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들의 추수감사

올해는 추수감사절을 맞는 우리들의 마음이 그리 편치 않습니다. 좀처럼 흔들릴 것 같지 않던 미국경제가 불안감에 휩싸여있습니다. 월가에 불어 닥친 금융위기는 우리네 서민들의 삶 속까지 파고 들었습니다. 경제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가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가운데 추수감사절을 맞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400여년 전 유럽에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신대륙으로 이주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신대륙에서의 새로운 삶을 향한 커다란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순례자들(Pilgrims)”이라고 불렀습니다. 우선, 영국 성공회에 반대해서 네덜란드의 레이든이라는 지역에 살고 있던 일단의 청교도들이 신대륙에 가기 위해 스피드웰이라는 배로 영국 런던에 도착했습니다. 영국 런던에서 메이플라워라는 무역 선을 하나 더 빌려서 두 대의 배로 대서양을 건널 예정이었습니다.

신앙의 자유는 물론 생사가 걸린 순례길이였으니 얼마나 철저히 준비하였겠습니까? 하지만 처음부터 어려움이 닥쳐왔습니다. 우선 스피드웰이라는 배에 문제가 생겨서 대서양을 건널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할 수 없이 메이플라워호에 짐과 102명의 순례자들이 옮겨 타고 한대의 배로 대서양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대서양을 절반쯤 건넜을 때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102명의 승객 가운데 한 명은 거친 폭풍에 바닷속으로 빠졌다가 간신히 살아나기도 했습니다. 노약자들은 심한 뱃멀미로 고생을 했습니다.

항해 도중에 임신부 가운데 한 사람이 아이를 낳아서 102명으로 시작된 순례길이 새 생명의 탄생과 더불어 103명으로 마칠 것 같은 기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대륙에 도착하기 5일 전에 한 명이 목숨을 잃고 102명의 숫자를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이들은 원래 계획한대로 뉴욕의 허드슨강에 도착하려 했지만 북쪽 보스턴 근교의 케이프 코드에 닻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해 겨울을 비좁은 배 안에서 보내면서 순례자들 가운데 절반이 폐렴과 전염병 등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처럼 추수감사절의 유래 속에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나선 순례자들의 아픔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들은 66일 동안 대서양의 거친 파도와 싸웠습니다. 죽어가는 신앙의 동지들을 가슴에 묻으면서 어떻게든 신앙의 꿈을 펼치려 사력을 다했습니다. 원주민의 도움을 받는 행운도 있었지만 낯선 환경을 개척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첫 번째 추수감사절을 보내는 순례자들의 마음은 말 그대로 만감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신대륙에 왔던 순례자들의 계획이 조금씩 어긋나고 목적지까지 변경된 것을 보면, 신앙의 순례길이 뜻대로 되지 않음을 발견합니다. 절반이 목숨을 잃은 것을 보면서 신앙을 찾아 떠나는 순례길의 험난함과 아픔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걷는 신앙의 순례길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400년 전 신대륙에 도착한 순례자들이 모진 역경을 이겨내고 첫 번째 추수감사절을 지켰듯이, 우리들 역시 어떤 어려움과 희생이 닥쳐와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서로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다면 감사의 축제를 벌일 날이 우리 앞에 분명히 찾아 올 것입니다.

2008년 추수감사절을 보내면서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희망이라는 두 글자를 아로새겨 놓았으면 좋겠습니다.(2008. 11. 20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고통 가운데 계신 분들께

