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박한 세상 속에서

좋은 아침입니다.

 

1.

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각자 알아서 자기 삶을 책임진다는 긍정적 의미도 있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부정적인 뜻도 들어 있습니다.

 

기후 위기도

지구 전체를 생각하기보다

일단 자기 나라만 잘 살려다 보니 생긴 재난일 것입니다.

각자도생의 어두운 그림자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사람들 마음속에는 ‘나는, 내 가족은’

무조건 살아남아야 한다는 이기주의가 생겼습니다.

역병을 겪고 나면서 생긴 부작용인데,

역시 각자도생의 어두운 면입니다.

 

이처럼 민족과 나라도, 개인도

각자도생을 위해서 무한 경쟁에 뛰어든 느낌입니다.

세상이 각박해지고 망가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2.

각자도생의 어두운 면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나만 살아남고, 나만의 이익을 챙기려는 ‘이기주의’입니다.

무한 이기주의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이기주의 앞에 하나님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을 믿는 믿음까지

자신의 생존과 성공에 사용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기주의는 우상숭배입니다.

자기가 신이 되고 하나님 자리에 앉았기 때문입니다.

 

이기주의는 다른 사람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내 의견과 내 이익만이 참(true)이고 옳음(right)입니다.

오직 관심은 자신(넓혀야 자기 가족)에만 쏠려 있습니다.

 

이기주의는 양심과 도덕의 기능도 마비시킵니다.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원칙은 무시하고

내게 필요한 것만 취사선택해서 적용합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이 점점 각박해집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남자와 여자가, 인간과 생물이, 그리고 자연과 우주 만물이

조화를 이루어 함께 살아가는 상생의 시스템인데 말입니다.

 

3.

이기적이고 각박한 세상을 바꾸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지만,

세상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고,

삶의 현장에서 작은 일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일 성경 공부에서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아브라함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의인 열 명이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했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아브라함의 기도) 생각하셔서

그의 조카 롯과 그의 가족을 구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기도가 헛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넉넉함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푸근하게 품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작지만 소중한 도움의 손길을 펼칩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듯해도,

예수 사랑으로 차가운 세상을 녹여보는 겁니다.

 

기도와 사랑의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점점 각박해지지만,

우리는 여유를 잃지 말아야겠습니다.

“엘-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생기를 불어넣는 성령의 바람이

우리부터 시작되기를 기대합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때에 밭모퉁이까지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23:22)

 

하나님,

참빛 식구들이 그리고 우리 교회가

세상을 살리는 작은 힘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3. 8. 24 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의 얼굴

좋은 아침입니다.

 

1.

야곱에 관한 말씀을 석 달 이상 공부하다 보니

야곱을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집니다.

 

야곱은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속이고 속는 그의 삶이 정상은 아닙니다.

넘어야 할 산을 앞에 두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야곱은 애처로울 정도입니다.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던 야곱이

이스라엘의 조상이 된 것을 보면,

하나님의 일하심은 인간의 생각과 다름을 실감합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밤새도록 하나님과 씨름하고

그곳 이름을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대면해서 보았는데 생명을 구했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다른 초월적 존재이십니다.

인간이 마주할 수 없는 전적인 타자이십니다.

야곱이 그 하나님과 밤새도록 얼굴을 맞대고 씨름한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을 보존했습니다.

 

2.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도 목숨을 유지한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자

형의 얼굴이 하나님 얼굴 같다고 말합니다.

엄청난 말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어떤 면에서  원수지간입니다.

에서는 야곱에게 속고 장자권과 축복을 잃어버렸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로부터 살해위협을 받았습니다.

 

형 에서가 자신에게 다가온다는 소식을 듣고

야곱은 안절부절못하였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준비했고,

자신과 가족을 구해주시길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자

에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발견한 것입니다.

깜짝 놀랄 일입니다.

 

얍복강에서 밤새도록 하나님과 씨름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본 야곱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3.

어떤 철학자는

“타인의 얼굴”에서 자신을 발견해야 하고

낯선 타인을 사랑하지 않고는 진정한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넘어서 낯선 타인의 지경에 들어가야

참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을 때,

이웃에게서 하나님의 얼굴을 발견하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낯선 이웃, 관계가 깨져서 서먹한 이웃, 약하고 소외된 이웃과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고 교감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기 얼굴에만 신경 씁니다.

