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인원 인생

2007년 휴대전화 외판원이었던 폴포츠라는 사람이 영국의 한 TV 장기자랑 프로그램에서 노래를 부른 것이 계기되어 일약 세계적인 스타가 됩니다. 그로부터 2년 후, 같은 프로그램에 수잔보일이라는 마흔일곱 살 먹은 아주머니가 나와서 또 한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녀는 가수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열 두 살 때부터 노래연습을 했답니다. 그녀는 누가 보아도 중년이 넘어 보이는 모습으로 무대에 오릅니다. 그리고 “나는 꿈을 꿉니다 (I dream a dream)”는 제목의 노래를 불러서 청중들을 깜짝 놀래킵니다.

지난 6월 위의 두 사람을 무색하게 만드는 인물이 한국에 등장했습니다. 영국 TV와 비슷한 아마추어 장기자랑 프로그램에 최성봉이라는 스물 두 살의 청년이 나온 것입니다. 특기가 별로 없을 것 같은 평범한 청년이 무대에 섰습니다. 유명 탤런트 출신의 심사위원이 신청서류에 가족사항이 없는 것을 두고 질문합니다. 청년은 부모의 이혼으로 세 살 때 고아원에 맡겨졌고 다섯 살 때는 구타가 싫어서 고아원에서 도망쳐 나왔다고 대답합니다. 그로부터 10여 년 동안 껌을 팔면서 거리의 아이로 살았답니다.그러다가 시장에서 떡볶이를 파는 한 아주머니의 조언을 따라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검정고시로 합격 합니다.  나이트 클럽에서 가곡을 불렀던 성악가의 도움으로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해서 성악가의 꿈을 키워오다가 TV 프로그램에 나온 것입니다 (한국일보 본국지 7월 23일 기사참조).

힘겨운 인생길을 걸어온 그 청년이 처음으로 무대에 서서 “나의 환상 속으로 (넬라 판타지)”를 노래합니다. 그의 목소리가 무대에 울려 퍼지면서 심사위원들은 물론 청중들도 깜짝 놀랍니다. 영국에서 폴포츠와 수잔보일이 노래할 때 청중들의 놀라는 모습과 똑같습니다. 심사위원들의 눈에 눈물이 고입니다. 청년은 약간의 감정 변화가 있을 뿐 끝까지 담담함을 읽지 않습니다. 그 동안 하도 눈물을 많이 흘려서 눈물샘이 마른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 만큼 꽃다운 청년의 인생길이 험악했다는 표시였겠지요. 유트브로 최성봉이라는 청년이 노래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었습니다.

위에 소개한 세 사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특별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동시에 자신의 장기인 노래를 누구보다 열심히 연습했고 청중들에게 예상치 못한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평생에 꿈꾸던 무대에 섰고 그들의 인생은 단숨에 역전을 경험하게 됩니다. 최성봉 청년의 이야기는 소셜 네트워크인 유트브의 힘을 타고 전세계로 퍼져서 미국의 CNN에서 그를 취재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골프로 치면 거리에서 껌을 팔던 한 청년이 단번에 인생의 홀인원을 기록한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아침에 눈을 뜨니 유명해졌다는 시인 바이런의 말처럼 기적 같은 인생의 홀인원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아니 우리들은 모두 인생의 홀인원을 꿈꾸면서 살아가는 지도 모릅니다. 지금보다 비교할 수 없는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연히 찾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휴대전화를 파는 외판원으로 또한 마흔일곱의 펑퍼짐한 몸매를 하고도 가수의 꿈을 놓지 않았던 폴포츠와 수잔보일, 나이트클럽에서 껌과 박카스를 팔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아름답게 갈고 닦은 최성봉 – 이들은 음지에서 눈물로 연습했을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가꾸었을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자신들에게 찾아온 한 번의 기회에서 그 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모두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아니 이들만큼 노래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삶과 노래가 하나가 되어서 우리 모두에게 뜨거운 감동을 준 것입니다.

