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계란 이야기

초등학교 시절 소풍을 갈 때나 운동회 날이 되면 어머님이 김밥과 함께 삶은 계란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삶은 계란에 소금을 살짝 묻혀서 먹으면 목도 매이지 않고 계란 맛이 그만입니다. 그때부터 저는 삶은 계란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음식점에서 냉면을 먹을 때는 냉면보다도 그 위에 얹어주는 계란 반쪽에 눈이 먼저 갑니다.

저녁 무렵 속이 허전할 때, 아내가 가끔씩 계란을 삶아 옵니다. 그러면 단숨에 몇 개를 먹어 치웁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삶은 계란을 먹을 때마다 아내와 실랑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노른자위는 먹지 말라는 아내의 잔소리 때문입니다. 노른자위를 빼고 흰자위만 먹으라니 속에 뭐가 빠진 찐빵과 진배없다고 투덜거리지만 아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예 노른자위를 빼고 흰자위만 남은 달걀을 가져옵니다.

실제로 노른자위가 지방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 성인병을 유발한다는 연구결과도 발표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계란만큼 영양가가 고루 들어있는 식품도 없습니다. 노른자위에 들어있는 지방도 과하게 먹지 않으면 별 문제가 없답니다.계란 속의 지방은 소화흡수가 잘 되는 지방이어서 도리어 간에 쌓인 지방을 제거해 주기도 한답니다. 그런데 과하게 먹으면 노른자위가 콜레스테롤 수치를 높여서 동맥경화증과 같은 성인병을 유발한다는 것이지요.

구약성경 욥기를 읽다 보면 재미있는 구절을 만납니다.:”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욥6:6) 물론 자신을 비난하는 친구들을 향한 욥의 자기변호이지만, 이 구절만을 떼어놓고 읽다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갑자기 욥의 모습이 눈 앞에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재산도 넉넉하고 종종 파티를 즐겼으니 넉넉한 체격을 가졌을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싱거운 음식을 싫어하고, 계란도 노른자만 골라 먹었다면 욥의 콜레스테롤 수치가 꽤 높았을 지도 모릅니다. 옛날에 살았으니 망정이지 요즘 세상에 태어났으면 욥은 아내로부터 잔소리께나 들었을 겁니다. 욥의 아내가 어디 보통 사람입니까?

먹고 싶은 음식을 실컷 먹고, 하고 싶은 일도 마음껏 하면서 기분내키는 대로 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뭐든지 과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했습니다. “절제”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 들어있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때로는, 건강을 위해서 맛없는 음식을 먹어야 하듯이,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도 해야 합니다. 지금 조금만 꾹- 참으면 장차 밝은 날이 올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보기 싫은 사람들도 만나서 대화의 물고를 트고 마음의 벽도 허물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네 세상살이입니다.

오늘도 ‘싱겁게 드세요’ ‘계란은 흰자위만 드세요”라는 아내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할 텐데 자꾸만 청개구리근성이 되살아나니 큰일입니다. 욥도 그랬을까요?

(SF한국일보 종교칼럼, 2006.6.30)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

신학을 시작하기 전, 직장에 다닐 때 목요일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광화문에 있는 새문안 교회 직장인예배에 참석하곤 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동익 목사님께서 삶에 지친 직장인들에게 생수와 같은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 가운데 시편127편을 설교하시면서 말씀하셨던 경험담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설교시간에 앞줄에 앉아서 매번 졸고 계시는 분이 있었답니다. 실제로 설교하다 보면 교인들의 부스럭거리는 동작까지 눈에 들어옵니다. 더욱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교인들이 눈에 띄면 신경이 쓰이게 마련입니다. 경험이 많으셨던 김 목사님께도 예외가 아니었나 봅니다. 나중에 심방을 가서 조심스레 여쭤보셨답니다. 예배시간마다 졸던 분께서 말씀하시기를, “목사님,정말 뭐라고 말씀 드리기가 송구스럽습니다. 사실 제가 불면증에 시달리는데요, 이상하게 예배시간만 되면 잠이 쏟아지네요죄송합니다.” 그 다음부터 김목사님께서는 교인들 가운데 조는 분들이 눈에 띄면, “음, 하나님께서 불면증 환자를 치료하고 계시는 중이군”이라고 여기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설교를 하셨답니다.

웬만큼 신앙생활을 하신 분이면 시편127 2절의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 도다.”라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이 말씀을 유효 적절하게 적용하셨을 것입니다. 특별히, 잠이 많으신 잠꾸러기 신앙인들에게는 성경 66권 가운데 가장 은혜로운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행여나 불면증에 시달린 경험이 있으시다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에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는 말씀에 남달리 은혜를 받으셨을 겁니다. 저도 할 일이 태산인데 자꾸만 잠이 몰려오면, ‘하나님께서 나를 무척 사랑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지 않으려 일손을 놓고 슬며시 자리에 눕곤 합니다.