관계가 어그러지고 그 속에 진실함이 사라집니다.

타인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신비를 경험하기 원합니다.

 

깜짝 놀랄 얼굴로 찾아오실 하나님을 기대하면서

오늘 하루 힘차게 시작합시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같사오며 (창33:10)

 

하나님

불현듯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지나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3. 8. 17 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과 씨름하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 예배에서는 두 시간에 걸쳐서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는 본문을 공부했습니다.

 

날이 밝으면

형 에서를 맞닥뜨려야 하는 긴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야곱은 재산의 절반이라도 챙기기 위해서 가축 떼를 둘로 나누고

형 에서를 위한 선물을 준비해서 형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야곱에게 가장 긴급하고 중요한 문제는

형 에서를 극복하고 살아남는 것입니다.

야곱의 생각 속에는 에서 밖에 없기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야곱이 가족까지 얍복강을 건너보내고

혼자 남아서 마지막 밤을 보냅니다.

가장 외롭고 불안하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야곱을 찾아오셔서

밤새도록 씨름하셨고

그의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마지막에는 야곱의 요청대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2.

지난주 설교에서

우리도 야곱처럼 하나님과 씨름하자고 제안하면서

시간상 나누지 못한 것을 오늘 보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정리했습니다:

 

우선,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을 이끄는 운영체계가 하나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매사에 믿음 안에서 살아가기로 결심하고

흔들림 없이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하나님과 씨름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둘째,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문제를 앞에 놓고 당황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제하실 수 있는 하나님 손에 문제를 맡깁니다.

문제를 일으킨 상황을 독수리의 시선(Bird’s eye view)으로 내려다볼 수 있을 때까지

기도와 말씀을 갖고 씨름합니다.

 

셋째, 중간에 포기하지 않는 끈질김입니다.

야곱은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는 것도 개의치 않고

하나님과 끝까지 씨름했습니다.

이름이 바뀌었고 결국 하나님의 축복도 받았습니다.

하나님과 씨름하는 사람은 끈질기게 살아남습니다.

 

넷째,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은

세상의 관습, 옛사람의 습관, 유행 등을 따르지 않습니다.

결국 없어질 세상 것들과 씨름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궁극적인 것(ultimate concern)”에  관심을 갖습니다.

신앙 안에서 각자의 인생관을 정립하는 과정입니다.

 

마지막 다섯째,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합니다.

하나님과 이웃과 평화를 도모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과 씨름한다는 것이

세상 일을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 안에서 고민하고 풀어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 앞을 막아서는 장애물을 뛰어넘고

신앙이든지 우리의 인생이든지

결국에는 중요한 과제를 풀어내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 씨름하기를 원합니다.

그 과정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길 원합니다.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창32:28)

 

 

하나님

사람이나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과 씨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3. 8. 10 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 편에 서라

좋은 아침입니다.

 

1.

토요일 새벽기도회 마치고

강단에서 기도하는데 문득

“하나님의 희로애락”이라는 문구가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은 언제 기뻐하시고, 화를 내시고

슬퍼하시고 즐거워하실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성경은

하나님의 희로애락을 기록한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올 때 기뻐하십니다.

정의와 공의가 사라진 세상을 향해서 분노하십니다.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쫓을 때 슬퍼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희로애락을 이해하고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2.

제가 기도하면서 든 생각은

하나님의 희로애락과

우리의 희로애락이 과연 일치하는 지였습니다.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합니다.

기쁘고 힘들고 슬프고 즐거울 때 기도하고

기쁘고 즐거운 일이 많아지길 기도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와 하나님의 마음이 일치하는 지 궁금했습니다.

 

희로애락이 인생이라면

우리가 원하는 인생과 하나님이 바라는 인생이

엇박자가 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 마음과 생각을 맞추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바른 기도요 바른 신앙일 것입니다.

 

3.

짐 월리스의

<하나님 편에 서라>는 책이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세상 속에서 추구해야 할 공동선에 관한 책입니다.

