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眞珠)

진주는 유사이래 귀한 보석으로 대우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주는 아픔을 통해서 만들어집니다. 딱딱하고 커다란 이물질이 몸 속으로 파고들면 조개는 체액을 동원해서 그것을 감싸 안습니다. 자기 안에 침입한 이물질을 밀어내지 못했을 때 마지막으로 발휘되는 조개의 생존본능이 진주라는 귀한 보석을 탄생시키는 것입니다. 진주는 귀한 보석이면서도 사람들에게 친숙한 이미지를 풍깁니다. 그러다 보니 진주를 소재로 삼은 문학작품이나 노래가 꽤 많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살리너스 태생이면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던 존 스타인벡의 <진주>라는 소설입니다.

소설 속에는 키노와 주애너라는 가난한 부부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멕시코 만의 작은 마을에서 조개잡이를 하면서 아기를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자 사랑의 결실인 아기가 전갈에 쏘입니다. 온몸이 퉁퉁 붓고 고열에 시달리는 아기를 둘러엎고 의사를 찾아가지만 가난하다는 이유로 문전박대를 당합니다.키노와 주애너는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배를 타고 진주조개잡이를 떠납니다. 아내 주애너의 간절한 기도가 응답이라도 된 듯이 바로 그날 갈매기 알 만한 진주를 발견합니다. 횡재를 한 것입니다. 이제는 의사가 집에 찾아와서 아기를 고쳐줄 것입니다. 진주를 팔면 돈이 없어서 미뤄두었던 결혼식을 올릴 참입니다. 하나뿐인 아들을 학교에 보내서 가난을 대물림 하지 않게 되었다는 희망도 생겼습니다.

그렇지만 착하고 순진한 부부를 세상이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진주를 따왔다는 소문이 퍼지자 집에 도둑이 듭니다. 집을 통째로 불태워버리기도 합니다. 남편 키노는 온 몸이 피범벅이 되면서 진주를 지켜냅니다. 진주를 팔기 위해서 중개상들을 찾아 가지만 헐값에 구입하기로 단합이 끝난 뒤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남편 키노의 성격이 점점 포학해집니다. 눈에 살기가 돕니다. 진주를 지키기 위해서 총도 준비합니다. 가족들을 위하는 일이라고 하지만 예전의 행복은 사라지고 불안과 두려움이 집안에 가득합니다. 아내 주애너가 차라리 진주를 다시 바다에 던져버리자고 제안했지만 이미 진주에 마음을 빼앗긴 남편을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결국 대도시로 가서 진주를 팔 작정을 하고 밤중에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진주를 노리는 사람들이 집요하게 따라붙습니다. 남편 키노가 이들과 마지막으로 격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적들이 쏜 총에 그만 아들이 죽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남편이 제정신이 듭니다. 가족을 위해서 진주에 집착했건만 그것은 아들을 잃는 비극으로 끝이 났습니다. 죽은 아들을 메고 고향마을로 돌아온 키노와 주애너는 바닷가로 가서 진주를 바다에 던져버립니다. 작가 스타인벡은 그 대목에서 진주를 놓고 “흉측했고 어두침침했으며 악성 종양 같았다”고 묘사합니다. 행운을 가져올 줄 알았던 진주, 팔자를 고쳐주길 바랬던 진주, 아니 진주를 팔아서 아들에게는 공부를 시키고 뭔가 근사한 인생을 살게 해주고 싶었던 젊은 부부의 꿈은 이렇게 도루묵이 되었습니다.

작가 스타인벡이 자신의 작품을 우화(偶話)라고 불렀듯이 그의 소설 속에서 인생의 단면을 발견합니다. 우리들도 진주를 따라다닐 수 있습니다. 삶을 역전시켜주고, 자신을 무시하던 사람들에게 멋지게 복수할 수 있는 진주를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싶어서 진주를 찾아 동분서주 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것을 놓고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진주를 찾고 보면 자신이 애초에 생각했던 것이 아닙니다. 진주를 지키려다가 자신도 망가지고 아들까지 잃어버린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우리들도 더 중요한 것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인생길 중간 중간에 잠시 멈춰서 자신이 현재 추구하는 것, 애지중지 하면서 간직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들의 진정한 의미를 점검해야 합니다. 손에 진주를 들고 있어도 그것이 행복을 무너뜨리는 것이라면 얼른 바닷가에 던져 버리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값비싼 보석이라도 자신의 초심을 무너뜨리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해를 끼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진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주 자체에 관심을 쏟으며 살다 보면 구약성경 전도서 기자가 이미 간파했듯이 허무한 인생이 되기 십상입니다. 진주보다 진주를 만들어내는 조개의 아픔을 본받기 원합니다.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오는 인생의 고난을 끝까지 견뎌내면서 값지고 고귀한 진주를 내면 깊은 곳에서 빚어가는 것이 진정한 행복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2013년 4월 26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십자가의 길

