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견디십시오

이번 달 칼럼주제를 생각하다가 그 동안 썼던 칼럼의 제목들을 훑어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작년 10월에 썼던 칼럼 제목이 “고통가운데 계신 분들께”였습니다. 경제가 어려워지기 시작할 때 썼던 칼럼이었고 하나님께서 고통 받는 분들의 편이 되어주신다는 글이었습니다. 그로부터 꼭1년이 지났지만 미국경제가 여전히 바닥을 헤매고 있습니다.

아마추어 레슬링에서 “빠떼루”라는 벌칙이 있었습니다. 원래는 “파테르”라는 레슬링 용어인데 한국의 한 해설자께서 빠떼루라고 발음한 것이 유행어가 된 것입니다. 빠떼루는 레슬링 경기에서, 상대방 선수가 자신을 굴려 넘어뜨리지 못하도록, 벌칙을 당한 선수가 최대한 몸을 매트에 붙이고 일정 시간을 견디는 동작입니다. 실제로 경기를 지켜보면 빠떼루가 자주 나옵니다. 우리나라 선수가 빠떼루를 받으면 마음이 조립니다. 상대방 선수가 팔로 우리선수의 허리를 감고 몸을 돌리려 할 때, 매트에 몸을 붙이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합니다. TV로 지켜보는 시청자의 마음도 조마조마한데 빠떼루를 당하는 선수와 코치의 마음은 오죽하겠습니까?

그런데 인생을 살다 보면 우리들 역시 빠떼루와 같은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이 잘못했거나 실수해서 레슬링 경기처럼 벌칙을 받기도 합니다. 이미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벌칙이든 실수의 대가이든지 다 지나갈 때까지 몸을 낮추고 견디는 것이 상책입니다. 때로는 자신과 상관없이 닥쳐오는 인생의 빠떼루도 있습니다.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이 인생의 매트에 바짝 엎드려서 빠떼루가 끝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빠떼루 자세에서 중요한 것은 머리를 드는 것입니다. 레슬링 경기에서 빠떼루 자세를 취하는 선수는 몸은 땅에 붙이지만 머리는 들고서 방향을 잡고 상황을 파악합니다. 인생길에서 만나는 빠떼루에서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머리를 숙이면 무기력해집니다. 방향감각을 잃기 쉽습니다. 호랑이에게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습니다. 왜 인생의 빠떼루를 당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하면 빠떼루를 견딜 수 있을지, 빠떼루가 지나가면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지 생각해야 합니다.

요즘 들어서 미국의 불경기가 끝났다는 언론보도가 눈에 띕니다. 실제로 다우주가지수도 1만선에 육박했고, 불경기의 근원지였던 뉴욕의 월가에서는 다시 보너스를 풀면서 돈 잔치를 한다는 씁쓸한 소식도 들립니다. 그런데 우리네 서민들의 살림살이는 말할 수 없을 만큼 힘겹습니다. 찬 바람이 나면 나아질 것을 기대했던 비즈니스도 여전히 잔뜩 흐림입니다. 아니 더 어렵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옵니다. 언론에서 떠드는 경기회복의 뉴스가 우리들에게 전해지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습니다. 게다가 경제학자들에 의하면 경기 회복 국면에 더 많은 기업들이 문을 닫는답니다. 계속되는 어려움에 그만 힘이 빠져서 두 손을 드는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끝까지 견딜 때입니다. 머리는 들고, 몸은 인생의 매트에 딱- 붙이고 인생의 빠떼루를 견뎌내야 합니다.성경에서도 끝까지 견딜 것을 교훈합니다.:”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4) 인내를 온전히 이루십시오. 매사에 마음을 단단히 먹고 견디십시오. 견디는 것이 힘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가 마지막에 웃습니다.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2009.10.22)