우리들은 보통 인생의 3분의 1을 잠을 자면서 보낸답니다. 수면시간이 생각보다 많게 느껴지시지요? 그래서인지 소위 처세를 강조하는 책들을 읽어보면 한 목소리로 잠을 줄일 것을 권면합니다. 잠꾸러기들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몰아붙입니다.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잠을 많이 자는 것은 게으름의 표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사랑하는 자들에게 잠을 주신답니다. 성공을 포기하라는 말씀인지, 아니면 또 다른 뜻이 베어있는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라는 시편 말씀 속에서 두 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헛되고 헛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참된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사랑하는 자들에게 편안한 휴식을 주신다는 뜻이지요. 두 번째로,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를 문맥에 맞춰서 잠을 자는 동안이라고 부사절로 번역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표준 새번역은 그러므로 주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에게는 그가 자는 동안에도 복을 내리신다.”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집을 세워주시고, 밤낮으로 우리의 인생길을 파수꾼처럼 지켜주시고, 그것도 모자라서 우리들이 잠을 자는 동안에도 복을 주신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이렇게 좋으신 분이라고 시편기자가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할 일은 태산인데 잠이 쏟아지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지 마시고 오늘은 일찍 잠자리에 드시지요. 수면보다 더 좋은 휴식이 없답니다. 거친 인생길 가운데 근심 걱정으로 잠을 설치기 일쑤이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세우지 않으시면 우리의 수고가 헛되고 파수꾼의 경성함도 헛되다고 했습니다. 인생의 모든 짐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편안한 잠을 청해보시지요.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답니다. 우리들이 잠자는 동안에도 복을 내리신답니다.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2006.6.16)

인연(因緣)

수필가 피천득님은 그의 수필 인연(因緣)”에서 일제시대 동경에서 만났던 아사코(朝子)라는 여인과의 세 번의 만남을 소개합니다. 소학교 1학년에 다니는 어린 소녀로 처음 만났고, 그로부터 십 년 후 풋풋한 여대생으로 만나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논하였답니다. 마지막 만남은 그녀가 한 남자의 부인이 된 후의 약간은 어색한 만남이었습니다. 한 여인과 수필가와의 인연은 이처럼 지속되었고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다고 했습니다. 이렇듯 모든 만남은 우리들의 인생여정에 큰 자취를 남기게 마련입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 담임으로 부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일보 손기자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제 개인적인 얘기와 지난 8년여 미국에서 공부하고 목회하던 얘기를 나누는 가운데 칼럼을 쓰겠냐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제 성격이 그리 적극적이지 못한데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글을 쓰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수락을 하고 난 다음 날부터 은근한 부담감이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마음에 설렘도 있었습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에 대한 설렘과 지면을 통해서 좋은 분들과 귀한 인연을 맺게 될 기대에서 오는 설렘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일상사를 예사로 볼 수 없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모든 만남 조차도 우연이 아닙니다.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는 매일 매일의 삶 역시 뒤돌아보면 순간순간마다 깊은 뜻이 베어있습니다. 이것을 두고 기독교에서는 섭리(providence)”라고 합니다. 우리들의 삶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깃들어 있어서 어떤 것도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에도 하나님의 뜻이 깃들어있다고 말할 정도입니다(10:29). 녹록하지 않은 이민생활이지만 매사에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다면 삶에 생동감이 넘칠 것입니다. 일상 속에 베어있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고 그것을 음미할 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감사와 기쁨이 솟아날 것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하나님의 섭리를 체험할 수 있을 겁니다. 이처럼 일상의 작은 것들 가운데서 의미를 찾고 하나님의 숨결이 깃든 성경말씀 앞에 우리의 삶을 비춰보고 싶습니다.

칼럼의 제목을 옹달샘이라고 붙였습니다. 깊은 산 속 옹달샘은 누구나 쉬어가는 곳입니다. 옹달샘 근처에 모이면 모두 이웃이 되고 목을 축이고 나면 한결 여유로워집니다. 옹달샘이 비록 작은 샘물이지만 계곡을 지나서 작은 개울을 이루고 강을 만나서 넓은 바다로 흘러갑니다. 옹달샘은 그렇게 대양을 품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독자들을 만나는 것을 두고 섭리라는 거창한 표현을 쓰기는 조금 부담스럽습니다. 그래서 인연이라는 말을 빌려왔습니다. 지면을 통해서 좋은 인연을 만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깊은 산 속 옹달샘처럼 누구든지 오셔서 샘물 곁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맑은 샘물로 목을 축이셨으면 좋겠습니다. 넓은 대양을 마음에 그리면서

(SF한국일보 종교칼럼, 2006.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