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레카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말씀은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찾아오셨다는 것이 맞을 겁니다.

 

팥죽 한 그릇을 주고 형 에서로부터 장자권을 샀고

아버지 이삭의 축복까지 가로채면서 형의 원한을 샀습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형 에서를 피해서

외삼촌이 있는 하란으로 가는 길입니다.

돌 베개를 베고 잠을 자는데

사닥다리가 땅에서 하늘로 이어지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고

그 위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꿈을 꿉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에게 주었던

땅에 대한 약속, 후손이 번창할 것이라는 축복,

야곱이 어디를 가든지 함께 하시고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며

이 모든 일이 성취될 때까지 야곱을 떠나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야곱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밤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셨고

야곱에게 꼭 필요한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2.

잠에서 깬 야곱이 탄성을 지릅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창28:16)

히브리어 본문의 의미를 살려서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확실하게 여기 계셨네요. 그런데 내가 그것을 몰랐습니다”

 

왕관에 섞여 있는 순금의 비율을 알아내라는 왕의 명령을 받고 고민하던

고대 그리스의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서 방법을 알아내고는

“유레카(깨달았다”)를 외치면서

알몸으로 욕탕 밖으로 뛰어나갔다는 사건이 생각납니다.

 

야곱에게는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 이상의 깨달음이었습니다.

눈이 활짝 열리는 새로운 발견입니다.

그동안 몰랐던 것을 알게 된 자각입니다.

돌베개를 베고 깜깜한 밤을 보내는 야곱에게 임한 선명한 빛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를 속이면서 축복을 가로챈 야곱을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표시였습니다.

앞으로도 절대로 야곱을 버리지 않으시겠답니다.

그동안의 막막함, 절망, 경쟁심, 욕심, 힘겨움, 두려움이

두서없이 말끔하게 씻겨 나가는 처음 세례 예식과 같은 사건입니다.

 

3.

야곱은 일어나서 돌베개를 세우고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창 28:17)

 

하나님을 만나는 깨달음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깨달음을 새로운 차원으로 확대시킵니다.

 

야곱이 있는 곳이 하나님의 집이 되었습니다.

집이 없는 야곱인데 그의 믿음과 상상력이 돋보입니다.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사닥다리를 보면서

하늘 문이 열렸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과 야곱 사이에 freeway가 개통되었습니다.

 

꿈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깨어난 야곱이

하나님 안에서 자기 인생을 새롭게 바라보는 또 다른 꿈을 꾸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들은 말씀을 확장하는 야곱의 상상력이 대단합니다.

꿈처럼 스치듯 지나가는 벧엘의 사건이

외삼촌 집에서의 20년을 버티는 뿌리 경험(root experience)이 됩니다.

 

이번에 함께 나누는 야곱에 관한 말씀이

우리 참빛 식구들 한 분 한 분에게 하나님을 보고

그동안 묵혀 놓았던 고민이 풀어지는 유레카의 순간의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집, 하늘 문으로 승화시키는 깜짝 놀랄 상상력도 발휘되길 기도하겠습니다.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창28:17)

 

 

하나님

꿈을 있는 상상력을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6. 15 이-메일 목회 서신)

에이카

좋은 아침입니다.

 

1.

<생명의 삶> 순서에 따라서

아침에 읽는 성경 본문은 예레이먀 애가입니다.

 

앞에 예레미야라는 별칭이 붙은 것은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인 칠십인역을 따른 것입니다.

정황상 애가서를 지은 저자를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고 목도한

예레미야 선지자로  보았습니다.

 

반면, 히브리어 본문 성경에서 애가서는

예언서가 아니라 성문서에 속합니다.

메길롯이라는 다섯 두루마리(아가, 룻, 애가, 전도서, 에스더)와 함께

예루살렘 멸망을 기억하는 절기에 불리던 노래입니다.

 

“슬프다”는 뜻의 히브리어 <에이카>로 시작하는 애가서는

시편의 탄식시와 맥을 같이 합니다.

