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코이야기를 넘어서

* 감리교 교단지인 기독교타임즈에서 요코이야기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보냈던 원고입니다. 같은 소재로 한국일보에도 칼럼을 썼습니다.

일제말기 일본이 패망할 때, 세 모녀가 한국을 탈출하면서 겪은 경험담을 소설형식으로 기록한 “요코 이야기” (원제: So Far from the Bamboo Grove, 대나무 숲 저 멀리)가 국내는 물론 이곳 한인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당시에 나남(청진)에 살던 열 한 살의 여자 주인공이자 저자인 요코는 언니와 어머니와 함께 서울과 부산을 거쳐서 일본으로 귀향하게 된다. 요코 이야기는 그 여정에서 자신들이 한국인들로부터 받았거나 목격한 폭행, 죽음의 위협, 강간의 순간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당시에 창설되지 않았던 인민군에 대한 기록 등 역사적인 사실을 왜곡한 것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지만, 이 소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일제 36년 동안 우리 민족을 강점했던 가해자가 소설 속에서는 피해자로 뒤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요코 이야기를 구입하기 위해서 미국서점에 들렀다. 내가 살고 있는 샌프란시스코는 이번에 처음으로 문제가 제기되었던 보스턴과는 정반대에 위치한 도시이기에 서점에 책이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면서 서점에 들어갔는데, 서점 직원이 영문판 요코 이야기를 손수 찾아서 가져다주었다. 그 순간만큼은 왠지 서점 직원의 친절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책을 사서 읽으려니 서두에 있는 지도에 눈이 먼저 갔다. 동해를 일본해(Sea of Japan)라고 표기해 놓은 것부터 눈에 거슬렸다.

책은 총 11장(章)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처음 여섯 장이 이들 세 모녀와 뒤에 남겨진 아들이 한국을 떠나는 과정을, 나머지 다섯 장은 일본에 도착한 후의 삶을 기록했다. 소설의 반전은 모녀가 겪은 한국에서의 어려움보다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가 죽는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 이후로 두 자매가 힘겹게 바느질 등을 해서 생계를 유지한다. 오빠와 두 자매가 재회하는 것으로 소설이 끝이 난다. 뒤에 쳐졌던 오빠는 한국인으로 위장해서 한반도를 떠난다. 오빠를 도운 한국 농부와 그 가족의 이름이 자세히 기록된 것이 새삼 눈길을 끈다. 아무리 개인적인 경험이라지만, 소설 속에는 우리 민족이 일제 치하에서 당한 수모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소설 다빈치 코드가 그랬듯이 내용과 구성이 사실적이어서 독자들로 하여금 소설의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게 할 가능성 또한 컸다.

미국에서 요코 이야기는 우리식으로 중학교 1-2학년 학생들이 영어시간(미국의 국어시간)에 읽어야 하는 독서목록에 들어있다. 처음에 문제가 제기된 동부의 보스턴과 뉴욕의 많은 중학교들이 요코 이야기를 독서목록에 포함해서 그곳의 한인단체들이 항의하는 일들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2월20일자 한국일보 미주 판에서는 LA의 한 중학교에서도 요코 이야기가 독서목록에 포함되어서 한인 학부모들이 학교에 항의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렇지만 미국의 학교들은 교사나 학교 당국 또는 교육청의 방침에 따라 독서목록을 결정하기 때문에 미국 전 지역의 중학생들이 요코 이야기를 읽는 것은 아니다.

일부지역이라고 해도 뉴욕이나 보스턴과 같은 대도시의 학생들이 요코 이야기를 읽는다는 것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감수성이 강한 10대 초반의 미국 청소년들이 요코 이야기를 읽고 한국 사람들에 대해서 무슨 생각을 할까? 혹시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을 핍박한 것으로 이해하지는 않을까? 우리 2세들이 수업시간에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곤욕스럽지는 않을까? 등등 여러 가지 질문이 생겼다. 여기에 일본을 은근히 선호하는 미국사람들의 정서를 생각하면 쉽게 넘길 문제가 아니었다. 현재 73세가 된 저자 요코 왓킨슨이 보스턴 근교의 학교들을 순회하면서 이 책의 내용을 중심으로 강연을 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니 더욱 마음이 불편했다. 마치 유대인의 아우슈비츠 탈출기처럼 자신의 한반도 탈출여정을 소개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뉴욕을 중심으로 일고 있는 한인단체들과 학부모들의 항의는 의미가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출판의 자유가 보장된 미국에서 저자 요코 왓킷슨의 완강한 변명을 뭐라고 할 수 없다. 국내에서 일고 있는 논란들은 자칫 단순히 민족주의적 분노에 그칠 수도 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할 수 있는 현실적 대응은 요코 이야기를 독서 목록에 넣은 학교의 한인 학부모들이나 인근의 한인단체들이 해당학교와 교사들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일이다. 그리고 가정은 물론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한국 역사를 올바로 가르치는 일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갔으면 한다. 나는 요코 이야기를 끝까지 읽고 나서,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미국의 대학에서는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과목과 전공들이 커다란 인기를 끌고 있다. 엘리 위젤이라는 작가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경험을 문고판 100여 쪽에 불과한 책(“Night”)을 써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했는지…얼마 전 워싱턴에서 자신들의 짓밟힌 삶을 눈물로 호소했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모습도 눈앞에 스쳤다.