한 불쌍한 인생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쓴 “사람에게 얼마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파흠은 남의 땅을 빌려서 열심히 농사를 짓는 순진한 소작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농부의 마음에 욕심이 슬며시 들어오면서,자기 소유의 땅을 많이 갖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파흠은 마을을 방문한 나그네로부터 비슈키르라는 지역에 가면 비옥한 땅을 매우 싼 값에 구입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듣습니다. 많은 땅을 소유하는 것에 인생을 건 파흠은 여러 날을 걸어서 나그네가 알려준 곳에 도착합니다. 정말 그곳 사람은 친절하고 여유가 있었습니다. 파흠은 그들이 땅이 많고 부유해서 그렇게 목가적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파흠은 그곳의 촌장을 만나서 땅을 사기 위한 조건을 흥정합니다. 그런데 이곳의 규정이 이상했습니다. 촌장은 하루치 땅 값을 1천 루블에 팔겠다고 했습니다. 1천루블은 요즘 환율로 환산하면 40달러 밖에 안 되는 적은 금액입니다.문제는 하루치 땅 값인데, 그것은 해가 뜰 때 출발해서 해가 질 때까지 밟고 돌아온 모든 지역을 가리킨답니다. 이와 같은 거래조건을 전해 들은 파흠은 매우 흡족해 했습니다. 아주 싼 값에 넓고 비옥한 땅을 소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기 때문입니다.

파흠은 밤잠을 설치면서 땅 사는 날을 기다렸습니다. 이튿날 해가 뜨자 마자, 하루치 땅을 구입하기 위해서 길을 떠납니다. 시간을 아끼려고 힘껏 달렸습니다. 더 많은 땅을 갖기 위해서 쉬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면 갈수록 더 비옥한 땅들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파흠은 조금 만 더, 조금 만 더 욕심을 부리다가 그만 오후를 훌쩍 넘기고 말았습니다. 파흠은 죽을 힘을 다해서 마을로 돌아옵니다. 해가 막 지려는 순간, 간신히 촌장이 있는 마을에 돌아왔지만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파흠의 하인이 그를 일으키려는데 입에서 피가 흘렀습니다.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지나친 욕심이 결국 그의 목숨을 앗아간 것입니다. 그러자 하인은 곡괭이를 들고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의 길이인 6피트 되는 구덩이를 파서 파흠을 그곳에 묻어 주었습니다.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땅에 대한 욕심이 유달리 많았던 파흠에게 필요한 땅은 겨우 6피트였습니다.파흠이 적당히 멈추고 돌아왔다면, 많은 땅을 싸게 살 수 있었고 자신의 꿈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눈 앞에 펼쳐진 땅을 보면서 끝없는 욕심이 생겼고 그것이 지나쳐서 그만 목숨을 잃고 만 것입니다.

이 소설을 읽고 있으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파흠의 모습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싶어합니다. 우리들의 욕심이 한이 없습니다.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했습니다. 무엇이든지 지나치면 차라리 시도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도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커지면 사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결국 욕심은 사망에 이르게 하는 지름길입니다. 실제로 마음에 욕심을 품고 살면 스트레스도 더 많이 받습니다. 무엇보다 감사를 잃어버립니다. 동시에 행복도 사라집니다. 이처럼 욕심은 불행의 시작입니다.

기껏해야 6피트 정도의 땅만 필요한 우리네 인생입니다.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주어진 삶에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행복인 것을 톨스토이를 통해서 배웁니다.(SF 한국일보 2009.9.17 종교칼럼)

“일상 – 그 하나님의 신비”

어느덧 8월도 다 지나갑니다. 이 달이 가면 올해도 3분의 2가 지나는 셈입니다. 이렇듯 빠르게 흘러가는 세월을 두고 고려시대의 한 시인은 이렇게 읊었습니다: “한 손에 막대기 잡고 또 한 손에 가시를 쥐고/ 늙어가는 것을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을 막대기로 치려고 하였더니/ 어느새 백발이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커다란 강처럼 유유하게 흘러가는 시간 한가운데서 느끼는 인생의 무상함을 노래한 시조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한탄만 하고 있으면 한번뿐인 인생이 너무 초라해 집니다. 호주 출신의 작가 마이클 프로스트가 쓴 “일상–그 하나님의 신비(Eyes Wide Open: Seeing God in the Ordinary)”라는 책이 있습니다. 영문 제목을 그대로 옮기면“눈을 크게 뜨세요 그리고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세요”쯤 될 것입니다. 저자는 현대인들이 일상 속에 깃든 하나님의 은혜와 손길을 수없이 놓치고 산다고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들려오는 새소리, 일정하게 동이 터오는 새벽빛과 아름다운 저녁노을, 호숫가에 피어 오르는 아침 안개 등등 일상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손길을 조목조목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너무 특별하고 커다란 은혜를 추구한 나머지 잔잔히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언제나 곁에서 힘이 되어주는 남편과 아내, 우리들의 분신인 자녀들, 또 부모형제, 친구와 이웃들의 소중함을 잊고 삽니다. 길 가에 피어 있는 꽃들 속에도 하나님의 손길과 배려가 깃들여 있는데 무심코 지나칩니다. 하루 동안 겪는 무수한 사건들 속에도 하나님의 간섭과 섭리가 있건만 모든 것이 제 힘으로 된 듯이 으쓱대거나 일이 안되면 쉽게 절망합니다. 우리들 곁에서 동행해 주시는 하나님을 느끼는 것은 매우 짧은 시간뿐이고 대부분 불평을 입에 달고 삽니다. 왜 그럴까요?

