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제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유럽에서는
4년마다 열리는 Euro 2012라는
축구시합이 한창입니다.

미국 시간으로
오후가 되면 어김없이 중계방송이 있는데
유럽의 축구강국들이 펼치는 시합들이어서
월드컵 못지 않은 인기와 흥미가 있습니다.

축구경기를 좋아하는 저에게도
Euro 2012는 큰 기쁨이자 유혹입니다.
멋진 경기와 세계적인 선수들의 묘기를 보면서
축구 경기를 만끽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지만 한가하게 축구경기를 즐길 수는 없습니다.
경기 하이라이트를 유튜브로 보거나
컴퓨터로 점수만 확인합니다.
물론
경기를 보고 싶은 충동을 꾹꾹 참으면서 말입니다.

2.
누구나 좋아하는 일이 있습니다.
운동경기일 수도 있고,
먹거리일 수도 있고,
사람들과 만나는 인간관계일 수도 있고
요즘 세대에는 컴퓨터나 게임일 수도 있습니다.

꼭 필요한 것이라기보다는
적당히 즐기면 스트레스도 해소되고
기분이 좋아지는 일종의 취미생활들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에 빠져들면
시간이나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게 되기에
절제(self-control)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절제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음식을 먹지 않는 금식보다
음식을 적당히 먹는 절식이 힘든 것을
생활 속에서 실제로 경험하지 않습니까?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외에
무엇이든지 지나치면 문제가 생기고 고장이 나게 마련입니다.

3.
우리는 매사에 절제를 훈련해야 합니다.
절제는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에 있듯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있어야 할 덕목이기 때문입니다.

절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그크라테이아에는
Self-control이라는 뜻 외에
숙달(거장, mastery)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매사에 절제를 훈련함으로
단정하고 균형잡이 삶으로 하나님께 나가는 것이
믿음의 거장으로 자라가는 비결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베드로후서 1 5-7)
For this very reason, make every effort to supplement your faith with virtue, and virtue with knowledge, and knowledge with self-control, and self-control with steadfastness, and steadfastness with godliness, and godliness with brotherly affection, and brotherly affection with love.(2Pet 1:5-7)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외에
그 어떤 것에도 지나치지 않게 하옵소서.
절제를 훈련하고
절제를 통해서 믿음의 거장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6.14 메일 목회서신)

크신 하나님

좋은 아침입니다.

엊그제는
금성이 태양을 가리는
금성일식(Venus Eclips)으로 세상이 떠들썩했습니다.

다음에는 105년 후에야 온다고 하니
우리 세대의 사람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금성일식이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노래할 때
박자를 맞추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과학에도 문외한입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을 아주 대단하게 생각합니다.^^

인터넷에 사진이 뜨는데
뭐가 뭔지 잘 몰라서
이것저것 찾아았더니
태양 속에 작은 검은 점이 금성이라는 것입니다.

금성에 가려서
태양의 일부분이
검은 점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런
솔직히 생각보다 시시했습니다.
일식이라면
금성이 태양을 가리는 것쯤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과학을 잘 모르는 저로서는
사람들이 조금 심하게 호들갑을(?) 떤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2.
금성이 태양을 가린다는 금성일식
그러나 태양을 가리기에는
금성이 너무 작았습니다.
태양이 너무 크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러면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생각났습니다.
때때로 우리가 하나님 보다 앞서가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려보겠다고
하나님 앞에 배짱 좋게 나설 때도 있습니다.

우리들 스스로는 하나님을 가렸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어림없는 일입니다.
기껏 가려봐야 금성일식 정도도 안 되는 점(point)이나 될까요?

금성일식을 보면서
이렇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크신 하나님 마음 한 켠에
점처럼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합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입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위대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 표현을 써서 찬양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 (시편 18:2)
The LORD is my rock and my fortress and my deliverer, My God, my rock, in whom I take refuge;
My shield and the horn of my salvation, my stronghold. (Psalms 18:2)

오늘 하루
시편기자처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조목조목 생각해서 찬양하기 원합니다.
크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고
하나님을 피난처 삼아 그 안에 거하기 원합니다.