지난 주에 시립 도서관에 들렸다가 표지가 온통 푸른 색인 책을 발견했습니다. 무심코 손에 들고 서문을 읽고 있는데 마음에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책 제목이 에밀리 디킨슨의 시(詩)에서 따온 Blue Peninsula였습니다. 우리 말로 번역하면 “푸른 반도”라고 해야 할까요? 병명을 알 수 없는 불치병으로 육체와 생명까지 마비되어가는 아들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마음을 글로 옮긴 책이었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하도 잘 웃어서 “이삭”이라고 이름을 지었답니다. 이삭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아들입니다. 100세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그만 웃어버립니다. 그래서 아들 이름이 “웃음”이란 뜻의 이삭이 되었습니다. 책 속의 이삭이는 14살까지 이름처럼 잘 웃고 밝은 아이로 건강하게 자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이삭이가 다리를 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몸이 비틀리고 걷기 조차 힘들게 되었습니다. 여러 유명한 의사들을 찾아갔지만 병명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몸은 정상이 아니었어도 정신이 살아있으니 아들을 대학에 보냅니다. 그런데 입학해서 3개월이 지났을 때 학교로부터 정신질환이 있어서 더 이상 학업이 불가능하다는 연락을 받습니다. 퇴행성 치매증세가 나타나서 생각이 멈추고 기억력이 급격히 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왜 그런 현상이 이삭이에게 생겼는지 아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이름조차 모르는 불치병을 8년째 앓고 있는 아들을 둔 어머니는 자신의 심정을 칼 필립스라는 시인의 싯구를 인용해서 세상에는 “숨도 쉴 수 없는 제4의 장소”가 있는 것 같다고 토로했습니다. 그래도 이 어머니는 자신의 책 마지막 장에 세 가지 단어를 기록해 놓았습니다:
평안(peace), 소망(hope), 기쁨(delight).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한 것들은 대개 육체나 마음에 심한 고통을 주기 마련입니다.때때로 신앙으로도 견디기 힘들 만큼 어려운 순간이 찾아옵니다. 원인도 모르고 끝도 보이지 않으면서 점점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고통의 순간들입니다. 시인의 말처럼 세상에는 숨을 쉴 수 조차 없는 제4의 장소가 있는 듯 합니다. 이처럼 모든 인생길은 힘겹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인생의 파도는 끊임없이 밀려옵니다. 그때마다 혼자만 어렵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일을 하는 목사인 저도 견디기 힘들만큼 어려울 때가 있답니다. 물론 극단적인 생각은 금물입니다.<?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대학 1학년 때, 영어 교과서에서 읽었던 “The show must go on(쇼는 계속되어야 한다)”이라는 문구가 생각납니다.혹시 지금 너무 힘드십니까?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펼쳐주신 인생의 무대에 다시 올라가십시오.여러분의 그 모습을 보고 힘을 얻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골방에서 기도해 주시는 분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설령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 없어도 너무 외로워하지 마십시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여러분 편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 오른손을 붙잡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주 너의 하나님이다. 내가 너의 오른손을 붙잡고 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돕겠다.”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xml:namespace prefix = st1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smarttags” />2008.10.16)

행복은 마음 속에 있습니다

지난 9 12일자 한국일보에 가슴을 찡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효부 베트남 댁 마당에 3각 희망이 떴습니다”라는제목과 더불어 세 식구가 환하게 웃는 사진이 실렸습니다. 얼핏 보면 한국 농촌의 평범한 가족처럼 보이지만, 이 번에“배용순 효부상”을 받은 베트남 댁 딘티덩씨에 대한 기사였습니다.

배용순 효부상은 독립운동가 매헌 윤봉길 의사의 부인 배용순여사를 기념하기 위해서 제정되었습니다. 배용순 여사는윤봉길 의사와 16세에 결혼해서 10년 만에 남편을 잃고 50여 년을 시부모님과 자녀들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며 한 평생을 사신 분입니다. 이번에 26회째를 맞이하는 시상식에 전국에서 세 분의 효부(孝婦)들이 선정되었는데 외국인 며느리로는 처음으로 전북 부안의 베트남 댁 딘(딘티덩)씨가 선정된 것입니다.

신문 기사에 의하면 딘씨는 3년 전 현재의 남편을 만나서 낯선 땅 한국으로 시집왔습니다. 그때 딘씨는 꿈 많은 20세 약관의 아가씨였습니다. 남편 오현모씨는 43세였으니 스물 세 살이나 연상인 어쩌면 아버지뻘 되는 남편과 결혼한 것입니다. 게다가 남편 오씨는 2급 장애인이었고 벽돌공장에 다니는 생활보호대상자였습니다. 팔순을 바라보는 시어머니도 모셔야 했습니다.

