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지난 번 한국 방문길에 보고 싶은 책들을 구입해 왔습니다. 인터넷 서점을 통해서 관심 있는 분야의 책들을 주문하다가<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철학적 이유>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목만 보고 얼른 카트에 담았습니다. 충동구매를 한 셈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철학적 이유!” 기대를 갖고 책의 목차를 살폈건만 찾고자 하는 내용은 한 장(chapter)뿐이었고 나머지는 일반적인 통념들을 철학적으로(?) 뒤 짚어보는 식입니다. 기대했던 내용이 많지 않아서 조금은 실망했지만 흥미로운 내용들도 꽤 있었습니다.

그 책에서는 독일어 <샤덴프로이데(Shadenfreude)>를 소개합니다. 샤덴프로이데는 “남의 불행을 보고 고소하다고 느끼는 심술궂은 마음”을 뜻합니다. 남 잘되는 꼴을 보지 못하는 못된 마음씨입니다. 샤덴프로이데를 설명하는 짧은 예가 나옵니다. 고급 양복을 입고 빙글빙글 지팡이를 돌리면서 산책을 하는 신사가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하늘을 날던 비둘기가 실례한 것이 그만 신사의 고급 양복 위에 떨어집니다. 그 순간을 목격한 사람들은 대개 키득거리면서 웃는답니다.신사가 잘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단지 운이 없어서 그런 것인데도 사람들은 고소해 한다는 것이지요.

위키피디아에서 샤덴프로이데를 검색해 보니 흥미진진한 내용들이 더 많이 있었습니다. 여성들보다 남성들에게서 샤덴프로이데가 심하게 나타난답니다. 남성들이 성취지향적이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자아 존중감이 낮은 사람일수록 남의 불행에 고소한 맛을 더 많이 느낀답니다. 국가간의 운동경기에서도 샤덴프로이데가 작동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이 시합에서 이기면 괜히 속이 쓰립니다. 반면에 우리 팀과 상관이 없는데도 일본이 지면 고소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제 36년의 잔재일 것입니다.

샤덴프로이데가 남의 불행을 보고 기뻐하는 것이라면, 우리말 속담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남의 성공을 놓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작 중요한 말은 ‘사촌’입니다.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이 땅을 사면 전혀 배가 아프지 않습니다. 빌 게이츠가 미국 전체를 산다고 해도 배가 아프기는커녕 그를 존경할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가까운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살살 아파옵니다. 경쟁상대로 여겼던 사촌이 땅을 샀다는 소식에 그 놈의 질투심이 발동한 것입니다. 가까운 사촌보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뛰어나야 한다는 얄궂은 자존심 일 수도 있습니다.

한번만 깊이 생각해 보면, 고급 양복을 버린 신사의 불운을 보고 웃기보다 그에게 다가가서 손수건을 내밀 수도 있습니다. 그런 불행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사촌이 땅을 샀다면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아량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들도 어려울 때 누군가 도움을 줄 것이고, 좋은 일이 있을 때는 누군가 다가와서 자기 일처럼 축하해 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점점 각박해져 갑니다. 어려움을 함께 나누거나 좋은 일에 진심으로 기뻐해 줄 이웃을 찾아보기 힘들어서 마음이 씁쓸합니다. 가깝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로부터 크게 실망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들 자신이 따뜻하고 넓은 마음으로 이웃에게 먼저 다가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솔직히 쉽지 않아서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15)는 성경 말씀이 샤덴프로이데는 물론 사촌이 땅을 사더라도 그대로 실천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012년 5월 25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고향의 봄

9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가기 전부터 여러 분들이 한국에 가면 많은 것이 변화되었을 것이라고 귀띔을 해 주셨기에 마음의 준비를 충분히 하고 아내와 함께 고국 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오랜만의 고국방문에 설렜던 제 마음을 시기했는지 열두 시간의 비행시간 내내 기류가 좋지 않아서 비행기가 많이 흔들렸습니다. 옆에 앉아 있던 아내는 비행기 멀미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무사히 인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기분 좋게 공항을 빠져 나와서 가족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올해는 윤달이 끼어서 봄이 늦게 왔답니다. 이제야 개나리가 핀다는 누님의 얘기를 들으면서 들판을 보니 여전히 겨울빛이었습니다. 4월의 생동감 넘치는 고국의 자연을 머리에 그리면서 왔는데 조금은 실망스러웠습니다. 공항을 빠져 나오는 길가에 전에 없던 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것을 보면서 이곳이 대한민국임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방문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그리운 친지들과의 만남이었습니다. 그 동안 파킨스씨병을 앓아오신 장모님은 많이 수척해 지셨고 걸음걸이도 힘겨우십니다. 아내는 장모님을 뵙자마자 눈물을 닦습니다. 누님과 매형들의 얼굴에도 주름살이 깊이 파여있습니다. 조카들도 많이 장성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삼촌을 맞으러 왔습니다.미국에 간 이래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던 조카는 어느덧 오십이 된 삼촌이 늙어 보인다고 안타까워합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가족의 정입니다.