마이클 프로스트는 두 가지 이유를 제기합니다. 첫째는 현대인들이 너무 바쁘게 생활하기 때문이랍니다. 삶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기 위해서는 약간의 서행이 필요합니다. 100마일로 달려가면서 경치를 구경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속도를 줄여야 주변을 자세히 관찰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사물을 대충 보고 넘어가기 때문이랍니다. 멈춰 서서 손으로 만져보고, 눈으로 살펴보고, 코로 향기를 맡아 보았을 때 그 속에 깃든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을 두고 프로스트는 이목집중의 훈련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에 눈과 귀를 집중해서 살펴보고 감지하는 훈련입니다. 그러면 이곳 저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보물찾기 하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은 저 멀리 무지개처럼 펼쳐있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그리고 손이 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서 하나님의 숨결이 들려옵니다. 그것을 감지하는 그리스도인은 무척 행복한 삶을 살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을 배웠기에 매사에 감사가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프로스트는 다음과 같이 우리를 일깨워 줍니다:“나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미적 감각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것이든 일상적인 것이 가장 특별한 것이다. 단순한 대답과 산문체 일색의 단조로움이 아니라 세심한 관찰력과 미적 감각, 창조 세계를 끌어안으려는 시인의 마음을 회복한다면 당신의 인생은 아름답게 변할 것이다.”-河-     (2009.8.20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아 버 지

저는 아버지께서 마흔 아홉에 낳으신 말 그대로 늦둥이입니다. 아버지께서는 평생 동안 흙과 씨름하신 평범한 농부셨습니다. 약주를 한잔 하시면 말문이 열리시지만 그 전에는 차근차근 얘기하시는 법이 없으신 우리 시대의 전형적인 무뚝뚝한 아버지셨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릴 적에는 밤만 되면 왜 그렇게 등이 가려웠는지요? 저의 짧은 팔로 등을 긁적거리면 아버지께서는 슬며시 다가오셔서 커다란 손으로 말없이 등을 긁어 주셨습니다. 농사일로 거칠어진 아버지의 손길이 등에 닿을 때마다 얼마나 시원했는지 모릅니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됐다고 말씀드릴 때까지 말없이 제 등을 긁어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표현은 안 하셔도 세상에서 저를 가장 사랑하셨습니다. 언제나 머리를 쓰다듬으시면서 쉰 가까이 낳은 자식이 커가는 것을 대견해 하셨습니다. 귀한 막내 아들이 농부가 되는 것이 싫으셨는지, 아버지의 일을 도우려고 논밭에 나가면 극구 만류하시면서 얼른 들어가서 공부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버지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드린 적이 별로 없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법대를 가서 법관이 되기를 바라셨지만 저는 문과대를 택했습니다. 직장에서 승승장구하며 여느 집 자식들처럼 아버지의 자랑이 되기를 바라셨지만 목사가 되겠다고 어느 날 갑자기 신학교를 갔습니다. 팔십이 넘으신 아버지를 뒤로 하고 태평양을 건너서 유학 길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가시는 길도 지켜드리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께서 하늘나라에 가신 후, 아버지의 수첩 속에 저의 옛날 직장 명함이 들어 있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한없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께서 하나님께 가신 지 5년이 지났지만, 바쁜 목회를 핑계로 아버지 묘소에 가서 큰 절 한번 올리지 못했습니다. 자식에 대한 섭섭함과 노년의 외로움을 속으로 감내하셨을 아버지를 생각하면 죄송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그런 제가 어느덧 두 아들을 둔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저는 아들과 친구처럼 지내는 말 그대로 신세대 아빠입니다.아이들과 한 침대에서 뒹굴고, 가끔씩 아이들과 팔씨름을 하면서 수선을 피웁니다. “사랑한다”는 말도 종종 합니다.하지만 그러다가도 아이들이 자기들 고집대로 하는 것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 장가도 가기 전에 이놈들이 벌써 아버지를 무시하나……’ 별 것도 아닌 일에 섭섭한 마음이 듭니다. 어쩌면 자기는 모로 걸으면서 자식들에게는 바르게 걷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아빠인지도 모릅니다.