영어 제목도  “On His Side”이니 우리 제목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희로애락에 동참하는 기도,

하나님을 기쁘고 즐겁게 하는 신앙,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서 경험하고 이루는 시도,

이 모든 것의 기본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월리스의 한국어 번역 책 표지에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의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인지 아닌지 나는 관심이 없다.

나의 가장 큰 관심은

내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다.”

 

4.

지난 주일 예배를 시작하면서 말씀드렸듯이

우리 중심의 예배, 우리 중심의 신앙,

내가 잘되고 평안하고 복을 받으려는 자세를 내려놓고

하나님을 한 가운데 모시고 하나님의 희로애락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우리의 시선도 머물고,

하나님의 손길과 발길이 가는 곳에

우리도 가서 도우면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

 

그러면 이다음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다음과 같은 칭찬을 들을 것입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5-36)

 

하나님 편에 서기 원합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5)

 

 

하나님

오늘도 주의 손과 발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3. 8. 3 이-메일 목회 서신)

늘 바쁜 일로 쫓기는 삶

좋은 아침입니다.

 

1.

현대인의 특징은 바쁨입니다.

비즈니스(business)라는 말을 패러디해서

영어 비지니스(busyness)라는 말이 생길 정도입니다.

 

바쁘게 살다 보면,

“내가 왜 이렇게 바쁘지?”하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몸과 마음이 바쁜데 뭔가 멍- 해지는 순간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에는 시간 관리에 관한 정보가 넘칩니다.

한국에도 소개된 Atomic Habits(아주 작은 습관의 힘)이라는 책은

아마존에서 10만이 넘는 리뷰를 받을 만큼 인기입니다.

 

그런데

시간 관리에 관한 책이나 강연을 들으면, 대개 아는 내용입니다.

몰라서 못 한 것이 아니라 알면서 실천하지 않은 것이지요.

책을 사서 읽다가 중간쯤 덮게 되는 이유입니다.

 

2.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시간(역사) 속에서 일하십니다.

창세기 1장에 6일이라는 시간 단위가 나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고 했습니다.

 

영원이라는 시간, 순간이라는 시간

세상의 시간, 개인의 시간

지나가는 시간 크로노스, 포착해서 즐기는 카이로스 등등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 안에서 산다는 것은

주어진 시간을 하나님과 더불어 산다는 뜻입니다.

시간을 구별하는 것도  거룩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 나라이고 영원일 것입니다.

이다음 하나님 나라에서 경험할 것을

지금 누리는 최고로 행복한 순간입니다.

 

3.

이것도 알고 있지만,

막상 현실에 적용하고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늘 바쁜 일로 쫓기며 살기 때문입니다.

 

시간에 쫓기다 보면

정녕 누려야 할 영원한 시간을 소홀히 합니다.

주일 예배에 와서도 다른 생각을 하거나,

간신히 기도하고 말씀 읽는 시간을 만들었지만,

여유가 없고 조바심이 나서 서둘러 마무리합니다.

 

기도하고 성경만 읽으려고 하면

해야 할 일들이 눈앞에 스쳐서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영적 전쟁이라는 말이 맞습니다.

 

4.

시간을 떼어놓아야 합니다.

하루에 10분, 30분, 한 시간 이런 식으로 떼어놓기보다는

아침 7:00- 7:30, 저녁 10:00-11:00와 같은 식으로 시계 속의 시간을 떼어 놓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시간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말씀 읽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하루를 시작하거나, 끝날 때

꼭 기도하고 말씀 읽는 습관을 만드는 것도 좋습니다.

 

간혹,

“목사님, 저는 기도하고 말씀 읽는 시간이 습관이 되었는데,

그 시간을 지키지 못하면 죄책감이 듭니다”는 말을 듣습니다.

저는 이런 말을 할 수 있고, 듣는 것 만도 감사하고 기쁩니다.

기도하고 말씀 읽는 것이 습관이 된 분의 고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이런 고백 또는 고민을 많이 듣고 싶습니다.

