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벤에셀

큰 꿈을 갖고 시작했던 2014년도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하나님께서 각자의 인생 통장에 넣어주신 365일을 알차게 보내야겠다고 결심했지만 한 해를 모두 살고 나니 아쉬움이 밀려옵니다. 매년 반복되는 일들인데 쉽게 고쳐지지 않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지나 온 한 해를 돌아보니 크고 작은 일들을 두루 경험했습니다. 때로는 이렇게 좋은 일만 있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장미빛 융단이 깔린 인생길을 걸었습니다. 호사다마라고 좋은 일들은 금방 지나가고 힘겨운 가시밭길이 눈 앞에 닥쳤습니다. 가시밭길을 헤쳐 나오다 보니 손과 발은 물론 이곳 저곳에 가시에 찔린 상처가 눈에 띱니다. 영광의 상처이니 가볍게 넘기라고 남들은 훈수를 두지만 정작 본인에게는 쓰리고 아픈 생채기들입니다.

우리들 인생길이 가시밭길인 것이 어쩌면 당연합니다. 구약성경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거역한 아담과 이브를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시면서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창3:18)고 예고하셨습니다. 가시덤불은 물론 엉겅퀴에도 가시가 달려있습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는 생존력이 강해서 주변의 식물들을 압도하면서 퍼져나갑니다. 우리가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끊임없이 내고 있으니, 우리네 인생살이가 가시밭길일 수 밖에 없습니다.

어디 개인의 인생사만 그렇겠습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도 가시덤불과 엉겅퀴에 얽어 매여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전쟁, 폭력, 테러, 사기 그리고 차별에 이르기까지 세상을 올바르게 세우는 일보다 혼란과 죽음으로 치닫게 하는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습니다. 단순히 세상이 악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무책임할 만큼 이 세상은 부조리와 부정부패로 둘러싸여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가시에 찔린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약속의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따르지 않고 가나안 땅에 있는 부족들을 살려두었습니다. 훗날 이들이 옆구리를 찌르는 가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서 근사하게 하나님 나라를 세우길 기대하셨는데 그들이 남겨놓은 죄악들에 찔리고 찍히면서 만신창이로 변해갑니다.

급기야 외국의 공격까지 받습니다. 이스라엘이 에벤에셀이라는 곳에 진을 쳤지만 강력한 군대 블레셋에 패하고 하나님의 임재상징이었던 언약궤까지 빼앗기는 수모를 당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 사무엘이 백성들을 미스바로 소집합니다. 금식하고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사무엘과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있을 때 블레셋 이 또 다시 쳐들어옵니다.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직접 블레셋에 대항해서 싸우십니다. 엄청난 천둥번개를 통해서 블레셋 사람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시고 그 틈을 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승리를 거둡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사무엘은 돌을 하나 세워놓고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고 선언합니다. 그곳 이름을 에벤에셀(도움의 돌)이라고 짓습니다. 블레셋에 패해서 언약궤를 빼앗긴 곳도 에벤에셀이었습니다. 치욕과 실패의 장소였습니다. 이스라엘이 가시덤불과 엉겅퀴에 찔려서 만신창이가 된 곳입니다. 우리 같으면 그 이름을 부르고 싶지도 않았을 텐데, 사무엘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블레셋에 승리를 거둔 장소를 또 다시 에벤에셀이라고 부릅니다. 패배를 넘은 승리였기 때문입니다. 아니 자신들의 패배를 하나님의 도움 속으로 편입시키고 영원히 기념하고 싶은 사무엘의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올 한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니 모든 것이 에벤에셀입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에 찔려서 상처가 난 곳도 에벤에셀이고,절망과 낙심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했던 곳도 에벤에셀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도우셨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 도움의 돌을 하나 세워놓고 한 해를 마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인미답의 새해를 맞습니다. 야심 찬 계획을 세워놓고 새해를 기다리지만 세상은 끊임없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입니다.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늘 그랬듯이 삶의 고비마다 함께 하시고 도와주시는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계시기에 차분히 그리고 담대히 2015년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2014년 12월 25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감사

오늘은 2014년 추수감사절입니다. 추수감사절은 알다시피 지금부터 394년 전인 1620년 102명의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메이플라워를 타고 신대륙에 도착한 후,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인디안 추장의 도움과 불굴의 신앙심으로 첫 번째 추수를 하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린 것에서 유래하였습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감사와 기도의 날을 제정했고, 남북 전쟁 중에 아브라함 링컨이 추수감사절을 국가 공휴일로 정하면서 미국에서는 지금까지 11월 마지막 주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 말로 번역하길 추수감사절이지 영어 그대로 하면 “감사절(thanksgiving day)”입니다. 또한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제쳐놓고도 일년 중에 하루를 감사절로 지킬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뜻 깊은 일입니다. 그것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감사의 날이 있으니 더욱 의미가 큽니다.

