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절 이야기

올해도 어김없이 추수감사절을 맞이합니다. 아시다시피 추수감사절은 한국의 추석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가장 큰 명절입니다. 추수감사절이 되면 4천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가족의 품을 찾아 길을 떠난다고 합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청교도들의 전통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1620년 겨울, 102명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를 타고 현재 보스턴의 남쪽에 위치한 플리머스에 도착하였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대서양의 거친 파도를 이겨냈지만 도착하자마자 동부의 혹독한 겨울을 이기지 못하고 거의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됩니다. 살아남은 50여명의 청교도들 역시 신대륙의 생소한 환경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때 인근지역에 살고 있던 아메리칸 인디언 원주민들이 청교도들을 도와줍니다. 곡식을 심는 법,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잡는 법, 독이 있는 채소를 분간하는 법 등을 원주민들을 통해서 배운 청교도들은 이듬해 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거둡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 자신들을 도왔던 원주민들을 초대해서 축제를 벌였던 아름다운 전통이 추수감사절 속에 깃들어 있습니다. 그렇게 해마다 추수감사절을 지키다가 1863년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이었던 아브라함 링컨이 추수감사절을 국가의 공휴일로 제정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칠면조 요리입니다. 칠면조는 원래 멕시코 북부와 미국동부가 원산지인 꿩 과에 속하는 동물입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면서 칠면조를 유럽에 전해주어서 유럽에서는 일찍이 칠면조 요리가 유행했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목덜미의 깃털이 일곱 가지 색깔로 변한다고 해서 칠면조라고 부릅니다. 칠면조가 추수감사절 음식이 된 것은 청교도들이 추수감사절에 야생터키를 잡아서 인디언들과 함께 잔치를 벌인 전통 때문입니다. 요즘도 추수감사절을 맞으면, 미국 전역에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터키들이 식탁에 오릅니다.  

추수감사절 전날 백악관에서는 대통령이 터키 한 마리를 놓아주는터키 사면식(turkey pardoning)”이 거행됩니다. 백악관의 추수감사절 만찬을 위해서 선택된 칠면조들이 미국의 유명한 농장에서 일년 동안 특별관리를 받으면서 사육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한 마리가 만찬석상에 올라가는 대신 풀려나서 그 여생을 동물원이나 야생 농장에서 호강을 하면서 보내는 행운을 잡는 것입니다.

트루먼 대통령이 1947년에 제정해서 올해로 60번째 터키 사면이 이루어질 예정이랍니다. 수많은 터키들이 죽음을 당하는 것에 미안한 마음을 갖는 미국국민들의 마음을 대통령이 대신 풀어주는 예식처럼 생각됩니다. 올 해는 과연 어떤 터키가 부시 대통령에게 선택되어서 목숨을 부지하게 될지 자못 궁금합니다. 또 동료들을 뒤로 하고 홀로 풀려나는 터키의 마음은 과연 편안할지!  

이처럼 추수감사절은 한 해를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리는 절기입니다. 또한 청교도들이 원주민들의 도움 없이는 살아남기 힘들었듯이 우리들 역시 부모형제 그리고 이웃의 도움이 있었기에 올해도 무사히 추수감사절을 맞게 되었음을 감사하면서 이웃들과 더불어 따뜻한 마음의 정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올 추수감사절에도 세계 곳곳에서 아름답고 정겨운 이야기들이 많이 들려왔으면 좋겠습니다. 복되고 풍성한 추수감사절 맞으십시오.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2007.11.15)  

칭찬과 격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한국의 연예오락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상대방을 비난하는 말과 저속한 말을 사용해서 문제라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사회자와 출연진들이 서로를 비하하고 조소하면서 시청자들로 하여금 대리만족을 느끼게 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한국의 오락 프로그램들이 방송이 지켜야 할 선을 넘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기사를 읽으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한번 우리의 입을 떠난 말은 다시 뒤돌아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얼굴의 한 가운데 입을 한 개만 만들어 놓으신 것 같습니다. 성경의 교훈대로 입에 파수꾼을 세워놓고 신중하게 말을 하라는 뜻이겠지요. 또한 남을 비난하고 비판하는 말은 상대방에게 커다란 상처를 입힙니다. 어떤 경우는 말로 인해서 받은 상처가 평생 동안 쓴 뿌리가 되어서 마음 속 깊이 자리잡기도 합니다.