곧 아버지 날이 다가옵니다. 올 해는 왠지 모르게 하늘 나라에 계신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납니다. 말없이 깊은 정을 주신 아버지의 마음과 손길을 생각해 봅니다.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우실 만큼 무뚝뚝하신 아버지셨지만 그 아버지가 그립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불러봐도 아버지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대신에 마흔 아홉에 낳으신 늦둥이가 어느덧 대학생이 된 아들을 둔 아빠가 되어 있을 뿐입니다. 제가 아버지께 받은 사랑을 얼만큼이나 자식들에게 나눠 줄 수 있을 지……자식들이 내 생각대로 가지 않아도 속으로 삭히고 자식들이 잘 되기를 응원해 주고 기도해 줄 수 있을지……

내리사랑이라고 자식이 아버지를 뛰어넘을 수 없음을 다시금 실감하면서 마음 속으로 그리운 아버지를 불러 봅니다.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2009년 6월 18일)

숨은 축복 찾기

목사에게 주일 저녁은 달콤한 휴식의 시간입니다. 심방이나 다른 약속이 잡힐 수도 있지만, 주일예배를 마친 후의 모든 일들은 한결 부담이 없습니다. 아마 목사처럼 월요일을 가벼운 마음으로 맞이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저 역시 주일 저녁의 자유함과 한가로움을 나름대로 즐기는 편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피곤해도 주일 밤 늦게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큰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는 일입니다. 저는 그 시간이 무척 행복합니다. 집에서 학교까지의30여분은 아무도 간섭할 수 없는 우리 부자만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대개 아들이 운전을 하고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옆 자리에 앉습니다. 조심스럽게 운전하라고 잔소리도 하지만, 그 때만큼은 좋은 얘기만 하려고 노력합니다. 여자친구가 있는지도 슬쩍 떠봅니다. 아들이 얘기하기 전까지 시험성적은 묻지 않습니다. 센스가 있는 아빠라면 그 정도 예의는 지켜줘야 합니다. 그러면 아들도 허물없이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습니다. 어떤 때는 오바마 대통령까지 들먹이면서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눕니다. 그때마다 아들이 어느덧 의젓한 청년으로 커있음을 발견합니다.

처음에는 주일 저녁에 아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는 것이 무척 피곤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시간이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앞으로 아이가 진학이나 직장을 찾아서 멀리 떠나거나 가정을 꾸미면 부자지간에 이런 시간을 내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렇고 보니 이 순간은 하나님께서 우리 부자를 위해서 숨겨놓으신 축복의 시간이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들의 신앙이 너무 한탕주의가 되었습니다. 축복도 양적인 개념으로 바뀌어서 웬만큼 큰 일이 생기지 않으면 축복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게다가 여기저기 간증집회를 다니시는 분들이 워낙 큰 축복을 받고 극적인 인생을 살다 보니 우리 같은 범인들은 어디에 명함도 내밀지 못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십니까? 하나님은 작은 것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분입니다. 작은 자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다윗은 형제들 가운데 막내였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가 가지고 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흔쾌히 받아서 축사하시고 그것으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축복은 작은 것에도 숨겨져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도 바로 여기에 맥이 닿아있습니다. 소위 큰 축복을 받고 감사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아주 작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으로 여깁니다. 매일 아침에 건강하게 일어날 수 있는 것부터 축복입니다. 한 낮에 머리 위를 비추는 태양을 볼 수 있는 것도 축복입니다. 밤이 되어서 평안하게 잠을 청할 수 있는 것도 축복입니다. 또한 아무리 어려운 일을 겪어도 그 안에 숨겨진 축복을 찾아내는 사람만이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숨겨진 축복을 찾아내서 그것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올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번 한 주간은 우리 삶 속에 숨겨진 축복을 매일매일 열심히 찾아봅시다. 어릴 적에 소풍 가서 보물찾기 하듯이 하나님께서 우리 주변에 숨겨놓으신 축복을 찾아보는 겁니다. 그러면 누구보다 우리 자신이 행복해지고 삶 속에 감사가 넘칠 것입니다. 내일은 또 하나님께서 어떤 축복을 숨겨놓으실 지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2009년 5월 14일)