뜬금없는 얘기 같지만 저는 다리미질하는 것을 좋아해서 가족들의 옷을 거의 다 제가 다립니다. 세탁기에서 갓 나온 구겨진 옷들도 다림질을 하면 반듯하게 다려집니다. 와이셔츠를 예로 들면, 갓세탁한 와이셔츠는 쭈글쭈글 심하게 구겨져 있습니다. 그대로 입고 나갔다가는 창피당하기 십상입니다. 아무리 고급 넥타이를 해도 와이셔츠가 구겨져 있으면 옷맵시가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잠시 시간을 내서 구겨진 와이셔츠를 다리면 금방 새 옷으로 변합니다. 새로 다린 옷을 입을 때 느끼는 쾌감도 있습니다. 다림질은 서둘러 해서는 안됩니다. 높은 온도의 다리미를 서둘러 움직이면 자칫 주름이 더 생기고 그것을 복구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다림질은 대충해서도 안됩니다. 평면은 쉽지만 어깨나 소매 등은 정성껏 대려야 반듯해집니다. 다리미가 지나가지 않은 부분은 여전히 쭈글쭈글 보기 싫어서 꼼꼼하게 다리미를 움직여야 합니다.

저는 이렇게 다림질을 하면서 감사를 떠올리곤 합니다. 우리들 인생길도 만만치 않게 쭈글쭈글 구겨져 있습니다. 경기가 좋아졌다고 말하지만 우리네 살림살이는 늘 쪼들립니다. 남들은 자녀들도 잘 키우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사는 것 같은데 막상 자신에게는 크고 작은 어려움이 닥칩니다. 갑자기 건강에 빨간 불이 켜져서 가슴 졸이면서 한 해를 보내기도 합니다. 쉽지 않은 인생길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염려와 근심으로 구겨져있고, 불안과 두려움은 인생길에 골을 새겨놓습니다.

그때 우리의 인생을 반듯하게 펴 주는 것이 ‘감사(thanksgiving)’입니다. 감사는 염려와 근심으로 구겨진 인생을 활짝 펴줍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감사하면 여유가 생기고 마음 깊은 곳에서 소망의 빛이 비춰 옵니다. 그리고 기쁨이 생깁니다. 감사와 기쁨은 서로 짝입니다. 저는 옷을 다리면서 제 삶을 생각하고, 다림질을 하면서 감사로 제 삶을 다려봅니다.그래서 다리미질 하는 것이 참 좋습니다. 조금 과하게 말하면 다림질이 주는 은혜가 있습니다. 다림질을 통해서 옷들이 반듯하게 펴지듯이 감사로 제 삶이 반듯해 지길 기도하면서 옷을 다리곤 합니다.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는 “감사는 날개를 가지고 있어서 가야 할 곳까지 날아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는 “가진 것에 감사하십시오.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입니다. 만약 갖고 있지 않은 것에 계속해서 마음을 쓴다면,당신의 인생은 늘 부족해서 채워지지 않을 것입니다”고 말했습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은 모두 다 좋은 것이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딤전4:4)라고 깨우쳐줍니다. 감사는 우리들 인생길을 날아오르게 합니다. 감사는 더욱 풍성한 삶을 살게 만들어줍니다. 감사할 때 하나님 마음 속으로 들어가고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이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감사는 우리의 삶을 반듯하게 다려줍니다.

추수감사절은 미국의 가장 큰 명절입니다. 감사하라고 국가가 정해준 뜻 깊은 날입니다. 요즘은 블랙 프라이데이 세일이 감사절의 본래 의미를 빼앗아버렸지만, 감사절의 본뜻을 되찾아야 와야 합니다. 지나 온 한 해를 돌아보면서 감사를 세어보고 여기저기 보기흉한 구김살들을 감사로 반듯하게 펴는 감사절이 되길 원합니다. 그러고 보니 감사야 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커다란 축복입니다. 복된 추수감사절 맞으십시오.(2014년 11월 27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십자가 십자가

한국에 있을 때 10월의 마지막 날이 되면 라디오의 전파를 타고 수없이 들려오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10월의 마지막 밤에 아무런 뜻도 모른 채 연인과 헤어진 사연을 노래한 가요입니다. 10월의 마지막 밤에 헤어진 커플들은 물론 이 세상에 이별의 슬픔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울립니다. 미국에 오니 10월의 마지막 날에는 헬로윈으로 떠들썩 합니다.아이들은 헬로윈 코스튬을 하고 학교에 갑니다. 저녁에는 사탕을 얻으러 다니는 아이들로 거리가 북적이고 샌프란과 같은 대도시에서는 말 그대로 광란의 파티가 벌어집니다.

그런데 10월의 마지막 날은 개신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날입니다. 마틴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그 성당에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를 향한 95개조의 반박문을 게시하면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고 결국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가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루터의 신학을 여러 가지로 논할 수 있겠지만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십자가 신학입니다.