<카네기 인간관계론>이라는 책에서는 비난을 집비둘기에 비유했습니다. 집비둘기는 언제나 때가 되면 집으로 다시 돌아온다고 합니다. 비난 역시 집비둘기처럼 언젠가는 자신에게 다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칭찬은 무쇠도 녹인답니다. 칭찬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일의 능률을 향상시키는 힘이 있답니다. 또한 모든 사람들은 인정받고 싶어하고 칭찬받고 싶어하기에 칭찬을 많이 하면 그만큼 좋은 친구들을 얻을 수 있답니다.

어떤 여성이 자기계발 프로그램에 참석했습니다. 한번은 그 프로그램에서 남편들에게 자기 부인에게 요구하고 싶은 것을 여섯 가지만 적어서 프로그램 진행자에게 제출해 달라는 과제를 주었습니다. 대부분의 남편들은 얼씨구나 하고 부인에 대한 불만 가운데 가장 큰 것부터 여섯 가지를 골라서 제출했습니다. 그런데 한 남편은 다음 날 아침에 꽃집에 전화를 해서 붉은 장미 여섯 송이를 자기 아내에게 배달해 달라고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장미와 함께 “당신에게는 고쳐야 할 여섯 가지가 하나도 없소. 나는 지금 당신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오.”라고 쓴 카드를 보냈답니다. 남편이 어떤 단점을 지적하고 비판할 지 가슴 졸이던 아내는 장미 여섯 송이와 카드를 받고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남편을 맞이했답니다.

우리 모두는 비난보다 칭찬을 듣고 싶어 합니다. 국어사전에서 칭찬을 “좋은 점을 지적해 주고 잘한다고 추켜세우는 것’이라고 정의해 놓았습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칭찬거리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10가지 가운데 9가지가 마음에 안 들어도 마음에 드는 1가지를 갖고 칭찬의 말을 건넬 수 있습니다.

격려는 “마음이나 기운을 북돋아 주는 것”입니다. 칭찬이 과거나 현재에 일어난 일을 대상으로 한다면, 격려는 앞으로 생길 좋은 일을 기대하면서 힘을 북돋아 주는 것입니다. “잘 할 수 있습니다.” “해 내실 수 있을 겁니다.” “힘 내십시오”라는 격려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우리들은 이미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칭찬과 격려의 말은 듣는 사람에게 약이 됩니다. 힘이 됩니다. 그리고 용기를 줍니다. 격려는 무너진 인생을 다시 세워주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 동안 만나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칭찬을 해 주세요. 손을 꼭 잡으면서 격려의 말을 건네보세요. 무엇보다 우리들 자신의 마음이 밝아지고 행복해 질 겁니다.(SF 한국일보 종교칼럼, 2007.10.18)

우리들이 희망입니다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예화를 소개합니다.

돈을 많이 벌고 세상에서 커다란 명성까지 얻은 부자가 있었습니다. 이 부자는 마지막으로 사람들로부터 성자라는 말을 듣고 싶었습니다. 부자는 성자의 도를 배우기 위해서 기차를 타고 성자가 사는 마을로 향합니다.

기차에 오른 부자는 일부러 가난한 사람들이 이용하는 삼등칸으로 갔습니다. “성자가 되려면 나처럼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해야지”라고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초라하게 보이는 한 노인 옆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목적지에 이르도록 자기가 어떻게 살았는지, 얼만큼의 부와 명예와 권력을 얻었는지, 그래도 교만하지 않았고 지금은 성자가 되기 위해서 가는 중이라고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옆 자리의 노인은 은은히 미소를 띠면서 부자의 얘기를 모두 들어주었습니다.

