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연히 가셨습니다

지난 주일 아침, 라이드로 섬기시는 권사님께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전도사님께서 전화를 받지 않으시고 아파트까지 올라가서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전화를 하신 권사님도 전화를 받는 저도 설마 했습니다. 요즘 쉽게 잠이 들지 않으셨다니 새벽녘에 약을 드시고 주무셨다가 깊은 잠에 빠지신 줄 알았습니다. 서둘러 따님에게 전화를 해서 전도사님 댁에 가보시길 청했습니다. 왠지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예배 시간이 되어서 사무실을 나가는 순간 둘째 따님이 전화를 해서 다급한 상황임을 알려주십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지만 주일 예배 시간입니다.

셀폰을 강대상 앞에 갖다 놓고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매월 마지막 주는 전도사님께서 대표기도를 하시는 주일입니다.제가 대신 기도하는데 목이 메였습니다. 전도사님의 회복을 위한 기도보다 주님께서 그 영혼을 긍휼히 여겨주시고 꼭 안아주실 것을 기도했습니다. 제가 왜 그런 기도를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내내 전도사님께서 앉아 계시던 자리가 눈에 밟힙니다. 예사롭지 않은 일이 생겼음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주일예배를 마치고 성도님들과 인사를 하고 강대상 위에 얹어 놓은 셀폰을 보니 음성 메시지 표시가 있습니다. 따님께서 문자와 음성으로 “어머님께서 소천하셨습니다”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앞이 깜깜했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엊그제 수요예배 때도 참석하셔서 근래에 없이 큰 소리로 기도하셨습니다. 전도사님의 기도소리를 들으면서 저도 덩달아 힘이 생겼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에 제 손을 꼭 잡아 주셨습니다. 저도 전도사님을 살짝 안아드렸습니다. 이렇게 최근 몇 주간 전도사님은 회복의 기미를 보이셨습니다. 얼굴도 좋아지셨고 어지러운 것을 제외하고 생기가 도는 것 같아서 내심 감사하던 차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도사님께서는 하나님께로 가실 것을 아신 듯 만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전하셨습니다.묵묵히 교회를 섬기는 권사님께 그 자리를 끝까지 지키시고 천국에서 뵙자고 말씀하셨답니다. 자신은 하나님께 가실 준비가 다 되었고 자식들에게 신세를 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도 남기셨고, 마지막 참석하신 노인회에서는 본인이 가장 좋아하시는 찬송가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를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사처럼 부르셨고, 제가 차에 모시고 새벽기도회에 갈 때마다 전도사로서 하나님 영광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로 가길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더니 당신의 소원대로 홀연히 하나님께 가셨습니다. 손 한번 더 잡아 보고, 앙상하게 마르신 전도사님을 한번 더 안아드리고, 제가 기도해 드리면 기도 중에도 본인이 아픈 곳에 손을 갖다 대시는 손길을 한번 더 느껴보고 싶었건만 홀연히 가셨습니다. 주일예배에 가시려고 목욕재개 하신다는 말씀을 막내따님에게 남기고 하나님께 가셨습니다. 하나님께 가시기 하루 전, 동생처럼 아끼며 의지하던 아래층 권사님을 찾아가서 내일은 꼭 같이 예배에 가자는 말씀을 하시고 본인은 정작 하늘나라 예배에 가셨습니다.

제가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얼마 되지 않아서 전도사님은 큰 수술을 앞두고 입원하셨습니다. 그때 본인은 하늘나라 초청장을 받았기에 아무렇지도 않다고 태연하게 수술실로 들어가셨습니다. 초청장에 날짜가 없었다고 하시면서 거뜬하게 큰 병에서 회복하셨습니다. 평생을 전도사로 사셨습니다. 아무리 몸이 편찮으셔도 기도하실 때의 목소리는 우렁차셨습니다. 주중에 교회를 비울 일이 있어서 말씀을 부탁 드리면 팔십이 넘으신 전도사에게 주는 특권이라고 어린아이처럼 기뻐하셨습니다. 어머님께 배우셨다는 옛날 찬송가를 무반주로 부르실 때는 온 교회가 함께 박수를 치면서 전도사님의 찬송 속으로 빠져들어갔습니다.

조기순 전도사님 – 저에게는 지난 8년 동안 어머니 같은 분이십니다. 힘들 때 언제나 제 곁을 지켜주셨고, 힘을 내라고 격려해주셨습니다. 저를 보면 시골에서 목회하다가 강단에서 순직한 동생이 생각난다면서 늘 측은히 여겨 주셨습니다.아직도 전도사님의 기도가 필요하고, 전도사님의 손길이 그리운데 홀연히 가셨습니다. 하나님 품이 얼마나 좋으셨으면 사랑하는 자식들과 교우들에게 작별인사도 없이 훌쩍 떠나셨는지요! 전도사님의 빈자리가 너무 큽니다. 많이 그리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늘나라에서 주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본인이 섬기던 교회와 목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실 것을 믿고 편안히 보내드립니다. 고통 없는 주님 품에 영원히 거하십시오. 조전도사님,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그 동안 너무 감사했습니다. (2014년 2월 27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선함과 아름다움으로