그 동안 하늘나라로 가신 부모님과 장인 어른 그리고 큰 누님은 성묘를 통해서 만나야 했습니다. 고즈넉이 봄볕이 드리운 선산에 누워계신 부모님께서는 사랑하는 막내가 찾아왔음에도 아무런 응답이 없으셨습니다. 불효자의 마음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래도 하늘나라에서 내려다보시면서 기뻐하실 부모님의 모습을 떠올리니 조금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부모님께서 생전에 사시던 아파트를 가보았습니다. 부모님의 체취가 여기저기서 느껴집니다. 살아생전 부모님의 모습이 눈 앞에 떠오르고 그리움이 밀려와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꽤 오랜만에 친지들을 만났습니다. 고향친구 삼총사를 만나서 복 요리를 코스로 즐겼습니다. 군대시절 신우회 활동을 함께 했던 옛 전우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그랬듯이 큰 힘을 주었습니다. 선교단체를 함께 섬겼던 후배들과도 오랜만에 호형호제하면서 회포를 풀었습니다. 한국에 귀국한 옛 교인들도 한국에서 근사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래 처음 만난 친구들은 중년을 지나서 노년으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미국에 살다 보면 때때로 외로움이 밀려오고 고국의 친지들과 단절된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는데 우리 모두는 마음 속에서 서로를 그리워했고 기도해주고 있었음을 발견했습니다. 모든 만남이 소중함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얘기해 주신대로 한국은 정말 많이 변해있었습니다. 고향마을도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로 북적댑니다. 외곽도로가 많이 생겼다지만 교통체증은 여전합니다. 지하철을 타면 얼굴의 반 이상을 덮은 황사방지용 마스크를 쓰신 아주머니들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모두들 종종 걸음을 걷는 것을 보면서 한국의 삶도 녹록하지 않음을 금새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섞여서 길을 걷고 있는 제 자신이 때때로 이방인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처음 사용해본 교통카드에 익숙해 지고 시차가 적응될 즈음에 샌프란시스코의 파란 하늘과 맑은 공기가 생각납니다. 교회 식구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도 궁금해 집니다. 역시 제가 있을 곳은 샌프란시스코임을 새삼 깨닫는 순간입니다.

이렇게 오랜만의 고향 방문을 끝내고 고국에서의 모든 만남을 마음에 간직한 채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새벽마다 기도해주시는 고국의 가족들이 있기에 저희 네 식구가 편안히 지낼 수 있고 목회도 능히 해 낼 수 있습니다. 친지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지나간 시간은 돌이킬 수 없지만 마음은 얼마든지 돌이킬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모든 만남을 가슴에 품고 그들의 모습을 눈 앞에 그리면서 새벽마다 기도해주고 축복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앞 길에 어떤 만남의 축복을 예비해 놓으셨을지 기대하면서 모든 분들과의 만남을 소중히 가꿔가야겠습니다. (2012. 4. 27 SF한국일보 종교칼럼)

네 개의 손

신약성경에는 네 개의 복음서가 있습니다. 모든 복음서들이 예수님에 대한 말씀들이지만 예수님을 바라보는 관점이 조금씩 달라서 우리들은 네 개의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에 대한 다양하고 풍성한 말씀을 접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개별 복음서에만 나오는 말씀이 있는 반면에 모든 복음서에 중복되어서 나타나는 말씀도 있습니다. 네 개의 복음서에 모두 등장하는 사건 가운데 웬만한 그리스도인들이면 알고 있는 말씀이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내용은 간단합니다. 산에서 말씀을 전하시던 예수님께서 말씀에 주릴 뿐만 아니라 육신적으로 배고팠던 당시의 백성들을 보면서 측은지심이 생기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하시지만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200 데나리온, 성인 남성의 8개월치 봉급에 해당할 정도의 큰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때 어린이 한 명이 자신이 가져온 오병이어, 즉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제자들에게 건네 줍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손에 들고 하늘을 향해서 축사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시지요. 원하는 대로 모두 나눠줍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은 것입니다.

복음서의 말씀을 읽다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 속에 네 개의 손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첫째는, 자신이 갖고 있던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예수님께 드린 어린 아이의 손입니다. 이 아이가 자신의 것을 – 비록 아주 작은 것이지만 –예수님께 드리지 않았다면 오천 명이 배불리 먹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어린아이의 헌신, 자기 것을 내어드리는 희생으로 말미암아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었습니다.  어린아이의 손을 통해서 드려진 오병이어는 예수님의 기적을 경험케 하는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둘째는, 오병이어를 받아 드시고 하늘을 향해서 축사하시는 예수님의 손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가 가져온 도시락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 크고 작은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손에 들려지는 것입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축사하시는 예수님의 손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작은 것을 통해서도 임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셋째는, 떡을 나눠주는 제자들의 손입니다. 처음에 제자들은 인간적으로/세상적으로 계산했습니다. “안 된다”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축사하시고 떡을 나눠주는 일에 참여한 제자들은 “놀라운 기적”을 경험했습니다.신기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세상적이고, 계산적이고, 인간적인 믿음을 회개했을 것입니다.