요코 이야기가 갖고 있는 문제에 지혜롭게 대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요코 이야기를 너머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세계에 알릴 인재를 키워야 한다. 이 일을 위해서 미국에 있는 한인교회들이 앞장서야 할 것이다. 단지 교세확장에만 주력할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안목에서 우리 조국 대한민국과 한민족의 우수함을 세상에 알릴 동량(棟梁)들을 키우는데 교회가 더욱 힘써야할 때임에 틀림없다. (기독교타임즈 2007.2.21)

성탄절 새벽송

제가 어릴적 자랐던 시골마을에서는 크리스마스가 최고의 절기였습니다. 성탄절 이브 저녁에는 연극을 하면서 배우의 꿈도 키워보고, 캐롤송을 부르면서 가수의 꿈도 키울 수 있었습니다. 밤새워서 대본을 외우고 노래 가사를 외우던 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무엇보다 성탄절 날 교회에서 주는 과자와 사탕은 왜 그렇게도 맛이있었던지…

중학생이 되면서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새벽송 대열에 참여했습니다. 처음에는 새벽송 자체보다 교회에서 밤새도록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이 더 재미있었습니다. 새벽 서너 시가 되면 목사님께서 사시는 주택에서부터 새벽송이 시작되었습니다. 등치가 큰 청년이 커다란 자루를 어깨에 메고 앞서 갑니다. 집집마다 준비해 놓은 과자며 사탕을 담을 자루입니다. 대열을 인도하시는 집사님은 잡담은 물론 발걸음도 살금살금 걸으라고 주의를 주십니다. 그런데 장난꾸러기 아이들에게 그 말이 통하나요? 뒤에서 여학생들을 놀래 키고 남들이 찬양을 할 때는 추녀 끝의 고드름을 따서 피리 부는 시늉을 하면서 장난을 치곤 했습니다.

성탄절 날 새벽에 눈이 하얗게 내리면 정말 장관입니다. 산 넘어 동네로 통하는 오솔길의 소나무들은 눈꽃으로 덮여 있습니다.하얀 눈이 덮인 들판에 달빛이 비추면,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금방이라도 다시 나타나실 것 같습니다. 어떤 때는 기온이 너무 떨어져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새벽송을 돌곤 했습니다. 마음이 넉넉한 집사님들께서 중간 중간에 떡국을 대접해 주셨습니다. 추위에 꽁꽁 언 몸을 녹이면서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먹던 떡국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결혼을 하면서 도시에 있는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1980년대 말만 해도 도시 교회들도 새벽송에 열심을 냈었습니다.그런데 도시의 새벽송은 영—불편했습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다른 교회 새벽송 대원들과 만납니다. 왁자지껄입니다.때로는 서로 타려고 경쟁을 합니다. 아파트 복도에서 노래를 부르면 반대편 집의 문이 열리기 일쑤입니다. 시골에서 살금살금 걸어가던 낭만도, 천사의 목소리로 노래를 하려고 생 달걀을 한 개씩 먹고 출발하던 열심도 도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대신에 먼거리를 차를 타고 가야하는 것을 두고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더니 슬며시 새벽송이 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한인교회들도 새벽송을 돌았답니다. 그런데 요즘은 새벽거리를 다니는 위험과 도시의 복잡함,무엇보다 성탄절을 가족과 함께 보내려는 미국문화에 새벽송은 점차 자취를 갖춘 듯 합니다.

