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보금자리

엠티 네스트 신드롬(empty nest syndrome)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90년 중반까지 10년 가까이 방송된 “엠티 네스트”라는시트콤의 제목에서 온 말입니다. 우리 말로는 ‘빈 둥지 증후군’이라고 옮길 수 있겠지요. 자녀들이 대학에 가고 결혼을하면서 하나 둘 집을 떠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부부만 덩그러니 남게 됩니다. 엠티 네스트 신드롬은 자식들이 떠난 가정, 즉 빈 보금자리에서 부모들이 느끼는 외로움을 일컫는 말입니다.

가족이나 상담에 대한 책을 읽으면 종종 등장하는 이 말이 남의 일로 알았는데 어느덧 저희 부부에게 닥쳤습니다. 이제내일이면 첫째 아이에 이어서 둘째 마저 대학 기숙사에 들어갑니다. 멀리 있는 학교에 가지 않아서 주말마다 집에 오겠지만, 그래도 마음이 섭섭합니다. 아이가 신이 나서 자기 방을 정리하고, 옷가지를 가방에 쌉니다. 아내도 크고 작은 물건을 챙겨주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이 참에 집을 떠나면 다시 오지 않을 작정인지 짐이 꽤 많습니다. 제 아무리 열심히짐을 싸도 아빠의 손길이 여전히 필요합니다. 컴퓨터를 연결할 전선줄이 없습니다. 밤이 늦었지만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 월그린에 가서 전선줄을 사다가 가방에 슬쩍 넣어 줍니다. 모두 잠이 든 늦은 밤, 거실에 나가서 아이의 짐을 하나하나 다시 확인해 봅니다. 늘 어린아이 같고 언제나 덜렁대던 둘째인데 자기 짐을 꽤 잘 챙겨놓았습니다.

둘째 마저 떠나는 것이 허전한 지 아내는 며칠 전부터 아이가 집에 있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수시로 되뇌곤 했습니다. 하긴 둘째 마저 없으면 아내의 일이 훨씬 줄 것 같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라고 아이와 씨름하지 않아도 됩니다. 심방하면서 아이 점심이나 저녁을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들만 둘인 우리 집에서 둘째는 종종 딸처럼 애교를 부리고어리광도 부렸기에 아내는 더 허전함을 느낄 것 같습니다. 아내는 앞으로 며칠 동안 아이들이 집에 없어서 허전하다고귀가 아프도록 얘기할 것입니다. 잘 생긴 남편이 곁에 있는데도 말입니다.

솔직히 아내만 허전한 것은 아닙니다. 아빠인 저도 아이들이 없으면 꽤나 허전할 것 같습니다. 지난 20여년을 밤마다 아이들이 제게 와서 “아빠 잘게요”라고 말하면 저는 그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꼬마일 때는 제 품에 꼭 안고기도해 주었습니다. 초등학생이 되면서는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했는데, 저 보다 등치가 커지면서 아이들의 등에 제 손을 대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큰 아이는 그것이 습관이 되어서 지금도 밤 10시가 되면 학교에서 전화를 합니다. 그러면전화로 기도해 줍니다. 둘째는 어떻게 할 지 모르겠습니다. 대학생이 된 아이들에게 아빠의 생각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제부터 스스로 자신들의 인생을 설계하고 개척해 나가는 방법을 터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밤 10시가되면 둘째의 전화도 기다릴 것 같습니다.

우리 이민1세들에게 자식에 대한 기대와 애정은 각별합니다. 때로는 자식을 부모의 분신처럼 생각해서 자녀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장성한 자녀들이 부모 곁을 떠나고 가정을 갖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그 동안 부모가 자녀들의 지킴이(가디언) 역할을 했다면, 이제는 한발 뒤로 물러서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부모의조언이 필요할 때 삶의 지혜를 나눠주는 멘토가 되어야 합니다.

저 역시 이렇게 이론적으로 잘 무장되어있지만, 자식들이 떠난 빈 보금자리는 꽤 허전할 것 같습니다. 순간순간 아이들이 보고 싶어 질것 같습니다. 이것이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이겠지요!