2014년은 말의 해입니다. 새해 첫 달을 보내면서 올 한 해를 말처럼 힘차게 달려가자는 덕담을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빠르게 달려도 목표가 정확해야 합니다.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새해계획을 세우면서 제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과연 어떤 목표를 향해서 50여년을 달려왔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디를 향해서 달려가야 하는지 진지하게 점검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누님들을 따라서 교회에 나갔습니다. 초등학교는 물론 중고등학교 시절까지 열심히 교회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대학에 가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실제적인 회심을 경험했습니다. 그 이후로 20대와 30대는 제가 만난 청소년들과 청년들에게 ‘제자훈련’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을 닮고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해서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훈련을 통해서 진짜 그리스도인들(Radical Christians)을 많이 세워보고 싶었던 패기 넘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는 어디를 가나 제자훈련을 강조했고 저 역시 더욱더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 위해서 다니던 직장을 접고 30대 중반에 목회의 길로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제 삶 속에 불꽃처럼 강하게 임하던 시절입니다.

40대에 접어 들면서 ‘거룩함’을 마음에 품고 살았습니다. 기독교가 세상에서 손가락질 당하고 때때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거룩함을 회복하지 않고는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룩함은 단지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라는 야고보서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가는 곳마다 거룩함을 역설했습니다. 제 스스로도 거룩함의 길을 가기 위해서 말씀과 기도에 힘을 쓰면서 보냈습니다. 거룩함의 길을 가면서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많이 체험했습니다.

50대 중반을 향해서 가고 있는 요즘, 저는 ‘선함과 아름다움’을 많이 생각합니다. 구약성경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세상을 바라보면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감탄하신 것을 전합니다. 여기서 “보시기에 좋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선하다는 뜻입니다. 이를 두고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악이 배제된 선한 세상이라고 했습니다. 악의 실체는 선함이 결핍되었을 때 드러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선한 세상을 마음 속에 그리면서 인간을 비롯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2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도 악한 세력을 물리치시고 선한 세상을 회복시켜주신 거대한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선한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고, 하나님의 선함을 세상에 드러낼 때 그리스도인의 진면목이 드러날 것입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에는 아름답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실제로 우리를 둘러쌓고 있는 자연만물을 보면 참 아름답습니다. 하늘의 별들도, 길가의 꽃들도, 갓 태어난 아기의 배냇짓 속에도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습니다. 선함이 내적인 모습이라면 아름다움은 선함이 밖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선함이 씨앗이라면 아름다움은 꽃이고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던 본래 모습으로의 회복입니다. 선함과 아름다움에는 제자훈련은 물론 거룩함까지 모두 들어있습니다.

50대의 한 가운데를 지나가면서 인생을 선하고 아름답게 살고 싶은 것입니다. 인생길을 걸을 수록 제 안에 선함이 없음을 실감하기에 더욱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날마다 회개의 자리에 나가서 마음과 삶이 정결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거울을 보면 예전의 동안(童顔)이 사라져갑니다. 머리 숱도 적어집니다. 사진을 찍는 것이 점점 부담스러워지는 외모로 변해가지만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인생을 소망합니다. 나이에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제 안에 새겨주신 선함과 아름다움을 누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이 조금이라도 밖으로 드러날 수 있다면 더 없는 기쁨이요 감사입니다.

2014년 한 해도 훌쩍 지나갈 것입니다. 시간 가는 것을 세면서 달력만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점점 허전해 집니다. 지금 이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젊은 때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선함과 아름다움을 향해서 나가기 원합니다.(2014년 1월 23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기다림

제가 아끼고 사랑하는 젊은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청년입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면서 여기저기 원서를 넣고 있지만 아직 좋은 소식이 없습니다. 실력도 있고 괜찮은 학교를 졸업했기에 무난히 좋은 직장을 구할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해를 넘길 것 같습니다. 뒤에서 기도해주는 저도 조바심이 나는데 직장을 구하지 못한 채 해를 넘기는 본인의 마음은 오죽하겠습니까? 청년실업이 심각하다는 언론보도가 남의 일이 아님을 새삼 깨닫습니다.

어디 직장을 구하는 젊은이들만 그럴까요? 한 해가 며칠 남지 않았는데 일을 마무리하지 못했거나, 올 해 이루려던 계획을 내년으로 미뤄야 하는 분들의 마음은 똑같이 조급할 것입니다. 아니 대부분의 일들이 마무리가 되기보다는 내년으로 이월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연말을 맞는 우리들의 마음이 홀가분하지 않고 도리어 무겁기만 합니다. 시간은 왜 이토록 빨리 흘러서 벌써 한 해가 다 지나갔는지, 한 장 남은 달력이 괜히 야속해집니다.

이것은 설령 개인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미국 경제가 좋아졌다고 하지만 서민의 삶은 여전히 쪼들립니다. 앞으로 경기가 좋아질 것을 예측하고 양적축소를 발표했지만 우리네 서민들과는 딴 세상 이야기입니다. 과연 미국의 경기가 좋아져서 지금보다 나은 이민생활을 할 수 있을 지 의문시됩니다. 태평양 너머 조국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더 갑갑합니다. 김정은이 집권한 북한에서는 하루아침에 권력자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대한민국도 여전히 정치가 골치거리입니다. 좀처럼 돌파구를 찾지 못한 채 서로 싸우는 모습이 추할 뿐입니다. 얼마나 기다리면 미국의 경기가 실감날 정도로 회복되고 조국 대한민국에서 좋은 소식들이 들려올 수 있을지요!