고대 근동에서 사람이 죽었을 때 부르는

조가(弔歌)의 형식도 갖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애가, “슬픈 노래”입니다.

 

2.

애가서의 특징은

1-4장까지 각 구절이

22개의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A부터 Z로 각 구절이 시작됩니다.

 

이것을 두고 다음과 같은 입장이 있습니다:

1) 알파벳 철자를 차례로 나열해서 노래하는 것에

귀신이나 악령을 쫓는 마술적인 힘이 있다는 고대 사회의 전통을 수용한 것

2) 교육과 암기용으로 알파벳 순서로 기록했음

3) 예루살렘의 무너진 것을 목도한 저자가

자신의 슬픔을 절제하기 위해서 알파벳 순서대로 차분하게 써 내려갔음

4) 예루살렘의 슬픔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기 위함.

5) 하나님의 징벌이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임했다는 입장.

 

애가서 외에도 시편 119편을 비롯한 성경에는

알파벳 순서대로 기록된 말씀이 있습니다.

암기나 교육용으로 그렇게 기록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또한,

민족이 당한 고난과 슬픔을 낱낱이 헤아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슬퍼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정리하고 정화하는

카타르시스의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애가서의 또 다른 특징은

“키나(3+2)”라고 불리는 히브리 운율입니다.

처음 셋이 긴 운율이라면, 다음 둘은 짧습니다.

이것도 슬픔을 노래하는 전형적인 문학 기법입니다.

 

애가서 1-3장(3)은 탄식으로 시작해서 소망(3장)으로 끝이 납니다.

4-5장(2)은 탄식과 공동체 기도입니다.

각 구절뿐만 아니라, 애가서 5장 전체가 키나 운율입니다.

 

시는 우리의 마음을 정화합니다.

고난은 모든 사람을 시인으로 만든다는 말도 생각납니다.

운율을 갖고 애가서를 써 내려가면서

예언자는 물론 후대에 애가서를 읽는 독자들의 마음도 정리되었을 것입니다.

 

3.

<에이카> 슬프다!

시편의 탄식시와 더불어 애가서가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 포함되어 감사할 뿐입니다.

 

잘못으로 인한 어려움이든지

맥락 없이 닥치는 고난이든지

타인으로 인한 핍박이든지

우리 앞에 닥친 고통스러운 현실을 놓고

하나님 앞에서 마음껏 슬퍼하고 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침마다 애가서를 묵상하면서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응어리가 부서지고

혼란스러운 생각들이 알파벳 순서대로 정리되고

새롭게 시작할 힘을 얻기를 바랍니다.

 

참지 말고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토해내고 애통합시다.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껏 웁시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5:4)

 

 

하나님

애통하며 우는 자들의 편이 되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6. 8 이-메일 목회 서신)

 

속임수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에는

창세기 야곱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야곱 내러티브에서 주목할 것은

속고 속이는 속임수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이요

아브라함과 이삭으로 이어지는 야곱에게

‘속임’은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고 형 에서의 축복권을 가로챕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아버지를 속이는 야곱을 방어할 이유도 없습니다.

거짓말은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은 솔직합니다.

성경의 인물들 가운데 완벽한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의 민낯을 발견하고

그런데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 섭리(providence)를 구하게 됩니다.

 

2.

엊그제

미국에서는 희대의 사기극을 펼친 이유로

연방 교도소에 수감된 엘리자베스 홈스에 관한 기사가 넘쳤습니다.

 

어릴 때부터 야망이 많았던

엘리자베스 홈스는 스탠퍼드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실리콘밸리에 <테라노스>라는 바이오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엘리자베스 홈스가 스무 살이던 2004년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 후,

엘리자베스 홈스가 세운 테라노스는

작은 양의 혈액만으로 250여 종의 질병을 진단할 수 있는

“에디슨”이라는 키트를 발견했다며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합니다.

 

테라노스의 설립자 엘리자베스 홈스는

순식간에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습니다.