드디어 기차는 성자가 사는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기차역에는 수많은 인파가 나와있었습니다. 부자가 모자를 멋지게 쓰고 옷 매무새를 만진 후에 기차에서 내립니다. 그런데 이 멋진 부자에게 눈길을 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사람들의 반응에 당황한 부자가 옆에 있는 젊은이에게 묻습니다. “누구를 마중나오신겁니까?” “예, 성자를 마중 나왔습니다. 저기 오시네요.” 젊은이가 가리키는 성자를 보고 부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 옆자리에 앉아서 자신의 자랑을 모두 들어주었던 그 노인이 바로 성자였기 때문입니다.

진짜 성자는 자신이 성자라는 표시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가 성자인 것을 알아봅니다. 그의 삶이 성자이기 때문입니다. 성자는 자신을 화려하게 꾸미지도 않습니다. 겉모습이 성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성품이 성자임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께서 그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범한 목수의 가정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의 3년 공생애를 눈 앞에 그려보면 화려함 보다는 평범하다 못해 초라할 정도입니다. 그가 택한 열 두 명의 제자들 역시 우리들과 같은 평범한 서민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영락없는 나사렛 청년이었지만, 폭풍을 제어할 정도의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아프간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세상 사람들의 입에 마치 천덕꾸러기처럼 오르내립니다. 인터넷에 난무하는 댓글을 읽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사람들이 교회로 쳐들어올 것 같습니다. 아니 교회를 찾았던 사람들도 모두 발걸음을 돌릴 것 같습니다. 교회 안팎에서 비관론이 제기됩니다. 하지만 2천 년을 견뎌온 기독교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붙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안됩니다. 이제 우리 모든 성도들이 나서서 기독교를 바로 세울 때입니다. 영어에서 성자(Saint)를 지칭하는 단어를 성도들(saints)에게도 사용하듯이, 우리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을 닮는 성자의 삶을 살기로 결심할 때입니다. 겉모습은 비록 보잘것없고 평범해도 마음 속에 예수님을 품고 각자의 자리를 지키면 됩니다. 각자의삶을 통해서 우리들의 신앙을 세상에 보여줘야 합니다.

어지러운 세상이지만 그 속에서 “작은 예수”로 살아가려는 그리스도인들이 남아 있는 한 기독교에는 희망이 있습니다.바로 우리들이 희망입니다. (2007..9.20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쉼표와 숨표

저는 노래를 부를 때 박자를 잘 못 맞춥니다. 쉽게 말해서 “박자 치’인 셈입니다. 한번은 오케스트라 연주회에 간 적이 있습니다. 웅장한 음악과 감미로운 선율도 저의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심벌즈 연주자의 동작에 제 눈이 고정되었습니다.저처럼 박자를 못 맞추는 사람에게는 한 참을 쉬고 있다가 이따금씩 박자에 맞춰서 심벌즈를 울리는 모습이 참 신기했습니다.저는 찬양을 하면서 손뼉을 쳐도 조금만 지나면 옆에 분들과 박자가 맞지 않아서 어색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노래를 부르면서 박자를 맞추지 못하는 것은 바로 쉼표 때문입니다. 음정은 비교적 잘 잡습니다. 음표의 길이도 적당히 맞출 수 있습니다. 그런데 쉼표가 나오면 속수무책입니다. 속으로 ‘하나, 둘’을 세어도 번번이 들어가는 박자를 놓칩니다. 못 갖춘 마디로 시작하면 여지없이 두 번째 가사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저는 노래하다가 쉼표가 나오면 편안히 쉬지 못하고,피아노 반주자나 옆 사람의 눈치를 살펴야 합니다.

노래에서 쉼표뿐만 아니라 숨표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숨표에 따라서 숨을 쉬어야 노래의 가사가 제대로 전달된답니다. 합창을 할 때는 함께 숨을 쉬어야지, 숨표를 무시하고 제 멋대로 숨을 쉬면 다른 사람과 호흡이 맞지 않습니다.그때도 호흡이 짧은 저는 틈틈이 숨을 쉽니다. 그러다 보면 박자를 놓치기 일쑤입니다.