루터는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했고 그것을 그의 신학은 물론 삶에 적용했습니다. 루터가 이처럼 십자가 신학을 주장하게 된 것은 중세 가톨릭 교회들이 십자가 고난을 외면한 채 부활의 영광만을 지나치게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영광의 신학을 인간의 이성과 노력, 업적을 통해서 인간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신학이라고 비판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을 높이고, 영원한 진리가 아니라 잠시 있을 세상의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는 소위 값싼 은혜를 설파하는 천한 신학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루터는 십자가 신학이 모든 신앙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은 하나님께서 친히 죽음의 자리까지 내려간 사건입니다. 모진 고난과 수치를 십자가 위에서 한 몸에 실제로 겪으셨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인간의 교만과 자랑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 세상 속에서 누리는 영광과 형통이 십자가를 통과한 것이 아니라면 그릇된 신앙입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라는 영국의 신학자는 자신이 청년시절에 루터의 십자가 신학을 이해할 수 없었고 도리어 거부했다고 고백합니다. 그가 믿는 신앙 까지도 이성을 사용해서 증명해 내고 글이나 말로 표현해 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학교를 졸업하고 부목사로 교회를 섬기면서 루터의 십자가 신학을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상아탑 안에서 머리로 생각하던 신앙과 그가 몸으로 부딪친 목회현장은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교회에서 만나는 성도들의 삶은 신학적 지식이나 이성으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고 처절했습니다. 그때 맥그래스는 루터가 말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을 실제 삶 속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때때로 십자가를 교리적으로 이해하곤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대속(代贖)의 교리가 십자가의 모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해지고, 악에 대하여 승리하시고, 하나님과 화해한 사건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위대하고 신비로운 사건이 교리에 머문다면 우리의 신앙은 매우 추상적이 될 것입니다. 10월의 마지막 밤에 연인과 헤어짐을 노래한 감상이나 헬로윈 코스튬을 입고 돌아다니는 아이들처럼 십자가가 단순한 감상이나 신앙의 겉치레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교리를 넘어서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가사처럼 주 달려 죽으신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려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 교만한 마음을 내려놓고 예수님처럼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훈련해야 합니다. 십자가 위에 우리의 이기심과 쓸데없는 자존심을 못박고 자신의 옛자아가 죽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작은 예수가 되어서 세상 속에서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종교개혁 주간을 맞으면서 십자가를 믿는 신앙과 그 안에서 체험하는 은혜가 교리를 넘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삶으로 이어지길 원합니다.(2014년 10월 31일 SF 한국일보 종교 칼럼)

아버지와 아들

지난 6월에는 학업을 위해서 미시간으로 떠난 큰 아이와 자동차 여행을 했습니다. 가까운 곳에서 대학을 다녔기에 처음으로 집을 떠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주일예배를 마치고 3박 4일의 여정을 시작하기 전, 네 식구가 둘러 앉아서 기도를 하는데 제 목소리가 떨립니다. 애써 참고 있던 아내도 아들을 안아주면서 울음이 터졌습니다. 큰 애도 손으로 눈물을 훔칩니다. 이렇게 약간 무거운 마음으로 아들과 단둘이 떠나는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넓고 넓은 미국 대륙의 절반을 횡단하는 여행은 저와 아들에게 큰 추억을 남겼습니다. 하루 10시간 정도를 번갈아 가면서 운전했습니다. 좁은 자동차 안에 둘만 있으니 저절로 얘기꽃을 피우게 됩니다. 어릴 적 한국에서부터, 커네티컷과 인디애나를 거쳐서 캘리포니아에 오기까지 우리 가족의 얘기, 학교생활과 친구들간의 에피소드, 교회 안에서 목사의 자녀로서 겪었던 애환, 앞으로의 학업과 그 이후의 계획까지 부자지간에 깊은 대화가 오갔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매우 엄격하게 키웠습니다. 지금도 제 목소리 톤이 올라가면 큰 애는 그 자리에 멈춰서 잔뜩 긴장합니다.그것이 늘 마음이 아팠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그 부분도 건드렸습니다. 아빠로 인해서 마음에 상처가 있다면 아빠를 용서하고 훌훌 털어버리길 부탁했습니다. 아이는 괜찮다고 했습니다. 덕분에 자신이 잘 클 수 있어서 고맙다고 했습니다.아들과 단둘이 하는 자동차 여행이기에 가능한 대화였습니다.

정착을 도와주고 아들을 미시간에 남겨둔 채 비행기편으로 돌아오는데 못난이처럼 자꾸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아빠를 배웅하고 혼자 학교로 돌아가는 아들의 마음이나, 아들만 덩그러니 남겨두고 떠나는 저의 마음이나 아쉽고 허전하기는 매일반이었을 겁니다.

요즘은 둘째와 둘이 지냅니다. 아내가 2주 예정으로 한국을 방문했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2주가 아니라 한 달도 견딜 만큼 많은 음식을 준비해서 냉장고에 얼려놓았습니다. 우리 부자가 제대로 끼니를 챙겨먹을 수 있을지 염려가 되는지 매일 카톡 메시지를 보냅니다. 저 역시 음식을 만들거나 집안일에 젬병이라 아내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은근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저를 많이 닮은 둘째이기에 아내가 없는 두 주간이 꽤 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대학생활 3년 동안 자취를 해서인지 둘째가 음식을 잘합니다. 제가 챙겨줘야 할 줄 알았는데 대학원 준비로 바쁜 이 녀석이 밥도 미리 해놓고 설거지까지 깔끔하게 마무리합니다. 식탁에 마주 앉아서 부자지간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기쁨도 솔솔합니다. 제가 모르는 것을 아들이 알고 있을 때는 살짝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뿌듯함을 느낍니다.

단 둘이 마주하고 있으니 더 잘해 주지 못한 일들이 생각나면서 한없이 미안해집니다. 힘들지 않냐고 물어보면 “난 괜찮아, 아빤 괜찮아?”라고 저를 걱정해 줍니다. 아직은 제가 젊지만, 이렇게 아버지는 나이가 들어가고 아들이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하는 세대교체가 이루어진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두 아들과 각각 단둘이 지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에 감사했습니다.