새옹지마(塞翁之馬)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아침에 신문을 펼치면 지역 소식을 제일 먼저 읽고 본국판은 맨 나중에 봅니다. 태평양 너머의 조국소식이 더 궁금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꾸만 속상한 소식만 들려오니 일부러 외면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xml:namespace prefix = st1 />노무현 전 대통령과 그 가족이 한 기업인으로부터 수백만 달러의 뇌물을 받은 비리가 온 신문에 보도되고 있습니다.

왜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퇴임 후에 하나같이 검찰의 조사를 받고 본인이나 가족들이 감옥까지 다녀오는 지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절대 권력을 가진 후에 초심을 잃고 그만 권력이 놓은 덫에 스스로 걸려 넘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아니 권력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착각해서 안하무인으로 행동한 대가인지도 모릅니다.

새옹지마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복이 화가 되기도 하고, 당장에는 화로 보이지만 나중에는 그것이 복이 될 수도 있다는 우리네 인생사를 잘 표현해 준 말입니다. 구약성경의 전도서가 새옹지마와 같은 인생의 이치를 잘 가르쳐줍니다. 전도서의 초반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것을 히브리원어와 함께 읽으면 헛된 인생이 실감나게 발음됩니다:하벨 하발림/하벨 하발릴/하콜 하벨. 헛헛헛/하하하!발음만 놓고 보면, 우리네 인생이 하도 헛헛해서 너털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표현으로 들립니다.

여기서 “헛되다“라는 히브리 원어 ”하벨“은 ”숨결(breath), 덧없음(vanity), 물거품(vapor)”이라는 뜻입니다.인생지사가 지나고 보면 “다 그렇고 그렇다 (덧없다)”는 것입니다. 유대 랍비 전통에 의하면 전도서는 솔로몬 왕이 인생의 길흉화복을 모두 경험한 후인 노년에 지었다고 합니다. 천하의 솔로몬 왕도 한 평생을 돌아보니 인생이 거기서 거기였다는 것입니다. 솔로몬 왕의 교훈을 우리 나라 대통령들이 마음에 새기면 행동거지를 꽤 조심할 텐데 권력을 잡고 있을 때는 이런 교훈이 귀에 들리지 않는가 봅니다.

목표를 세상에 두고 있으면 언제나 불안하고 숨이 막힙니다. 바람이 어디서 불어서 어디로 갈지 모르듯이 인생도 세상풍파 속에서 표류합니다. 우리들의 인생을 자세히 살펴보면 전도서의 가르침대로 물거품과 같기 때문입니다.어차피 인생길은 이십 보 백 보요 새옹지마처럼 복과 화가 번갈아 오는 법입니다.

하지만 전도서는 물거품과 같은 인생을 단지 탄식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전도서의 마지막 장은 젊은이에게 주는 교훈으로 막을 내립니다; “젊을 때에 너는 너희 창조주를 기억하라”. 덧없는 세상을 의미 있게 사는 비결은 일찍이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사는 것이라는 깨우침입니다. 헛된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지만 우리의 눈을 창조주 되신 하나님께 고정해야 합니다. 기쁨과 슬픔이 번갈아 오는 인생길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기보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밤하늘의 북극성처럼 언제나 거기 계시면서 인생길의 기준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힘이 들고 앞이 깜깜해도 너무 초조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 훗날 생각해 보면 복이 화가 되고 화가 복이 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길은 모두 거기서 거기입니다. 그렇다면 시선을 영원하신 하나님께 고정시키고, 느긋하게 인생길을 걸어가는 것이 새옹지마와 같은 인생길을 일정하게 사는 비결임을 깨닫습니다. (2009년 4월 16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인생은 마라톤 경주입니다