이쯤 되면 딘씨의 결혼생활이 어떨 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아마 요즘 젊은이들에게 이런 운명이 주어진다면 대부분결혼생활을 포기할 것입니다. 그런데 딘씨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아름답게 가꾸어 갔습니다. 넉넉지 못한 살림살이를도우려 열심히 밭일을 다녔습니다. 워낙 억척스럽게 일을 하니 동네에서 인기가 높답니다. 두 살배기 딸도 낳았습니다.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셨습니다. 동네사람들 사이에 “아, 그 얌전하고 착한 월남 새댁, 정말 요즘 한국 며느리보다낫당께”라고 칭찬이 자자하답니다.

딘씨에 대한 신문기사는 태평양 건너에 살고 있는 생면부지의 저를 울고 웃게 했습니다. 딘씨는 요즘 “너는 내운명”이라는 드라마에 빠져있답니다. 스무 살 나이에 띠 동갑을 두 번 가까이 지난 장애인 남편과 낯선 외국 땅에서살아가면서 “남편은 내 운명”이라고 말하는 딘씨! 신문기사를 읽어가면서 저도 모르게 마음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젖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인생도 있구나!왠지 딘씨가 안쓰러워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기사에 실린 딘씨의 활짝 웃는사진을 보면서, 이번에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습니다. 마음이 흐뭇해지고 ‘이것이 행복이구나!’는 생각이들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간 새벽예배에서 함께 나누었던 잠언 15장 말씀 두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고난 받는 자는 그 날이 다 험악하나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잔치하느니라”. 딘씨의 삶은 겉으로 보면 고난이요 역경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웃는 모습은 항상 잔치하는 삶입니다.얼굴이 빛이 납니다. 마음이 즐거워서 그렇겠지요.

행복은 우리들 마음 속에 있습니다. 밖에서 행복을 찾으면 늘 허전하고 쫓고 쫓기는 삶의 연속입니다. 반면에 마음속에깃든 행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키워갈 때 복에 겨운 삶을 살 수 있음을 바다건너 월남댁을 통해서 배웠습니다.(SF한국일보 2008 9 18일 종교칼럼)  

인간승리

베이징 올림픽이 한창 진행 중입니다. 중국이 세계로 도약할 마음을 먹고 대대적으로 준비한 올림픽이기에 개막전부터세인의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게다가 독립을 요구하는 티벳과의 갈등, 베이징의 심각한 공기오염과 테러의 위험까지겹쳐서 올림픽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높았습니다. 올림픽 개막에 맞춰서 발발한 그루지아와 러시아간의 전쟁소식도올림픽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마음을 무겁게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이해관계에 따라서 지나치게 상업화된 올림픽을보면서 눈살이 찌푸려집니다. 이 모든 것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매우 복잡함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

그래도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에서 어김없이 들려오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백미는 역시 인간의한계를 극복하고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들이 전해주는 인간승리에 대한 미담(美談)입니다.

이번 올림픽에는 장애인올림픽(패럴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던 두 선수가 참가했습니다. 한 선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수영선수 나탈리 투아(24)입니다. 투아는 8년 전 시드니 올림픽에 도전했지만 출전자격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오토바이 사고로 왼쪽발의 무릎 밑을 절단하는 수술을 하게 됩니다. 수영선수로서는 치명적인 부상이었습니다. 하지만투아는 장애를 딛고 일어섭니다투아는 이번 올림픽에 수영의 마라톤이라고 불리는 10km 경주에 출전합니다.한쪽다리로 앉아서 환하게 웃고 있는 투아선수의 사진을 보면서 그녀의 집념과 노력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힘차게물살을 가르며10km의 장거리를 헤쳐나갈 투아의 투혼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또 한 선수는 폴란드의 탁구선수 파르티카(19)입니다. 이 선수는 태어날 때부터 오른손 팔꿈치 아래가 없었습니다. 7살때부터 언니를 따라서 탁구 라켓을 잡고 2000년 시드니 장애인올림픽에 11세의 나이로 참가해서 올림픽 최연소기록을 세웠습니다. 수영선수에게 다리 하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손으로 하는 운동인 탁구선수에게 팔 한쪽이정상이 아닌 것도 커다란 장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르티카는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고 자신의 조국 폴란드를대표해서 단체전에 나섭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 밖에도 미국의 수영 선수 에릭 셴토(24)는 지난 6월 말 올림픽 예선 직전에 고환 암 선고를 받았지만 수술을 연기한채 올림픽에 참가했습니다. 자신과 똑 같은 고환암을 극복했던 미국의 싸이클 선수 암스트롱을 떠올리며, 올림픽에참가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병과 싸우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답니다. 불굴의 정신력입니다.