2천년 전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예루살렘에는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라는 순례길이 있답니다. 비아 돌로로사는 라틴어입니다. “비아”는 길이라는 뜻이고, “돌로로사”는 고난이라는 뜻이니 합치면 “고난의 길”이 됩니다.예수님과3년 동안 함께 지냈던 제자 가룟유다가 은 삼십에 자신의 스승을 팔아 넘깁니다. 군병들에게 잡히신 후,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과 빌라도 총독에게 심문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예수님에 대한 재판과 십자가형은 하룻밤 사이에 일사천리로 진행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께서 심문을 받으신 곳에서부터 시작된답니다.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요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했다는 죄목으로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고소했습니다. 갈릴리 청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인한 것은 하나뿐인 하나님을 욕되게 한 신성모독죄라는 것입니다. 당시는 로마의 황제가 세상을 통치했습니다.식민지였던 팔레스타인에 그 어떤 통치자도 허락하지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으로 소위 로마 황제를 대적하는 쿠데타를 꾀했다는 모함입니다.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어떤 죄도 발견하지 못했지만 군중들의 소요가 두려워서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언도합니다. 비록 자신의 뜻과 다른 판결임을 표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손을 씻지만 2천년 교회의 역사에서 빌라도는 예수님께 십자가형을 언도한 인물로 낙인 찍혔습니다.

예루살렘의 십자가의 길에는 예수님께서 군병들에게 희롱 받으신 장소도 포함됩니다.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웁니다. 얼굴에 침을 뱉고, 채찍으로 때렸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일개 군병들 앞에서 조롱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참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그 다음에는 십자가를 지고 예루살렘 도시 한 복판을 지나가십니다. 당시에 십자가형은 극악무도한 죄인들에게 언도하는 실형이었기에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도시를 지나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이 지치셨습니다. 더 이상 십자가를 지실 수 없었기에 구레네에서 온 시몬이라는 사람이 대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비아 돌로로사,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의 발걸음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결국 십자가형이 집행됩니다. 양손과 발에 못이 박히시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의 마지막 선포는 세상을 악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새로운 구원을 펼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외마디 외침이었습니다 (실제로 헬라어 본문은 “테테레스타이“라는 한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비아 돌로로사는 예수님께서 묻히신 무덤과 부활하신 후에 하늘로 올라가신 감람산까지 이어진답니다.

고난 주간을 맞으면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는 것도 신앙에 큰 유익이 될 것입니다. 비록 예루살렘의 성지를 순례하지 않아도 신약성경의 복음서를 차례로 읽어가면서 예수님께서 가신 고난의 길을 마음 속으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들 마음과 삶 속에 잔잔하게 스며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면, 우리의 인생길 자체가 예수님께서 걸으신 십자가의 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에 살다 보면 어처구니 없는 일에 휩싸일 때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인생의 짐, 우리들 각자가 지고 가는 십자가의 중압감에 쓰러질 때도 있습니다. 누군가 곁에서 도와주면 눈물겹도록 고맙지요. 하지만 대부분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각자의 비아 돌로로사, 십자가의 길을 걸어갑니다. 주님도 지고 가셨으니 우리도 그 길을 걷는 것입니다. 십자가 너머에 부활의 영광이 있음을 믿기에 묵묵히 믿음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갑니다.

찬송가 가사 그대로 즐거운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인생길을 걷기 원합니다. 이미 그 길을 가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면 슬픈 마음을 가진 이웃들이 우리를 보고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특별히 고난 주간을 맞아서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들 삶에 깊이 임하고 그 어떤 고난도 예수님과 더불어 극복해 나가는 멋진 신앙으로 거듭나길 간절히 원합니다.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2013년 3월 22일)

키리에 엘레이손

신약성경 마가복음에는 여리고라는 동네에 살던 한 소경이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뜨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이 소경은 “바디메오”입니다. 성경본문은 친절하게도 이것이 그의 이름이 아니라 “디메오의 아들”이라는 뜻이라고 알려줍니다. 길가에 앉아서 구걸을 하며 살아가는 소경 바디메오 – 그는 이름도 없이 아버지의 성함으로 불렸습니다. 여리고는 상업이 발달해서 세무서가 있을 정도의 도시였기에 길목을 잘 지키면 수입이 꽤 괜찮을 수도 있었겠지만 소경 바디메오의 실존은 말 그대로 불쌍한 인생임에 틀림없습니다.