넷째로, 떡을 받아 먹는 백성들의 손입니다. 이들은 제자들이 나눠주는 떡을 마음껏 먹었습니다 원 없이 먹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에 참여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사실 본문에서 “축사하시다”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유카리스테오”라는 동사인데 여기서 성만찬을 뜻하는 “유카리스트”가 나왔습니다. 떡을 받아 먹는 백성들의 손은 떨렸고, 기뻤고, 그 순간만큼은 그곳에서 하늘나라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정말 보잘것없는 하찮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예수님의 손에 들려졌을 때, 오천 명이 먹고 남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들의 삶이 어떠하든지 예수님의 손에 올려지길 원합니다. 그때 우리들도 기적의 떡을 받아먹은 백성들의 손처럼 예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받는 것에만 익숙하면 안됩니다.떡을 나눠주고 남은 떡을 거두는 제자들의 손이 되어야 합니다. 계산적이고 인간적이었던 자신들의 속셈을 회개하고 결국에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손입니다. 무엇보다 어린아이의 손이 많아야 세상이 밝아집니다. 작은 것을 드리는 손들입니다. 희생하는 손들입니다. 자기보다 먼저 교회와 이웃을 생각하는 손들입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출발점이 되는 귀한 손들입니다. 그때 우리들이 있는 곳이 기쁨이 넘치고 풍성한 나눔이 있는 하나님 나라가 될 것입니다. (2012년 3월 23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지금 이 순간

우리들은 세 가지 시간대를 갖고 살아갑니다. 하나는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과거입니다. 또 하나는 앞으로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것을 바라면서 사는 미래입니다. 마지막 한 가지는 지금 이 순간입니다. 초대교부 어거스틴은 서구사상에 시간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소개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을 시간적 존재로 규정하면서, 현재만이 의미가 있을 뿐, 과거는 현재 속에 기억으로 미래는 현재 속에 기대로 남아 있을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현재도 우리가 쉽게 포착할 수 없습니다. 단지 직관(intuition)을 통해서 현재를 느끼고 현재를 살 수 있을 뿐입니다.

어거스틴이 말한 현재를 사는 직관에 대한 좋은 예를 톨스토이의 “세가지 물음”이라는 단편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옛날에 어떤 황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세가지 물음에 대한 해답만 찾을 수 있다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가 갖고 있던 세 가지 물음은 ‘일을 언제 시작해야 할까’, ‘누구와 함께 일을 해야 할까’, 그리고 ‘어떤 일이 가장 중요할까’였습니다. 여러 사람들의 자문을 구했지만 사람들 마다 의견이 제 각각이었습니다. 흡족한 해답을 얻지 못한 황제는 은둔생활을 하고 있던 자신의 은사를 찾아갑니다. 황제의 은사는 산 속에서 도랑을 파고 있었습니다. 은사에게 자신이 갖고 있던 세가지 물음을 말씀 드리고 그 해답을 구했지만 은사는 도랑만 파고 있을 뿐 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그만 돌아가려는데 연로하신 은사님이 도랑을 파고 계시는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은사의 도랑 파는 일을 돕게 됩니다. 그때 저 멀리서 한 청년이 피범벅이 되어서 뛰어왔습니다. 은사와 황제는 그 청년을 정성껏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청년은 황제가 산으로 떠난다는 말을 듣고 황제를 죽이기 위해서 중간에 매복해 있던 적군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황제의 경호원들에게 발각이 되어서 경호원들이 쏜 화살에 상처를 입고 피신해 온 것입니다. 청년은 자신을 치료해준 사람이 황제인 것을 알고는 백배 사죄하면서 용서를 빌고 서로 화해합니다.

이제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가려던 황제는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은사께 세 가지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합니다. 그때 은사가 이런 말을 합니다. “자네가 나를 돕지 않고 일찍 돌아갔으면 저 청년에게 살해를 당했을 것이니 도랑을 파고 있을 때가 가장 좋은 때였고, 자네가 나를 도운 것을 보니 그 순간에 내가 자네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고, 저 청년을 치료해 주지 않았으면 청년도 죽고 자네와 화해도 하지 못했을 테니 저 청년을 치료해 준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지.”

톨스토이의 단편이 주는 교훈은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우리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고, 그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지혜입니다. 톨스토이 역시 어거스틴처럼 우리는 현재만을 다룰 수 있고, 지금 이 순간에 가장 중요한 것을 직관적으로 행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가르쳐줍니다.