장애를 딛고 일어선 선수들이 정상인과 겨루어서 메달권에 진입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금메달을 목에 건선수들보다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올림픽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금메달을 몇 개씩 목에 거는올림픽 영웅들의 빛에 가려서 이들은 쓸쓸히 조국 행 비행기를 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야말로 금메달감입니다. 아니 이 선수들은 이미 금메달을 마음에 걸고 올림픽에 참가한 인간승리의주인공들입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에 잔잔한 감동과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불어넣어주기 때문입니다. (SF한국일보 2008.8.21 종교칼럼)

내 아우를 지키는 자 니이까?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아들은 농부였고 둘째는 양을 치는 목자였습니다. 농부인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그리고 목자인 아벨은 양을 잡아서 하나님께 각각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왠 일인지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형 가인의 제사는 거절하셨습니다.

신약성경 히브리서에는 믿음으로 드린 아벨의 제사가 가인의 제사보다 하나님 보시기에 더 나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인과 아벨의 사건을 직접 다루고 있는 창세기 4장에는 하나님께서 왜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고 이후에 일어난 가인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가인은 자신의 제사가 거절당하자 얼굴색이 변할 정도로 몹시 화를 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화를 내지 말 것을 요청하셨지만 가인의 분노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가인은 죄가 문지방에 웅크리고 있으니 분을 참고 마음을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들로 나가서 동생 아벨을 죽입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라는 죄목을 갖게 된 순간입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가인은 시치미 뚝 떼고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반문합니다. 현재 분사형을 사용하고 있는 히브리 본문을 다음과 같이 직역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금 지키고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맞습니다. 형은 동생을 지켜주는 사람입니다.형이 동생을 지켜주지 않으면 세상에 누가 동생을 지켜준단 말입니까? 이어지는 하나님의 질문이 가인의 비수를 찔렀을 것 같습니다.:”(그런데) 네가 무슨 짓을 하였느냐?“

형 가인이 동생 아벨를 죽인 사건은 하나님께서 동생의 제사만 받으신 것에 대한 형의 질투로 시작되었습니다. 가인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장남인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이 섭섭할 수도 있습니다. 정성껏 준비했다면 더더욱 이해가 안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질투는 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럴수록 자신을 한번 더 돌아보고, 동생 아벨을 찾아가서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기쁨을 함께 나누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인은 시기하고 질투했습니다. 그것이 분노로 발전했고 결국 자신이 지켜주었어야 할 동생을 죽이는 큰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시기와 질투 – 관계를 단절시키는 주범입니다. 마음속에서 만족을 빼앗아가고 불안과 분노를 갖다 주기에 누구보다 본인 스스로에게 커다란 해가 됩니다.

가인의 이야기가 단순히 옛날 이야기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지나치게 경쟁적입니다. 시기와 질투는 신앙에서도 그대로 표출됩니다. 하나님을 독점하려는 성향이 너무 강합니다. 축복을 혼자만 받거나 다른 이 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복을 받아야 성이 찹니다. 그리고 툭하면 분노하고 화를 냅니다.

언제부터인지 가인의 모습이 이처럼 우리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아벨과 가인의 사건을 보면서, 우리들이 서로에게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함을 다시금 느낍니다.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이웃의 기쁨을 함께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

과거에 그랬던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앞으로 그렇게 하겠다는 결심도 신빙성이 없습니다. 현재진행형(‘지금 지켜주고 있는 자’)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쓰러지기 쉽고 부서지기 쉬운 연약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SF 한국일보 2008.7.17)