개인의 인생길이나 세상만사가 기다림의 연속인 것 같습니다. 다 이루고 끝을 볼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도달해 보면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임 오지 않는다는 노래의 가사처럼 어쩌면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조급해집니다.

이와 같은 기다림은 이스라엘 최고의 왕 다윗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은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지만 그 후로 10여 년 이상을 광야에서 쫓겨 다녔습니다. 사울왕이 집요하게 그의 목숨을 노립니다. 사방에 적군입니다. 왕으로 등극하는 것은 그만두고 목숨 하나 부지하기 힘든 상황이 계속 펼쳐집니다. 그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미친 척까지 했습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순간, 다윗은 주님께 탄식하면서 기도 드립니다: “내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떨립니다. 주님께서는 언제까지 지체하시렵니까?” (시편6:3).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느냐는 호소입니다. 기다림의 끝이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이 자신에게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최고의 왕이 된 것입니다.

올 한 해가 다 지나가지만 우리들에게도 “언제까지(how long)라는 질문이 남아있습니다. 언제까지 더 기다려야 하는지, 언제까지 더 참아야 하는지, 언제까지 준비만 해야 하는지, 과연 기다림의 끝이 있을 것인지 – 해는 저물어가는데 질문은 점점 늘어 갑니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기다림이라는 단어 속에 희망이 숨겨져 있음을 발견합니다.희망이 없으면 기다리지도 않겠지요. 기다림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이처럼 기다림은 희망과 맞닿아 있습니다. 희망의 끈을 꼭 붙들고 끝까지 기다리는 것이 주어진 인생길을 꿋꿋하게 살아가는 비결임을 한 해를 보내면서 다시금 되새겨봅니다. 기다림에는 끝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올해 못다한 일을 두고 너무 속상해하지 맙시다. 세상에 모든 일을 마음먹은 대로 다 해내는 사람은 없기에 기가 죽을 필요도 없습니다. 심기일전해서 새해에 더 열심히 하면 되지요. 내년에는 아니 끝까지 믿음 가운데 기다리면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우리의 소망을 이루어주실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갖고 있는 확신이고 자신감입니다. 내년에는 제가 간절히 기도해주는 젊은이에게도 좋은 직장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12월 26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추수감사절 만찬

미국에 처음 와서 맞았던 추수감사절 만찬이 생각납니다. 그때는 뉴욕에 있는 한 한인교회에서 중고등부 전도사로 사역하던 때였습니다. 추수감사절 주일을 맞이하자 온 성도들이 음식을 한 가지씩 준비해서 교회로 가져왔습니다. 마치 한국의 추석명절을 맞듯이 한복을 곱게 차려 입으시고 신이 나서 추수감사절 만찬을 준비했습니다. 추수감사절 몇 주전부터 교인들께서 칠면조 고기를 꼭 맛보아야 한다고 특별히 주문하셨습니다. 잔뜩 기대를 하고 칠면조 고기를 맛보았지만 푸석푸석하고 솔직히 맛은 별로였습니다. 고기와 곁들어 주시는 양념이 훨씬 맛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리 네 식구는 한국에서 먹던 양념통닭 얘기로 꽃을 피웠습니다.

어제는 한 청년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10년 인디애나에서 목회하던 시절의 교회 주보를 사진찍어서 올려놓았습니다. 그 청년이 우리 교회를 처음 왔을 때 받았던 주보를 우연히 발견해서 그때 그 시절을 추억하면서 올려놓은 것입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그때는 풋풋했던 청년들이 지금은 대부분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학부형이 된 청년들, 성경공부를 열심히 시켰더니 말씀대로 생육하고 번성해서 세 명의 자녀를 둔 청년들도 있습니다. 옛날 주보를 보고 있으니 제 마음이 10년 전으로 돌아갑니다.

인디애나에서의 추수감사절을 떠올리면 매년 우리 가족을 초청해 주시던 권사님 내외분이 생각납니다. 제가 태어난1962년에 결혼하셔서 한국 사람이 거의 없는 인디애나로 시집오셨습니다. 미국 시어머니의 호된 시집살이를 다 견디셨습니다. 한국 사람이 없으니 한국말도 잊어 버린 때도 있으십니다. 그래도 변함없는 남편의 사랑을 먹고 그 모진 이민생활을 이겨내신 권사님이십니다. 은퇴하시고 두 분이 아담한 집에서 강아지 두 마리와 함께 오순도순 살고 계셨습니다.