인생의 홀인원이 우연의 산물이 아님을 이들을 통해서 배웁니다. 솔직히 한번에 우연히 찾아온 홀인원이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자신의 목표를 향해서 끊임없이 연습하고 꿈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 곧 인생의 홀인원입니다. 물론 우리네 같은 범인들은 홀인원을 꿈꿀 여유도 없습니다. 하지만 매일 같이 주어진 삶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알고 최선을 다해서 살아갈 때 우리네 인생도 홀인원만큼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TV에 나올 만큼 대단한 일이 아니어도 매일 매일의 삶이 노래가 되고 그것이 자신과 이웃의 마음 속에 판타지가 되어 울려 퍼진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값진 인생의 홀인원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2011년 7월 29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익숙함의 잔재들

저는 종종 미국에 처음 오던 때를 회상하곤 합니다. 13년전 뉴욕의 케네디 공항에 내렸을 때는 무척 더운 한 여름이었습니다.네 식구가 이민가방 일곱 개를 카트에 밀면서 꿰제재한 모습으로 공항을 빠져 나왔었습니다. 처음 미국 생활은 모든 것이 새로웠습니다. 학교 기숙사 앞에 있던 아름드리 나무는 다람쥐 가족의 보금자리였습니다. 30분만 운전해서 가면 대서양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이것저것 세심하게 관찰하길 좋아하는 저에게 미국에 사는 다양한 사람들의 옷차림과 표정, 행동 그리고 말투까지 신기하게 다가왔습니다. 프리웨이에서 한국 차를 보면 온 식구가 “저기 한국 차가 있다”고 소리치면서 애국심을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은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장관이었습니다. 아침에 창문 틈으로 들리는 새들의 노랫소리와 함께 눈을 뜨는 것도 기쁨이었습니다. 이처럼 미국에서의 첫 경험은 일종의 희열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새롭게 다가왔던 것들이 점점 익숙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시사철 피어있는 길가의 들꽃 앞에 한참 동안 멈춰 서서 물끄러미 쳐다보던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늘 거기에 있었다는 듯이 눈길 한번 주고 지나갑니다. 프리웨이를 달리면서 “야- 미국이 참 넓다”라고 감탄사를 연발하던 것과 달리 지금은 행여나 교통 티켓을 받을 까 염려하면서 속도계를 점검합니다. 미국의 신선한 공기도 이제는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다양한 사람들과 섞여 사는 것이 거추장스럽기도 합니다. 이처럼 언제부터인지 미국생활에 익숙해졌습니다. 감탄사를 쓰던 말투가 평서문으로 변하더니 이제는 “왜 이렇지?”라고 투정 섞인 의문문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첫눈에 반한다고 하지요. 마음에 맞는 친구를 만나면 한없이 좋아서 몇 날 며칠을 함께 붙어 다닙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실증을 느끼고 또 다시 새로운 사람을 찾습니다. 결혼생활도 비슷합니다. 처음에는 아내가 끓여주는 김치찌개 하나에도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아내의 음식 솜씨를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진수성찬에도 무덤덤합니다. 칭찬은커녕 맛이나 간을 두고 투정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신앙도 예외가 아닙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었을 때는 순수한 마음으로 기도했고,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성경말씀을 눈을 비비면서 읽었습니다. 교회에서 벌어지는 이런 저런 일들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단지 믿음으로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감사였고 감격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신앙이 아니라 교회생활에 익숙해졌습니다. 새로운 것을 깨닫고 그것을 삶에 실천하려는 신앙은 뒷전으로 밀리고 교회 안의 인간관계와 이런 저런 가십에 신경을 씁니다. 점점 멋진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가야 하는데 간신히 주일만 지키는 선데이 크리스천으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익숙함이 신앙 속에 남겨놓은 잔재들입니다.

그런데 “익숙해졌다”고 느끼는 순간에 뒤를 돌아보면 놓친 것들이 너무 많음을 발견합니다. 조금만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면 더 좋은 결과를 얻었을 텐데 익숙해졌다는 선입견으로 대충대충 넘긴 것들입니다. 길가에 피어있는 꽃들을 힐끗 보았듯이 소중한 순간들과 이웃들을 아무 생각 없이 스쳐 지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친숙하다는 핑계로 무례하게 행하고 그들의 소중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만 주변을 신경 쓰다가 신앙의 진수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감사와 감탄이 우리 마음에서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저 아쉽기만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언젠가는 현재의 익숙함도 커다란 아쉬움으로 밀려올 것 같습니다. 모든 것들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지만, 지금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네 인생은 재생도 불가능하고 뒤로 돌릴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들이 소중한 것입니다. 올해도 반이 지나갑니다. 그래도 우리 앞에는 새로운 반년이 남아 있습니다. 익숙함이 남겨놓은 잔재들을 말끔히 씻어버리고 하루 하루 새롭게 그리고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살아갑시다. (2011.6.24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그 날이 오면…