당시에는 소경으로 태어나면 부모의 죄로 또는 태아인 자신의 죄로 벌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먼지가 많은 중동 지역에는 눈병이 깊어지면서 중간에 시력을 잃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런 경우도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저주받은 인생으로 취급 당했습니다. 바디메오는 길가에 앉아서 구걸을 했다고 성경본문이 전합니다. 길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은 곳입니다. 이처럼 바디메오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상관없이 그들이 던져주는 동전소리에 일희일비하는 타인의존적인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여리고에 들어오시면서 소경 두 명을 고치셨고,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던 여리고 세무서장 삭개오를 찾아가셨습니다. 눈은 볼 수 없지만 귀는 밝았을 바디메오에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저절로 들려왔을 것입니다. 길가에 앉아 있으니 적선뿐만 아니라 자연스레 귀동냥도 즐겼을 테니까요. 그런 예수님이 많은 무리들과 함께 자기 앞을 지나간다는 소식입니다. 운수 대통한 날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조금씩만 적선을 해줘도 며칠은 거뜬히 살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이것이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그런데 소경 바디메오는 그 이상을 보았습니다. 물질적인 행운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열망이 생겼습니다. 지긋지긋한 죄의 고리와 외로움 그리고 깜깜한 절망에서 벗어나고 싶은 소망입니다. 어둠을 뚫고 들어오는 빛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들은 바디메오가 크게 소리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애절한 외침입니다. 헬라어 본문은 바디메오의 외침이 폭탄이 터질 듯한 탄성이었다고 소개합니다.울부짖음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저지시키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더 크게 부르짖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께서 소경의 외침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멈춰서 그를 불러내십니다. 바디메오의 외침이 예수님의 귓전에 아니 마음에 전달된 것입니다. 소경은 겉옷을 두고 뛰어 나갑니다. 무엇을 해주기 원하냐는 예수님의 말씀에 다시 보기를 원한다고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선포하시면서 소경의 눈을 밝혀 주십니다. 바디메오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입니다. 바디메오는 그 길에서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마가복음에서 소경 바디메오가 눈을 뜨는 사건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시는 예루살렘 입성 바로 직전에 행한 기적입니다. 바디메오가 외친 “다윗의 자손 예수여”는 예수님께서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할 메시야로 오셨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마가복음 안에서 소경 바디메오가 처음으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디메오의 외침인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에서 그 유명한 외마디 기도 “키리에 엘레이손(주여 불쌍히 여기소서”가 나왔습니다.

바디메오, 길가에 앉아서 구걸을 하며 살아가는 불쌍한 인생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나면서 새로운 삶을 살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의 외마디 기도는 교회사 2천년 내내 가장 훌륭한 그리고 애절하고 진솔한 기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존재감 없이 깜깜한 인생을 살던 바디메오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생명의 빛을 비춰주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2013년 사순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소경 바디메오처럼 각자의 인생길에 앉아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와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이 필요한 인생들입니다. 어두움을 몰아낼 생명의 빛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사순절을 지내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을 향해 외쳐 부르짖기 원합니다. 짧지만 간절하고 예수님의 심금을 울리는 기도를 올려 드리기 원합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키리에 엘레이손)! (2013년 2월 21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암스트롱 유감

랜스 암스트롱 – “손이 강하다(arm-strong)”는 그의 이름 뜻에 걸맞게 프랑스 싸이클 대회에서 7년 연속 우승한 세계적인 스포츠 영웅이었습니다. 강인한 체력뿐만 아니라 그의 정신력으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귀감이 되기도 했습니다. 1996년 25세의 젊은 나이에 고환암이 발병해서 폐와 뇌까지 전이되었습니다. 50%의 생존률을 정신력으로 극복합니다.암을 이기고 다시 참가한 대회에서 세운 신기록이었기에 사람들은 그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었습니다. 미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랜스 암스트롱은 포기하지 않는 인간승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2005년 은퇴한 후에는 자기 이름을 건 <암스트롱 파운데이션>이라는 재단을 세워서 암 예방에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3년 전부터 암스트롱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팀 동료 가운데 한 사람이 암스트롱이 금지약물을 복용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암스트롱은 법정 공방까지 가면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밝혀지기 마련입니다. 작년 8월 그가 세운 모든 기록을 박탈당합니다. 저 역시 개인적으로 암스트롱의 인생역정을 존경했기에 그 정도에서 끝나길 바랬습니다. 그런데 엊그제 윈프리쇼에 나와서 자신의 입으로 충격적인 말을 했습니다. 그가 사상 최초로 프랑스 싸이클 대회에서 7년 연속 우승한 것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금지 약물을 복용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몸 안에 혈액수치를 높이기 위해서 경기 전 피를 뺐다가 다시 주입하기도 했답니다.사회자가 그런 것이 가능하냐고 물었을 때 스케줄만 조절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합니다.

그 쇼를 시청하던 많은 사람들은 랜스 암스트롱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냈고 어머니의 희생으로20대 중반에 찾아온 암을 이겨냈고 그 이후로 훌륭한 가정을 이루면서 세상에 귀감이 되었던 인물이었기에 그가 세간에 안겨준 실망감은 더욱 컸습니다. 그에게는 진실된 후회나 회개를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약물중독 사건이 보도되면서 늘 그랬듯이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교묘한 말솜씨로 얼버무리고, 또 다른 길을 모색하기 위해서 진실을 희석시키려는 약삭빠른 처세술을 보는 듯했습니다.