우리 주님은 태양과 비교할 수 없는
태양을 만드신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그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크심을

소리 높여 찬양하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6.7 메일 목회서신)

한 걸음씩

좋은 아침입니다.

1.
새벽기도회에서의 다니엘서 읽기
수요예배에서의 골로새서 읽기
청년부들과 에베소서 읽기
아침마다 큐티 본문읽기
속회공부에서 성경본문 읽기
주일 설교에서 말씀 읽기
1년 성경읽기

일주일 동안 제가 참여하거나 인도하는
성경읽기와 관련된 일들입니다.
그러고 보니 상당한 분량의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그렇게 성경읽기 진도가 쭉나갑니다.

물론 모든 분들께서
저처럼 모든 프로그램에 참여하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절반만 참여하셔도
꽤 많은 양의 성경을 읽고 묵상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한번에 모든 것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으면
모래성이 바닷물에 밀려 가듯이
쌓아놓은 것들마저 금방 사라져 버립니다.

야금야금
그리고 꾸준히 말씀을 읽고 기도하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묘미이고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어제 수요예배에서는
골로새서 마지막 장을 함께 공부했습니다.
4 2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기도에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Devote yourself to prayer, being watchful and thankful.

여기서 기도에 항상 힘쓰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카르테레오에는 위에 있는 NIV 성경번역처럼

1) 자신을 헌신해서 드리다라는 뜻과
2) 참석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도에 항상 힘쓰는 것은
몸과 마음을 기도에 헌신하는 것이고,
기도생활에 결석하지 않고 참석하는 것을 뜻합니다.
기도를 쉬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도뿐만 아니라 신앙생활 전반에서
우리는 결석해서는 안됩니다.
예배도 그렇고,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큐티도 그렇고
출석을 게을리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꾸준히 참석하는 것이
곧 항상 힘쓰는 신앙입니다.

신앙에 지름길은 없습니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났을 때 신앙의 달인이 되는 비약도 없습니다.
신앙은 항상 힘쓰면서 조금씩 조금씩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지루하고
같은 일이 반복되듯이 느껴질 수 있지만
그래도 그 길이 복된 길이요 살길이기에
매일같이 밥을 먹고 숨을 쉬듯이 신앙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한 걸음씩
주님을 향해서 나가는
하루가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항상 힘쓰는 신앙
어떤 상황 속에서도
앞으로 나가는 끈기와 성실함을 더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5.31 메일 목회서신)

여호와 삼마

좋은 아침입니다.

1.
오늘 새벽예배에서
에스겔서를 모두 읽었습니다.
하루에 한 장씩 읽어가니
48일이 걸린 셈입니다.

새벽에 예언서를 읽기가 쉽지 않지만
창세기부터 이어지는 긴 여정이기에
광야를 걷는 심정으로 읽었습니다.

에스겔서는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것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선지자의 관점에서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만 골라서 행했던
예루살렘이 멸망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임했던 하나님의 영광이 떠납니다.

하나님께서 떠나신
예루살렘에 남은 것이라고는
처절한 심판뿐입니다.
그렇게 에스겔서의 분위기는 어둡습니다.

2.
하지만 끝 무렵에 가면서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이
심판이 아닌 소망인 것을 가르쳐줍니다.

37장에서 죽은 뼈가 살아나는 모습은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는 듯 했습니다.
47장의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강물이 되어서
바닷물을 살리는 말씀을 읽을 때는 속이 시원했습니다.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오는 47장 말씀은
얼마 후에 주일설교에서 다룰 계획도 세웠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에서
에스겔서의 마지막은
두 단어로 종지부를 찍습니다.:
여호와 삼마 (The Lord is There)

이제 하나님께서

성전을 떠나지 않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하나님 성전에 계십니다.
하나님 거기에 계십니다.