새벽송이 사라진 것은 괜찮은데, 새벽송을 돌면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고 새해의 복을 빌어주던 정겨운 마음까지 사라진 듯 해서 아쉽습니다. 어디 새벽송뿐입니까? 매일같이 날아드는 세일 전단들과 TV광고를 보면서 성탄절을 세상에 송두리째 빼앗긴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시대에 탄생하신다고 해도 여관을 잡기는 매우 어려우실 것 같습니다.

매년 맞는 성탄절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어릴 적 성탄절이 생각나는 것은 옛날에 대한 좋은 추억 때문만은 아닙니다. 교회도 많고 그리스도인들도 많고 온 세상이 성탄절인 줄 알지만, 진정으로 예수님의 탄생을 알릴 천사들의 발걸음과 목소리가 그립기 때문입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 (SF한국일보 종교칼럼 2006.12.13)

새해에는

정해년 새해의 첫 달을 보내고 있습니다. 태평양 건너 고국의 일각에서는 올 해가 600년 만에 찾아온 “황금 돼지해”라고 야단법석을 떨고 있답니다. 돼지 저금통도 황금색으로 만들고, 액세서리에도 황금돼지가 등장했답니다. 젊은 부부들은 한술 더 떠서 황금 돼지띠 아이를 낳으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인답니다. “황금 돼지해”라는 말은 정해년의 “정(丁)”자가 오행(五行)에서 붉은 색을 뜻하는 것에서 유추 해석된 것인데, 실상을 알고 보니 근거 없는 과장이고 일부 업체들의 상술이었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황당한 해프닝인 셈입니다.

황금 돼지꿈은 아니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벅찬 기대 속에 새해를 맞고 있습니다. 복 받는 것을 마다할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2007년 새해에도 우리들의 삶은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만만치 않게 전개될 것입니다. 때로는 산등성이에 걸려있는 무지개를 잡으려고 헛걸음 질을 칠 지도 모릅니다. 남들과 무리하게 경쟁하려다가 마음에 상처만 입고 중간에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숫자만 바라보고 정신 없이 살다가 구약성경의 전도서 기자처럼  “내가 해 아래서 수고한 모든 수고에 대하여 도리어 마음으로 실망케 하였도다”(전도서 2:20)라고 허탈해 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겉모습을 꾸미고 외형을 추구하고 있을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도바울의 권고처럼 속사람을 먹이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신앙인격을 갖추기 위해서 매일같이 애쓰고 자신을 돌아보아 야합니다. 지나가버리는 순간적인 것에 마음을 두기 보다 영원한 것을 바라보면서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신 분복(分福)에 감격하고 작은 일에도 감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러면 틀림없이 하루 하루가 행복에 겨울 것입니다.

2007년 새해를 맞는 첫 날에 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올 한 해 동안 제 눈을 지켜 주옵소서. 보아야 할 것을 보게 하시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이 눈 앞에 닥치면 찔끔 눈을 감게 하옵소서. 제 입을 지켜 주옵소서. 아름답고 고운말, 격려하고 칭찬하는 말들만 제 입술에 있게 하옵소서. 제 귀를 지켜 주옵소서. 수많은 소리가 들려오지만 들을 소리만 듣게 하시고, 남을 비난하거나 교회와 세상을 무너뜨리는 말들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보내게 하옵소서. 제 손과 발도 지켜 주옵소서. 낙심한 이웃들, 격려가 필요한 성도들의 손을 꼭 잡고 저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게 하옵소서. 도움이 필요한 분들께는 한 걸음에 달려가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올 한 해 동안 제 마음을 지켜주옵소서. 우리 교인들, 가족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려는 마음이 심장이 뛸 때마다 솟아나게 하옵소서. 매사에 넉넉한 마음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마음을 닮게 하옵소서.”

올 해도 어김없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인생 통장에 365일이라는 귀한 자산을 공평하게 예치해 주셨습니다. 인생 통장에 예치된 365일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는 우리들 몫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황금을 쫓기보다 속사람을 더욱 아름답게 가꾸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365일을 사용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SF한국일보 종교칼럼, 2007.1.18)

내리사랑

요즘 들어서 지난 봄에 돌아가신 어머님 생각이 부쩍납니다. 어머님께서 저를 마흔 셋에 나셨습니다. 그때 아버님 연세가 마흔 아홉이셨으니 거의 쉰둥이로 태어난 셈입니다. 저는 부모님의 사랑을 흠뻑 받고 자랐습니다. 은근한 사랑을 주셨던 아버님께서도 그러셨지만, 어머님이야말로 저에게 특별한 분이셨습니다. 마흔 셋에 막내를 낳으셔서 하나님 나라에 가시기까지 44년동안 어머님께서는 한시도 막내 아들을 잊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막내를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달게 치르셨습니다.