아들을 향한 제 마음을 보면서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저에게 가장 잘해 주고 싶으실 겁니다. 때때로 어려운 일이 닥치면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이 들지만 결국에는 선을 이루실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아주 가끔 매우 엄격하게 대하십니다. 육신의 아버지께서 사랑의 매를 드시는 듯 합니다. 정신이 바짝 납니다. 뭐니 뭐니 해도 하나님의 측은지심이 저를 여기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동시에 과연 저는 하나님 아버지께 자랑스럽고 대견한 아들인지 스스로를 돌아봅니다. 공항에서 제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고 손을 흔들어주던 큰 아이만큼 하나님을 끝까지 바라보고 있는지, 힘들면서도 “난 괜찮아, 아빠는?”이라고 말하는 둘째처럼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많이 부족한 자식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부자지간을 떼어놓을 수 없듯이 그 어떤 것도 십자가의 은혜로 맺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향해서 아바(아빠)라고 부를 수 있음에 감사하고, 아버지되신 하나님을 향해서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음이 감사할 뿐입니다. (2014년 9월 25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열심에 대하여

작년부터 한 달에 한번씩 몇 분 목사님들과 함께 은퇴하시고 베이지역으로 오신 신학교 은사님을 모시고 요한 웨슬리의 설교를 읽고 있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18세기 영국의 부흥운동을 주도한 인물입니다. 산업혁명으로 영국 사회가 정신적으로 피폐하고 빈부격차가 생기는 등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로 인해서 신음하고 있을 때 ‘성화’라는 모토를 갖고 교회는 물론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완전에 이를 정도의 거룩한 삶을 추구해야 함을 역설했습니다.개인적 성화뿐만 아니라 사회적 성화를 촉구하면서 당시 영국 사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신앙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웨슬리가 후대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큽니다. 그의 신앙운동은 영국은 물론 미국에서 일어난 19세기 부흥운동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 근거한 신앙으로부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성과 개인적인 체험에 이르기까지 균형 잡힌 신앙을 강조했고,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 속에서 실천하는 사회운동에 초석을 놓기도 했습니다. 속회라고 불리는 소그룹 역시 웨슬리와 초기 감리교회가 가장 강조한 사역이었습니다.

웨슬리는 체계적인 신학서적을 저술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행했던 설교와 일기 속에 그의 사상이 깃들어있는데, 평생을 웨슬리를 연구하시고 가르치신 은사님의 해설을 곁들인 웨슬리 설교 읽기는 저를 비롯해서 참석하시는 목사님들의 개인 영성과 목회에 커다란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엊그제는 <열심에 대하여>라는 설교를 읽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열심이라고 하면 말씀과 기도와 소위 영적인 일에 힘을 쏟는 것을 뜻합니다. 예배나 교회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것을 가리키곤 합니다. 이처럼 열심은 신앙생활이나 교회활동에 국한된 말로 쓰입니다. 심한 경우, 가정이나 세상 일을 소홀히 하면서 교회 일에 앞장서는 사람들을 두고 열심히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반쪽 짜리 또는 기형적인 그리스도인이 많아졌고,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색해졌습니다.

부작용도 많이 일어납니다. 교회 안에서 열심을 내는 사람들은 자신이 한 일을 자랑합니다.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보상을 바라면서 열심을 낼 수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목소리를 크게 내거나 교회를 좌지우지 합니다. 웨슬리는 그릇된 열심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독재자들이나 세상 권력의 그릇된 열심이 무고한 희생자를 낸 것을 예로 들었습니다. 열심의 동기와 방향이 자신을 향할 때 사람들을 다치게 하거나 공동체에 도리어 해를 입힐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진정한 열심은 자기를 높이지 않습니다. 교만하지 않고 겸손합니다. 불평하거나 다른 사람을 비판지 않습니다.성급하지도 않습니다. 다른 이를 향해서 분노하지 않습니다. 한 두번 열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내심을 갖고 묵묵히 맡겨진 일을 해냅니다. 겉으로 드러난 행위만큼 말씀과 기도 등 경건의 행위에 힘씁니다. 무엇보다 열심의 한 가운데 사랑이 위치합니다. 사랑이 빠진 열심은 자신을 드러내는 자랑거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열심은 마음이나 생각에 그치지 않고 손과 발로 나타납니다. 열심은 마음을 넘어서는 “사랑의 행위(works of mercy)”가 되어야 합니다. 웨슬리는 열심을 두고 “사랑의 불꽃”이라고 불렀습니다. 열심의 시작과 끝에 불꽃과 같은 사랑의 ‘실천’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신앙과 삶이 일치해야 진정한 열심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삶과 세상 속에서의 삶이 한결같아야 합니다. 신앙과 생활의 일치, 개인적 성화와 사회적 성화의 완성이 곧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작은 예수의 삶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열심입니다.