3.
우리들도 살다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곁을 떠나신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을 잊고 살아간 것인데……
그때도 하나님 거기 계십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행여나 나를 버리면 어떻게 할 지를 염려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버리면 버렸지
하나님 거기 계십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전에 모여서 예배할 때도
하나님 거기 계십니다.
예배를 끝내고 각자 삶의 처소로 돌아갔을 때도
하나님 거기 계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보다 앞서 가시는 하나님,
하나님 늘 거기 계십니다.

여호와 삼마
언제나 거기 계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힘차게 하루를 시작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참빛 교회 식구들이 가는 곳에
하나님께서 거기 계실 줄 믿습니다.
각자의 처소에서
거기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5.24 메일 목회서신)

하나님의 마음

좋은 아침입니다.
요즘은 구약성경의 신명기를 읽고 있습니다.
이래 저래 올해 성경 통독이 많이 늦었지요.
부지런히 따라잡아야겠습니다.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했던
이스라엘 1세대는 여호수아와 갈렙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나머지 백성들은 광야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모세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신명기는 모세가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
장차 가나안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의 2세들에게
들려준 마지막 설교였습니다.

제가 오늘 읽은 신명기 22장은
신명기 법전(12-26)의 후반부에 해당합니다.
신명기 22 1-12절을 읽으면서
하나님 마음을 잘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본문에 나오는 예들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1-4절에서는
이웃의 소나 양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말고 그것을 주인에게 돌려주랍니다.
주인이 없으면 집에 두었다가
주인이 찾을 때 돌려주랍니다.
소나 양 뿐만 아니라
무엇이든지 이웃이 잃어버린 것들을 발견하거든
못 본체 해서는 안 된답니다.

요즘처럼 무관심이 판을 치는 시대에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아니 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들 모두 각박한 세대를 살고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솔선해서
이웃의 일을 내일처럼 보살피고
이웃사랑을 실천해야 함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6-7절에서는 길을 가다가 어미 새와 새끼 새가 있는 것을 보거든
새끼나 알은 꺼내와도 어미는 잡지 말랍니다.
어미는 계속해서 새끼를 낳으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조명령을 준수해야 하기 때문이겠지요.

무슨 일을 하든지
여지를 남겨놓으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하나님은 끝장을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8절에서는 집을 지을 때 난간을 만들어 놓으랍니다.
난간을 만들어 놓으면 사람이 지붕에서 떨어져도
목숨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발적으로 짓는 살인죄도 막을 수 있다고 가르쳐줍니다.

만반의 준비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행여나 준비를 덜해서 이웃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자신이 손해를 당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발적인 것까지 고려하면서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라는 교훈입니다.

5절과 9-12절은
남녀가 옷을 바꿔 입거나,
양털과 무명실로 섞어서 짠 옷을 입거나
밭에 식물을 섞어서 심거나
소와 나귀가 함께 멍에를 지고 밭을 가는 것을 금지합니다.

혼합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십니다.
거룩한 것과 세상적인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섞어서 무질서하게 보이거나
혼란스럽게 일을 행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순수해야 합니다.
마음이 하나님께로 고정되어야 하고
복잡한 것에 질서를 부여하면서 정돈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혼란스럽거나 혼동케 하는 생각이나 행동은
하나님 앞에서 금물입니다.

엊그제 새벽기도회에서 읽었던
에스겔서 42 20절 말씀과도 일맥 상통합니다.
에스겔 선지자에게 성전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시면서
성전 주변에 담을 두를 것을 명령하십니다.
성전과 세상을 구분하는 담입니다.:
그 담은 거룩한 곳과 속된 곳을 구별하는 것이더라.
It had a wall around it to make separation between the holy and the profane.

구약의 율법서들이 지루한 것이 사실이지만
차분하게 읽다 보면
율법의 조항 조항 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깃들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백성들이 세상 속에서 구별된 삶을 살고,
이웃을 배려하면서 근사하게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 동안 세상에 살면서
구별된 삶을 살게 하시고,
이웃을 배려하고,
매사에 하나님 앞에서 완벽히 행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5.17 메일 목회서신)

두 개의 눈과 두 개의 귀

좋은 아침입니다.

