려온 사닥다리에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환상을 봅니다.

오늘 본문에도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이스라엘은 간사함에 빠져있었습니다.

참된 이스라엘 사람들을 만나기 어려웠습니다.

참빛 되신 예수님께서 오셨지만

어두운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요1:9-11).

예수님께서는

야곱이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만나고 거기에 돌을 세우고 하나님을 예배했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신앙을 회복하길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향해서 나다니엘처럼

고백하길 원하셨을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임금이로소이다

간사함이 없던 나다니엘은

예수님을 바로 볼 수 있었습니다.

3.

어느 덧 2013년 새해의 첫 달도

거의 지나갑니다.

시간이 빠르다고 하염없이 말하기에는

꽤 아까운 순간들입니다.

송구영신 예배 때 말씀드린대로

흘러가는 시간들(클로노스)이 아니라

의미 있는 시간들(카이로스)로 만들어야 하는데…

우리 안에 참됨/진실됨을 간직하기 원합니다.

행여나 야곱의 간사함이 있다면

환도뼈가 부러지는 처절한 씨름을 통해서

참 이스라엘, 참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기 원합니다.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마음 깊은 곳에서 고백하기 원합니다.

무화과 나무 아래 있던 나다니엘의 마음을 꿰뚫어보신 예수님께서

각자의 삶의 처소에 있는

우리들을 바라보신다면 뭐라고 하실까요?

참된 주의 백성으로 주님께 보이기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루 하루

진실됨으로 주님께 나가게 하옵소서.

나다니엘처럼

참된 주님의 백성으로 주님께 인정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1.24 이-메일 목회서신)

앞서 가시는 하나님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가을부터 성경읽기 속도가 붙어서
주보에 나오는 진도보다 앞서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서
지혜를 얻고, 평안을 누리고,
살아있고 운동력있는 말씀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기에
힘들 때 성경에 마음을 쏟은 것이 여기까지 왔습니다.
감사할 뿐입니다.

오늘 아침 새벽기도회 시간에
저의 성경읽기 본문은
신명기 1-5장이었습니다.

신명기 말씀은 이번 주일 설교 본문이기도 합니다
신명기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아야 할
이스라엘의 2세들에게 행한 설교입니다.

모세라는 큰 지도자 없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물론 젊은 세대에
두려움이 밀려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이스라엘 백성들과 늘 함께 하시고
큰 복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2.
올 해도 어느덧 20여 일이 지났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날들을 생각하면
두려움이 엄습할 때도 있습니다.

일어나지도 않았고, 일어날 것도 아닌데
갑자기 염려가 생깁니다.

요즘 세상이 불안하다 보니
실제로 어려운 일들이 파도처럼 밀려올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그곳의 민족들과 한판 싸움을 벌여야 합니다.
40년을 광야에서 지내면서
몸과 마음이 지쳐있었을 그들에게는 두려운 일입니다.

이래저래 불안한 상황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싹텄습니다.

이것을 안타까이 여긴 모세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너희 앞서 행하시는 너의 하나님 (신1:30)
(The Lord your God who goes before you)

하나님께서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앞서서 행하셨다는 고백입니다.
먼저 가셔서 그들의 길을 예비하셨다는 간증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도
하나님께서 그들보다 앞서 가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3.
새벽에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마음에 은혜가 밀려왔습니다.

“너희 앞서 행하시는 너의 하나님!”

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앞에 어떤 길이 펼쳐질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선발대로 앞서 행하심에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서 가신 길이라면

어떤 길이라도 감사와 기쁨으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푸근해졌습니다.
앞 길을 미리 알려고 애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어떤 길이 펼쳐질 지 조급해하지도 않기로 했습니다.

길에 관심을 갖고 신경쓰기 보다
앞서 가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따라가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은혜가 넘쳤고 감사의 고백이 나왔습니다.

2013년의 첫 달도 절반이 지나갑니다.
하지만 아직도 350여 일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올해만 그렇지
우리들 앞에 남아 있는 인생길은 훨씬 많습니다.

미래를 놓고 지나친 염려나 두려움을 버리고
또한 미래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도 옆으로 제쳐놓고
우리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한걸음 한걸음 차근차근 주어진 삶의 여정을 걸어갑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보다 앞서가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을 분별하고
믿음으로 그 길을 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1.17 이-메일 목회서신)

믿음이란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 목요서신에
“거세개탁”이라는 어려운 제목을 달았다고
아내에게 꽤 면박을 받았습니다.ㅠㅠ
제가 생각해도 조금 그랬습니다.