요즘은 기독교가 세상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많이 잃었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열심만 강조하다 보니 반 쪽짜리 믿음이 되었고, 세상과의 소통을 상실했습니다. 지금이야 말로 “믿음의 총체요 완성인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위해서 가장 큰 열심을 내야 합니다”라는 웨슬리의 설교를 귀담아 들을 때입니다. 우리의 열심이 하나님과 이웃을 향하기 원합니다.말과 생각에 그치는 허풍쟁이 열심보다 손과 발로 사랑을 실천하는 알짜배기 열심이 요청되는 시대입니다.(2014년 8월28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내 눈에 들보

언젠가 예화 집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조금 각색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여인이 공항매점에서 과자 한 봉지를 사서 봉투에 넣고 대합실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건장하고 잘 생긴 신사가 옆에 앉더니 과자 봉지를 꺼내서 먹는 것입니다. 곁눈질을 해서 살펴보니 자신이 매점에서 샀던 그 과자와 똑같습니다. 신사는 과자 봉지를 뜯어서 여인과 자신 사이에 놓고는 컴퓨터를 하면서 연실 과자를 먹습니다.

여인이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참다 못한 여인이 영역 표시라도 하듯이 과자 한 개를 집어서, 보란 듯이 자기 입으로 가져갑니다. 신사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태연할 뿐입니다. 여인이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결국 신사와 번갈아서 과자를 먹다가 결국 마지막 한 개가 남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과자를 신사가 집더니 반을 잘라서 반은 자신이 먹고 나머지 반은 여인에게 양보하려는 듯 봉지에 다시 넣습니다. 그리고는 눈웃음을 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서 비행기를 타러 갑니다.

여인은 신사를 바라보면서 “세상에 저런 철면피 같은 남자가 다 있을까? 그러고도 눈웃음을 치고 싶을까? 아휴 남자들은 왜 저렇게 다 뻔뻔하지!” 갑자기 온 세상의 남자를 비난하는 말로 분풀이를 하고 시간이 되어서 비행기를 타러 갔습니다. 좌석에 앉아서도 몰염치한 신사의 모습이 생각나서 혼자 씩씩거리고 있다가 매점에서 산 휴지를 꺼내기 위해 종이봉투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자기가 샀던 과자가 고스란히 봉투에 있었습니다. 분풀이 하듯이 경쟁적으로 집어 먹은 과자는 바로 신사의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무한하던지 그 신사와 같은 비행기를 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습니다.

물론 예화지만 우리들도 무심코 여인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곤 합니다. 저도 몇 주전 새벽기도회 시간에 비슷한 실수를 범했습니다. 새벽기도회를 인도하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립니다. 주일 예배 시간마다 휴대폰을 꺼달라는 광고를 자막으로 띠우기에 우리 교인들은 무척 조심을 하는데, 새벽기도회 시간에 전화벨이 울리다니 조금 당황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몇 분 안 계신 새벽기도회 시간이어서 볼륨이 크지는 않았지만 신경이 쓰였습니다. 속으로 “어떤 분이 휴대폰 소리를 죽이지 않고 오셨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앞에 계신 성도님들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동안 벨소리가 울리는데도 끄지 않으십니다. “아이쿠, 벨 소리를 듣지 못하시는 것을 보니 졸고 계시나” 그 짧은 시간에 별의 병 상상을 다했습니다.

그렇게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예배실 옆에 있는 사무실로 돌아왔는데 제 휴대폰에 초록색 불이 깜빡 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휴대폰을 켜보니 ‘아뿔싸’ 아까 울린 휴대폰은 바로 제 것이었습니다. 수술을 앞두신 한 집사님께서 이미 수술실로 들어가셨으니 병원에 올 필요가 없다고 새벽기도회가 끝나기 전에 서둘러 전화를 해서 녹음을 남기셨는데 그만 제가 휴대폰 소리를 꺼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는 제 휴대폰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얼굴이 뜨겁던지요. 토요일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친교하는 자리에서 이실직고하면서 권사님들을 의심했던 것에 용서를 빌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자기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 눈의 티끌을 보고 비판하는 것을 금하셨습니다.위선으로 똘똘 뭉친 당시의 유대종교지도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자기 눈의 들보를 먼저 살피는 것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예전에 가톨릭에서 “내 탓이오 운동”을 벌였던 것과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요즘은 인터넷은 물론 여기저기에서 서로 비판하고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는데 혈안이 된 경우를 자주 봅니다. 다른 사람을 끌어내려야 자신이 올라서는 경쟁사회에 살기 때문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자기 눈의 들보를 먼저 살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고 건설적인 비판까지 금할 수는 없습니다. 내 눈에 들보를 두고 남의 눈에 티끌을 책잡는 것을 금할 뿐입니다.필요한 경우에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잘못된 것은 지적하고 더 좋은 대안을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요즘 세상이 매우 복잡하고 혼란스럽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행여나 우리 눈에 들보가 있는지 살피면서 밝고 바른 세상 만들기에 동참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2014년 7월 24일 SF한국일보 종교컬럼)

월드컵 문어

브라질 월드컵이 한창 열기를 더하고 있습니다. 각국을 대표하는 젊은 선수들이 조국을 위해서 땀을 흘리며 열심히 뛰는 모습을 보면 덩달아 숨이 차오르면서 월드컵 승부의 세계로 빨려 들어갑니다. 모든 운동경기가 그렇듯이 월드컵 축구 역시 이기느냐 지느냐의 갈림길에 섭니다. 물론 무승부도 있지만 조별 예선이 지나면서 승리한 팀만이 살아남는 정글의 법칙이 적용됩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사람들의 이목은 누가 이기느냐에 집중되게 마련입니다.