성경에도 한 어리석은 부자가 나옵니다. 그는 과거에 누구보다 열심히 일을 해서 많은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꿈을 이룬 부자는 창고를 짓고 그곳에 곡식을 저장해 놓고 앞으로 편하게 살기 위해서 미래를 설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날 밤에 그 부자를 데려가십니다.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 못한 부자의 비극을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들은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과거의 아름다운 기억을 추억으로 간직하는 것이나 미래를 찬란하게 설계하는 것도 중요하만, 정작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살고 있느냐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하고 있는 일’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 가장 귀한 일이고 내가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인물(VIP)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모이면 훗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게 될 것이고, 지금 이 순간이 결국에는 희망찬 미래로 인도하는 디딤돌이 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2012년 2월 24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토끼와 거북이 두번째 이야기

지난 달에 제가 쓴 칼럼의 제목이 “토끼와 거북이”였습니다.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고 그만 중간에 잠이 들어버린 토끼는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달려온(?) 거북이에게 경주에서 지고 만다는 이솝 우화였습니다. 우화 속의 토끼는 자만심은 물론 게으른 잠꾸러기로 좋지 않게 묘사되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를 새로 각색한 글을 발견했습니다.

“옛날에 거북이를 사랑하는 토끼가 있었답니다. 토끼는 속으로만 거북이를 사랑했기에 아무도 토끼가 거북이를 사랑하는 줄 몰랐고 거북이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토끼에게는 한 가지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거북이가 자기의 느린 걸음을 너무 자학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토끼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토끼는 거북이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거북이에게 말했습니다. ‘거북아! 나랑 달리기 해 보지 않을래?’ 그날 따라 거북이는 투지가 생겼습니다. 질 때 지더라도 토끼와 같이 달려봐야지 하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드디어 경주가 시작되었습니다. 순식간에 토끼는 저만치 앞서갔습니다. 그러면서도 뒤따라오는 거북이만 생각했습니다. ‘포기하면 어떡하지! 중간쯤 가서 기다려주자!” 그런데 그냥 눈을 뜨고 거북이를 쳐다보면서 기다리면 거북이가 자존심이 상할까봐 토끼는 길에 누워서 자는 척을 했습니다. 거북이가 가까이 와서 자기를 깨워주고 같이 나란히 언덕으로 올라가는 아름다운 꿈을 꾸면서 말입니다. 거북이는 자기 옆을 지나면서도 자기를 깨우지 않았습니다. 결국 거북이가 경주에서 이기게 되었습니다. 경주 후에 동네 동물 식구들과 후세 사람들로부터 거북이는 ‘근면하고 성실하다’는 칭찬을 들었고, 토끼는 ‘교만하고 경솔하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토끼는 남몰래 눈물을 흘리며 그 모든 비난을 감수했습니다. 왜냐하면 거북이의 기쁨이 자신의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각색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솝 우화에 나오는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보다 더 감동적입니다. 사람들은 경주에서 이기는 것에 익숙해 있습니다. 사람들은 승자에게 관심을 가질 뿐, 패자의 마음을 헤아릴 여유가 없습니다. 스스로 양보하거나 은밀히 선행을 행한 경우라도 세상은 그것을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주인공이 되고 싶어하고,경쟁에서 이기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런데 위에 소개한 이야기 속의 토끼는 자기가 짝사랑하는 거북이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서 경주에서 일부러 저 주었습니다. 그래도 거북이가 자는 척하고 있는 자기를 깨워서 함께 경주에 임할 줄 알았는데, 거북이는 자신을 지나쳤습니다.자신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실망스러웠지만 사랑하는 거북이를 위해서 참을 수 있었습니다. 경주에서 이긴 거북이는 친구들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반면에 토끼에게는 교만하고 게으르다는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토끼는 남몰래 눈물을 흘렸지만 사랑하는 거북이를 위해서 이 모든 일을 기쁨으로 감수했습니다.

사랑하는 거북이를 위해서 일부러 경주에서 져 준 토끼에게 연민의 정이 느껴집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도 기쁨으로 감수할 수 있는 토끼의 마음을 갖고 싶어집니다. 요즘 세상은 모두가 일등이 되고 싶어하고, 양보와 손해라는 말은 어리석게 치부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신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조금 다르게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꼭 일등이 되려는 야심과 더 많은 복을 받으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들을 세워주고 양보의 미덕을 발휘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토끼와 같은 마음을 갖고 사는 것이 쉽지 않지만 <사랑>이라는 단어를 마음 깊이 품고 있으면 가능하겠지요. 예수님의 마음을 닮으면 훨씬 쉽겠지요.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지 않고, 이웃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여기는 넉넉한 마음을 주시길 하나님께 기도 드리면서 한 해를 시작해야겠습니다.  (2012년 1월 27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토끼와 거북이