음악뿐 아닙니다. 우리들의 삶에도 “쉼표와 숨표”를 지켜야 합니다. 쉴 때 쉬지 않으면 나중에 피곤이 몰려와서 집중력을 잃기 쉽습니다. 인생길의 쉼표를 지키지 않고 일만하다가 중한 병에 걸리는 경우도 종종 봅니다.  “숨쉴 틈도 없이 바쁘다’는 말이 있는데, 아무리 바빠도 숨은 쉬고 살아야 합니다. 하늘을 쳐다보면서 심호흡을 하고 나면 마음이 상쾌해 집니다. 숨쉴 틈도 없이 바쁘게 산다는 것이 자랑거리는 아닙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쉼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엿새 동안 일하시고 일곱째 날 안식함으로 “쉼”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성경의 “안식”은 세상일의 중단입니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에는 집안의 종들까지 일손을 멈춰야 합니다. 세상일을 접고 온전히 하나님을 생각하고 예배하는 시간입니다. 세상에서 6일 동안 열심히 일하고, 일곱째 되는 날은 세상일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안식일은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의 모드 전환입니다.

현대인들이 일주일 가운데 하루를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루를 쉰다고 해도 그 동안 밀린 일들을 해야 합니다. 눈코 뜰새 없이 바쁜 이민생활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만큼 우리들은 직장과 사업 그리고 복잡한 인간관계에 쫓겨서 살아갑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쉬는 법을 터득할 만큼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만큼 바쁘게 살아왔습니다. 그래도 이제부터 조금 쉬어갑시다. 인생의 쉼표와 숨표를 지키면서 살아봅시다. 하루를 온전히 쉬지 못한다면, 일주일에 단 몇 시간 또는 몇 분이라도 세상 일을 내려놓고 숨 고르기를 하면서 하늘나라의 삶을 연습해 봅시다. 그래야 인생의 엇박자를 막을 수 있습니다. (SF한국일보 종교칼럼 2007.8.23)

얍복강 가에서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어머니 복중에서부터 형 에서와 다퉜습니다. 에서의 발 뒤꿈치를 붙잡고 둘째로 세상에 태어났지만 장자권에 대한 그의 집념은 대단했습니다.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사더니,훗날 아버지 이삭이 노년이 되었을 때는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습니다. 형 에서의 복수심에 위협을 느낀 야곱은 외삼촌이 있는 메소포타미아로 피신을 갑니다. 외삼촌 집에서 야곱의 삶은 그의 말대로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낸” 20여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얻기까지 14년이 흘렀습니다. 외삼촌 라반은 야곱의 품삯을 열 번이나 바꿔치기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야곱은 온 가족을 이끌고 가나안을 향해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이 눈 앞에 보이는 얍복이라는 강가에 도착했을 때, 거기서 큰 문제에 봉착합니다. 그의 목숨을 노리던 형 에서가 400명의 군사를 데리고 그를 죽이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외삼촌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날이 밝으면 형 에서와 맞닥뜨려야 합니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입니다.

칠흑 같은 밤입니다. 가족들을 먼저 얍복강을 건네 보내고 야곱은 홀로 강가에 남았습니다. 그때 누군가 야곱에게 와서 싸움을 걸어옵니다. 야곱은 날이 새도록 그와 씨름했습니다. 야곱은 결코 지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야곱이 씨름하는 장면을 두 인물 모두 “그(he)”라는 3인칭 주어를 사용해서 관람석에서 씨름경기를 관전하듯이 리얼하게 묘사했습니다. 비록 환도뼈가 부러졌지만 야곱은 끝까지 견딥니다. 마침내 그의 이름이 하나님과 사람을 이겼다는 이스라엘로 바뀌게 됩니다. 그가 원하던 축복도 받았습니다. 아침이 되어서 환도뼈가 부러진 야곱이 절뚝거리면서 다시 길을 떠날 때 아침 햇살이 그의 얼굴을 비췄습니다. 해피엔딩입니다.