편견과 교만

깊은 산속에 작은 옹달샘이 있었습니다. 옹달샘에서는 언제나 맑고 깨끗한 샘물이 솟아 나왔습니다. 큰 짐승한테 쫓겨 다니다가 겨우 몸을 피한 토끼가 이젠 살았구나 생각하니 갑자기 목이 말랐습니다. 그래서 옹달샘을 찾아 허둥지둥 목을 축이고는 “아이고. 시원하다. 물맛이 이렇게 달콤한 줄 몰랐네”라고 말했습니다. 조금 있자니 이번에는 감기가 잔뜩 걸린 사슴이 콜록콜록 기침을 하면서 비틀비틀 옹달샘을 찾아 왔습니다. 와서 샘물을 바짝 마른 혀로 몇 번 핥아 마시고는, “어 참 쓰기도 하다. 샘물 맛이 이렇게 소태처럼 쓴 줄은 몰랐어”하고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개미 한 마리가 옹달샘 곁 바위를 기어가다가 아차 잘못하여 데굴데굴 굴러 풍덩 샘물에 빠졌습니다. 개미는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있는 힘 다 내어 소리질렀습니다. “개미 살려요! 개미 살려요!” 물 위에 떠서 허우적거리는 개미는 옹달샘이 그냥 무섭기만 했습니다. 마침 바람이 휙 불자 가랑잎 하나가 매달려 있던 마른 가지에서 시나브로 떨어져 옹달샘 위에 내려 앉았습니다. 가랑잎은 샘물 위에 팔다리 죽 뻗고 누워 둥둥 떠다니며 “허허 참! 세상에 이렇게도 편한 침대가 다 있었던가? 아 기분 좋다.”라고 말했습니다.

옹달샘 둘레에 토끼, 사슴, 개미 그리고 가랑잎이 모였습니다. 먼저 토끼가 나서더니, “이 샘물은 세상에서 제일 달콤하고 시원한 물이야”, 사슴이 썩 나서서 “천만에 말씀! 이 옹달샘은 세상에서 제일로 소태처럼 쓴 물이야.” 죽을 뻔하다가 겨우 가랑잎 위로 기어올라 살아난 개미가 앞다리로 힘껏 도리도리를 하며 말했습니다. “말도 말아. 말도 말아. 옹달샘은 죽음으로 이끄는 넓고 넓은 문이야. 끔찍해!”

그러자 마지막으로 가랑잎이 말했습니다. “너희들 다 모르는 소리, 옹달샘은 말이지. 세상에서 제일 편한 침대야.” 넷이서 서로 자기 말이 옳다고 우겨대고 있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이 모든 얘기를 듣고 계시던 하나님께서 빙긋이 웃으시며 한 말씀하셨습니다; “허허허…… 옹달샘은 그냥 샘이란다.”

이현주 목사님의 <옹달샘은 샘이다>라는 동화책에 나오는 짧은 이야기인데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우리들은 자꾸만 자신의 관점에서 사물을 파악하고 이해하려 합니다. 토끼와 사슴 그리고 개미와 가랑잎이 옹달샘을 각각 평가하듯이 말입니다. 우리들이 갖고 있는 편견 때문입니다. 편견이 지나치면 자신만이 옳다고 우겨대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교만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체험하고 이해한 그 하나님만이 진짜인 것처럼 고집할 때가 있습니다.하나님을 자꾸만 좁디 좁은 자신의 생각 속에 가두어 두려고 합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편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자신이 갖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믿음을 그것만이 진리인 양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기도 합니다. 이보다 더 심한 교만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편견에서 비롯된 현상들입니다.

편견을 없애는 것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비결입니다. 그것은 내 눈으로 세상을 보지 않고, 창조주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고집과 편견을 버리고,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주변사람들을 받아주고, 존중해 주는 것입니다. 옹달샘이 그냥 샘이듯이 말입니다. (2008.6.19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인생의 파도타기