아침에 거울을 보면서

제 얼굴을 가만히 관찰해 보았습니다.

입과 코는 하나인데

눈과 귀는 각각 두 개씩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눈과 귀를 각각 두 개씩 만들어주신

하나님의 뜻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눈이 하나라면

사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왜곡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두 개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하고

사랑하는 사람들도

세심하게 돌볼 수 있습니다.

물론 두 눈으로 보지 말아야 할 것들만 본다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거꾸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귀가 두 개인 이유도 생각해 봅니다.

당장 저는 개인적으로 두 개의 귀를 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살아갑니다.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지만

다른 쪽 귀로 거의 정상인처럼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귀가 하나였다면

저는 지금 무척 답답하고 불편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귀가 두 개인 이유는

세상의 말들을 한 쪽 귀로 듣고

한 쪽 귀로 흘리라는 뜻도 들어 있을 것 같습니다.

쓸데없는 말들을 들었다면 곧바로

다른 쪽으로 흘려 보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참 많은 소리들을 듣습니다.

이른 아침의 맑은 새소리부터 시작해서

대낮의 자동차 소음과 군중들의 말소리,

귀담아 듣고 마음에 간직해야 할 조언과

하나님 말씀에 이르기까지

두 개의 귀를 통해서 들려오는 소리들은 정말 다양합니다.

그런데 이따금씩

양쪽 귀에 필터(filter)를 설치해 놓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들어야 할 말만 들을 수 있는 장치입니다.

하지만 그런 장치는 없습니다.

필터가 없으니 앞에서 말한 대로

필요 없는 소리들은 한 쪽 귀로 듣고

한 쪽 귀로 흘려 보내는 훈련을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모든 소리를 마음에 품고 있으면

생각이 혼란스러워지고

마음에 상처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들을 소리만 정선해서 마음에 간직한다면

한결 우리의 영혼이 깨끗해질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두 개의 귀와 눈을 열어놓는 것은 물론

눈과 귀를 지혜롭게 차단하는 비결도 배워야 합니다.

이사야서 33장 15-16절에서는

하늘 나라 백성의 자질과 그들이 누리는 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알려줍니다

오직 공의롭게 행하는 , 정직히 말하는 ,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 흔들어 뇌물 받지 아니하는 ,

귀를 막아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

그는 높은 곳에 거하리니 견고한 바위가 그의 요새가 되며 그의 양식은 공급되고 그의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He who walks righteously and speaks uprightly, who despises the gain of oppressions, who shakes his hands, lest they hold a bribe, who stops his ears from hearing of bloodshed and shuts his eyes from looking on evil, 16 he will dwell on the heights; his place of defense will be the fortresses of rocks; his bread will be given him; his water will be sure.(Isa 33:15-16)

우리 귀를 통제해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우리의 눈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세상만 볼 수 있기 원합니다.

우리의 감각까지 통제할 수 있는

온전한 신앙인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높여주신 곳,

견고한 바위를 요새로 삼고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양식과 물이 끊이지 않는

축복을 누리기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의 눈과 귀가

하나님께서 만드신 목적대로

선하게 사용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5.10 이-메일 목회서신)

확신있게 서기

좋은 아침입니다.

한국을 방문하느라

지난 3주 동안 목회서신을 보내지 못했는데

어느덧 5월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참 빠르게 지나갑니다.

세월을 붙들어 놓을 수 없다는 말이 실감나는 요즘입니다.

이렇게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 아니 인생길에서

그리스도인이라면 잠깐이라도 멈춰 서서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믿음에 대한 점검과 확신입니다.

이것을 두고 골로새서 4 13절에서는

확신 있게 서기라고 말합니다.

골로새 교회를 세운 바울의 제자 에바브라가

교회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던 내용입니다.