여성 스티브 잡스라고 불릴 정도였습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2015년,

월스트리트 저널의 존 케래이루(John Carreyrou)기자가

테라노스의 에디슨 키트가 거짓이라는 추적 기사를 보도합니다.

기사의 내용 그대로 엘리자베스 홈스의 연구는 거짓이었습니다.

투자자와 세상을 상대로 사기를 친 것입니다.

 

작년 11월,

엘리자베스 홈스는11년형을 선고받고

엊그제 5월 30일 텍사스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만만치 않은 감옥살이가 엘리자베스 홈즈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수용소 부엌에서 접시 닦는 일을 시작한 답니다.

모범수가 되면 9년여 만에 석방될 수 있고 항고도 계획하고 있다지만.

투자자들과 종업원, 세상을 속인 죗값을 톡톡히 받을 것 같습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입니다.

 

세계가 주목하는 자본주의의 첨단

우리 지역에서 발생한 일이기에 더 관심이 갑니다.

욕망의 끝이 어디 인지도 다시 깨닫습니다.

 

3.

아버지를 속인 야곱은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알다시피

야곱도 나름 대가를 지불합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아무리 유명한 성경의 인물이어도

잘못한 것을 미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잘못했을 때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아무쪼록

우리가 사는 세상이 맑아지고 정직해지길 바랍니다.

 

이웃에게 팔든지 이웃의 손에서 사거든

너희 사람은 그의 형제를 속이지 말라 (레25:14)

And if you make a sale to your neighbor or buy from your neighbor,

you shall not wrong one another. (Lev 25:14)

 

하나님

 

정직한 사람의 편이 되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6. 1이-메일 목회 서신)

조금만 더

좋은 아침입니다.

 

1.

어느덧 올해도

다섯 달이 지났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빠른 지 해마다 실감합니다.

 

빠르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뭔가 부족하고 실망스러운 자신의 모습도 발견합니다.

우리 인생이 생각처럼 펼쳐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때는 조급해집니다.

 

인상주의 화가로 유명한

빈센트 반 고흐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고흐는

동생 테호에게 의존하던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유명해지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뜻대로 되지 않자

자기 귀를 자르고 정신 병원에 입원하는 등

굴곡의 삶을 살다가 37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고흐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작품이 세상에서 좋은 평가를 받게 되고

20년 후에는 동생 테오와의 편지가 책으로 출판되는 등

우리가 알다시피 세계적인 화가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조금만 더 견디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면

자신의 진가를 알아주는 세상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너무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2.

이집트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로 나오면서 물이 부족했습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흘 길을 갔지만 물이 없었습니다.

마라(쓴물)라는 곳에 도착했지만, 쓴물만 나왔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하고 모세에게 나와서 불평합니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나뭇잎을 물에 던지니 쓴물이 단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나서

엘림이라는 곳에 이르렀는데

그곳에는 열두 개의 우물과 일흔 그루의 종려나무가 있는

사막의 오아시스였습니다.

 

조금만 참고 기다렸으면

불평하지 않고 엘림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아쉽습니다.

 

3.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인생길을 걷기에

미래를 생각하면 늘 불안하고 조급해집니다.

급한 대로 임시변통을 하는데 그 행동이

고흐나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보듯이 안타까운 결정일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조금만 더 라는 말이 힘이 되고 격려가 됩니다.

조금만 더 견뎌보는 겁니다.

조금만 더 앞으로 나가보는 겁니다.

조금만 더 노력하는 겁니다.

조금만 더 기도하면서 신앙의 길을 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인생의 오아시스 엘림이 눈앞에 있음을 믿고 걷는 것이지요.

 

오늘 하루도

올해 우리 교회 표어 그대로

<푯대를 향해서> 한 걸음 더 나가는

‘조금만 더’의 발길이 되길 바랍니다.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곁에 장막을 치니라 (출15:27)

 

 

하나님

중간에 멈추지 않고

조금만 더 나갈 수 있는 힘을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5. 25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 예배에서

창세기 야곱에 대한 말씀을 시작했습니다.