미국에 처음 와서 우리 가족은 동부에 살았습니다. 네 식구를 데리고 늦깎이 유학을 왔었던 저는 학업과 삶이 힘들 때마다 아내와 함께 대서양이 훤히 내다 보이는 해변가 바위를 찾곤 했습니다. 동부에서 중서부로 이사한 후에 바다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늘 아쉬웠습니다. 3년 전 샌프란시스코에 오면서 내심 기뻤던 것은 다시 태평양이라는 넓은 바다를 바라볼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힘들고 마음이 무거우면 바닷가를 찾습니다. 해변가 바위에 앉아서 넓게 펼쳐진 태명양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확 트입니다. 바다 끝에 있어도 하나님께서 그곳까지 함께 해 주신다는 시편 말씀도 생각 납니다.  밀려왔다가 부숴지는 파도를 보고 있으면 ‘인생살이도 다 그렇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바닷가에 가보면 파도타기를 즐기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서핑 보드 위에 몸을 싣고 파도를 타면서 묘기를 연출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제 마음도 시원해 집니다. 그리고 파도를 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배우는 교훈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파도 타기를 하는 사람들은 밀려오는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커다란 파도가 밀려 오기를 기대하는 듯 합니다. 우리들 역시 삶 속에서 밀려오는 파도를 겁내지 말아야 합니다. 타락한 세상은 끊임없이 엉겅퀴와 가시덤불을 냅니다.인생의 파도가 밀려 올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아무리 큰 파도가 밀려와도 그것을 타고 넘겠다는 단호한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파도 타기를 하는 사람들은 파도 위를 절묘하게 타고 다닙니다. 그러다가 파도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파도에 묻혀서 넘어집니다. 인생의 파도타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 속에 들어가 있으면 문제를 옳게 파악하기 힘들어서 허둥대거나 넘어지게 됩니다. 인생의 파도를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그 위를 타고 넘는 여유와 자신감이 요청됩니다.

또한 파도타기를 하는 사람들은 파도에 부딪쳐서 넘어져도 다시 일어납니다. 한번 넘어졌다고 파도타기를 포기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도리어 더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가서 더 큰 파도를 타고 나오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인생 길에서 넘어지는 것은 다시 일어나기 위한 전 단계일 뿐입니다.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서 인생의 파도를 맞으려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파도타기를 하는 사람들은 철저히 준비합니다. 파도타기에 앞서서 옷을 갈아입습니다. 서핑 보드도 늘 옆구리에 끼고 다닙니다. 이들은 무엇보다 파도를 타려는 마음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인생의 파도는 언제나 밀려옵니다. 고난의 파도가 없는 인생은 소설이나 영화에나 나올법한 일입니다. 인생의 파도가 밀려올 때, 파도를 타고 넘을 수 있는 도구, 방법,마음가짐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인생의 파도가 아무리 크고 험해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으면 파도에 묻히는 일은 없습니다.

준비된 사람은 언젠가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여기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굳건한 믿음이 있다면 인생길에 밀려오는 파도를 타고 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저기서 불경기라는 말이 들려오고 마음을 어둡게 하는 소식이 자꾸만 전해집니다. 이럴 때에도 밀려오는 파도를 멋지게 타고 넘으면서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몫임을 기억합시다. 힘내십시오! (SF 한국일보2008.5.22일 칼럼)

셀폰 이야기

지난 달에 우리 가족 모두 셀폰을 바꿨습니다. 그 동안 큰애와 저만 셀폰을 갖고 있었는데 새롭게 계약을 하면서 아내와 둘째도 셀폰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큰 애와 똑 같은 모델을, 아내는 둘째와 같은 모델을 선택했습니다.

집에 와서 그 동안 사용했던 셀폰을 모아둔 상자를 열어보았습니다.  6년 전 처음으로 사용했던 셀폰의 모습이 촌스럽고 투박해 보였습니다. 한 쪽 머리에는 수신 안테나가 뿔처럼 달려있습니다. 표면이 지나치게 미끄러워서 떨어뜨리기 일쑤였습니다. 살펴보니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입니다.

지금은 골동품처럼 보이는 전화기를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예전 생각이 납니다. 처음에는 길을 가다가 괜히 집에 전화를 걸곤 했었습니다. 한 동안 전화가 오지 않아서 교인들에게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가 나중에는 통화한도를 관리하느라 월말이 되면 쩔쩔매곤 했습니다. 긴급한 연락 받고 신속히 달려갔던 일, 길을 가다가 교인들의 기쁜 소식을 전해 듣고는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다가 옆에 있던 사람들을 보고 머쓱해 했던 일 등등 투박한 셀폰이지만 많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셀폰은 샌프란시스코로 옮긴 지 6개월여 만에 갖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국산 전화기였습니다. 빨간색이 중간에 들어가서 왠지 세련되어 보였습니다. 머리에 있던 뿔도 없어졌습니다. 신호음도 바꿔보고, 초기화면도 바꿔보면서 고성능 셀폰에 적응해 나갔습니다.