추수감사절이 되면 권사님 내외분이 우리 가족을 초청해 주셨습니다. 때로는 눈길을 헤치고 한 시간 가까이 운전해서 가야 하는 거리에 사셨지만 우리 네 식구는 추석날 부모님 뵈러 가는 기분으로 내려가곤 했습니다. 권사님의 특기는 호박파이와 감자요리셨습니다. 권사님은 칠면조 고기가 맛이 없다고 닭을 가지고 맛있게 요리해 주셨습니다. 한국전쟁 때 죽은 동생을 등에 업고 피난을 가던 사연부터 위성방송으로 시청하셨던 <장금이>와 <여섯 시 내 고향>에 나오는 한국 음식을 놓고 신이나서 얘기하시던 권사님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샌프란시스코로 목회지를 옮기고 난 이후에는 추수감사주일에 교인들과 함께 칠면조 고기를 먹습니다. 뉴욕의 교인들처럼 우리 성도님들도 음식을 한가지씩 정성껏 준비해 오시고 칠면조는 여선교회가 전담해서 굽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추수감사절을 맞는 청년들이나 교인들에게 칠면조 고기를 꼭 맛보라고 강력히 권합니다. 그리고 만찬이 끝난 다음에 맛이 어땠는지 약간 짓궂게 물어봅니다. 거의 대부분 잠시 머뭇거린 후에 “맛있어요”라고 대답합니다.  ‘한국에서 먹던 양념통닭만 못한걸요’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저는 금새 알지요. 그래도 온 교인들과 더불어 나누는 추수감사절 만찬은 늘 풍성하고 화기애애합니다.

이처럼 추수감사절의 절정은 온 가족 또는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만찬에 있습니다. 첫 번째 추수감사절을 보냈던 청교도들도 일 년 동안 자신들을 도와준 인디언들을 초대해서 만찬을 베풀었습니다. 102명이 메이플라워를 타고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 대서양을 건너왔지만 겨울을 지내면서 절반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디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들마저도 신대륙에서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가족과 신앙의 동지를 잃은 슬픔이 마음 한 켠에 있었지만 살아남은 청교도들과 인디언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한데 어울러 첫 번째 추수감사절 만찬을 즐겼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추수감사절을 맞습니다. 교회는 물론 각 가정마다 함께 모여서 푸석푸석한 칠면조 고기에 양념을 곁들어 먹으면서 한 해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좋을 수는 없습니다. 칠면조 고기만큼이나 기대에 못 미친 한 해의 삶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추수감사절을 맞을 수 있음은 커다란 축복입니다.

아내와 함께 올해 추수감사절 만찬에는 누구를 초대할까를 의논하다가 작년처럼 가족들 없이 이곳에 남아있을 청년들을 집으로 초대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어김없이 그들에게 칠면조 고기를 적극 권할 것입니다. 맛있는 양념과 화기애애한 덕담까지 얹어지면 올 해도 풍성한 추수감사절을 보낼 것 같습니다. Happy Thanksgiving!
(2013년 11월 21일 SF 한국 일보 종교칼럼)

고르반

10월은 개신교인들에게 뜻 깊은 달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종교개혁자 말틴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앞에 당시의 타락한 교회의 모습을 반박하는 95개조의 반박문을 게시하면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부터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루터는 베드로 성당의 건축비와 은행 빚을 갚기 위해서 무분별하게 면죄부를 발급한 혹세무민(惑世誣民)의 관행에 분개했습니다. 면죄부를 팔면서 면죄부를 사고 헌금을 헌금통에 넣는 순간 “쨍그랑”소리와 함께 죽어서 연옥에 있던 부모와 친지들이 구원받게 된다고 백성들을 현혹시켰습니다. 이러한 달콤한 논리에 많은 사람들이 면죄부를 샀고 이것은 결국 교회의 부정축제 수단이 되었습니다. 루터는 그의 반박문에서 헌금통 안에 던져진 돈이 쨍그랑 소리를 냄과 동시에 연옥에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인간의 학설이라고 못박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면죄부를 팔수록 연보궤 안에서 인간의 탐욕과 잇속만 늘어난다고 당시의 교회를 비판했습니다.

면죄부와 비슷한 관행이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음을 신약성경이 소개합니다. 마가복음 7장에는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간의 논쟁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몇 사람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짚어먹는 것을 본 종교지도자들이 당시의 율법을 들이대면서 예수님께서 부정한 사람들을 제자로 데리고 다닌다고 딴지를 걸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이 만들어낸 사람의 전통이 하나님의 계명보다 앞설 수 없다고 반박하십니다. 거기서 한발자국 더 나가셔서 고르반의 예를 갖고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선하신 계명을 변질시켰다고 말씀하십니다.