세상이 뒤숭숭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을 비롯한 세계경제는 여전히 불황에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자연 재해에대한 불안함도 여전합니다. 중서부에 내린 비로 미시시피 강이 범람 위기에 처했습니다. 급기야 비상 댐을 열어서 물줄기를 돌려놓았습니다. 언젠가 인터넷에 우주 쓰레기(space junk) 사진이 나왔습니다. 그 동안 각 국가들과 기업체들이 무분별하게 쏘아 올린 인공위성들과 로켓의 잔해들이 쓰레기가 되어서 지구 주변의 우주를 맴돌고 있는데 보는 것만으로기분이 언짢았습니다. 요즘 우리가 사는 베이 지역도 5월임에도 불구하고 비가 자주 내리고 기온도 서늘한 것이 정상이아닌 듯 합니다.<?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세상이 뒤숭숭하면 언제나 등장하는 것이 종말론입니다. 다른 종교에도 종말론은 있지만 특히 기독교안에서 종말론을주장하는 사람들이나 종파가 꽤 있습니다. 성경이 세상의 종말을 예고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것을 약속했기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1992년 10월 28일 휴거가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던 다미선교회입니다. 그들을 믿는 신도들이 종말을 맞기 위해서 재산을 모두 팔아서 헌금하고 기도원으로 몸을 피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들이 말하던 대로 종말은 오지 않았고 일종의 해프닝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런데 잊을 만 하면 어디선가 몇 월 며칠에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는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나타납니다. 이번에는 우리동네에 종말론자가 나타났습니다. 오클랜드에 본부를 둔 패밀리 라디오의 설립자 해롤드 캠핑(89)이라는 사람이 엊그제인 5월 21일에 휴거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로부터 날수를 자기 나름대로 계산해서 종말의 날을산정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았지만 그래도 소수의 사람들은 그에게 현혹되어서 재산을 내놓고 휴거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물론 캠핑이 말하던 휴거는 오지 않았습니다.

종교적인 이유가 아닌 다른 관점에서 세상의 종말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분별한 과학 문명의 발달과 지구의오염이 대재앙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2004년에 출시된 <The day after tomorrow>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환경오염으로 인해서 지구에 다시 빙하기가 온다는 줄거리입니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등골이 오싹합니다. 열도 지방인 인도 뉴델리에 눈 폭풍이 몰아치고, 일본에 쓰나미가 밀려오고, LA에 토네이도가 옵니다. 뉴욕 맨해튼에 홍수가 나고 기온이 급격하게 내려가면서 온 세상이 얼음으로 뒤덮입니다. 영화는 우주선을 타고 있던 우주인이 지구의 절반이 얼음과 눈으로뒤덮인 것을 바라보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지구상에 다시는 빙하기가 오지 않을 것이랍니다. 영화는 사실이 아니라 심각한 환경 오염에 대한 경고인 셈입니다.

끝이 온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두려울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종말론자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입니다. “그 날이후”에 대한 두려움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그 날과 시간은 하나님만 아신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지구 최후의 날에 목숨을 걸고 시간과 날짜에 연연하는 종말론자들에게 현혹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맥 놓고 사는 것도 올바른 신앙은 아닙니다. 개인의 인생은 물론 이 세상의 끝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날이 오면” 어떻게해야 할 지 준비해야 합니다. 종말론자는 아니지만 종말론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세상의 끝이온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며,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 그날이 닥쳐도 두렵지 않도록 예수님 맞을 준비를 하면서 하루 하루 소망가운데 살기 원합니다. (2011년 5월 27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주님 뜻이면…

지난 주간은 부활주일이었습니다. 부활주일에 앞서,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제 마음속에 가장 많이 떠오른 것은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둔 예수님께서 평소에도 자주 찾으셨던 겟세마네 동산으로 발걸음을 옮기십니다. 유월절 만찬을 통해서 제자들에게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이미 일러두신 후입니다.겟세마네 동산에 가신 예수님께서 홀로 기도하십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셨으면 예수님의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었다고 성경이 기록했을까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온 인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실 예수님의 고뇌가 가슴에 사무쳐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 물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계셨습니다. 사랑했던 제자의 배신으로 곧 잡히게될 것이고, 심한 고초를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심도 아셨습니다.