무엇보다 두 번째 셀폰의 압권은 전화기에 장착된 카메라였습니다. 드디어 저도 셀카를 하게 된 것입니다. 혼자서 또는 아내와 함께 사진을 찍어봅니다. 웃는 표정, 찡그린 표정, 기쁜 표정, 교인들이 보면 깜짝 놀랄 화난 표정…. 젊은이들처럼 표정을 지어보지만 화면 안에는 영락없는 40대 중반의 아저씨가 들어있었습니다. 어떻게 해도 표정과 모습이 어색하기만 했습니다.그래도 요즘 세대를 따라잡기 위해서 노력하는 스스로의 모습에 감동을 받고 격려하면서 셀폰에 추억을 담아 놓았습니다.

이제 세 번째로 갖게 된 셀폰은 뿔도 달리지 않고 두툼하지도 않은 슬림형입니다. 와이셔츠 주머니에 넣고 다녀도 불편함이 없을 만큼 가볍습니다. 새로운 셀폰을 구입할 때 아내는 서로 헷갈린다고 말렸지만,  함께 갔던 큰 아이가 저와 같은 모델을 선택하기를 은근히 바랬습니다.

이제 큰 아이는 올 여름에 대학에 갑니다. 지난 10년 동안 미국에 와서 가족이 똘똘 뭉쳐서 살았는데 큰 아이가 집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표현은 못해도 섭섭한 마음을 누를 길이 없습니다. 그래도 같은 전화기를 갖고 있으면 이심전심 마음이 통해서 부자지간에 자주 연락을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큰 애가 아빠의 마음을 알았는지 저와 똑 같은 점잖은 모델을 선택했습니다. “휴- 역시 저 놈 속에 내 피가 흐르고 있구나. 고맙다 아들아!”

자녀들이 커가면서 왠지 작아지는 아버지의 모습, 그렇지만 아이들이 조금만 생각해줘도 마음 속에서 울컥할 만큼 기뻐하고 감동하는 부모의 마음은 세대를 초월해서 똑같음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셀폰의 모델과 기능은 해가 다르게 바뀌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우리들의 마음은 언제나 한결같았으면 좋겠습니다.

새롭게 장만한 셀폰을 통해서 나누게 될 하늘나라 이야기 그리고 아로새겨질 추억들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흐뭇해 집니다. (2008 5.1 SF한국일보 컬럼)

외로움 저 너머

부활절을 기다리면서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보낼 때 마다 색다른 은혜를 체험하곤 합니다. 그래서 매년 맞는 부활절이지만 소홀히 하거나 관습적으로 지낼 수 없습니다. 사순절 마지막 주간에 마가복음을 묵상했습니다. 마가복음은 네 개의 복음서 가운데 가장 짧고, 사건의 전개가 빠르고 역동적인 복음서입니다.


영국 런던대학의 킹즈 칼리지 학장이었던 리처드 버리지라는 분은 네 편의 복음서, 한 분의 예수라는 책에서 마가복음에 그려진 예수님을 묶여진 사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첫 번째 장()에서 예수님은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표준새번역 막1:15)고 사자처럼 포효하십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속의 예수님은 참으로 외로우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교훈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귀머거리를 고쳐주면서 에바다(열려라)”라고 외치시고, 소경의 눈을 띠어주시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지도 못합니다.


예수님을 묶여진 사자라고 묘사한 것은 외롭게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3년 동안 동고동락하며 가르치셨던 제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넘깁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예수님 곁을 떠났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예수님을 버려도 자신만은 끝까지 예수님과 함께 하겠다던 베드로 역시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빌라도의 법정에 모인 백성들은 극악무도한 강도 바라바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예수님 편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급기야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다시 한번 묶인 사자처럼 포효하십니다.:“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이처럼홀로이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저에게 가장 크게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속의 예수님은  의연하게 행동하십니다. 외로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임을 당당히 선언하면서 주어진 길을 걸어가십니다.