우리들 역시 인생의 얍복나루에 홀로 남아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홀로 남았더니”라는 성경구절을 쉽게 읽고 넘겨서는 안됩니다. 한 밤중에 얍복강가에 홀로 남아 있는 야곱의 모습을 눈앞에 그리면서 한참 동안 이 구절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묵상의 마지막에는 얍복강가의 야곱의 모습 속에서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내야 합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인생길 한 운데 홀로 남아있는 외롭고 절박한 상황 – 인생의 순례길 속에서 우리들 역시 비슷한 상황에 처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들이 꼭 만나야 할 분이 있습니다. 우리들 각자의 얍복나루까지 친히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길 때까지 우리와 씨름해 주시고 결국에는 축복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과 씨름하는 사람들입니다. 인생의 얍복나루에 홀로 남겨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내가 졌다’고 말씀하실 때까지, 이름이 바뀌고 환도뼈가 부러질 때까지 하나님과 씨름해야 합니다. 그때 밤은 지나가고 아침 햇살이 우리의 인생길을 환히 비춰줄 것입니다. 하나님과 씨름하는 그리스도인의 인생길은 언제나 해피엔딩입니다. (SF한국일보 종교칼럼 2007.7.19)

길되신 예수 그리스도

저는 어린 시절을 한국의 조그만 농촌 마을에서 보냈습니다. 제가 살던 동네는 산 밑에 자리잡고 있었고, 동네 앞으로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들에 나가면 이리저리 펼쳐진 논두렁길이 나옵니다. 가을 녘 논두렁 길을 걷다 보면 황금빛으로 물들은 들판의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비좁은 논두렁 길이지만, 길 양 옆에는 부지런한 농부들이 심어놓은 콩이며 깨와 같은 곡식들도 여물어갑니다. 들판을 가로질러 이리저리 펼쳐진 논두렁 길은 제 기억 속에 풍성함으로 남아있습니다.

어릴 적 친구들과 함께 뒷산에 올라갔던 오솔길도 잊을 수 없습니다. 나무들 사이로 간간히 비추는 햇살을 맞으며 이마의 땀을 훔치면서 오솔길을 걸어갑니다. 새들이 지저귑니다. 이름 모를 들꽃들이 방긋 웃으며 인사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사시사철 푸른 모습으로 자기 자리를 지키는 소나무들도 만납니다. 꼬불꼬불 이어진 작은 길이지만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어느새 산정상에 도착합니다.

미국에 와보니 길이 참 시원시원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동 서부를 관통하고 남과 북으로 이어진 고속도로는 활짝 뚫린 신작로입니다. 넓은 평원을 가로지른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으면 가슴이 확 트입니다. 저 멀리 지평선이 보이고, 아지랑이가 피어 오를 정도로 까마득히 보이던 길도 금세 눈앞으로 다가옵니다. 자동차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광경도 자주 봅니다. 그런데 막상 그곳에 도착해 보면 언덕이 평지처럼 밋밋해서 거뜬히 오를 수 있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릴 때마다 우리의 인생길도 신작로처럼 넓게 그리고 평편하게 펼쳐지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길 가운데는 황당한 경우도 있습니다. 지름길이라고 생각하고 기분 좋게 운전해 왔는데 눈앞에 “우회하라”는 표지판이 있을 때는 매우 당황스럽습니다. 우회도로는 참을 만 합니다. 돌아가면 되니까요. 그런데 낯선 길을 운전하다 보면 종종 “막다른 길(dead end)”을 만납니다. 그때는 참 허탈합니다. 뒤돌아나가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인생길도 마찬가지입니다.지름길인 줄 알고 신나게 달려왔는데 그 길이 우회도로입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생길이기에 막다른 길을 만나기도 합니다. 열심히 달려온 길이 막다른 길일 때 밀려오는 절망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때 우리가 꼭 선택해야 할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나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끊어진 길을 이어주셨습니다. 이웃과의 단절된 관계도 길 되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로 이어주십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오솔길 같은 포근함도 느낍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모두 맞아주시는 신작로와 같은 넓디넓은 마음도 갖고 계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면 “Dead End”를 만나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길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인생길을 새롭게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소망 가운데 인생길을 걸어가는 행복한 순례자들입니다. (SF한국일보 종교칼럼, 2007.6.14)