진작에 약물복용을 시인하고 깨끗하게 물러섰다면 사람들의 마음은 잃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이미 훌륭한 운동선수였고, 암을 극복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인간승리입니다. 경쟁이 치열한 프로 스포츠계에서 약물파동은 늘 있어왔기에 사람들은 그의 솔직한 고백에 박수를 쳐 주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마치 거짓말쟁이 늑대소년처럼 자신을 변호하기에 급급했습니다. 솔직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우승기록은 물론 사람들의 마음까지 잃어버린 듯 해서 심히 유감스럽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욕심과 집착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은 야망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릇된 생각을 하고 그것을 행동에 옮기면서 실수를 저지릅니다. 견물생심이라고 눈 앞에 보이는 이익과 성공 앞에서 잠시 길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바른 길로 돌아오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입니다.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가는 솔직함입니다.

컬럼을 준비하고 있는데 또 하나의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대학 미식축구 선수가 경기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습니다. 경기 전날 암으로 죽은 자신의 애인만을 생각하면서 경기를 했다는 감동적인 인터뷰로 유명해졌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선수가 말한 애인은 가상의 인물입니다. 인기를 얻기 위해서 꾸며낸 거짓말이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는 참 난감한 일입니다.

미국은 정직(honesty)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나라입니다. 신용을 중요시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서 세워진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일찍 이민오신 어르신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정직하지 않고는 미국에서 살아남기 힘드셨답니다. 그런데 요즘은 담벼락 무너지듯이 정직함이 무너져 내리는 듯 해서 매우 아쉽습니다. 오늘 성경에 손을 언고 취임선서를 하는 미국의 대통령과 위정자들부터 정직함을 회복하길 기도해야겠습니다. 아니, 남을 탓할 것 없이 새해에는 우리들 만이라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정직하고 솔직하기 원합니다. (2013년 1월 25일자 SF한국일보 종교칼럼)

근심상자

독일의 문호 괴테는 38년에 걸쳐서 파우스트를 집필했습니다. 21세에 시작해서 59세에 끝을 맺었으니 그의 인생 전체를 한 작품에 바친 셈입니다. 젊었을 때 집필한 부분은 자신감과 열정이 넘칩니다. 반면에 노년으로 갈 수록 인생을 관조하는 대작가의 신중함이 발견됩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흥미로운 대목이 나옵니다. 한 밤중에 잿빛을 한 여인 네 명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 여인은 결핍이고, 둘째는 죄악, 셋째는 근심 그리고 마지막 여인은 가난입니다. 네 여인이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문이 닫혀있습니다. 그 집은 남부러울 것이 없는 파우스트가 사는 집입니다. 가난은 서둘러 발길을 돌렸습니다. 죄악도 일찌감치 집안으로 들어가길 포기합니다. 결핍은 혹시 주인이 가난해 지면 그때 들어가겠다고 말하면서 그림자처럼 홀연히 사라집니다. 네 명의 여인가운데 남은 사람은 근심뿐입니다. 근심이 친구들에게 말한 대목이 눈에 보이듯이 실감나게 읽혀집니다.:”당신네들은 들어갈 수도, 발을 들여놓지도 않는군요. 나 근심은 열쇠 구멍으로 숨어 들어갑니다.”

열쇠구멍을 통해서 집안으로 들어간 근심이 그 집의 주인인 파우스트에게 말을 겁니다. 파우스트는 세상에서 부족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근심은 집요하게 파우스트에게 엉겨 붙습니다. 물러가라는 파우스트의 명령에 자신은 와야 할 곳에 왔을 뿐이라고 비아냥거립니다. 급기야 자신의 정체를 드러냅니다.:”제 목소리는 귀에는 안 들려도 가슴 속엔 틀림없이 울릴 거예요. 저는 모습을 바꾸어가며 무서운 힘을 휘두릅니다. 육로에서건 바다에서건 영원히 불안을 자아내는 길동무로서 요청하지 않아도 언제든지 나타납니다.” 어쩌면 이렇게 근심을 잘 표현해 놓았는지요!

근심에 대한 국어사전의 뜻은 “해결되지 않은 일 때문에 속을 태우거나 우울해 함”입니다. 일이 해결되면 근심도 사라집니다. 젊었을 때는 해결되지 않았어도 패기와 자신감으로 모든 일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지만, 나이가 들수록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많음을 느낍니다. 그때마다 우리들 마음의 열쇠구멍을 통해서 근심이 들어옵니다. 소리도 들리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습을 바꾸어 가면서 무서운 힘을 휘두릅니다. 불안을 자아냅니다. 결코 길동무를 삼고 싶지 않은데도 불쑥불쑥 나타나서 앞길을 막아섭니다. 다루기가 참 까다롭습니다.