그가[에바브라]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 4:13)

He is always struggling on your behalf in his prayer, that you may stand mature and fully assured in all the will of God.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적어도 세 가지 확신이 필요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확신

우리들 안에 계시는 성령님에 대한 확신

우리가 사는 시대는 모든 것을 유보하고

불확실성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고

어느 한 가지 확실한 것을 붙잡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여서

확신 있게 서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면서 예수님을 믿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확신 있게 서 있어야 합니다.

계절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5월을 맞으면서

우리들의 신앙과 삶이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성령님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빛 교회 식구들께

흔들림 없는 확신과 온전함을 더해 주옵소서.

확신 있게 서 있는 굳건한 믿음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5.3 메일 목회서신)

부활로 가는 길

좋은 아침입니다.

1.

어느덧 사순절이 지나고

고난 주간의 한 가운데 와 있습니다.

내일이 성 금요일이니

오늘은 예수님께서 붙잡히신 날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고 군병들에게 잡히신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과 빌라도 앞에

끌려 다니시면서 재판을 받으시고

결국 십자가형에 처해지신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

며칠 전에 죽은 나사로까지 살리신 예수님이시건만

전능하신 능력은 온데간데 없고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듯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무력하게 십자가를 지시고

갈보리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2.

기독교 신앙은 십자가와 부활로 집약될 수 있습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초라할 정도로 무력합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겉만 번드르할 뿐 속빈 강정입니다.

부활의 뒷면에는 십자가가 깃들어 있고

십자가는 부활로 나아가는 길목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를 지나서 부활로 나가야 합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짐을 알고

꿋꿋하게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우리가 겪는 고난과 고통이라면

부활은 고난의 끝일 것입니다.

고난 주간을 지나면서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느끼기 원합니다.

동시에 우리가 겪는 크고 작은 고통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올려 놓기 원합니다.

그리고

곧 다가올 부활의 아침을 소망하기 원합니다.

십자가는 부활로 이어지는 길목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고난 주간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우리 모두 위에

부활의 소망과 능력을 부어주옵소서.

나는 죽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신다는 귀한 고백이

예수님과 더불어

십자가와 부활의 여정을 걷는 우리들 안에 넘쳐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4.5 메일 목회서신)

침착함

좋은 아침입니다.

1.

엊그제 뉴욕을 떠나서 라스베가스로 향하던

제트 블루 항공기에 어이없는 일이 생겼습니다.

비행기 기장이 갑자기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면서

조종실을 뛰쳐나와서 승객들 사이를 오가며

알케이다 때문에

비행기가 추락하고 있다고 외쳤습니다.

승객들이 기장을 제압하고

비행기는 3시간 만에 텍사스 공항에 비상 착륙해서

사태가 해결되었지만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에는

항공사 조종사(pilots)에 대한 기사가 심심치 않게 보도됩니다.

음주상태에서 조종간을 잡은 경우,

조종사들이 자동 조종에 익숙해서

비상사태가 생기면 수동으로 비행기를 이착륙시키는 기술이 부족하다는 우려,

조종석에 앉아서 농담을 하거나 비행기 운항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까지

아찔한 얘기들이 흘러 나옵니다.

그 어떤 운송수단보다 비행기는

조종사들이 중요합니다.

이륙하는 순간부터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비행기에 탄 승객들은 조종사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세상이 어수선하다지만

조금씩 정신을 차리고

모든 면에서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2.

제트 블루 비행기 조종사가

정신이상을 일으켰을 때

옆에 있던 부조종사의 침착한 대응이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부조종사는 조종사가 종교를 얘기를 하는 등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자

조종사의 정신이상 증세가 있음을 감지했답니다.

그를 조종석에서 밀어내고

때마침 비행기를 탑승해 있던

비번 조종사에게 비행기 조종간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승객들과 더불어 조종사를 제압하면서

자칫 당황될 수도 있는 비상사태에

침착하게 대처했습니다.

미국 언론들은 오하이오 출신의 다우드(Dowd)라는

부종종사를 영웅으로 치켜 세우고 있습니다.