예배하는 가정

구약 성경의 창세기에는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으로 이어지는 족장들이 나옵니다. 이들의 신앙과 삶에 대한 기록을 족장사라고 부릅니다. 족장(族長)은 말 그대로 가족의 수장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이 부족이나 국가를 형성하기 전에 가족단위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창세기의 족장들은 완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실수를 연거푸 두 번씩 저지릅니다. 부전자전이라고 하더니 이삭 역시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입니다. 창세기의 세 번째 족장인 야곱의 인생은 말 그대로 파란만장입니다. 아버지를 속여서 장자권을 얻어낸 야곱은 평생 동안 속고 속이는 일에 연루됩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의 열 두 아들이 훗날 열 두 지파의 조상이 됩니다.

창세기의 족장들이 이렇듯 완벽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 이삭,야곱 모두 한 가정의 가장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열심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땅에 이르자 마자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백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린 사건은 아브라함 믿음의 백미입니다. 그의 아들 이삭 역시 이곳 저곳으로 옮겨다는 유목생활 중에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외삼촌 집으로 피신가는 도중에 꿈을 꾸고 자기가 베고 있던 돌 베개를 세워서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이처럼 창세기의 족장들의 삶 한 가운데에는 언제나 “예배”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한 가정을 이끌면서 그들은 기쁠 때나 슬플 때, 죄를 지었을 때나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했을 때,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일찌감치 선택했고 믿음의 조상으로, 복의 근원으로 삼으셨을 것입니다.

지난 달 버지니아텍에서 일어난 참사 이후에 한인사회에 자녀교육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 동안 자녀들이 좋은 학교에 가고 좋은 직장을 얻는 것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면, 이제는 자녀들의 성품과 그들의 삶 전반에 관심을 가질 때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가정 예배를 활성화했으면 좋겠습니다. 온 식구가 일 주일에 최소한 한 번만이라도 둘러 앉아서 가정의 제사장되신 아버지의 인도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자녀들의 마음을 만져주실 겁니다.기도제목을 함께 나누면서 부모들의 애환과 자녀들의 고민을 서로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정에서 찬송이 울려 퍼질 때,자녀들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들이 사라지고 밝은 생각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의 가정을 예배하는 가정으로 만듭시다. 그러면 창세기 족장들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축복이 그대로 임할 것입니다. 부모나 자녀들이나 실수도 저지르고 때로는 죄도 짓지만, 예배 가운데 하나님께서 가족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예배하는 가정 –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는 비결입니다. (SF한국일보 종교칼럼, 2007.5.17)

벧세메스를 향하여

성경 속에는 갖가지 동물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노아는 홍수가 그치고 땅이 말랐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까마귀와 비둘기를 방주 밖으로 날려보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양이나 염소 그리고 때로는 소와 비둘기가 쓰였습니다.이 밖에도 독수리와 같은 날짐승, 사자와 같은 들짐승 그리고 고래처럼 큰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수많은 동물들이 성경에 등장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동물들 가운데 제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바로 구약성경 사무엘상6장에 나오는 벧세메스 길을 걸어갔던 두 마리의 암소입니다. 살아가면서 또는 목회를 하면서 힘겨울 때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서 깊이 묵상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에 패하면서 하나님의 법궤를 팔레스타인에게 빼앗겼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팔레스타인의 신당에서는 그들의 신 다곤이 하나님의 법궤 앞에서 고꾸라지고 팔다리가 끊어졌습니다.법궤가 가는 곳마다 전염병을 일으키고 큰 재앙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비록 전쟁에서 졌지만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능력 있는 신임을 적지 한 가운데서 보여준 셈입니다.