2012년 한 해가 아쉬움과 감사가 교차하는 가운데 저물어갑니다.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서 마지막 한 달을 열심히 살았지만 인간만사는 흐르는 물과 같아서 어디 하나를 딱 잘라서 정리할 수 없고 미완(未完)의 상태에서 새해를 맞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좋은 일이야 마무리가 되지 않았어도 희망차게 새해로 이월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생길을 가로막는 어려움들은 마음 한 켠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습니다. 그것이 곧 열쇠 구멍 사이로 들어온 근심거리가 됩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근심 상자를 하나씩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올 해가 가기 전에 마음 속에 있는 근심거리, 해결되지 않아서 속을 태우는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꺼내서 근심 상자에 차곡차곡 담는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상자가 꽤 커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근심걱정을 달고 살기 때문입니다. 근심 상자의 뚜껑을 꼭 닫습니다. 그리고는 우리를 무척 사랑하셔서 목숨까지 내어주신 예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근심상자를 얼른 받으실 겁니다. 예수님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똑 같은 삶을 사셨기에 우리들이 겪는 염려와 근심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남겨두신 제자들을 향해서도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고 말씀하셨습니다. 열쇠구멍으로 들어올 만큼 교활하고 변화무쌍한 근심이라도 예수님 앞에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꼭 붙잡는 믿음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할 것입니다.우리들 각자의 근심 상자를 예수님께 넘겨드리고 힘차게 새해를 맞이합시다. (2012년 12월 28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속깊은 감사

추수감사절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실 추수감사라는 용어는 농경사회에 적합해 보입니다. 우리처럼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추수감사라는 말보다 댕스기빙(thanksgiving)이라는 영어표현이 더 마음에 와 닿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하나님과 주변의 친지들께 감사를 드리는 절기라는 뜻입니다. 추수감사절의 성경적 근거는 가을에 포도농사를 마친 후에 조상들이 광야에서 천막을 짓고 살던 것을 되새겨 보려는 초막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1월 네 번째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전통은 1620년 11월 102명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를 타고 신대륙에 도착한 것에서 유래했습니다.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영국에서 네덜란드로 그리고 66일간의 항해 끝에 신대륙에 도착했습니다. 생소한 곳에서 살아남는 것도 쉽지 않은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동부의 혹독한 겨울을 지내면서 절반 가량이 목숨을 잃었습니다.신앙의 자유와 신대륙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보려는 부푼 꿈을 갖고 왔지만 밀어닥친 어려움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그때 이들을 도와준 사람들은 다름 아닌 인디언 원주민들이었습니다. 옥수수를 심는 법부터,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잡는 법, 산에 자라는 독초들을 구분하는 법까지 원주민들로부터 실제적인 도움을 받았습니다.

청교도들은 그 해 가을 첫 번째 수확을 하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립니다. 자신들을 도와주었던 원주민들을 잔치에 초대했습니다. 원주민들이 청교도들처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신앙을 초월해서 자신을 도와주었던 원주민들과 함께 감사의 축제를 즐긴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의 전통에는 이처럼 자신의 종교와 생각을 넘어서 도움을 주고 받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함께 어울려 즐기는 속 깊은 감사가 깃들어 있습니다.

첫번째 추수감사절을 지키던 청교도들의 마음이 한없이 기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같은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온 동료들 가운데 절반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신대륙에 와서 첫 번째 수확을 하고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청교도들의 마음 한 켠에 세상을 떠난 동료들의 모습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아쉽고 허전한 것입니다. 살아남은 자들이 갖는 미안함입니다. 곧이어 닥치게 될 겨울에 대한 불안함도 있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 겨울을 나면서 동료들을 더 잃게 되면 큰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모든 아쉬움과 허전함 그리고 불안함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역시 속 깊은 감사입니다.
감사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유카리스테오”입니다. “행복하다” 또는 “기쁘다”는 뜻을 갖고 있는 접두어 “유”와 “은혜”라는 의미의 “카리스”가 합쳐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받은 은혜를 기쁨으로 표현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첫 번째요 그 다음에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의 은혜에 신앙을 초월해서 기쁨으로 화답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추수감사절을 보냈던 청교도들이 아쉬움과 불안함 가운데 감사예배를 드렸듯이 우리네 삶 속에도 기쁘고 행복한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기쁜 일보다 속상한 일이 훨씬 많이 생깁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수도 있고, 생각처럼 세상일이 펼쳐지지 않고, 자신도 모르게 우울한 마음에 휩싸여서 감사보다 불평과 원망이 앞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속 깊은 감사는 마음의 상처, 실패, 슬픔과 아쉬움까지 감사로 변환시키는 능력입니다.
요즘은 추수감사절보다 블랙 금요일 쇼핑이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감사는 주는 것인데 많은 것을 값싸게 취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침 일찍 줄을 서며 쇼핑을 즐기는 분주한 발길들을 보면서 추수감사절의 본뜻이 많이 퇴색되었음을 느낍니다. 추수감사절 주간을 마무리하면서 한 해 동안 우리에게 임했던 감사를 다시금 헤아려보기 원합니다. 스쳐 지나가면 잊혀질 일들도 잠시 멈춰 서서 그 안에 깃든 은혜를 생각해 내는 것입니다. 그때 속 깊은 곳에서 감사가 우러나올 것입니다. 마음 속에 은은한 기쁨이 샘솟고 소망의 빛이 밝혀질 것입니다. 우리 삶 전체가 환해 지는 행복한 순간입니다. 해피 댕스기빙!