주일에도 말씀드렸듯이

아브라함과 이삭에 관한 말씀은 일찍이 함께 나눴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고향 땅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으로 가는 믿음으로 시작했습니다.

중간에 하나님의 약속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잠시 곁길로 갔지만,

마지막에는 하나뿐인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믿음을 선보였습니다.

 

이삭은 “웃음”이라는 이름 뜻 그대로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커다란 어려움을 겪지 않았으니, 이삭에 대한 말씀이 짧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에 비하면

야곱의 일생은 말 그대로 파란만장합니다.

탄생부터 어린 시절, 결혼과 자녀들,

이집트 피난살이까지 한평생이 성경에 기록된 어쩌면 유일한 인물입니다.

 

그러다 보니

야곱의 희로애락 한 평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2.

야곱 속에는 완벽하지 않은 우리의 모습이 있습니다.

 

순종과 실수를 거듭하지만, 믿음의 조상으로 우뚝 선 아브라함이나

큰 어려움 없이 또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삶을 따라 사는 이삭과 달리,

야곱은 물질에도 민감하고,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합니다.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에 비해서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야곱에게 마음이 갈 수도 있습니다.

 

이곳저곳을 떠돌면서

이민자로 살았기에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는 야곱의 고백도

타향에 와서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을 대변합니다(창49:7).

 

야곱의 삶을 지탱해 준 두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형 에서를 피해서 외삼촌 집으로 피나가던 길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돌베개를 베고 노숙할 때 하나님께서 야곱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야곱은 그곳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어디든지 하나님이 계시면 그곳이 하나님의 집이라는 깨달음입니다.

 

20여 년 외삼촌 집에서 이민 생활을 마무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에서가 야곱에게 다가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야곱은 형이 자기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족을 얍복강 너머로 건네놓고

한밤중에 야곱 홀로 남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야곱을 찾아오셨습니다.

밤새도록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합니다.

 

깜깜한 어머니 태중에서 형과 싸우던 야곱이

한밤중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한 것입니다.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난 야곱이

얍복강에서는 하나님을 꼭 붙들고 복을 주시길 간청합니다.

 

그때 야곱의 이름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의 ‘이스라엘’로 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입니다.

 

벧엘과 얍복강은

야곱의 한평생을 버티는 두 기둥이었습니다.

 

3.

우리의 삶도 야곱에 버금가게

힘들고 고달픈 순간의 연속입니다.

모든 삶이 힘들고, 지금 이 순간이 늘 어려운 법입니다.

 

그때마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났던 벧엘과 얍복강 사건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꿈꾸고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걷는

인생과 신앙의 순례길이길 간절히 바랍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내게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창28:15)

 

하나님

참빛 식구들을 지키시고 항상 함께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5. 18이-메일 목회 서신)

아히도벨

좋은 아침입니다.

 

1.
아침에 함께 묵상하는
사무엘하 본문은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장면입니다.

 

다윗의 인생은
밧세바 사건을 전후로 극명하게 나뉩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에 수도를 삼고
대내외적으로 나라를 견고하게 세웠습니다.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자기 잘못을 덮으려고 충성스러운 장수 우리아까지
전쟁터에서 죽게 하면서 다윗에게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습니다.

 

밧세바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죽고
다윗 가문에 폭력과 죽음이 끊이지 않더니
결국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이어졌습니다.

 

다윗은 죄의 대가를 치루려고 결심한 듯
자신과 가문에 닥친 어려움을 감당합니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지 않았습니다.
비록 밤중에 신하들을 이끌고 피난을 가지만,
차분하게 대처하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웁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도 돋보입니다.

 

2.
다윗이 매우 당황하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다윗이 가장 아끼고 신뢰하는 모사 아히도벨이
압살롬 편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을 때입니다.
다윗이 즉시 하나님을 찾고 기도할 정도로 아히도벨의 배신은 위협적이었습니다.