(2010.8.27SF 한국일보 종교칼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지난 주간에는 펜실베니아주의 스크랜튼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열린 코스타 수양회에 다녀왔습니다. 올 해로 일곱 번째 참석하는 코스타였지만 매 해 갈 때마다 가슴이 설레고 동시에 부담감도 느낍니다. 미래를 책임질 새벽이슬과 같은 젊은이들을 만날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뜁니다. 요즘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교회에 대해서 좋지 않은 선입견을 갖고 있다고 하지만 코스타에 가면 참된 신앙을 가져보려는 젊은 청년들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도리어 그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동안 시카고에서 열린 코스타에서 주로 성경연구 세미나를 인도했는데, 이번에는 25세 이하의 젊은 청년들이 모이는 스크랜튼 코스타에서 오전 전체 집회 말씀을 맡았기에 더욱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뒷전에서 기도해 주시는 성도님들과 친지들이 계셨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에 은혜가운데 말씀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코스타 기간 중에 청년들을 만나면서 제가 마치 30여년전으로 돌아간 듯 했습니다.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젊은이들이 갖고 있는 고민은 대충 비슷했습니다.: 신앙에 대해서 무차별 쏟아내는 질문들, 진로에 대한 고민들, 그리고 젊은 시절에 누구나 가슴앓이를 하는 만남과 헤어짐의 아픔들. 인생을 조금 더 산 신앙의 선배로서 성심껏 조언해주었습니다. 어떤 때는 말없이 젊은이들의 넋두리를 들어주었습니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받으면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습니다. 그때마다 제 앞에 앉아 있거나 쭉 둘러있는 젊은이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 전도서는 솔로몬이 기록했다고 전해집니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왕의 후광을 입어서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렸던 왕입니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에 남긴 말은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 12:1)입니다. 청년의 때는 인생의 꽃망울이 터져 나오는 시기입니다. 힘차게 앞을 향해 뛰어나가는 시기입니다.

청년의 때와 대조되는 말이 “곤고한 날”입니다. 몸과 마음이 인생살이에 지쳐서 더 이상 희망을 갖지 못하는 때를 가리킵니다. 곤고한 날이 되면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쉽게 포기합니다.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자조 섞인 말투로 탄식합니다. 솔로몬은 그런 날이 오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교훈합니다.

코스타에서 젊은이들을 만나면서, ‘만약에 청년의 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 동안 아쉬웠던 많은 기억들, 게으름으로 인해서 흘려 보냈던 시간들, 짧은 생각에 그만 성급하게 서둘다가 놓치고 말았던 인생의 기회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아있던 아쉬움 들이 주마등처럼 머리에 스쳤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진한 아쉬움은‘이제는 늦었다’ ‘나는 할 수 없다’고 단정해서 시도도 하지 않은 채 미리 포기했던 일들이었습니다.

물론 시계추를 거꾸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지나간 시간을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기에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이라는 가정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을 수는 있습니다. 예전의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앞을 바라보며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살겠다고 마음을 다잡아 먹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먼 훗날,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았을 때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은 꽤 많이 줄어있을 것입니다. “

너희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전도서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창조주 하나님과 더불어 하루하루 새롭고 행복한 인생길을 걸어가기 원합니다.

(2010.7.23 SF한국일보 종교칼럼

하나님의 숨결

6월 한 달은 대한민국 월드컵 축구국가대표팀 덕분에 행복했습니다. 우리 나라가 처음으로 원정 16강이라는 훌륭한 성적을 일궈냈고, 비록 8강에 오르지 못했지만 우리 선수들은 최선을 다해서 뛰고 또 뛰었습니다. 저 역시 워낙 운동경기를 좋아하기에 가족들과 함께 우리나라 경기를 모두 지켜 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예선 마지막 경기인 나이지리아와의 경기가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선수들의 실수로 실점할 때는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우리 선수들이 두 번이나 골 네트를 흔들 때는 정말 짜릿했습니다. 마지막 5분여를 남겨놓고는 하도 긴장이 되어서 앉아서 보지 못하고 일어서서 손을 꼭 쥐고 지켜보았습니다. 마지막 휘슬이 울리기까지 추가시간이 왜 그리 길던지요? 드디어 원정 첫 번째 16강이 확정되는 순간 우리 가족은 서로 껴안고 소리를 치면서 야단법석을 떨었습니다.아마 이웃집에서 깜짝 놀랐을 겁니다.

그때 그 순간의 스릴과 긴장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어서, 한국과 나이지리아의 경기를 인터넷을 통해서 재방송으로 시청했습니다. 이기고 있다가 한 선수가 실수를 해서 승부차기로 동점이 됩니다. 나머지 시간 동안 적어도 무승부를 기록해야 합니다. 생방송을 볼 때는 그 순간이 얼마나 긴장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재방송을 보니까 재미가 없었습니다. 생방송을 볼 때의 스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선수들이 실수하는 장면만 눈에 들어왔습니다. 경기 결과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뭐든지 생방송으로 봐야 그 순간의 짜릿함을 느낄 수 있지, 녹화방송은 밋밋할 뿐이라는 진리를 다시금 깨닫고 노트북을 접었습니다.