그런데 이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이것을 두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이 두려워서 그렇게 기도하셨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사람도 살려낼 능력이 있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는 사람들의 죄를 지고 죽음의 길을 가야 하는 그 자체가 슬픔이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들이 왜 이토록 죄에 빠져사는지에 대한 예수님의 탄식입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고 진리의길로 가지 않을 것을 아셨기에 십자가 이후의 세상을 눈에 그리면서 한탄하셨을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십니다. 그리고 죄에 빠진 온 인류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주십니다.이것이 우리 기독교 신앙 한 가운데 있는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사랑의 절정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면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없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께 매우 큰 빚을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빚을 갚는 심정으로 예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빚쟁이가 주인에게 이것 저것을 달라고 요청해서는 안됩니다. 빚을 갚는 일에만 몰두해야 합니다. 은혜를 입었으면 보답하는 것이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거꾸로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참 많은 것들을 요구합니다. 우리들이 기도한 것을 녹음했다가 다시 들어본다면,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할 것입니다. 빚쟁이 주제에 뭐 그리 많은 것을요구하는지요. 거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빚을 진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모습이라니 얼마나 창피하고 하나님께 송구스러운지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던 겟세마네의 예수님을 닮기 원합니다. 우리들의 기도가 부끄러울 만큼 이기적이라 해도, 기도의 끝은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처럼 “그러나”로 마무리해야합니다. “그러나 주님 뜻이면 모든 것을 하겠습니다. 그러나 주님 뜻이면 양보하겠습니다. 그러나 주님 뜻이면 희생하겠습니다. 주님 뜻이면 십자가의 길도 기쁨으로 걷겠습니다. 주님 뜻이면 멈추겠습니다. 주님 뜻이면 앞으로 나가겠습니다.” 우리가 걷는 신앙의 여정이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겟세마네의 신앙이 되기 원합니다. (2011년 4월 29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폭풍 속에서

일본에 몰아 닥친 지진과 쓰나미는 우리 모두의 마음에 혼란과 두려움으로 다가왔습니다. 자동차들이 마치 장난감처럼둥둥 떠다닙니다. 거친 바다를 항해해야 할 배들이 육지로 올라와서 지붕 위에 올라앉기도 했습니다. 정착촌을 이루던집들도 정처 없이 파도에 밀려갑니다. 그 동안 경험했던 쓰나미와 달리 선진국 일본에 밀어닥친 이번 쓰나미는 인류가자랑하던 것들이 자연재해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을 고스란히 보여주었습니다. 쓰나미에 이어서 들려온 방사능누출 소식은 자연재해를 넘어서 인간이 쌓아 올린 기술문명이 빚은 인재(人災)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번 쓰나미로 일본인 아내를 잃은 한국인 남성에 대한 기사가 눈시울을 적게 했습니다. 남편은 트럭운전을 하고 아내는 공장에서 일하면서 국경을 초월한 사랑을 나누던 부부였습니다. 지진이 일어나던 날, 밀려오는 쓰나미를 피하기 위해 남편은 아내의 손을 잡고 육지를 향해 달렸답니다. 간신히 학교까지 내달아서 이제 몸을 피하려는 찰라, 거대한 쓰나미가 밀려왔고 남편은 잡고 있던 아내의 손을 놓쳤습니다. 남편이 학교 난간에 간신히 몸을 의지한 채 아내를 찾았지만파도에 쓸려간 아내는 온데간데 없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말 그대로 눈깜짝할 사이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습니다. 일본 국민들이 국가적 재난 앞에서침착하게 질서를 지키면서 대처했다는 것이 미담처럼 전해지지만, 그들의 아픈 가슴을 무엇으로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순식간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폐허로 변한 도시에 망연자실 앉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애처롭기 그지 없습니다.

구약 성경의 욥은 까닭 없이 고난을 받습니다. 세상에 의인이 있느냐는 사단의 질문 앞에 하나님께서 동방의 의인이었던 욥을 지목해서 그를 시험하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욥이 잘 대처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신앙의 친구들 마저 자신을 비난했을 때 고뇌에 쌓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십니다. 심하게 폭풍이 부는 가운데 욥이하나님을 대면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욥에게 수백 가지 질문들을 폭풍처럼 퍼부으십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깊은 뜻을 피조물인 욥이 과연 이해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질문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고,결국 얼굴을 땅에 묻고 엎드려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이번에 밀어닥친 쓰나미를 통해서 그 동안 인간이 최고라고 생각하면서 교만하게 쌓아 올린 인류문명, 천년 만년 이 세상에 살듯이 애지중지했던 집들과 인생의 자랑거리들이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모든 것을 텔레비전으로 생생하게 지켜보면서, 우리 인간이 자연 앞에서 얼마나 왜소하고 초라한지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쌓아놓은 모든 것이 그토록 허무하게 쓰나미와 함께 사라질 수 있는데도 우리들은 한 푼이라도 더 갖고 조금이라도 더 많이 누리기 위해서 아등바등 살아갑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면서 피조물인 인간이 최고인양 교만하게 살아갑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니 도리어 안쓰럽고 어리석어 보입니다.