결국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법궤를 벧세메스라는 곳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하고 암소 두 마리를 데려왔습니다.이들에게는 아직 젖을 떼지 않은 새끼들이 있었습니다. 한 번도 멍에를 메어보지 않은 신출내기입니다. 이 암소 두 마리에게 난생 처음으로 멍에를 메게 하고, 새로 짠 수레를 연결시킵니다. 수레 위에는 법궤를 올려놓습니다. 암소 두 마리가 스스로 법궤를 끌고 벧세메스를 향해서 곧장 나아가면 팔레스타인에 일어난 재앙이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임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두 마리의 암소가 발을 맞춰서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게다가 자신들의 발걸음을 주시하고 있는 수많은 팔레스타인들의 눈길이 얼마나 부담스러웠겠습니까? 멍에를 처음 메었으니 얼마나 불편하였겠습니까? 배가 고파서 엄마를 찾는 송아지들의 울음소리가 귓전을 울렸을 테니 어미의 마음이 오죽했겠습니까? 당장이라도 멍에를 떨쳐 버리고 새끼들에게 돌아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본문은 두 마리의 암소들이 울부짖으면서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꿋꿋하게 벧세메스를 향해서 나아갔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벧세메스에 도착하자마자 이들은 희생제물로 드려졌습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자신의 몸까지 제물로 드려진 벧세메스의 암소를 생각하면 비록 동물이지만 조용히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그리고 벧세메스로 향하는 두 마리의 암소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을 연상시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뜻을 모두 이루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또한 벧세메스를 향하는 암소는 삶의 고통과 아쉬움을 가슴에 품고 신앙의 순례길을 걸어가는 우리들의 모습, 아니 이 시간 벧세메스의 암소를 생각하면서 가슴을 쓸어 내리는 바로 당신의 모습입니다. 소리를 내지도 못한 채 속으로 울음을 삭히면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꿋꿋하게 벧세메스 길을 향해서 나아가는 당신!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그리스도인이십니다. 힘내십시오!(SF한국일보종교칼럼, 2007.4.17)

두 남자 이야기

바다에 폭풍이 일어 배 한 척이 난파하면서 배에 타고 있던 남자 둘이 손바닥만한 섬까지 어렵사리 헤엄 쳐 갈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쩔쩔매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기로 하였다. 그 와중에도 누구의 기도가 더 힘이 있는지 알고 싶어 두 사내는 작은 섬을 둘로 갈라서 각각 차지하고 기도를 시작하였다.

그들은 제일 먼저 먹을 것을 청하기로 결정하였다. 기도가 끝나자 한 남자가 자기 구역에서 나무열매를 발견하고 배를 채웠다.다른 남자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일 주일이 흐른 뒤, 이쪽 남자는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서 아내를 얻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자 이튿날 배 한 척이 난파되더니 그 배의 유일한 생존자인 아리따운 여인이 섬에 도착하였다. 저쪽 남자의 기도는 하나도 응답되지 않는 듯 했다. 아내까지 얻은 남자는 신이 나서 이제 자녀와 집과 의복을 달라고 기도하였다.그랬더니 기도하는 것 마다 모두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가족이 그 섬을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다음날 보니 배 한 척이 가까운 해변에 와 있었다.

섬에 남아 있을 친구가 걱정이 되었지만 기도의 응답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축복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에 자신의 짐만 열심히 챙겼다. 그리고 섬을 막 떠나려고 하는데 하늘에서 소리가 들여왔다. “너는 어찌하여 네 동료를 남겨두고 떠나려 하느냐?” 기도가 모두 응답된 남자가 자신 있게 대답하였다. “내가 받은 복은 내가 빌어서 받은 것이니 나 혼자 누려야 할 몫입니다. 저 친구는 응답 한번 받지 못한 걸요.” 그때 하늘에서 이런 책망이 들려왔다. “헛소리 말아라. 내가 응답한 기도는 바로 저 사람의 기도니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남자가 응수하였다. “저 친구가 무슨 기도를 했기에 내가 받은 이 모든 복이 그의 덕이란 말입니까? 어디 말 좀 해 보시지요?” “저 사람은 너의 모든 기도가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했느니라.”