이것은 성경읽기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들은 녹화방송을 보듯이 성경을 읽습니다. 예를 들면, 다윗이 풀 맷돌 다섯 개로 구 척 장수 골리앗을 이기는 말씀을 읽으면서 긴장하거나 통쾌한 마음을 전혀 느끼지 않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지”라고 미리 결론을 내리고 성경을 읽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경말씀이 무척 지루하고 녹화방송처럼 밋밋할 뿐입니다. 대신에 생방송을 보듯이 성경말씀을 한 장 한 장 읽어나가면 얼마나 재미있고 다음 장면이 기대가 되는지 모릅니다. 성경이 전해주는 말씀들이 생생하게 마음 속에 전해집니다. 이처럼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재방송이 아니라 생방송처럼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읽는 또 하나의 방법은 연애편지 읽듯이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연애편지를 대충 읽는 연인들은 없습니다. 연애편지를 수면제 대용으로 읽는 연인들도 없습니다. 연애편지를 받으면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행간(行間)까기 헤아려가면서 자세히 그리고 여러 번 반복해서 읽습니다. 수십 년이 지나도 예전에 받았던 연애편지와 그 내용을 기억하는 경우도 꽤 많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연애편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숨까지 바쳐가면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연애편지라고 생각하면, 한 구절도 대충 넘어가지 않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서 애를 쓰게 마련입니다.

실제로 성경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숨결이 담겨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되었다고 하였는데(딤후3:16), 여기서 “하나님의 감동하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오푸뉴스토스”는 “하나님의 숨결”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는 연애편지처럼 달콤하고 그윽하게 속삭이시는 하나님의 숨결을 따라 읽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주시는 생생한 말씀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 말씀이 정금보다 더 사랑스럽고 송이 꿀보다 더욱 달다는 시편기자의 고백(시19:10)이 우리의 고백이 될 수 있습니다.(SF 한국일보 2010년 7월 2일 종교칼럼)

인생길 위에서…

베이지역에 살면서 누리는 가장 큰 혜택가운데 하나가 좋은 날씨입니다. 그런데 아주 맑은 날 자동차를 갖고 도로에 나가보면 아슬아슬하게 곡예운전을 하는 차들이 많이 눈에 띕니다. 출퇴근 시간도 아닌데 길이 막힌다 싶으면 영락없이 얼마 가지 않아서 사고차량들이 길 옆에 서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사고 날 장소가 아닌데 대형사고가 난 경우도 종종 발견합니다.

날씨가 좋고 도로도 한적한 데 왜 사고가 날까요? 밴더빌트라는 분이 “트래픽(traffic,2008)”이라는 책을 출판해서 뉴욕 타임즈의 베스트 셀러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운전습관과 교통사고의 원인 등을 운전자의 심리적 요인과 연관시켜서 분석하였습니다. 몇 가지 흥미로운 내용을 소개하면, 운전자들은 날씨가 맑고 도로가 한가해 보이면 기분이 좋아지면서 약간 방심하는 경향이 있답니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속력을 내게 되거나, 전화도 걸고, 음악도 듣고, 옆에 마음이 맞는 사람이 동승했다면 얘기꽃을 피우면서 정작 집중해야 할 운전에 소홀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고의 원인이 됩니다. 운전하는 동안 3초의 방심이 사고로 이어질 확률이 그 어느 것보다 크답니다.

앞에 여성 운전자가 있을 때 자동차 경적을 더 크게 자주 울립니다. 그런 점에서 여성운전자들은 희생자인 셈입니다. 좋은 차가 있으면 경적을 쉽게 울리지 못한답니다. 시골이나 작은 도시에서는 경적을 울리는 회수가 현저하게 줄어듭니다. 반면에 뉴욕과 같은 대도시에서는 너도나도 경적을 울려댑니다. 시골에서는 행여나 아는 사람이 있을 까 조심하는 것이고, 대도시에서는 아는 사람을 만날 확률이 거의 없기에 마구 행동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참 간사합니다. 또한 아무리 경적을 크게 울린다고 앞에서 미적거리던 자동차 운전자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습니다. 경적을 울리는 사람이나 그것을 당하는 사람이나 모두 기분만 상할 뿐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경적을 울림과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욕설에 가까운 말을 내뱉습니다. 아뿔싸! 옆 자리에 고상한 분을 모시고 간다면 자신의 인격만 손상을 입은 셈입니다.