이번 일을 눈으로 보면서 우리들의 삶을 정돈하기 원합니다. 우리 스스로 욕심껏 펼쳐 놓았던 삶을 거두어들이는 것입니다. 언젠가 사라질 세상 것들보다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삶으로 모드를 전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다 앞서서 자신이 최고라고 자랑하던 교만도 거둬들여야 합니다. 욥이 폭풍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듯이 우리들도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자연재해 앞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 앞에 조용히 무릎 꿇고 겸허한 삶을 살기로 다짐하기 원합니다. (2011년 3월 25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말씀 앞에서

지금은 큐티(Quite Time경건의 시간)를 모르는 기독교인들이 없을 정도가 되었지만 제가 대학에 입학하던 1980년대 초만해도 매일 아침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경건의 시간을 갖는 것은 매우 생소했습니다. 대학 새내기로서 이곳 저곳 교내 서클을 전전하다가 정착한 곳이 IVF라는 기독학생회였고, 그곳에서는 소그룹 활동을 통해서 신입생들에게 큐티를 소개하였습니다. 이처럼 20대 초반에 큐티를 알게 된 것은 저에게 커다란 축복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줄곧 경건의 시간을 갖지만, 나이가 들면서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씩 바뀌는 것도 경험합니다. 20대에 하나님 말씀을 묵상할 때는 매일 주시는 말씀을 제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애썼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제 인생의 야망(?)을 이루는 도구로 삼기도 했습니다. 물론 당시의 안타까운 사회현실 속에서 구약의 예언서를 읽고 고민하기도 했지만 이기적인 성경읽기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30대에 접어들면서 가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30대 중반이 되면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신학의 길로 접어 들었습니다. 한국에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30대 후반에 미국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의 30대는 계속해서 인생의 방향을 바꾸며 변화를 경험했던 특별한 시기였습니다. 그때 저는 아침 마다 말씀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갓 태어난 두 자녀를 어떻게 양육해야 할 지, 가장으로서 다니던 직장을 접고 신학의 길에 접어드는 것과 뒤늦게 유학의 길에 오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두고 고민을 거듭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 말씀은 제 인생의나침반처럼 갈 길을 제시해 주었고 때로는 제 마음에 뜨거운 감동을 주기도 했습니다.

마흔에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학생촌에서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교회를 개척하면서 드디어 담임목회를 시작한 것입니다. 40대 중반에는 샌프란시스코로 옮겨와서 이민목회를 시작했습니다. 젊은이들에게서 이민자들로 교인들이 바뀌는 경험과 더불어 40대에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설교준비였습니다. 40대의 큐티는 매 주일 설교를 위한 말씀 묵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큐티를 통해서 설교의 주제를 정하기도 하고, 큐티를 통해서 체험한 영적독서가제 설교에 그대로 반영되기도 했습니다. 20대 초반부터 시작해서 신앙의 습관으로 자리잡았던 큐티와 개인 성경연구가설교와 목회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돌아보니 저는 지난 30년 동안 아침 마다 하나님 말씀 앞에 섰고, 말씀은 제 인생길의 안내판이 되었습니다. 말씀 앞에서 20대에 꾸었던 꿈이 30대에 목회의 길로 접어들면서 송두리째 바뀌는 경험도 했습니다. 40대에 목회를 시작하면서,하나님 말씀을 옳게 그리고 열정을 갖고 전하기 위해서 아침마다 하나님 말씀 앞에 섰습니다. 여느 인생처럼 제 인생여정도 계속해서 변화되었지만, 하나님 말씀은 언제나 제 발의 등이었고 제  길을 비추는 빛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한국나이로 오십에 접어들었습니다. 인생의 후반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하나님 말씀 앞에 서야 할지 생각해 봅니다. 바라기는 제 자신을 돌아보는 자기성찰에 초점을 맞추고 싶습니다. 그 동안제가 하나님 말씀을 읽었다면, 이제부터는 하나님 말씀이 저를 읽도록 제 자신을 말씀 앞에 내어놓고 싶습니다. 말씀 앞에서 지나온 인생길을 돌아보고, 앞으로 펼쳐질 인생이 예수님을 닮는 거룩함의 훈련이 되기를 아침마다 애쓰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다음 노년이 되었을 때, 다니엘 호손의 단편 “큰 바위 얼굴”처럼 제 모습과 삶 속에 예수님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나타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SF 한국일보 2011년 2월 25일 종교칼럼)