 

위에 소개한 <아주 작은 습관>에서 강조하듯이

작은 것이 습관이 되면 신앙의 내공이 저절로 키워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의 달인(達人, master)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고 말씀 읽는 시간,

하나님 안에서 사는 행복을 절대 놓치지 맙시다.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할렐루야 (시편115:18)

 

하나님

우리의 시간에 주인이 되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 목사 드림.

(2023. 7. 27 이-메일 목회 서신)

야곱의 하나님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 예배에서는

창세기 야곱에 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성경의 인물 중에서

야곱만큼 복합적이고 세상적인 인물이 있을까 싶습니다.

 

장자가 되어서 아버지의 복을 차지하겠다는 집요함은

수단과 방법을 무시하고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는

브레이크 없는 전차처럼 보입니다.

 

아무리 어렵게 얻은 부인이라도

라헬만 편애(favoritism)하는 것은

사랑의 숭고함이 아니라 한 여성을 향한 한 인간의 집착으로 느껴집니다.

 

야곱의 두 부인, 라헬과 레아의 시기와 갈등

아기 낳기 경쟁이 야곱 자신의 편애에서 시작했는데

자기는 쏙- 빠지고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는 약삭빠름은 혀를 내두를 정도입니다.

 

2.

야곱에게는 의외의 면도 있습니다.

 

외삼촌에게 번번이 속지만,

결국에는 얼룩진 양과 염소로 큰 부자가 됩니다.

야곱의 총명함, 지략은

야곱이 외삼촌 머리 위에서 날고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약삭빠르면

생각이나 행동이 가볍고, 충동적이고 의지가 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외삼촌 집에서 20년을 종/노예로 살면서도

자신의 길을 가는 꿋꿋함과 특유의 성실함도 갖췄습니다.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을 마음에 품고

20년을 버틴 믿음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야곱에 관한 말씀 후반부로 갈수록

야곱은 조금씩 성숙해 갑니다.

그의 신앙과 생각이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어 갑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조상으로 야곱을 택한 이유일 것입니다.

 

3.

훗날 야곱의 이름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의 이스라엘로 바뀌지요.

그런데도 성경은 곳곳에서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한 발짝 떨어져서 읽으면

앞에서 말한 야곱의 복합적인 성품이 떠오르면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렇지만

야곱의 말씀속으로 들어가서

야곱과 우리 자신을 겹쳐서 읽으면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용어에서 친근함을 느낍니다.

 

얄미워서 멀리하고 싶지만, 가까이할 수밖에 없는

‘야곱’이라는 한 인간을 마냥 비난할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영락없는 야곱의 모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 대신 우리 이름을 슬며시 넣어서 읽어도 상관없게 됩니다.

 

그래서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참 좋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146:5)

 

 

하나님

우리에게도 야곱의 하나님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7. 20 이-메일 목회 서신)

다르게 살기

좋은 아침입니다.

 

1.

2주 전에 목요서신 제목이 <거슬러 살기>였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기보다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용기를 갖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아침마다 묵상하는

사도행전의 기독교인들이 그랬습니다.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 놓아서(upside down)

세상을 소동케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긴, 재산을 서로 나눠 쓰고

예루살렘에 핍박이 발생하니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방으로 흩어져서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심지어 죽음도 불사했으니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사도행전의 사건들은

오순절 성령의 임재와 예수님 제자들의 사역으로

기독교 역사상 가장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때였습니다.

강철도 녹이는 용광로와 같은 시대였으니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복음이 처음 전해지는 곳에서는

성령의 역사가 강력하게 일어난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2.

얼마 전, 한국 언론에도 등장한 미국 청년이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알래스카 항공 사내지를 필두로

많은 언론이 보도한 청년입니다.

 

빌(Bill)이라는 청년은

UC 버클리에서 교통 관련 석사 학위 과정에 등록했는데

거처를 버클리로 옮기지 않고 LA집에서 비행기로 통학했습니다.

버클리 지역의 비싼 렌트비를 아끼고

일주일에 수업이 세 번 있었기에 LA집에서 학교에 다니기로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버클리 지역 1년 렌트비 약 25,000불의 20% 정도에 불과한

5,600불을 교통비로 사용하고 올해 5월에 졸업했습니다.