4년 전 남아공 월드컵이 열릴 때 독일의 한 수족관에 사는 문어 한 마리가 인기를 끌었습니다. 월드컵 문어 폴(Paul)이라는 이름까지 갖게 된 이 문어는 독일 국가대표팀 경기를 비롯해서 월드컵 결승전까지 여덟 경기의 승부를 모두 맞췄습니다. 독일 국기에 익숙해진 문어의 행동이거나 수족관의 조작이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신기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세계의 언론은 물론 도박사들까지 월드컵 문어 폴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2010년 문어 폴이 죽자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질 정도였습니다. 미래의 결과를 알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이 문어 폴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입니다.

지금 브라질에서 벌어지는 월드컵에서 중계를 맡은 한 해설위원이 경기결과를 연거푸 맞춰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분의 예언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예언이 맞아떨어지는지 관심을 가지면서 중계를 봅니다. “족집게 예언” “인간 문어”’라는 별명도 얻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이 문어처럼 경기 결과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각국 대표팀의 경기 결과를 분석해서 최대한 예측(豫測)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도 언론이나 사람들은 과정보다 그분이 주장한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으니 자칫 본인에게는 큰 부담이 될 수 있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미래는 안개와 같은 미지수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호기심과 불안을 마음 한 켠에 갖고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미래를 알려주는 사람이 있거나 종교가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주르륵 그곳으로 몰려갑니다. 소위 역술인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한국에 40만에 이르고 4조원 정도의 매출을 올린다는 기사를 오래 전에 보고 깜짝 놀랐는데, 이런 수치만 보아도 미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어느 정도이고, 현대인들이 불안지수가 얼마나 높은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도 예언이 있습니다. 성경에 예언서라는 말씀이 있을 정도입니다. 성경의 예언자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입니다. 그들의 직업은 농부, 목동, 귀족, 몰락한 제사장 가문의 후손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예언자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에 넣어주신 말씀만 전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예언자를 한자로 예언자(預言者)라고 씁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마음 속에 넣어주신 말씀만을 전한다는 뜻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성경의 예언자들은 사소한 개인의 예언이나 소소한 일상적인 일을 두고 예언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커다란 역사의 흐름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의 앞길을 예언합니다. 예언의 목적도 다릅니다. 단지 미래에 펼쳐질 일을 미리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늦기 전에 하나님께 돌아와서 올바른 삶을 살라는 교훈적인 의미가 강합니다.

이처럼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룰 것을 믿고 지금 여기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한걸음 더 나가면 하나님의 예언을 사사로운 것에 적용하기 보다 이 세상의 불의와 모순, 차별과 압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예언자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 미래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앞길을 예측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지만 그들의 예언이 정확하지도 않습니다. 월드컵 문어든지 아니면 승부를 정확히 예측하는 전문가들의 말과 행동에 집착할 이유도 없습니다.인생이라는 전차는 미리 정해놓은 운명의 궤도를 따라 달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월드컵 축구는 물론 우리들 인생도 얼마든지 역전승이 가능하고 예측불허의 결과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앞 날을 알고 싶은 호기심은 삶에 대한 기대로 승화시키고, 불안한 마음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고, 값진 땀을 흘리면서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하기 원합니다. (2014년 6월 26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뚜벅이 신앙

뚜벅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자기 자동차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걸어 다니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가용이 있으면 편리할 텐데 차가 없으니 뚜벅뚜벅 걸어 다닐 수 밖에 없습니다. 불편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힘이 들고 속도가 중요한 현대사회에서 뒤쳐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놓치기 쉬운 일상들을 뚜벅뚜벅 걸으면서 차근차근 포착할 수 있을 테니 뚜벅이로 사는 묘미가 솔솔해 보입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세간에 회자되는 종교집단이 있습니다. 정식 명칭은 ‘기독교 복음 침례회’이고 소위 ‘구원파’로 불리는 기독교 이단입니다. 이단(異端)은 처음은 유사할 수 있지만 끝으로 갈수록 진리에서 멀어지는 특정 교리나 종교집단을 일컫는 말이지요. 세월호 참사의 배후에 구원파의 핵심인물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온 국민의 시선이 구원파에 쏠렸습니다.

구원파에서는 회개와 자백을 구분한답니다. 회개를 구원받는 순간 행하는 일회적 사건으로 봅니다. 만약 구원을 받고도 재차 회개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다시 죄인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 되니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구원 이후의 회개는 자백으로 대치됩니다. 자백은 자신의 죄를 입술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세월호의 선장은 물론 경영진들이 구원파 교리에 깊이 물들어있었다면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르고도 입술로 자백하고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는 아찔한 생각도 스쳐 지나갑니다. 이와 같은 구원파의 교리는 성경을 자신들에 맞게 자의적으로 해석한 결과입니다.

성경에서는 회개를 강조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구원 받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에서 의롭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의롭다고 칭해진 것이지(稱義), 우리들 존재 자체가 완벽하게 의인이 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종교 개혁자 말틴 루터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의인인 동시에 죄인” 즉 “용서받은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구원을 확신하고 구원의 은혜에 감격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회개를 통해서 죄인의 모습을 청산하는 거룩함 즉 성화(聖化)를 이뤄가야 합니다.

또한 성경에서는 구원을 일회적인 사건으로 결론짓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회개, 삶 속에서 예수님을 닮아가려는 훈련과 성령의 인도하심,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해 가는 거룩함의 여정이 넓게 보아서 구원의 과정에 속합니다. 이것을 두고 사도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고 일갈했습니다.