 

“아히도벨”이라는 이름은
무감각한 형제, 냉철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조언으로 당대 최고의 모사꾼이 되었습니다.
아히도벨의 말은 하나님 말씀으로 생각할 정도의 권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 아히도벨이 압살롬 편에 섰으니
다윗이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이 자기 친구 후새를 예루살렘에 돌려보냅니다.

 

성경은 아히도벨과 후새의 경쟁을 보도합니다.
아히도벨은 기습공격을,
후세는 시간을 갖고 완벽하게 준비할 것을 제안하는데
압살롬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기하게도 후세의 손을 들어 줍니다.
성경은 다윗의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간섭이라고 알려줍니다.

 

자기 계획이 거절된 것을 안 아히도벨이
고향으로 내려가서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다윗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은 사필귀정의 사건이지만,
하나님 버금갈 정도의 훌륭한 책사였음을 고려하면 안타까운 죽음입니다.

 

3.
감정에 휘달리지 않고 냉철하게 상황을 분별하고 판단하던
아히도벨이 압살롬을 따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자기 잇속이 있었거나,
압살롬의 달콤한 제안에 순간적으로 분별력을 잃었을 것입니다.
아히도벨은 자기 능력을 믿은 나머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소홀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끝까지 바른길을 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순간의 선택이 생명을 좌우할 수 있음을
아히도벨을 반면교사 삼고 배웁니다.

 

우리 앞에도 많은 유혹이 있습니다.
분별력을 잃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후회하지 않는 선택,
변치 않는 마음으로 끝까지 하나님의 길을 가기를 원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 (시119:55)

 

하나님
오늘 하루도
믿음 가운데 깨어 있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5. 11이-메일 목회 서신)

자긍심

좋은 아침입니다.

 

1.
여행 중에
숨은 맛집이라고 소문난 곳을 방문했습니다.
자기 이름을 걸고 예쁜 정원까지 꾸몄습니다.
생각보다 가격도 비싸지 않았습니다.

 

주방 너머로 셰프가 보였고
들어서자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메뉴가 많지 않았기에
우리 일행 네 명은 똑같은 메뉴를 주문했습니다.

 

그랬더니 셰프가 정색을 하면서
“네 분이 사이가 좋지 않으신가요?”
“아니면 개성이 없으신가요?”
“호기심도 없고 창의력도 없으신 것 같습니다” 라며 타박합니다.

 

우리는 서로 매우 친한 사이라고 변명하거나
손님을 마구 대하는 듯한 말투에 화를 낼 여유도 없이
셰프의 기세에 눌려서 각자 다른 메뉴를 주문하고 말았습니다.

 

드디어 음식이 나왔습니다.
셰프가 오더니 반찬부터 메인 메뉴까지
재료, 조리방식, 각 메뉴의 특징까지 상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고급 식당에서 셰프의 안내를 받는 것에 버금가는 환대였습니다.
마음이 환해지고
우리 앞에 차려진 각각의 요리와
대화를 나누는 듯한 묘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2.
셰프는 자기가 준비한 요리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거칠 것이 없었고 부족한 것 하나도 없이
당당하게 자기 요리를 우리 앞에 내놓은 것입니다.

 

셰프의 설명을 듣고 나니
우리 네 명이 똑같은 음식을 시켰을 때
왜 호기심도 없느냐고 몰아붙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자기 일에 자신감과 자긍심을 갖고 있는 것이 부러웠습니다.

 

모든 일이 쉬운 것은 없습니다.
그래도 이왕 하는 일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일에 자긍심을 갖는 것은 꼭 필요합니다.
그때, 숨어있는 힘까지 발휘되고 호기심을 넘어서 창의력도 생길 것입니다.

 

3.
자신감 넘쳤던 셰프처럼
우리의 자긍심은 퍼져 나갑니다.
더불어 기뻐하게 되고 왠지 모를 힘을 줍니다.