내적 부요함

신약성경의 마지막인 요한 계시록은 당시 소아시아에 있던 일곱 교회들을 향해서 기록된 말씀입니다.  일곱 교회 가운데 마지막인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은 말 그대로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라오디게아는금융, 의학, 염색등 산업이 발달했던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에 속한 성도들도 물질적으로 부유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계3:17)고 말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안에 물질주의가 팽배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교회에서 부(富)가 자랑거리가 되었고. 부족함이 없을 만큼 세상에서 부유함을 누리는 것을 축복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진단은 이들의 자랑을 무색하게 만듭니다.: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계3:17, 표준새번역). 자칭 부족함이 없다고 말했던 라오디게아 교회였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했습니다. 심지어 눈이 멀어서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지 못한다고말씀하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면서 요즘 기독교의 모습이 자꾸만 중첩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새해 들어서 교회와 목회자에 대한 부끄럽고 안타까운 소식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옵니다. 차마 입에 담고 싶지 않은 추한 모습들이지만,문제가 생긴 원인을 가만히 살펴보니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들의 모습들입니다. 첫사랑을 잊어버린 기독교인들, 성적인 타락과 그릇된 영적 지도자들, 믿음과 행함이 일치하지 않는 죽은 신앙, “나는 부자”라고 물질적인 축복을 자랑하는 기복신앙 – 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안타깝고 때로는 분노하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들입니다.

그 동안 우리들은 지나칠 정도로 눈에 보이는 축복에 연연해 왔습니다. 교회는 물론 그리스도인들도 라오디게아 교회가누린 물질적인 풍요함을 동경해 왔습니다. 예전에 춥고 배고플 때는 믿음 가운데 물질적인 필요도 채워졌어야 합니다.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습니다. 솔직히 우리들이 현재 기도하고 소원하는 물질적인 축복은 더 가지려는 욕심과 남들보다 앞서려는 경쟁심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 속에서 기독교가 힘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기독교만이 참된 종교라고 목청껏 외쳐도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고도리어 배타적이라고 손가락질합니다.

이제는 물질과 성장 그리고 축복을 강조하는 외적인 신앙보다 내면의 성숙을 생각할 때입니다. 현재 기독교를 향해서쏟아지는 비판도 그 동안 교회가 물질과 성장 등 겉모습에만 신경을 쓰다가 진작 중요한 내면을 놓친 결과일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현실을 직시하고 우리의 내면을 살펴야 합니다. 한걸음 더 나가서, 그리스도인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정도의 신앙과 생활의 일치를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기독교회들이 물질주의와 기복신앙을 하루속히 뛰어넘어야 합니다. 축복 신드롬을 벗어나야 합니다. 비록 무화과 나무에 열매가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하나님을 찬양하였던 하박국 선지자의 영성을 닮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영생이라는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축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들이 교회 안에들어와 자리잡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을 청산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 생명에 대한 감사와 기쁨으로 우리의내면을 가득 채우기 원합니다. 세상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들과 다른 그렇지만 세상이 흠모할만한 내면의 거룩함임을 기억합시다.

(2011.1.28. SF한국일보 칼럼)

삶의 여백

중학교 다닐 때 미술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어렸을 때 화상을 입어서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지셨고 불같이 급한성격을 갖고 계셨기에 학생들에게 무서운 선생님으로 통했습니다. 외모와 성품이 특별하신 선생님이셨지만 실력만큼은대단하셨습니다. 시골 중학교였고 당시에는 인터넷 같은 대중매체가 발달하지 않아서 확인할 수 없었지만 국전에서 입상하신 분이라는 소문도 학교에 돌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선생님의 전공이 동양화였던 것 같습니다. 미술시간마다 창호지와 벼루와 묵을 갖고 오라고 하셔서 난초와 같은 수묵화를 그리게 하셨습니다. 그림에는 얼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만 까까머리 중학생들이 그깊은 뜻을 알 리가 없었습니다. 그저 무서운 선생님께 야단맞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그리는 흉내를 내고, 그 와중에도틈만 나면 얼굴에 먹물을 묻히고 키득키득거리면서 장난을 치곤 했습니다. 그래도 선생님께서는 늘 진지하게 수업을 진행하셨습니다.

그때 배운 것 가운데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림은 여백의 미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미술에 문외한이지만 “여백의 미”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성격도 괴팍하시고 한번 화를 내시면 호랑이처럼 무서우셨던 미술선생님이 생각납니다.