한번의 회개로 죄가 모두 용서받고 의인이 된다는 교리는 복잡한 세상살이에 지쳐있는 현대인들에게 꽤 매력적입니다.구원의 확신은 물론 성경의 다양한 교리들을 단순명료하고 편리하게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뚜벅이가 아니라 자동차로 신앙의 길을 여행하는 식입니다. 하지만 신앙의 여정은 존 번연의 말대로 하늘나라에 이르는 “천로역정”입니다. 신앙의 길을 가다 보면 여러 가지 유혹과 어려움을 만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의 영광을 마음에 품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께서 오르신 갈보리 언덕을 오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을수록,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알아갈수록 진실된 신앙을 갖는 것이 쉽지 않음을 절감합니다. 예전에 함부로 주장했던 것들이 크신 하나님을 인간의 말과 생각에 가둬두는 교만이었음도 종종 깨닫습니다. 동시에, 한없이 깊고 모든 것들을 품을 만큼 넓고, 하늘에 닿을 만큼 높고 긴 기독교의 진리, 복음 앞에 머리를 숙이게 됩니다.

무수한 이론과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는 글과 말들이 난무한 이 시대에 뚜벅뚜벅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립습니다. 자동차로 휙- 둘러보는 식의 편리한 신앙이 아니라, 사우나에 가서 땀을 쭉-빼듯이 감정만 충만한 일시적인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 앞에서 고민하고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려고 안간힘을 쓰는 진정한 신앙말입니다.우리가 받은 신앙은 한 순간에 이룰 수 있는 무지개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말 그대로 담담한 것입니다. 일상이 신비가 되고, 하루 하루의 삶이 성령의 역사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기적임을 고백하면서 묵묵히 걷는 순례길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뚜벅뚜벅 걸어가는 신앙의 여정이 되길 원합니다. (2014년 5월 22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반석위에 지은 집

한국에서 들려온 세월호 침몰소식은 미국에 사는 우리들까지 슬픔에 잠기게 만들었습니다. 사고가 났던 지난 주 화요일 에는 밤늦게까지 인터넷으로 한국 뉴스를 시청했습니다. 화면에 비친 세월호의 모습이 참담했지만 모두 구조되었다는 뉴스 자막이 나오길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있으니 실종자의 숫자가 200명이 넘는다는 정정보도가 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을 구조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는데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대참사로 이어졌습니다.

어수선한 언론 보도는 물론 갈팡질팡하는 정부의 발표를 보면서 조국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 큰 발전을 이루었지만 재난에 대처하고 국민들을 보호하는 시스템이 상당히 부실함을 느꼈습니다. 그 결과 꽃다운 청춘들이 자신의 꿈도 펼쳐보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금지옥엽 같은 자식을 잃은 부모님들과 졸지에 사랑하는 부모님과 형제 자매를 잃은 가족들의 애끓는 심정은 슬픔을 넘어서 분노에 이를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번 일을 보면서 신앙을 집 짓기에 비유하신 예수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을 비교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두 가지 집이 평소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어쩌면 모래 위에 지은 집이 훨씬 화려할 수 있습니다. 어떤 집이 더 훌륭한 지 결판나는 것은 바람이 불어오고 홍수가 날 때입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바람이 불고 홍수가 나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기초가 튼튼하기 때문입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쉽게 무너집니다.흔적도 없이 쓸려 내려갑니다. 모래 위에 세운 집을 두고 새번역 성경은 다음과 같이 번역했습니다:”비가 내리고, 홍수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서 그 집에 들이닥치니 무너졌다. 그리고 그 무너짐이 엄청났다.”

예수님께서는 지혜로운 사람은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고 하셨습니다. 반면에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일갈하십니다. 여기서 말씀은 신앙생활의 기준 또는 삶의 원칙입니다. 그러니까 원칙에 충실하고 기본부터 차근차근 다지라는 것입니다. 겉모습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기초에 투자하라는 것입니다. 듣는 것이나 말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이 모든 것을 행동으로 옮기라는 교훈입니다.

물론 말씀을 행동에 옮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기초를 다져야 합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보다 비용도 훨씬 많이 들어갑니다. 평소에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도리어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러다 보니 머릿속이 복잡할 정도로 여러 가지 상념들이 떠오릅니다. 약삭빠르게 편법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이해관계에 따라서 이리저리 쏠려 다닙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지어놓고는 반석 위에 세운 것처럼 속임수를 씁니다. 평소에는 알 수 없지만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금방 드러날 것을 모른 채 눈 앞의 이익을 쫓습니다. 원칙을 무시하고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태평양 너머 조국에서 들려온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모래 위에 지은 집이 생각났습니다. 해운회사는 편법을 사용해서 배를 개조했고, 배에 실린 화물의 무게는 물론 승객의 숫자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배를 운항하던 선장은 자기 혼자 빠져 나오는 몰염치한 행각으로 국제적으로 비난을 샀습니다. 당국이 조금만 일찍 그리고 현명하게 대처했으면 대참사를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정부는 물론 구조에 나선 경찰과 군도 허둥지둥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국민들에게 알릴 책임을 진 언론들도 특종만 따라다니다가 상황을 더욱 헷갈리게 만들었습니다. 신앙으로 말하면 말씀에 충실하지 않은 것입니다. 지켜야 할 기본 법규와 원칙을 무시한 채 미봉책으로 일관한 결과 큰 재앙을 부른 것입니다.어른들의 어리석고 무분별한 행동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생각하니 안타까움과 죄스러움이 밀려옵니다.