막내아들 가족을 미국으로 떠나 보내실 때도 어머님께서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이 울면 떠나는 아들의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머님께 큰 절을 올리고 어머님 무릎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는 아들을 못난 자식이라고 야단치셨습니다. 저희를 떠나 보낸 후에 슬픔을 삭히시느라 한없이 힘들어하시면서도 전화를 걸면 “너희만 객지에서 고생하지 않으면 된다. 쌀은 떨어지지 않았니?”라고 또박또박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두분 모두 세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줄 알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부모님께 받은 사랑이 새록새록 생각납니다.그리고 부모님을 꿈 속에서라도 한번 뵙고 싶을 만큼 그립습니다.

사랑은 이처럼 내리사랑입니다. 아무리 자식이 부모님을 생각해도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간이라도 빼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부모님께 받은 사랑을 평생 동안 갚아도 갚을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철이 들어서 갚을라치면 부모님께서는 세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부모님의 사랑만 내리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사랑도 내리사랑입니다.

화가 렘브란트가 그린 ‘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라는 작품을 보고 헨리 라우웬이 같은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누가복음 15장 속의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탕진한 말 그대로 ‘못된 자식”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이 집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아무런 조건없이 그를 맞아 줍니다.

렘브란트는 이 장면을 아주 감명깊게 화폭에 옮겨놓았습니다.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 온 아들이 무릎을 꿇은 채로 아버지 가슴에 머리를 묻고 있습니다. 분명히 흐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옷은 누더기입니다. 신발이 벗겨딘 왼쪽 발은 퉁퉁 부어있습니다. 오른쪽 발에 신고 있던 샌들은 모두 달아서 뒤꿈치가 드러날 정도입니다. 아버지 역시 아들을 기다리느라 무척 수척해진 모습입니다. 수염도 다듬지 않았고 볼은 푹 파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두 손을 내려서 아들의 어깨와 등을 감싸고 있습니다. “이 녀석아! 왜 이제 왔니?”라는 아버지의 음성이 들리는 듯 합니다.

탕자를 조건없이 맞아준 아버지는 우리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세상에서 지치고 힘들 때 언제든지 돌아가서 안길 수 있는 피난처되십니다. 설령 우리가 잘못 했더라도 하나님께 돌아가면, 하나님께서는 큰 손을 우리 어깨에 드리우시고 사랑으로 맞아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도 내리사랑입니다.

그러고보니 우리들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복덩이들임에 틀림없습니다. (SF한국일보 종교칼럼. 2006.11.16)

진실한 사랑

성 어거스틴은 교회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입니다. 교회 안에 여러 가지 논쟁이 난무하고 교회권력이 생겨서 교회를 흔들기 시작할 때, 어거스틴은 논쟁의 가닥을 잡아주고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신앙이 무엇인지 깨우쳐주었습니다. 어거스틴은 354년 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서 태어났습니다. 질풍노도와 같은 십대에 여자를 알았고, 20대에는 진리를 찾아서 방황했습니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의 기도와 어거스틴 자신의 깨우침으로 서른두 살이 되어서야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가 기독교의 진리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체험한 후에 기록한 것이 유명한 “고백록(The Confessions)”입니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사랑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큐피디타스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카리타스입니다. 큐피디타스는 탐욕적인 사랑인 반면에 카리타스는 영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사랑입니다. 큐피디타스는 남을 이용해서 자신의 잇속을 챙기려는 사랑이지만, 카리타스는 희생과 나눔의 사랑입니다. 큐피디타스에서는 사랑이 수단이 되지만, 카리타스에서는 사랑 자체가 목적이 됩니다. 큐피디타스가 생겼다가 없어질 소모적인 사랑이라면 카리타스는 샘물처럼 끊임없이 솟아나는 생산적인 사랑입니다.

어거스틴은 우리들이 어디를 향하는가, 즉 지향성에 따라서 사랑의 성격이 정해진다고 했습니다. 세상을 향하고 있다면 그것은 곧 탐욕적인 사랑으로 이끌리게 됩니다. 사랑한다는 미명하게 서로를 이용하고 자신의 잇속을 모두 챙긴 후에는 헌신짝처럼 버리는 변덕쟁이 사랑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할 때에 비로소 진실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용납하고,이웃도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향한 진실된 사랑고백이 저절로 우러나올 것입니다.:“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18:1).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상의 탐욕적인 사랑을 하나님을 향한 카리타스로 정화시킬 의무가 있습니다. 탐욕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진실된 하나님의 사랑을 펼쳐 보이므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줄 사명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온 교회에 주어진 사명입니다.