평생 동안 스포츠 중계를 했던 아나운서가 방송에 나와서 인터뷰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스포츠 중계라면 안 해 본 것이 없는 아주 베테랑 방송인이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각종 스포츠 중계 가운데 마라톤 중계가 가장 힘들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라톤 경기는 42.195킬로미터를 두 시간여에 걸쳐서 뛰기만 합니다. 선수들간에 몸싸움도 별로 없습니다. 가끔 경기 막판에 극적인 순간이 연출되기도 하지만 다른 경기에 비하면 밋밋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마라톤 경기를 두 시간여 중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엊그제 한국의 입지전적인 마라토너 “봉달이”<?xml:namespace prefix = st2 /><?xml:namespace prefix = st1 />이봉주 선수가 마지막 은퇴경기를 가졌습니다. 비록 올림픽에서 우승을 하지 못했지만 그의 마라톤 경력은 화려합니다.또한 연약해 보이는 외모 때문에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하는 마라토너였습니다. 한번은 이봉주 선수의 발이 언론에 공개된 적이 있습니다. 그의 발은 하도 많이 달려서 닳아 버렸다고 보일 만큼 만신창이였습니다. 게다가 이봉주 선수는 왼쪽과 오른발이 다른 짝 발을 갖고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그런데 이봉주 선수가 세운 기록이 가히 세계신기록 감입니다. 그는 올 해로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런이봉주 선수가 그의 나이와 똑 같은 40번째 마라톤 완주라는 대기록을 세운 것입니다. 이것은 세계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대단한 기록이라고 합니다. 그 동안 이봉주 선수가 달린 거리는 훈련 량을 합쳐서 지구를 두 바퀴 돈 것에 해당한다니 그야말로 온 국민의 박수를 받아 마땅합니다.

신학교 시절 목회실습 시간에 선배목사님을 찾아 뵌 적이 있습니다. 은퇴를 앞두신 목사님께서 목회를 준비하는 우리들에게 목회는 마라톤이라고 조언해 주셨습니다. 서두르지 말고 한 번에 어떤 결실이나 변화를 기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건강과 가족을 챙기라는 말씀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10년 가까이 목회를 하면서 그 선배목사님의 조언이 더욱 귀하게 다가옵니다.

어디 목회만 그렇겠습니까? 우리네 모든 인생이 마라톤과 같습니다. 외롭고 밋밋한 것이 인생길입니다. 남들의 인생길은 극적인 순간도 있고 매우 재미있어 보입니다. 자녀들도 잘되고 모두들 금메달을 목에 주렁주렁 걸고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 외롭고 지리하고 마라톤 경기에서 언덕을 오르듯이 매일같이 허덕허덕입니다. 결승점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더 지칠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남의 떡이 커 보여서 그렇지, 알고 보면 모든 사람들이 숨을 헐떡이면서 인생의 마라톤 경주를 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중간에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고 급한 마음에 빨리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인생은 마라톤 경주와 같습니다. 멀리 보아야 합니다. 자기 속도를 지키면서 끝까지 달려야 합니다. 이봉주 선수가 40번의 완주를 했듯이 우리들 역시 어떤 일을 시작했으면 결승점에 이르도록 달리고 또 달려야 합니다. 그래서 먼 훗날 인생을 돌아보면서 몇 번의 완주기록을 세웠노라고 하나님과 자신 앞에서 흐뭇한 마음으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빨리 달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끝까지 달려서 마지막 결승점을 통과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2009년 3월 19일 SF 한국일보종교컬럼

날마다 새 날을 맞습니다

“날마다 새롭다”는 뜻을 가진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원래 이 말은 주전17세기경 중국 은나라의 탕왕이 세숫대야에 기록했던 “일신일일신우일신(日新日日新又日新)”을 줄인 말입니다. “하루가 새롭고,날마다 새롭고, 또 새롭다”는 뜻입니다.

중국 최초의 고대왕조를 세웠던 은나라의 탕왕은 이 글귀를 청동 세숫대야에 새겨놓고 아침마다 자신을 돌아보고 하루를 새롭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아마 탕왕은 청동대야에 물을 받아 세수를 하면서, 지난 날과 지난 밤의 어두운 일들을 모두 씻어 버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수대야에 새겨진 글귀를 보면서 하루를 새롭게 살려고 결심했을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을 돌아보고 하루하루를 새롭게 살려는 노력덕분에 지금까지 덕이 넘치는 어진 임금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저는 직장 생활을 하다가 뒤늦게 신학을 공부했고 40줄에 들어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처음 목회지에서 겁도 없이 우리 네 식구가 교회를 개척했다가 개척초기에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나중에 교회가 번듯하게 세워졌지만 지금도 개척 당시를 떠올리면 우리 네 식구는 서로를 바라보면서 웃을 뿐입니다. 그 이후로 우리 큰 아들은 목사가 되지 않고 평신도로 봉사하겠다고 합니다.