(2012년 11월 22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기도 품앗이

작년 시카고에서 열린 청년 집회에 참석했다가 몇몇 청년들과 요즘 대세인 페이스북(facebook)으로 서로 소통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때부터 젊은이들 용어를 빌리면 “페이스북질”을 하게 되었는데 그 지경이 생각보다 넓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잊었던 친구들을 마구 찾아 줍니다.

페이스북을 시작하면서 10년 만에 찾은 친구가 있습니다. 동부에 있을 때 성당에 다니는 오누이와 함께 매주 월요일 성경읽기 모임을 했습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성실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오빠는 뉴욕으로 직장을 다녔고 동생은 의대를 준비 중이었는데 월요일이 되면 꼬박꼬박 제가 다니던 신학교 기도실로 찾아와서 성경을 읽고 서로 느낀 점과 기도제목을 나누는 시간을 한 시간여 가졌습니다. 인디애나로 옮기면서 이들과 연락이 끊겼습니다. 어떻게 살고 있는지 늘 궁금했었는데 페이스북이 이들을 찾아 주었습니다. 동생은 맨하튼에서 의사로 일하고, 오빠는 연방은행의 높은 자리에 올라서 어머니를 모시고 열심히 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와 통화하면서 세 식구가 모이면 제 얘기를 자주 했었고 어디 있든지 좋은 목사가 되길 기도하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서로 연락할 수는 없었지만 기도 가운데 만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페이스 북은 개인의 속사정이 모두 드러나는 단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혜롭게 조절하면 서로의 마음을 여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페이스북 친구들이 올리는 글을 보면서 “좋아요”라고 공감할 수 있고 격려의 글을 달아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친구들은 기도제목을 올려놓습니다. 그러면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줄 수 있습니다. 수십 년 만에 온라인에서 만난 친구들의 늙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거울 보듯이 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줍니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대하고 사용하는가에 따라 차이가 날 뿐 세상의 모든 일들이 유익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성경 말씀이 매사에 진리임을 또 한번 깨답습니다.

우리는 홀로서기가 불가능합니다. 그 만큼 연약하고 쉽게 부숴지는 질그릇들입니다. 서로 지켜주고 세워주고 북돋아 주면서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야 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일은 기도로 돕는 것입니다. 기도는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과 접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얼굴을 볼 수 없지만 온라인상에서 서로 연락하고 대화할 수 있듯이, 하나님과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볼 수 없지만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마음 속으로 들어갑니다. 시편기자의 고백대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귓전에 울려 퍼집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선한 것으로 응답해 주심을 믿습니다.

기도 가운데 가장 귀한 기도는 이웃을 위한 중보기도입니다. 성경에서는 성도들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려지는 금향로로 비유했습니다. 이웃을 위한 기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합니다. 예전에 만났던 친구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고, 앞으로 만나게 될 신앙의 동역자를 놓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피붙이 가족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고 저 멀리 지구 끝에 있는 이름 모를 형제자매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가 곧바로 응답되는 것을 보고 기뻐할 수 있지만 이웃을 위한 기도는 금방 열매를 볼 수 없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이처럼 이웃을 위한 기도는 사랑과 소망으로 심는 기도의 씨앗들입니다.

세상에 눈물겹게 감사한 말이 있습니다.:“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그 어떤 입에 바른 칭찬이나 격려보다 뒤에서 묵묵히 기도해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힘차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것도 누군가 뒤에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들의 기도, 가족들의 기도, 교회 식구들의 기도, 잊혀진 줄 알았는데 기도의 끈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던 친지들의 기도가 오늘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줍니다. 이제 우리도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기도의 품앗이에 참여하기 원합니다. 기도 가운데 서로 연결된 세상은 참 아름다운 하늘나라임에 틀림없습니다. (2012년 12월 26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하나님 나라

“내 영혼이 은총 입어”(통495장)는 제가 즐겨 부르는 찬양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변합니다. 주의 얼굴을 뵙기 전에는 하늘나라가 참 멀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 나라가 마음 속에 이뤄졌습니다. 높은 산에 올라가든지 거친 들을 걸어가든지 초막이나 궁궐에 살든지 예수님을 모신 곳은 그 어디나 하늘나라로 변화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 또는 천국은 기독교인 누구에게나 익숙한 말이지만 막상 정의를 내리거나 구체적으로 설명하려면 궁색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릇된 설명도 종종 발견됩니다. 이를테면 하나님 나라를 죽어서 가는 내세(來世)라고 단정짓거나, 천국을 저 하늘 어딘 가에 있을 좋은 곳 즉 공간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일전에 젊은이들과 하늘나라에 대해서 공부를 하는데 한 청년이 천국의 인구과밀을 걱정하는 농담을 하기도 했습니다.또한 천국을 죽어서 가는 곳으로 오해한 나머지 이 세상에서의 삶은 의미가 없다고 치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천국 또는 하늘 나라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소치입니다.