또한 어거스틴에 따르면 사람들이 (세상이) 우리를 즐겁게 해주려고 비위를 맞추거나 최고라고 추켜세울 때에 특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그것을 즐긴다면 여전히 큐피디타스를 극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존경 받는 삶을 살다가 세상에서 유명해진 후에, 세상 덫에 걸려서 인생을 망친 경우를 종종 봅니다. 세상이 자신을 즐겁게 해 줄 때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 카리타스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세상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가 자초한 불행입니다.

우리들은 간사하고 분별력도 부족합니다. 자신에게 잘해주고 이익이 있으면 세상과 하나님 가리지 않고 무조건 그곳으로 향합니다. 모든 것이 “나” 중심입니다. 큐피디타스 – 욕심을 내려놓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잘못된 곳을 바라보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세상이 미워하든지 좋아하든지 그리고 어떤 상황이 펼쳐지든지 해바라기처럼 한결같이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상을 품어야 합니다. 그때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사람들이 우리를 흠모하는 눈길 바라볼 것입니다. (SF한국일보종교칼럼, 2006.10.5)

팥죽 한 그릇

둥이 형제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태중에서도 싸움을 할 만큼 유별났습니다. 먼저 나오려는 동생을 뿌리치고 힘이 좋은 형이 먼저 태어났습니다. 동생은 형의 발꿈치를 잡고 세상에 나올 정도로 장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이들 형제의 성품은 정반대였습니다. 형은 사냥을 좋아하고 용맹함이 넘쳤습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들사람이었습니다. 동생은 온순했습니다. 밖에 나가는 것보다 집에서 어머니를 돕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요즘 말로 마마보이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냥을 갔던 형이 기진맥진해서 돌아옵니다. 헐레벌떡 집에 와보니 동생이 커다란 솥을 휘휘 저으면서 일품요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팥죽이었습니다. “팥죽 좀 줄래? 지금 배가 너무 고프거든” 형이 동생에게 애원하듯 말합니다. 동생은 속으로 키득키득 웃었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사냥에서 돌아온 형의 얼굴이나 자기가 만들고 있는 팥죽색깔이나 붉은 색을 띠기는 매한가지였기 때문입니다.[에서가 태어났을 때 그의 몸은 붉었습니다. 에서의 후손 에돔 역시 ‘붉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동생은 의외로 냉정합니다. 형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예상 밖의 말을 건넵니다. “형의 장자권을 내게 파세요.” 아라비아 상인처럼 형과 거래를 하려는 동생의 말투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형은 앞뒤 가리지 않는 들사람입니다. “내가 지금 당장 죽어가는데 장자권이 무슨 소용이니? 일단 팥죽부터 주면 내가 알아서 할게.” 동생은 집요합니다. “확실하게 제게 맹세하세요. 그러면 팥죽을 드릴게요.” 형은 동생 앞에서 맹세를 하고 장자권을 팝니다. 동생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팥죽에다 빵까지 덤으로 얹어서 형에게 줍니다.

구약성경 창세기 25장에 나오는 형 에서와 동생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동생 야곱은 집요한 사람입니다. 형의 맹세를 받아낸 후에야 팥죽을 건네는 모습만 봐도 그렇습니다. 빵까지 덤으로 주는 것은 거래를 완벽히 성사시키려는 주도 면밀함입니다.반면에 형 에서는 성미도 급하고 앞뒤 가리지 않고 행동하는 말 그대로 들사람입니다. 동생에게 섣불리 장자권을 판 행동은 비판을 받아 마땅합니다.

창세기 본문은 다섯 개의 동사를 연속적으로 사용해서 에서의 행동을 중계 방송하듯이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에서가 먹고, 마시고, 일어나서, 갔다. 이것은 에서가 장자권을 가볍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다섯번째 동사는 에서의 행동에 대한 해설입니다. 이것은 에서가 어느 정도로 장자권을 소홀히 여겼는지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세상에는 먹고 마시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있어야 할 자리를 홀연히 떠나는 것도 잘못입니다. 에서는 배고픔이라는 눈 앞의 욕구를 채우다가 가장 귀하게 간직해야 할 장자권을 경솔하게 팔아버렸습니다.