 

오늘 하루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
우리가 하는 일,
가족, 친지, 교회 등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자긍심을 갖고 살아봅시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얼마나 귀한지
예수님께서 우리의 길과 생명과 진리가 되심에
확신과 자부심을 갖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갑시다.

 

우리의 자긍심으로 세상을 밝히고
사람들에게 웃음과 희망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하느니라 (수1:9)

 

하나님,
자긍심을 갖고 그리스도인의 길을 걷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5. 4이-메일 목회 서신)

어떤 지점

좋은 아침입니다.

 

1.
태풍의 눈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태풍의 중심부에 비와 바람이 외벽을 형성하면서
수십 킬로에 이르는 지역에 평온한 상태가 유지되는 현상입니다.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저 같은 사람에게는 신비로운 자연현상으로 보입니다.
어떻게 태풍 한 가운데에 평온하고 맑은 태풍의 눈이 생긴 단 말입니까?

 

그런데 살다 보면
태풍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네 인생길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안개가 끼인 것처럼 앞길이 뿌옇게 보일 때가 많습니다.
누구나 정답이 없는 인생길을 걷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지점이나 어느 순간에
앞길이 훤히 보이거나, 문제들을 해결한 묘수가 떠오르거나
자신감과 확신이 생깁니다.
어려움 속에 있으면서도
태풍의 눈처럼 평안과 소망을 느낍니다.

 

염려와 불안이 밀려옵니다.
실제로 두려운 일이 닥쳤습니다.
도저히 마음의 평안을 누리기 힘듭니다.
그런데 어떤 순간, 어떤 지점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안이 임합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맛보는 순간입니다.

 

2.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늘 맑은 것은 아닙니다.
365일 24시간 확신 가운데 사는 것도 아닙니다.
평소에 믿고 있던 것들에 의심이 생기고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 때가 있습니다.

 

주기도문에서 배운 것으로 설명하면
시험에 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길을 가는 우리에게
시험에 드는 일은 언제나 발생합니다.

 

그런데 어떤 지점 또는 어떤 순간에는
의심의 구름이 걷히고
모든 것이 다 믿어지면서
영적인 눈이 활짝 뜨인 것을 경험합니다. 거침이 없습니다.

 

이처럼 크고 작은 깨달음의 순간을 경험할 때마다
신앙이 한 계단 한 계단 도약합니다.

 

3.
이 모든 순간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지점입니다.
미래에 펼쳐질 일을 앞당겨서 경험하는 신비로움입니다.
어려움 한 가운데서 하늘의 평안을 맛보는 지점입니다.
좀처럼 믿기 어려운 신앙의 장애물이 사라지는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을 맛보면서
우리는 다시 일어나 주어진 인생길을 갑니다.
우리 삶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지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이
주님 안에서 그 날, 그 순간, 그 지점이길 원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하나님,
빼앗지 못할 평안, 확신, 자신감
넘치는 사랑과 소망을 맛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4. 27이-메일 목회 서신)

종결자

좋은 아침입니다.

 

1.
저는 한국의 1호선 경인선 전철에
얽힌 추억이 많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1974년에 경인선이 개통되었는데
고등학교 시절인 1978년부터 이용해서
대학과 직장 모두 20년 동안1호선 전철을 탔으니 말입니다.

 

제가 다니는 구간의 역 이름은 물론
각 역까지 걸리는 시간도 외우고,
혹시나 갈아탈 때 좋은 탑승 위치,
멀리 갈 때는 어디서 자리가 나는지까지 꽤 차고 있었습니다.

 

당시 출퇴근 시간에는 사람들이 정말 많아서
직장에 가면 와이셔츠가 땀으로 젖고 구겨질 때도 많았습니다.
지옥철이라는 말이 그냥 생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2.
한국에 올 때마다
여전히 1호선 전철을 이용합니다.

 

대한민국이 모든 면에서 발전했지만,
전철과 지하철도 눈부시게 발전했습니다.
서울 시내 어디든 땅을 파고들어 가면 지하철이 나올 듯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리바리,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목적지에 도착하는 이방인이지만
전철이나 지하철을 탈 때마다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정말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특별한 국가인 것 같습니다.