우선 용어에 대한 정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천국은 신약성경의 마태복음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려 하지 않았던 유대교의 전통을 고려해서 주로 사용한 용어입니다. 마태복음 외에 다른 성경말씀에서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더 많이 쓰입니다. 예전에는 “천당(天堂)”이라는 말도 사용했는데 이것은 기복주의가 가미된 정제불명의 한국식 번역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곳은 찬송가 그대로 그 어디나 하늘나라인 셈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눅17:20-21). 우리의 마음, 삶, 학업, 직장, 가정, 인간관계 등등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 한 개와 누룩 서 말에 비유하셨습니다 (눅13:18-21). 겨자씨는 매우 작은 씨지만 그것이 자라면 새들이 깃드는 커다란 나무가 됩니다. 누룩은 떡 반죽을 부풀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는 순간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우리의 마음과 삶에 뿌려집니다. 신앙 성장은 그 씨앗이 점점 자라서 열매도 맺고 다른 이들의 쉼터를 제공하는 과정(process)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갑자기 가는 곳이 아니라 예수님을 마음 속에 주님으로 모신 그 순간부터 우리 안에 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미 그러나 아직 (already but not yet)”이라는 시간적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씨앗이 심겨진 곳에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의와 평강과 희락의 하나님 나라(롬14;17)는 완성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릴 뿐만 아니라 앞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소망 중에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아무리 가르쳐주어도 믿지 않고 무시하는 사람들이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고 지금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비밀” (눅8:10)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밀을 깨닫고 비밀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특권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알고 있는 것만으로 부족합니다. 신앙은 앎이 아니라 삶이기 때문입니다.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려야 합니다. 더 나아가 세상 속에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 나라가 임하길 기도해야겠습니다. (2012년 9월 28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귀감 (龜鑑)

런던에서 열렸던 2012 올림픽이 끝난 지 한 달이 지나갑니다. 몸은 미국에 있지만 마음은 조국에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듯이 대한민국 선수단의 선전을 응원하면서 보름 남짓을 보냈습니다. 금메달을 13개나 따서 금메달 순위로 전체 5위의 성적을 거뒀으니 조그만 나라에서 대단한 일을 한 것입니다. 또한 선수들의 눈물겨운 투혼이 우리 모두에게 큰 힘이 되었기에 오랫동안 우리들 마음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올림픽이 열릴 때마다 귀감이 되는 일화들이 전파를 탑니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일본 선수단에는 일흔이 넘은 승마대표 선수가 있었습니다. 금메달 후보였던 한 중국 선수는 허들에 걸려서 다리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당했지만 일어나서 결승점까지 들어오는 투혼을 보였습니다. 남아공 육상팀에는 두 다리 모두 의족을 한 선수가 릴레이에 참가했습니다. 두 다리가 없는 선수가 의족을 한 채 달리는 모습을 보면서 그의 의지와 노력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금메달을 따서 비닐하우스에서 생활하시는 부모님께 집을 사드리고 싶었다는 체조선수 <?xml:namespace prefix = st1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smarttags” /><?xml:namespace prefix = st1 />양학선은 자신의 이름을 건 묘기를 성공해서 하루아침에 돈방석에 앉았습니다. 여기저기서 선물과 상금이 쏟아져 들어오고 심지어 집까지 기부하겠다는 기업이 생겼습니다. 본인은 물론 그동안 고생하셨던 부모님도 꿈인지 생시인지 어리둥절할 것 같습니다. 짧은 시간에 공중에서 세바퀴를 도는 묘기를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겠습니까? 양선수가 흘린 땀에 비하면 그가 받은 보상이 결코 커 보이지 않습니다.

비록 이번 올림픽에서 메달을 획득하지 못했지만 우리들에게 귀감이 되었던 선수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세월은 이길 수 없었습니다. 올림픽 3연패를 노리던 장대높이뛰기의 이신바예바는 자신의 신기록에 한참 못 미치는데도 그만 넘지 못하고 중간에 걸려서 넘어졌습니다. 그래도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에서 최선을 다한 선수의 여유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한국의 역도 선수 장미란은 4년 전만 해도 세계신기록을 세우면서 여자 역도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지만, 이번에 새로 등장한 러시아와 중국 선수들에게 밀려서 그만 메달획득에 실패했습니다. 마지막 역기를 들다가 실패한 후에 역기를 매만진 후에 기도하던 모습은 금메달을 땄을 때보다 더욱 감동적이었습니다. 인간사가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갈 때가 있고, 치고올라오는 새로운 세대에 자리를 물려줘야 할 순간이 있음을 몸소 가르쳐주었기 때문입니다.

한 유도선수는 운동선수로서는 환갑이 넘었을 서른 다섯의 나이에 생애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이번 올림픽에 참가했습니다. 16강 전에서 경기를 하다가 이마가 찢어 졌습니다. 피가 멈추지 않고 흘렀지만 붕대로 감고 경기에 임해서 승리를 거둡니다. 8강전에서는 손톱이 부러졌습니다. 불운의 연속이었습니다. 결국3-4위전에 패해서 메달을 얻지 못하고 경기를 마쳤습니다. “하늘이 도와주지 않은 것 같습니다”라고 밝게 인터뷰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자신이 목표로 했던 메달을 따지는 못했지만 최선을 다한 선수의 여유로운 모습이 메달 리스트 이상으로 귀감이 되었습니다.