 

수업이 있는 날은 LA 집에서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서

비행기로 샌프란 공항에 도착한 후에 바트로 이동해서 10시 수업에 들어갔고

집에 가면 보통 자정이 되었답니다.

 

절대 쉽지 않은 일을 해냈기에

빌이라는 청년이 레딧이라는 소셜 미디어에 올린 글이

세상의 주목을 받은 것입니다.

 

4.

청년이 비행기로 통학한 것이 학업이나 학교생활을 위해서

지혜로운 것인지에 대한 의견이 갈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발상이 특이한 것은 사실입니다.

 

빌이라는 청년을 보면서

다르게 사는 것도 주목받을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창의적으로 사는 것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고

세상을 거슬러 사는 것의 또 다른 버전입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습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후

스스로 보기에 좋았다고 감탄하신 하나님,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서

걸작품(masterpiece)으로 만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창의적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요?

누구나 사는 일상을 창조적인 카이로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 주신 지혜를 갖고

나만의 하루, 창조적인 일을 시도해 봅시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에베소서 2:10)

 

하나님

하나님 지으신 걸작품다운 삶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7. 13 이-메일 목회 서신)

레아의 시간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주 함께 나눈 본문은

야곱의 첫째 부인 레아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창세기 본문은 레아와 그의 동생 라헬의 외모를 비교했습니다.

라헬은 외모가 탁월했고,

레아는 시력이 약했다고 우리 성경이 번역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을 “눈이 부드럽다(Leah’s eyes are tender)”로 옮길 수도 있습니다.

 

레아가 라헬에 비해서 약하고 뒤처지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외모를 갖고 비교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에서와 야곱의 반대입니다.

 

레아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야곱의 첫째 부인이 됩니다.

야곱은 라헬을 원했는데 아버지 라반이

그 지방 풍습대로 맏딸인 레아를 야곱에게 준 것입니다.

 

외삼촌 라반이 조카 야곱을 속였고

레아는 속고 속이는 상황에서

주체적인 의지나 생각을 상실한 객체일 뿐이었습니다.

 

2.

야곱이 14년을 일하고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라헬만 사랑합니다.

지독한 편애(favoritism)입니다.

 

야곱은 외삼촌에게 분풀이하듯이

레아를 미워했습니다.

사랑과 미움이라는 감정을 갖고 라헬과 레아를 대한 것입니다.

 

이처럼 레아는

야곱이 새로 꾸민 가정에서 철저히 소외되고

심지어 미움받는 연약한 여성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레아를 챙기셨습니다.

미움받고 소외된 레아를 보셨고 레아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레아의 태를 열어 주셔서 네 명의 아들을 낳게 하셨습니다.

 

제사장 지파의 조상 레위, 다윗과 예수님의 조상 유다가

레아를 통해서 태어났습니다.

레아를 향한 하나님의 실제적인 위로였습니다.

 

3.

우리 모두 인생을 살다 보면

레아의 시간을 살 때가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다른 사람은 사랑받고 사는데 자기는 덩그러니 홀로된 느낌,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주변인으로 사는 시간,

외톨이 또는 왕따를 경험하는 시간,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상황에 던져진 것 같은 심정 등등…

자존심이 상하고

자기도 모르게 동굴 속으로 점점 깊이 들어가는 순간입니다.

 

누구에게나 레아의 시간은 힘겹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레아를 보시고

레아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말씀이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약한 자, 외로운 자, 무력한 자를 향합니다.

아무도 챙기지 않을 때, 하나님이 챙기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누리는 특권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우리가 해야 할 일도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는 곳을 바라보고

하나님 가시는 곳을 가고

하나님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세상의 레아들, 레아의 시간을 살고 있는 이웃을 챙기는 것이지요.

 

멋지고 근사한

그리고 하나님 사랑을 듬뿍 경험하고 전하는

하나님 백성의 삶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시 41:1)

 

 

하나님

레아의 시간을 사는

세상 모든 사람의 편이 되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7. 6 이-메일 목회 서신)

거슬러 살아보기

좋은 아침입니다.

 

1.

한국에 있을 때,

휴전선 임진강 근처 폭포 어장에 가곤 했습니다.