아무리 배가 고프고 숨이 넘어가도 끝까지 지켜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우리들의 삶을 아름답고 부요하게 만들어줄 것들입니다. 양심도 그 중에 한가지 입니다. 가정도 그렇습니다. 오랜 벗들과의 우정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해져도 진실된 사랑을 꼭 간직해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야말로 끝까지 지켜야 할 장자권임에 틀림없습니다. 순간적인 것들을 위해서 영원한 것을 잃어버리는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지금 당신에게 유혹의 손길을 뻗치고 있는 팥죽 한 그릇은 무엇입니까?

요나의 박넝쿨

구약성경 가운데서 요나서는 흥미로우면서도 깊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요나서의 주제는 구약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파격적입니다. 하나님은 자신들만 사랑하고 자신들만 선택 받은 백성이어야 하는데, 니느웨라는 이방나라에도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였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니느웨는 당시 강대국이었던 앗시리아의 수도였습니다. 죄악이 번성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들이 살고 있는 전형적인 세속도시였지요. 선지자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오릅니다. 요나가 탄 배가 풍랑을 만나고, 요나는 그 책임을 지고 바닷물에 던져집니다. 그렇지만 요나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커다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밤낮을 보냅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드린 요나의 기도(요나2장)는 매우 감동적입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건짐을 받은 요나는 하나님 명령대로 니느웨로 가서 심판을 예언합니다. 요나의 예언을 들은 니느웨 백성들은 일제히 베옷을 입고 자신들의 죄를 회개합니다. 그 모습을 본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를 구원하시기로 마음을 돌이키십니다. 요나는 이것이 몹시 못마땅하였습니다. 이방사람들은 무조건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만 살면 된다는 이기적인 신앙입니다.자신만이 선택된 백성이라는 교만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향하여 화를 냅니다. 그리고 동구밖에 나가서 씩씩거리며 초막을 짓고 니느웨가 멸망하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놀부 심보입니다.

한 낮이 되자 요나의 머리 위에 햇볕이 내려 쪼였습니다. 그때에 박 넝쿨 하나가 자라서 그늘을 만들어 줍니다. 얼마나 시원하던지! 요나는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연발합니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 벌레 한 마리가 나와서 박 넝쿨을 갉아먹기 시작합니다. 햇볕은 쪼이고 뜨거운 바람은 불어오고 다시 죽을 맛입니다. 요나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습니다”라면서 다시 불평하고 분노합니다. 그때 하나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합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요나4:10-11) 요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질문으로 끝이 납니다. 오픈 엔드입니다.

요나의 박 넝쿨 이야기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세상일을 판단하고 이웃을 정죄합니다. 자신의 전통이나 상식이 하나님의 생각인 듯 이웃에게 강요합니다. 또한 참 간사합니다. 일이 조금 잘 되면 하나님께 “감사”를 연발하고, 조그만 어려운 일이 생겨도 금방 불평하고 분노합니다. 박 넝쿨에 연연하는 신앙입니다.

햇볕을 가려주는 박 넝쿨을 바라보지 말고 박 넝쿨을 자라게도 하시고 사라지게도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모든 사람들을 편견 없이 마음에 품는 것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요즘 세상 역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듯 넓은 마음을 요청하는데,우리들은 자꾸만 쪼그라드는 듯해서 걱정입니다. (SF한국일보 종교칼럼, 2006.8.25)

열린마음 열린세상

비행기 여행을 할 때는 은근히 긴장이 됩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힘차게 달려서 이륙을 시도할 때는 저도 모르게 손을 꼭 쥡니다.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면 안도의 숨을 쉽니다. 그런데 비행기 여행만이 주는 유익이 있습니다. 수만 피트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생각보다 오밀 조밀입니다. 그 속에서 아옹다옹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왠지 겸연쩍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창공을 나는 비행기에서 바라보는 태양빛은 더욱 선명합니다. 석양을 바라보고 있으면 하늘나라를 날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우리들은 하루하루의 삶에 쫓겨서 큰 그림을 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독수리의 눈(bird-eye-view)으로 세상을 보기보다,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벌레의 눈 (worm-eye-view)으로 세상을 봅니다. 그러다 보니 늘 바쁜 일로 쫓깁니다. 작은 일에도 상처를 받고, 지내놓고 나면 하찮은 일인 줄 알면서도 사소한 일에 온 마음을 빼앗긴 채 시간과 힘을 낭비합니다. 때로는 막다른 길목에 도달했다고 단정을 하고 털썩 주저앉아 있을 때도 있습니다. 조금만 더 나가면 큰 길이 펼쳐 있는데 그 너머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벌레의 눈을 갖고는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세상사를 내려다볼 수 없습니다.