오늘 아침 새벽기도회에서는
누가복음 17장을 읽었습니다.
그 가운데 17장 5-19절을
한 문단으로 읽으면서
믿음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도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간청했습니다(5절).:
우리에게 믿음을더하소서 (Increase our faith)

새해를 사는 우리들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믿음을 더해 달라는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이름 뜻도 “더하기”임) 사도들의 요청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아주 작은 것으로 축소시켜서 대답하십니다.

겨자씨와 같은 믿음입니다(6절).
그것도 겨우 겨자씨 한 알입니다.

여기까지 들은 사도들은 꽤 실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너희에게 겨자씨한 알 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 더러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순종하였으리라.

If you had faith like a grain of mustard seed, you could say to thismulberry tree,
‘Be uprooted and planted in the sea,’ and it would obey you.(Luk 17:6 ESV)

뽕나무가 뿌리가 뽑히는 것도 어렵지만
그것이 바다에 심기는 것은
사람들의 지식과 상식을 초월한 사건입니다.

그러고 보니 믿음은 말 그대로 신비입니다.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을 갖고도
우리의 존재, 생각, 마음씀씀이를 뛰어넘는
신비로운 사건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2.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뽕나무가 우리에게 순종한다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말씀의 주제를 살짝 바꾸십니다(twist).

어떤 종이 일을 하다가 집에 돌아왔습니다 (7-10절)
그렇다고 주인이 종을 위해서 상을 차려주지 않습니다.
종은 주인을 위해서 상을 차리고 수종 들어야 합니다.
종이 그 일을 했다고 주인이 감사할 필요도 없습니다.
종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 종은 믿음을 가진 우리를
주인은 하나님을 뜻할 것입니다.

종인 우리가
주인 되신 하나님 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믿음을 가졌다고
주인 되신 하나님께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종의 신분을 망각한 행동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으로
뽕나무를 뽑아서 바다에 심고
그 일을 통해서 자신이 높아지려고 한다면
그것은 결코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온전한 믿음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마6:33)는 말씀이
여기에 와 닿습니다.

믿음을 갖고
자신의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기 원합니다.

3.
이어서
지난 번에 설교했던 열명의 문둥병자 사건을 소개합니다 (11-19절)
열 명의 문둥병자(한센씨병을 앓는 사람들)가 고침을 받았는데
예수님을 찾아와서 감사한 사람은 한 명,
그것도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나와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가 없다면 믿음의 사람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예수님께서 그 한 명의 문둥병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네 믿음이너를 구원하였느니라 (17:19)
Rise and go your way; your faith has made you well.(Luk 17:19 ESV)

믿음의 끝은 결국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헬라어 직역은 “너의 믿음이 이미 너를 구원했다/your faith has saved you”)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겨자씨 만한 믿음부터
순종하고 감사하는 그래서 생명에 이르는 믿음까지
차례로 더하고 계십니다.

새해가 야금야금 지나갑니다.
우리들도 누가복음 속의 사도들처럼
매일같이 기도하며 살기 원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 마음과 삶 속에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을 주옵소서.
살아있는 믿음을 심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1.10 이-메일 목회서신)

거세개탁

Happy New Year!

좋은 아침입니다.

1.
작년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한국의 한 신문에서는
대학교수님들이 선정한 사자성어를 발표했습니다.:
거세개탁(擧世皆濁).

꽤 어렵게 들립니다.
“온 세상이 모두 탁해
지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바르지 않아
홀로 깨어있기 힘들다.”는 뜻이랍니다.
그런데
2013년도 그리 쉽게 지나갈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한국에서는 새해벽두부터
섭씨 영하 20도에 육박하는 강추위가 닥쳐서 한강이 얼었답니다.
마음까지 얼어 붙으면 안되는데요.

미국은 재정절벽(fiscal cliff)를 간신히 모면했지만
미국의 국가 부채가 어마어마합니다
(10조 달러, 1경원을 웃도는 말 그대로 천문학적 숫자).

경제야 2008년 이후 계속 불경기를 맴돌고 있어서
그러느니 한다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혼탁해지고 있습니다.

바르게 살려는 마음도

진리를 추구하려는 생각도

더불어 살려는 시도도

물질만능주의와 극도의 개인주의 앞에서 힘을 잃습니다.