길이 막힐 때, 옆 차선의 자동차가 빨리 가는 것 같습니다. 얼른 차선을 바꾸어 보지만 다시 그 길이 막히고 이번에는 옛 차선의 차들이 잘 빠져나갑니다. 그때 운전자가 심리적으로 당황하게 되고, 이리저리 차선을 바꾼다면 그것은 교통사고의 원인과 직결됩니다. 저자는 여러 가지 연구결과를 인용하면서 길이 막힌 상태에서 차선을 바꾸는 것보다 자기가 서 있는 차선이 잘 빠지기를 기대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조언합니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은 교통사고나 교통체증의 원인은 도로나 자동차에 있지 않고 운전자의 심리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어디 운전만 그렇겠습니까? 인생길이 활짝 개이면 자신감이 넘쳐서 이 일 저 일에 손을 대다가 집중력을 잃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실패를 거듭한다면, 그것을 만회하려고 허둥지둥 서둘다가 더 큰 수렁에 빠지기도 합니다. 운전자가 도로나 상대방을 탓하듯이, 환경이나 다른 사람들 심지어 부모나 가족을 탓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생길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자신입니다. 남의 탓을 한다고 인생길이 좋아지지 않고, 서로 기분만 상할 뿐입니다. 인생의 차선을 자주 바꿀 필요도 없습니다. 끈기를 갖고 차분하게 주어진 인생길을 운전해 가는 것이 최선이자 가장 빠른 지름길입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가 걷는 인생길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가는 인생길이 가장 행복한 길임을 믿기 때문입니다.:”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시편37:5-6)

[2010년 6월 4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노숙자 이웃들

지난 해에 새로 렌트해서 들어간 미국교회는 매주 수요일마다 노숙자(홈리스)들에게 저녁식사를 대접합니다. 미국 교회 목사님과 대화하는 중에 노숙자를 돕는 손길이 더 필요하다는 말씀을 듣고 여선교회와 자원하신 성도님들을 중심으로 노숙자 돕기를 시작했습니다. 올해부터는 우리 교회가 전담해서 매월 한번씩 100여명의 노숙자들에게 저녁을 대접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노숙자들을 대하거나 가까이하는 것이 편치 않았습니다. 노숙자들에 대한 편견도 갖고 있었습니다.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분들과도 친분(?)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만난 세 분의 노숙자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한 분은 비교적 깨끗한 옷을 입고 오시는 할머니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인 그 할머니는 저를 만나면 기도해 줍니다. 자신이 성령의 은사를 많이 체험했다면서 노숙자들의 영적 스승 역할을 합니다. 하루는 저에게 아주 작은 하모니카를 선물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하모니카를 즐겨 불어서 곡조만 알고 있으면 악보 없이도 연주할 수 있습니다. 즉석에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를 연주했더니 얼마나 기뻐하든지 그 얼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한 분은 중국 아저씨입니다. 이 분은 거의 매번 똑 같은 옷을 입고 있어서 가까이 가면 땀냄새가 많이 납니다. 이 아저씨는 심장이 좋지 않아서 종종 병원에 실려갑니다. 엊그제는 거리에서 괴한에게 머리를 맞았다면서 동양인들이 현금을 많이 소지하기에 괴한들의 표적이 된다고 조심하랍니다. 노숙자인 그 아저씨나 목사인 저나 현금을 많이 갖고 다닐 처지가 아닌데 서로 그런 얘기를 나누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입니다. 한 번은 이 아저씨가 한 달여 보이지 않아서 큰 일을 당한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뉴욕에 있는 부모님을 방문하고 왔답니다. 그레이하운드를 타고 뉴욕을 다녀왔으니 얼마나 긴 여정이었을까요? 그에게도 찾아갈 부모님이 계셨다는 사실에 내심 깜짝 놀랐습니다. 부모님이 반겨주더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흐뭇한 표정을 짓습니다. 마음이 찡- 했습니다. 얼마나 부모님의 사랑이 그리웠으면 뉴욕까지 버스를 타고 다녀왔을까요!

또 다른 한 노숙자는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청년입니다. 키가 하도 커서 이 청년이 앉아 있는 것이나 제가 서 있는 것이나 비슷할 정도입니다. 이 젊은이는 수요일이 되면 일찍 교회에 와서 음식준비며 식탁 배열을 돕습니다. 지난 추수감사절에는 근사한 옷을 입고 왔습니다. 좋은 일이 있냐고 물었더니 취직이 되었답니다. 그런데 취직이 된 사람이 자꾸만 나타납니다. 기회를 보다가 어렵사리 직장생활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떨굽니다. 정부보조가 나오면 요리학교에 다니겠답니다. 그러면서 또 다시 씩- 웃습니다. 기도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얘기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엊그제 수요일에 만났는데 옷에서 땀냄새가 심하게 납니다. 심상치 않아서 학교는 다니냐고 하니까 돈이 없어서 못 다닌답니다.그러면서 횡설수설하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참 선해 보이는 젊은이인데 무너진 인생을 다시 세우기가 그토록 어려운가 봅니다.