시인 월트 휫트먼(Walt Whitman)은 Song of the Open Road라는 시에서 세상이 우리들 앞에 활짝 펼쳐져 있다고 노래합니다. 자질구레한 인생사에 얽매이지 말고 먼 미래를 바라보면서 힘차게 나가랍니다. 시인은 보이지 않는 세상이 앞에 펼쳐져 있음을 확신합니다 (I believe that much unseen is also here). 과거를 회상하면 아쉬움만 밀려옵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또한 현재의 문제에만 집착하면 먼 미래를 바라보기 힘듭니다.눈 앞에 닥친 문제 속으로 자신까지 함몰되는 경험을 합니다. 휫트먼은 우리 앞에 펼쳐진 길을 설렘으로 걸어가랍니다. 그 길은 아무런 글씨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와 같답니다. 한 번도 넘겨보지 않고 고스란히 책장에 간직해 두었던 책과 같답니다. 무한한 가능성이 우리들 앞에 펼쳐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3장 12-14절에서 지나간 과거는 모두 잊고, 앞에 세워놓은 푯대를 향해서 나아간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안에 부르심의 소망이 있고,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은 미래지향적입니다. 활짝 열린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 신앙이요, 전인미답의 길을 믿음으로 걸어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미래를 향해서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우리가 일할 터전인 세상을 향해서도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이웃을 향해서도 마음을 열고 인생길을 함께 걸어갈 동반자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독수리의 눈보다 더 높은 하나님의 눈(God’s eye view)으로 세상을 조망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서 주어진 삶을 만끽해야 합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의와 희락과 화평의 하나님 나라가 우리들 앞에 활짝 펼쳐질 것입니다. (SF한국일보 종교칼럼 2006.7.26)

노익장(老益壯)

지난 5월 할머니 권사님들을 모시고 칼리스토가 온천장에 다녀왔었습니다. 온천장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잠시 휴식을 취한 권사님들께서 서둘러 야외 온천탕으로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의자에 편안히 누워서 독서 삼매경에 빠지신 권사님, 여전히 온천탕에서 몸을 지지고 계시는 권사님, 수영장에서 수영을 즐기는 권사님, 오후의 따가운 햇볕을 피해서 그늘에 앉아서 담소하시는 권사님들. 마치 젊은 청년들을 데리고 수련회에 온 것 같았습니다. 수영복을 입고 당당히 걸어 다니시는 권사님들의 맵시가 미스 코리아 못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저마다 한마디씩 하십니다. “목사님도 얼른 수영복 입고 들어와요!”

지난 달에는 짐 에리오테스라는 83세의 할아버지가 미국 프로야구 사상 최고령 선수라는 신기록을 세웠습니다. 사우스다코다에서 열린 마이너리그 야구 경기에서 1회말 선두타자로 타석에 들어선 짐 할아버지는 파울 한 개만 쳐내고 헛스윙 삼진을 당했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의 나이와 똑 같은 숫자인 83마일짜리 공에 삼진을 당했지만, 그 분이 과시한 노익장은 국내외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짐 할아버지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기회가 더 주어졌다면 안타를 칠 수 있었다고 호통을 쳤습니다. 왜 시니어 리그(senior league)에서 뛰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곳에서 던지는 투수들의 공이40-50마일인데 그것은 너무 밋밋하고, 적어도 90마일은 되어야 타석에 들어설 마음이 생긴다고 당당하게 답변했습니다.

원래 노익장이라는 말은 중국의 후한시대 광무제 때 마원이라는 사람의 어록에서 유래하였습니다. 큰 뜻을 품고 부지런히 무예를 익혔던 마원은 예순 두 살의 나이에 전쟁에 나가서 흉노를 토벌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습니다. 노익장은 마원의 말 “대장부가 한번 뜻을 품었으면 어려울수록 굳세어야 하며 늙을수록 건장해야 한다 (老當益壯).”에서 나왔습니다.

성경에는 노익장을 과시한 인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갈렙입니다.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다고 자신감 넘치는 보고를 했던 갈렙은 그로부터 45년 후에 여호수아 앞에 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수14:11-12) 그때 갈렙의 나이 85세였으니 대단한 노익장을 과시한 셈입니다.