원래 고르반은 히브리어 “예물”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을 히브리어로 고르반이라고 합니다(레1:2). 이것이 후대로 오면서 두 가지 의미를 갖게 됩니다. 한가지는 원래의 뜻 그대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고, 다른 것은 하나님께 드린 것은 금할 것이 없다는 금지명령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어떤 종교지도자들은 고르반 규정을 그릇되게 가르치고 강요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노부모를 모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릴 적에는 부모가 보호자가 되고 그늘이 되지만, 부모님께서 연세가 드실수록 상황이 역전되어서 부모가 자식들의 짐이 되기 십상입니다. 예수님 당시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어긴 사람들 또는 부모를 공경할 생각이 없는 자식들에게 일종의 면죄부를 팔았는데 그것이 바로 고르반이었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 대신에 성전에 고르반 예물을 드리면 부모님을 모실 책임이 면제된다는 관행입니다. 고르반을 선언하고 나면 그 어떤 책임과 의무도 고르반 선언을 금지할 수 없습니다. 일종의 책임회피입니다. 십계명을 왜곡시킨 “사람의 전통”입니다. 혹자에 의하면 예물을 드릴 필요도 없이 성전에 와서 고르반 서약을 하고, 보증금을 걸듯이 일부만 예물로 드리면 부모에 대한 책임도 면제받고 남은 재산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고르반이나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던 면죄부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왜곡시키고 자기 편한 대로 하나님을 믿겠다는 얄팍한 심리를 잘 드러냅니다. 책임을 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쉽게 믿고 편리하게 살고 싶은 본성이 있습니다. 헌금통에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죽은 영혼이 구원받는다는 식의 신앙은 매력이 있어서 현혹되기 쉽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잇속과 쉽게 믿고 축복만 받으려는 기복주의가 만나서 보기 흉할 뿐만 아니라 그릇된 신앙이 만들어졌습니다.

솔직히 면죄부나 고르반의 관행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있습니다. 성경에도 없는 것을 사람들이 만들어서 그것이 신앙인 것처럼 믿고 따릅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천로역정과 같은 신앙을 가르치기보다 편하고 값싼 은혜를 설파합니다. 종교개혁주간을 맞으면서 95개조 반박문에 있는 루터의 말이 마음을 울립니다.:” 참다운 그리스도인은 죽은 자나 산 자나 면죄부 없이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모든 영적 은혜에 참여 하는 것이다.””가난한 사람을 도와 주고 필요한 사람에게 꾸어 주는 것이 면죄부를 사는 것보다 선한 일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고르반을 선언하고 부모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폐하는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슬며시 자리잡은 그릇된 신앙의 관행들, 추하고 얌체 같은 편이주의(便易主義)를 낱낱이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되고 바른 신앙을 회복하기 원합니다. (SF 한국일보 2013년 10월 24일 종교칼럼)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제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습니다. 큰 아이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준비 중이고 둘째도 어느덧 대학교 4학년이 되었습니다. 15년 전 유학 길에 오르면서 김포공항(그때는 인천공항이 없었음)을 떠날 때 작은 아이가 자기 몸집보다 큰 가방을 메고 출국심사를 받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아이들이 저를 내려다볼 정도로 성인이 되었습니다.

저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 엄하게 키웠습니다. 잠언 말씀 (잠언 13:24)을 핑계삼아(?) 아이들이 잘못할 때마다 회초리를 들었습니다. 그때마다 아내는 가슴 아파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회초리로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에 장단점이 있습니다. 장점은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했듯이 어렸을 때 받은 엄한 교육이 아이들의 심성을 바르게 합니다. 매사에 조심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단점도 꽤 있습니다. 아이들이 쉽게 주눅이 들곤 합니다. 지금도 제 목소리가 커지면 사뭇 긴장합니다. 잘못했을 때 자신들도 모르게 아빠에게 야단맞을 것을 먼저 걱정합니다. 어릴 때부터 생긴 습관이 몸에 베어서 그렇습니다.

아이들에게 회초리를 들면서 신혼시절부터 저희 부부가 세운 원칙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제가 매를 들면 아내가 아이들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것입니다. 함께 야단을 치지 않고 한 사람은 아이들에게 피난처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저 역시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어서 잠이 들락날락할 때 아이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속삭이며 기도해 주었습니다. 회초리를 든 것이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로 남아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원칙은 아이들이 열 살이 되면 더 이상 회초리를 들지 않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열 살쯤 되면 아이들과 진지한 대화가 가능하리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쉽지는 않았습니다. 열 살이 되면서 아이들이 게임에 빠져듭니다. 학교 공부가 늘어나는데 텔레비전 앞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비교적 마음 고생을 하지 않고 사춘기를 보냈지만 그래도 부모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열살 이후로 아이들에게 회초리를 들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대신에 부모인 저희들이 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어릴 때는 회초리를 들었지만 아이들이 커가고 그들의 자아가 자리잡으면서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가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사춘기의 아이들과 대화로 풀어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몸집은 커졌지만 부모의 눈에 자식은 늘 어리게 보였습니다. 이런저런 일들로 아이들의 어깨가 축 쳐져 있을 때에 아이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주었습니다. 아이들도 엄마와 아빠가 자기들을 위해서 기도해준다는 것을 알고 힘들 때마다 기도제목을 알려줍니다. 기도는 부모와 자식이 하나님 안에서 소통하는 최고의 방법임을 배웠습니다.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 기도의 힘은 회초리보다 강합니다. 회초리를 갖고 아이들의 그릇된 습성을 고칠 수 있어도 그들의 인생길을 열어줄 수는 없습니다. 사랑의 매라고 해도 신체에 가해지는 회초리는 아이들의 마음에도 상처를 입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부모의 기도는 아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고 북돋아 줍니다. 기도하는 부모를 둔 자식은 비뚤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기도로 뿌린 씨앗은 결국 싹이 나게 마련입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손길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자식간에만 기도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젊은이들을 만나면 세상살이가 쉽지 않다고 고민을 토로합니다. 경쟁이 치열하고 앞 길이 불투명해서 늘 염려와 불안을 안고 살아갑니다. “목사님 기도해주세요”라고 서슴없이 부탁하는 것을 보면 이들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 짐작이 갑니다. 어르신들도 마음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몸이 약해지면서 마음도 약해지십니다. 자식들은 물론 친지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애쓰다 보니 마음 속에 돌덩이가 점점 커집니다.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하소연 할 곳도 없습니다. 역시 기도가 필요하신 분들입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우리 모두는 기도가 필요한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누군가 기도해 준다는 말만 들어도 위로가 되고 힘이 생기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목사인 저는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해 드리는 것을 가장 큰 특권이요 사명으로 삼게 됩니다.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 지금 이순간도 누군가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부족함이 없을 만큼 삶이 평안하시다면 자녀들과 친지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행여나 어려운 인생길을 걷고 계시다면 힘내십시오. 일어서십시오. 그리고 앞으로 나가십시오. 누군가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2013년9월 26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이야기가 있는 인생