이렇게 지난 1년여 노숙자들을 만나면서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하나님을 믿고, 부모형제가 있고, 앞 길을 놓고 고민하는 이웃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잡채와 복음밥과 같은 한국 음식을 대접받고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면서 감사의 표시를 하는 그들에게서 정감을 느낍니다. 거리에서 그들을 마주치면 “패스터(pastor)”하면서 이가 다 빠진 채로 인사합니다. 그들의 모습과 표정 속에서 인생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배웁니다. 마음을 터놓고 대하면 누구든지 친구가 될 수 있음도 배웁니다. 무엇보다 그들을 통해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낍니다. (2010년 4월 30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동상이몽

사순절 막바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다음 주일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백성들은 겉옷을 길에 펴면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라고 외치면서 종려나무를 흔들고 야단법석을 떨었습니다. 구약의 예언대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께서 로마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줄 메시야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다윗 왕국이 재건될 것을 기대했습니다. 자신들의 소원과 욕구를 채워주는 정치적 메시야로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

하지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로마를 전복시킬 의도가 전혀 없으셨습니다. 도리어 로마 권력에 의해서 자신이 전복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해방시킬 생각은 안중에도 없으셨고, 오직 모든 인류를 죄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하나님의 구원계획만을 생각하셨습니다. 가진 조롱과 멸시를 받으면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셔야 할 예수님이셨습니다.

이처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로마로부터 해방될 것을 기대하는 백성들의 마음은 말 그대로 동상이몽이었습니다. 수일 후에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욕구를 채워주지 않을 것임을 발견합니다. “호산나”를 외치면서 예수님을 맞이했던 백성들이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을 비난하는 폭도로 변합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겉옷을 깔던 백성들이 이제는 겉옷을 흔들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칩니다.

백성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뭔가 큰 일을 하실 줄 알았습니다. 물위를 걸으시고 풍랑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 귀신을 쫓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신 예수님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예루살렘을 통치하는 로마제국을 허물고 메시아 왕국을 세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권력을 잡으시면 양 옆에 앉게 해달라고 인사청탁을 하는 제자들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무력하게 로마 군병들에게 체포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제자들도 백성들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등극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줄 알았는데, 예수님께서는 도리어 극악한 죄인들이 달리는 십자가위에 올라가셨습니다. 역시 동상이몽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이유를 성경을 통해서 그리고 수없이 들은 설교를 통해서 무엇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의 마음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보다 거리에서 종려나무를 흔들면서 다윗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대하는 백성들에게 달려갑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우리들의 욕심과 기대가 채워지길 바라면서 예수님을 믿습니다.

사순절 막바지에 우리 각자가 믿고 기대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우리들 역시 예수님을 우리 좋을 대로 믿고 있지 않은지요? 자신의 긴급한 요구에 응답해 주시는 도깨비 방망이나 911 구급차 정도로 생각하지는 않는지요? 기도제목 가운데 한가지만 응답되지 않으면 불평하고 배반하는 얄팍한 신앙은 아닌지요?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철저히 복종시키셨습니다. 우리들 역시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내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생각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예수님과 함께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야 합니다. 그것이 동상이몽이 아닌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갖고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참모습입니다.(2010년 3월 26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하늘 위에서 본 세상

저는 지금 시카고에서 인디애나폴리스로 향하는 비행기안에 있습니다. 인디애나대학교 기독학생회 수련회에서 말씀을 전하러 가는 길입니다. 비행기 여행을 할 때는 긴장하게 마련입니다.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순간에는 자신도 모르게 손과 발에 힘을 줍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카고까지는 큰 여객기를 타고 왔는데, 인디애나로 내려가는 비행기는 좌석이 두줄 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비행기입니다.

조종사 한 명을 포함해서 승무원이 세 명뿐입니다. 평상복과 다름없는 바지를 입고 있는 여승무원들도 왠지 모르게 촌티(?)가 납니다. 승객들을 기다리면서 조종사와 여승무원이 농담을 하는 모습이나, 먼저 탑승한 승객들이 옹기종기 떠드는 모습이 꼭 한국의 시외버스를 연상케 합니다. 비행기가 이륙해서 방향을 바꿀 때는 기체가 심하게 흔들리면서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입니다. 하지만 하늘 높이 올라가면 큰 비행기나 작은 비행기나 커다란 차이 없이 상공을 날아갑니다.