<이야기 속에 담긴 진실>이란 책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어떻게 보면 상투적이고 흔한 이야기 같지만 자세히 읽고 생각해보면 그냥 넘길 수 없는 진실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이웃사랑이 어떤 것인지도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복음성가의 가사가 떠오릅니다. “당신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 내릴 때…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누군가 기도하네.” 우리는 너무 자주 교만해 집니다. 조금만 상황이 나아지거나 좋은 일이 생기면 어깨가 으쓱해지고 세상이 자기 것인 양 우쭐댑니다. 모든 것을 혼자서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자기만의 하나님을 상정하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기도를 드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 힘으로 된 것이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큽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도움과 기도가 우리를 이 자리까지 인도해 주었습니다.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가져야 할 겸손한 마음입니다. 부활절을 대망하며 사순절을 보내는 요즈음,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주고 서로를 배려할 수 있는 따뜻한 마음들로 우리네 세상이 가득 찼으면 좋겠습니다. (SF한국일보종교칼럼 2007.3.15)

인재를 키우는 교회

요즘 언론에서 회자되고 있는 “요코 이야기 (원제 So far from the bamboo grove)”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본국 교단지의 요청으로 책을 사려고 미국서점에 들렸습니다. 곧바로 고객센터를 찾아서 책 제목을 직원에게 건넸습니다. 은근히 책이 없다는 말을 듣고 싶었는데 잠깐 기다리는 말을 남긴 직원이 직접 찾아서 책을 건네줍니다. 직원의 친절이 그 날은 그리 달갑지 않고 도리어 마음이 씁쓸했습니다. 그동안 동부의 몇몇 중학교에서는 이 책이 필수 독서목록에 들어 있었답니다.  한 한인 학생이 그 책을 읽고 학교에 문제를 제기함으로 세간의 이슈가 된 것입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절은 일본인들에게는 전쟁에서 패한 국치일입니다. 요코 이야기는 당시에 함경도 나남(청진)에 살던 요코라는 일본인 소녀가 가족과 함께  한반도를 떠나서 일본에 도착하기까지의 힘겨운 여정을 그린 일종의 수기와 같은 소설입니다. 이들이 원산과 서울을 거쳐서 부산까지 내려가는 여정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사연들, 당시에는 있지도 않았는데 요코가 오빠의 말을 듣고 책에 기록했다는 공산당의 만행, 일본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는 동안 여자 셋이 넘겨야 했던 힘겨운 순간들을 열한 살 소녀의 눈으로 기록했습니다.

책 서두에 있는 지도에 동해를 “일본해”라고 표기한 것부터 눈에 거슬렸습니다. 아무리 개인적인 경험이라지만, 우리 민족이36년간 일제 강점기에 겪은 수모는 온데간데없습니다. 대신에 한 가족이 한국을 떠나면서 겪은 단지 몇달 동안의 어려움을 마치 유대인의 아우슈비츠 탈출기인양 기록하였습니다. 현재 73세가 된 저자 요코는 보스턴 근교의 학교들을 순회하면서 이 책의 내용을 중심으로 강연을 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니 더욱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책을 모두 읽고 책에서 손을 떼고나니, 책의 내용보다 우리의 모습이 더 안타까웠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라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눈물로 호소하다가 한을 품고 생을 마감하는 정신대 할머니들을 보면서 그저 동정만 했고 나라 안에서만 야단법석을 떨었지 세상에 알리려는 노력은 부족했습니다. 현재 미국의 대학에서는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과목과 전공들이 커다란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엘리 위젤이라는 작가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경험을 문고판100여 쪽에 불과한 책(“Night”)을 써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했는지…

기독교 신앙에서는 사람을 키우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은 물론2천년 교회사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사람을 통해서 일하셨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해진 초창기에 한국교회는 훌륭한 신앙의 지도자들과 민족 지도자들을 많이 배출했습니다. 그때는 교회가 사회를 선도했었습니다.

요코 이야기에 지혜롭게 대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들의 이야기”를 세계에 알릴 인재를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무엇보다 교회가 사람을 키워야겠습니다. 교회의 재정에서 선교비를 책정하듯이 장학기금도 빠짐없이 책정해야겠습니다.특별히 이국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기에 조국과 한민족의 우수함을 세상에 알릴 동량(棟梁)들을 키우는데 교회가 더욱 힘써야겠습니다.  (SF한국일보종교칼럼, 2007.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