2011년은 토끼해였습니다. 올 한 해를 보내려니 뜬금없이 이솝 우화에 나오는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어느 날 토끼가 거북이를 보고 느림보라고 놀렸습니다. 이 말을 들은 거북이가 토끼에게 도전장을 냈습니다. 토끼는 여유 있게 거북이의 도전을 받아 줍니다. 심판은 여우가 맡았습니다. 여우가 정해준 코스에서 토기와 거북이가 경주를 시작했습니다. 토끼는 빠르게 출발해서 저만치 앞서 갔습니다. 한참을 달린 토끼는 잠시 쉬어가기로 하고 잠시 누웠는데 그만 잠이 들어 버립니다. 거북이는 뒤에서 느릿느릿 기어옵니다. 그리고 잠을 자고 있던 토끼를 지나서 결승점에 먼저 도착했습니다. 한참을 자고 난 토끼가 잠에서 깨어나서 서둘러 결승점에 갔지만 거북이가 승리한 뒤였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토끼는 시간당 56킬로미터(35마일)을 달릴 수 있고, 거북이는 아무리 빨리 기어도 시간당 300미터(328야드)밖에 갈 수 없답니다. 그러니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서 거북이가 이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이솝 우화 속에서는 거북이가 승리합니다. 불가능한 일이 현실이 된 것입니다. 거북이가 갑자기 힘이 생겨서 빨리 달렸거나 축지법을 쓰는 기적이 일어난 것도 아닙니다. 거북이는 평소의 속도대로 기어서 경주에 임했습니다. 문제는 토끼에게 있었습니다. 토끼는 자신의 실력을 과신한 나머지 아니 거북이를 무시해서 중간에 쉬다가 그만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방심하다가 쉽게 이길 수 있는 경주에서 패한 것입니다.

올 한 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들도 토끼처럼 사뿐사뿐 뛰면서 한 해를 살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런데 한 해를 돌아보니 방심하다가 찾아온 기회를 놓친 경우가 꽤 많이 있습니다. 자신의 실력을 과신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을 무시해서 큰 코를 다친 경우도 있습니다. 끝까지 달려가는 것이 중요한데 그만 중간에 잠시 쉰 것이 일을 그르치기도 했습니다. 자신에 대한 쓸데없는 과신과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태도는 인생의 경주에서도 도움이 되지 않음을 이솝 우화는 물론 우리들 인생 경험을 통해서 다시금 깨닫습니다.

학창시절 선생님들께서는 “인생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이니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끝까지 달려가라”는 말씀을 주시곤 했습니다. 젊었을 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이제 50여 년 살다 보니 인생이 마라톤인 것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인생의 승부가 생각보다 금방 나지 않습니다. 조금 빨리 갔다고 자만해도 안되고, 빨리 가는 친구들을 보면서 부러워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길을 자기에게 맞는 속도로 걸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거북이처럼 기어가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결승점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이솝은 토끼와 거북이의 우화를 다음과 같이 마무리하였습니다.: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노력하는 자가 경주에게 이긴다 (Slow and steady wins the race).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는 길목에 서 있습니다. 이쯤 해서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면 아쉬움이 짙게 밀려옵니다. 잠을 자다가 경주에서 진 토끼에게 밀려왔을 아쉬움입니다. “…하지 말걸” 하는 식의 후회들입니다. 로마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였던 세네카는 “인생에서 가장 쓸데없는 것이 후회”라고 했습니다. 후회는 결국 마음을 상하게 할 뿐입니다. 또한 거북이처럼 태생이 느린 것을 두고 자책할 수도 있습니다. 남과 비교해서 느린 것이지 거북이 자신의 발걸음은 결코 느린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만하지 않고 “천천히 꾸준히” 주어진 인생길을 끝까지 걷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계속되는 불경기 속에서 2011년 365일을 살아낸 우리 모두는 승자들입니다. 밀려오는 세파와 어려움 속에서도 올 해의 결승점까지 달려오신 모든 분들께 박수를 보냅니다. (2011년 12월 30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기드온의 에봇

구약성경은 쉽게 읽어지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부분은 무척 재미있고, 지루한 말씀은 세상에 이렇게 재미없는 책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성경을 취사선택해서 읽곤 합니다. 구약성경의 일관된 주제는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 (God’s endless love)”입니다. 구약 성경의 첫번째인 창세기 3장부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엇박자가 시작됩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는 하나님의 음성은 구약 내내 메아리 칩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 자리를 엿보고 때마다 변명하고 핑계거리를 찾습니다. 어쩌면 그리도 하나님 속을 푹푹 썩이던지요!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특별히 구약성경의 사사시대는 어지럽기 그지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기드온이라는 사사가 있었습니다. 기드온은 당시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미디안 족속을 몰아내고 나라를 구합니다. 그때 백성들이 “장군께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대를 이어 아들과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요청합니다. 무지몽매한 백성들은 기드온의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임한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늘 그렇습니다. 군중은 눈앞의 이익을 추구합니다. 행간을 읽지 못할 만큼 충동적입니다. 기드온의 대답은 현명합니다: “나는 여러분을 다스리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아들도 여러분을 다스리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주님께서 여러분을 다스리실 것입니다”.