잉어를 키워서 직접 요리해 주는 곳이었습니다.

 

음식점 앞에 있는 어장에서 잉어들에게

먹이를 던져주면 수많이 잉어 떼가 몰려들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그 모습을 보고 신기해하며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먹이에 무관심하고 저 멀리서 유유히 수영을 즐기는

특이하게 행동하는 잉어들이 꼭 있었습니다.

대부분 모든 잉어가 먹이에 집착하고 서로 싸우는데

세상을 초월한 듯이 자기 삶을 즐기는 잉어들입니다.

 

2.

임진강 폭포 어장의 잉어들을 예로 들었지만,

세상을 거슬러 살거나 구별된 삶을 사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자기들만의 삶을 창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성경 용어로 말하면 “거룩”입니다.

 

수요일 에베소서 성경 공부에서 배웠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하늘의 신령한 복을 주신 이유가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성도(saints)”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성도답게 사는 것이 요청됩니다.

거룩한 길을 가는 것인데

이것을 성화(sanctification)라고 부릅니다.

 

겉으로 거룩하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자칫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이나

예루살렘 지도자들 같은 위선에 빠질 수 있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구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됩니다.

 

3.

요즘은 사람들이

지나칠 정도로 한 방향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욕망이 지배하는 시대가 되고

자기만족의 무한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조그만 손으로

작은 먹이 하나만 던져주어도

떼로 몰려와서 먹이를 갖고 서로 싸우고

허덕대는 잉어 떼의 모습이 연상될 정도입니다.

 

그때 우리는 조금 떨어져서

그리스도인 특유의 여유를 갖고 세상을 헤엄치기 원합니다.

세상을 거슬러 살아보는 것입니다.

남들이 다 가는 길을 거슬러 가는 묘미를 즐기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거룩이고,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삶일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아주 작은 것이라도 예수님을 닮아봅시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엡5:1)

Therefore be imitators of God, as beloved children. (Eph 5:1)

 

 

하나님

세상을 거스를 지혜와 용기를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6. 29 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좋은 아침입니다.

 

1.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모든 율법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집약된다고 하셨습니다(막 12:29-32).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도, 기도할 때도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할 때도

곁에 두고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점검할 말씀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이것을 훈련해서 습관이 되고 인격이 된다면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셈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보다

더 중요하고 귀한 신앙의 본질은 없습니다.

 

2.

C S 루이스는

<네 가지 사랑>이라는 책에서

“필요의 사랑”과 “선물의 사랑”을 구분합니다.

 

필요의 사랑은

배가 고픈 아기가 엄마 품을 찾듯이

필요에 의해서 성립되는 사랑입니다.

 

선물의 사랑은

선의로 베푸는 호의이고 말 그대로 선물(gift)입니다.

필요의 사랑이 사랑을 받는 사람 중심이라면

선물의 사랑은 베푸는 사람 중심입니다.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이 선물의 사랑에 가깝습니다.

 

C S 루이스는

두 가지 사랑의 경중이나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습니다.

 

필요의 사랑을 이기심의 발로라고 단정하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어려울 때,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처럼

필요할 때 누군가의 사랑을 요청하는 것도 정상입니다.

우리 역시 필요한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습니다.

 

선물의 사랑도 실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선물을

이웃에게 공짜로 나눠줄 때

필요의 사랑과 선물의 사랑이 통합되고 완성됩니다.

 

3.

우리 모두에게 두 가지 사랑이 모두 요청됩니다.

 

대부분 사람이 사랑을 받기만 할 뿐

주는데 인색하다면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가 이뤄질 수 없습니다.

 

주는 사랑만 진짜라고 주장한다면

피조물인 우리는 제대로 된 사랑도 못 해보고 지치고 말 것입니다.

기운이 쏙- 빠진 사람들만 세상에 넘치겠지요.

 

필요할 때는

망설임 없이 하나님을 찾고, 이웃을 찾아갑시다.

우리를 필요로하는 이웃이 생길 때는

힘을 다해서 사랑의 선물을 전달합시다.

 

미리 맛보는 천국,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질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 11:28)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6. 22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