하나님은 이야기를 좋아하신다(God loves stories)”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이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어떤 사건의 줄거리를 단순하게 전달하는 식이 아니라, 세상 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대면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 속에 의미를 담아서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 속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자신을 들여다봅니다.때때로 성경 속의 인물이 되어서 함께 고뇌하고, 함께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기도 합니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에는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정직하고 솔직하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읽다 보면 어떻게 이런 이야기들이 하나님 말씀에 포함되었는지 의아하게 생각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두 번씩이나 아내를 누이라고 속입니다. 부전자전이라고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같은 잘못을 범합니다. 야곱은 형으로부터 장자권을 빼앗기 위해서 어머니와 짜고 아버지 이삭을 속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잘난척하는 동생 요셉을 시기한 나머지 외국 상인들에게 팔아 버립니다. 때때로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성경의 이야기들은 솔직합니다.

성경 속의 이야기들은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춥니다. 그런데 성경의 하나님은 홀로 저 멀리 하늘에 계시지 않고, 세상 안으로 들어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시고 도와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결국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시기와 질투, 미움과 다툼은 물론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못된 인간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성경에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을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연애편지라고 부릅니다.

성경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습니다. 아무리 인터넷이 발달하고 고화질 텔레비전이 발명되었어도 어렸을 때 어머님이나 주일학교 선생님들께서 들려주신 성경 이야기들의 흥미진진함을 따라잡지 못합니다. 어른이 되어서 어릴 적 들었던 성경 이야기들을 읽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있습니다. 다윗이 물 맷돌 다섯 개로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물리친 이야기는 지금 읽어도 흥미진진합니다. 들릴라의 유혹에 머리카락이 잘린 삼손이 힘없이 블레셋에 끌려가는 이야기를 읽다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르면서도 슬퍼집니다. 우리는 이렇게 어릴 적부터 성경의 이야기에 빠져들었고, 그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힘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야기들로 성경을 가득 채워놓으셨듯이,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도 이야기가 가득한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야기를 들려주시듯이 우리들도 하나님께 우리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올려드릴 수 있습니다.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운 이야기, 세상에 내놓기 어려운 실패담(失敗談), 때로는 결말을 보지 못한 미완성의 이야기들도 괜찮습니다. 물론 자랑스럽고 감사한 이야기들은 쉽게 풀어낼 수 있겠지요. 그렇다고 보기 좋게 꾸밀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들 인생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 속에 담아 놓으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솔직한 이야기를 즐겨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하나님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과 매사에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걷는 인생길 속에는 간증과 고백, 주옥 같은 신앙 이야기들이 모두 들어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우리 인생의 배경음악처럼 은은하게 삶 속에 울려 퍼집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더불어 써 나가는 우리들의 인생 이야기는 솔직하지만 깊은 맛을 내게 마련입니다.

이야기가 있는 인생길은 쉽게 잊혀지지 않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습니다. 지나치는 인연과 하찮은 만남도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면 결코 소홀히 여길 수 없습니다.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라는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는 하루 하루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것을 이야기로 엮어내면 됩니다. 그때 작은 일도 큰일로 변하고 우리네 하찮은 인생도 하나님 앞에서 보배롭고 귀한 인생으로 승화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가 이야기들로 가득 찬 인생길이 되길 원합니다. 그 속에서 인생의 깊이와 신앙의 귀함을 깨닫기 원합니다. (2013 9 12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참호신앙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미군군목 윌리엄 커밍스는 “참호 속에는 무신론자가 없다(there are no atheists in foxholes)”는 말을 남겼습니다. 머리 위에서 총탄이 오가고 언제 적군이 공격해 올지 모르는 참호 속에 있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초월적인 하나님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맞는 말입니다. 2001년 9.11테러 직후에 미국인들의 예배참석률이 실제로 5%이상 급상승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연약한 인간은 전쟁이나 테러 또는 쓰나미와 같은 불가항력적인 자연재해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찾습니다. 전쟁터 참호 속은 아니라도 질병이나 실패등 개인적으로 극도의 어려움을 경험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초월적인 신을 찾습니다.