개인이든 국가든지 폭풍우는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불어 닥칩니다. 그때 집을 모래 위에 세웠다면 아무리 크고 화려해도 무너짐이 엄청날 겁니다. 하지만 반석 위에 세운 집은 폭풍우를 이기고도 남습니다. 이번 기회에 우리들 각자는 물론 조국 대한민국이 드러난 문제점들을 낱낱이 파악하고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계기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2014년 4월 24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생각하기 나름

예전에 인디애나에서 목회할 때, 여름이 되면 교인들과 근처에 있는 유적지를 탐방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했었습니다. 미국의 중서부는 한 두 시간만 운전해서 나가면 허허벌판에 옥수수 밭이 펼쳐질 뿐 딱히 기념할 만한 유적지가 많지 않습니다. 그래도 유적지 탐사를 담당하는 자매가 열심히 인터넷을 검색하고 여기저기 알아본 덕택에 유명한 곳은 물론 알려지지 않은 유적지들을 방문하는 뜻 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인디애나를 비롯한 중서부에는 헛간처럼 지붕을 덮은 다리(covered bridge)가 곳곳에 있습니다. 그 해 여름에는 근처에 있는 오래된 다리 세 군데를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아침에 일찍 도시락을 싸서 교인들과 함께 다리구경을 떠납니다. 첫 번째 다리에 도착했는데 모두들 실망한 눈치입니다. 자동차 하나가 다닐만한 다리에 지붕이 씌어 있는 것이 다입니다.길이도 짧아서 걸어서5분이면 건너갈 수 있습니다. 남은 두 다리는 근사할 것이라고 내심 기대하면서 다같이 모여서 사진을 찍고 다음 번 다리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두 다리들도 허름하니 페인트도 벗겨져 있고 볼품이 없습니다.유적지 탐사를 주선한 자매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역력합니다. 결국 근처 공원에 가서 점심을 먹는 시간이 훨씬 즐거웠습니다.

문제는 그날 저녁입니다. 유적지 탐사가 끝나면 교회 홈페이지에 소감문을 게시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다리 세 개를 보고 온 날은 아무것도 쓸 것이 없는 것입니다. 헛간처럼 지붕을 얹어놓은 다리가 유적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가 다리에서 찍은 성도들의 사진을 보고 있으니 흐뭇해 집니다. 초라한 다리였지만 함께 갔던 성도들은 서로서로 이어져서 한 마음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다리는 끊어진 길을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다리가 없으면 길은 중간에 끊어집니다. 우리 교인들이 어느 곳에 있든지 서로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길 기도했습니다. 왜

다리에 지붕이 있는지 궁금해서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중서부에는 여름에 갑자기 소낙비가 내립니다. 다리에 헛간 같은 지붕을 만들어 놓아서 비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길가는 나그네들이 잠시 비를 피하면서 오순도순 얘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리가 건설되던 1800년대에는 말을 타고 여행을 했습니다. 말들이 하천을 만나면 밑을 내려다보면서 겁을 먹곤 했기에 지붕을 만들어서 말들이 안심하고 건너게 했답니다. 다리에는 유리창을 만들어 놓아서 요즘 자동차의 사이드 미러처럼 뒤에 오는 마차들을 살필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다리를 건너던 연인들은 지붕으로 덮인 다리에서 잠시 사랑을 나누곤 해서 “입맞춤 다리(kissing bridge)”라고 불렀다니 왠지 가슴이 설렜습니다.

볼품없는 다리였지만 그 속에 담긴 역사와 사연을 찾아내서 돌아보니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종종 거창하고 자랑할만한 것들을 쫓아 다닐 때가 있습니다. 특별한 것이 아니면 시시하다면서 지나치곤 합니다. 그런데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면 소중한 것으로 변합니다. 매일 매일의 일상도 그냥 지나치면 지루하고 실망스럽지만 그 속에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면 하루 하루가 은혜요 축복입니다. 한 집에 사는 가족들이 세상에서 최고로 위대한 분들입니다. 만나면 티격태격 다투고 어디 새로운 인연이 없을까 두리번거리지만 지금 이 순간 곁에 있는 이웃들이 가장 귀한 분들입니다. 인생의 참 뜻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 가장 평범한 일들 속에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구약성경의 시편 기자는 매일같이 뜨고 지는 해와 달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낮에는 해가 상하지 않도록 밤에는 달이 해치 않도록 자신을 보호해 주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는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날 수 있는 것이 기적이었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 수 있음이 감사였습니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시편3:5).

하나님 백성인 우리들에게 하루하루가 소중합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도 하나님께서 붙드시고 인도해주신 결과이기에 감사할 뿐입니다. 작은 일에도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면 인생길 여기저기에 축복이 숨겨져 있습니다. 만사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말이 꼭 맞습니다. 하찮은 것도 쉽게 넘기지 말고, 매일 매일의 삶 속에 주님께서 숨겨놓으신 보물들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반복되는 일상이 ‘싫증’이 아니라 ‘감탄’이 되는 행복한 인생길을 걷기 원합니다. (2014년 3월27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