목회의 길에 접어든지 어느덧10년이 가까워 오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목회는 늘 어렵게만 느껴집니다. 목회 현장에서는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납니다. 마음이 털썩 내려앉아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눈물로 기도할 때가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그때마다 제가 암송하고 묵상하는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 3장 23절 말씀입니다.:”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예레미야 애가는 제목 그대로 예레미야 선지자의 눈물의 노래입니다. 애가서는 첫 구절부터 ‘슬프다”로 시작해서 마지막 구절에도 하나님의 진노가 끝나지 않았고 자신들을 완전히 버리셨다고 고백할 정도의 슬픈 말씀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애가서의 한 가운데 위에 인용한 소망의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폐허가 된 예루살렘과 절망 가운데 있는 백성들의 마음속 한가운데 아침마다 새롭게 임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것은 은나라를 세웠던 탕왕이 세수대야에 새겨놓았던 “일신우일신”과 비교할 수 없는 확실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저는 힘들고 낙심될 때마다 이 말씀을 마음 한 가운데 새겨놓고 하루를 새롭게 시작합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새로운 힘을 더해 주고 목회와 삶의 현장 한 가운데 소망을 주시는 것을 몸소 체험합니다.

아침이 오는 것이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 만큼 삶이 힘겹고 자신감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무감각하게 아침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일상에 길들여져서 새로움과 삶의 경이로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역시 마음 판에 “일신우일신”이라는 글귀를 새겨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어제가 힘들고 절망 속에 있었어도 오늘은 하나님께서 주신 새날입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아침마다 새롭게 임하는데 우리들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뿐입니다. 날마다 새롭게 임하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체험하고 싶습니다.날마다 새로운 날을 주심에 감격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싶습니다. 주의 성실이 아침마다 크기 때문입니다.(2009년 2월 19일 SF 한국일보 칼럼)

좋은 말 세 마디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던지는 말 한마디의 가치가 천 냥과 맞먹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좋은 언어습관은 인생에 커다란 밑천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많이 듣는 세 마디의 말이 있습니다.어찌 보면 미국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표현들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Sorry(죄송합니다)”, “Excuse me(실례합니다)” 그리고 “Thank you(고맙습니다)”입니다.

버스 안이나 상점 등에서 무심코 어떤 사람과 몸이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미안해서 겸연쩍어 하고 있을 때 상대방에서 먼저쏘리/sorry”라고 말합니다. 사실미안해요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도리어 핑계를 대거나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 것 자체를 자존심 상하는 일로 여기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가장 가까운 친지나 부부간에도미안해요!”라는 말을 잘 못합니다. 때로는 누가 먼저 미안하다고 말을 할 지 기다리면서 힘겨루기를 합니다. 하지만 먼저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미안합니다 아니 뭘요, 괜찮습니다는 이해심이 넘치는 세상을 만들어 주는 좋은 말입니다.

10
년 전 처음 미국에 왔을 때 뉴욕 할렘 가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습니다. 시끄러운 음악이 거리에 울려 퍼지고 골목으로 들어가니 웃통을 벗은 청년들이 쳐다보고 손가락질을 합니다. 간신히 자동차를 세우고 가장 선하게 보이는 아저씨에게 길을 물어보려는데엑스큐즈 미/excuse me”라는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식으로 그냥헤이(여봐요)!”라고 불러서 길을 물었는데 친절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아저씨는 무척 마음씨가 좋으신 분이셨습니다. 이제는 저도 습관이 되어서 “excuse me”를 자주 사용합니다. “실례합니다라는 표현은 자신을 배려해 달라는 정중한 요청입니다. 자신의 허물과 부족을 인정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기 전에 상대방을 배려해 주는 공손한 표현입니다. “실례합니다 괜찮습니다는 밝고 투명한 세상을 만들어주는 좋은 말입니다.