그런데 위기가운데서만 하나님을 찾는 참호신앙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실제로 9.11 테러 직후에 교회를 찾던 많은 발걸음들이 두 달도 되지 않아서 교회를 떠났습니다. 심지어 테러가 일어나기 일년전보다 예배 참석률이 낮아졌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이처럼 참호 신앙은 올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참호 속에 있을 때만 하나님을 찾습니다. 참호 속에서 목숨을 구해주신다면 있는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겠노라고 서원하면서 기도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 밖에 없다고 서슴없이 고백합니다. 참호 속에서는 무신론자가 없다는 커밍스의 말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참호 밖을 나오면 모든 것이 도루묵이 됩니다. 그 이전보다 더 나빠지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절대자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에게 참호신앙 또는 참호기도는 흔하게 발견됩니다. 어려움을 당하면 하나님께 SOS를 칩니다.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해서 911을 부르듯이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합니다. 평소에 하지 않던 새벽기도회에도 참석하고, 교회활동에도 앞장서면서 말 그대로 열성분자 기독교인이 됩니다. 그러다가 어려움이 지나가면 어려움과 더불어 신앙도 쓸려 보내고 소위 건성으로 하나님을 믿곤 합니다. 전형적인 참호 신앙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관계의 종교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도 관계적 언어를 통해서 제한적으로 설명될 뿐입니다. 성부,성자, 성령 하나님의 하나됨은 결국 일체 되신 관계를 통해서 우리 안에 나타납니다.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 안에 계신 것같이 제자들도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 안에 거하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안에 거하는 것’이 곧 관계입니다.

성경 속에 나타난 대표적인 참호신앙은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은 아홉 명의 나병환자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 때 열명의 나병환자가 소리치면서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주시길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보시고 측은히 여기셔서 열명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열 명 가운데 한 명만 예수님께 와서 감사했지 나머지 아홉 명은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열 명중에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아홉 명은 참호신앙이었습니다.

남 얘기가 아니라 우리들 이야기입니다. 우리 안에도 그때뿐인 신앙, 은혜를 망각하는 부끄러운 신앙이 꽤 많이 있습니다. 참호 속에 있을 때만 하나님 안에 있고, 참호 밖을 나오면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참호신앙입니다. 어려울 때는 하나님께 나와서 울며불며 기도하지만, 어려움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부끄러운 신앙입니다.

이제는 참호신앙을 지나서 한결 같은 신앙으로 나아갈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하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부할 때나 가난할 때나, 기분이 좋을 때나 상할 때나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한결같으신 하나님께 상록수와 같은 신앙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자신을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던 질병에서 고침 받고 예수님을 찾아온 그 한 명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도 크게 울려 퍼질 것입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17:19).
(2013년 7월 25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엎드림

대부분의 포유동물들은 엎드려서 네 발로 걷는데 우리 인간들은 두 발로 서서 직립보행을 합니다. 다른 동물들처럼 엎드려서 네 발로 기어 다녔다면 인간의 모습은 물론 우리가 사는 세상도 전혀 다르게 펼쳐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두 발로 걷다 보니 두뇌도 발달하고 자유로운 두 손을 사용해서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두 발로 서서 걷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신 셈입니다.

서서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인간은 무릎 꿇고 엎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무릎을 꿇고 엎드립니다. 성경에서는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할 때도 엎드리다는 표현을 씁니다. 지은 죄를 뉘우칠 때도 엎드립니다.여기서 통회자복(痛悔自服)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스스로 엎드려서 가슴을 치며 자신의 죄를 회개한다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의 인도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아간이라는 사람이 전쟁에 나갔다가 전리품을 몰래 숨깁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아시고 전쟁에서 패(敗)하게 하십니다. 그때 여호수아는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더불어 하루 종일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통회자복합니다. 엘리야 선지자 역시 바알 선지자들과의 갈멜산 대결에서 이긴 후에 가뭄을 그치고 비를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 드리면서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엎드립니다. 간절함의 표시입니다. 하나님께서 손바닥만한 구름을 보내주셔서 비를 예비하시더니 곧이어 큰 비를 내려주십니다. 엎드림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도 엎드림의 동작이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 하나는 베드로의 경우입니다. 예수님께서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헛수고를 한 베드로를 찾아가셔서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잔뼈가 굵은 베드로였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깊은 곳으로 배를 몰고 가서 그물을 던집니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육지로 나온 베드로가 예수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체험하고 두려움 속에 엎드린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십니다. 베드로의 엎드림은 그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 받은 시작점이었습니다.

엎드림은 성경의 인물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도 엎드려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엎드려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습니다. 인생길에 폭풍우가 불어오면 땅바닥에 엎드리는 것이 상책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두 발로 걷도록 만드셨다지만 인생의 모진 바람을 일어서서 온 몸으로 맞는 것은 어리석다못해 매우 교만한 행동입니다. 엎드려 있으면 폭풍우가 머리위로 지나갑니다. 땅에 얼굴을 묻고 엎드려있으면 자신이 흙으로 빚어진 연약한 존재임을 금새 깨닫습니다. 일어서 있을 때는 자신의 그릇된 모습이 전혀 생각나지 않지만, 무릎 꿇고 엎드리면 저절로 통회자복이 나옵니다. 이처럼 엎드림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더욱 더 하나님께로 인도합니다.