누군가에게 귀감이 되는 인생을 사는 것은 값진 일입니다. 그렇다고 꼭 금메달을 따고 일등을 해야만 귀감이 되는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리를 버리고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낮고 낮은 자리에 오셨고 급기야 죄인들이 달리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LORD)이라고 고백합니다. 모든 무릎을 그에게 꿇게 하실 것이라고 성경은 선포합니다(빌2:10).

우리 같은 범인들이 귀감이 되는 인생을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겸손한 자세로 최선을 다할 때 누군가에게 귀감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예수님을 닮고 따르면 귀감이 되는 멋진 인생을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거울로 삼아 본받을 만한 모범”이라는 귀감의 사전적 의미 그대로 우리들의 생각과 삶이 누군가에게 귀감이 되는 근사한 인생을 살아내기 원합니다. (SF한국일보 종교칼럼2012년 8월 31일)

배움의 기쁨

살아가면서 누리는 여러 가지 기쁨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가지가 배움의 기쁨입니다. 그래서인지 공자는 논어의 학이(學而)편 첫 구절에서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悅乎)”, 즉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여기서 때때로라고 번역한 한자어 시(時)는 가끔 또는 시간이 날 때만 배우는 것이 아니랍니다. 이어지는 습(習)과 더불어 ‘반복하여 학습하며 익힌다’는 뜻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이따금씩 생각날 때마다 배우고 익힌다면 배움에 결실을 맺기 어렵습니다. 꾸준하게 배우고, 배운 것을 삶에 적용해 나갈 때 배움의 기쁨과 열매를 누릴 수 있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가장 기쁘고 보람된 것은 목사는 배우고 가르치는 사람이라는데 있습니다. 저는 배우는 것을 무척 좋아합니다. 그 가운데서 책을 통해서 배우는 것을 즐깁니다. 또한 목회를 하면서 많은 분들을 만나면서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어떤 때는 말 그대로 멘토로 삼고 싶을 정도의 배움이 있고, 때로는 반면교사로 삼으면서 제 삶을 돌아보게 하는 배움도 있습니다. 배운 것을 성도들이나 젊은이들과 나누면서 목회의 보람을 느낍니다. 무엇보다 목사이니 하나님 말씀을 한 구절씩 풀어서 설명해 나가고 말씀의 깊은 뜻을 함께 나누는 가르침의 기쁨이 있습니다. 이처럼 제가 생각하는 목사의 모습은 배우고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그러던 중에 지난 두 달 동안 매우 흥미로운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목회하는 교회에서 어르신들을 위한 컴퓨터 강좌를 열었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컴퓨터 강사라는 직함을 갖고 열명 남짓 되는 어르신들께 컴퓨터 교육을 시켜 들였습니다. 60세는 기본이고 70이 넘으신 어르신들입니다. 강좌가 있다는 광고를 보시고 자원하셨습니다. 거금을(?) 들여서 노트북을 구입하셨습니다. 교회 친교실에 앉아서 컴퓨터 강좌를 기다리시던 어르신들의 첫날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처음 하는 컴퓨터 강좌였기에 책임감이 막중했습니다. 컴퓨터를 켜고 끄는 것부터 시작해서 자판설명, 인터넷 사용법과 폴더를 만들어서 디지털 카메라의 사진을 컴퓨터로 옮기는 작업까지 차근차근 소개하면서 가르쳐드렸습니다. 수요일 오후에는 제가 강의하고, 주일 오후에는 교회 청년들이 일대일로 과외하는 식의 공부가 두 달 남짓 진행되었습니다. 어르신들의 배움의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반복해서 익히시고 집에서 복습하시고 주일날에는 청년들에게 일일이 질문하시면서 배움의 기쁨을 누리셨습니다. 성경말씀을 컴퓨터에 타이핑해오는 숙제를 드렸는데 저장을 잘못하셔 숙제 해놓으신 것들이 없어졌을 때의 한숨은 땅이 꺼질 것만 같았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이-메일을 주고 받으시면서 기뻐하시던 모습도 잊을 수 없습니다.

배움에는 기쁨이 동반됩니다. 새로운 것을 깨닫고, 새로운 세상에 들어가는 희열입니다. 또한 배움은 우리 몸과 마음에 엔도르핀이 돌게 합니다. 물론 배운 것을 자꾸 잊어버리는 것이 스트레스가 될 수 있지만 반복해서 익히면 됩니다. 배우려는 열심은 백발이 된 노년의 나이도 막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배움을 통해서 빠르게 변하는 세상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배움의 길을 걷는 사람은 늘 행복합니다. 열린 마음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기에 여유와 넉넉함을 잃지 않습니다.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새로운 것을 접하고 익히는 가운데 배움의 기쁨을 누리기 원합니다. (2012년 6월  29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