비행기 여행을 할 때면 의례히 하는 일이 있습니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는 차분히 눈을 감고 하나님께 여정을 온전히 맡기는 기도를 합니다. 이번 여행은 젊은 청년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길이기에 더욱 기대가 됩니다. 또한 저의 첫 단독 목회지를 방문하는 길이어서 마치 친정 집을 방문하는 것 같습니다. 지난 5년여 뵙지 못했던 권사님들을 뵐 생각을 하니 꼭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아들 심정입니다. 이번 여정에서 만나게 될 모든 사람들을 마음껏 축복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눌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연초에 받았던 성도님들의 1년 기도제목 묶음을 가방에서 꺼냅니다. 어느덧 비행기는 고도를 잡고 상공에 올라와서 안정되게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하늘 꼭대기에서 성도님들의 모습을 눈에 그리며 기도제목을 한 장 한 장 넘겨가면서 기도합니다. 하늘에서 기도를 하니 마치 기도가 하나님께 더욱 빨리 올리어질 것 같습니다. 물론 느낌입니다.아니 잘못된 믿음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의 기도제목을 놓고 비행기안에서 기도하는 특권을 포기할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시카고까지 오는 동안 창가를 통해서 아래를 내려다 보았습니다. 대부분 하얀 눈으로 덮여있었고, 수만 피트 상공에서 내려다본 세상은 평지나 다름없습니다. 로키산맥을 비롯해서 높은 산간지역을 지나고 있지만, 하늘 위에서는 높고 낮음을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라는 시구(詩句)가 생각났습니다. 그 옛날에는 비행기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하늘아래 뫼”라는 사실을 알아냈는지 선조들의 혜안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십여 분만 하늘로 올라가도 세상이 평평해 보입니다.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면 높은 산이나 깊은 골짜기나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높아지기 위해서 아등바등 서로 경쟁하며 살아갑니다.까치발을 하면서 1-2인치라도 조금 더 높아지고 조금이라도 더 큰 것을 가지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하늘 위에서 보면 이십 보 백 보일 뿐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세상을 내려다보시면, 인간들이 하는 행동과 모습이 얼마나 우스워 보일까요? 비행기 창에 비친 제 얼굴이 겸연쩍게 빨개집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창가에 펼쳐진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비행기가 고도를 낮춥니다. 목적지에 도착한 것입니다. 비행기 창가로 도시의 수많은 불빛과 하이웨이를 달리는 자동차의 행렬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제 수 분 후면 또 다시 아등바등 서로 경쟁하면서 살아가는 세상으로 내려갑니다. 이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하지만 하늘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가졌던 여유와 하나님께 기도했던 겸손한 마음을 간직하기로 다짐하면서, 이번 집회에서 만날 새벽이슬과 같은 젊은이들을 눈에 그려봅니다.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2010년 2월 26일)

고요한 시간

2005년에 필립 그로닝이라는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위대한 침묵(into great silence)>이 한국에서 소리 소문 없이 5만 명 이상의 관객을 모으고 있답니다. 이 영화는 해발 1300미터 알프스 산맥에 위치한 카르투지오 수도원의 일상을 담았습니다.

영화 제목 그대로 무려 162분 동안 거의 대사가 없습니다. 단지 수도사들이 침묵으로 기도하면서 지내는 모습이 조용하게 펼쳐질 뿐입니다. 수도원을 둘러싼 아름다운 알프스 산맥의 경치, 수도사들을 깨우는 종소리, 수도사들의 발자국 소리와 경전을 읽는 소리가 이따금씩 들릴 뿐입니다.

한창 인기를 끌기 시작한 3차원 영화들이나 현란한 대사로 관객을 사로잡는 요즘 영화들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렇지만 영화 속에 흐르는 수도사들의 침묵은 매우 아름답고 어떻게 보면 화려합니다. 그들의 겉모습이 화려한 것이 아니라, 수도사들의 내면에 흐르는 신앙과 절제된 삶이 인상 깊게 마음에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서 저도 모르게 수도원의 삶에 빠져들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한번쯤 경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하루 종일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는 수도사들의 모습이 부러워 보였습니다. 함께 영화를 보던 아내가 “당신은 저런 삶을 살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아마 하루 종일 얘기 한 마디 나누지 않고 혼자서 지내는 수도원의 생활을 견딜 수 있냐는 뜻일 겁니다.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저는 원래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려서 수다를 떨거나 무슨 일을 도모하기 보다 혼자 있는 시간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목회를 하다 보니 말도 많이 하고 여러 얘기도 듣게 됩니다. 이 다음 은퇴 이후라도 기회가 된다면, 수도원 생활을 꼭 경험해 보고 싶습니다.