저는 인생길이나 목회의 여정에서 어려움이 찾아오면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폭풍우가 다 지나가길 엎드려 기다립니다.엎드려서 제 자신을 샅샅이 살펴보는 내적성찰의 시간을 갖습니다. 쉽지 않은 시간들이지만 엎드려있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어느 순간엔가 폭풍우를 동반한 먹구름이 지나가고 파란 하늘에 맑은 햇살이 비춰옵니다. 그때 일어나서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기쁨의 찬양을 드립니다.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그렇게 엎드려서 어려움을 견뎌왔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손을 붙잡아 일으켜주셨습니다.

아마도 일어서 있었다면 넘어졌을 것입니다. 폭풍우를 온 몸으로 맞을 힘도 능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엎드려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엎드려있었기에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엎드린 사람만이 경험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길입니다. 인생길에 불어 닥치는 모진 바람을 두 발로 서서 온 몸으로 맞기보다 무릎 꿇고 엎드려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엎드린 우리를 지켜주시고 손잡고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2013년 6월 27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품격 (品格)

한국에서 인기리에 방송되는 코미디 프로그램 한 꼭지의 주제가 “거지의 품격”입니다. 신사의 품격이라는 드라마를 패러디한 코미디라고 들었습니다. 허름한 옷을 입은 거지와 예쁘게 생긴 아가씨가 실랑이를 벌입니다. 넉살 좋은 거지는 순진한 아가씨의 질문을 빌미로 500원 이상을 꼬박꼬박 챙깁니다. 아가씨는 “뭐 이런 거지가 다 있어”라며 거지를 향해서 소위 돌직구를 날리지만 시간이 갈수록 거지에게 마음이 끌리는 듯 합니다. 품격 있는 거지와 도도한 아가씨 사이의 은근한 로맨스도 볼거리입니다. 코미디 속의 거지는 자신을 꽃 거지라고 밝히면서 꽃으로 장식된 겉옷을 입고 춤을 춥니다. 보통 거지와 다른 품격이 있는 거지임을 밝히는 동작입니다.

연암 박지원이 쓴 풍자소설가운데 <허생전>이 있습니다. 허생이라는 남산골 선비는 10년을 작정하고 학문을 시작했습니다. 7년쯤 지났을 때 집안일을 책임지던 아내가 푸념을 하기 시작합니다. 집은 다 무너져 내리고, 쌀독에 쌀은 떨어지고, 옷이 헤어지는데도 글만 읽고 있으니 아내가 부화를 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 길로 허생이 집을 나서서 장안의 부자인 변씨에게 일만 냥을 빌려서 장사를 시작합니다. 손을 대는 사업마다 성공을 해서 상당한 돈을 법니다. 그렇지만 허생은 번 돈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변씨에게 빌린 만 냥을 갚은 후에 남산골 오두막집으로 돌아갑니다. 허생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아본 변씨가 허생에게 먹거리를 대주면서 친구처럼 지내게 됩니다. 남산골 선비 허생은 부자 친구 변씨가 필요한 것 이상으로 물건을 대주면 정중히 사양합니다. 분수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다 싶으면 곧장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어째서 내게 재앙을 물려주려 한단 말인가?”

남산골 선비까지는 아니더라도 품격을 지키며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품격(品格)을 사전에서는 “사람의 품성과 인격” 또는 “사물 따위에서 느껴지는 가치나 위엄”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품격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풍겨나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갖고 있고, 높은 위치에 올라갔어도 저절로 품격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성품과 인격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가치와 위엄이 있어야 품격이 살아납니다. 또한 품격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부자 친구 변씨가 자신에게 과하다 싶을 정도의 호의를 베풀어 줄 때는 “어째서 내게 재앙을 물려주려 한단 말인가?”라고 말한 남산골 선비 허생의 말을 곱씹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우리 사회가 품격을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고위 공직자가 남의 나라에 와서 추태를 벌인 것은 국가의 망신입니다. 어디 그 한 사람뿐일까요? 어쩌면 빙산의 일각처럼 사회 곳곳에서 무례하고 저속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 것입니다.

남의 말을 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품격이 요청됩니다. 초대교회 당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위를 버리고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가셔서 병을 고쳐주시고, 배불리 먹여주시고, 죄를 용서해 주셨지만 한번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품격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당시 가장 잔혹하고 수치스러운 형벌인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온갖 조롱과 비난의 소리를 들으시면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하지만 메시야로서의 품격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품격을 세상에 드러내면서 예수님의 대리인으로 살았습니다. 거기에 성령의 능력까지 더해지니 초대 교회가 부흥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과연 우리들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품격을 갖춘 그리스도인들인지 돌아볼 시점입니다. 예수님을 닮은 품성과 신앙 인격을 갖추고 있는지, 하나님 자녀로서의 가치와 위엄을 드러내고 있는지 살펴볼 일입니다. 스스로 자화자찬하는 식은 이제 통하지 않습니다. 말보다 삶이 앞서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 검증 받아야 합니다. 주변에 있는 이웃들로부터 “당신은 정말 그리스도인답습니다. 당신을 보니 나도 예수님을 믿고 싶습니다”라는 평판을 들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의 품격을 갖춘 셈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복음 5장 16절). (2013년 5월 24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