여백의 미는 동양 미술의 진수랍니다. 화판을 가득 채우는 것보다 여백을 남겨두고 그곳에서 예술의 진수를 느끼는 것이 중요하답니다. 여백의 미를 느끼기 위해서는 상상력과 감성이 발달해야 하고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한답니다. 여백의 미는 논리와 실적을 따지는 서양의 사고방식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도 여백을 남겨놓는것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빈 곳이 있으면 안달하면서 무엇으로든지 그곳을 채워 넣어야 안심이 됩니다. 여백을 남겨놓는 것은 허술해 보이고, 만족스럽지 못하고, 때로는 창피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2010년 경인년이 이제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올해 초 새해를 맞아서, 범띠인 저는 표범처럼 포효하며 힘차게 한 해를살기로 결심했었습니다. 하지만 그 동안 지나온 발자취를 돌아보니 여기저기 허술하기 그지 없습니다. 아쉬움도 많이남고, 조금 더 열심히 살아야 했다는 뉘우침도 생깁니다. 그렇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것들이 삶의 여백일 수 있습니다.

완벽한 인생길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인생을 여백 없이 가득 채우며 산다면, 그것 역시 숨막히는 일이겠지요. 인생길 이곳 저곳에 남겨진 여백을 바라보면서 마음 한 켠에 여유를 느끼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이라면, 자신이 남겨놓은 여백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채워주실 지 기대하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아니 남겨진 여백도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들 삶 속에 남겨진 여백 자체가 축복이고 소망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구약 성경의 전도서 기자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렇다. 다만 내가 깨달은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평범하고 단순하게 만드셨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전도서 7장 29절, 표준 새번역). 평범하고 단순하게 사는 인생은 여백의 미를 만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반면에 자신을 스스로 복잡하게 만드는 인생길은왠지 모르게 숨이 막히고 나중에 허탈감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전도서의 일관된 가르침대로 우리의 인생길은 이십 보백 보요 거기서 거기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송구영신의 계절에 우리의 삶에 남겨진 여백으로 인해서 아쉬워하거나 조급해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대신에 여백을 즐기고, 남겨진 여백이 새해에 어떻게 채워질 지 기대하면서 소망 가운데 새해를 맞기원합니다. (2010년 12월 31일 SF 한국일보 종교 칼럼)

“한 길 가는 순례자”

“한길 가는 순례자” – 유진 피터슨 목사님의 한국어판 책 제목입니다. 영어 제목은 “A long obedience in the same direction”이고 우리 말로는 “한 방향으로의 오랜 순종”이라고 옮길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 시편 가운데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표제가 붙은 말씀을 묵상한 책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인생을 순례길로 표현하곤 합니다. 순례길은 힘이듭니다. 알아주는 사람도 없기에 외롭기도 합니다. 하지만 순례자는 자신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갑니다. 그 길이 어떤 모습이든지, 아무리 힘이 들고 지치더라도 묵묵히 자신이 가야 할 순례길을 걸어 갑니다. 순례자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400여년 전, 자신들에게 주어진 신앙의 순례길을 걷기 위해 메이플라워를 타고 신대륙에 도착한 일단의 순례자들이 있었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험난한 대서양의 파도와 싸운 끝에 65일만에 신대륙에 도착한 청교도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 꿈이 있었다면, 자유롭게 신앙의 꿈을 펼치는 것이었습니다..

꿈을 갖고 신대륙에 도착했지만 낯선 곳에서 살아남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순례의 여정이었습니다. 겨울을 나면서 절반에 가까운 동료들이 폐렴 등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처럼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청교도들에게 봄이 찾아 왔지만, 신대륙의 환경은 여전히 생소하기만 했습니다. 유럽에서 갖고 온 씨앗들은 신대륙에서 싹을 틔우지 못했습니다. 커다란꿈을 안고 신대륙에 왔지만, 막상 도착해 보니 먹고 사는 것 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그때 이들에게 나타난 천사와 같은 인물이 있었습니다. 당시 그곳에 살던 인디안 부족이었던 스콴토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인생역정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청교도들이 신대륙에 도착하기 15년 전에 영국의 한 탐험가가 스콴토를데리고 영국으로 건너가서 그곳에서 영어도 배우고 서양문물을 접하게 한 후에 다시 신대륙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니까 스콴토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인물이었습니다. 영어를 하는 것이 빌미가 되었는지 영국의 노예상들이 밀어닥쳐서스콴토를 카리브 해안 국가에 노예로 팔았습니다. 스콴토는 그곳에서 마음 좋은 가톨릭 사제를 만나고 그의 도움으로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스콴토가 이렇게 인생역정을 거치고 고향에서 지내고 있을 때 메이플라워를 탄청교도들이 플리머스에 도착한 것입니다.