그런데 곧바로 문제가 생깁니다. “여러분에게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적군에게서 탈취한 전리품 가운데 귀고리 하나씩만 나에게 주십시오.” 삼백 명을 이끌고 미디안을 무찌른 하나님의 용사가 백성들에게 귀고리 하나씩만 달라는 쩨쩨한 요청을 합니다. 그것도 적군에게 빼앗은 전리품을 달라는 것이니 신앙의 지도자로서 해서는 안될 말을 한 것입니다. 백성들은 기드온의 청을 들어줍니다. 기드온은 겉옷 위에 백성들이 던진 귀고리로 에봇을 만듭니다. 에봇은 구약시대에 대제사장들이 입던 성스런 예복입니다. 기드온은 에봇을 자신의 고향에 둡니다. 자신의 고향을 성지로 만드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백성들은 민족을 구한 전쟁영웅 기드온이 만들어 놓은 근사한 에봇을 “음란하게” 섬겼습니다. 여기서 “음란하다” 라는 말에는 (매우 추잡한) 성적인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기드온 마음에 슬며시 들어온 욕심이 백성들까지 죄의 길로 빠지게 한 셈입니다. “그것이 기드온과 그 집안에 올가미가 되었다”라는 말씀으로 에봇 사건은 끝을 맺습니다.

기드온이나 그 시대의 백성들만이 아닙니다. 우리들도 사사로이 자신을 높이고, 눈에 보이는 것들을 쫓아 다닙니다. 그래서 신비주의와 충동적인 신앙이 위험한 것입니다. “적어도 저 사람보다는 나아야지,” “내 수입이 저 사람보다 적을 수는 없지.” “내 교회 아니 내 가정에만 하나님께서 계셨으면…”등등 끊임없는 경쟁심과 욕심이 속에서 생겨납니다. 전쟁영웅이었던 기드온이 쩨쩨하게 귀고리를 가지고 에봇을 만들어서 자기 땅에 모셔 두었듯이, 우리들도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고 자기 영역 안에 가두어 두려는 죄를 짓습니다. 물론 그릇된 신앙입니다.

올 해도 이제 달력이 한 장 남았습니다. 한 해를 마감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사람이나 에봇에 한눈이 팔려 있지 않았는지, “하나님께서 다스리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말은 번드르하게 했지만 그 속에 슬쩍 자신의 생각을 끼워 넣지 않았는지, 혹시라도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만들어 놓은 에봇은 없는지 –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는 신앙의 길을 가기 원합니다. 마지막 한달 만이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지 않고 하나님의 기쁨조로 살기 원합니다.

(2011년 11월 25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거룩한 독서

우리가 사는 베이 지역은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하지 않지만 여기저기 떨어져서 뒹구는 낙옆을 보면서 어느덧 늦가을로 접어 들었음을 느낍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불립니다. 가을이 되면 날씨가 선선해져서 책을 읽기 좋고 또한 수확의 계절 가을에 책 읽기를 통해서 마음의 수확까지 거두라는 뜻에서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적에 책을 접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시골에서 자랐고 부모님께서 연로하셨기에 저를 위해서 책을 사 주실 여유가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초등학교 다니던 70년대에는 자유교양경시대회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매년 주최측에서 선정한 책을 읽고 군이나 도대회에 나가서 독후감을 비롯한 독서 시험을 치는 대회였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시골 학교의 대표가 되어서 선정된 도서들을 샅샅이 읽는 훈련을 할 수 있었습니다. 대회에 나가서 시험을 치러야 했기에 방과후에는 학교에 남아서 선정된 도서들의 내용을 정리하고 선생님께서 미리 내주신 예상 문제를 풀곤 했습니다. 어린 시절 우연찮게 독서훈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었는지 대학에서는 영문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지금도 책을 읽는 시간이 가장 행복합니다. 그러고 보니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맞는 듯 합니다.