평균수명이 길어지면서 은퇴 후에도 보통 20여 년의 시간이 우리들에게 주어집니다. 젊었을 때, 미리미리 훗날을 준비해 놓지 않으면 인생의 황혼기를 허술하게 보낼 가능성이 많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삶을 한 순간도 낭비해서는 안 되는데 말입니다. 이미 노년기에 이르신 어르신들께서는 삶의 경험과 지혜를 후손들에게 나눠주시는 노익장을 과시하셔야 합니다. 비록 삼진을 당하더라도 인생의 타석에 들어서려는 패기를 간직하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권사님들! 저도 내년에는 꼭 수영복을 입겠습니다. 한 해 동안 부디 건강하셔서, 내년에도 멋지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십시요. (SF한국일보 종교칼럼, 2006.8.11)

코스타에 다녀와서

지난 7월 3일부터 7일까지 시카고 휘튼대학에서 열린 제21회 코스타(북미유학생수양회)에 다녀왔습니다.올해도 49개 주, 390개의 교회에서 1400여명이 참석하였습니다. 같은 시간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열린 25세 이하의 칼리지 코스타에도 450여명의 청년들이 참석하였답니다. 7월의 첫 번째 주간에 2천여 명의 젊은이들이 미국땅 한 가운데 모여서 신앙과 꿈을 나눈 셈입니다. 코스타가 유학생들을 위한 집회에서 한국어로 진행되는 미주 최대의 청년집회로 자리매김해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코스타에 갈 때 마다 제가 더 큰 은혜를 받고 옵니다. 천여 명의 젊은이들이 한 마음으로 부르는 찬양은 나이애가라 폭포 소리만큼 우렁찹니다. 저는 이번에 제자훈련기초 세미나에서 “예수님의 제자 삼기”라는 주제로 강의했습니다. 한 가지라도 더 배워서 자신이 속한 신앙 공동체에 접목시키려는 참석자들의 모습에 더욱 신이 났습니다. 예수님을 닮고 복음 안에서 자신의 꿈을 펼쳐 보려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우리 한민족의 미래가 밝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혼탁한 세상이지만 그 속에서도 순수한 마음을 간직하고, 신실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고민하고 애쓰는 젊은이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문보도에 의하면 미국에 유학생을 보낸 국가 가운데 인도와 중국에 이어서 대한민국이 3위를 차지합니다. 2005년 말 현재 미국에 와 있는 우리나라 유학생은 5만3천명입니다. 이렇듯 많은 숫자의 유학생들이 미국에 오다 보니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들도 많이 일어납니다. 외화낭비라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들립니다. 유학생뿐만 아니라 미국에는 수많은 한인 청년들이 살고 있습니다. 1.5세와 2세에게 거는 기대 못지 않게 이들에 대한 염려도 매우 큰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미주에 거주하는 젊은이들이 신앙으로 거듭 태어나서, 예수님을 따라 살기로 결심한다면 우리들의 염려는 단지 기우에 그칠 것입니다.

코스타에 가면 젊은이들 속에서 희망을 봅니다. 어떤 이들은 멀리 플로리다와 텍사스에서 자동차로 며칠을 달려왔답니다. 배가 불룩하게 나온 임신부들도 종종 눈에 띠었습니다. 이제 갓 한살이 지난 아기를 아가 방에 떼어놓고 집회로 향하는 젊은 부부의 모습도 보기 좋았습니다. 머리는 노랗게 염색을 했지만,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신세대 젊은이들에게서도 새로운 희망을 보았습니다. 삼삼오오 잔디밭에 앉아서 받은 바 은혜를 나누고 고민을 얘기하는 모습도 정겹고 믿음직스러웠습니다.

저는 이번 코스타 강의에서 예수님의 제자된 표지(mark)를 네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1) 하나님과 단둘이 깊은 대화를 나눌 줄 아는 고요함(silent), 2) 부피보다 밀도 있는 삶을 살려는 단정함(simple), 3)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는 희생(sacrifice), 4) 마지막으로 하늘에 속한 사람다운 강인함(strong). 밟히고 밟혀도 새봄에 새싹을 돋아내는 잡초처럼 근성 있는 신앙인이 될 것도 부탁했습니다. 여기에 사무엘 울만이 그의 시 <청춘>에서 언급한 “강인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는 열정”까지 갖추고 있다면 금상첨화입니다.

이제부터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자는 제안에 “아멘”으로 화답한 젊은이들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울려 퍼집니다. (SF한국일보 종교칼럼, 2006.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