화려한 영상과 때로는 듣기에 거북한 상스러운 대화가 판을 치는 현대 영화들을 제치고, 말 그대로 침묵의 시간으로 들어가야 하는 <위대한 침묵>이 현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현대인들이 시끄러운 세상에 식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도시생활은 무척 시끄럽습니다. 한 밤중에도 소방차와 응급차의 소리가 들리는 거리의 소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들 입술의 말은 어떻습니까? 통계에 의하면 남성들은 평균 2만5천 개의 단어를 사용한답니다.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무려 1만 단어를 더 사용해서 3만 5천여 개의 단어를 구사하면서 대화한답니다. 그 가운데 듣기 좋고 아름다운 말들이 얼마나 될까요? 진실된 마음에서 우러나온 사랑의 대화는 얼마나 될까요? 대부분 일상의 대화들은 무의미하거나 나중에 녹음을 해서 다시 듣는다면 얼굴이 뜨뜻해질 정도의 창피한 언어들임에 틀림없습니다.

새해 첫 달에 <위대한 침묵>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시편 62편 1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여호와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 도다.” 새해 첫 주일 설교에서 올 해는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고요한 시간을 갖기로 성도님들과 약속한 것도 생각났습니다. 적어도 하루에 2-3분은 세상일을 모두 내려놓고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기로 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말을 너무 많이 합니다. 듣지 말아야 할 얘기도 너무 많이 듣습니다. 올 한해는 세상의 소리에 귀를 막고, 하고 싶은 말을 참으면서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는 훈련을 하기 원합니다. 그때에 미세하게 들려오는 하늘의 음성이 마음속에 울려 퍼지면서 우리의 삶이 더욱 풍요로워질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2010년 2월 21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 요즘 어디를 가나 쉽게 듣는 인사말입니다. 말 그대로 성탄절은 즐거운 절기입니다. 아니 즐겁다 못해서 기쁜 성탄입니다. 울려 퍼지는 크리스마스 캐롤을 듣고 있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가벼워집니다. 성탄 카드와 선물을 주고 받는 것도 마음을 즐겁게 합니다. 캘리포니아는 불가능하지만, 성탄절 아침에 하얀 눈이라도 내려서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된다면 연인들의 마음은 한없이 설렐 것입니다. 이쯤 되면 말 그대로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하지만 매년 맞는 성탄의 참 뜻은 이것보다 훨씬 깊고 넓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한 농부의 집에 세를 들어 사는 가난한 구두수선공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아내와 번갈아 입는 낡은 외투가 한 벌 있었습니다. 어떻게든 여유가 생기면 양 가죽으로 된 외투를 아내에게 선물하고 싶은 것이 구두수선공의 소박한 소원이었습니다. 하루는 모아놓은 돈을 갖고 양 가죽을 사러 읍내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양 가죽이 터무니없이 비싼 겁니다. 외상으로 양 가죽을 사려고 하니까 가게주인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구두 수선공은 화가 나서 가지고 있던 돈으로 그만 술을 마셔 버렸습니다.

얼큰하게 술이 취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 교회 앞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교회 앞에 이상한 물체가 있는데 술김에 보아도 사람 같습니다. 괜히 다가갔다가 화를 당할까 두려워 못 본 척 하고 지나쳤지만 양심에 가책이 생겼습니다. 발길을 돌려서 가까이 가서 보니 아주 온화하게 생긴 젊은 청년이 추위에 떨고 있습니다. 측은지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입고 있던 한벌뿐인 낡은 외투를 젊은이에게 냉큼 벗어줍니다. 젊은이에게 이말 저 말을 걸어보니 집도 없고 거할 곳도 없답니다. 결국 이 젊은이를 집으로 데리고 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마음이 아주 환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하지만 집에 도착하자 젊은이를 본 구두수선공의 아내가 펄펄 뜁니다. 그나마 있던 외투도 젊은이에게 주었고, 가난한 살림에 군식구가 늘었으니 아내가 화를 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합니다. 그때 구두수선공이 아내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당신에게는 하나님도 없소?”