홀로 깨어있기 힘든 세상임에 틀림없습니다.

2.
주일설교에서 함께 살펴본 이사야 53장은
온 세상의 죄 짐을 홀로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에대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분은 고난 받는 종(suffering servant)으로 오셨습니다.
무시 받으셨고, 거절당하셨고, 버림받으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5)
But he was wounded for our transgressions; he was crushed for our iniquities; upon him was the chastisement that brought us peace, and with his stripes we are healed.(Isa 53:5 ESV)

이사야 53장 속의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면서
혼탁한 세상을 비추는 한 줄기 빛을발견합니다.
그 분이 우리의 치료자요, 힘이요, 구원이심을 고백합니다.

설교시간에 다루지 못했지만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갔으면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우리도 걸어가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불사하는 신앙입니다.
아무리 세상의 물결이 강하게 흘러도
살아있는 송사리처럼
세상 물결을 거스를 수 있는 용기입니다.

이처럼 이사야 53장은
우리가 단지 바라보고 믿어야 할메시야 예수님을 넘어서
우리들 역시
고난 받는 종으로 살아야 한다는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3.
힘이 들어도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가기 원합니다.
혼탁한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되기 원합니다.
말씀과 기도 가운데 깨어있기 원합니다.

나 혼자의 삶에 안주하지 않고
“우리의 삶”을 살아가고
세상의 아픔을 가슴에 품고
고난 받는 종으로 나가기 원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에가능할 것입니다.

올 한해 우리 앞에 어떤 길이 펼쳐진다해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바라보며
꿋꿋하게 걸어갑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래도 올 한 해가 여러모로 힘이 들고
분기점이 되는 중요한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그때마다 십자가의 예수님,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도 그 길을 걷고,

우리가 있는 곳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1.3 이-메일 목회서신)

연말연시

좋은 아침입니다.

1.
성경을 읽다 보면

“두려워 말라(do not fear)”는 말씀이
자주 나옵니다.
그만큼 우리 안에 두려움이 내재되어 있다는 뜻일 겁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놓고 느끼는
삶에 대한 두려움,
모든 인생이 향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
우리들은 사나 죽으나 두려움을 등에 엎고 갑니다.

두려움에서 파생된 자잘한 일들 가운데
염려와 근심이 있습니다.

두려움을 업고 있다면
염려와 근심은 옆구리에 달고 삽니다.
앞으로 나가야 하는데
염려와 근심 때문에 휘청거립니다.

열등감 또는 자신 없음이라는 짐을
가슴에 달고 있을 때도 있습니다.
앞으로 나가기가 힘겹습니다.

인생길이 전후 좌우로 흔들리고
갈팡질팡 방황합니다.
넘어지기도 합니다.

2.
올 한 해를 마무리하는 요즘
지나온 350여 일을 생각하면
아쉬움과 더불어 안도의 한숨이 나옵니다.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아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 염려와 근심
그리고 무너지는 자신감을 감내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조금 더”라는 아쉬움은
연말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단골손님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지나온 삶의 구비구비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경험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삶의 구석 구석에 숨겨진 하나님의 은혜를 찾아내기 원합니다.
거기서 범사에 감사가 나옵니다.

두려움, 염려와 근심
자신 없음까지
은혜로 녹여버립시다.

3.
한 해를 이렇게 보내지만
우리 가슴에 여전히
남겨진 일들이 있습니다.

응답되지 않은 기도제목,
오랫동안 또는 한 해 동안 씨름했지만
마무리하지 못한 일들입니다.

내년으로 넘겨야 할 것들입니다.
기다림의 훈련이 무엇인지
실제로 깨닫게 해주는 일들입니다.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이끄는 것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듯이
우리들이 지고 가야 할 십자가일 수도 있습니다.
견뎌내야 할 소명입니다.

앞으로 견뎌야 할 인생길,
신앙의 길,
올 한해 풀지 못한 숙제들도
기쁘게 지고 새해를 맞기 원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면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유1:21)
Keep yourselves in the love of God, waiting for the mercy of our Lord Jesus Christ that leads to eternal life.

하나님 아버지
한 해를 떠나 보내면서
신실하신 아버지를 꼭 붙잡고
그 안에서 위로 받고 힘을 얻게 하옵소서.
참빛 교회 식구들을 한 분 한 분의 인생길을 친히 인도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2.12.20 이-메일 목회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