그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려는사명감때문이었을 겁니다. 제자들이 곁을 떠나고,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물론 로마의 군인들까지 얼굴에 침을 뱉으며 조롱을 하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상황에 휩싸이지 않으시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마음뿐이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큰 소리를 지르고 운명하실 때 성전 휘장이 두 폭으로 찢어지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옛 시대는 가고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예수님에 비하면 어림없지만 우리들 역시 신앙의 순례길을 걸어가면서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세상 천지에 혼자 서 있는 것 같은 영적고독의 순간들입니다. 앞으로 나가고 싶어도 손 발이 묶인 듯 꼼짝달싹하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때는 홀로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손발이 묶인 사자처럼 인생의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 간다 하여도 예수님처럼 포효하면서 외로움 저 너머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꿋꿋하게 인생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 끝에는 부활의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2008.3.20 SF한국일보)  

삶 속에 드리운 무지개

동부에 살 때 나이아가라 폭포를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두 번 방문했었는데, 나이아가라 폭포는 갈 때 마다 참 장관이었습니다. 폭포 근처에 도착하면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가 웅장하게 들려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 위에 펼쳐진 야경은 말 그대로 환상적입니다. 나이아가라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우비를 입고 폭포수가 떨어지는 바위 밑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폭포수가 머리 위로 떨어질 때의 짜릿함과 시원함을 잊을 수 없습니다. 또 한가지는 유람선을 타고 폭포 가까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방에서 들리는 폭포 소리와 하늘 위에서 떨어지는 듯한 폭포수의 향연을 보고 있으면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우러러 볼 때”라는 찬양이 절로 나옵니다.

이처럼 웅장한 나이아가라 폭포를 바라보고 있으면, 끊임없이 떨어지는 폭포수 위에 무지개가 선명하게 걸려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어떤 각도에서 봐도 일곱 색깔 무지개가 폭포수에 걸려 있습니다. 무지개가 얼마나 선명한지 비디오 카메라에 담아서 재생을 해도 그대로 나타날 정도입니다. 폭포수는 쉬임없이 떨어져서 하류로 흘러가지만, 폭포수위에 드리운 무지개는 정지된 영상처럼 폭포수에 걸쳐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부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영생을 폭포수에 걸쳐있는 무지개에 비교하였습니다. 쉬임없이 흘러가는 시간은 끊임없이 떨어지는 폭포수와 같습니다. 따라서 시간을 붙잡을 수는 없습니다. 젊어서는 영원히 살 것 같지만 금방 흰머리가 나고 인생을 마감할 때가 닥칩니다. 어쩌면 매우 허무하고 무상(無常)할 뿐입니다. 그런데 폭포수 위에 햇볕이 비취면 무지개가 생기듯이, 피조물인 인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 삶 한 가운데 영생이라는 무지개가 드리웁니다. 그때야말로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영원하고 진리 되신 하나님의 시간대를 체험하는 순간입니다. 허무해 보이던 인생이 아름다워 보이고 하나님의 손길을 눈으로 보듯이 체험하는 특별한 순간입니다.

2008년 새해도 한 숨에 떨어지는 폭포수처럼 빠르게 지나갈 것입니다. 이처럼 살같이 지나가는 광음(光陰) 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 속에서 영생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흘러가는 세월을 붙들어 매 놓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흘러가는 시간 속에 드리운 은혜의 무지개를 포착할 수는 있습니다. 일곱 색깔 무지개로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순간순간 경험하고 그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누리는 영생입니다.

올 해도 어김없이 365일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서 하늘의 은혜도 똑같이 내려 주실 것입니다. 마음이 아플 때는 위로해 주실 겁니다. 힘이 없고 낙심될 때는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가는 하늘의 힘을 공급해 주실 겁니다. 어디로 가야 할 지 몰라서 갈팡질팡 할 때는 우리들을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서 각자의 삶 속에 아름다운 무지개로 아로새겨지겠지요. 이렇게 하나님께서 삶 속에 만들어주신 아름다운 무지개를 바라보고, 무지개의 색깔을 하나하나 세어보며 사는 것이 영생의 삶입니다. 그때 비로소 마음 깊은 곳에서 다음과 같은 고백이 나올 것입니다.:“은혜로 사는 인생은 무지개처럼 아름답습니다.” (2008.1.17 SF 한국일보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