 

3.
<지하철 종결자>라는 앱을 설치했습니다.
출발지와 도착지를 입력하고
출발하고 싶은 시간 또는 도착하는 시간을 알려주면
정확한 정보를 알려주는 앱입니다.
환승할 때 몇 번째 칸에 타야 하는지까지 알려줍니다.

 

“종결자”가 무슨 뜻이냐고
chatGPT에 물으니 다음과 같이 답해주었습니다:
“종결자는 어떤 일을 끝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어떤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람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종결자 앞에 수식어를 붙이면
특정 분야에서 끝을 본 사람이거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람이 됩니다.

 

<성경 종결자> 성경을 모두 마스터한 사람
또는 성경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람.
<사랑 종결자> 사랑에 목숨을 걸고 끝을 본 사람
사랑이라면 어떤 문제도 해결할 줄 알고
사랑을 세상에 펼쳐 보이는 사람.

 

종결자라는 말은
교만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단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지하철 종결자>라는 앱을 사용해 보니
교만보다는 섬김에 무게가 실립니다.
지하철을 이용하는 승객들에게 최고의 편의를 제공하는
말 그대로 종결자이기 때문입니다.

 

4.
누군가에게 종결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의
정보와 섬김,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섬김의 끝, 사랑의 끝, 하고 있는 일의 끝,
신앙의 끝에 이르는 종결자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죽음까지 이기신 최고의 종결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우리 역시 그 길을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전도서 7장 8절)

 

하나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걷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4. 20 이-메일 목회 서신)

우리

좋은 아침입니다.

 

1.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친근한 용어가 들립니다.

 

“우리 비행기는…”
이라고 시작하는 멘트인데
주기도문 첫 번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서 우리가 생각났습니다.

 

“우리”라는 말은 마음을 안심시켜줍니다.
함께 간다는 뜻입니다.
누구도 배제하거나 따돌리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한국행 비행기 안에는
여러 사람이 타고 있습니다.
기껏해야 옆 사람과 인사를 나눌 정도인데
그것도 혼자 여행할 때나 그렇지
대개는 함께 가는 가족이나 일행과만 소통합니다.

 

그런데도
비행기 승무원은 “우리 비행기”라고 했습니다.
목적지가 같으니 우리입니다.
비행기라는 큰 캡슐에 몸을 맡긴 사람들이니 우리입니다.

 

2.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 (our Father)”라고 부르셨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말 그대로 우리를 실천했습니다.
세상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믿었으니 그리스도인들끼리
똘똘 뭉쳐서 우리 공동체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재산까지 공유했고
어려운 교우들을 돕고
예수님 안에서 남녀노소는 물론 신분까지 초월하는
“우리”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이 부러울 때도 있지만,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이 그때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는
유무상통하는 공동체라기보다
한계를 가진 우리 공동체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3.
우리 교회는 다양함을 존중합니다.
다양함 속에서 서로의 공감대를 형성해 가고
우리라는 공동체를 세워가는 것이지요.

 

유니폼을 입듯이 한 가지 색깔을 내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것들, 정말 중요한 것에서
“우리”를 찾고 그것을 기초로 공동체를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닮으려는
목적이 같습니다.
천로역정의 크리스천처럼
하나님 나라라는 목적지도 같습니다.

 

주일마다 같은 공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니
“우리”임에 틀림없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있는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 공동체는 서로를 많이 알고 친밀합니다.
그래도 부족한 것이 있기에 혹시라도
외롭거나 배제되는 참빛 식구들이 없도록 서로 챙겨야 합니다.
“우리”라는 말을 쓰는 것이 부끄럽지 않도록…

 

하늘위에서
참빛 식구들을 눈에 그리며 기도하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예수님의 기도가 실감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넘어서 ‘우리’ 하나님이 되신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시편 147:5)

하나님,
같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
참빛 식구들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4. 13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