여러 권의 책을 빨리 읽는 다독(多讀)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다독을 통해서 많은 지식을 두루 섭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책 읽기의 정석은 뭐니 뭐니 해도 정독(精讀)에 있습니다. 줄을 치고 여백에 메모를 해 가면서 한 줄 한 줄 치밀하게 읽어가는 정독은 책 속에 빠져드는 독서 삼매경의 기쁨을 만끽 할 수 있게 만듭니다. 정독에 해당하는 적절한 영어 표현을 찾는다면 “close reading(자세히 읽기)”일 것입니다. 책과의 간격을 최대한 줄이고 책 속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독서를 즐기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도 한 단어, 한 표현, 한 구절까지 놓치지 않고 자세히 정독해야 합니다. 그때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임을 깨닫게 됩니다. 교회사를 통해 보면 이미 중세시대부터 성경을 자세히 읽는 거룩한 독서법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렉치오 디비나”라고 불리는 독서법인데 여기에는 적어도 네 가지 단계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하나님 말씀을 차근차근 읽는 것입니다 (렉치오). 성경을 꼼꼼히 읽어 내려가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연애편지라고 생각하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읽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읽은 말씀을 마음으로 곱씹는 묵상 (메디타티오)입니다. 성경 읽기에 묵상이 빠지면 마치 한 귀로 들은 것이 한 귀로 나가듯이 읽은 말씀이 어디론가 빠져나갑니다.묵상은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는 작업입니다. 말씀을 마음 속에 꼭 붙들어놓으려는 노력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읽고 묵상한 말씀을 붙들고 입술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라티오).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길 기도하는 것입니다.말씀을 갖고 자신은 물론 이웃과 세상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말씀을 받았으니 이제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단계는 말씀 안에서 쉼을 얻는 안식입니다 (콘템플라티오). 말씀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 동안 자신이 말씀을 읽었다면 이제부터는 말씀이 자신을 읽도록 말씀 앞에 자신을 내어놓는 것입니다.집착이나 이기심을 내려놓고 온전히 말씀 앞에서 평온함을 경험하는 시간입니다.

어지럽고 복잡한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룩한 독서는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단독자로 서서 자신을 깊이 돌아보고 말씀 속에서 힘과 지혜를 얻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말씀 안에서 쉼을 얻는 귀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내어놓고, 말씀의 깊이에 푹- 빠져 드는 거룩한 독서를 통해서 우리의 내면이 부요해지고 하루 하루의 삶에 말씀의 은혜가 넘치길 원합니다. (2011년 10월 28일 SF한국일보 칼럼)

거울속에 비친 모습

요즘 한국에서는 동안(童顔)이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얼굴이나 모습이 나이에 비해서 현저하게 젊어 보일 때 그것을 두고 동안이라고 합니다. 동안을 유지하기 위해서 운동은 물론 심한 경우는 성형수술까지 불사한답니다. 시간이 지나가면 동안은 노안(老眼)으로 바뀌는 것이 순리일 찐대 지나치게 외모에 집착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키가 작아서인지 나이에 비해서 젊어 보인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가까이서 보면 얼굴에 주름도 있고 눈가에 다크써클도 생겼지만, 멀리서 얼핏 보면 대학교 4학년 아들을 둔 50세 중년 남성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저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얼마 전까지10년은 젊은 30대 후반으로 보았고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저를 아직도 젊은 목사로 생각하시는 것을 보면 제 판단이 아주 틀린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동안을 자랑할 날이 그리 멀지 않음을 느낍니다. 염색을 하지 않으면 머리는 거의 백발입니다. 사진은 거짓말을 시키지 않는다고 어르신들이 말씀하시는데, 저 역시 사진에 나온 제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중년 아니 이제 50대에 접어든 노년의 모습도 보입니다. 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 고등학교 동창들의 인터넷 까페에 들어가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까까머리에 검정색 교복을 입고 미소년 같았던 친구들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조금 심하게 말하면 늙수그레한 남자들이 등산을 가서 사진을 찍어서 인터넷에 올렸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때 그 시절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입니다. 30년 동안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의 얼굴이 생소할 만큼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저도 슬쩍 일어나서 거울을 봅니다. 동안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도 인터넷에 올라온 고등학교 동창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친구들도 나를 보면 똑같은 생각을 하겠지’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쓸쓸해 집니다. 가는 세월을 막을 수 없음을 다시 한번 느끼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예전의 부모님들이 그토록 사진 찍기를 싫어하셨고 거울 앞에서 심난한 표정을 지으셨던 것 같습니다.

우리네 인생은 이렇게 지나갑니다. 한 세대가 지나면 다음 세대가 오고 세상은 변하지 않지만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자꾸만 지나가게 마련입니다. 이것을 익히 간파한 구약 성경의 전도서에서는 인생살이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지나간 세대는 잊혀지고 앞으로 올 세대도 그 다음 세대가 기억해 주지 않을 것이다”(전도서1:1). 그러니 너무 세상살이에 집착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물 흘러가듯이 세상의 순리에 순응하면서 자연스럽게 살아가라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얼굴이 변해가는 것은 정상입니다. 동안만 좋은 것이 아니라 노안 속에도 매력이 있습니다. 그 동안 살아온 인생 경험이 얼굴에 묻어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자리까지 꿋꿋하게 여러 가지 풍상을 겪으면서 견디고 살아온 것만도 대단한 것입니다. 물론 신앙인이라면, 이것이 우리 힘으로 된 것이 아님을 잘 압니다. 하나님께서 순간순간 도와주셨고 언제나 변함없이 우리의 손을 붙잡고 동행해 주셨기에 가능했던 지난 날들입니다. 그것을 알기에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 낼 수 있습니다. 거기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우리들의 얼굴 속에는 앞으로 펼쳐질 인생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깃들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비록 동안이 아니어도 행복한 인생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이제 다시 한번 거울 앞에 서서 행복한 표정으로 웃어봅니다. 멋진 모습입니다. 세상에 똑같은 얼굴을 가진 사람이 한 명도 없으니 매우 독창적인 얼굴입니다. 웃는 모습 속에 희망이 보입니다. 남은 인생을 한결같이 인도해 주실 하나님을 향해서 저절로 기도가 나옵니다: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시편4:6). 아멘.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2011.9.30)