당시 그곳에 살던 인디안 부족들은 낯선 사람들이 자신들을 방문하면 극진히 대접하는 관습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연히영어를 할 줄 아는 스콴토가 나섰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청교도들이 신대륙에 정착하도록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가을, 모든 곡식을 추수하였을 때 청교도들과 원주민들이 함께 모여서 첫 번째 추수감사절을 지켰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한 길을 갔던 청교도들에게 임한 축복이자 감사였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방황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갈피를 못 잡고 허둥지둥 대면서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 것은 신앙의 순례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대신에 목적지를 향해서 꿋꿋하게 순례길을 걸어가는 “한길 가는 순례자”들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은 분명히 임할 것입니다. 신대륙에서 영어를 할 줄 아는 스콴토를 만날 줄을 상상이나 하였겠습니까? 낯선 사람들에게 우호적인 원주민들이 신대륙에 있을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푯대를 세우고꿋꿋하게 앞으로 나가는 신앙입니다. 흔들림 없이 하나님만 똑바로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갈 때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우리의 순례길 여기저기서 임할 줄 믿습니다. 한 길 가는 순례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요 축복입니다. (2010년 11월 19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달인 (達人)

한국에서 방송되는 개그 프로그램가운데 “달인(達人)”이라는 코너가 있습니다. 키가 작고 다부지게 생긴 개그맨이 나와서 보통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장기를 하나씩 보여줍니다. 지난 추석에는 그 동안 시청자의 관심을 끌었던 일곱 가지 장기를 특집으로 엮어서 방송했습니다. 체조 선수도 아니면서 링 위에서 가진 묘기를 부립니다. 온 몸에 먹칠을 하고 전위예술 하듯이 하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데 괜찮은 작품이 탄생합니다.

자신은 십여 년 이상을 얼음에서 생활했다고 허풍을 떨면서 얼음 위에서 책을 읽고, 심지어 얼음 신발까지 신고 추위를견딥니다. 물속에서 잠수한 상태로 콜라와 컵라면을 먹고 책을 읽습니다. 급기야 맛을 느끼지 못하는 달인이라는 명목으로 청양고추를 질겅질겅 씹어먹고, 맵기로 유명한 태국고추를 팝콘처럼 한 입에 가득 넣습니다. 매운 고추를 먹을 때는 그분의 건강이 은근히 걱정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의사까지 대동하고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달인 코너가 인기를 끄는 것은 이 분이 보여주는 장기가 허풍이나 거짓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청자는 물론 수 많은 방청객들 앞에서 실제로 달인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를 씁니다. 오랜 시간 동안 링에 매달려 있는 것이 힘들다는 것이 역력한데도 그분은 ‘아니라’고 능청을 떱니다. 청양고추를 먹으면서 웃음을 짓지만, 시청자들은 그가 달인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매운 맛을 참고 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이리저리 핑계를 대면서 어려움을 피해가지만, 그가 보여준 장기만으로도 시청자들은 박수를 보냅니다.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보여주는 달인의 모습만으로도 충분히감동이 밀려오기 때문입니다.

달인(達人)은 말 그대로 “무엇엔가 통달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코미디 프로그램이기에 쉽게 채택할 수 있지 (달인 코너의 개그맨은 결코 쉽게 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달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꽤 어렵습니다. 우리네 보통사람들은 입에담기도 어려운 말입니다. 그런데 그 프로그램의 달인 코너를 보고 있으면 왠지 우리도 달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적어도 우리들이 하고 있는 생업 또는 취미나 특기를 살려서 달인이 되고 싶다는 충동을 느낍니다. 작은 체구의 개그맨이 우리에게 주는 은근한 힘이요 커다란 용기입니다.

달인 코너를 보면서 저도 어떤 영역에서인가 달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제가 목사이니 목사와 관련된 달인의 모습을 하얀 종이에 적어 봅니다: 설교의 달인, 인간관계의 달인, 섬김의 달인, 상담의 달인, 언어의 달인 등등. 달인이 되고 싶은영역이 꽤 많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되고 싶은 달인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바로 ‘기도의 달인’입니다. 목사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도의 달인이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깨어있으면 늘 기도하고, 꿈을 꾸면서도 기도하고, 운전하면서 기도하고, 일을 하면서도 기도하고, 누군가 만나면서도 기도하고, 밥을 먹거나 무엇을 하든지 늘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대화하면서 평생을 살아가는 기도의 달인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방송에 나오는 개그맨처럼 일상 생활 속의 어떤 일이나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서 달인의 모습을 갖추려고 애쓰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 같은 아마추어들은 수없이 연습해야 합니다. 때로는 고통도참고 이겨야 합니다. 달인 코너의 개그맨을 두고 동료들이 했던 말 가운데 한 가지가 마음에 남습니다:“그는 악바리입니다!” 달인이 되기 위해서는 끝까지 견디는 근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겠지요. 여러분들께서는 어떤 영역에서 달인이되고 싶으십니까? (2010년 10월 15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