다우드는 어렸을 때부터 침착한 성격이었고

그의 가족들도 매우 사려 깊은 사람들이라고

고향사람들의 말을 인용해서 보도했습니다.

그의 장모는 사위의 행동이 결코 영웅적이 될 수 없고

비행기에 탄 모든 승객들이 영웅이라는 겸손함도 보였습니다.

중고등부 시절 도우드를 가리켰다는 주일학교 선생님은

그는 훌륭한 사람입니다. 영웅이 될 충분한 성품을 갖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어떤 일이 닫쳐도 능숙하게 대처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라고

다우드를 칭찬했습니다.

맞습니다.

부기장 다우드의 침착한 대처가

큰 사고를 막았습니다.

3.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우리 속담이 있듯이

침착함

특히 위기에 침착하게 대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하루 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평소에 침착함을 훈련하고 그것이 습관처럼 베어 있었을 때

위기상황에서도 허둥대지 않는 침착함이 발휘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열 처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다섯 명의 처녀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서 등불과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반면에 다른 다섯 명은 등불만 갖고 있을 뿐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채

신랑을 기다립니다.

신랑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등불과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는 침착하게 신랑을 맞이합니다.

반면에 기름을 준비하지 못해서 불을 키지 못한 처녀들은

그제야 허둥대면서 기름을 구하러 가지만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침착함은 준비함에서 옵니다.

매사에 지혜롭게 준비하고 미리미리 훈련해 놓으면

급한 일이 생겼을 때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항상 해야 합니다.

그때 가서 허둥대지 않고 준비한 기름으로 등을 밝히고

예수님을 침착하게 맞으려는 준비된 삶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면

주님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는지요?
사순절 마지막 주간에

우리의 신앙과 삶을 돌아보고

서둘다가 흐트러진 부분이 있다면

다시금 침착함을 회복하기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이 매사를 지혜롭게 준비해서

침착함이 성품 속에 깃들게 하옵소서.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면서 하루 하루 의로운 길을 걷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3.29 메일 목회서신)

별처럼 빛나는 인생

좋은 아침입니다.

1.

수요예배에서는

바울 서신을 한 장씩 읽고/공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부터 시작했는데

어느덧 빌립보서까지 왔습니다.

빌립보서는 제가 청년시절부터 무척 좋아하던 성경 말씀입니다.

물론 어렸을 때는 빌립보서 4장 13절 때문에 애독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I can do everything through him who gives me strength.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빌립보서 전체에 흐르는 말씀이 마음을 울립니다.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이 빌립보서 전반에서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언급할 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고백을 할 때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는 명령을 할 때,

위에 있는 4장 13절 배후에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는 말씀을 할 때,

빌립보서 말씀이 제 마음 속에

살아있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메아리 쳐옴을 느낍니다.

2.

어제 예배에서는 빌립보서 2장 말씀을 나누었는데.

2장 한 가운데 보석과 같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어그러지고 거슬리는 세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흠 없고 순전한 모습으로 하나님과 세상에 나갈 때,

그 인생이 하늘의 별처럼 빛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흠이 없고 순결해져서,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별과 같이 빛날 것입니다. (빌 2:15)

…that you may be blameless and innocent, children of God without blemish in the midst of a crooked and twisted generation, among whom you shine as lights in the world.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는 인생!

이보다 더 귀하고 행복한 인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말하는 소위 성공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도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 가운데서

보석처럼 돋보인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흠이 없고 순결한 (blameless and innocent)

모습을/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가졌을 때

저절로 생기는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모습입니다.

우리들은 흠없고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그 길로 나갈 뿐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나갈 뿐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흠없고 순결한 그리스도인들을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 속에서

믿음을 굳게 지키고

바르게 살려고 애쓰고 힘쓰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시대의 요청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는 기대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세상 속에서 별과 같이 빛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빛 교회 식구들께서

흠이 없고 순결한 신앙을 갖게 하옵소서.

세상 속에서 별처럼 빛나는 축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2.3.22 이-메일 목회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