조급증 벗어나기

2주 전쯤에 교단 목회자들의 수련회가 있어서 몬트레이에 다녀올 때였습니다. 저희 부부는 사정이 있어서 수련회 첫날만 참석하고 밤늦게 돌아와야 했습니다. 자동차에 타서 계기판을 보니 개스가 한 눈금 남짓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원래 미리 미리 개스를 넣는 편인데 그 날은 무심코 집으로 향했습니다.

아내와 둘이 교회에 대한 이야기,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심야 데이트를 즐기고 있을 즈음, 갑자기 개스 경고등이 켜졌습니다. 그래도 20여 마일은 문제없다는 생각을 했는데, 눈금이 생각보다 아주 빨리 떨어집니다. 앞으로 몇 마일을 더 갈 수 있는 지 계기판을 점검해 보니 7마일 가면 개스가 모두 소진된답니다. 깜짝 놀라서 고속도로 출구를 찾았지만 좀처럼 나오질 않았습니다. 280 하이웨이는 자주 다니던 곳인데 스탠포드를 지나서부터 깜깜한 산길이 연속인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결국 1마일 남았다는 표시등이 들어왔습니다. 등줄기에 땀이 흐릅니다. 아내는 옆에서 기도를 합니다. 여행길도 아니고 산길도 아니고 우리 동네에서 그것도 밤 12시에 개스가 떨어지면 이거 무슨 창피입니까? 앞에 92번 하이웨이 출구가 보입니다. 개스를 아끼려고 기아를 중립에 넣고 내리막길을 따라 갔습니다. 주유소가 보였습니다. 얼마나 반갑고 기뻤는지요! 기름을 넣고 나니 제 배가 다 부른 듯 했습니다. 이제는 대륙횡단도 할 수 있을 만큼 기분이 홀가분했습니다.

개스를 넣고 집으로 향하는데 슬그머니 부끄러운 생각이 듭니다. 1마일 남았어도 그곳에 주유소가 있었는데 너무 초조해한 것 같았습니다. 개스가 떨어지면 AAA를 부르면 되고, 아내가 옆에서 열심히 기도했으니 하나님이 창피를 당하지 않도록 우리 길을 인도하실 텐데 지나치게 안달을 떨었던 것 같았습니다. 산골도 아니고 도시에서 개스가 떨어졌다고 큰 일이 생길 것도 아니었습니다. 갑자기 위기상황이 닥쳐오자 조급증이 발동했던 것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다급한 상황 앞에서 조급해 지기 마련입니다. 구약성경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물을 찾았습니다. 광야 길을 걷다 보면 갈증이 났을 것입니다. 또 언제 오아시스가 나올지 모르기에 더욱 초조했을 것입니다. 기껏 샘을 만났는데 물이 써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합니다. 모세가 기도하고 나뭇잎을 물에 던지니 쓴 물이 단 물로 변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갈증을 해소하고 다시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이것이 왠 일입니까? 그들 앞에 엘림이라고 하는 커다란 오아시스가 나타났습니다. 눈 앞에 오아시스가 있었는데, 조급한 마음에 참지 못하고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했던 것입니다.

개스 경고등에 1마일이 나왔지만 개스가 떨어지기 전에 주유소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알았다면 느긋하게 그 위기의 순간을 도리어 즐겼을 것입니다. 조금만 더 가면 열 두 개의 샘물이 있는 오아시스가 있는 것을 알았다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중간에 모세와 하나님을 향해서 불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앞을 훤-하게 내다보는 투시력은 없습니다. 그래서 조급해 하고 안달하면서 살게 마련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눈을 하나님께로 돌려봅시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여호와 이레 (직역하면, “여호와께서 앞을 내다보신다”)라고 소개합니다. 우리들의 앞을 내다보시고, 우리보다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이레 하나님을 믿는다면 개스가 떨어져가더라도, 갈증에 쓰러질 것 같더라도 조급해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보다 앞서 가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생길을 가다 보면 끝이 없는 터널을 지나는 것처럼 힘들 때가 있습니다. 어려움이 연속해서 밀려오고, 이대로 추락하는 것이 아닌지 초조한 순간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보다 앞서가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너무 조급해 하거나 목적지를 눈 앞에 두고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인생의 오아시스를 향해서 나가기 원합니다.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엘림을 예비해 놓으셨음을 믿고 침착하고 꿋꿋하게 앞으로 나가는 것이 조급증을 벗어나는 비결입니다. (2011년 8월 26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