미국에서 하루 중에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아마도 댕큐일 것입니다. 때로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가 아니라 사회통념상 습관적으로 튀어나오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미국사람들은 댕큐를 남발합니다. 이유야 어째든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들어서 속이 상해 본적은 없습니다. 도리어 괜스레 기분이 좋아집니다. 별로 큰 호의를 베푼 것도 아닌데 감사하다는 말을 들으니 겸연쩍기도 하고 이제는 자연스레천만에요라고 답변합니다. 살아가면서 서로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웃는 얼굴에 화낼 수 없듯이, 상냥한 미소로댕큐라고 말하는데 얼굴을 찡그릴 수 없습니다. 이처럼 감사합니다 천만에요는 훈훈한 세상을 만들어 주는 좋은 말입니다.

어느덧 2009년 새해에의 첫 달이 훌쩍 지나고 있습니다. 올 한 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여전히 잔뜩 흐림입니다. 이런 때 일수록 죄송합니다” “실례합니다” “고맙습니다라는 세 마디를 입에 달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그러면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 한층 따뜻해지고 무엇보다 좋은 말을 사용하는 우리들 각자의 마음과 삶이 맑아 질 것 같습니다. (SF 한국일보 2009.1.21일자 종교칼럼)

아쉬움을 넘어 감사를…

어떤 사람이 사막을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내려 쪼이는 햇볕과 뜨거운 모래의 열기를 참고 여행하다 보니 기진맥진해서해가 떨어지자마자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꿈결에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내일 해가 돋거든 당신의 주머니마다모래를 가득 채우시오. 분명 좋은 일이 있을 것이요사막이야 널린 것이 모래 아닙니까? 여행자는 다음 날 아침 동이트자마자 주머니에 모래를 가득 채웠습니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모래가 주머니에 가득 채워져 있으니걷는 것이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조금 걷다가 모래를 적당히 덜어내고 밤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이튿날 잠에서 깨어났을 때 다이아몬드 몇 개가 바닥에서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깜짝놀라서 일어나 보니 주머니에서 다이아몬드, 에메랄드, 진주와 같은 보석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주머니의 모래들이모두 보석으로 변한 것입니다. 여행자는 땅을 쳤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중간에 모래를 버리지 말았어야 했는데,주머니가 많이 달린 옷을 입고 왔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왕이면 커다란 자갈을 짚어 넣을 걸 등등 아쉬움과 후회에털썩 주저앉아서 가슴을 쳤습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여기저기서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들의 한결같은 교훈은 욕심에 대한 경계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더 가지려는 소유욕이 있습니다. 옛 어른들의 표현을 빌리면 “움켜지려는 마음”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주머니 속에 있는 보석들도 공짜로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잃어버린 것에 미련을 둡니다. 그러다 보니 아쉬움과 후회가 밀려옵니다. 대신에 감사하는 마음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집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지나간 날들을 돌아보면 아쉬운 것이 많습니다. 특히, 올 해는 쓰나미처럼 갑자기 밀어닥친 금융위기와 경제불황으로 사막과 같은 광야길을 걸어 왔기에 아쉬움이 더욱 큽니다. 그 가운데 흘러 보낸 시간이 매우 아쉽습니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면서 허무하게 흘러 보낸 시간들을 떠올리면 하나님께 부끄러울 따름입니다.부지런히 살겠노라고 새해에 결심했지만 편한 것을 추구하는 천성이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었습니다. 분주하게 살았지만 열매를 맺지 못한 시간들도 많습니다. 내 뜻대로 살아 보려고 발버둥치고 내 이름을 드높이려고 열심히 뛰어다녀봤지만 허전함만 남아 있습니다.

한 해를 보내고 나서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시니라는 잠언말씀의 의미를 새삼 깨닫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아쉬움이 밀려들지만 거기에 매여 있는 것은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애를 쓰고 순간순간 알차게 계획하며 살았다 해도 아쉬움은 늘 남는 법입니다.

이제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아쉬운 일보다 감사한 일들을 기억해 내고 싶습니다. 우선 마음 속에 감사 주머니를 하나 만들어 놓는 겁니다. 그리고 가정적으로, 직장과 사업 속에서 감사하고 기뻤던 일들을 감사 주머니에 담아보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끝까지 채울 수 있을까 걱정도 되지만, 올 초부터 지금까지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려보면감사 주머니가 순식간에 가득 찰 겁니다. 그 주머니를 가슴에 안고 기우뚱거리면서 하나님 앞에 나오는 순간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2008.12.18 SF한국일보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