이 한마디에 구두수선공의 아내는 자신의 인색함을 뉘우치고 젊은이를 받아들입니다. 갈 곳 없는 젊은이는 가게에서 구두수선을 돕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이 젊은이는 하나님께 벌을 받고 세상에 내려온 천사였습니다. 훗날 이 천사는 다시 하늘로 올라갑니다. 결국 구두수선공과 그의 아내는 은연중에 천사를 대접한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이 소설에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 앞에 “모든 인간은 스스로를 걱정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대답합니다. 한 벌뿐인 외투가 없어도, 가난한 살림에 군식구가 들어와도,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사랑만 있다면 그것이 가장 큰 행복이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성탄의 정신 속에도 이와 같은 사랑이 깃들어 있습니다. 세상을 한없이 사랑하셔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 죄로 인해 죽어가는 인생을 살리기 위해 결국에는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신 예수님! 그 예수님의 사랑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랑을 조금이라도 이웃에게 전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성탄의 즐거움보다 더 깊고 오묘한 하늘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200.12.24. SF한국일보 종교칼럼)

두 개의 바구니

올해도 어김없이 추수감사절을 맞이했습니다. 성경에서는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라고 교훈하지만 막상 세상에 나가면 감사보다는 불평과 원망이 앞서는 것이 우리네 범인들의 삶입니다. 게다가 “범사에”라는 수식어가 부담이 됩니다.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in everything)” 감사하라는 권면이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라는 말속에는 “모든 상황에서(in all circumstances)” 감사하라는 뜻도 들어있습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고 범사에 감사하기로 결심도 하지만, 막상 삶 속에서 범사에 감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엊그제는 101번 도로를 이용해서 샌프란시스코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아침나절인데도 생각보다 도로가 많이 막혔습니다. 알고 보니 앞에서 접촉사고가 나서 교통이 통제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심리가 참 묘합니다. 길이 막히다가 갑자기 소통이 원활해 지면 제한속도를 생각하지 않고 앞으로 질주합니다. 저 역시 약속 시간에 늦었기에 사고가 난 곳을 지나자마자 엑셀레이터를 밟고 달렸습니다.

그런데 앞에 가던 차가 속도를 내지 않습니다. 얼마나 답답한지 차선을 바꾸어보았습니다. 하필이면 앞에 있던 차도 따라서 차선을 바꿉니다. 하도 답답해서 경적을 울리고 싶었지만 꾹 참고 찬양CD를 틀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5분도 안되어서 앞에 경찰차가 있는 겁니다. 앞에 갔던 차들이 줄줄이 단속에 걸렸습니다. 그 순간 제 앞길을 막았던 자동차의 운전자가 얼마나 고맙게 느껴지던지요! 이처럼 우리들은 어떤 일이 벌어져야 감사하지, 그 이전에는 불평하고 원망하고 때로는 씩씩대면서 화를 냅니다.

하나님께서 두 명의 천사에게 각각 커다란 바구니를 주면서, 한 천사에게는 세상에서 불평을 바구니에 담고, 다른 천사는 감사만 바구니에 담아오라고 부탁하셨답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서 불평 바구니를 든 천사가 기우뚱거리면서 돌아왔습니다. 바구니가 너무 작아서 세상의 불평을 모두 담을 수 없다고 세상 사람들처럼 불평을 합니다.

한참 있다가 감사를 담은 천사가 얼굴에 미소를 뛰면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바구니가 텅텅 비어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정을 물으니 천사가 대답합니다.: “세상에 내려가보니 감사를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돌아다녔는데 반도 채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제 바구니에 들어있는 감사를 생각하니까 제 마음속에 감사가 넘쳤습니다.”

우리들 삶 속에도 불평과 감사의 바구니가 있다면 아마 불평 바구니는 틀림없이 가득 찼을 것이고, 감사 바구니는 비교적 헐렁할 겁니다. 이처럼 우리들 역시 감사보다는 불평에 익숙합니다. 감사는 노력해야 얻을 수 있는데, 불평은 저절로 생깁니다. 감사할 것들을 찾기가 쉽지 않은데 불평할 것들은 주변에 널려있습니다.

일년에 한번 추수감사절을 지킬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감사절만큼은 감사할 것들을 찾아보고, 세어보고, 인생의 감사바구니에 곱게 간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범사에 감사하기로 다짐할 수 있기에 추수감사절기는 그 어떤 쇼핑보다 우리 마음에 풍성함을 가져다 줍니다.

올 추수감사절을 보내면서, 마음 속에 있는 불평바구니를 비어내고 그것마저 감사 바구니로 바꾸어서 두 바구니 모두 감사를 가득 담는 행복한 삶을 살기로 결심합시다. (2009.11.26 SF 한국일보 종교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